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롬10:1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SlBBDKDOplA [또는 https://tv.naver.com/v/40839928]
1. 들어가며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이 어떤 이름인지를 체험하는 방법에는 대체 어떤 것들이 있는가? 기본적으로 성도들은 기도할 때에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기도의 맨 마지막 순서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마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거나 치유할 때도 역시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때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과 질병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러면 이것으로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방법이 더 이상 없는 것인가? 아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또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가져다 주는 축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주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으로 옮기는 자는 오늘 이후로 놀라운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2. 신앙의 실체를 체험하는 3가지 실행들은 무엇인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신앙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실체적인 실행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오늘날 성도들은 관념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게 되면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이며, 자신이 회개하면 하늘의 행위책에서 자기의 죄가 지워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실제 자신의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다만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가운데, 신앙의 실제를 지금도 현장에서 체험하는 실행들이 몇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고, '성령의 불'이 있으며, '예수의 이름'이 있다.
첫째, 예수님의 피는 사실 2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고백한 죄들을 용서해 주는 역할을 한다(엡1:7, 요일1:7).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지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의 효능에 더 실제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피의 보호의 기능이 있다. 우리가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뿌리고 덮고 바르게 될 때, 그 피가 우리를 보호해 주고 지켜 준다는 사실이다(출12:23). 이것의 시작은 B.C.1445년경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때에 있었다. 그날은 애굽에 속한 모든 장자와 첫것을 다 죽이는 재앙의 날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재앙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으니, 그것은 흠없는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들이 거주하는 집의 좌우 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 바울은 그날 잡은 유월절 양이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고전5:7). 그러므로 당시에 유월절 양의 피가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었듯이,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피가 온갖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성령의 불도 2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먼저는 심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심판의 날에 그 불이 모든 사람의 공력을 다 시험해 볼 것인데 이때 공력이 불에 타지 않으면 그것이 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이 마지막 심판의 때에 불신자들을 태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 안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불은 이것 외에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 성령의 불이 직접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내 몸이 실제적으로 뜨겁게 될 뿐만 아니라, 귀신도 태울 수가 있는 것이다(계20:10). 이때 우리 몸 안에 들어온 성령의 불은 사악한 귀신들도 함께 태워버린다. 그러므로 귀신들도 이 불을 받게 되면 견디다 못해 우리 몸으로부터 떠나버린다. 또한 이 불은 내 몸의 체온도 올려준다. 그러면 몸이 뜨거워진다. 이때 사람의 온도가 약 0.5도 내지는 1도 정도가 상승하게 된다. 그러면 암병에서 낫게 되고 암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암병은 모두 다 몸이 차가워서 생기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령의 불은 심판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불은 지금도 귀신을 쫓아내며 우리 몸의 체온을 상승시켜 몸의 면역력을 높여 주고, 또한 병든 자도 치료할 수가 있다.
셋째, 마지막으로 예수의 이름도 여러 가지 방면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리고 축사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다. 그리고 병을 치유할 때에도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주님께 나에게 일하시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 그동안은 아마도 한 번 내지는 세 번 정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이름의 능력은 그 이름을 계속해서 부를 때에 놀라운 기적을 가져온다.
