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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6. 11. (목)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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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HftS79XS4J8​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8)]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4)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1)(시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HftS79XS4J8​

 

1. 들어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였고, 메시아를 가장 많이 예언한 자였고, 회개할 줄 아는 자였다. 또한 그는 저주시까지 기록하였고, 심판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았으며, 죄 앞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자였다. 그런데 이 모든 특징들이 결국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수렴된다. 그것은 그가 바로 '전쟁에 능한 자'라는 것이다.

  왜 회개를 배워야 하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지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과 죄가 가득한 상태로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왜 메시아를 알아야 하는가? 전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저주시를 배워야 하는가? 진짜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정확하게 저주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공부는 이 하나의 목표, 곧 '전쟁에 능한 왕'이 되기 위한 과정들이었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그 모든 공부가 결국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이 시리즈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요한계시록 19장에 가면 아마겟돈 전쟁이 등장한다. 그 전쟁에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으로 백마를 타고 나오신다. 그때 그분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도 함께 등장하는데, 그 군대는 천사와 부활한 성도 두 부류로 이루어진다. 그 군대의 옷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천국에서 그리스도인의 최종 신분이 '예배자'로 끝나지 않고 '왕이자 전사'임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신분은 왕이라는 신분이다. 그런데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해야 할 자들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만들어 내야 할 사람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지금 우리는 왜 다윗을 공부하고 있는가? 다윗이 범죄했다가 회개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가 메시아를 예언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가 천국에서도 왕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인정하신 왕, 하나님이 인정하신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의 최종 특징이 전쟁에 능한 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공부는 결국 전쟁에 능한 왕이 되기 위한 자격과 과정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전쟁에 능한 자'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다윗의 생애를 통해 그 정체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말씀은 기독론 강의의 큰 흐름 속에서 '전쟁에 능한 자' 시리즈의 첫 번째 시간이다. 앞으로 이 주제를 여러 시간에 걸쳐 다루게 될 것인데, 오늘은 그 기초를 세우는 시간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2. 왜 그리스도인의 최종 정체성은 '전쟁에 능한 왕'이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 19장 14절부터 1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 19:14-16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여기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칭호는 단순히 예수님이 최고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천국의 신분 구조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천국에는 네 종류의 신분이 있다. 변두리에서 구경하는 자가 있다. 서서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배하는 자가 있다. 앉아서 예배드리는 십사만 사천 명이 있다. 그리고 따로 보좌에 앉아 있는 이십사 장로가 있다. 또한 그 십사만 사천 명 안에서도 두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왕 노릇 하는 자요 또 하나는 주인 노릇 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왕의 왕'이라는 호칭이 있고, '만주의 주'라는 호칭이 있다. 주님은 십사만 사천 명의 주인이 되시고 또한 왕이 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목숨을 바치는 자이다. 다윗의 용사들이 베들레헴의 물을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 한 마디에 적진을 뚫고 물을 가져왔던 것처럼,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 중에서 왕 노릇 하는 자와 주인 노릇 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신분 구조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그리스도인을 두셨는가? 단지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있다. 만세 전에 세우신 경륜을 어그러뜨리려는 자, 하나님의 뜻을 망가뜨리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원수 때문에 천국 백성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고, 그 원수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진전이 방해받고 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려 추수하려 하시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수를 대적하는 자가 필요하다. 그 원수를 이기는 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받은 성도의 최종 목표는 전쟁에 능한 왕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 정복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정복에 사용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기는 하였지만 전쟁에 능한 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혈기를 좀 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광야의 삶으로 마감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정복할 자는 전쟁에 능한 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셨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예호수아'이며, 이것은 '호세아'와 어근이 같고 헬라어로는 '예수'와 동일한 이름이다. 자음 구조가 같고 모음 발음만 달라진 것이다. 호세아, 여호수아, 예호수아, 예수, 이것은 모두 같은 이름이다. 곧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예표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가나안을 정복하듯, 예수님께서 영적 가나안을 정복하신다.

