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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1--V52cPzaw
날짜 2018-10-14
본문말씀 로마서 5:8~9(신약 24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칭의(의롭다하심)과구원,칭의와성화,구원에대한다양한정의,천국에들어가는구원,믿음과회개,구원의방법

칭의를 받은 자는 면죄부를 받은 것인가? 칭의를 받은 자는 더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죄사함을 받는 것인가? 칭의를 받은 자는 결국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가? 우리들 중 믿는 이들 가운데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램일 뿐 성경이 증거하고는 말씀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칭의가 무엇인지, 칭의와 죄사함 그리고 칭의와 구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사람이 칭의를 받을 때에 자신의 영적인 상태나 행동과 상관없이 받았듯이 장차 받을 구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왜곡한 것이고 과대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고 사도들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칭의란 구원의 여정 가운데에 첫 시작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끝(완성)은 우리가 죽어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감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칭의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들을 말씀에 나와있는 그대로 살펴보자. 그리고 칭의를 받음으로 시작된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어보자.

 

1. 들어가며

  칭의가 과연 모든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일까?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에 해당한다. 그럼, 칭의의 선언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죄사함을 완전히 받고 구원받은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칭의를 받은 것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이미 얻은 구원은 결단코 흔들림 없을 것일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칭의를 받은 것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기인한 것이니 그것은 결코 변동됨이 없을 것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래서 오늘은 칭의와 죄사함과 구원의 관계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칭의란 무엇이며, 그것과 죄사함을 어떤 관련성이 있으며, 칭의에 따른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칭의가 곧 성화와 같은 것이며, 죽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칭의가 완성되는가?

  전 총신대 신대원장을 역임하시고 지금은 미국의 풀러신학교에서 교수일을 하고 계시는 김세윤박사라는 분이 계신다. 그분이 제작년에 한국에 오셔서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꺼내놓으셨다.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칭의에 관한 개념을 뒤집는 것이자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분은 크게 2가지를 주장하셨다. 첫째,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까지 유보되어 있다고 하셨다. 둘째, 칭의와 성화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톰 라이트과 주장한 칭의에 관한 새 관점 학파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분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칭의를 통한 값싼 구원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구원은 죽을 때에 가서 완성된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 번 성경적인 칭의에 의문점을 제시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분의 주장은 한국교회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김세윤박사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볼 때 다 옳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대목이 있다. 왜냐하면 칭의는 믿음을 통해서 처음으로 얻었을 때 완전한 것이지 죽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칭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칭의 속에 성화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는 구원의 서정의 첫단추에 해당한 것 뿐이며, 성화는 인생전반에 걸쳐서 진행되어야 할 구원의 두번째 과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칭의를 얻는 자는 곧바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김세윤 박사의 주장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3. 칭의에 관한 성경적인 주장은 어떠한 것인가?

  그렇다면, 칭의에 관한 성경적인 주장은 어떤 것인가? 칭의(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것)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어 죄인이라도 의롭다함고 여김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칭의로 인해 자동적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거룩케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칭의는 우리의 성품이나 행실이 실제로 거룩하고 의로워진 것을 보고서 주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가 비록 의롭지 못해도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법정적인 조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있고 더러움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의를 받아들인 자는 칭의를 얻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는 사실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단회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롭하심에 대한 선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 번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완전한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사실 칭의에 다른 어떤 과정이 거기에 들어와야 칭의가 완성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칭의란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내게 전가되어 내게 주어지는 의인데, 만약 칭의가 성화와 같은 다른 과정에 의해서 완전해진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칭의는 단 번에 주어지는 것이자 동시에 완전한 칭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칭의가 곧 구원인가?

