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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hCG8jABrxOM
날짜 2026-02-06
본문말씀 사도행전 2:1~4(신약 88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6-02-06(금) 금요기도회

제목: [제2회 방언열기세미나(01)] 방언,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는가?(행2:1~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hCG8jABrxOM

 

1. 들어가며: 닫힌 하늘 문을 여는 영의 마스터키

  신앙생활에서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들 중의 하나는 바로 '방언'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기독교의 핵심적인 은사로 사모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이미 사도 시대에 끝난 과거의 유물이나 귀신의 장난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30년 넘게 성경을 연구하고 영적 세계를 마주해 온 필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방언은 단순히 신비한 소리 내기가 아니라, 성령과 연합된 인간의 영이 하늘 보좌와 직접 소통하는 영적인 소리 장치라고 말이다.

  필자는 보수적인 장로교 전통에서 자랐었다. 박수조차 금기시되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방언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성경 원문을 파고들고 실제적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방언이 우리 영을 강화하고 기도의 한계를 돌파하게 하는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를 점차 알게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가 기도의 갈증을 느끼면서도 방언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이유는 방언에 대한 오해와 더불어 방언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실전적인 가이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우리는 방언에 대한 신학적 오해를 걷어내고,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누구나 유창하게 영의 언어를 발설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나누고자 한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다. 현장에서 검증된 실전 지침서임을 밝힌다. 진리에 목말라하는 전 세계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하늘의 평강과 능력을 체험하는 영적 전환점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 방언을 '지방 사투리'나 '외국어'로 오해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리가 방언을 이해하는 데 겪는 첫 번째 혼란은 바로 방언이라는 '용어' 자체에 있다. 한자어로 '방언(方言)'은 본래 '지방의 말'을 뜻한다. 제주 방언, 경상도 방언이라 할 때의 그 의미다. 한글 성경이 번역되던 초기, 선교사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오는 초자연적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당시 한글은 '언문'이라 불리며 천대받았고 유식한 이들은 한자를 썼지만,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가 복음의 옷을 입게 되었다.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사투리'가 같은 단어를 공유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사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두 단어는 명확히 구분된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헬라어로 '글로싸(Glossa)'이고, 지리적 사투리나 외국어는 헬라어로 '디아레크토스(Dialektos)'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이를 모두 '방언'으로 번역해 놓았고, 최근 개역개정판에서는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을 아예 '언어'라고 수정하면서 방언이 곧 학습된 외국어라는 오해를 더욱더 고착화시켜 놓았다.

  한국 기독교의 오랜 전통은 성령의 언어를 '방언'이라 불렀다. 그리고 지방 말은 '사투리'라고 구분해 왔다. 하지만 일부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근거로 방언을 오직 '배우지 않은 외국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번역도 와전되어버린 것이다. 방언을 외국어라는 정의하는 이러한 주장은 초자연적인 방언이라는 언어를 인간의 지성 체계 안으로 가두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아니다. 방언은 동서남북 지방의 말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언어이며 우리 영의 비밀스러운 고백이다. 고로 방언이라는 자체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리가 우리를 방언의 초자연적 본질에 접근하게 해 줄 것이다. 

 

 

 

3. 헬라어 '글로사'와 '디아레크토스'의 차이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방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헬라어 원어를 살피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4절,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다른 언어들(Glossa)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글로싸'는 신체 기관인 '혀'를 뜻함과 동시에 인간의 지식으로 구성되지 않은 '영의 소리'를 의미한다. 반면,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유대인들이 "우리의 난 곳 방언(Dialektos)으로 들음이 어찌 됨이냐"라고 했을 때, 그때 사용된 지방어가 곧 '디아레크토스'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구속사적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날 대부분 갈릴리 출신이었던 120명의 제자가 각기 다른 나라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학습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헤테로스 글로싸(질적으로 딴 영의 언어)'를 발설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셔서, 듣는 사람들의 귀에 그 영의 소리가 각자의 모국어인 '디아레크토스'로 번역되어 들리게 하신 것이다. 즉, 말하는 120명의 성도들은 각자 영의 언어인 자신만의 '방언'을 발설했고, 15개국에서 오순절을 지키러 왔다가 마가다락방에 모인 자들 중의 일부는 기적적으로 해석된 자기나라의 말(모국어 혹은 자국어)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발설되어 나온 방언을 '말하는 자의 외국어 능력'으로 오해하면 고린도전서 14장의 가르침과 충돌하게 된다. 바울은 방언을 가리켜 분명하게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고전 14:2).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결코 비밀이 될 수 없다. 방언이 오직 하나님만 알아들으시는 비밀인 이유는 그것이 이 세상의 언어 체계인 '디아레크토스'가 아니라 하늘의 소리인 '글로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 말이 이 세상에서 사용하던 같은 종류의 여러 다른 언어('알로스'=another)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전혀 들을 수는 없는 딴 종류의 언어('헤테로스'=different)였다고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참고로 같은 종류들 중에 다른 것은 헬라어로 '알로스'를 사용하고, 딴 종류의 다른 것들을 표현을 할 때에는 '헤테로스'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딴 종류의 언어로써 방언을 이해함으로써, 방언이 이성의 산물이 아닌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방언은 성령의 '신령한 은사'인가, 배우면 가능한 '외국어'인가?

