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정말 인류 마지막 시기라고 말해지고 있는, 다니엘의 한 이레(7년)의 기간에 나타나 활동하는 주의 사역자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사역하는 시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1,260일은 과연 3년 반의 시간일까 아니면 상징적인 기간인가? 그리고 교회가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히는 시기는 후3년반의 시기요, 두 증인이 활동하는 시기는 전3년반의 시기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누가 이러한 해석을 내놓은 것이며, 이것은 과연 올바른 해석인가? 뿐만 아니라 두 증인이 활동하다가 죽임당한 장소가 "큰 성"이라는데 그곳은 대체 어디인가? 그곳은 예루살렘 성인가 아니면 바벨론 성인가? 오늘은 해석해야 할 부분도 참 많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환난전휴거를 따라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환란통과를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 중에서 난제 중의 난제는 역시 요한계시록 11장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두 증인"과 두 증인의 활동하는 기간인 "1,260일"과 두 증인의 순교하는 장소인 "큰 성" 그리고 그가 죽고 난 3일 반 후의 "부활 승천의 시기"에 대한 갖가지 해석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 두 증인"은 대체 누구이며,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인 "1,260일"은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두 증인이 순교하는 장소로서 "큰 성"은 어디며, 이들이 죽고 난 후에 부활하고 승천한다는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 등은 지금도 수십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모두들 저마다 올바른 해석이라고 내놓고 있지만 어느 것이 정말 바른 해석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시간 관계상 이것들 중에서 "두 증인"에 대한 확실한 정의와 아울러 두 증인이 활동하는 시기인 "1,260일" 그리고 두 증인이 순교하는 장소인 "큰 성"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리해 보자.
그럼 첫째로, "두 증인"은 누구인지를 정리해 보자.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에 등장하고 있는 "두 증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조금은 살펴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두 증인이 단지 두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계11:3). 왜냐하면 두 증인이 자신의 활동을 마치게 될 경우,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계11:7). 어찌 두 사람과 전쟁하는 나라가 혹은 세력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두 증인이 순교당하자,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3일 반 동안 거리에 나뒹굴게 놔둔다고 했는데, 이들의 시체를 원문으로 보면 "시체들"이 아니라 단수 명사인 "시체"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계11:7,9). 이는 두 증인이 어떤 단체적인 개인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렇다. 우선 두 증인은 그들이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는 증인들이라는 점이다(계11:3).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인 것이다. 시대마다 일어나 우상숭배의 죄악을 외치고 회개를 외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목숨을 걸고서 복음을 증거하는 선구자들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들은 "두 감람나무"라고 했다(계11:4). "두 감람나무"는 일곱 금등잔에 기름을 흘려보내는 두 감람나무를 가리킨다. 이러한 모습은 스가랴 4장에서 스가랴가 본 환상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때 당시 두 감람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두 사람은 성전 건축 공사를 독려하던 인물이었다(학1:12, 2:2). 그런데 이들이 일곱 개의 관들을 통해 일곱 금등잔에 기름을 흘려보내는 존재라고 기록되어 있고,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슥4:11,14), 이들은 주님을 대신하여 금등잔(금촛대)으로 비유되는 지상의 교회들에게 성령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일 뿐만 아니라, 주의 종들에게 성령충만을 공급하는 주의 종들인 셈이다. 이들은 누구에게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서 사역하거나 복음을 전파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성령충만이 흘러나와 다른 주의 종들을 깨우고 가르치는 주의 종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감람나무를 일곱 금등잔에 기름을 흘려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이들은 "두 촛대"라고 했다(계11:4). 요한계시록 자체의 해석에 의하면(계1:20), 촛대는 곧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두 촛대는 어둠 가운데서 빛을 발하는 지상의 2개 교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고 있는 주의 종들을 두고 있는 교회인 셈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등장하는 교회에서 살펴본다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당시 서머나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의 상징이었고,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하면서 형제 교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상징이었다. 고로, 핍박을 견디어 충성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교회가 바로 두 증인인 셈이다. 넷째로,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다(계11:5~6). 왜냐하면 이들의 활동을 묘사하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선지자의 대표였던 '엘리야'와 율법의 대표였던 '모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불태운 자였으며,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실 때에 첫 번째 재앙으로서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게 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렇다. 두 증인은 어떤 두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시대마다 일어나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회개를 외치던 사역자들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두 선지자다(계11:10,3,6). 이들은 예언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좀 다르다. 왜냐하면 이들이 활동하는 때는 메시야가 이미 구약의 예언을 따라 와서 속죄사역을 완성해 버린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소개하며, 회개하여 천국을 소유하라고 외치는 자들이 바로 두 증인인 것이다.
