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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1-12
본문말씀 룻기 3:6~11(구약 40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룻,보아스,청혼,고엘,구원론,찾는자,효심,아도나이,호의,하녀,왕권신부,이방인신부

1. 들어가며

  룻기는 아가서와 상당히 비슷하다. 왜냐하면 둘 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 성도들 간의 결혼을 언급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가서에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룻기서에서는 보아스와 룻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둘은 성격상 하나님의 신부가 될 두 종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중에 아가서에서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은 비록 시골 처녀로서 유대인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의 신부를 예한다. 그렇다면 룻기서에서 신부는 어떠한가? 그것은 그녀가 과부이면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둘 다 신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결혼에 골인한 것은 똑같다. 신구약성경의 주된 메시지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처음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오지만 나중에는 이방인인 교회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룻기서가 아가서에 비하면 훨씬 더 교회 중심적이자 신약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룻과 보아스 간에 일어난 청혼 소식을 접하면서, 누가 먼저 상대방에게 청혼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왜 상대방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 주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2. 보아스와 룻은 누가 먼저 청혼을 했는가?

  보아스는 유다 베들레헴 지방의 유력하고 덕망는 재력가였다(룻2:1). 더군다나 그는 신앙도 매우 좋았다(룻2:4, 12). 그런데 어느 날 자기의 동네에 룻이 들어온다. 시어머니를 따라온 며느리였는데 그녀는 같은 동족이 아니었다. 모압인으로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룻2:6,10). 그렇지만 보아스는 그녀에 대해 은혜 베풀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그녀로부터 완곡하고도 부드러운 청혼을 받게 된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룻3:9)"라고 말한 것이다. 이 표현은 룻이 보아스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다는 청원으로서, 자신을 아내로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다(겔16:8). 이것은 보아스가 아니라 룻이 청혼을 먼저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룻이 먼저 청혼을 하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한 4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보아스야말로 룻이 시집왔던 무너진 엘리멜렉의 집안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두 명 중의 한 명의 고엘(기업 무를 자)이었기 때문이다(룻3:9, 2:20).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우리가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게 되고 그 소문의 진실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만이 내 인생 문제의 유일한 결자인 것을 믿는것과 같다고 하겠다. 

  둘째, 그동안 부딪혀서 경험했던 보아스의 사람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행동이 남편감으로서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첫째로, 자상한 남자였다. 자기가 부리는 사환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인격체로서 대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룻2:4). 둘째로,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선한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룻2:10,20), 셋째로는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였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의 계명에 따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선대할 줄 알고 있었으며(신24:19~24, 레19:9~10), 자기가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요 계대 결혼 제도를 알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그녀는 자부를 안식할 수 있는 곳에 시집보내고 싶어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룻3:1).

  넷째, 마지막으로는 그녀가 이삭줍기를 통하여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과 영구적으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보아스를 남편으로 두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룻이 이삭줍기를 통해 시어머니를 섬기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말 시어머니를 잘 모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베들레헴의 유력한 재력가이자 기업 무를 자에게 시집가는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룻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시어머니 상의하였고 시어머니의 의견을 따라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룻3:1~6). 그리하여 룻은 보아스의 마음이 진정 룻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더욱이 그 작전(?)을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밤시간을 이용하여 조용히 진행하였다. 

 

3. 왜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받아 주었는가?

