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3)] 유다와 요셉은 어떻게 이기는 자의 꽃과 열매가 될 수 있었는가?(창49:8~12, 22~2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sw07P0kduc8
1. 들어가며
성경은 인류 구원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예표(Type)들을 등장시킨다. 우리는 구약의 인물들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아담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족장 시대의 마지막 거인, 야곱을 마주한다. 야곱은 그 이름 자체가 '발뒤꿈치를 잡은 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스라엘)'로 변화된, 명실상부한 '이기는 자'의 뿌리다.
하지만 야곱의 이야기는 야곱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승리는 열두 아들로 확장되는데, 그중에서도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솟아오른다. 바로 유다와 요셉이다. 한 사람은 이기는 자의 '꽃'을 피웠고, 한 사람은 이기는 자의 '열매'를 맺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이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수치스러운 과거를 딛고 일어선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면, 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꿈을 꾸고 하나님의 예정 속에 고난을 견뎌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에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추적해 보려 한다.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형제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자'라는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한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일곱 가지 질문을 통해 깊이 파헤쳐 보자.
2. 야곱의 생애가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기는 자'의 뿌리가 되어 유다와 요셉으로 확장되는 구속사적 이유는 무엇인가?
창세기를 읽다 보면 특이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야곱의 이야기는 창세기 25장부터 시작되는데, 그가 죽는 49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창 37:2)라고 시작해 놓고는, 정작 그 뒤에 요셉의 이야기를 줄기차게 쏟아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야곱의 삶이 곧 요셉의 삶이고, 야곱의 승리가 곧 그의 아들들을 통해 완성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이루시듯, 이기는 자의 모형도 한 인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야곱이 '이기는 자'의 뿌리라면,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유다와 요셉이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이기는 자'의 원형을 보여주시고, 그의 아들 유다를 통해서는 '법적 정통성과 왕권(꽃)'을, 요셉을 통해서는 '실질적인 통치와 풍성함(열매)'을 보여주셨다.
즉, 유다와 요셉은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이기는 자'의 두 가지 측면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합쳐놓을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3. 요셉의 이야기(창 37장)가 시작되자마자, 왜 뜬금없이 유다의 수치스러운 범죄 기록(창 38장)이 끼어들어 있는가?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자, 형들에 의해 미움을 받아서 결국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갑자기 38장에서 그 흐름이 끊기며 유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것도 아주 민망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다. 유다는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여인(수아의 딸)과 결혼했고, 두 아들들(엘과 오난)이 악하여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다. 또한 형사취수제도에 따라 막내 아들 셀라가 자라기까지 친정에 보내지만, 유다가 양 털을 갂으로 가다가 급기야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 오인하여 동침하고 쌍둥이를 낳는 등,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패륜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음행하여 임신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녈르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겠다고 한다. 그러자 그 여인은 자신 며느리 다말이라고 말하고 그날 자기에게 들어온 남자로부터 받아놓은 약조물을 보이는데, 그것들 곧 도자오가 끈과 지팡이는 유다의 것이었다. 이는 유다거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이며, 음란에 빠진 자인지를 알려준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토록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굳이 기록해 둔 것일까? 이것은 장차 달라지게 될 유다의 삶을 요셉과 '대조'하기 위함이었다. 유다에 비해 요셉은 어릴 때부터 거룩한 꿈을 꾸고 죄의 유혹(보디발의 아내)을 뿌리친 '성별된 자'였다. 반면 유다는 위선적이고, 음란하며, 세속적인 욕망을 따라 살았던 '타락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다의 이야기가 요셉 이야기 가운데 삽입된 이유는, '이기는 자'라도 해도 처음부터 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처럼 밑바닥에서 살았던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훗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의 길을 선택한다면 얼마든지 영광스러운 '이기는 자'의 반열, 심지어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고로 유다의 삶은 좌절에 빠진 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다.
4. 형제를 팔아넘겼던 비정한 유다는 어떤 계기로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희생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
초창기의 유다의 삶은 비정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죽게 내버려 두자는 형제들 틈에서, 그는 "죽이지 말고 차라리 팔아서 돈이나 챙기자"고 제안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다 돈(은 20냥)을 챙기는 실리적인 계산이 앞섰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완전히 변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갔을 때, 총리가 된 요셉(정체를 밝히기 전)이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형제들이 집에 돌아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만은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버틴다. 그러자 그때에 유다가 나선다. "아버지, 저를 믿고 보내주십시오. 만약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겠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건 것이다(창 43:9).
그런데 결정적인 장면은 애굽에서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어 그가 노예가 될 위기에 처했을 때다. 유다는 요셉 앞에 엎드려 간청한다. "내 주여, 이 아이가 못 가면 아버지는 죽습니다. 차라리 나를 종으로 삼으시고 이 아이는 올려보내 주소서."(창 44:33).
이것은 바로 유다를 형제들 중에 '이기는 자'의 꽃으로 만든 결정타였다. 그는 자신의 죄(과거 요셉을 팔았던 죄)를 뉘우치고, 이제는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기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았다. 그것도 배다른 형제를 위해서 말이다. 이기적인 위선자가 자기 희생의 대명사로 바뀌는 순간, 야곱은 그를 주목한다. 고로 이기는 자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회개와 희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5. 야곱은 왜 장자인 르우벤이나 요셉이 아닌, 유다에게 "규(왕권)가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함께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야곱의 임종 예언(창 49장)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각 사람의 행위를 달아보시고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판결문이다. 장자 르우벤은 서모와 통간하여 탁월함을 잃었고(창36:22, 49:4, 대상 5:1, 히13:16~17). 시므온과 레위는 잔해하는 기계라며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그러므로 순서대로라면 넷째인 유다 차례인데, 야곱은 유다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을 쏟아붓는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홀(Scepter)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49:8-10). 이것은 그에게 왕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훗날 다윗 왕조가 유다 지파에서 나왔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셨다(계 5:5).
