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 모셨던 다윗에게나 그리고 뒤에 섬겼던 압살롬에게나 마찬지였다(삼하16:23). 그런데 모반자 압살롬은 탁월한 아히도벨의 제안을 버리고 후새의 제안을 선택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아히도벨도 조금은 이상하다.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그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살에는 어떤 것들이 작용한 것인가? 오늘 우리는 한 나라의 지도자와 더불어 그 지도자를 돕는 이들이 어떻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압살롬의 예루살렘의 무혈입성으로 인해 그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각료를 갖춘 후에 국무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두 모사(자문관, 척사)에게 자문을 주문한다. 그러자 아히도벨과 후새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각각 제시한다. 그런데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버리고 후새의 전략을 선택한다. 왜 그랬을까? 왜 압살롬은 처음부터 자기 편에 가담했던 충성된 헌신자 아히도벨의 모략을 버리고 후새의 모략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났던 일도 참으로 이상하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조언을 압살롬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의 고향에 내려가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왜 아히도벨은 다음 기회를 노리지 않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지도자 과연 누구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가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죽음을 통하여 주군을 바꾼 자의 최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제안했던 2차 조언은 무엇이었는가?
아히도벨이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하여 제일 처음 조언한 것은 선왕 다윗왕의 결별이었다. 그것을 백성들로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윗은 지는 별이고 압살롬은 떠오르는 별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양단간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것은 왕의 아버지가 남겨둔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을 하라는 것이었다(삼하16:21). 그러자 아히도벨의 제안은 주효하였고 아히도벨에게 사람들의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이제는 다윗을 제거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그때였다. 아히도벨이 먼저 압살롬에게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에게 군사 12,000명을 붙혀주면 그날 밤에 가서 다윗을 뒤를 추척하고 급습하여 그와 함께 한 백성들을 도망치게 놔두고 다윗만을 제거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삼하17:1~3). 왜냐하면 다윗은 지금 지쳐서 맥이 풀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아히도벨의 계략은 매우 핵심을 파고도는 것이었고 그것이 만약 실행되었다면 다윗은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른다. 그리고 아히도벨이 제안한 모략을 그에게 들려주고는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다. 아마도 다윗의 절친이자 모사였던 후새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의 절친이었던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과는 다른 모략을 제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채택하지 않고 후새의 조언을 채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때 후새는 대체 어떤 조언을 왕에게 했던 것인가? 그것은 아히도벨이 지금 다윗을 잘 모르는 정세분석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그의 추종세력은 다 용사들이어서 그들은 지금 들에 있는 곰이 자기 새끼를 빼앗긴 것 같아 격분하고 있는 상태이며, 또한 다윗은 전략가이기 때문에 결코 백성들과 함께 잠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어느 굴속에 매복해 있다가 압살롬의 군사가 오면 몇을 쓰러뜨려 압살롬을 따르는 자가 재앙을 받았다면서 소문을 내면 아무리 강한 압살롬왕일 지라도 치명타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제안하기를 왕이 온 이스라엘을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모래처럼 모은 후에 왕이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그를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한다면, 새벽에 이슬이 땅에 덮임같이 그를 덮쳐 한 사람도 남기도 않고 죽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다윗이 어느 성에 도피해있으면 아예 밧줄로 그 성을 포박하여 강에다 빠뜨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조언을 한 것이다.
3. 왜 압살롬은 후새의 조언을 선택한 것인가?
그러자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뛰어나다고 칭찬을 하였다(삼하17:14). 그렇다면 당시 실제적으로는 아히도벨이 보다 더 정확한 정세를 파악하고 계략을 왕에게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왜 후새의 조언을 선택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왕이 어떤 사람인지가 왕이 선택한 선택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왕의 생각은 왕이 선택한 것에 그대로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왕이 아히도벨의 제안을 버리고 후새의 제안을 선택했다는 것은 왕이 후새의 안을 내심 바랬었고 그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렇게 되기를 더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략가 후새는 어떻게 해서 압살롬의 마음을 자기의 의견 안으로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사용한 '화술'에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부사어'를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는 비유적인 표현을 써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왕의 허영과 교만한 마음을 부채질하여 그 마음이 후새의 제안을 선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그가 사용한 부사어를 살펴보자. 그는 "이번에는"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왕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전번에 있었던 아히도벨의 제안은 아주 현명했고 잘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대문이다. 즉 "이번에는'는 이라는 말을 통하여 과거에 그는 왕에게 참으로 좋은 제안을 펼쳤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을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압살롬 왕은 그가 다른 사람의 의견도 잘 듣고 있으며, 잘 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지지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로, 후사는 적절한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 왕의 어영심과 교만함에 더욱더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전부터 이미 압살롬은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문에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면서 백성의 마음을 4년동안 흠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만 하면 모든 백성이 자신에게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욕심과 허영심을 정확히 간파한 후새가 압살롬의 마음을 단어와 비유적인 표현으로 격동시킨 것이다. 이때 후새가 사용한 표현들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서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덮치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라는 말에 스스로 감격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어느 성에 들어가 숨어있더라도 왕이 그 성을 밧줄을 가져다가 묶어서 강에 던져버리면 된다고 비유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압살롬이 전쟁에도 능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안을 들어본 압살롬은 그만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고 자기의 이름이 높일 수 있는 후새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해버린 것이다.