  그렇다면 왜 보아스는 이방인이자 과부였고 보잘 것 없었던 룻의 청혼을 받아 준 것인가? 보아스는 사실 자기 동네에 들어온 과부 룻에 대해 관심이 있기는 있었다. 왜냐하면 보아스 자신에게 알려진 그녀에 대한 소문 곧 그녀의 삶과 신앙이 그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소문은 이렇다. 첫째로, 그녀가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실 모압 지방에서 살고 있을 때에, 자기 동네에 임시로 거주하러 온 외국인을 만나 결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잘 공경하고 모셨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잘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녀는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서인 오르바처럼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지만 시어머니를 떠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권유처럼 자신의 고향에 남아 재가하여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통해 믿게 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자기 민족의 우상신인 그모스를 섬겨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죽은 남편의 뒤에 끝까지 남아서 시어머니를 섬기고 있는 룻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의 날개 그늘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왔다는 것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룻2:11~12). 그리고 셋째는 그녀가 젊은 나이(약 23세 이쪽 저쪽이었을 것이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시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픈 열망에 따라 시어머니의 말을 청종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룻3:10). 그렇다. 그녀는 당장 눈에 보이는 쾌락을 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미래를 바라보며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보아는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를 아내로 취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4. 보아스가 룻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보아스가 룻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녀의 집안에 고엘(구속자, 기업 무를 자)이 어 주는 일이었다. 첫째로, 나오미가 팔려고 내놓은 기업을 사 주어 그 기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둘째, 그렇게 마음씨가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여인을 자신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사실 보아스 자신도 나이가 많아 젊은 처자들이 마음을 쓰지 않는 판국이었기에 보아스는 이번 기회에 장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룻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부인 자신을 내로 맞이해 준다면 평생 안식처를 얻게 되는 것이니 만큼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좀 있다 더 살펴보겠지만 장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친족이 되시어 오셨는지를 알게 해 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5. 죄의 고된 노역에서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룻기서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늙은 늦깍이 총각 보아스가 과부인 모압 여인 룻을 만나 결혼했다는 것을 후대에 전하려고 기록한 책일까? 만약 그것이 이 책을 남긴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이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게 하신 이유는 이 책을 읽을 모든 독자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모든 성경의 기록은 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요5:39), 우리의 신랑 예수님과 그의 신부인 우리들의 결혼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룻이 먼저 보아스에게 청원을 했던 사실은 분명한 뜻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요청하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것으로서 이 이야기는 어떤 영적인 교훈을 함유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 인간은 자신의 살 길이 막막해져서 소망이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가 주님을 붙잡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그러한 상태에서 가만 있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핑계를 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두고서 하나님께 원망의 화살을 돌리는 어리석음의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이야기는 구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 우리 인생의 절망적인 상태를 누가 가장 잘 알고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능자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오직 보아스로 예표된 우리 주님 뿐이시다. 결국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구원받느냐 마느냐 하는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오직 그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가 겸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만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여, 나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소서!!!" 

  셋째, 오늘날 구원을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내가 당신을 믿기로 결정했으니, 당신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겠소그러나 지금 나를 어디 한번 구원해 보시오"라고 말이다. 그러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과거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매우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의 모습은 적어도 그녀 모습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그녀는 보아스에게 어떻게 자신을 구속해 달라고 부탁했는가? 그녀가 처음 이삭을 주러 나갔을 때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그 보리 밭의 주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가? 그녀는 그때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낮추며 엎드리며 말했다. "나는 이방 여인에 불과한 사람인데도, 왜 당신은 내게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나를 돌보아 주시나이까(룻2:10)"라고 했다. 그때 보아스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잘해 주는 것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분에게 "나의 아도나이(주인)"라고 칭하면서, "나는 당신의 하녀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겸손히 말했던 것이다(룻2:13).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쓰러져 가는 가문을 건져낼 수 있는 분이 보아스라는 것을 진실로 아는 자로서 말도 했고 행동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보아스는 룻의 청원에 대해서 어떠한 대답을 했겠는가?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3:11). 그렇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고엘이 되어 주겠다고 기꺼이 응답한 것이다. 

 

6. 나오며

  오늘날 주님께 구원을 바라고 요청하는 우리의 모습은 실로 어떠한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응당 당신이 나를 책임져 줘야 할 것이 아니냐는 태도는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 앞에 엎드릴 존재일 뿐, 그분 앞에 고개를 쳐들고 왜 내가 부탁한 것을 안 들어주느냐면서 따질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먹을 것조차 걱정해야 할 처지였고, 영원히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이나 주러 다닐 판이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친족이 되어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땅으로 오셔서,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과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건져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해 주셔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택하신 그분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로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우리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를 선택하신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와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 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도 오직 우리 주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뿐이다. "주 예수여, 나로부터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받으소서!"

 

2021년 11월 12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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