유다가 이런 복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가 형제들을 위해 '대속의 짐'을 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처하며 형제를 살려낸 그 희생정신이야말로 왕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군림하는 자가 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가 진짜 왕이다. 유다는 자신의 삶으로 그 자격을 증명했기에, 영적인 장자권을 거머쥐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6. 꿈을 통해 예정된 길을 걸었던 요셉은 왜 형들의 배신과 보디발 아내의 모함이라는 처절한 밑바닥을 경험해야만 했는가?
이처럼 유다가 '자수성가형'이라면, 요셉은 '하나님의 예정형'의 이기는 자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17세에 이미 형들의 곡식단들이 자신의 곡식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으며, 이어서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지도자로 세우시겠다는 작정했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고 해서 그가 꽃길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예정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연단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하여 요셉은 17세 때에 이미 형들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고, 애굽의 친위대장(호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성실하게 일했으나,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강간 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들만을 가두는 감옥에 갇하게 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그는 정말 요셉의 꿈의 해석대로 복직이 된다. 그러나 그는 2년이 지나도록 잊고 지낸다. 요셉에게는 끝없는 추락처럼 보였다. 이처럼 사탄은 음란과 억울함, 배신감을 통해 요셉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한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복수님과 분노 그리고 화병으로 죽었거나, 복수의 칼을 계속 갈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달랐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그는 알았다. 자신이 겪는 고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훗날 가족과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는 사실을. 그는 고난을 인내로 이겨내고,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함으로써 '이기는 자'의 열매를 맺게 된다.
7.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요셉의 축복은, 이기는 자가 도달해야 할 영향력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고로 창세기 49장 22절에서 야곱은 요셉을 이렇게 축복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포도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담장을 넘어가면, 그 열매는 주인만 먹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도 따 먹게 된다.
요셉의 삶이 그랬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기근 때에 야곱의 가족 70명만 살린 것만이 아니다. 애굽의 백성들과 주변의 모든 이방 민족들까지 굶주림에서 구원해냈다. 그의 축복은 '담(경계)'을 넘어 세상으로 흘러갔다.
이것은 '이기는 자'가 맺어야 할 열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나의 성공, 나의 축복이 흘러넘쳐서 내 가족, 내 이웃, 심지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생명을 공급하는 것, 그것이 요셉이 보여준 '담을 넘는 가지'의 축복인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은 애굽에게 실질적인 왕의 통치권을 가지고, 땅에서 누릴 복과 하늘의 복을 모두 받아 누리며, 많은 사람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될 수 있었다.
8. 유다의 '희생'과 요셉의 '인내', 서로 다른 두 길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끄는가?
유다가 자기를 희생하여 형제를 구원했다면, 요셉은 고난을 인내하여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 이 두 가지 그림을 합치면 누가 보이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유다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으신 대속의 구주이시다. 동시에 예수님은 요셉처럼 죄 없으신 분이 멸시와 천대, 억울함을 묵묵히 견디시고 부활 승천하여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신 통치자이시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면서(계 5:5), 동시에 고난받은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사53장, 요 1:29).
고로 우리가 이 땅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왕 노릇 하려면 이 두 가지를 배워야 한다. 유다처럼 나의 자존심과 이익을 버리고 지체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하며, 요셉처럼 닥쳐오는 시련과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인내해야 한다. 이 두 날개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새 예루살렘 성에 넉넉히 들어가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9. 나오며
창세기의 긴 여정 끝에 우리는 두 개의 거대한 산봉우리를 만났다. 부끄러운 과거를 딛고 자기 희생으로 형제를 살려낸 유다, 그리고 억울한 고난을 섭리로 승화시켜 세상을 먹여 살린 요셉. 그들은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 '남을 살리는 자'가 되어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한 별처럼 빛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디에 가까운가? 혹시 유다처럼 실수하고 넘어져 부끄러운 모습인가? 그런데 좌절하지 말라. 돌이켜 형제를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라. 우리도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다. 혹은 요셉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억울함 속에 있는가? 낙심하지 말라. 그 고난은 당신을 통해 수많은 생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유다와 같은 희생의 사람, 요셉과 같은 인내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나 혼자 구원받는 것을 넘어, 내 가족과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꺼이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사람.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이기는 자들 중의 왕노릇할 자'이며, 장차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날 주인공이 될 자이다. 이 영광스러운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 모두 이기는 자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26년 01월 12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본 설교은 구약 성경의 인물인 야곱, 유다,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발견하고, 천국에서 이기는 자로 거듭나는 신앙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본 설교는 야곱을 이기는 자의 뿌리로, 유다를 그 꽃으로, 그리고 요셉을 풍성한 열매로 비유하며 이들이 보여준 자기 희생과 고난의 인내가 어떻게 왕권의 축복으로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특히 도덕적 결함이 있었으나 자신을 던져 형제를 구한 유다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억울한 시련을 견뎌낸 요셉의 삶을 통해, 천국의 왕 노릇은 타인을 살리는 헌신적인 삶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각자의 고난 속에서도 불평 대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함으로써, 타인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영적 조력자의 사명을 완수할 것을 독려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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