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방언은 외국어인가 아니면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인가? 요즘 들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고린도현상이자 귀신이 하는 장난이며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들이 성경에 있다고 한다. 과연 성경에 그러한 근거가 있는가? 반대로 그렇다면 방언이 영의 언어이자 기도라는 근거는 있는가? 이제 방언논란을 종식시켜줄 만한 말씀이 여기에 있다. 한 번 시간을 내서 꼭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1. 들어가며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성령세계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또한 그들 위에 부어짐으로 말아맘아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들(방언들)'이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는가? 방언의 은사는 배워서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사인가? 어떤 이들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던 성령의 은사는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날 그들에게 터져나온 방언의 은사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2. 사람 위에 부어진 최초의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갑자기 성령세례가 부어졌다. 그리러자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선물로서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언어들"이라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기들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이겠지만, 이미 다른 지방에서 말하여지고 있던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듣지 못했던 새롭고 신비한 언어였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날 120명의 성도들이 말하게 되었던 "언어(글로싸)"는 성경에서는 "혀"(막 7:33, 눅 1:64, 행 2:3, 롬 14:11, 고전 14:9) 아니면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다. 단 한 번 "언어"(행2:11)라고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단어에 대한 사도행전2:4의 번역은 기존에는 "방언"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언어"라는 단어로 바뀌었는데, 이렇게 바뀐 곳은 오직 단 두 곳으로서, 행2:4과 행2:11에서만 "방언" 대신에 "언어"라고 바꾸어놓았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곳에서 이것을 표적이나 은사의 종류로서 번역할 때에는 항상 "방언"이라고 번역하였다(막 16:17, 행 10:46,19, 고전 12:10, 13:1,8, 14:4,6,13,14,18,22,26,27,39). 그러므로 사람 위에 부어진 성령의 최초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다고 우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 방언은 어떤 은사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이란 대체 어떤 은사인 것이며, 그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 관하여는 대부분 2가지 견해로 서로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간단히 말해서 "외국어"라는 것이다. 자기나라의 말이 아니라 외국의 말이어서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또 하나는 그 말은 다른 나라에서도 말해지는 "외국어"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없는 그래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서 "영의 말"(고전 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라는 것이다
먼저, 행 2:4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다른 언어들"을 외국어라고 보는 입장부터 살펴보자. 이쪽 계열은 보통 장로교쪽 계열이 많이 주장하는 편이다. 물론 장로교에 속한 모든 교단들 모두가 다 방언을 외국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지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외국어"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그러나 또 한 쪽 계열이 있다. 이쪽에서는 "방언"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이쪽계열에는 오순절교단에 속하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주류를 이룬다. 이들 중에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방언을 말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외국어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가?
우선, 행2:4에 나오는 "언어들(글로싸이스)을 외국어들로 보는 분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들은 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최초의 성령세례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을 정리하면 딱 2가지다.
첫째,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세례로서 말하게 되었던 "방언"은 당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나라의 언어(디아레크토스=지방어)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외국어"라는 것이다. 당시 해외파(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총 15개국에서 왔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서 방언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둘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이방신을 따라는 고린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고린도현상으로서, 고린도가 해양도시로서 이방신을 많이 섬기는 곳이었기에, 고린도성도들은 자기기 딴에는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신들이 그들을 속이는 속임수의 의미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고린도의 특수현상을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잘못 번역한데서 오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분은 우리 통합측 교단의 노OO목사님이시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분의 책("방언을 검증하자")을 보니, 헬라어성경을 얼마나 왜곡되이 번역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신학을 연구하는 자로서 헬라어를 오랫동안 공부해왔기 때문이다.
4.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OO목사님은 왜 고전 14장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분은 고전 14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특히 3가지 말씀은 잘못된 번역으로서 사람들이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착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분의 주장(번역)과 실제 헬라어성경말씀은 어떤 것인지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하자.