3. 두 증인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은 무엇이며, 그들은 언제 누구에 의해 죽임당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두 증인에게는 어떤 놀라운 특권이 주어진다. 그것은 이들이 사역을 마치기까지는 그 누구도 이들을 해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계11:5).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분향단과 성전에 경배하는 자들을 특별히 보호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을 해치려 할 때에는 오히려 해치려는 자가 해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11:5).
하지만 이들이 사역을 마치게 되면, 무저갱에서 올라운 "짐승"에 의해 죽임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11:7). 다시 말해, 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짐승에 의해 순교를 당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과 음행을 하지 말 것을 늘 계속해서 책망하고 경고해 왔기 때문이다(계11:8).
그렇다면, "무저갱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13장에 가서 제대로 공부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조금만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그 짐승은 바로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귀신의 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무저갱은 귀신들의 감옥이자 처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올라오는 영은 귀신(타락한 천사)의 영이지, 지옥에 있는 사람의 영은 아니다. 사람이 한 번 죽고 나면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람의 영은 이승과 저승을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사람의 영이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타락한 천사의 영이 올라와 사람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것이다. 이 짐승의 실체는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정확히 말해 주고 있는데(계16:13~14), 이는 용(사탄, 마귀)이다. 요한계시록 20장에 가면, 이 용 짐승의 마지막의 모습은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이다(계19:20).
계16:13~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삼위일체 방식으로 역사하시듯이, 사탄도 하나님을 모방하여 삼위일체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것처럼, 사탄의 삼위일체도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인 셈이다(계16:13). 용이 짐승(첫째 짐승)에게 자기의 권세를 주고 나중에는 짐승(첫째 짐승)이 거짓 선지자(둘째 짐승)에게 용의 권세를 준다(계13:2,15). 고로, 계11:7에 나오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사탄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의 시기(천년왕국의 끝 무렵)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무저갱에 갇혀 있는 용을 잠시 풀어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짐승(용)이 밖으로 나와서 역사할 것인데, 그가 두 증인을 죽일 것이다.
그럼,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왜 죄없는 두 증인을 죽이려고 하는가? 만약 그렇게 하면, 사탄 자신도 이 세상에서 자신이 왕 노릇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질 것이고, 주님의 재림을 더욱 재촉하기만 할 텐데, 왜 그는 죄없는 두 증인을 죽이려고 시도하는가? 그것은 두 증인의 활동이 너무나 밉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때든지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니 말이다. 그들의 사역을 마치는 날, 하나님께서 그를 풀어주기로 허락하실 때에 그들도 그 두 증인을 죽일 수가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들이 활동하는 기간이었던 "1,260일"은 언제이며, 이들이 죽임당했던 "큰 성"이란 대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일까?
4. 두 증인이 사역하는 기간 1,260일은 대체 어떤 기간일까?
둘째로, 두 증인이 사역하는 1,260일은 어떤 시간일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두 증인이 활동하는 1,260일(42달, 3년 반)은 다니엘의 한 이레(7년) 중에서 전 3년 반의 기간일 것이고(계11:3~13), 성전 밖 마당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게 되는 때(계11:1~2)는 후 3년 반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11장의 활동이 여섯째 나팔이 울려퍼진 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퍼지기 전에 시간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 자들인데, 왜 여기서는 순서를 앞뒤로 뒤바꾸는지는 잘 모르겠다.