  오늘날에 대한민국의 일부 기독교 교단에서는 방언을 그저 전도하기 위한 '외국어 은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외국어는 학원을 다니거나 독학을 통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그러한 기술에 불과하다. 그건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이 방언을 어떻게 말하는가?. 그것은 "성령의 신령한 아홉 가지 은사"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을 보라. 이 모든 은사를 "한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만약 방언이 단순한 외국어라면, 바울이 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겠는가? 외국어라면 사전을 찾아보거나 공부하라고 했을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10장 고넬료 가정의 사례를 보라.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도중 성령이 임하자 즉시 그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로마 군인으로서 배우지 않은 유대인의 방언이나 다른 외국어를 말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들은 성령을 받은 표적으로서 영의 언어를 그냥 쏟아낸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보고할 때에 고넬료 가정이 모든 자들이 어떻게 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다. 

행 11:15-17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랬다. 그날 고넬료 가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유대인들이었던 베드로와 120명의 성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 받은 것과 똑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다. 

  고로, 방언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약속하신 것과 일치한다. 여기서 '새(Kainos)'라는 단어는 기존에 있던 외국어가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하늘의 소리를 뜻한다. 따라서 방언을 학습의 영역인 외국어로 치부하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부인하는 안타까운 신학적 오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방언은 거듭난 영이 하늘 아버지를 향해 터뜨리는 사랑의 언어이자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5. 성령의 방언과 악한 영이 장악한 '귀신 방언'을 어떻게 분별하는가?

  방언에 대한 두려움 중 하나는 "혹시 내가 귀신 들려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일 것이다. 실제로 영적 세계에는 '귀신 방언'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도나 미얀마의 이교도 사원에서도 역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것은 악한 영들이 사람의 혀를 장악하여 내는 소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방언을 무서워 멀리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 말에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이 주는 진짜 방언과 귀신이 주는 가짜 방언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적 기준과 실제 현상을 통해 어느 정도 분별이 가능하다. 그럼, 성령의 방언과 귀신의 방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첫째, 먼저 방언소리의 질감을 통해서다. 성령의 방언은 평강과 기쁨을 동반하며 영혼을 소생시킨다. 반면 귀신이 주는 방언은 소름이 끼치고 불쾌하며 거북한 느낌을 준다(스스스~, 샤샤샤~, 쉿쉿쉿~ 등).

  둘째, 뱀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는 경우는 자신의 혀를 낼름거린다. 만약 그의 혀가 쑥 빠져나와서 방언을 하고 있다면 100% 귀신이 주는 방언이다.

  셋째, 방언의 발음이 매우 지저분하면서 혀로부터 침이 과도하게 튀거나 가래를 계속해서 뱉는 등의 추한 현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혹은 중간중간에 동물 울름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위와 같은 경우, 방언하는 사람의 말을 통역해보면 교회를 저주하거나 음란한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아주 많다. 이는 혀가 성령의 통제를 벗어나 귀신의 노리개가 된 상태인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이러한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심령을 깨끗이 한 자에게는 결코 악한 영이 틈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력한 성령 사역자의 지도 하에 방언을 받으려 할 때에는 전투천사들이 와서 지켜주기 때문에 안전하게 방언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이 하고는 방언이 의심된다면 사역자에게 안수를 받아서 영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혀를 붙잡고 있는 영들을 불로 태워버리면, 진짜 방언을 할 수 있다. 그렇다. 깨끗한 그릇에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 비로소 순수하고 투명한 영의 언어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방언은 결코 지저분하지 않다. 그것은 하늘 보좌의 수정을 통과해 나온 맑은 시내와 같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6.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녀도 방언을 못 하는 성도들이 꽤 많다. 그들이 믿음이 없거나 기도가 부족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장벽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잘못된 지식의 장벽 때문이다. "방언은 은사 중지론에 따라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거나 단지 "외국어일 뿐이다" 혹은 그것은 "귀신이 가득했던 고린도교회가 받은 잘못된 현상이다"는 가르침을 들으면 그만 자신의 영이 위축되어 입을 닫아버린다. 이때는 방언에 대한 바른 지식의 교정을 받지 아니하면 영의 자유함은 끝내 오지 않을 수 있다.

