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65) 바벨탑의 건축과 인류의 분산이 주는 교훈(창11:1~9)_2022-10-21(금)
https://youtu.be/R-VE1qhkUV4
1. 들어가며
창세기의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창세기가 아마도 모든 것들의 시작과 부패를 다루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창세기는 우리가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무궁무진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는 천문학에서부터 고고학 그리고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오늘은 바벨탑 사건에 대해서 집중해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과연 바벨탑은 누가 언제 건설하였는지 그리고 바벨탑은 왜 건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분출 통로가 되었던 바벨탑의 의미를 살펴보게 될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지켜 보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사실 B.C.1446년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시내산으로 데려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법도를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바로 '십계명'이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와 법도를 제시하고 있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수많은 법도 중에서 현재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10가지로 정한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행동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아담부터 인간이 행하여 온 행동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면 꼭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염두해 두시고, 그것들 중에서 추리고 추려서 만든 것이 바로 십계명인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듣고 타락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제9계명으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것을 보시고 제6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나온 사건들, 즉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섞여 살면서 폭력을 사용하고 권력을 쥔 자가 여러 여자들을 거느리고 사는 것을 보시고는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염두해 두셨을 것이고, 이어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과 제10계명 "이웃의 집과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노아 홍수 사건 이후 노아가 불효자였던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리는 저주를 보시고는 제5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염두해 두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을 보시고는 어떤 계명을 생각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제1계명에서 제4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탑 사건의 결론은 결국 인간의 권력과 명예욕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며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종교적인 행위로 귀착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누군지를 듣고 보고 공부하지 않아서 조상으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사탄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들어온 악이 사람 전체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욕심은 남이 자기를 높여 주도록 부추기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을 신적 존재로 추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 노선을 취하여 자기는 아니더라도 하나님 아닌 피조물을 신격화시켜 그것을 받들어 섬기도록 하고, 자신은 그 신의 특명을 받은 자처럼 가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을 보시고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제2계명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는 계명도 함께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에서 보여 주듯 사람마다 자기의 이름을 내려 하고, 하나님을 배우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름 계명으로서 제3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제4계명으로서 안식일 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주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세속화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3. 바벨탑은 언제 누가 건설했는가?
창세기에는 총 5차례에 걸쳐 타락이 나온다. 아담의 타락, 가인의 타락,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타락, 그리고 함(가나안)의 타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탑 시대의 니므롯의 타락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선 역사라고 일컬어지는 창세기 1~11장의 이야기는 창조와 타락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장부터는 약속과 회복이라는 또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바벨탑 시대의 타락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바벨탑 시대의 타락은 사실 타락의 최고봉에 속하는데, 이 시작은 함의 손자 니므롯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권력욕과 명예욕이 니므롯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꼬드기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바벨탑을 쌓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 11장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창세기 10:8~12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함의 손자 니므롯의 이야기가가 바벨탑 사건의 서막이기 때문이다. 니므롯은 함의 여섯째 아들로 늦게 태어난다(창10:7~8).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성읍을 4군데나 차지하고 살았다. 그것도 자신의 형제들이 살던 함의 땅에 자신의 성읍을 개척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셈의 땅에 성읍을 개척했던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가 먼저 차지했던 성읍들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그것은 셈의 땅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맨 끝자락인 갈대아 우르 근방에 4개의 성읍을 개척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아카드), 갈레라고 하는 성읍들이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그가 맨 처음에 차지했던 시날 땅의 바벨에 세워진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니므롯에 있어서는 수도와 같은 곳이 그곳이다. 이것을 보면 니므롯의 욕심이 상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개척했던 4개의 성읍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유브라데와 힛데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른 사람의 성읍을 빼앗았고 그리고 거기에 거대한 성읍을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세운 성읍이 바로 앗수르의 니느웨 성이며, 르호보딜과 갈라과 레센(니느웨와 갈라 사이)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중 니느웨는 거대한 성읍이었으며, 그 위성 성읍으로서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세운 것 같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언제 누가 세운 것인가? 좀 전에서 언급했듯이 바벨탑은 함의 여섯째 아들 니므롯에 의해서 세워졌다. 하지만 창세기 11장 어디를 읽어 보더라도 그 주동자가 니므롯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에 10장에 보면 시날 땅의 바벨이라는 성읍을 그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는 자기가 개척한 성읍에 사람들을 꼬드겨 탑을 쌓은 것 같다. 그는 먼저는 4개에서 왕노릇하다가 이어서 나중에는 8개의 도시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던 자였다(창10:10). 그러므로 그가 도시 사람들을 설득하여 성쌓기를 종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사람들이 성쌓기를 시작할 때에는 언제였는가? 