5.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처럼 다니엘의 한 이레가 정말 마지막 어느 시기에 도래할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처럼 다니엘의 한 이레가 마지막 어느 종말의 시기에 성취될, 문자적인 7년이라는 기간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니올시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가설과 잘못된 성경 해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한 이레"에 대한 약속은 저 구약 성경 단9:24~27에 나와 있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분명하게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위한 약속이라고 다니엘서에 처음부터 정의되어 있다(단9:24). 이것은 결코 마지막 시기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경륜이자 약속인 것이다. 그러니까 70이레의 약속은 그 약속이 실행되기 시작하면 쭉 일어날 일인 것이지 마지막에 한 이레가 말세에 일어날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궤변이다. 그리고 다니엘의 70이레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속죄사역에 관한 예언인 것이지,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70이레는 과연 어떤 약속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정해 놓은 70이레(한 이레는 7년이라고 계산할 경우 490년)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가 있고 이것이 지난 후에 한 이레가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러한 70이레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다시 지으라는 말씀이 나올 때부터라고 아예 규정하고 있다(단9:25).
그런데 "예루살렘 중건영"은 사실 3가지 학설들이 거론되고 있다. 첫 번째 학설은 A.D.538년 바사 왕 고레스가 그의 통치 원년에 내린 성전 중건영이 있다. 두 번째 학설은 A.D.520년 바사 왕 다리오 제2년에 내린 중건영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학설은 A.D.457년 아닥사스다왕 제7년에 내린 성전 중건영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가설은 세 번째다. 그것은 B.C.457년 바사 아닥스사왕 7년에 내린 예루살렘 중건영이다(스7:8, 11:25). 그리고 이때로부터 70이레(490년)의 기간을 계산해 보면, 69이레(7이레+62이레)는 483년이 지난 해이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그 때는 A.D.27년이다. 이때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던 시기였다. 그런데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69이레 후에 한 이레의 절반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많은 사람들과 한 이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희생제사와 곡식제사를 그칠 것이라고 했다(단9:27). 고로 이것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한 이레(7년)의 절반에 속죄제사를 완성하여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 이레의 절반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성됨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스라엘의 성전제사가 필요가 없어진다는 예언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속죄제사를 완성한 A.D.30년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행한 속죄사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자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A.D.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그렇다. 이것만 보더라도 70이레의 약속은 계속 이어져서 일어나는 약속인 것이지, 69이레까지만 성취되었다가 무한한 과도기가 지난 후에 또 다시 한 이레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다니엘서 9장에는 69이레 후에 어떤 휴지기간이 있다고 하는 어떤 암시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다니엘의 70이레의 약속 가운데 마지막 한 이레의 언약이 남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이스라엘과 한 이레 즉 7년간의 평화협약을 맺고, 그 이레의 절반인 전 3년 반 후에 그 언약을 파기하고, 성전에 우상을 세워 놓고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666표를 받게 하여 그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를 경배하지 않는 자를 다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 이레의 언약이 마지막 어느 시기에 적그리스도에 의해 집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 자체가 틀렸다.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가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69이레가 지나고 공백기를 지나서 어느 시기에 한 이레의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언약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메시야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시는 언약이지,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이 맺는 조약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언젠가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스라엘과 한 이레의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이레의 절반에 성전제사를 그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이스라엘에 성전이 아직 세워지지 아니했지만 언젠가는 이 언약의 성취를 위해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다 상상의 산물이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천주교의 리베라 신부(A.D.1537~1591)가 만들어 낸 거짓된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리베라 신부는 교황의 지시에 따라서, 당시 교황이 적그리스도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설책을 집필했는데, 거기에 다니엘의 마지막 한 이레에 관한 가설을 집어넣었다. 이름하여 요한계시록에 대한 미래적 해석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것은 다니엘의 한 이레가 미래의 어느 날에 성취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곧 미래의 어느 날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스라엘과 한 이레의 언약을 맺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사실 천주교의 리베라 신부가 이러한 미래주의적 해석을 내놓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한 이레가 미래의 어느 날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 간에 맺을 약속이라는 해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리베라 신부의 해석으로 인하여 개혁 교회가 미혹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리베라 신부의 해석은 개신 교회에 흘러 들어왔고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가 세대주의를 낳았으며, 우리나라의 초기의 목회자들도 미국에 건너가서 리베라 신부의 미래주의적 종말론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의 약 70% 성도들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혹은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틀린 것이다. 이처럼 다니엘의 한 이레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을 아무런 비판없이 무턱대고 믿고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성경대로 믿어야 하고 성경의 올바른 번역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6.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과 성전 밖 마당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히는 시기는 다른가?
