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5가지 직분은 무엇이며,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교회에게 있는 '목사'라는 직책은 과연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방언'이나 '예언'같은 신령한 은사는 언제까지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보다 더 좋은 은사가 있는 것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오늘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자.
1. 들어가며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분들이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 교회가 탄생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때 있었던 직분들 중에는 지금도 있는 직분도 있으나, 그때는 없던 직분이 지금에 와서 새롭게 생겨난 것도 있다. 하지만 초기 교회 가운데 직분은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은사였다. 그러한 직분의 은사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이러한 직분들은 어떤 직무를 수행하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직분의 은사들 중에서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두 가지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을 공부하면 우리는 이어서 사랑의 은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사랑의 은사는 어떤 은사인지 그리고 이 은사가 다른 은사들과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 사랑의 은사의 속성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은사들이 지난 한계점과 그것들의 존속 시기는 언제까지인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아무쪼록 직분의 은사들과 사랑의 일반 은사에 대해 주님의 가르침을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교회에게 주어진 5중직 중에서 복음 전하는 자는 어떤 직분의 은사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 4:11을 통하여, 교회에게 주어진 은사에는 5가지 직분의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은사들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있었다. 이것들 중에서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고 오늘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의 은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은 초기 교회 당시 사도와 선지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은사에 속하는 은사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는 사도와 선지자와 더불어 똑같이 어떠한 하나의 장소에 머물러서 사역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은사다. 즉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또한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이 은사는 일종의 '선교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선교사는 타지역이나 외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되,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이 은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복음 전하는 자'의 은사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로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빌립(집사)이 성경에 나온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전도자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3차례 이상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딤후1:11, 갈1:6~9). 그리고 둘째로, 복음 전하는 자 곧 전도자에는 '디모데'가 있다. 특별히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람이다. 그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 전파하기를 힘쓰라"고 하였던 것이다(딤후4:5). 그로 하여금 전도자의 직무를 성실히 감당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 셋째로, '빌립(집사)'이라는 전도자가 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피택된 인물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던 차에,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곳에 사마리아 교회가 개척이 된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 곧 전도자는 오늘날에 전도사 정도의 신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준 사도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으며, 세례도 주었다. 그리고 빌립 같은 경우에는 능력도 행사하였고 축사도 행했다. 수많은 표적들과 기사들이 그에게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의미의 순회 전도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3. 목사와 교사의 직분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인가?
직분으로 교회 가운데 주신 '목사'와 '교사'의 은사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함께 초기 교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직분의 은사자들이었다. 왜냐하면 목사와 교사의 은사자들로 인하여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는 이단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고, 귀신으로부터 지켜내며, 세상으로부터 이기는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고 세워주는 은사자들이었다. 특히 '목사'와 '교사'의 은사자는 앞의 3가지 은사자와 달리, 한곳에 머물러 일하는 사역자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양육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목사와 교사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거기에서 풀타임 사역자로 평생을 일하는 분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목사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목사의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5중직의 직분 은사들 가운데서, '교사'의 은사자와 더불어 함께 등장하고 있는 은사인데(엡4:11), '목사와 교사'라는 명칭을 보면, 단어는 2개이지만 한 개의 정관사만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목사는 반드시 교사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목사나 교사는 양육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라는 명칭은 사실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목자'로 나온다. '목자'는 헬라어로 '포이멘'인데, 양떼들을 지키고 돌보는 목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교회의 성도들을 양육하는 직분을 일컬어 '목자'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으로 생각하시고 당신을 목자로 말씀하신 것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 싶다(시100:3). 그리고 예수께서도 당신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 예수께서 당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0:11,14~15).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라는 직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양 무리 곧 교회의 성도들을 목양하는 자를 일컫는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 후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사역을 위임하실 때에,"너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일컬어서 '양들의 큰 목자(히13:20)'라고 하였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2:25)'이자 '목자장(벧전5:4)'이라고 말했다.