  더불어 갈렙의 존재도 빠뜨릴 수 없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였다면, 갈렙은 평신도로서 그 전쟁에 참여한 자였다. 자기 몫이 많지 않았으나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이처럼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것은 지도자에게만 요구되는 사명이 아니다. 성도라도 누구든지 전쟁에 능한 자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사명은 바로 이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회개와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결국에는 전쟁에 능한 왕을 세우기 위한 과정이다. 회개를 알아야 전쟁에서 이기고, 천국 복음을 알아야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을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다. 전쟁에 능하지 못한 자는 천국의 낮은 신분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천국은 단순히 구원받아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 안에도 신분이 있고 지위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대한민국에도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 있고 공무원이 있고 일반 시민이 있는 것처럼, 천국에도 신분의 구분이 있다. 그 신분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 이긴 자, 전쟁에 능한 자가 높은 신분을 얻는다. 단지 믿기만 하고 아무 싸움도 하지 않은 자는 변두리의 구경꾼으로 머문다. 이것이 천국의 공정한 질서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읽을 때도 우리는 전쟁에 능한 왕, 전쟁에 능한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한다. 사무엘상하를 읽을 때도, 역대상하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이 걸어갔던 길 전체가 전쟁에 능한 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 과정을 따라 배워 가야 한다.

  그런데 천국의 신분 구조를 잘못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으면 되지 않나요? 신분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묻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바깥 어두운 데에 내쫓으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불리는 자들은 받은 달란트를 갑절로 만든 자들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될 때, 그 싸움의 결과가 천국 신분으로 영원히 연결된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를 배워야 하는 신학적 근거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는 하늘 군대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변두리에서 구경하는 자로 머물러 있을 것인지는 이 땅에서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쟁에 능한 자로 준비되는 것이 바로 지금 이 훈련의 목적이다. 이 시간이 그래서 소중하다.

 

3. 다윗은 전쟁의 여정에서 원수를 어떻게 단계적으로 깨달아 갔는가?

  다윗은 처음부터 원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 시절부터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쟁의 대상에 대한 이해는 점진적으로 깊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다. 그의 원수는 처음에는 맹수인 사자와 곰이었고, 그다음에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었으며, 그다음에는 사방의 이방 민족들이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윗은 드디어 진짜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첫 번째 원수는 양떼를 해치려는 '사자'와 '곰'이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기 이전부터 그는 아버지 이새의 양 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그 시절 그의 원수는 양 떼를 해치는 맹수들이었다. 당시 목동에게 사자와 곰은 생사를 건 대적이었다. 두 번째 원수는 골리앗이었다.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야 했다. 골리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이방 신을 섬기는 자의 대표자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변 이방나라들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은 과연 다윗의 원수였는가?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다윗의 원수라고 분명히 말했다. "당신의 원수입니다. 단칼에 끝내십시오." 그러나 다윗 자신은 사울을 원수로 보지 않았다. 사울의 겉옷 자락만 가만히 베었을 뿐,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 사무엘하 1장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오히려 슬픔의 노래, 곧 활의 노래를 불렀다. 원수가 죽었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그 이후 다윗은 왕이 되어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서쪽으로는 블레셋, 남쪽으로는 아말렉과 에돔, 동쪽으로는 암몬과 모압을 정복해 나갔다. 약 십 년에 걸쳐 동서남북의 모든 적들을 정복하였는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사방 원수에게서", "사방 대적"이라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특히 시편 18편 표제어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시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주목할 것은 표제가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라고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울은 그 모든 원수 중 하나로 열거되지 않았다.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사울이 단순히 다윗의 개인적 원수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를 처음에는 사자와 곰 같은 동물로 보았고, 그다음에는 골리앗 같은 이방의 장수로 보았으며, 그다음에는 주변 이방 민족들로 보았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원수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 주셨다. 그때 다윗의 시야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원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원수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러면서 점차 배워 간다. 누군가를 원수로 생각했다가,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 더 본질적인 원수를 찾아가게 된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다. 우리가 틀렸으면 틀렸던 것을 인정하고, 바로 배워 가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성장이다. 다윗도 점차 알아 갔다. 우리도 지금 이 공부를 통해 점차 알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작은 전쟁에서 시작해서, 점차 더 크고 근본적인 원수를 보게 하신다. 다윗도 사자에서 시작해서 적그리스도의 원형이 되는 이방 세력까지 알게 되었다. 우리도 지금 배워 가는 중이다. 포기하지 말고 배워 가야 한다.