그렇다면, 두 증인이 복음을 전파하고,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가 짓밟히는 일이 동시에 실현되는 42달 혹은 1,260일(3년 반)은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그 어디에도 전 3년 반이나 후 3년 반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오셔서 한 이레의 절반에 속죄사역을 드리심으로 제사와 예물을 그쳤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굳이 후 3년 반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속죄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3년 반이 지난 시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던 때다. 이때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됨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70이레는 육적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에 관한 예언으로 이미 완성된 것이다.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의 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년 반이 지났으며, 오늘날까지 약 2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주님의 재림은 성취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70이레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성에 관한 약속이었던 것이지, 전 인류의 역사에 관한 약속이나 아니 교회에 관한 약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42달 내지는 1,260일, 그리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다니엘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260일의 기간은 요한계시록 11장에 의하면, 성전인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지는 기간이요, 두 증인에 의해 만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굳이 1,260일이라는 기간은 상징적인 기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그 기간을 문자적으로 계산하려 한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 전까지의 모든 기간 곧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는 기간이요, 동시에 교회가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혀지는 시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1,260일은 문자적인 1,260일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숫자는 다 상징적인 숫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42달이나 1,260일도 다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어떤 특별한 의미있는 기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숫자적인 기간으로만 알고 해석하려고 했다가는 많은 오류를 낳게 되고 급기야는 시한부 종말론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가 144,000명인데, 이 숫자가 문자적으로 144,000명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7. 두 증인이 죽임당하는 큰 성은 대체 어디인가?
셋째로, 이제는 두 증인이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죽임당하는 장소인 "큰 성"이 과연 어디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큰 성"을 "예루살렘 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 성에 대한 해설이 나오는데, 그곳은 두 증인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곳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계11:8). 얼핏 보면 두 증인이 죽임당하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두 증인"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에 주님의 재림 때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들을 지칭하고 있는 바, 복음 사역자들이 꼭 예루살렘 성에서만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 두 증인은 시대를 막론하고 주의 종들을 깨우치는 주의 종들이다. 이들은 모세처럼 십계명의 준수를 외치는 사역자들이고, 엘리야처럼 회개를 외치는 사역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큰 성"을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두 증인들이 복음을 외치다가 죽임을 당한 큰 성은 대체 어디인가? 결론적으로 그곳은 "큰 성"인 "바벨론 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큰 성"은 오직 "바벨론 성"이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요한계시록 자체에서 무려 10번이나 나온다(계11:8, 14:8, 16:19, 18:2,10,16,18,19,21). 이 중에서 몇 개만이라도 살펴봄으로 그 성이 바벨론 성을 지칭하는지 알아 보자.
계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녀(음녀)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계16: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계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계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큰 성"이란 오직 멸망받게 될 바벨론 성만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에 이 지구상에는 문자적으로 바벨론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도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떤 성을 바벨론 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17~18장 강해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선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이 죽었던 장소가 큰 성이라는 말씀에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자. 그것만 보더라도 그곳이 어디인지를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큰 성 바벨론은 백성들과 족속들과 방언들과 민족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떤 장소라고 한다(계11:9). 그런데 계11:8에 따르면, 그곳이 어디인지를 암시하는 3가지 단서들이 나온다.
