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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6. 24. (수)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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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e9f_TUkraVA

 

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30)]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2)( 아가서 4:9~5:2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e9f_TUkraVA

 

1. 들어가며

  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깊고도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다.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보면, 이 책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가장 친밀하고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단순한 연애시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아가서는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단지 남녀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피조물인 인간을 자신의 짝과 신부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노래한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9).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말씀을 풀어 주셨다(눅 24:44).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 역사나 도덕 교훈의 책이 아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와 그림자와 상징으로 미리 보여 주는 책이다. 유다와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 고난받는 왕, 예언자적 왕, 목자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 아들 솔로몬은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런데 솔로몬을 통한 그리스도의 예표는 역사서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솔로몬이 남긴 지혜문학, 특히 아가서는 그가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는 사실의 내적 의미를 보여 준다. 외형적인 성전은 돌과 나무와 금으로 지어졌지만, 신약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성도들, 곧 교회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성전이 어떻게 영적 신부로 산출되는지를 노래한다. 이 책에서 예수님은 1)왕이시며 2)창조주이시고, 3)속전이시며 4)목자이시고, 5)포도원의 주인이시며 6)동산지기이시고, 7)다시 오실 재림주이시며, 마지막으로 8)신랑이시다.

  이번 말씀의 초점은 그중에서도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우리를 ‘내 누이, 내 신부’라는 놀라운 신분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술람미 여인과 신랑의 관계 속에서 계시되고, 그 생명 분배를 통해 성도가 어떻게 ‘내 누이, 내 신부’라는 신분으로 세워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가서는 예수님의 어떤 신분들을 보여 주는가?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단순히 한 가지로만 말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이 여러 겹으로 감추어져 있다. 그중 핵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신분은 여덟 가지다. 첫째, 그분은 왕이시다. 둘째, 창조주이시다. 셋째, 속전이시다. 넷째, 목자이시다. 다섯째,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여섯째, 동산지기이시다. 일곱째, 재림주이시다. 여덟째, 신랑이시다.

  먼저 아가서의 솔로몬은 왕이다. 그는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 속의 왕이 아니라, 장차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아가서 3장에는 왕의 가마와 왕관, 시온의 딸들과 예루살렘의 딸들이 등장한다. 왕은 사랑하는 여인을 데려오기 위해 가마를 보낸다. 그 가마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들어졌고, 기둥은 은이며, 바닥은 금이며, 자리는 자주색이다. 이는 왕의 영광과 신부를 향한 존귀한 초청을 보여 준다(아 3:9~11).

아 3:9~11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주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었구나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있구나

  이 왕은 단지 통치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신부를 부르시는 왕이다. 이것이 아가서의 특징이다. 시편은 예수님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보여 주고, 요한계시록은 그분을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아가서는 그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러 가마를 보내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왕은 종말의 심판주이면서 동시에 혼인 잔치의 신랑 왕이다.

  아가서의 예수님은 또한 창조주이시다. 이것은 이번 말씀의 핵심이다.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술람미 여인에게는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있으나, 신랑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라고 말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의 근원이 같지 않음을 암시한다. 신부는 피조물로부터 시작하지만, 신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그분은 속전이시기도 하다. 아가서 1장 14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부른다. ‘고벨화’는 히브리어 계열에서 ‘고페르’와 연결되고, 그 뿌리는 ‘카파르’, 곧 덮다, 속죄하다, 속량하다, 몸값을 지불하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신랑은 피를 흘려 신부를 속량하실 분이다.

  이처럼 아가서는 예수님의 신분을 단순히 교리적 명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꽃과 향기, 포도원과 동산, 왕의 가마와 신부의 고백, 오빠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감추어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는 자는 겉의 사랑 노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아야 한다.

3. 왜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신가?

  이번 말씀의 중심 구절은 아가서 8장 1절이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이라고 한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은 신랑이 실제로는 그녀의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라는 뜻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아 8:1).

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술람미 여인에게는 오빠들이 있다. 아가서 1장 6절에서 그녀는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가서 6장 9절에서는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라고 부른다. 오빠들이 있는데도 외동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관계가 단순한 육신의 혈연관계가 아님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영적인 가족 구조가 숨어 있다.

  아가서의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과 같은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오빠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자들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물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랑은 그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며,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분이다.