3. 주님의 이름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1~13의 말씀에서 주의 이름이 지닌 3가지 효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수치)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롬10:11). 둘째, 그분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게 되면 부요함(풍성함)을 얻게 된다고 했다(롬10:12). 셋째, 그분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게 되면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다(롬10:13).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실 다음과 같은 3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 주님의 이름을 믿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롬10:9). 둘째, 주님의 이름을 명령하고 선포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칠 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주님의 부요함이 내게 들어오는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이름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님의 이름은 대체 누구의 이름인가?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의 이름이란 대체 어떤 이름을 일컫는 것인가? 사실 성경에서 진정 '주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는 총 세 분이다. 그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주님(아도나이)이라고 불리어졌다(창15:8).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께서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불리어졌다(마8:2).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이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불리어졌다(고후3:17).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10:11~13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의 이름은 누구의 이름인가? 그것은 롬10:12의 말씀 안에 힌트가 들어 있다. 먼저 롬10:12의 말씀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둘 다] 차별이 없음(없기 때문)이라. 한 분이신(같은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주이시기 때문에), 그를 [간절히] 부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그렇다. 이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할례받은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예수께서도 공생애 때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를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붙들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 모든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특권을 폐지시켜 버리셨다. 이제는 모든 민족(이방인들)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8:19~20).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똑같은 한 분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륜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모든 차별을 폐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있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래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계3:21).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을 구약시대의 방식으로 일컫는다면, 여호와의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 여호와의 이름이란 대체 어떤 이름이었는가? 구약시대 그분의 이름은 스스로 계신 이의 이름이요(출3:14), 창조주의 이름이자 전능자의 이름이었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 계신 이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요 창조주와 전능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다.
5. 주 예수의 이름이 지닌 4가지 효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 전체가 들려주는 예수의 이름의 효능은 어떤 것인가? 성경 전체를 동틀어서 그분의 이름이 가진 효능을 살펴보면 예수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 4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분의 이름은 '구원과 용서'를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을 믿고 부를 때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행2:38, 12:43, 22:16).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믿고 부를 때에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요3:16, 20:31).
둘째, 그분의 이름은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에 병든 자가 낫게 되기 때문이다(행3:6, 4:10, 약5:14). 그리고 잃었던 것들도 그분의 이름으로 다시 되찾게 되고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분의 이름은 '능력과 권세'를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 앞에 모든 만물이 다 복종하며 천사도 순종하기 때문이며, 귀신들도 다 굴복하기 때문이다(행16:18). 그렇다. 그분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다 그분 앞에 복종한다(빌2:9~10).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지금도 역시 귀신들이 떠나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위임되어진 예수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암행어사의 마패와 같기 때문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그분의 이름은 '응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시행하시기 때문이다(요14:13, 16:23~24). 고로 예수의 이름으로 요청할 때 초자연적인 일도 일어나게 되며 우리의 문제들도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구원과 용서를 경험할 수 있으며, 치유와 회복, 능력과 권세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받는 놀라운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6. 주 예수의 이름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실제적으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는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기도할 때에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때는 '주여'라고 부르거나 '주여, 주여, 주여'라고 외치면 된다. 둘째는 명령과 선포할 때에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귀신에게 명령하고 질병을 향해 선포할 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그분의 이름을 불러서 그분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주여'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사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 예수여!'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좀 더 살을 붙여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문구 기니까 짧게 줄여서 '주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라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불렀다. 그러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어떤 일을 행하시게 된다. 그러면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도 낫게 되는 것이다.
7. 호흡기도를 통한 자가 축사 방법은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
우리 성도들은 초기 교회 성도들이 실행했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호흡기도'에 대해 다시 배워야 한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기도의 실행을 많이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때에 마음 속에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것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한 것이다. 즉 코로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성령을 마신다는 마음으로 하고, 숨을 내쉴 때에는 '주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숨을 내쉴 때에는 귀신들이 내 몸속에서 떠나간다는 마음으로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케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귀신이 빠져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기도 방법은 과연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20:21~22). 그렇다. 모든 사람은 숨처럼 바람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을 마실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오순절 이후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성도들 속에 들어오는 것이기에, 이제 주는 성령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서 자유가 있다고 언급했다(고후3:17). 그렇다. 이제 성령은 주님으로서 호흡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숨을 내쉴 때에 그러한 영들이 나가라고 명령하면, 그들이 우리 몸밖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이것을 실행하는 이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또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면 숨을 내쉬면서 "주여!'라고 외쳐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귀신들도 내 속에서부터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8. 호흡기도를 통한 자가 축사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만약 호흡기도를 통해서 성령은 받아들이고, 내 안에 받아들인 성령과 이미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이 하나되어 우리 속에 있는 귀신들을 내보낸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그때에는 우선 첫째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점차로 우리가 성령에 장악되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성령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숨을 내쉬면서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둘째로,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영들이 우리 속에서 떠나가게 된다. 그러면 귀신이 붙잡고 있었던 저주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게 된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질병이 낫게 된다. 귀신이 떠나가면서 질병을 놓고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도 풍성해진다. 물질을 가로막고 있던 귀신들이 떠나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부요하게 된다고 한 말씀이 그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인 모든 눌림들이 사라짐으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면 참다운 기쁨과 행복이 내게도 찾아온다. 마음에서부터 평안을 느끼게 되고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거룩해지고 더욱더 주님과 친밀해진다.