계11:8(헬라어 직역) 그것(그 성)은 영적으로 소돔들(복수)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애굽[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그곳은] 그들(두 증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곳[이다]
그렇다. 첫째,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들'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계11:8a). 그리고 둘째,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불리우는 장소이며( 계11:8b), 셋째, 그곳은 두 증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던 장소라고 되어 있다(계11:8c). 여기서 세 번째 단서부터 먼저 살펴본다면, 예루살렘 성도 바벨론 성의 하나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큰 성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주하는 예루살렘 성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곳은 어디인가? 첫째로, 영적으로 "소돔들"이라고 불리우는 장소라고 하였다(계11:8a). 여기서 '소돔들'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성으로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일시적으로 거주했던 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성은 온갖 죄악이 난무하던 성이요, 그 중에서도 동성애와 같은 음란이 가득한 성이었다. 결국 그 도시는 불과 유황불로 형벌을 받아 지구상에서 사라진 도성이었다. 그러므로 큰 성 바벨론 성은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도성이자, 동성애와 같은 음행이 가득한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음행"은 요한계시록 17장에 음녀로 표시되는 한 여자가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실제적인 음행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들이 가득한 도시가 큰 성 바벨론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을 저지르는 도시 바벨론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결혼하여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대를 찾아서 음탕한 행위를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이외의 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바로 "큰 성 바벨론"인 것이다. 그러니 "큰 성 바벨론"은 어느 한 도시만을 일컫는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또한 둘째로, 큰 성은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계11:8b). 여기서 애굽이라는 국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삼아 압제하고 괴롭혔던 나라를 상징한다. 곧 영적으로 보면 마귀의 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큰 성이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이 도시가 핍박의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구주로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도시나 세력이 "큰 성 바벨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을 당시에 그 도시는 어디였겠는가? 당연히 그 도시는 로마였을 것이다. 로마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을 뿐만 아니라 온갖 음행으로 가득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 번째 단서인 주께서 못박히던 곳이라는 말도 영적인 것이므로, 예수께서 공생애 당시에 활동했던 예루살렘도 하나의 바벨론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돈과 권력이라는 우상에 빠져 있어서, 메시야를 눈 앞에서 보고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행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한 도시였기에,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예루살렘은 하나의 바벨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로마라는 나라는 망했다. 하지만, 로마의 바티칸 성은 지금까지 땅의 임금들(왕들)을 다스리는 도시가 되어 있다(계17:18). 고로 중세의 로마 천주교도 거대한 성 바벨론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의하면, 언젠가는 불법의 사람이자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하나님이라 불리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나오스=교회)에 앉아 자기를 경배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살후2:3~4). 그럼, 적그리스도는 누구겠는가? 그때를 중세로 친다면, 로마 교황이 아니고 또 누구를 가리키겠는가? 그렇다. 중세시대에 바벨론은 로마 교황이 살고 있는 바티칸 성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들은 바벨론 성의 하나다.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교회도 얼마든지 바벨론 성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로마 천주교는 잠시 동안 죽은 듯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만약 로마 천주교의 교황을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 뿔 가진 짐승으로 가정한다면,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 가진 짐승은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계13장). 고로, 어떤 곳이 로마 천주교이든지 교회이든지 온갖 더러운 음행에 물들어 있고 마귀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다면 그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는 큰 성 바벨론 성에 속해 있는 자인 것이다.
8.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두 증인이 활동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그들의 사역을 축복하시고 그들이 사명을 마칠 때까지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 두 증인은 시대마다 활동했던 주의 종들 중에 있어 왔다. 그리고 진짜 끝에 또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떤 주의 종과 어떤 교회가 두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의 뒤를 잇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증인은 모세처럼 우상숭배를 한다면 그가 설령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외치는 주의 종들이자 또한 그러한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회개를 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외치는 주의 종들과 교회다. 이러한 사역자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다. 또 지금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자를 만나야 하고 이러한 교회를 통해서 때를 분별하고 환난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환난 후에 오신다고 하였다. 결코 환난 전에 휴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속하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는 어떤 숫자가 결코 문자적인 숫자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 상징적인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2달이나 1,260일도 다 상징적인 숫자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어린양의 뿔이 일곱 개이고 어린양의 눈들이 일곱 개이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가 144,000이라는 말의 숫자가 다 상징적인 숫자였던 것과 같이, 3년 반도 다 상징적인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 기간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이후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의 이 땅에서의 기간일 것이다. 이 시기는 교회가 핍박당하는 시기도 되겠지만, 두 증인과 같은 사역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 오늘 이 시간에는 두 증인이 누구이며,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인 1,260일은 무엇이며, 그들이 사역하던 장소이자 사역이 끝나는 날 죽임당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살펴보았다. 사실은 이 시간에 두 증인과 두 증인의 활동 시기와 활동 장소를 비롯하여, 두 증인의 부활 승천까지 살펴보려고 했다. 그래야 1,260일이라는 기간이 어떤 기간인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두 증인의 부활 승천"에 관해서는 다음 이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자. (건투를 빈다....삭제)
2017년 12월 6일(수)
<참고>
2019-05-10(금) 금요기도회
제목: 용과 여자의 쟁투(6) 짐승에 의한 환난기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시작점과 끝점은 언제인가(계11:3~13)
어떤 사람은 대환난기가 "7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3년반"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7년"과 "3년반"이라는 기간은 대체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가? 우리는 이 기간에 대해 다니엘에서 2번, 요한계시록에서 5번을 만나게 된다. 특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시기를 동일하게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은 3년반으로서, 1,260일이며, 42달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1,260일"은 정말 산술적으로 딱 3년반의 기간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징적인 숫자요 영적인 숫자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12장과 11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계12장("여자"와 용에 대한 환상)에서는 그 시작의 시기를 말해주고 있으며, 계11장("두 증인"에 대한 환상)에서는 그 끝의 시기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대체 얼마만큼 되는 것이며, 그 시작과 끝은 언제인 것인가?