4. 왜 아히도벨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가?
그렇다면 왜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선택되지 않은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 일을 정리한 다음 조용히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 것인가? 아히도벨은 왜 스스로 목을 메 자살한 것인가? 그의 계략이 압살롬에게 채택되지 않고 거부당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을 생각할 때 속이 상하고 풀이 죽어서였을까? 만약 그 정도가 그의 자살의 원인이었다고 한다며는 그는 더 자신의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것보다는 훨씬 더 큰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전후사정을 살펴보았을 때 그의 자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가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압살롬의 거사가 실패가 돌아갈 것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첫째로, 그러면 훗날 자신이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것을 취조당할 때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미리 자살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훗날 자신이 지은 죄가 최소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한 때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부하였으나 반역자의 편에 가담하여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또한 자신이 선택한 압살롬이 지혜롭지 못하여 거사가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했다고도 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제안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제안이 왕을 높이지 않고 자신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높아지려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을 예상해서 자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다섯째, 자신이 베푼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오히려 최고의 수치로 여기고서 자살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그것을 두고 자살을 선택한 것은 너무 과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왜냐하면 자살은 자기가 자신을 살해하는 살인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 용서받을 방법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5. 다윗에게 늘 돕는 자가 붙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다윗을 도피를 돕는 손길들로 인하여 다윗은 안전하게 마하나임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마하나임은 잠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후 사울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이기 때문에 요새화되어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시동안 다윗이 도피해 있기에는 매우 적절한 장소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때 세 사람이 다윗과 그의 군대와 백성들을 위하여 식량과 피난시에 사용할 물품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들은 암속족속 나하스왕의 아들 소비(둘째 아들로 추정됨)였고 로데발(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동시에 로글림 출신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바실래)가 찾아왔다. 그들은 왜 다윗을 찾아온 것인가? 먼저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그곳에 식량과 피난용물품을 가지고 찾아온 것은 다윗이 전에 그의 아버지의 부친 장례에 조문을 보내온 것에 대한 고마움(삼하10:1~4)과 자신의 형(하눈)이 그때 다윗을 잘못 오해하여 그의 신하들에게 모욕을 준 것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찾아온 갓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때 다윗이 자신의 형 하눈을 죽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그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온 것 같다. 그리고 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긍휼의 은사가 많은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울이 죽고 난 후에 자기의 마을에 피신해온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도 그가 보살펴 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다윗이 원수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자신의 아들처럼 맞아준 것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고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여 그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르실래는 정말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로서, 그는 길르앗 땅의 거부였는데(19:32), 아마도 그동안 다윗이 주변 이방민족들을 복속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땅에 침범해오지 못하록 해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에 찾아온 것 같다. 그는 후에도 다윗의 인격과 통치력에 감복하여 다윗을 도왔지만 훗날 다윗이 환궁하고 나서 그에게 벼슬을 주려고 했을 때에도 극구 사양한 겸손한 사람이기도 하다.