  둘째는 방언을 '받으려만 하는 태도'의 문제다. 많은 이들이 "방언을 주시옵소서"라고 한국말로만 수십 번 수백 번을 외친다. 그렇지만 그는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계셔서 우리의 혀를 사용하여 발설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위에서 무언가를 툭 던져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방언은 성령이 강권적으로 혀를 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내가 입술을 벌려 '발설(發說)'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말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영의 언어가 우리 혀에서 나오지 못한다. 

  셋째는 영적인 방해다. 특히 유교 전통이 강한 제사 가문의 후손들이나 이성적 논리가 강한 지식인들은 방언을 하는 것을 '미친 짓'으로 여기는 불신앙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머리에 가득 찬 제사의 영은 끊임없이 의심과 논리를 들이대며 혀의 주권을 내어주지 못하게 막는다. 그럴 때에는 이 결박을 끊어내야 한다. 머리를 붙잡고 있는 제사의 영과 혀를 붙잡고 있는 악한 영들을 안수를 통해 불로 태워서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머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배로부터 생수의 강이 터져 나와서 자신의 혀가 영의 언어를 말하는 사건이다. 이 세 가지 장벽만 허물어지면 방언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영적 호흡이 된다.

 

 

 

7. 방언을 터뜨리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육체적 실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방언은 영적인 사건이지만 동시에 '혀'라는 육체적 기관을 사용하는 일이다.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를 언어치료기관에 보내듯, 방언이 안 터지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영적 언어 치료'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혀를 푸는 연습이다. 혀를 "도로로로로..."라고 말함으로 혀를 떨리게 해보라. 혀가 자유롭게 떨리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이한다. 혀가 굳어 있는 상태에서는 영이 내 혀를 장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할렐루야 루야 루야 루야"를 반복하는 것이다. 혹은 필자가 고안한 것으로 '리커바커(Lika-baka)' 훈련이다. "리커바커 리커바커"를 빠르게 반복하다 보면 혀가 약간 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국어의 리듬을 잃게 된다. 그때 혀가 가고자 하는 대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샤카바야, 알라시야" 같은 의미 없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방언의 마중물이다. 처음에는 내가 억지로 만드는 것 같아 어색할지 모르지만,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운전대가 성령께로 넘어가며 영의 에너지가 실리게 된다.

  이것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처음 배울 때는 비틀거리고 남이 잡아줘야 하지만, 한 번 중심을 잡으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자유롭게 탈 수 있다. 방언도 마찬가지다. 한 번 터진 물꼬는 기도의 분량이 쌓일수록 깊은 강을 이룬다. 주저하지 말고 입을 크게 벌려 선포하라. 당신의 영은 이미 당신의 혀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리커바커"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너머에는 광대한 하늘의 언어가 기다리고 있다.

 

 

 

8. 방언 기도가 성도의 영권 강화에 주는 5가지 유익은 무엇인가?

  내가 새롭게 방언을 말한다면 어떤 유익을 얻게 되는가? 방언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에 엄청난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영적 구조물을 견고하게 건축하여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만든다.

  둘째, 영을 사용하고 강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케 한다. 방언을 통해 영이 강화되면 사물에게 명령하고 귀신을 제압하는 실제적인 영적 권세(Power)가 생기는 것이다.

  셋째, 모든 신령한 은사의 기초가 된다. 방언은 환상, 예언, 치유, 영 분별의 은사로 나아가는 영적인 입구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을 발견하게 한다. 방언을 통역하게 되면 내 영이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는지, 주님이 나를 향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계신지 알게 된다.

  다섯 번째는 주님과의 친밀한 연합이다. 특히 방언 찬양으로 들어가면 영이 주님과 밀착되어 천국 보좌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방언 찬양이 유창한 자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된다.