1. 들어가며
지금의 시대는 과연 환난기인가 평온기인가? 과연 우리의 시대에 대환난이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대환난"이란 미래의 어느 날이 되었을 때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이스라엘과 7년간의 평화협상을 맺게 될 터인데 그때부터가 환난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중에도 전3년 반은 미온적 환난기라고 하고, 후3년 반은 극심한 환난기이기 때문에, 대환난은 3년 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주장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환난기이며 대환난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짜 3년 반의 환난기가 언제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3년 반의 환난기의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이 언제인지를 통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시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환난을 대비하고, 환난에서 이기는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더불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세대주의적 환난전휴거론자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기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한 두 때와 반 때"를 산술적으로 해석하여 시간적으로 딱 1,260일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어느 미래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 성도들을 죽이는 딱 3년 반의 기간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3년 반 즉 1,260일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9:27에 나오는 "다니엘의 한 이레"에 대한 자의적 해석 때문이다. 그들은 한 이레(7년)의 언약을 이렇게 푼다. 즉 한 이레(7년)의 절반에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성전(제3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때에 비로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그가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서 목베임을 받아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러한 해석은 잘못 오해하고 내린 해석이다. 왜냐하면 다니엘서 9장에 나오는 70이레의 언약 가운데 "한 이레"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니엘의 70이레의 "한 이레"는 초림하신 메시야의 죽음과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인 것이지, 미래에 있을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 간에 맺을 7년 평화협정이 아니기 때문이다(단7:24~27). 다니엘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70이레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 그것은 7이레와 62이레가 지난 후에 메시야가 나타나서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며, 그후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라고 했다(단9:27). 그러므로 마지막 "한 이레(7년)"의 시작은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해(A.D.27년)를 가리키는 것이며, "한 이레의 절반"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시기로서,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랐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거부한 채 계속해서 성전에서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리려고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 곧 로마의 디도장군을 보내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셨던 것이다(마24:15, 눅21:20). 이것이 바로 한 이레의 절반 이후에 되어질 일이다. 고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이 말하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산술적으로 1,260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초림의 예수님의 사건을 미래에 있어질 적그리스도의 통치로 해석한 잘못된 주장이다.
3. 요한계시록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의미는 대체 어떤 의미인가? 우선 요한계시록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용어가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다(계12:14). 그런데 이 용어가 동일 문맥 안에서 1,260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계12:6). 그래서 우리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1,260일과 동일한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이것은 달(month)수로 환산해 본다면, 42달이며, 연(year)수로 계산해 본다면, 3년 반에 해당한다. 고로 우리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곧 "1,260일"이자, "42달"이며, "3년 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260일은 정말 문자적으로 딱, 42달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상징적인 시기요 영적인 시기다. 왜냐하면 그 기간은 성도들이 대적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환난을 받는 기간 전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용어를 요한계시록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이 단어가 처음 쓰였던 단7:25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단9장의 70이레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에 의해 핍박받는 기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짐승같은 하나님의 대적자들에 의해 핍박받고 환난받는 기간을 가리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간일지라도 성도들을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이 본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체라고 여겨지는 한 여자가 용(사탄)의 얼굴을 피해 광야로 도망가서 거기서 양육받는 기간을 1,260일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260일이란 여자가 용으로부터 보호받고 양육받는 기간이면서, 동시에 여자가 용에게 핍박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4. 환난의 시작 지점이 어디이며, 환난의 끝 지점은 대체 어디인가?