첫째, 그분은 고전 14:2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고전 14:2 왜냐하면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가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고전 14:2의 말씀에 대해 노OO목사님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말한다고 한디만 알아듣는 자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OO목사님의 번역은 크게 잘못되었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거나 말했던 것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발설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14:2의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잘못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말이 아니라, 왜 방언이 신령한 은사인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 그분은 고전 14:14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본문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고전 14:14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기 대문이다. 그런데(그럴지라도) 나의 마음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열매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장차]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고전14:5)" 그렇다. 바울은 말한다.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자가 통역하기를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고전 14:13), 그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마음으로는 아무런 열매가 맺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방언은 통역을 해서 마음으로도 열매를 맺도록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분은 고전 14:18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외국어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노OO목사님은 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은 자신이 방언기도를 일반성도들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도 잘못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 14:18 내가 너희의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계속해서] 더 발설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바울이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종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많은 것 곧 분량이 많은 것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여기서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다면, 그는 자신이 "다른(알라이스) 방언들(글로싸이스)"을 더 많이 말한다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한 것에 대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외국어로서, 성경이 쓰려질 때까지만 존속하다가 사라진 특별한 은사였다는 노OO 목사님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근거를 성경에서 가져오려고 했으나, 오히려 성령을 더 왜곡되이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결코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번역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근거로 책을 내고 세미나를 개최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호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지 말아야 행동으로 보인다.
5.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말이자 영의 기도인지를 증거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말 행 2:4에서 최초의 방언이 과연 사람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지 그 근거들을 살펴보록 하자. 참고로, 자신은 방언을 외국어로 알고 있고, 성경기록이 종료된 이후 더이상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이래야 저래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천국에 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영적인 측면에서 매우 큰 유익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 것을 증거하는 성경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 10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방언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그것을 "지방말"(디아레크토스)"이 아니라, "방언(글로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그것도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 16:17).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표적들이 따라올 것인데 그것을 중의 하나가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마가복음 16:9~20의 말씀이 원래 마가복음에 있었던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말씀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렇게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 손에 이러한 말씀에 들려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새 방언"을 말씀하신다고 했는데, "새로운 지방말(외국어)"을 따르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외국어는 가서 배우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에 포함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새[로운]"이라는 말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노스"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언어를 믿는 자들에게 표적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질적으로 다른 언어를 두고, 자신은 현재 모르고 있지지만 당시 다른 지방에서 쓰고 있는 단어를 가리킬 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처음 방언(글로싸)이 나타났던 마가다박방에서 그때 함께 모여있던 120명의 성도들이 사용하던 방언은 이 세상에서 쓰는 언어가 아니라 "다른(헤테라이스) 언어들(글로싸이스)"이었기 때문이다(행2:4). 그렇다. 최초의 방언은 단순한 "방언(글로싸)"가 아니었다. "다른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헤테로스, 원형)"이라는 단어다. 헬라어에서 "다른"이라는 단어가 총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알로스(another)"가 있고, 또 하나는 "헤테로스(other)"가 있다. "알로스"는 같은 것들이 많은 중에서 조금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요, "헤테로스"는 질적으로 다르며 종류가 다를 때에 사용하는 "다른"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이라는 단어가 바로 "알로스"다. 이는 보혜사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제 영으로써 다시 오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 2:4에 나오는 "방언"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며, 종류가 전혀 다른 방언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언어들로서 서로 연관성이 있는 외국이였다면 "알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쓰지 않았던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가 출현하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사도바울은 방언이란 거듭난 성도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로서, 인간의 혼이 말하는 언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고전 14:2). 그렇다. 이것은 이 세상 다른 나라에 가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말이 아니다. 특히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심지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 영이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결코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외국어일리가 전혀 없다.
넷째,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행 2:4,10:44~46,11:15~18). 오순절성령강림사건부터 성령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일하신다. 하나는 그 사람의 속으로 들어오시어 거주하신다. 그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요 14:16~17).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성령은 사람 위에도 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성령세례" 혹은 "처음으로 받는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 성령의 내주를 경험한 자들에게, 성령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를 잘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분이 가지고 온 것은 생명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런데 그 생명은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바로 자신의 영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울음과도 같은 소리다. 그것이 곧 방언인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진 것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 곧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질 때 대부분 방언(글로싸)를 말했던 것이다.