  특별히 다윗이 사울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담고 있다.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원수로 보았다. 그것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방식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 나를 죽이려 하는 자를 원수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 곧 사울을 손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울 뒤에 있는 더 근본적인 원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가진 영적인 눈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려면 이 영적 눈이 열려야 한다.

 

4. 사무엘하 12장과 마태복음 13장은 '여호와의 원수'를 누구로 규정하는가?

  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시점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계시가 임한 순간이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죄를 덮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의 최전선에 보내 죽게 만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 앞에 명백한 죄악이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때 나단은 이렇게 말했다.

삼하 12:13-14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니라

  여기에 "여호와의 원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때를 보라. 이때는 다윗의 원수가 사울 왕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의 죄악이 빌미가 된 것은 '여호와의 원수'였다. 하나님에게 원수가 있었고, 그 원수가 다윗의 죄를 통해 비방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계시를 통해 다윗의 시야는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려는 그 존재가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 안에 들어온 죄성, 나를 죄짓게 한 그 원흉, 그것이 진짜 원수였다. 예수님도 이 원수의 정체를 비유로 분명히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가라지 비유가 그 비유이다.

마 13:24-28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밭'은 이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그 가라지를 뿌린 자가 바로 원수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영을 이 땅으로 보내 사람 안에 집어넣고, 자유의지로 선택하게 하여 믿는 자를 다시 데려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런데 원수는 가라지를 뿌려 하나님이 영혼의 추수를 못 하게 만든다. 이 원수가 바로 사탄이다.

  원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목표 지점이 달라진다. 목표가 다르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정치 지도자를 원수로 삼고,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싸우며, 같은 그리스도인끼리 서로를 적으로 삼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이런 오류는 반복되어 왔다.

  만약 스데반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원수로 여겼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도 바울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신약 성경 열세 권에서 열네 권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의 경륜이 크게 미루어졌을 것이다.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것이 이후 바울의 회심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명령하셨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람은 언제든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다. 사람 안에 들어와 그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드는 악한 영이 진짜 원수이다. 사람이 마귀에 속한 자가 되어 결국 마귀가 지옥에 갈 때 함께 가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원수가 아니다. 이것을 정확히 알아야 우리가 진짜 원수를 향해 싸울 수 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쓴 시편 51편은 바로 이 깨달음 위에서 기록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한다. 왜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하는가? 밧세바에게도 죄를 범했고 우리아에게도 죄를 범했는데, 왜 '주께만'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자신의 죄가 인간 관계를 넘어 여호와의 원수에게 비방할 기회를 준 죄임을 다윗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 위에서 다윗은 더 철저히 회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회개가 다윗을 다시 전쟁에 능한 자로 세워 갔다.

 

5. 다니엘서 7장의 사자·곰·표범은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다윗의 목동 시절에 그의 원수는 사자와 곰이었다. 그는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 떼를 지키었다. 그때 사자와 곰은 글자 그대로 맹수였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사자와 곰과 표범은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된다. 깨끗한 짐승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자와 곰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세력의 상징하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계시의 결정적인 열쇠가 다니엘서에 나타난다.

  다니엘서 7장 1절에서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네 바람이 불어 바다로 몰아쳤다. 여기서 바다는 요동치는 거대 세력을 상징한다. 역사 속의 모든 대제국은 항상 바다를 끼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태풍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거대 세력이 일어남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 바다에서 네 짐승이 올라왔다.

단 7:3-7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첫째는 사자 같은데 … 둘째는 곰과 같은데 … 셋째는 표범과 같은데 …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빨이 있어서

  첫째 짐승인 사자는 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한다. 둘째 짐승인 곰은 메대와 바사 연합 제국의 고레스 왕을 상징한다. 셋째 짐승인 표범은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을 상징한다. 알렉산더는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세계를 정복했기 때문에 날개 달린 표범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열 뿔을 가진 넷째 짐승은 일차적으로 로마 제국이었고,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네 짐승은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세력의 대장들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민족의 왕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완성된다.