9. 나오며
이제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과연 주님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아마도 '주여!'라고 한 번만 불렀던지, 아니면 '주여! 주여! 주여!'라고 세 번 정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강력한 기도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성령을 숨처럼 마시고, 숨을 내쉴 때에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귀신을 내보내는 것이다. 이때 계속 호흡을 하면서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해서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기도해 보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루 종일 그렇게 기도해 보라.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의 영이 우리 속에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이 호흡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귀신이 가져다 주었던 온갖 저주들도 같이 떠나게 된다. 그러면 저주들이 점차 내게서 사라지면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신이 떠나갈 때에, 그냥 쉽게 떠나가지 않고 발버둥치는 귀신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말고 무조건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 악한 영들을 처리해 주실 것이다. 때로는 귀신들이 하품하면서 떠날 수도 있고, 기침과 가래를 내뱉으면서도 떠나갈 수 있다. 때로는 손과 몸에 진동이 오거나 땀이 나거나 몸이 뜨거워지면서 귀신이 떠나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느 시간이 되면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지게 된다. 주님의 평강이 나를 사로잡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주님의 임재가 상시 임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영안이 열리는 자도 있고, 기도와 동시에 환상이 보이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그냥 낫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흡기도의 놀라운 위력이다.
2023년 09월 10일(주일)
정보배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영적 세계에서 발휘하는 실제적인 효능과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신앙을 단순히 관념적인 지식에 가두지 말고, 성령의 불과 예수의 피가 지닌 보호와 정화의 힘을 일상에서 직접 체험하며 살 것을 권면합니다. 특히 주여 삼창과 같은 부르짖음이 단순한 종교 형식을 넘어 성령 충만을 이끌어내고 내면의 악한 영을 몰아내는 강력한 통로가 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들이마시고 어둠을 내뱉는 호흡 기도를 통해 질병과 저주를 극복하고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영적 승리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요약본입니다.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영적 사실이 있고, 현재의 삶에서 체험되는 성령의 역사도 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자백할 때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일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영적 사실이다. 성도는 그것을 육안으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동시에 예수의 피를 의지할 때 보호를 받고, 성령께서 마음과 몸을 붙드시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악한 영의 역사가 제어되는 실제도 경험할 수 있다. 두 영역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구약의 유월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게 하는 표가 되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셨고, 그분의 피는 죄 사함과 구속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의 피를 의지한다”는 말은 어떤 물질을 바른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가진 속죄와 보호의 효력을 믿음으로 붙든다는 뜻이다(출 12:13).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불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과 심판과 정결을 나타낸다. 성령께서는 죄를 드러내고, 악한 영의 역사를 제어하며, 성도의 속사람을 뜨겁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불은 감각적인 열감 자체가 아니다. 몸이 뜨거워졌다는 사실만으로 성령 충만을 단정해서는 안 되며, 몸이 뜨겁지 않다고 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성령의 열매와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그 역사를 분별하는 더 분명한 기준이 된다.
이번 말씀의 중심은 예수의 이름이다.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의 회복을 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대적한다.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인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의 권세와 구원을 담은 이름인가? 또 성도가 “주여”라고 부를 때 하늘과 영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며, 그 이름을 지속적으로 부르는 기도는 우리의 구원 여정과 성령 충만과 영적 자유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로마서 10장의 ‘주’가 누구이며,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성도가 그 이름을 믿음과 회개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로마서 10장의 ‘주’는 과연 누구인가?