다섯째, 바울을 이것을 '영의 기도'라고 바울이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14:14~15). 바울은 방언을 영이 비밀을 말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말이라고 했다(고전 14:2).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방언을 영의 드리는 기도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 14:14).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는 영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 14:15).
여섯째, 방언을 들었던 자들 중에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자들은 갈릴리 출신의 120명의 성도들을 향해 "새 술에 취하였다" 곧 "미쳤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행 14:13, 고전 14:23). 당시 오순절날 방언소리를 듣고 찾아온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소동하였다. 그리고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다 놀라 당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이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그 때 시각이 오전 9시였으니, 성령의 역사를 믿지 못한느 자들은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했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토종 언어로 그들이 말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아침부터 술에 취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또다른 증거가 고전 14장에 나온다. 만약 교회가 다 함께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게 된다면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을 해야 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고 예언을 하라고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외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 혹은 "미쳤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식해졌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순절날 유대인들의 방언과 가이사랴의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경험했던 방언(글로싸)은 둘다 서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행 10:44~46, 11:15~17).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의 가정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들은 말씀을 듣다가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방언(글로싸)을 말하였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방언찬양)했기 때문이다(행10:46). 그러자 이것을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한 베드로는 자기들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 성령세례가 있었던 것처럼 고넬료 가정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의 선물에는 동일하게 "방언(글로싸)"이 있었다. 그러므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과 고넬료가정에서 말했던 방언은 동일한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넬료가정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누가 거기에 있었다고, 그들이 외국어로 말했겠는가? 아니다. 그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언어를 말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방언이다.
여덟째, 바울은 이것을 "영이 드리는 기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 14:14). 바울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영의 기도라고 말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방언의 내용은 자신의 기도와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자신의 기도는 약 10%정도이며, 약 90%정도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책망이나 권면이나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은 영의 하는 말임과 동시에 영이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외국어를 사용해 드리는 기도를 가리켜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홉째, 바울은 통역을 할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기 때문이다(고전14:13).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 중의 하나로서 방언의 은사를 언급했다. 그런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어 자신의 마음으로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공중예배 즉 교회에서 예배 중에 그것을 말해야 한다면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가? 그것이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라면 그 나라에 가거나 그 나라 사람에게서 배우면 된다. 하지만 바울은 통역하기를 배우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14:13). 이는 방언통역도 초자연적이며 신령한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도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방언통역도 동시에 초자연적이고도 신령한 은사인 것이다.
열째,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워준다(복원한다, 복구한다)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4). 바울은 방언은 뜻도 내용도 모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전14:18).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14:39). 왜냐하면 방언은 자기를 세우주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전14:4). 왜 그런가? 사실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지만(건축하지만), 방언은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자신의 진정한 소원, 영이 아뢰는 진정한 소원이 들어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진정 권면하고 책망하고 인도하시는 음성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그의 영에 매우 유익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이며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자는 방언통역을 해보아야 한다. 만약 방언통역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기도를 계속 드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영의 기도가 먼저 선행되고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기도도 점차로 영의 기도와 일치를 이루게 되는 날이 오는데,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 몇 달, 몇 년, 몇 십년 뒤에 실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라시는 바람직한 모습이 들어있고, 자신의 영의 소원이 들어있기에, 자신을 세워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운다"는 말의 헬라어원문은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는 "짓다, 건축한다"는 뜻 외에도 "다시 짓, 재건축하다"라는 뜻도 있으며, "복구하다. 