  신약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증언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고 말한다(요 16:27~28).

요 16:27~28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으로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그분을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요 1:18).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아들 되심을 피조물의 아들 됨으로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 피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본체에서 나오신 분이다. 빌립보서 2장은 그분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한다(빌 2:6~8).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도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한다(히 1:3).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아가서 8장 1절은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신랑과 신부의 근원적 차이가 감추어져 있다. 신부는 피조물이다. 오빠들도 피조물이다. 그러나 신랑은 피조물이 아니다. 신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회개와천국복음선교회가 이 시대에  전하고 있는 한 분 하나님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곧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4. ‘출생’의 의미는 예수님과 우리에게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의 아들 됨은 다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언어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헬라어에는 출생을 말하는 중요한 동사들이 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겐나오’가 사용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틱토’가 사용된다. 또한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는 ‘모노게네스’다. ‘모노’는 유일함을, ‘게네스’는 출생 혹은 기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일하게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본래 피조물이다. 우리는 창조되었고, 타락했으며, 죄와 사망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의 아들 됨은 은혜로 주어진 생명의 참여다.

  반면에 예수님의 아들 되심은 아버지의 본체에서 나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다. 요한복음 5장 26절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요 5:26).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아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며, 아버지의 생명을 본질적으로 가지신 분이다. 그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골로새서 1장은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5~16).

골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표현을 피조물의 첫 번째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의 기원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그분은 피조물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있게 하신 창조주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출생과 우리의 출생은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다시 그분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차이를 잃어버리면 올바른 기독론이 무너진다. 예수님을 피조물로 만들면 구원도 무너지고, 신부의 신분도 무너진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창조주께서 사람으로 오셨기에 속죄와 생명 분배와 신부의 산출이 가능하다.

5. 술람미의 오빠들은 왜 타락한 천사를 상징하는가?

  아가서에는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오빠들은 단순한 친오빠로만 볼 수 없다. 아가서 1장 6절에서 술람미는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한다(아 1:6).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런데 아가서 6장 9절에서는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라고 부른다(아 6:9).

아 6: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가 낳은 자 중에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오빠들이 있는데 왜 외동딸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문학적 모순이 아니라 영적 구조를 암시한다. 오빠들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나, 신부와 같은 방식으로 신랑과 하나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설교의 관점에서 이 오빠들은 의붓오빠들이며, 영적으로는 먼저 지음받은 피조물인 천사들, 그중에서도 타락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삼았다. 그녀는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을 죄와 수고와 억압 아래 두고, 인간이 자기 생명과 사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한 상황을 보여 준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와를 속였고,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다. 그 결과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인간은 땀을 흘려 수고해야 하는 상태에 들어갔다.

  아가서에서 술람미가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해졌다는 말도 단순한 외모 묘사가 아니다. 죄와 수고와 억압 가운데 놓인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준다. 그녀는 원래 아름다운 존재이나, 오빠들의 지시 아래 포도원에서 수고하며 그을린 자가 되었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신랑은 오빠들과 다르다. 오빠들은 신부를 부리고 억압하지만, 신랑은 그녀를 찾아와 데려간다. 오빠들은 포도원에서 수고하게 하지만, 신랑은 가마를 보내어 왕의 자리로 부른다. 오빠들은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만, 신랑은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타락한 천사들과 창조주 그리스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 점에서 귀신론도 연결된다. 악한 영들은 사람을 억압하고, 상처와 죄와 수고의 구조 안에 묶어 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억압에서 해방하시고 자신의 생명 안으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신부가 되려는 성도는 오빠들의 지배, 곧 타락한 영들의 억압에서 벗어나 신랑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6. 사과나무는 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아가서에서 신랑을 설명하는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사과나무다. 술람미는 남자들 중에 자기 사랑하는 자가 숲속의 사과나무 같다고 고백한다. 그 그늘에 앉아서 기뻐했고, 그 열매는 입에 달았다고 말한다(아 2:3).

아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이 사과나무는 단순한 과일나무가 아니다. 설교의 흐름에서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두셨다. 인간은 원래 생명나무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 왕노릇하는 자로 자라가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으며,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아가서에서는 신부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신랑을 만난다. 아가서 8장 5절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고 말한다(아 8:5).