로마서 10장은 구원받는 믿음의 구조를 마음의 믿음, 입술의 고백, 주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설명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예수를 주라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이어서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며, 한 분이신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베푸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한다(롬 10:9~13).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다. 퀴리오스는 주인, 통치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분을 가리킨다. 로마서 10장 9절은 그 주가 예수님이라고 명백히 밝힌다. 그러므로 13절의 “주의 이름”도 문맥상 주 예수의 이름을 가리킨다. 바울은 예수를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로 고백하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를 주, 곧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절대 주권자로 고백하라고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로마서 10장 13절이 요엘 2장 32절을 인용한 말씀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 구약에서 요엘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씀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문맥에 적용한다. 베드로도 오순절 설교에서 같은 말씀을 인용했다. 이는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욜 2:32, 행 2:21).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동탄명성교회의 한 분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이 연결은 더욱 분명하다. 구약에서 홀로 한 분이셨던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과 아기의 신분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슈아’와 연결되며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진다. 천사는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하면서,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분이라고 설명했다(마 1:21).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고, 자신이 하는 말과 일은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두 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육신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다(요 14:9~10).
요 14: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러므로 성도가 “주여”라고 부를 때 막연한 신적 존재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신약에서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셨으며, 지금은 성령으로 성도 안에 거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인격과 권세와 임재를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행위다.
3. 예수 이름은 왜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이름인가?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발음이나 표지가 아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과 권위와 사명을 나타낸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말은 몇 음절을 주문처럼 외운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믿고 그분의 권위를 의지하여 행한다는 뜻이다. 이름과 인격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태어나신 뒤 사람이 붙여 준 별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미리 정해 주신 구원의 이름이다. 그 이름 안에는 한 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성육신의 목적이 담겨 있다.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선언하셨다(마 28:18).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권세는 세상의 정치적 지위나 군사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죄를 사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굴복시키고, 심판과 구원을 집행하는 하늘의 권세다. 사탄과 귀신들도 피조물이다. 그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미혹하지만 창조주와 동등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이 선포될 때 영의 세계에서는 창조주와 구원자의 주권이 선포된다. 악한 영은 그 이름 자체의 소리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리키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 앞에서 굴복한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 결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된다(빌 2:9~11).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구원 이름이며,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고, 모든 존재가 복종해야 할 왕의 이름이다. 또한 성도에게 맡겨진 영적 권세의 근거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자기 욕망을 이루는 마술적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사람에게 맡겨진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을 바르게 사용하려면 먼저 그 이름 앞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입으로는 “주 예수”라고 부르면서 삶에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부름은 공허해진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때 예수 이름은 성도의 전 존재를 다스리는 왕의 이름이 된다.
4.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부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칼레오마이’다. 이 단어는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는 행위뿐 아니라, 도움을 얻기 위해 호소하고, 권위를 의지하며, 그분을 예배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라는 소리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을 나의 주와 구원자로 인정하고, 나의 죄와 생명과 문제를 그분께 맡기며,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표지였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과 함께 성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다. 초기 성도에게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충성을 바친다는 뜻이었다(고전 1:2).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는 네 요소가 함께 있어야 한다. 첫째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둘째는 고백이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해야 한다. 셋째는 의탁이다. 자기 힘과 의를 내려놓고 구원과 도움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넷째는 순종이다. 부른 뒤에도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른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이 네 요소가 빠지면 주의 이름은 쉽게 주문으로 변질된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빌려 악한 영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믿음도, 순종도 없었다. 악한 영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고 반문했다. 이는 이름의 음절만 흉내 낸다고 권세가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행 19:13~16).