  그렇다면 칭의가 곧 구원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가 곧 구원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는 의롭지 아니한데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것을 과대확장하여, 그것이 곧 구원인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실제로 의롭지 않지만,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으로 인하여 자기자신이 칭의를 얻게 된 만큼, 이제는 자신의 구원도 자신이 현재 죄를 짓고 있고 잘못 행하는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만 갖고 있으면, 심판도 면제받고 구원도 받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칭의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요 크나큰 오산에 해당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칭의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구원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여정 가운데 칭의가 들어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구원의 여정 가운데 칭의는 첫 단추이자 출발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때에 그 사람의 믿음으로 인하여 그에게 칭의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죄사함을 받은 자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 포함하는 보다 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칭의를 얻을 수 있지만 아직 구원은 완전히 받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죽을 때에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약성경을 보면, 구원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폭넓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이 고침받은 것도 "구원"받은 것이다(마9:21). 또한 풍랑이는 바다로 인하여 배가 뒤집혀질 위험에 처했을 때 주님께서 잠잠하라고 외치심으로 고요해져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구원받은 것에 해당한다(마8:25). 또한 귀신이 쫓겨나가 자유롭게 된 것도 구원이며(눅8:36), 회당당 야이로의 딸의 경우를 보면, 죽었다 그의 딸이 살아나게 되는 것도 구원받은 것이다(눅8:50). 그러가 한 명의 영혼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개념으로서 구원은 이러한 구원의 개념들 속에 들어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개념은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으나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 개념이며(마1:21),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자기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개념이다(딤후18). 그러므로 칭의가 곧 구원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칭의는 구원의 일부일 뿐이다. 칭의는 구원의 여정의 첫 시작 단추에 해당하는 것이다.

 

5. 예표론적으로 볼 때 칭의의 위치는 어디쯤에 있는가?

  그렇다면, 구약의 예표론적으로 볼 때 칭의는 과연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일까?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의 노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고전10:6,11). 이스라엘민족을 구원받을 대상으로 보고, 애굽이라는 나라는 사탄의 왕국 내지는 이 세상왕국으로 보며, 애굽왕은 사탄마귀로 간주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의 탈출의 역사는 곧 인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첫 여정은 유월절을 지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되고, 광야에 도착하게 된다.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반석에서 생수를 마시며 살게 된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전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여정을 성도의 개인의 신앙생활에 견주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칭의라는 것이며, 홍해를 건넌 것은 성령세례 내지는 물세례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며,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생활을 하는 것으로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7장에서 스데반이 했던 설교 가운데에서 등장한다. 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여정이 곧 신약의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과 같다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교회에 있었다고 함으로써(행7:38),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곧 광야생활과 같은 것이라고 알려준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유월절양을 잡고 그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신의 징벌을 받지 않고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단 한 사람도 애굽사람들과 칼로 전쟁하여 그곳을 빠져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거듭남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영역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광야생활은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녹록지 않은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을 두셨다. 그때 그들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먹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수많은 출애굽1세대들은 광야에서 생수와 만나를 먹으면서도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 곧 부추와 파와 마늘 등을 그리워하였고, 만나를 싫증냈으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광야 곧 교회생활이 그만큼 힘든 것이다. 교회에 소속되면 금방이라고 질병에서 고침받고 부자가 되고 자녀가 될 되는 줄 알지만 실은 그런 것이 교회생활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며, 어떤 적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가 없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지 못해 죽을 것만 같은 곳이 광야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만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가나안땅에 들어갔는가? 과연 어떤 사람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 것인가? 그것은 광야의 시험을 잘 통과한 사람뿐이었다. 성화의 과정에 해당하는 교회생활을 잘 통과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광야에 나온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럼 우상을 숭배하고, 원망 불평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음행을 일삼는 자가 된다면 그는 결국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 것이다.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애굽을 탈출해 나온 것을 두고 이미 구원을 받아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홍해를 건너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하지만 광야생활은 우리가 겪어야 할 교회생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잘 통과한 자만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출애굽했어도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은 자가 태반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칭의를 얻은 자라고 교회생활을 하다가 이 시기를 통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자가 부지기수인 것이다.

 