6. 나오며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어떤 조언을 들었을 때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것은 사실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 지도자가 평소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때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계략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만 아히도벨의 계략을 버리고 후새의 전략을 취하고 말았다. 그것은 후새가 압살롬을 추켜 세우고 그의 허영심과 교만함을 자극했기 때문인데, 압살롬도 그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압살롬은 자신에게 직언을 한 아히도벨의 제안을 버리고 후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선택한 정책이 어떠한 것이냐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도자의 주변에 누가 자리잡고 있느냐를 보고서도 판단할 수가 있다. 이제 곧 얼마 안 있으면 우리나라도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에 정말 우리들은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정말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도자가 입술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눈여겨 보라.그리고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가를 살펴보라. 그것이 곧 그 지도자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요 그를 따르는 자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압살롬이 어리석게 자신의 허영심과 교만을 부추기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자기의 생각도 한 몫 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때 거기에는 다윗의 기도 곧 "여호와여, 원하옵건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라고 하는 다윗의 기도의 대한 응답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내게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분께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가장 적절한 시기에 우리에게 돕는 사람을 붙혀주실 것이고, 적의 악한 생각이 이기지 못하도록 그 생각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2022년 01월 30일(주일)
정병진목사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 모셨던 다윗에게나 그리고 뒤에 섬겼던 압살롬에게나 마찬가지였다(삼하16:23). 그런데 모반자 압살롬은 탁월한 아히도벨의 제안을 버리고 후새의 제안을 선택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아히도벨도 조금은 이상하다.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그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살에는 어떤 것들이 작용한 것인가? 오늘 우리는 한 나라의 지도자와 더불어 그 지도자를 돕는 이들이 어떻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압살롬의 예루살렘의 무혈입성으로 인해 그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각료를 갖춘 후에 국무 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두 모사(자문관, 척사)에게 자문을 주문한다. 그러자 아히도벨과 후새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각각 제시한다. 그런데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버리고 후새의 전략을 선택한다. 왜 그랬을까? 왜 압살롬은 처음부터 자기 편에 가담했던 충성된 헌신자 아히도벨의 모략을 버리고 후새의 모략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났던 일도 참으로 이상하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조언을 압살롬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의 고향에 내려가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왜 아히도벨은 다음 기회를 노리지 않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지도자가 과연 누구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가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죽음을 통하여 주군을 바꾼 자의 최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제안했던 2차 조언은 무엇이었는가?
아히도벨이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하여 제일 처음 조언한 것은 선왕 다윗왕의 결별이었다. 그것을 백성들로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윗은 지는 별이고 압살롬은 떠오르는 별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양단간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것은 왕의 아버지가 남겨둔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을 하라는 것이었다(삼하16:21). 그러자 아히도벨의 제안은 주효하였고 아히도벨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이제는 다윗을 제거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국무 회의가 열렸다. 그때였다. 아히도벨이 먼저 압살롬에게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에게 군사 12,000명을 붙여 주면 그날 밤에 가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고 급습하여 그와 함께 한 백성들을 도망치게 놔두고 다윗만을 제거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삼하17:1~3). 왜냐하면 다윗은 지금 지쳐서 맥이 풀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아히도벨의 계략은 매우 핵심을 파고드는 것이었고 그것이 만약 실행되었다면 다윗은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른다. 그리고 아히도벨이 제안한 모략을 그에게 들려주고는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다. 아마도 다윗의 절친이자 모사였던 후새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의 절친이었던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과는 다른 모략을 제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채택하지 않고 후새의 조언을 채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때 후새는 대체 어떤 조언을 왕에게 했던 것인가? 그것은 아히도벨이 지금 다윗을 잘 모르는 정세 분석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그의 추종 세력은 다 용사들이어서 그들은 지금 들에 있는 곰이 자기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고 있는 상태이며, 또한 다윗은 전략가이기 때문에 결코 백성들과 함께 잠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어느 굴속에 매복해 있다가 압살롬의 군사가 오면 몇을 쓰러뜨려 압살롬을 따르는 자가 재앙을 받았다면서 소문을 내면 아무리 강한 압살롬왕일 지라도 치명타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제안하기를 왕이 온 이스라엘을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모래처럼 모은 후에 왕이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그를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한다면, 새벽에 이슬이 땅에 덮임같이 그를 덮쳐 한 사람도 남기지도 않고 죽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다윗이 어느 성에 도피해 있으면 아예 밧줄로 그 성을 포박하여 강에다 빠뜨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조언을 한 것이다.
3. 왜 압살롬은 후새의 조언을 선택한 것인가?
그러자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뛰어나다고 칭찬을 하였다(삼하17:14). 그렇다면 당시 실제적으로는 아히도벨이 보다 더 정확한 정세를 파악하고 계략을 왕에게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왜 후새의 조언을 선택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왕이 어떤 사람인지가 왕이 선택한 선택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왕의 생각은 왕이 선택한 것에 그대로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왕이 아히도벨의 제안을 버리고 후새의 제안을 선택했다는 것은 왕이 후새의 제안을 내심 바랬었고 그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렇게 되기를 더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략가 후새는 어떻게 해서 압살롬의 마음을 자기의 의견 안으로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사용한 '화술'에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부사어'를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는 비유적인 표현을 써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왕의 허영과 교만한 마음을 부채질하여 그 마음이 후새의 제안을 선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그가 사용한 부사어를 살펴보자. 그는 '이번에는'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왕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전번에 있었던 아히도벨의 제안은 아주 현명했고 잘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 대문이다. 즉 '이번에는'이라는 말을 통하여 과거에 그는 왕에게 참으로 좋은 제안을 펼쳤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압살롬왕은 그가 다른 사람의 의견도 잘 듣고 있으며, 잘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지지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로, 후사는 적절한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 왕의 허영심과 교만함에 더욱더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전부터 이미 압살롬은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문에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면서 백성의 마음을 4년 동안 훔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만 하면 모든 백성이 자신에게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욕심과 허영심을 정확히 간파한 후새가 압살롬의 마음을 단어와 비유적인 표현으로 격동시킨 것이다. 이때 후새가 사용한 표현들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서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덮치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라는 말에 스스로 감격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어느 성에 들어가 숨어 있더라도 왕이 그 성을 밧줄을 가져다가 묶어서 강에 던져버리면 된다고 비유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압살롬이 전쟁에도 능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안을 들어본 압살롬은 그만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고 자기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후새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해버린 것이다.