복원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너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시 복원시켜주는 것이 곧 방언기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기도가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방언,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사임에 틀림없다. 구약시대에는 단 한 명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이것의 귀중함을 증명된다. 사실 고전12:8~10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오직 2가지 은사만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바로 방언이요 방언통역이다. 그래서인지 최초의 성령세례로 나타났던 성령의 은사는 다름 아닌 "방언"이었다. 방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 사도행전으로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신령한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 그리고 방언통역에 관하여 고전14장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고전14장의 말씀을 통하여, 방언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는 것까지 알 수 있다. 그렇다. 방언은 고린도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헛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아 행하는 악령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일이다. 그것은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듭난 영이 성령에 의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비밀을 말하고 또한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도 말했다. "다 방언들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 그렇다. 성도들 중에는 방언을 못하는 자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의 기준을 방언을 가지고 말해서도 아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다느니, 외국어라느니 말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방언으로 말함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영적인 유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2020년 06월 19일(금)
정보배목사
[참고] 고전14:2, 14:14, 14;18의 헬라어원문과 노OO목사님의 사역(개인적인 직역)








[설교요약]
이 설교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방언의 정체성을 학술적이고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방언이 기존의 습득된 외국어가 아닌 영의 언어임을 강조합니다. 이 설교는 헬라어 원문을 근거로 삼아 사도행전의 '디알레크토스(지방어)'와 성경 전반에 쓰인 '글로싸(방언/혀)'의 차이를 설명하며, 방언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이자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 비밀이라고 정의합니다. 특히 일부 교단에서 방언을 단순한 외국어나 귀신의 속임수로 치부하는 견해를 반박하며, 방언이야말로 신자가 영적 세계로 진입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결정적인 통로이자 기초적인 표적임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텍스트는 성도들이 방언을 통해 영적 유익을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더욱 힘 있게 증거할 수 있도록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돕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1. 들어가며: 성경 해석의 난제를 넘어 진리의 심장으로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인간의 지각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 거대한 산맥들과 마주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칠십 이레'가 그러하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이나 사도행전의 '방언'이 그 대표적인 난제이다. 특히 방언은 현대 교회 안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이자, 교단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이 은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오순절주의와 장로교가 신앙의 결을 달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본질은 분명하다. 방언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토록 방언의 정체성에 천착하는 이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이기는 자'로 살아가기 위한 기초 체력이자, 초자연적인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게 하시고, 신약학 박사과정을 통해 헬라어 원문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이는 오늘날 범람하는 잘못된 신학적 가르침을 바로잡고, 성도들에게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성경의 진의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이제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헬라어 원어가 증언하는 방언의 실체를 통해 우리 영혼이 누려야 할 풍성한 유익이 무엇인지 함께 탐구해보고자 한다.
2. 왜 방언은 신약 성도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표적'인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곳에도 성령의 역사는 충만했다.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쳤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예언을 쏟아냈고 환상을 보았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도 구약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구약의 그 어떤 위대한 성자도 방언을 말하거나 방언 통역을 했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언은 신약 시대,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Indwelling)하기 시작한 때부터 허락된 고유한 은사라는 점이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했던 사람 위에 일시적으로 머물렀지만(Upon),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모든 사람의 영 속에 성령이 직접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런데 방언이란 바로 이 거듭난 영이 태동하면서 터져 나오는 '영의 첫 비명'이자 하늘의 언어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죽었던 영이 살아났을 때, 그 영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보여주는 가장 원초적인 표적이자, 구약의 선지자들도 누리지 못했던 신약 성도만의 특별한 특권이다. 이 기초가 흔들리면 다른 초자연적 은사들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게 된다. 방언은 성령 세례를 받은 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영적 실재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3. 헬라어 원어가 말하는 '글로사(Glossa)'와 '디아레크토스(Dialektos)'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방언을 단순한 외국어(Foreign Language)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있다. 그것은 대개 성경 번역의 모호함에서 비롯된이 아닌가 싶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는 구절에서 '언어'로 번역된 헬라어는 '글로싸(Glossa)'이다. 이는 해부학적인 '혀(tongue)'를 뜻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지 않은 '영의 말'을 의미한다.
