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13)] 화가 난 유대인들의 예상되는 질문들과 2가지 궤변은 무엇인가?(롬3:1~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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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셨으니, 바로 이스라엘, 유대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롬3:2)라는 세상 그 어떤 민족도 받지 못한 특별한 사명과 특권을 받았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분의 성품, 그리고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그들에게 처음으로 위탁되었다. 그들은 인류의 영적 등대요, 진리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말씀을 맡았으나 듣지 않았고,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비극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기보다 종교적인 형식과 전통에 얽매였고, 심지어는 그 말씀을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과 2장을 통해 이방인뿐만 아니라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하던 유대인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겉모습뿐인 할례나 율법 지식이 구원의 보증이 될 수 없으며, 오직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면적 유대인’만이 하나님께 칭찬받는 참 유대인이라고 선포했다(롬2:29).
이러한 바울의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민사상과 종교적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고, 어떻게든 바울의 논리를 반박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로마서 3장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예상되는 반론, 즉 교묘한 궤변에 대한 사도 바울의 명쾌한 논증과 답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죄성이 어떻게 진리를 왜곡하고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지를 목도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그 모든 궤변을 뛰어넘어 굳건히 서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지 2천 년 전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도 숨어 있는 교묘한 자기 합리화와 불순종의 뿌리를 발견하고, 오직 진리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바울은 왜 유대인인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해야 했는가?
로마서는 누구에게 쓴 편지인가? 그것은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두 종류의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유대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었고 또 하나는 이방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구원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어도 여전히 율법의 핵심인 도덕법으로서 십계명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의식법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은 의식법으로서 할례만 행하였다면 도덕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는데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와 반대로 주 예수님을 믿었으면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을 수 있고 성령을 힘입어 구원을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고, 반대로 이방인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게 하신 것은 방종하며 살라고 그렇게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인도를 받아 거룩함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화가 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2가지 질문을 바울에게 던질 것이다. 이어서 그들이 말할 수 있는 2가지 궤변을 예상하고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번 시간에 나눌 로마서 3:1~8의 말씀이다.
3. 바울은 왜 로마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였는가?
바울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다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도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롬3:23).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율법 곧 십계명법을 지키고 의식법들을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도덕법을 지키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즉 유대인들은 남들에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고 있었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간음을 행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라고 하면서 오히려 우상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일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었다(롬2:21~24). 그러므로 할례만 받고 십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는 표면적인 유대인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새겨진 선한 양심을 따라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면 이러한 이방인이 오히려 이면적 유대인 곧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말했다. 즉 할례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들이 진정 언약 백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4.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던질 수 있는 예상된 질문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대체 모세시대부터 예수님의 시대까지 약 1,500년동안 율법을 지켜온 유대인들은 잔뜩 고생만 한 것인가? 대체 유대인들의 뛰어남은 무엇인가? 정말로 그들 자신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에 이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결국 구원에서 제외되서 구원의 화살표가 이방인에게 넘어가데 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진정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기로 약속했던 당신 자신의 신실하심은 폐하여져버린 것인가?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들이 던질 수 있는 2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면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첫째, 그렇다면 대체 유대인들의 나음(뛰어남)은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할례의 유익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될 유대인들에게 대답한다. 그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범사에 많은 유익들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라고 했다(롬3:1~2).
둘째, 그러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여진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될 유대인들에게 대답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만을 이야기하시고 참된 말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롬3:4). 오히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한 유대인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5.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2가지 예상되는 궤변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말해주었는가?
첫째, 유대인들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유대인들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실 수가 있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이 곧 궤변이라고 했다. 즉 첫 번째 궤변은 이것이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롬 3:5). 즉, ‘우리의 불의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더 빛나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는 주장이다. 이는 마치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완성되었으니, 가룟 유다는 칭찬받아야 한다는 식의 억지 논리와 같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롬 3:6) 라고 반박한다. 만일 악을 행하여 선한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그 악이 정당화된다면, 세상에 심판받을 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반드시 심판하신다.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회개하고 형벌을 받아야 할 대상을 칭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
둘째, 유대인들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고 있으니, 어찌 유대인을 정죄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데, 이것이 곧 궤변이라고 말했다. 즉 두 번째 궤변은 이것이다. “또한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3:8). 이는 7절의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라는 말을 발전시킨 것이다. ‘나의 거짓말과 위선적인 행동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영광이 더 드러났다면, 왜 내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차라리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실로 경악할 만한 주장이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최후의 발악과도 같다.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과정과 동기, 수단까지도 모두 감찰하시는 분이다. 악한 동기와 수단으로 얻어진 선한 결과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모독하는 행위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궤변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작은 거짓말이나 불의는 괜찮다는 식의 안일한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며(살전 5:22), 거짓을 통해 하나님의 선을 이루려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6. 진리 앞에 나도 정직히 서는 길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모
든 궤변과 자기 합리화를 논파하며,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로마서의 핵심 진리로 돌아온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단순히 율법을 어겼다는 데 있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진리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 어떻게든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구원은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회개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부분적인 지식이나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신앙의 연수가 깊어지고 직분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히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혹시 나도 모르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죄와 타협하고, 그것을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신앙은 나의 불의와 거짓됨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궤변을 버리고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사도 바울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싸움의 축소판과 같다.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의 죄 된 본성은 어떻게든 그것을 피하거나 왜곡하여 자신을 변호하려는 교묘한 궤변을 만들어낸다. ‘나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거나, ‘선을 위해 악을 행할 수도 있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독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그 어떠한 궤변으로도 가릴 수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공의는 반드시 살아있다. 인간의 불신실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으며, 악한 수단으로 얻은 결과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모든 과정과 동기를 감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그것은 모든 자기 합리화와 변명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다. 나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나의 유익이나 명예를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맡겨진 말씀에 순종하며 진리의 파수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궤변을 넘어 진리의 중심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참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05월 14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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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약] 이 설교는 로마서 3장 1-8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죄를 궤변으로 합리화하려 했던 유대인들의 문제를 다룬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불신실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으며, ‘불의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거나 ‘선을 위해 악을 행한다’는 식의 주장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악한 궤변임을 논파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자기 합리화를 버리고 진리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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