  방언을 하는 자는 결코 영적으로 굶주리지 않는다. 말로 하는 기도는 내 욕심이 섞여 들어가지만, 내 영의 기도는 100% 하나님의 뜻만을 간구한다. 그러므로 허물어지고 깨어진 자신의 신앙을 건축해준다. 그리고 이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전투방언, 방언찬양, 방언통역으로 나아간다면, 나를 영적인 전사로 무장시켜 준다. 그런데 이렇게더 귀한 선물을 어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거부하겠는가? 방언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마지막 시대에 이기는 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이다.

 

 

 

9. 나오며: 성령의 물결에 몸을 던지라

  오늘 우리는 방언의 정체성과 실전적인 비결을 살펴보았다. 방언은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 당장 당신의 삶에 터져 나와야 할 실질적인 권세다. 성령은 이미 당신 곁에서 당신의 입술을 쓰기 원하신다. 당신의 영은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고 싶어 탄식하고 있다. 이제 육체의 논리를 잠재우고 성령의 물결에 몸을 던져라.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영적인 힘이 필요한 시대다. 이론에 갇힌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실제적인 능력을 소유한 성령의 전사가 되라. 혀를 풀고, 마음을 열고, "리커바커"를 외치며 믿음의 발걸음을 떼라. 당신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는 하늘의 언어가 가문의 저주를 끊고, 질병의 결박을 풀며,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열린 입술을 기다리고 계신다. 성령의 불이 당신의 혀에 임하여,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는 승리자의 노래가 그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

 

 

2026년 2월 6일(금)

정보배 목사

 

 

[설교요약]

본 설교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바탕으로 방언의 본질과 유익을 성경적으로 정의하며, 방언이 단순한 외국어가 아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영이 말하는 하늘의 언어임을 강조합니다. 본 설교는 방언을 신령한 소통의 표적이자 모든 영적 은사의 통로로 규정하고, 잘못된 신학적 오해나 악한 영의 방해를 제거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 누구나 자연스럽게 방언을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도구이며, 말씀 경청과 기도, 그리고 안수를 통해 실질적으로 방언이 열리는 영적 체험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이 텍스트는 학습과 실습을 통해 성도들이 영의 언어를 회복하고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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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좀 더 확장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1. 들어가며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어떤 이는 방언을 단순한 외국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고린도 교회에만 있었던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방언을 귀신 들림의 소리로만 몰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을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가 탄생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성령의 새 시대가 열린 표적이었다(2:1-4).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방언은 성도가 신기한 소리를 내는 재주가 아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의 영과 혀를 사용하여 말하게 하시는 영의 언어다.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의 언어를 배운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사람은 영의 생명을 받는다. 그 영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혀를 사용할 때 나오는 말이 방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단순한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영이 살아났는가, 내 혀가 누구에게 쓰임받고 있는가, 내가 성령께 순종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물론 방언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다.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으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방언을 아직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 영의 언어가 열리는 것은 성경이 보여 주는 실제이며, 방언은 자기 영을 세우고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게 하는 귀한 통로다. 그러므로 방언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잘못된 지식은 성령의 은혜를 막고, 두려움은 혀를 묶으며, 회개하지 않은 죄는 악한 영에게 방해할 근거를 줄 수 있다.

 이 글은 방언을 무조건 체험 중심으로 몰아가려는 글이 아니다. 또한 방언을 외적인 현상만으로 설명하려는 글도 아니다. 성경의 단어와 사건과 영적 원리를 따라 방언을 정밀하게 살피려는 글이다. 방언이 무엇인지, 사도행전의 방언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지, 표적과 은사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방언이 왜 유익한지, 또 성도는 어떻게 자기 혀를 성령께 내어 드려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방언이 무엇이며,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났고, 성도는 어떻게 성령께 혀를 내어 드려 영의 언어를 말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방언은 외국어인가, 영의 언어인가?

 방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단어를 구분해야 한다. 한국어에서 방언은 본래 지방의 언어라는 뜻을 가진다. 제주 방언, 경상도 방언, 전라도 방언이라고 할 때의 방언은 지역 언어, 곧 사투리의 의미다. 그러나 성경에서 오순절 제자들이 말한 방언을 이런 지방말이나 외국어로만 이해하면 본문을 정확히 읽지 못하게 된다. 사도행전 2장에는 서로 다른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헬라어 글로싸이고, 다른 하나는 디알렉토스.