4. 왜 아히도벨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가?
그렇다면 왜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선택되지 않은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 일을 정리한 다음 조용히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 것인가? 아히도벨은 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인가? 그의 계략이 압살롬에게 채택되지 않고 거부당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을 생각할 때 속이 상하고 풀이 죽어서였을까? 만약 그 정도가 그의 자살의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더 자신의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것보다는 훨씬 더 큰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았을 때 그의 자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가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압살롬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첫째로, 그러면 훗날 자신이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것을 취조당할 때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미리 자살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훗날 자신이 지은 죄가 최소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한 때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부하였으나 반역자의 편에 가담하여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또한 자신이 선택한 압살롬이 지혜롭지 못하여 거사가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했다고도 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제안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제안이 왕을 높이지 않고 자신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높아지려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을 예상해서 자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다섯째, 자신이 베푼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오히려 최고의 수치로 여기고서 자살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그것을 두고 자살을 선택한 것은 너무 과한 행위가 아니었나 싶다. 왜냐하면 자살은 자기가 자신을 살해하는 살인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 용서받을 방법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5. 다윗에게 늘 돕는 자가 붙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다윗의 도피를 돕는 손길들로 인하여 다윗은 안전하게 마하나임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마하나임은 잠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후 사울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이기 때문에 요새화되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시 동안 다윗이 도피해 있기에는 매우 적절한 장소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때 세 사람이 다윗과 그의 군대와 백성들을 위하여 식량과 피난시에 사용할 물품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들은 암몬 족속 나하스왕의 아들 소비(둘째 아들로 추정됨)였고 로데발(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동시에 로글림 출신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바실래)가 찾아왔다. 그들은 왜 다윗을 찾아온 것인가? 먼저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그곳에 식량과 피난용 물품을 가지고 찾아온 것은 다윗이 전에 그의 아버지의 부친 장례에 조문을 보내온 것에 대한 고마움(삼하10:1~4)과 자신의 형(하눈)이 그때 다윗을 잘못 오해하여 그의 신하들에게 모욕을 준 것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때 다윗이 자신의 형 하눈을 죽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그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온 것 같다. 그리고 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긍휼의 은사가 많은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울이 죽고 난 후에 자기의 마을에 피신해 온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도 그가 보살펴 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다윗이 원수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자신의 아들처럼 맞아준 것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고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여 그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르실래는 정말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로서, 그는 길르앗 땅의 거부였는데(19:32), 아마도 그동안 다윗이 주변 이방 민족들을 복속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땅에 침범해 오지 못하록 해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에 찾아온 것 같다. 그는 후에도 다윗의 인격과 통치력에 감복하여 다윗을 도왔지만 훗날 다윗이 환궁하고 나서 그에게 벼슬을 주려고 했을 때에도 극구 사양한 겸손한 사람이기도 하다.
6. 나오며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어떤 조언을 들었을 때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것은 사실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 지도자가 평소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때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계략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만 아히도벨의 계략을 버리고 후새의 전략을 취하고 말았다. 그것은 후새가 압살롬을 추켜 세우고 그의 허영심과 교만함을 자극했기 때문인데, 압살롬도 그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압살롬은 자신에게 직언을 한 아히도벨의 제안을 버리고 후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선택한 정책이 어떠한 것이냐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도자의 주변에 누가 자리 잡고 있느냐를 보고서도 판단할 수가 있다. 이제 곧 얼마 안 있으면 우리나라도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에 정말 우리들은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정말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도자가 입술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눈여겨 보라. 그리고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가를 살펴보라. 그것이 곧 그 지도자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요 그를 따르는 자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압살롬이 어리석게 자신의 허영심과 교만을 부추기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자기의 생각도 한몫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때 거기에는 다윗의 기도 곧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라고 하는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내게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분께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가장 적절한 시기에 우리에게 돕는 사람을 붙여 주실 것이고, 적의 악한 생각이 이기지 못하도록 그 생각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2022년 01월 30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