계 13:1-2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고로 마지막 시대의 적그리스도는 첫째 짐승(사자), 둘째 짐승(곰), 셋째 짐승(표범)의 모든 강력한 특징을 하나로 합친 존재이다. 사자의 위엄과 권위, 곰의 강인한 발, 표범의 민첩성, 이 모든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마지막 적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뒤에서 용, 곧 사탄 마귀가 있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적그리스도에게 준다. 용이 짐승에게 자기 능력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이 짐승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5절부터 7절을 보면, 이 짐승이 42달 동안 활동한다고 기록된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곧 삼 년 반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삼 년 반이었던 것처럼, 사탄 마귀는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자신의 공생애를 살아간다.

계 13:5-7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더니

  이때는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시기다. 그 시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다 그 짐승을 경배하게 될 것이된다. 이것이 전쟁의 최종 국면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전 이 때에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자와 곰을 쳤던 그 전쟁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탄의 공격을 막아 내는 영적 싸움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처음에 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점차 배워 가면서 알아 갔다. 그리스도인도 처음에는 모른다. 배워 가야 한다. 우리가 어떤 대적과 싸우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점점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한다. 시편 24편은 이 전쟁의 승리자를 "전쟁에 능한 여호와"로 묘사한다.

시 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 이것이 이번 설교의 핵심이다. 여호와 자신이 전쟁에 능한 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 그분을 대표하는 자들이 함께 전쟁에 능하게 된다. 다윗이 목동 시절 사자와 곰과 싸운 것은, 사실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를 대표하여 싸운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쌓이고 쌓여 다윗은 마침내 이 시편을 노래하게 된 것이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 이 표현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분임을 선언한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이것이 시편 24편의 핵심 고백이며, 전쟁에 능한 자가 가져야 할 확신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께서 이기고 돌아오신다!

 

6. 전쟁에 능한 자의 첫 번째 정체성—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전쟁에 능한 자로서의 첫 번째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목자'라는 정체성이다. 이것은 다윗이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 떼를 지킨 사건에서 비롯된다.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경험한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였다. 목자가 양 떼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되어야 했다. 고로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삼상 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당신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은 사자와 곰이 새끼를 물어갈 때 그냥 있지 않았다. 따라가서 치고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다. 그것이 자신을 해하려 덤빌 때에는 수염을 잡고 죽였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목자는 양 떼를 사랑하기에 자기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리고 다윗은 이 경험에서 놀라운 통찰을 끌어낸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큰 전쟁의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로 성장하는 방식이다. 작은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이 쌓여 큰 싸움의 담대함이 된다. 고로 시편 23편 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원수'는 바로 목자가 아닌 양 떼를 해치려 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목동 시절의 다윗에게 원수는 '사자'와 '곰'이었다. 그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상을 차려 주신다는 것은, 목자로서 양 떼를 지키며 싸우는 자에게 하나님이 친히 보상을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목동 시절부터 이 목자의 심정을 키워 갔다.

  그리고 이러한 목자 정체성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삯꾼은 이리가 오면 달아난다. 자기 목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의 첫 번째 본질이다. 전쟁을 잘한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원수를 향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귀신 잘 쫓는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강력한 분노와 함께 백성을 건지겠다는 목자의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이 목자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인구 조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전염병으로 치실 때, 다윗은 이렇게 간구했다.

삼하 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그러나 백성은 살려 주소서."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왕이 되어서도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을 유지한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윗이 강포를 쓰지 않고, 원수를 직접 손대지 않으며, 백성을 사랑했던 것, 이 모든 것이 목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전쟁에 능한 자로 세우셨다. 목자의 마음이 없는 자는 전쟁에 능해지더라도 그 능력을 백성을 위해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그것이 삯꾼의 특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자를 전쟁에 능한 자로 세우신다.