 글로싸는 본래 혀를 뜻하지만, 성경에서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오는 방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반면 디알렉토스는 지방 언어, 민족 언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을 읽을 때에는 제자들이 무엇을 말했는지와 사람들이 무엇으로 들었는지를 구분해야 한다. 제자들이 말한 것은 글로싸였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들은 것은 자기들의 디알렉토스였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방언을 단순한 외국어로 보면, 성령께서 주신 영의 언어를 사람이 배워서 말하는 언어로 낮추게 된다. 외국어는 배울 수 있다. 영어도 배울 수 있고, 헬라어도 배울 수 있고, 히브리어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방언은 배워서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거듭난 자의 영과 혀를 사용하여 말하게 하시는 언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며,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였다(고전 14:2).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또한 사도행전 24절에는 다른 언어(방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다른이라는 말은 헬라어 헤테로스의 계열로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종류 안에서 다른 것을 말하는 알로스와 달리, ‘헤테로스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 곧 방언은 한국어와 영어와 일본어처럼 같은 차원의 인간 언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세상 언어와 질적으로 다른 영의 언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외국어라기보다 영의 언어라고 해야 성경의 흐름에 맞다.

 방언을 영의 언어로 이해하면 많은 문제가 풀린다. 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말의 내용을 모를 수 있는가? 왜 방언 통역이 필요한가? 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 덕을 세운다고 하는가? 왜 방언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가? 그것은 방언이 혼의 언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지만, 영은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다(고전 14:14-15).

고전 14:14-15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러므로 방언의 출발점은 지식이 아니라 영이다. 성도는 방언을 사람의 언어 체계 안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방언은 사람에게 배운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듭난 영에게 열어 주시는 말이다. 이것을 분별할 때 방언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이 사라지고, 성경이 말하는 영의 언어를 바르게 사모할 수 있다.

 

 

3.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오순절 방언 사건은 방언 논쟁의 중심 본문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성령께서 사람 위에 임하실 뿐 아니라, 사람 안의 영을 살리시고 혀를 사용하게 하시는 새 시대의 시작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놀라운 점은 두 방향에서 일어난다. 첫째,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했다. 둘째, 여러 나라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소리를 자기들의 언어로 들었다. 여기서 말한 것들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제자들이 갑자기 15개국 언어를 배워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이 주시는 글로싸를 말했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민족의 디알렉토스로 들리는 은사적 현상이 일어났다(2:6-8).

2:6-8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이 본문을 외국어 방언으로만 설명하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갈릴리 사람들이 갑자기 모든 민족의 언어를 능숙하게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을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한 말씀과도 긴장이 생긴다. 사도행전 2장의 핵심은 제자들이 외국어 학습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말하게 하심을 받았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현장을 듣는 자들에게도 특별한 방식으로 열어 주셨다.

 오순절 방언 사건은 단순한 언어 기적이 아니라, 구원 경륜의 전환점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특정 사람 위에 임하여 사역하게 하셨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거듭난 영이 성령의 생명을 받아 말하기 시작한다. 이때 방언은 그 새 생명의 표적처럼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영을 살리셨으니, 그 영이 말을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도 대조된다. 바벨에서 사람들은 교만으로 흩어졌고 언어가 혼잡해졌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임하시자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한 언어를 무너뜨리셨지만, 성령 안에서는 영의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방언은 혼잡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간 영의 말이다.

 또한 오순절 방언은 교회의 출생과 연결된다. 교회는 사람의 조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 시작되었다. 제자들은 설교하기 전에 성령을 받았고, 사역하기 전에 방언을 말했다. 곧 방언은 교회가 성령의 교회라는 표지였다. 오늘날 성도도 이 사건을 과거의 기념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순절의 원리는 지금도 살아 있다. 성령께서 영을 살리시고, 그 영이 성령 안에서 말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4. 방언은 표적인가, 은사인가?

 방언을 이해할 때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방언은 표적이기도 하고 은사이기도 하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 성령세례의 표적으로 나타나는 방언이 있고,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신령한 은사로서의 각종 방언이 있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기능과 범위가 다르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거듭난 성도에게 성령의 생명이 임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말씀하실 때 새 방언을 말씀하셨다(16:17). 이 표적은 성도가 구원받기 위해 쌓아야 할 공로가 아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날 수 있는 영적 표지다. 아기가 태어나면 말을 배워야 하듯, 성령으로 난 영도 영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열려야 한다.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을 말한다. 이것은 일반 재능이 아니다. 노래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고, 가르침을 잘하는 일반 은사와 다르다. 신령한 은사는 성령께서 성도의 영 안에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것이다(고전 12:8-11).