반면, 오순절 현장을 목격한 이들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native language)으로 듣게 됨이 어찌 됨이냐"라고 했을 때의 '방언'은 헬라어로 '디아레크토스(Dialektos)'다. 여기서 '디아레크토스'는 지리적 구분에 따른 '지방어'나 '사투리', 즉 인간의 학습된 외국어를 뜻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글로싸'와 '디아레크토스'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했다.
제자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글로싸(영의 언어)'를 발설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는 청중들의 귀에는 각자의 '디아레크토스(외국어)'로 들리는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즉, 말하는 자는 영의 비밀을 말하는 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듣는 자들의 귀를 여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혼동하여 방언 자체를 인간의 지방어(native language)로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언어학적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다. 방언은 인간의 지성이 배운 언어가 아니라, 성령이 혀를 장악하여 내보내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이 약속하신 '새 방언'에서 '새(Kainos)'라는 단어에 담긴 비밀은 무엇인가?
방언을 부정하는 이들은 마가복음 16장 17절의 예수님 약속을 무시하거나 후대의 가감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서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노스(Kainos)'는 시간적인 순서를 뜻하는 '네오스(Neos)'와는 질적으로 다른 단어다.
다시 말해, '네오스'가 어제 산 옷과 오늘 산 옷처럼 시간상으로 새 것임을 뜻한다면, '카이노스'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출현을 가리킨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언이 단순히 배우지 않은 외국어였다면, 그것은 기존에 있던 언어를 말하는 것이기에 '네오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카이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는 방언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존 언어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영적 차원의 언어임을 시사한다. 학습으로 도달할 수 없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는 새로운 본질의 소리가 성령을 통해 터져 나올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이 '새 방언'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권세와 함께 주어지는 표적이다. 따라서 방언을 단순한 외국어로 가두어버리는 신학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초자연적인 '카이노스'의 능력을 거부하는 안타까운 행위임에 틀림없다.
5.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 소동'은 '말하는 자'의 기적인가, '듣는 자'의 기적인가?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사건을 두고 "제자들이 15개국의 언어를 공부도 안 하고 완벽하게 구사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모순이 많다. 120명의 사람이 각기 다른 15개국 이상의 언어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면, 그곳은 소통의 현장이 아니라 거대한 소음의 현장으로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당시 120명의 성도들의 방언을 자기나라의 언어로 들었던 청중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디아레크토스)으로 듣게 됨이 어찌 됨이냐." 방점은 '말하기'보다 '듣기'에 찍혀 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헤테로스 글로사(질적으로 다른 영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듣는 이들의 귀에 이 소리가 기적적으로 번역되어 자기들의 언어로 들리는 '청취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120명의 성도들이 행했던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언어인 방언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자기들의 언어로 알아듣는 은사적인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천국에서 우리가 각자 자신의 모국어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서로가 완벽하게 알아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초자연적 상태가 그날 지상에서 잠시 재현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열방으로 퍼져 나가야 했기에, 그 시발점에서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는 강력한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방언이 외국어라는 증거가 아니라, 영의 언어가 발설될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를 열으시어 자기의 언어로 듣게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구속사적 드라마인 것이다.
6. 고린도전서 14장을 '외국어'로 치부하려는 이들의 번역 오류는 무엇인가?
일부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방언(글로싸)의 폐해를 근거로, 이것이 진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고린도 지역의 이교도적 광란'이나 '잘못된 외국어 사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고전 14장 2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라는 구절을 번역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께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식의 인용문과 같은 형식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어국문학적 문장 구조로나 헬라어 원문상으로나 명백한 오역이자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지금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방언의 본질을 '서술'하고 있다. 원문은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 발설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바울이 왜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겠는가? 외국어라면 학원을 다니거나 사전을 찾아보라고 권면했을 것이다. 영적 통역은 기도를 통해서만,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어떻게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영어를 아는 사람 앞에서 영어를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방언이 오직 하나님만 알아들으시는 비밀인 이유는, 그것이 이 세상 언어의 범주를 벗어난 '하늘의 암호'이기 때문이다. 학문적 독선으로 성경의 명확한 서술을 비트는 행위는 성도들의 영적 눈을 가리는 치명적인 범죄와 같다.