그렇다면, 환난의 때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시작 시점은 어디며, 환난의 끝 지점은 어디인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은 그것이 언젠가 도래하게 될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으로서 그 기간의 처음과 끝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 기간에 적그리스도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고 해석하기에, 지금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반드시 제3의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적그리스도가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 후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 일은 99.9%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들은 단9장에 나오는 한 이레를 잘못 해석하고 있음이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영적인 대환난기)의 시작점은 언제이고, 또한 3년 반의 끝 지점은 대체 언제인가? 놀랍게도 그 시기가 요한계시록 12장과 11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환난기의 시작점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환난기의 끝 지점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의 시작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날이다(계12:5~6). 왜 그런가?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체로 표현된 여자가 예수님을 낳은 이후 용에 의해서 핍박을 받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먼저 해를 옷입은 채 있는 여자와 남자아이가 누군지부터 살펴보자. 처음에 여자가 누군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사내아이(남자 아들)가 누군지는 알 수 있다. 그는 장차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남자라고 했기 때문이다(계12:5). 계19:15과 계2:27을 읽어보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는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후에 출현하게 되는 "이기는 성도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장차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남자아이의 첫 열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이어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이기는 성도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참고로, "해를 옷입은 채 있는 여자(계12:1)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산출하는 모체를 가리키며, 예수님 탄생 전까지 이 여인은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지만, 예수님의 탄생 이후부터는 천국에 들어갈 이기는 자들을 산출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뒤에 가서 더 자세히 나옴).
둘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의 끝 지점은 언제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재림 직전"이다. 왜냐하면 그 기간은 여자가 광야로 도망가서 양육받는 기간임과 동시에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과 일치하고 있는데, 두 증인의 사역이 마치는 날은 무저갱으로부터 한 짐승이 올라오는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계11:7). 이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한 짐승"은 사탄을 가리킨다(계9:1,11, 16:13~14, 17:8). 그때에 두 증인이 자신의 사역을 마치는 그날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의 재림이 있다. 고로, 환난기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인 것을 알 수 있다.
5. 두 증인은 누구를 가리키며,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두 증인이 자신의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서 두 증인과 전쟁을 일으키며 그들을 죽이는 짐승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남자아이를 낳은 여자가 피신하여 양육받는 기간이 어떻게 되어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과 동일한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계12장에 의하면, 해를 옷입은 채 있는 이 여자는 일차적으로 "구약의 성도들을 산출하는 모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해를 옷입고 있었고 그녀의 발 아래는 달이 있었으며, 12별들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37:9에 의하면, 요셉의 꿈에, 해는 야곱을 가리키고, 달은 그의 어머니를, 열한 별들은 그의 형제들을 가리키고 있다. 고로 해를 옷입은 채 있는 여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어 애를 쓰며 부르짖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는 큰 붉은 용이 있어서,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먹어 치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늘의 별들(천사들)의 1/3을 끌어다가 말이다. 그런데 여자가 낳은 아들을 용은 먹어 치우지 못한다. 오히려 여자가 낳은 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낚아채져 가버린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그곳은 하나님께서 1,260일 동안 그녀를 양육하기 위하여 예비된 장소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아이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여자가 낳은 첫째 아들은 누구인가? 그분은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실 예수님이시다(계19:15, 2:27, 시2:9). 그리고 그의 동생들이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 이들이 바로 계20장에 등장하고 있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가 광야로 피하여 용의 얼굴을 떠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는 시점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등장하여 활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도되고 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들이 누군지를 더 말해 준다. 첫째는 "두 감람나무"라고 했고(계11:4a), 둘째는 "두 촛대"라고 했으며(계11:4b), 셋째로 "두 선지자"라고 했다(계11:10). 먼저 사도 요한은 그들을 이 땅에 주님 앞에 이미 서 있는 채 있는 "두 감람나무"라고도 말했다(계11:4a). 이는 슥4장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곧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제사장과 왕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두 촛대"라고 하였다(계11:4b).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촛대"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계1:20). 그리고 이들은 "두 선지자"라고 하였다(계11:10). 왜냐하면 이들이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치고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예표가 누군지를 말해 주고 있는데, 그들은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이며,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다(계11:5~6). 이들 두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요약하면, 첫째는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이며, 둘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역이 마치는 때가 언제인지가 정확하게 나온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증언을 마칠 때라고 하였다(계11:7).