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사과나무 아래는 생명과 출생과 깨움의 장소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으로 계시하신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6:35, 11:25, 14:6).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아가서의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숲속의 여러 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가 특별한 것처럼, 많은 남자들 가운데 신랑은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 그늘은 안식이고, 그 열매는 생명이며, 그 아래에서 신부는 깨어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자신과 마주 볼 짝을 얻기를 원하셨다. 그 짝은 단지 피조물 상태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존재다. 그래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산출된다.

  아가서 2장 5절에서 신부는 건포도와 사과로 자신을 시원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건포도와 사과는 모두 생명의 공급과 사랑의 병을 치유하는 상징이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 때문에 병이 났고, 신랑의 생명 공급으로 회복된다.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 없이는 신부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보여 준다.

7. 그리스도의 생명 분배는 신부를 어떻게 산출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속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속전이시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또 하나의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생명 분배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2:24).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그 안에 있던 생명이 해방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명 분배다.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해방되어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분배된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고전 15:45).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가서에서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생명 분배의 결과다. 신부는 원래 피조물이다. 그녀는 오빠들의 지배 아래 있었고, 포도원에서 수고했으며,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신랑이 그녀를 찾아오고, 사랑으로 부르고, 가마를 보내고, 결혼을 통해 신분을 바꾸신다. 그러면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포도원지기가 아니다. 그녀는 신부가 된다.

  아가서 4장 8절 이후 신부의 신분은 확연히 달라진다. 신랑은 그녀를 ‘내 신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곧이어 ‘내 누이, 내 신부’라고 부른다(아 4:8~9).

아 4:8~9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여기서 ‘신부’는 혼인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누이’는 생명의 관계를 말한다. 신랑과 신부는 단순히 외적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같은 생명을 나누는 가족 관계로 들어간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다(고전 6:17).

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이것이 신부의 산출이다. 교회는 인간 조직으로 산출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 분배로 산출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분의 생명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신부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단순히 죄 사함만 받은 자로 멈추면 안 된다. 속죄를 받은 후에는 생명을 받아 자라야 한다. 그 생명이 자라면 신부의 인격이 형성된다. 신부의 인격이 형성되면 신랑의 뜻과 생각과 감정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아가서가 보여 주는 신부의 길이다.

  여기서 속죄와 생명 분배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죄는 죄값을 처리하는 것이고, 생명 분배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낳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룬다. 피 흘림으로 죄가 처리되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이 해방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피로 씻김받아 정결하게 될 뿐 아니라, 생명으로 자라 신부의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아가서는 이 과정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랑의 관계와 혼인의 언어로 보여 준다.

8. 신부는 왜 ‘내 누이, 내 신부’로 불리는가?

  아가서에서 가장 놀라운 표현 가운데 하나는 ‘내 누이, 내 신부’다. 신랑이 신부를 ‘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관계를 말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천사는 섬기는 영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한 근원에서 났다고 말하며, 그분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증언한다(히 2:11).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 말씀은 인간의 존귀함을 보여 준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존재다. 천사는 능력이 많고 영적 세계를 오가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내 누이, 내 신부’로 불릴 수 있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처음부터 신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여인이다. 오빠들에게 눌려 있고, 햇볕에 그을렸으며,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신랑은 그녀를 다르게 본다. 신랑은 그녀 안에 장차 신부가 될 가능성을 본다. 그는 그녀를 부르고, 데려오고, 사랑하고, 신분을 바꾼다.

  이것이 구원론의 깊은 흐름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완전한 신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악한 영들의 억압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속전이 되어 피를 흘리셨고,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우리를 자신의 생명을 가진 자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신부는 은혜로 시작하지만, 그 은혜 안에서 반드시 준비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고 말한다(계 19:7~8).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신부는 준비되어야 한다. 단순히 구원받았다는 말만으로 혼인 잔치의 신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해야 하고,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명으로 빚어져야 한다. 또한 신랑이 하시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아가서 후반에서 신부는 신랑이 양떼를 치고 백합화를 꺾는 일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도 신랑의 일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누이, 내 신부’라는 표현은 성도의 신분 상승을 보여 준다. 피조물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가족이 되고, 신부가 되고,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놀라운 결론이다.