고전 12:8-1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방언을 하나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 처음 영이 열릴 때 나타나는 표적적 방언이 있고, 하나님께서 교회와 사역을 위해 특별히 쓰시는 은사적 방언이 있다. 어떤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말로 쓰이고, 어떤 방언은 통역되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특별한 역사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출처가 성령인지, 쓰임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질서와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방언과 성령의 관계다.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분은 어떤 독립된 능력이나 무명의 영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혜사 성령으로 성도 안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과 성령의 역사는 서로 분리된 뜻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영의 언어로 표현되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방언을 높이되 방언만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방언은 시작일 수 있으나 끝은 아니다. 방언은 영을 세우는 통로이지만, 회개와 말씀과 순종이 없으면 바르게 자라지 못한다. 성령의 은사는 늘 성령의 거룩하심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방언을 받은 성도는 더 회개해야 하고, 더 정결해야 하며,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이것이 표적과 은사를 바르게 붙드는 길이다.

 

 

5. 사도행전의 방언 사례는 무엇을 증언하는가?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다. 그 안에서 방언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와 이방인과 에베소까지 확장된다. 이것은 방언이 특정 교회의 특수 현상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성령께서 복음의 경계를 넓히실 때, 방언은 성령세례의 실제를 드러내는 표지로 나타났다.

 첫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방언이 나타났다. 이것은 유대인 가운데 시작된 교회의 출생 사건이었다.

둘째,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의 전도 후 사도들이 안수하자 성령이 임했다. 본문은 방언이라는 단어를 직접 말하지 않지만, 시몬이 눈으로 볼 만한 성령의 나타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셋째, 고넬료 가정에서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중에 성령이 임했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10:44-46).

10:44-46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고넬료 가정의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유대인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큰 장벽을 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을 부어 주셨고, 방언을 통해 그들도 같은 성령의 선물을 받았음을 드러내셨다. 베드로는 나중에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이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11:15-17).

11:15-17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넷째,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받았고, 훗날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고백했다. 다섯째,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19:6). 이 흐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가 이방 세계로 확장되는 타임라인을 보여 준다. 방언은 그 확장 과정에서 성령의 실제를 증언하는 표지로 나타났다.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 사례들은 방언이 고린도 교회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한다. 고린도전서가 방언의 질서를 다룬 것은 방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방언을 바르게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은사가 남용된다고 해서 그 은사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다. 병 고침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병 고침의 은사를 부정할 수 없고, 예언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예언의 은사를 없앨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도행전의 방언 사례는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확장을 함께 보여 준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에게, 로마 백부장 가정의 이방인에게,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든 민족을 부르시는 경륜이다. 방언은 그 경륜 속에서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말하고 높이는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과거의 특이한 사건을 모아 놓은 기록이 아니라, 성령의 시대가 어떻게 열리고 확장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지도다. 성도는 그 지도를 따라 오늘도 말씀과 기도와 순종 가운데 성령의 실제를 구해야 한다.

 

 

6. 방언에는 어떤 종류와 유익이 있는가?

 방언은 한 가지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와 영적 쓰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 어린아이처럼 짧고 단순한 소리로 시작한다. 이것을 아기 방언처럼 설명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언어처럼 길어지고, 흐름이 생기고, 기도와 찬양과 대적과 축복의 기능으로 확장될 수 있다. 방언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이 사용되면서 자라갈 수 있다.

 방언은 대상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방언, 사람에게 들리게 되는 방언, 영적 대적을 향해 선포되는 방언, 축복을 흘려보내는 방언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방법에 따라서는 기도 방언, 찬양 방언, 대화 방언, 대적 방언, 축복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방언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방언이 단순히 의미 없는 반복음이 아니라, 영적 목적에 따라 쓰임받는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방언의 첫 번째 유익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건축한다는 뜻을 가진다. 영이 약해지고, 상처받고, 흔들릴 때 방언은 자기 영을 세우는 통로가 된다. 사람이 육의 양식을 먹어 몸을 세우듯, 영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말할 때 힘을 얻는다(고전 14:4).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두 번째 유익은 영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방언은 혼의 언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다. 방언을 계속 말하다 보면 성도는 자기 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성령의 감동이 어떻게 흘러오는지, 혀가 어떻게 영의 도구로 쓰임받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것은 영적 사역의 기초가 된다. 축사, 예언, 영분별,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도 결국 영을 사용해야 나타나는 은사들이다. 방언은 영적 감각을 깨우고 훈련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세 번째 유익은 다른 은사들이 열리는 문이 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했을 때 처음 나타난 표지가 방언이었다. 에베소에서는 방언과 예언이 함께 나타났다. 방언은 영의 문을 열어 주며, 그 후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영분별, 병 고침, 능력 행함의 은사로 확장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은 신령한 은사들의 기초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유익은 방언 통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내 영의 소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방언 자체는 마음이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통역이 주어지면 영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감동을 주시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고전 14:13).