행 19:15~16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죄를 붙들고 있으면서 예수 이름으로 악한 영만 몰아내려고 하면 영적 싸움이 온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죄는 악한 영이 역사할 통로를 만들기 때문이다. 거짓, 음란, 미움, 우상숭배, 교만, 탐욕, 용서하지 않음과 같은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끊어야 한다. 그런 뒤 주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악한 영의 권리를 거부해야 한다.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감정이 격해질 때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평안할 때에도 감사와 찬양으로 부르고, 유혹이 올 때에는 도움을 구하며 부르고, 두려움이 밀려올 때에는 주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불러야 한다.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는 것도 좋은 기도가 된다. 중요한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자신을 맡기느냐에 있다.
5.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가?
로마서 10장 11~13절은 믿는 자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제시한다. 첫째,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둘째, 한 분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베푸신다. 셋째,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 세 약속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의 의미를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먼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성도가 세상에서 한 번도 창피한 일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일이 마지막 날 헛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처럼 최종적인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은 믿음 때문에 조롱과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믿음이 옳았음이 드러나며, 주를 의지한 사람은 영원한 부끄러움에 떨어지지 않는다(롬 10:11).
롬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둘째, 주님은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부요하시다”는 말은 주님에게 구원과 은혜와 지혜와 능력이 무한히 풍성하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넉넉히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주의 이름만 부르면 반드시 재산이 늘어난다는 공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에는 죄 사함, 성령, 지혜, 위로, 필요한 공급, 사명을 감당할 능력, 영원한 생명이 포함된다. 물질도 주님의 공급에 속하지만, 물질적 증가만이 이 말씀의 중심은 아니다.
셋째,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구원하다”는 헬라어 ‘소조’는 위험에서 건져 내다, 보존하다, 온전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구원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시작되며, 성도가 믿음과 회개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때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한 번의 입술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음 믿을 때 구원자를 부르고, 유혹과 환난 속에서 계속 주님을 의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의 이름을 붙들어야 한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했다. 여기서 이름을 부르는 것, 세례를 받는 것, 죄를 씻는 것이 함께 언급된다. 이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회개와 믿음과 세례의 순종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행 22:16).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 그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권자로 인정하며 사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방향을 돌린다. 둘째,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를 의지하는 믿음의 호소가 하나님께 상달된다. 셋째, 성령께서는 믿는 자 안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언하고 회개와 순종을 도우신다. 넷째, 악한 영의 세계에는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와 권세 아래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선포된다. 다섯째, 끝까지 그 이름을 붙드는 자에게 구원의 완성이 약속된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행위다. 하지만 그 효력은 발음의 정확성이나 횟수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믿으며, 죄를 회개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자신을 맡길 때 그 이름의 약속이 실제가 된다.
6. 예수 이름은 구원·치유·축사·응답에 어떻게 역사하는가?
예수 이름의 역사는 성경에서 크게 네 영역으로 나타난다. 구원과 죄 사함, 치유와 회복, 귀신을 쫓는 권세, 기도 응답이다. 이 네 영역은 모두 같은 원리 위에 서 있다. 예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 이름의 주인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역사한다는 원리다.
첫째, 예수 이름은 구원과 죄 사함과 생명의 이름이다. 사람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며 그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죄를 계속 짓고도 처음의 고백만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 성도는 죄를 지을 때마다 자백하고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기도가 아니라, “주 예수여, 나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으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깨끗하게 하소서”라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다.
둘째, 예수 이름은 치유와 회복의 이름이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겠다고 말한 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했다. 그 사람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고, 그는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다(행 3:6~8).
행 3:6~8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건은 예수 이름이 부활하신 주님의 치유 권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예수 이름을 말하면 모든 질병이 반드시 즉시 낫는다는 기계적인 공식을 만들 수는 없다. 성도는 믿음으로 치유를 구해야 하며, 주님이 치유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동시에 치유의 때와 방식과 결과에 대한 주권은 주님께 맡겨야 한다. 필요한 진단과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다. 기도와 의료적 도움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함께 사용될 수 있다.
셋째, 예수 이름은 귀신을 쫓는 능력과 권세의 이름이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점치는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고, 그 영은 즉시 나왔다(행 16:18).