  이 신분은 장차 천국에서 실제로 드러난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천국에서의 신분과 영광은 이 땅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빚어졌는가와 연결된다. 신부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이며, 왕의 가마에 태워질 자이고, 왕의 일에 동참할 자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신부론은 단순한 감상적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성도의 종말론적 준비와 직결된다. 오늘의 회개와 말씀 순종과 영적 전쟁은 장차 신부의 옷과 신분과 자리로 연결된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으로 산출되는 신부의 비밀을 살펴보았다.

  아가서 8장 1절은 신랑과 신부가 같은 피조물의 출생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님을 보여 준다. 신부에게는 어머니의 젖을 함께 먹은 오빠들이 있으나, 신랑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신랑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며, 사람 가운데 뛰어난 성인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본체에서 나오신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성도는 본래 피조물이며 죄와 사망과 악한 영들의 억압 아래 있던 자였음을 알아야 한다.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에 의해 포도원지기로 세워지고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인간은 타락한 영들의 영향 아래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존재였다. 그러나 신랑이 찾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속전이 되셨고, 생명나무와 같은 분으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으며, 피조물인 우리를 ‘내 누이, 내 신부’라 부르실 만큼 존귀하게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단지 구원자로만 좁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왕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속전이시며 생명나무이시고, 우리를 자신의 짝으로 세우시는 신랑이시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우리를 신부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각과 감정과 뜻에 맞추어 자라가야 한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고, 말씀과 성령의 생명 공급 안에서 신부의 인격을 준비해야 한다.

  아가서의 비밀은 성도의 미래를 밝힌다. 우리는 천사보다 연약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와 신부와 왕노릇할 자로 세워질 수 있다. 이 신분을 알 때 성도는 대강 살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은사와 물질과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경륜 안에서 사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악한 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창조주이신 신랑의 사랑 안에서 ‘내 누이, 내 신부’라 불릴 만큼 정결하게 준비되어 새 예루살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23일(화)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중 특히 창조주로서의 면모를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술람미 여인과 오라비들의 관계를 통해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인 그리스도의 본질적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신부이자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아가서의 사과나무를 생명나무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신 독생자 그리스도가 어떻게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분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분배하셨는지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깨달아 그분과 시선을 맞추고, 주님이 맡기신 사역에 동참하는 영적 연합의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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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30)]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2)( 아가서 4:9~5:2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시가가 아니다.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관한 가장 심오한 계시가 문학의 형식으로 숨겨져 있다. 지난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첫 번째인 새 예루살렘의 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신분인 창조주에 관하여 아가서 8장 1절의 오빠들과 솔로몬의 어머니 차이를 통해 그 서론을 열었다. 이 시간에는 그 신학적 탐구를 더 깊이 이어가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이다. 우리가 그분을 창조주로 알 때, 그분 앞에 진정한 경배가 가능하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신부로 취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가 피조물을 신부로 취하신다는 것은 전적인 하강(下降)이며, 무한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깊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분은 단순히 탁월한 인간 스승이거나 선지자 중 하나가 아니시다. 그분은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그분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선언하고, 히브리서 1장 3절은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증언한다.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6절은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아가서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건네는 고백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 속에 숨겨진 상징들, 그리고 사과나무와 오빠들의 이미지 속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아가서는 한 편의 연애 시가로만 읽히고 만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빛으로 아가서를 읽을 때,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가 찬연히 빛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 8장 1절의 오빠들의 의미와 사과나무의 상징, 그리고 결혼 이후 신부를 향해 건네는 신랑의 호칭들을 통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아가 술람미라는 이름과 신랑의 깃발이 드러내는 신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가서 8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어떻게 계시하는가?

  아가서 8장 1절은 아가서 전체에서 가장 신학적으로 밀도 높은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은 신부가 신랑에게 건네는 말로, 겉으로는 친밀한 가족 관계를 소망하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아 8:1-2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의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포도주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노라

  신부는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랑이 그녀의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는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존재들이 아니다. 오빠들은 그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았지만, 신랑은 그렇지 않다. 신랑의 근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 한 문장이 드러낸다.

  8장 2절에서 신부는 계속해서 신랑을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말한다. 나를 가르치셨던 내 어머니 집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집은 신부가 태어난 곳, 즉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생명의 기원을 가리킨다. 신부는 신랑에게 그 기원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신랑은 이미 그 어머니와는 다른 근원에서 나오신 분이다.

  그렇다면 신랑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것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해명하는 핵심 질문이다. 요한복음 16장 27절부터 28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선언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으로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신 분, 이것이 그분의 근원이다.