7. '외국어'라고 가르치는 신학이 성도들의 영적 권세를 어떻게 약화시키는가?
신학은 단순히 지적인 유희가 아니다. 어떤 신학을 하느냐에 따라 성도가 누리는 영적 권세의 분량이 달라진다. 방언을 그저 사도 시대의 외국어 전파 도구로 한정 짓는 '은사 중지론적 신학'은 성도들의 영적 무기고를 그냥 폐쇄하는 것과 같다. 방언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영권(靈權)의 고지 점령은 요원해지는데도 말이다.
방언은 우리 안의 성령께서 내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여 올리는 기도다(고전 14:14). 이 기도가 터지지 않으면 성도는 자기 지식의 한계 안에서만 기도하게 된다. "주십시오, 해주십시오"라는 수준 낮은 기복 신학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이 영의 언어임을 확신하고 기도할 때, 기도는 내 이성을 뚫고 하나님의 보좌로 직행하는 기도이다.
악한 영들은 우리가 자국어(예, 한국말)로 기도할 때 우리의 약점을 파악하고 방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영의 비밀(Mystery)을 말하기 시작하면 사탄은 당황한다. 고로 방언은 사탄이 도청할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과만 통화가 되는 영적 무전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외국어로 가두어버리려는 신학은 이 강력한 보안 통신망을 스스로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만다. 우리는 정확한 성경 원문을 통해 방언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귀신을 제압하고 질병을 치유하며 시대를 분별하는 참된 영적 권세자가 될 수 있다.
8. 방언이 '영의 기도'임을 확신할 때, 우리 신앙의 지평은 어떻게 확장되는가?
고로 방언이란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비밀한 대화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기도는 노동이 아니라 '황홀한 교제'가 되기 때문이다. 기도가 지루한 이유는 내 지식의 밑천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으로 기도하면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한 시간을 기도해도 피곤치도 않고, 오히려 영의 에너지가 육체로 흘러 들어와 생동감을 부여한다.
또한 방언은 천사들을 움직이는 신호탄이 된다. 사적인 욕심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영의 기도는 즉각적으로 천군 천사의 수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으로 비밀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의 내용에 따라 하늘의 군대를 보내시고 우리의 앞길을 평탄케 만드신다. 이는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신비한 세계다.
더 나아가 방언은 '방언 통역'과 '예언'의 기초가 된다(고전 14장). 영의 언어를 발설하는 근육이 단련된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영의 감각이 예민해지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도 놓치지 않게 된다. 방언은 신앙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보화들을 꺼내 쓰는 마스터키와 같은 것이다. 이 열쇠를 쥐고 영적 세계의 깊은 곳으로 항해를 시작해보라. 우리의 신앙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파워를 갖게 될 것이다.
9. 나오며: 영의 언어로 하늘 문을 열라
이번 시간에 우리는 방언의 정체성을 둘러싼 신학적 혼란을 뚫고 성경의 참뜻을 살펴보았다. 방언은 2천 년 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골동품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 영을 소생시키고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생명의 탯줄인 것이다.
고로 사람의 지혜로 성령의 은사를 제한하지 말라. 헬라어 '글로싸'가 증언하듯,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 올리는 지고한 찬양이자 강력한 기도인 것이다. 방언이 외국어라는 편협한 틀을 깨버리고, 내 안의 성령께서 마음껏 노래하시도록 우리의 혀와 마음을 내어드려라. 그리하여 내 영의 언어가 혀를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올 때, 우리를 억누르던 가문의 저주와 질병의 결박도 점차적으로 녹아내릴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영적인 힘이 필요한 시대다. 이론에 갇힌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실제적인 능력을 소유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방언이라는 문을 열고 영적 세계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영과 깊은 비밀을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 하늘의 언어로 무장하여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2020년 6월 12일(금)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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