6. 한 번 구원얻은 자라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 번 구원얻은 자라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가? 여기서 구원을 얻은 자란 일차적으로 구원을 얻은 자라는 말로서, 구원의 여정 가운데 처음 순서인 칭의를 받은 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칭의를 얻은 자가 과연 구원에서 탈락되어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미 구원얻은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다 가나안땅에 들어갔는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 광야에서 징계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신구약성경은 이미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 거듭난 체험을 한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여러가지 사람들의 예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구약의 인물로서는 남북통일왕국의 초대왕이었던 사울, 장차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가 될 한나를 축복해주었지만 범죄한 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 목이 부러저 죽은 엘리 제사장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구원을 잃어버린 자의 예이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도 예수님을 팔고 자살해 죽은 가룟유다, 행5장에 등장하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일원이었지만 성령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 즉사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 믿음을 가졌으나 믿음에 파선해버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도 이런 인물들에 속한다(딤전1:20).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에서 13장을 통해 구원의 탈락 가능성에 대해 5번씩이나 강력하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히6장과 10장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탈락에 관한 경고는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히6:4-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10:26-3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사데교회 성도들 중에서 이기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 중에,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으로부터 지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계3:5). 유월절제사를 통해서 애굽을 탈출하여 칭의를 이미 받았으며, 홍해에서 성령세례 내지는 물세례를 받아 이미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훗날 심판 받을 때에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표론적으로 볼 때 거듭난 자라도 얼마든지 버림받을 수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7.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대체 구원의 요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 사람치고 죄짓지 않고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희망을 갖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가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은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겨 희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요일1:7,9). 그렇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얻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도 공생애 초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고 외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이라고 외치셨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눅24:47)"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믿음만으로 구원얻을 사람은 수치상으로 볼 때 거의 없다. 믿는 순간 죽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일차적인 구원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죽기전까지는 다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때에 이 세상에 있으면서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이 있어야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사도들이 회개의 중요성을 그리 강조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A.D.96년 밧모섬에 유배되어있는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은 회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를 써보내라고 하는데, 그때 각 교회마다 주시는 말씀을 달랐다. 하지만 칭찬들었던 두 개의 교회 곧 서머나교회아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에게 주님은 공통적으로 회개할 것을 권면하셨다. 다시 말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 주시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회개였다는 뜻이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가 구원의 최종적인 관문이었던 것이다.

 

8. 나오며

  칭의는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필수적인 요소이며 또한 첫 시작에 해당한다. 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여정가운데 맨 처음에 위치하는 칭의는 매우 중요한 구원의 과정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여정을 영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한 사람이 구원받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칭의를 거쳐, 거듭남을 받는 것이고, 거듭남을 거쳐 성화의 과정 그리고 죽은 뒤에 영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것들 중에 만약 거듭남이라는 요소를 제거한다면, 구원의 여정은 크게 "칭의"와 "성화"와 "영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러한 구원의 여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놓았다(롬8:30).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칭의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처럼 성화나 영화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믿는 자에게 맨 처음에 주어진 칭의가 비록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지는 완전한 칭의라고 할지라도, 광야의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비로소 약속에 땅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칭의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이러한 광야생활 중에는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 그리고 죽음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험들에게 절대 넘어지지 않고 다 이겨낼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믿는 자에게는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서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때일수록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회개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지었던 죄들을 용서받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들은 이제 말씀에 대한 순종과 더불어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순종의 댓가는 그가 만약 천국에 들어간다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자에게만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칭의를 받은 것인 죄인이 칭의를 받은 것이지 죄의 칭의를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짊어지고 있으면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죄를 없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 그렇다. 이처럼 믿음과 회개만이 우리의 영혼을 천국으로 들여보내는 구원의 2가지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보자.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에다가 회개가 더해져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0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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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의가 곧 면죄부인가?(롬5:8~9)_2018-10-14 file 갈렙 2018.10.14 526
210 이스라엘민족은 진짜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절기를 지켰을까?(출3:15~18)_2018-10-07 file 갈렙 2018.10.07 737
209 성령받음과 칭의를 받은 근거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갈3:1~14)_2018-09-30 file 갈렙 2018.09.30 428
208 원문으로 살펴본 행함과 믿음의 상관관계(약2:14~26)_2018-09-16 file 갈렙 2018.09.17 432
207 가까운 친족과 친구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행10:24~33)_2018-09-09 file 갈렙 2018.09.09 583
206 왜 그리스도인들은 술을 먹거나 술취하지 말아야 하는가?(잠23:20~21과29~35)_2018-09-02 file 갈렙 2018.09.02 1127
205 유전된 혈통과 구원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창9:18~29) file 갈렙 2018.08.26 423
204 히브리인들의 애굽체류기간은 400년인가 430년인가 자손4대인가(창15:13~16)_2018-08-19 file 갈렙 2018.08.19 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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