  따라서 전쟁에 능한 자는 백성을 원수 취급하는 자가 아니다. 백성을 해치는 원수와 맹렬히 싸우는 자이다. 나라의 지도자도, 교회의 지도자도 이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 잘못한 것은 정확한 재판을 열어 바로잡되, 항상 백성을 사랑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걸어서라도 양 떼를 지키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진정한 왕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목자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성도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양 떼를 위해 목숨을 거는 목자인가, 아니면 삯꾼인가를 진실로 점검해야 한다. 이리가 올 때 달아나는 삯꾼은 성도들을 버린다. 이단 사상이 들어올 때, 거짓 복음이 침투할 때, 악한 영의 공격이 올 때 목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다윗이 사자의 수염을 잡고 죽였던 것처럼, 목자는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 성도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 목자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우리 가족을, 우리 이웃을, 우리 교회 공동체를 해치는 악한 영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 목자의 정체성을 가진 전사의 삶이다. 목자의 마음으로 싸우는 자에게 하나님이 상을 차려 주신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라! 원수와 싸우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상을 베푸신다. 이 약속을 붙잡고 목자의 마음으로 싸워야 한다.

 

7. 전쟁에 능한 자의 두 번째 정체성—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는 어떻게 싸움을 가능케 하는가?

  전쟁에 능한 자의 두 번째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장면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생각해 보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어떤 인간적 조건이 있었는가?

  전쟁에 능한 사울 왕도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다. 아침마다 골리앗이 나와 이스라엘을 모욕해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요나단도 나서지 않았다. 다윗의 큰 형 엘리압도, 이스라엘의 어떤 병사도 나서지 못했다. 사울이 자기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 보았지만 갑옷이 너무 커서 입고 갈 수조차 없었다. 다윗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년이었다. 모든 조건에서 다윗은 골리앗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나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삼상 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이 나아간 것은 자기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대표자로서 그에게 나아간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이 불가능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시편 20편 7절은 이 원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병거와 말은 당대 최강의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군대는 그것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에 있지 않고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그 이름으로 싸워야 한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나갈 것을 명령했다. 자기 능력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예수님의 이름은 바로 '여호수아', 곧 '예호수아'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싸울 때 승리가 임한다. 귀신과 싸울 때는 자기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 보내셨다는 정체성으로 싸워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자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 이 정체성으로 싸울 때 악한 영은 물러난다.

  다윗이 가나안 땅 최강의 대적이었던 아낙 자손의 후손 골리앗을 먼저 쳐야 했던 것처럼, 마태복음 12장의 원리대로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 그의 집을 노략할 수 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그렇다. 사탄 마귀를 먼저 결박해야 주변의 귀신들을 물리칠 수 있다. 그것이 골리앗을 먼저 잡고 블레셋 군대를 격퇴한 사건의 영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귀신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정체성,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우는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정체성 곧 목자와 대표자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목자의 마음이 있어야 대표자로서 싸우는 이유가 생긴다. 목자의 마음이 없이 대표자의 능력만 가지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반대로 목자의 마음만 있고 대표자의 정체성이 없으면, 이리가 올 때 감당하지 못하고 삯꾼처럼 달아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전쟁에 능한 자가 완성된다. 다윗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그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었던 이유이다.

 

8. 고린도전서 9장이 말하는 '목표 있는 싸움'은 오늘 성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되려면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방향이 없으면 상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힘차게 주먹을 휘둘러도 상대방을 정확히 향하지 않으면 허공을 칠 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6절부터 27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고전 9:26-27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이는 달리는 데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목표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는 상대방을 정확히 향해 치고 있다는 것이다. 헛스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투 선수가 아무리 힘차게 주먹을 날려도 상대방을 못 맞추면 자기 몸만 지치게 된다. 목표를 잘못 알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다리를 짚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자기 몸만 빠질 뿐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원수를 잘못 정의하고 있다. 정치인을 원수로 삼고,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싸우며, 인간을 원수로 삼아 끌어내리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을 치는 것이다. 진짜 원수를 향해 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 악한 지도자를 원수로 삼아 싸우는 것, 이것은 결코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길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정의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싸움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원수가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원수를 나의 원수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방해하려는 자, 천국 백성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려는 자, 천국에서의 아름다운 지위와 신분을 얻지 못하게 핍박하는 자, 그가 원수다. 그가 바로 마귀요,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로 삼아야 한다. 여호와의 원수가 우리의 원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확히 아는 싸움은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기 육신과 정욕과 죄성을 먼저 다스리지 못하면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에서 자기 육신을 다스리지 못해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이 여호와의 원수에게 비방할 기회를 주었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려면 자신의 내면을 먼저 정복해야 한다. 내 안의 죄성을 먼저 다스려야 밖의 원수와 싸울 수 있다.