행 16:18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축사에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먼저 죄를 회개하여 악한 영이 붙들고 있는 통로를 닫아야 한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승리와 권세를 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 이름으로 악한 영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해야 한다. 회개 없이 권세만 사용하려 하면 악한 영이 다시 들어올 수 있고, 권세를 믿지 않으면 두려움에 눌릴 수 있다. 또한 모든 정신적·신체적 증상을 귀신의 역사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영적 원인과 심리적·의학적 원인을 함께 분별해야 한다.
넷째, 예수 이름은 기도 응답의 이름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시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은 기도 끝에 관용적으로 붙이는 문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뜻과 성품과 말씀에 일치하여, 그분의 공로와 권위를 의지해 구한다는 뜻이다(요 14:13~14).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응답을 얻으려면 예수 이름을 크게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죄를 회개하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즉시 응답하시고, 때로 기다리게 하시며, 때로 성도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예수 이름은 하나님을 조종하는 열쇠가 아니라, 성도가 그리스도의 중보와 뜻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7. 왜 주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불러야 하는가?
주의 이름을 한 번 부르는 것과 계속 부르는 것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한 번 부르더라도 하나님은 들으실 수 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짧은 간구로 주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한 번의 간구로 모든 싸움이 끝나는 삶이 아니다. 죄의 유혹과 두려움과 질병과 악한 영의 공격이 반복되기 때문에, 성도는 지속해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
지속적으로 부른다는 것은 횟수를 채우는 주문을 뜻하지 않는다. 백 번을 불렀다고 더 큰 공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의탁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될 때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듯이, 성도는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주님께 계속 맡겨야 한다. 그동안 마음은 두려움에서 주님께로 향하고, 성령께서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견딜 힘을 주신다.
시편 기자는 곤고한 자가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또한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건진다고 말한다. 이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실제적인 통로임을 보여 준다(시 34:4~7).
시 34:4~7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교회 역사 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계속 기도한 성도들이 있었다. 이 기도는 흔히 예수기도라고 불린다. 그 핵심은 반복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며, 주님의 긍휼을 쉬지 않고 구하는 데 있다. 성경을 읽고, 일하고, 걷고, 쉬는 중에도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려는 훈련이었다.
지속적인 부름은 성령 충만에도 도움을 준다. 성령 충만은 성령이 물질처럼 조금씩 쌓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을 더 온전히 다스리시는 상태를 뜻한다. 주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죄를 자백하고 순종을 선택할 때, 성령의 다스림이 강해지고 육체와 악한 영의 영향은 약해진다.
악한 영을 대적할 때에도 지속성이 필요할 수 있다. 어떤 영은 한 번의 명령으로 떠날 수 있지만, 오랫동안 반복한 죄와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잘못된 습관을 통하여 형성된 견고한 진은 단번에 정리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성도는 조급해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계속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해야 한다. 다만 반복 횟수를 능력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깊이를 점검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부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문제 해결만이 아니다. 주님 자신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문제만 해결되면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예수 이름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형편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부른다.
8. 호흡기도는 어떻게 성령 충만과 영적 자유를 돕는가?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숨을 쉰다. 그래서 호흡은 끊임없는 기도를 훈련하는 데 유용한 리듬이 될 수 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짧은 간구를 마음에 품고, 내쉴 때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산만한 생각을 거두고 주님께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호흡 그 자체에 영적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공기와 동일하지 않으며, 귀신도 내쉬는 공기 속에 물질적으로 실려 나가는 존재가 아니다. 영적 역사는 믿음과 회개와 말씀과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일어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새 창조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제자들에게 성령의 사역을 위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 본문은 모든 성도가 공기를 들이마시는 행위를 반복하면 자동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호흡법의 명령은 아니다(요 20:21~22).
요 20:21~22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므로 호흡기도를 실행할 때에는 먼저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숨을 들이마실 때 “성령이여, 나를 다스리소서” 또는 “주 예수여, 내 안에 충만히 역사하소서”라고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숨을 내쉴 때에는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거나, 회개한 죄와 연결된 악한 영의 역사를 거부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의 역사는 떠나가야 한다”고 기도할 수 있다. 이때 능력은 호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와 성령께 있다.