그것은 아마도 에벨의 아들 벨렉의 때가 아닌가 싶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까지만 해도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는 사실이다(창11:1). 그런데 바벨탑의 언어 혼잡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고로 하나였던 언어가 각기 다른 언어로 분화된 것은 바벨탑 사건 이후였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셈과 함과 야벳의 70종족의 이름들 말미를 보면, 그들이 여러 지역과 민족과 나라들로 분산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때 그들은 각기 언어별로 흩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70개의 종족들이 처음에는 한 가지의 언어를 쓰고 있다가, 바벨탑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이 언어가 달라짐으로 서로 뿔뿔이 흩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는 셈의 자손의 경우에 에벨의 아들 벨렉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때에(그의 시대에) 세상(땅)이 나뉘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벨렉 이후 사람들의 수명이 그전에 비해 절반 아래로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반역 사건 이후 인간의 수명은 감축되었으며, 그 사건이 바로 바벨탑 사건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4. 바벨탑은 왜 건설했으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니므롯이 왕으로 다스리던 당시 사람들은 왜 시날 땅의 도시에 탑을 쌓으려고 했던 것일까? 창세기 11장에 나온 말씀에 보면 2가지 목적이 있었다(창11:4). 하나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의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의 이름을 내고자 그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해보고자 그렇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자기의 명성을 위하여,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탑을 쌓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니므롯의 선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못내 자랑하고 싶었고, 자기들이 세운 건축물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탑쌓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기자를 통하여 그들의 원래의 목적이 탑을 쌓아서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는 데에 있었다고 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 니므롯이라는 이름이 '반역자, 대적하는 자'라는 데에서도 그 원인을 엿볼 수 있다. 이때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난 용사(영걸)라고 하였다(창10:8). 이는 그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왕 노릇하던 폭군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낭꾼'이 되었는데,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여호와를 대적하여, 여호와를 맞서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대항하여서 대적하는 자로서 행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벨탑 사건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고자 하는 인간의 강력한 열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성경 기록이 아닌 다른 언어들의 기록을 조사해 보면, '바벨'이라는 용어는 '신의 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이 하늘의 문까지 자기 탑을 쌓아 하나님과 겨뤄 보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날 성읍에 쌓기 시작한 탑은 어떻게 해서 끝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쌓기를 중단함으로 끝이 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탑을 쌓는 것을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더불어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게 된다. 잠깐 그때 어땠었는지를 살펴보자.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11:6)",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그렇다. 인간은 어느 정도 숫자가 모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떤 이상한 흐름이 생긴다. 그것은 그 모임의 주최자가 한 번 무엇인가를 결정하게 되면, 아무도 그것을 반대하거나 뒤집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중은 지도자 한 사람을 추켜 세워 그를 신적 존재처럼 떠받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신적 존재로 추앙받기 전에 그 일을 그치게 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속히 그 문제에 개입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탑을 쌓는 것을 그치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정말 잘 사용해야 한다. 죄짓는 일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그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하나님 위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에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5.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이 높아지려는 욕망과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니므롯은 자기의 성읍을 4개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성읍을 빼앗아 자기의 성읍으로 만들려고 했으니, 그는 무려 8개의 성읍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을 꼬드겨 탑까지 쌓도록 종용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다. 둘째, 인간에게는 조금만이라도 자기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것을 행사하려 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가 신적 권위를 가진 자임을 선언한 채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신격화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므롯이 살아 있을 때에는 성취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내인 세미라미스에 의해서 그 일이 시작되어 그의 아들 대에 가서 완성을 이룬다. 셋째, 인간의 자유 의지는 심각하게 하나님의 뜻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이 죄짓는데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면 정말 나쁜 결과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늘 하나님의 뜻에 맞춰 나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일에 자신이 점령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시편 기자는 말한다. 인간에게 시간은 지나간 밤의 한 순간 같다고 말이다(시90:4~6). 인간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세가도를 달린다고 할지라도 그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늙어서 죽을 무렵이 되면 다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다음에 비로소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렇다. 인생의 영화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아니 풀이 아침에 돋아나지만 저녁이면 지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귀영화에 너무 목매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이 누리는 부귀영화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이다(약4:1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더 많은 물질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 그것이 최고 지혜이다. 니므롯을 보라. 그가 비록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도시들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도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그 벌은 반드시 자기의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남을 압제하고 괴롭히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어서도 아니 된다. 그러다가는 어제까지 내 형제 자매요, 또한 어제까지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서로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후히 누리도록 주시는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생, 살다보면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2022년 10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