고전 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다섯 번째 유익은 방언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도 귀하지만, 영으로 부르는 찬송은 또 다른 깊이를 가진다. 바울은 영으로 찬송하고 마음으로 찬송하겠다고 말했다. 방언 찬양은 내 영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한다. 그것은 단지 음률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과 경배를 올려 드리는 영의 움직임이다.

 이 유익들을 종합하면 방언은 성도의 영적 성장과 깊이 관련된다. 방언은 자기 영을 세우고, 영을 사용하게 하며, 다른 은사들을 여는 통로가 되고, 통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찬양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작은 은사가 아니다. 방언은 성도가 성령 안에서 자라가고, 회개와 순종으로 새 예루살렘 성을 준비하도록 돕는 중요한 영적 도구다.

 

 

7. 왜 어떤 성도는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가?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귀한 은혜이지만, 모든 성도가 곧바로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잘못된 지식이다. 어떤 사람은 방언이 외국어일 뿐이라고 배웠고, 어떤 사람은 방언이 고린도 교회에만 있었던 일시적 현상이라고 배웠다. 또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면 귀신에게 속는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이런 가르침을 오래 들으면 마음이 닫히고, 영도 눌린다.

 성령의 은혜를 막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가 잘못된 신학적 선입견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성경대로 받지 않고, 교단의 관습이나 사람의 해석으로 제한하면 성령의 실제를 경험하기 어렵다. 물론 분별은 필요하다. 아무 소리나 성령의 방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짜가 있다는 이유로 진짜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귀신이 흉내 내는 일이 있다고 해서 성령이 주시는 방언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이유는 실제로 말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성도들이 방언을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정작 입을 열어 영이 말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말로 계속 방언을 주세요라고만 말하면서 자기 혼의 언어를 내려놓지 않는다. 방언은 생각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실 때 혀가 쓰임받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기다리기만 하면 언어가 밖으로 나오기 어렵다.

 셋째 이유는 귀신의 방해. 이것은 동탄명성교회의 귀신론적 회개 사역과 깊이 연결된다. 악한 영은 사람의 혀와 목과 생각을 붙잡아 영의 언어가 나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특히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우상숭배, 무당 계열, 음란, 저주, 거짓, 분노, 교만의 영들이 혀를 장악하면 방언이 막히거나 왜곡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사모하는 성도는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악한 영이 붙잡고 있는 근거를 제거하는 길이다.

 성령의 방언과 귀신의 혀 장악은 구별되어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은 하나님께 향하고, 영을 세우며, 거룩한 방향으로 이끈다. 반면 악한 영이 혀를 붙잡으면 소름 끼치는 느낌, 거북한 발성, 더러운 말, 저주성 표현, 지나치게 지저분한 몸의 반응, 혀와 목의 비정상적 장악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방언 자체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방언과 귀신의 모방을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두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귀신이 쫓겨나야 새 방언이 더 깨끗하게 나올 수 있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악한 영이 근거를 붙잡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음란, 거짓, 우상숭배, 부모 미움, 조상 죄, 교만, 불순종을 회개함으로 혀와 목과 영의 통로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방언을 못 하는 이유를 알면 길도 보인다. 잘못 배운 것은 성경으로 교정해야 한다. 말해 보지 않은 것은 믿음으로 성령께 혀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귀신의 방해가 있다면 회개와 축사로 그 근거를 제거해야 한다. 방언은 억지로 꾸며 내는 소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살아난 영을 통해 말하게 하시는 언어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움보다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의심보다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

 

 

8. 성도는 어떻게 방언을 말하게 되는가?

 방언을 말하는 원리는 혀의 주권과 관련된다.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말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도구다. 평소에는 혼이 혀를 사용하여 한국어, 영어, 자기 나라의 언어를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혀를 사용하시면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말이 나오고, 내 영이 성령과 하나 되어 혀를 사용하면 방언이 나온다. 반대로 귀신이 혀를 붙잡으면 더러운 말이나 거짓 방언도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 혀를 누가 사용하고 있는가?

 성경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한다. 성도 안에 들어오신 성령은 성도의 영과 하나 되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방언은 내 영과 성령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 내 혼은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내 영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한다. 이것이 방언이다(고전 6:17).

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방언을 말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영적인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방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방언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영의 언어다. 그러므로 방언의 출발점은 믿음이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믿음 위에서 성령의 역사가 열린다.