호흡기도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다. 미움과 음란과 거짓과 우상숭배와 교만을 붙들고 있으면서 호흡만 반복한다고 영적 자유가 오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죄를 자백하고, 잘못된 관계를 정리하며,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고, 끊어야 할 습관을 끊어야 한다. 그다음 예수 이름을 의지하여 악한 영의 권리를 거부해야 한다. 회개는 악한 영이 붙드는 손잡이를 제거하는 일이고, 예수 이름은 그 영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는 권세다.
호흡은 자연스럽고 편안해야 한다. 지나치게 깊고 빠른 호흡을 오래 반복하면 어지럼증, 손발 저림, 가슴 답답함, 떨림과 같은 과호흡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반응을 모두 성령의 임재나 귀신이 나가는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불편함이 생기면 호흡을 정상으로 돌리고 쉬어야 하며, 지속되는 신체 증상은 의료진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 영적 분별은 신체 반응 하나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 죄에서 멀어짐, 마음의 평안,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확인해야 한다.
자가축사 역시 예수 이름을 자기 자신에게 마술처럼 적용하는 기술이 아니다. 성도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시지만, 회개하지 않은 죄의 통로를 통하여 악한 영이 육체와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용서를 구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악한 영의 역사를 거부해야 한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회개한 이 죄를 통하여 들어온 악한 영의 역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야 한다”라고 기도할 수 있다.
성령을 구하는 일도 성경적이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도 성령의 충만한 다스림과 능력을 계속 구해야 한다(눅 11:13).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또한 바울은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교회시대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주여”라고 부를 때 성도는 멀리 계신 분을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함께 계시는 주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에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고후 3:17).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호흡기도가 유익하려면 말씀 묵상과 회개와 순종과 교회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영적 현상을 과장하거나 신체 반응을 경쟁해서도 안 된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심리적·신체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에게 무리한 호흡과 장시간의 반복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짧고 자연스럽게 시작하고, 평안 가운데 주님께 집중하며, 삶의 열매를 살펴야 한다. 그럴 때 호흡은 주 예수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르는 보조 수단이 되며, 성령의 다스림을 구하고 악한 영의 역사를 대적하는 기도의 리듬이 될 수 있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성도가 그 이름의 권세를 누리는 길을 살펴보았다. 로마서 10장의 주는 예수님이며, 바울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적용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이름은 구약의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의 구원 이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도는 예수 이름을 주문이나 종교적 구호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죄를 숨긴 채 예수 이름만 반복해서는 안 되며, 구체적으로 회개하여 악한 영이 역사할 통로를 닫아야 한다. 예수 이름의 권세는 회개와 믿음과 순종 안에서 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최종적인 수치를 당하지 않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으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성도는 구원과 죄 사함과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의지해야 하고, 악한 영을 대적할 때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응답을 구할 때에는 자기 욕망보다 주님의 뜻과 영광을 먼저 구해야 한다.
주의 이름은 한 번이나 세 번만 부르고 잊어버리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는 평안할 때에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고, 유혹과 환난과 두려움이 올 때에는 그 이름을 붙들어야 한다. 지속적인 부름은 횟수를 채우는 주문이 아니라, 믿음과 의탁을 중단하지 않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주님을 찾지 말고,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기 위해 이름을 불러야 한다.
호흡기도를 사용할 때에도 호흡 자체를 성령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스러운 호흡에 맞추어 주 예수께 마음을 집중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구할 수 있지만, 능력은 호흡법이 아니라 주 예수와 성령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체 반응을 성급히 영적 현상으로 단정하지 말아야 하며, 말씀과 회개와 순종과 성령의 열매를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성도는 사람의 이름과 세상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의 이름을 더욱 붙들어야 한다. 그 이름으로 죄를 이기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악한 영의 공격을 물리치고,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날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며 성령 충만과 영적 자유와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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