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인가 회개인가? 기본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못 들어갈 성도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회개치 못해서 천국에 못 들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회개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약에 나오는 두 세리의 회개를 통해서 이것을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신구약성경에는 회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등장한다. 그중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대표자는 욥과 다윗이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대표자는 베드로(눅5:1~11), 탕자(눅15:11~24), 세리(눅18:9~14), 세리장 삭개오(눅19:1~10) 그리고 한 편 강도(눅23:32~43)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총 7명의 회개자들을 통해서, 회개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회개해야 하며 또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이들 중에는 두 명의 세리도 들어 있다. 이들은 온전히 죄인취급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세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세리이며(눅18:9~14), 뒤의 세리는 당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로서 실제 있는 이야기였다(눅19:1~10). 오늘은 이 두 명의 세리의 회개를 통해 회개가 무엇이며, 이들은 무엇을 회개했으며, 어떻게 회개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회개란 무엇인가?
먼저, 두 명의 세리를 통해서 회개란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눅18장에 나오는 세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가운데 나오는 자다(눅18:9~14).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다. 즉 회개란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잠깐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성전에서 따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죄를 속죄해 달라고 고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이제는 눅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삭개오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회개란 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오직 돈(물질)을 위해 달려왔다.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로서 취급했고, 죄인 남자(눅19:7, 원문)라고 불렀다. 여기서 사람들이 그를 죄인 남자라고 칭한 것은 그는 당시 사회로부터 확실히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죄인 남자라 칭하는 한 부류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죄인 여자라 칭하는 한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세리들과 창녀였다(마21:31~32). 그런데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 남자라 칭하는 부류의 제일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리가 되었고 이어서 세리장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산더미처럼 가졌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고 외로웠으며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죄인이라도 기꺼이 맞아주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을 만나보고자 결심한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된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시더니 자기 이름을 부르시면서 자기집에 유하러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내려온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그리고는 회개했다. 이전까지 살아왔던 그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자신을 사람으로 맞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을 움켜쥐는 인생을 놓았다. 그리고 돈을 나눠주는 인생으로 살기로 결정해버렸다. 그랬다. 그는 자신이 그처럼 생명처럼 여겼던 돈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속여서 강탈한 것이 있다면 4배나 갚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까지는 인색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후한 사람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전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율법말씀에 불순종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곧 그는 유턴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 회개란 가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에 더 이상 그 길로 쭉 가지 않고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돈을 위해서 살고, 쾌락과 명예를 위해 살았던 자가 유턴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돈을 나눠주며 그것으로 구제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3.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둘째로, 두 명의 세리들이 과연 무엇을 회개했는가를 살펴보자. 앞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했다. 뒤의 세리는 자신이 돈만을 최고로 추구하던 삶을 회개했다. 그렇다. 사람이 회개하는 데에는 딱 3가지 것을 회개한다. 하나는 낱낱의 범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자신의 죄성을 회개한다. 살아보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눅5장에서 고기잡이의 기적을 체험한 후에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당신은 나로부터 떠나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죄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여(눅5:8)"라고 말했다. 당시 죄인 남자는 세리밖에 없었는데 베드로는 자신이 구제불능의 죄인인 것을 그때 시인한 것이다. 주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제자로 삼으실까? 그리고 어떤 자를 곁에 두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철저히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의 세리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했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회개하는 한다. 이것을 적극적인 회개라고 한다. 이런 자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고 난 뒤 죄성을 회개한 자가 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이제부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 이전에 행하던 범죄행위를 따르지 않고 주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그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번째 회개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적극적인 회개를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세리장 삭개오였다. 그는 마음을 돌이킨 후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회개했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회개의 내용은 구제하는 것이저 배상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칭했다. 그렇다. 우리도 회개한 자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회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자는 처음부터 다시 회개를 시작해야 한다.
4.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이제 셋째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앞에 나오는 눅18장의 세리는 마음을 찢어가며 회개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자의 바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심정이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도 없었기에 그는 성전 뒤편에서 멀찍이 떨어져 기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바른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를 하는 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가? 그런 모습은 회개자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나도 이렇게 회개했으니 이제 복을 달라고 하는 자도 바람직한 회개의 모습이 아니다. 회개한 후라도 주님이 어떠한 처우를 내린다고 해도 달게 받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렇게 부족하고 잘못된 존재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오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회개가 바로 탕자의 회개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의 세리 곧 눅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자면, 그는 인천세관의 세무서장이나 부산세관의 세무서장에 해당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신 그는 차마 앉아있지도 못했다. 종처럼 서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눅19:8을 보라. 그는 종처럼 서서 예수님께 시중들고 있다. 종의 신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바른 모습이다. 그는 꼭 종처럼 예수님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가 여리고의 세리장의 직책까지 올라갔으니 아마 나이도 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 앞에 종처럼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인 것이다.
5. 나오며
자, 이제는 우리를 돌아볼 차례다. 과연 우리는 회개하고 있는 사람인가? 자신이 정말 못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시인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세리장 삭개오처럼 잘못 가고 있던 삶에서 유턴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자인가? 만약 우리에게서 이러한 회개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천국에서 멀리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자는 결코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으며, 주님께서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아니 그러다가 영원히 주님곁을 떠나 살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낮은 자세로 주님 앞에 지은 죄를 자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죄성을 가진 자를 시인하고 눈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추구하던 삶에서 유턴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이 조금이라도 열리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