 둘째, 회개해야 한다. 혀와 목과 생각과 영을 더럽힌 죄를 회개해야 한다. 우상숭배와 미신, 음란과 거짓, 부모와 형제에 대한 미움, 분노와 저주, 교만과 불신앙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단순한 심리적 정리가 아니다. 회개는 악한 영이 붙잡고 있던 법적 근거를 제거하는 영적 행위다. 죄의 근거가 제거될수록 성령께서 혀를 사용하시기 쉬워지고, 방언도 더 깨끗해진다.

 셋째,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고넬료 가정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임했고 방언을 말했다. 말씀은 믿음을 일으킨다. 잘못된 이론이 방언을 막았다면, 바른 말씀은 방언을 열어 준다. 성도는 방언에 대한 두려움을 말씀으로 씻어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글로싸, 성령세례의 표적, 영의 기도, 자기 덕을 세우는 유익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넷째, 기도해야 한다. 오순절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다. 기도는 성령께 자신을 여는 통로다. 방언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술이 아니므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입을 닫고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도 가운데 믿음이 생기면, 자기 혼의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영이 말하도록 혀를 내어 드려야 한다.

 다섯째, 안수와 성령의 역사도 방언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안수하자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 안수는 사람의 능력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성령의 불과 능력이 흘러가도록 돕는 통로다. 다만 안수를 받을 때에도 회개와 믿음과 분별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인지, 혼적 흥분인지, 악한 영의 장악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자기 혀를 성령께 내어 드려야 한다. 방언은 성령께서 강제로 입을 움직이는 로봇 같은 현상이 아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한국말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영의 언어를 동시에 말하기는 어렵다. 혼의 언어를 멈추고, 마음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내 영과 혀를 사용하시도록 허용해야 한다. 처음에는 짧고 어설퍼 보여도 괜찮다. 아기가 처음 말을 배울 때처럼 영의 언어도 사용하면서 자라갈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체험 자체가 아니다. 방언의 목적은 성령 안에서 영을 세우고,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더 깊은 회개와 순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방언을 받은 사람은 더 거룩해야 한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방언 찬양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은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며 두루마기를 빠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의 언어는 결국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게 하는 성령의 선물이다.

 

 

9. 나오며

 우리는 방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도가 말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방언은 단순한 외국어도 아니고, 고린도 교회에만 있었던 일시적 현상도 아니며, 귀신의 소리로만 몰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의 영과 혀를 사용하여 말하게 하시는 영의 언어다. 사도행전 2장의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글로싸를 말했고, 듣는 자들은 자기들의 디알렉토스로 들었다. 이 차이를 분별해야 방언의 본질을 바르게 붙들 수 있다.

 성도는 방언을 표적과 은사라는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성령의 생명이 임한 영이 말하기 시작하는 사건과 연결된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로서, 방언 통역과 함께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무질서하게 사용해서도 안 되고, 잘못된 두려움 때문에 거부해서도 안 된다. 성도는 성경이 말하는 기준 안에서 방언을 사모하고 분별해야 한다.

 또한 성도는 방언의 유익을 실제로 알아야 한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영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게 하며, 다른 신령한 은사들이 열리는 통로가 되고, 통역을 통해 내 영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방언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해지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을 세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은 성도는 더 깊은 회개와 더 큰 순종과 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방언을 막는 원인도 알아야 한다. 잘못된 가르침은 믿음을 막고, 말해 보지 않는 태도는 혀를 묶으며, 회개하지 않은 죄는 귀신에게 방해할 근거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으로 생각을 교정해야 하고, 믿음으로 혀를 성령께 내어 드려야 하며, 회개로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해야 한다. 성령의 방언과 귀신의 혀 장악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거룩한 방언은 하나님께 향하고 영을 세우지만, 악한 영의 소리는 더럽고 거북하며 저주와 혼란을 가져온다.

 방언은 천국을 준비하는 삶과도 연결되어야 한다. 성도는 방언을 통해 자기 영을 세우는 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져야 한다. 방언 찬양은 영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귀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자는 방언 체험만이 아니라 회개와 정결을 함께 가져야 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성 안에 들어갈 권세를 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22:14).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방언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방언만으로 자신을 높여서도 안 된다.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의 언어이며, 성도의 영을 세우는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은 한 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붙들어 회개하고,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주어진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입은 저주와 거짓과 음란의 말에서 떠나야 하고, 찬양과 기도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영의 언어로 자기 영을 세우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져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도록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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