그렇다면, 두 증인이 자신의 증언의 사역을 마칠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무저갱으로부터 짐승이 올라오는 때"라고 하였다(계11:7). 사실 짐승으로 표현되는 "용"은 무저갱의 천사로서, 사탄 마귀를 뜻한다(계9:11). 그는 원래 하늘의 천사장의 하나였으나, 자신의 높은 지혜로 인간들과 무역(거래)을 하고 있었다. 즉 하늘에 있으면서 지상의 왕(황제)들을 유혹하여 자신을 신으로 섬기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알고 있었으나 그의 특성을 이용하여, 그를 일시적으로 인간들의 "참소자"로 사용하였다(계12:11). 그러나 그의 무역(거래)이 커져 하늘의 별들(천사들)의 1/3을 끌어들였다(계12:4). 그러자 예수님의 탄생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을 시켜, 용과 그의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내었다(계12:7~9). 그러자 그들은 땅속(지구 속)(원문)으로 떨어졌고(계12:9,13), 사탄 마귀는 거기에 자신의 보좌를 만들고 귀신들을 자신의 부하들로 조직한 왕국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왕국'이다(마12:26). 그들의 처소가 바로 땅속 곧 음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약 시대만 해도 사탄 마귀는 하늘의 천상회의에 늘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범죄한 인간들을 참소했다. 그 장면이 욥1~2장과 왕상 22장과 슥3장에 고스란히 나온다. 그는 하늘과 지구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께서 탄생하셨고, 인류의 속죄를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그것의 시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았던 바로 그 세례였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이다. 사탄이 즉시 예수님께 다가왔고 첫 아담의 경우처럼 그를 시험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3대0으로 승리했다. 그리하여 마귀는 이제 진 자가 되고 말았다(벧후2:19). 그러니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사탄 마귀의 부하들인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두목인 사탄 마귀가 예수님께 광야에서 3대0으로 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는데 실패한 사탄 마귀는 잠시 물러나 예수님을 없앨 계획에 착수하는데, 그것은 종교지도자들을 이용하여 죽이는 것이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이권문제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귀에게 쉽게 포로가 되어 버렸고 결국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행하고 로마 총독에게 사형 집행을 부탁한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지만 그것은 사탄 마귀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자신이 가진 사망 권세를 사용해 죽였으니 불법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때 그는 즉시 사망 권세를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사망의 음부의 열쇠가 예수님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계1:18). 그리고 그는 그때에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의 권세는 많은 제한이 가해졌다. 이것이 천년 동안 마귀가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다(계20:1~3). 이 기간 동안에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부른다), 천국에 들어가 왕 노릇하게 되는데, 이것을 일컬어 "천년왕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에 사탄 마귀를 무저갱으로부터 잠깐 동안 풀어 준다고 말씀하셨다(계20:3,7). 그때 무저갱으로부터 사탄 마귀가 올라오게 될 것이다(계11:7). 그러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이 전부 다 끝나는 것이다. 이제 그가 올라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동안 갇혀 지냈던 분풀이를 예수믿는 자들에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기의 대환난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순교자의 숫자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이 재림하실 수가 있으시다.
고로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두 증인(두 명의 개인 아님)과 더불어 전쟁을 하게 되고 이내 그들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순교자의 숫자가 채워질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을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무저갱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시기가 주님의 재림 직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리하여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예수님의 재림 직전이라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6. 나오며
그렇다. 계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이 땅에 회개를 외치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두 감람나무"처럼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름(성령)을 공급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두 촛대"와 같은 자들인데 계2~3장에 나오는 교회의 사례를 가지고 비교한다면,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와 같은 역할을 할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역을 하는 것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예수님의 재림 직전까지 사역할 자들이다. 그 사역을 하는 동안 아무도 그를 손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권세가 그들을 해하려는 자들을 삼켜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계11:5). 그리하여 그들은 3년 반 동안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회개를 외치며 천국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이나 요한계시록 12장에 등장하는 "여자" 곧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를 낳고 광야의 피난처로 가서 보호받는 여자는 동일한 존재를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이기는 성도들을 계11장에서는 "두 증인"으로 표현하고 있고, 계12장에서는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마지막 때까지 살아남아 이기는 성도들이 되고 이기는 성도들을 배출하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두 증인"처럼 사역해야 한다. 끝까지 회개를 외치고 예수님이 누구며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려 주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면 그 교회는 음부의 문들이 이길 수 없는 교회가 될 것이다(마16:18). 그러면 어떤 짐승이라도 건드릴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회개와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삭제)
2019년 5월 10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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