그럼, 목사는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한마디로 목사는 하나님이 맡기신 양 무리를 목양하는 직무자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양떼를 먹이는 일을 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양떼를 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 무리를 '먹인다'(보스코)'는 말은 양들로 하여금 풀을 뜯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먹일 수 있어야 한다(요21:15,17). 그리고 목사는 양 무리를 '치는(포이마이노)' 일을 행한다. 여기서 '친다'는 말은 '돌보다, 지키다'라는 말로서, 양떼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잘 돌보고, 그들을 사탄 마귀와 귀신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자는 2가지를 사용하는 자다. 하나는 '막대기'로서 양들을 헤치려 오는 동물들을 후려치는 일을 행하는 것이며, 반대로 '지팡이'로서는 양떼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4. 교사의 은사는 무엇이며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교회에게 주신 마지막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사(디다스칼로스)'라는 은사다. 이는 성경을 잘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교사는 목사의 은사와 더불어 짝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목사는 교사처럼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딤전5:7). 그렇지만 교사가 반드시 목사인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라고 하는 성경 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행18:24~25). 그는 목사도 아니었고 복음 전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목사나 교사의 다른 은사에 비해 다른 것은 둘 다 한곳에 머물러서 성도들을 양육한다는 점이다. 특별히 교사는 성경을 잘 배워서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도 성경 교사로서(딤후1:11, 2:7) 구약의 율법을 잘 해석하여 그것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잘 전달하는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로서 디모데를 택하여 에베소 교회에 목자와 교사로서 파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에게 성경을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권하였던 것이다(딤전4:13).
5. 사랑의 은사는 왜 필요한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의 초반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특별 은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이어서 후반부에서 직분의 은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너희는 더욱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했다(고전12:31). 그리고 '사랑의 은사'를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는 매우 가장 좋은 은사요 큰 은사임에 틀림없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3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신령한 은사들 곧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을 발설할 수 있는 자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같고,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했다(고전13:1). 그리고 예언의 은사가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으며, 산을 옮길 수준의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13:2). 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말의 은사는 말장난에 불과하며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모든 소유물로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했다(고전13:3). 왜냐하면 그렇게 수고했어도 천국에서는 아무것도 계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 사용에 있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을 자신의 마음의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6. 사랑이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어 사도 바울은 사랑이 어떤 것이며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고전13:4~7). 사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요일4:8).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대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사랑의 특성을 총 15가지로 소개한다. 그것을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질투)하지 않으며, 사랑은 자랑하지(허풍떨지) 아니하며, 교만하게 되지 아니하며, 5 수치스럽게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의 것들을 찾지(구하지) 아니하며, 분노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꾀하지 아니하며, 6 불의에 대하여 기뻐하지 아니하며, 그런데 진리에게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들을 덮어 주며, 모든 것들을 믿으며, 모든 것들을 소망하며, 모든 것들을 견디느니라
그렇다. 사랑은 일종의 구호나 관념이 결코 아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덕목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천이 없는 사랑은 공허한 것이다. 그렇다면 15가지 사랑의 항목들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내'라는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나갔고 죄를 지었지만 끝까지 오래 참으셨다. 그리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며, 그가 회개하여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기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7.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사랑의 은사는 어떻게 다른가?
끝으로 사도 바울은 각종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사랑의 은사를 비교한다(고전12:8~13). 그러면서 말하기를 예언이나 방언, 지식의 말씀의 은사 등이 참으로 놀라운 은사일지라도 이것들은 결국 한시적이며 부분적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천국에까지 필요한 은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까지 그가 다 아는 것은 아니며, 그가 영안이 열리는 은사와 환상의 은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천국과 지옥을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신과 천사들 모두를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 부분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거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죽어 하늘에 올라간다면,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은 다 그치게 되고 폐지될 것이다. 그것들이 천국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렇더라도 어린아이 때에는 이러한 은사들이 상당히 유효하게 쓰인다고 말이다. 왜 그런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랑의 은사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듯 사랑의 은사도 영원한 것이다. 천국에서도 사랑의 은사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사모하고 추구하는 은사를 정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사랑의 은사를 선택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끝까지 자신을 지켜 내야 할 '믿음'도 중요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소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건축하게 하고 교회를 건축하게 하기 위해 성령의 선물로서 은사들을 각자에게 분량을 따라 주시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교회들 가운데 직분의 은사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의 직책을, 어떤 사람에게는 선지자의 직책을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책을 주시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직분의 은사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고로 교회는 각종 은사들과 5중직의 직분을 통하여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은사들이 교회에 풍성하다 할지라도 각자에게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은사를 받았다가 잘못 사용하여 훗날 심판의 때에 주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거나, 아울러 불법을 행하는 자로 낙인 찍혀 주님으로부터 버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정말 교회의 질서 가운데 겸손하게 그것도 남을 섬기는 것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분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남들 위에 군림하지 말아야 하며, 신령한 은사를 이용하여 남의 돈을 갈취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아니 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값없이 내주시고 섬겨 주셨듯이 우리도 값없이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이웃 형제 자매를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1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