  회개를 아는 자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다.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즉시 돌이키는 자, 자기의 실수를 보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유턴하는 자가 전쟁에 능하게 된다. 악한 영들은 죄가 들어온 틈을 통해 우리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회개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사람을 원수로 삼는 것의 위험성은 역사 속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에 일평생을 쏟아부어도, 그것이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애국자가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하늘의 기업을 차지하는 길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온 악한 영을 목표로 싸우는 자를 원하신다. 그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자기 절제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다. 다윗도 한 번 갑옷을 벗었을 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서울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았을 때가 그것이었다. 전쟁에 나가야 할 봄에 전쟁에 나가지 않고 왕궁에 머물러 있었던 것, 그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전쟁에 능한 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순간 원수에게 틈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치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회개로 언제나 새롭게 하는 것이 전쟁에 능한 자의 일상이어야 한다.

  사울이 죽은 것을 다윗이 슬퍼했듯, 원수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서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한 영이 원수이다. 그 악한 영과 싸우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오늘 성도가 정확히 원수를 정의하고 목표를 향해 싸울 때, 그 싸움은 반드시 의미 있는 싸움이 된다.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대상을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싸움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만왕의 왕을 따라 백마를 타고 나가는 군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로 삼고, 여호와의 원수와 싸우는 진정한 전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당장 자신의 싸움을 점검하라! 나는 지금 진짜 원수와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허공을 치고 있는가? 나는 목자의 마음으로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사사로운 감정으로 싸우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내 능력을 의지하며 싸우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

 

9. 나오며

  오늘은 '전쟁에 능한 자'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성도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편 24편의 표현대로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분의 대표자로서 싸우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신분이 전쟁에 능한 왕임을 확인하였고, 다윗이 그 원수를 어떻게 단계적으로 깨달아 갔는지를 추적하였다. 사무엘하 12장과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여호와의 원수가 사람이 아니라 사탄과 그에게 속한 악한 영임을 밝혔다. 다니엘서 7장의 사자·곰·표범이 요한계시록 13장의 마지막 짐승으로 수렴된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능한 자의 두 가지 핵심 정체성 곧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와 하나님의 대표자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으며, 고린도전서 9장을 통해 목표 있는 싸움이 무엇인지를 점검하였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 이 공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엉뚱한 원수를 향해 싸우고 있었는지, 또 얼마나 진짜 원수를 모르고 있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강의를 통해 배운 것들이 삶의 자리에서 실천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람을 원수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정치인을 끌어내리는 것을 일평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서로를 적으로 여겨서도 아니 된다. 우리의 대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진짜 주적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자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방해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을 우리의 대적으로 삼아야 한다. 다니엘서 7장의 사자와 곰과 표범,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 이 모든 세력의 배후에 있는 용을 우리의 원수로 삼아야 한다. 그 싸움을 위해 우리는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하는 자기 절제가 있어야 하고, 회개를 통해 죄의 틈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원수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는 담대한 전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19장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만왕의 왕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로 세워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강의에서는 전쟁에 능한 자의 또 다른 정체성을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오늘 배운 두 가지 정체성 곧 목자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정체성을 마음에 새기고, 삶의 현장에서 이 정체성으로 싸우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허공을 치는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원수를 정확히 겨냥하는 목표 있는 싸움을 싸워야 한다. 자기 몸을 먼저 다스리고, 회개로 늘 깨끗함을 유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성도가 전쟁에 능한 자이다. 다윗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사자와 싸운 그 마음, 골리앗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외쳤던 그 담대함이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있기를 소망한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라! 그것이 하나님이 이 마지막 시대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이다. 우리 모두 그 사명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사명을 붙들고 날마다 말씀 위에서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멘.

2026년 06월 10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인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영적 전쟁의 군사적 정체성을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도의 최종적인 신분은 천국에서 제사장일지라도 이 땅에서는 전쟁에 능한 자이자 왕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신앙의 초점을 영적 전투에 맞출 것을 촉구합니다. 다윗의 삶에서 나타나는 세 단계의 대적, 즉 사자와 곰, 골리앗, 그리고 내면의 죄를 통해 원수의 실체가 단순히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사단 마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영적 승리는 내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대표자 의식을 가질 때 가능하며, 이것이 곧 가나안 땅과 같은 천국 기업을 차지할 왕의 자격임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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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론(118)]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4)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1)(시24:7~10)_2026-06-10(수) updatefile 갈렙 2026.06.10 57 https://youtu.be/HftS79XS4J8​
2328 [기독론(117)]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3)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5)(시51:1~19)_2026-06-09(화) file 갈렙 2026.06.09 67 https://youtu.be/mQ8T-U8Veqw
2327 [기독론(11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2)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4)(시51:1~19)_2026-06-07(주일) file 갈렙 2026.06.08 119 https://youtu.be/R3lkAyHzK88
2326 [기독론(11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9)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1)(시38:1~13)_2026-06-05(금) file 갈렙 2026.06.05 124 https://youtu.be/NMuZ0Ly2igs
2325 [기독론(11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8) 다윗의 저주시,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시51:10~12)_2026-06-04(목) file 갈렙 2026.06.04 118 https://youtu.be/Bu-ht_hrNmM
2324 [기독론(111)]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7) 그는 메시야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였다(04)(시22:1~21)_2026-06-03(수) file 갈렙 2026.06.03 104 https://youtu.be/SMRwAH_FhHU
2323 [기독론(11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6) 그는 메시야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였다(03)(시22:1~21)_2026-06-02(화) file 갈렙 2026.06.02 106 https://youtu.be/MpzXbxrIduQ
2322 [기독론(10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5) 그는 메시야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였다(02)(시22:1~21)_2026-06-01(월) file 갈렙 2026.06.01 121 https://youtu.be/8_z-Y2WW3yY
2321 [기독론(10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2) 찬양대장에게 미친 진정한 왕의 위엄(시78:65~71)_2026-05-29(금) 갈렙 2026.05.29 178 https://youtu.be/ZUPCGQWtCgU
2320 [기독론(105)]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1) 고라자손에게 미친 진정한 왕의 위엄(시48:1~14)_2026-05-28(목) file 갈렙 2026.05.28 131 https://youtu.be/Y1hbJRiwHcs
2319 [기독론(104)]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0) 그는 예수께서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03)(시110:1~7)_2026-05-27(수) file 갈렙 2026.05.27 131 https://youtu.be/O7qFXjZSbUA
2318 [기독론(10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9) 그는 예수께서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02)(시110:1~7)_2026-05-26(화) file 갈렙 2026.05.26 109 https://youtu.be/dK6eZeWZvT4
2317 [기독론(10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8) 그는 예수께서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01)(시110:1~7)_2026-05-25(월) file 갈렙 2026.05.25 173 https://youtu.be/_Y-0B3nPzV4
2316 [기독론(9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5) 사명과 마음과 은사의 측면에서(시110:1~7)_2026-05-22(금) file 갈렙 2026.05.22 157 https://youtu.be/nXjJaFuelYY
2315 [기독론(98)]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4) 사명과 마음과 은사의 측면에서(시110:1~7)_2026-05-21(목) file 갈렙 2026.05.21 203 https://youtu.be/-YVS--SER50
2314 [기독론(97)]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3) 사명과 마음과 은사의 측면에서(시110:1~7)_2026-05-20(수) file 갈렙 2026.05.20 170 https://youtu.be/EJEfSxYsP64
2313 [기독론(9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2) 사명과 마음과 은사의 측면에서(시110:1~7)_2026-05-19(화) file 갈렙 2026.05.19 149 https://youtu.be/6WsAuOlbj40
2312 [기독론(95)]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1) 사명과 마음과 은사의 측면에서(시110:1~7)_2026-05-18(월) file 갈렙 2026.05.18 147 https://youtu.be/INsYN08YZ2k
2311 [기독론(95)]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1) 사명과 마음과 은사의 측면에서(시110:1~7)_2026-05-18(월) file 갈렙 2026.05.18 99 https://youtu.be/INsYN08YZ2k
2310 [기독론(92)] 사람들이 세운 왕과 하나님이 세운 왕의 차이는?(삼상9:1~17)_2026-05-15(금) file 갈렙 2026.05.15 142 https://youtu.be/e0IZ5pgUl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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