요 16:27-28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느니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요한복음 1장 18절은 이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여기서 독생하신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인데, 모노는 오직 하나뿐인 것을 뜻하고 게네스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는 의미의 동사 겟나오에서 온 말이다. 즉 독생자란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출생한 자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다는 동사 틱테와 구분되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오신 유일한 분임을 강조한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반면에 우리 인간과 천사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아가서에서 어머니의 젖을 빤 오빠들은 바로 이 피조물, 특히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한다. 그들도 어머니인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들이다. 술람미 여인도 같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신랑인 솔로몬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다. 그는 다른 근원을 가지신 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이것이 아가서 8장 1절이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오빠들은 피조물이고, 신랑은 창조주이시다. 이 차이가 아가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기초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 신랑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아가서 8장 1절의 한 문장이, 수많은 신학적 오류를 방지하는 울타리가 된다는 것이 놀랍다.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가장 아름다운 문학 형식으로 보존하는 신학적 계시이다. 역사 속에서 많은 이단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뛰어난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나오신 독생자이시다. 어떤 피조물도, 아무리 거룩하고 아무리 능력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창조주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6절은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선언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골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3. 헬라어 '헤테로스'와 '알로스'의 차이로 보는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신약 헬라어에는 다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동사가 있다. 헤테로스와 알로스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알로스는 같은 종류 안에서의 차이를 뜻한다. 사과와 사과 사이의 차이처럼,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서로 다른 개체임을 나타낸다. 반면에 헤테로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차이를 가리킨다. 사과와 자동차처럼, 범주 자체가 다른 이질적인 차이이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과 그 오빠들의 차이는 알로스의 차이이다. 그들은 같은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며 서로 다를 뿐이다. 오빠들은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비유하자면, 같은 사과 품종 중에서도 홍옥과 부사가 다른 것처럼, 피조물 안에서의 다름이다. 이 알로스의 다름은 서로 연합할 수 있는 다름이다. 타락한 천사와 인간은 모두 피조물이지만,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피조물로서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빤 자들이다. 아가서에서 오빠들이 여동생과 함께 같은 어머니의 품에 있었던 것처럼, 천사와 인간은 같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어머니의 젖을 빨았던, 즉 동일한 피조물의 범주에 속한 존재들이다. 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인간이다. 모두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같은 종류에 속하며, 그 안에서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의 차이는 헤테로스의 차이이다.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고, 신부인 우리는 피조물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차이이다. 어떤 피조물도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거룩해지고,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받아도 창조주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이고, 그분은 영원히 창조주이시다.

  이 구분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 즉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선언했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선언한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조물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그 성육신이 그분의 신성을 바꾸지는 않는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어도 그분은 여전히 창조주이시다. 동시에 그분은 피조물인 우리를 신부로, 형제로, 자녀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신부로 취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이 아가서가 노래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신앙이 바로 선다.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모르면 우리는 그분을 단순히 위대한 인간으로만 보게 된다. 위대한 인간에게는 존경을 드릴 수 있지만, 절대적 경배는 드릴 수 없다. 절대적 경배는 오직 창조주에게만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알 때 우리는 그분 앞에 온전한 복종을 드릴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와 다른 종류의 분이심을, 헤테로스의 차이를 가진 분이심을 알 때, 비로소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그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이 고백이 나온 것이다. 그것이 바른 신앙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뛰어난 선생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가서는 이 신학적 진리를 시의 언어로 표현한다. 신랑과 신부 사이의 근원의 차이,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오빠들과 신랑 사이의 차이로 드러낸다. 이 차이가 있기에 신랑의 사랑이 더욱 놀랍다. 아가서는 지혜 문학의 정수라 불릴 만하다. 이 책 한 권 안에 창조론, 구원론, 종말론, 기독론이 모두 담겨 있다.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가 성령의 감동과 만났을 때, 이처럼 심오하고 아름다운 책이 탄생한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신부로 취하신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심오한 역설이고 가장 깊은 은혜이다.

 

4.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그분의 창조주 되심의 신학적 근거이다. 그분은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 이 차이가 그분을 모든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구별한다.

  요한복음 5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 자체를 이어받아 나오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헬라어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고 할 때는 겟나오라는 동사를 쓰고,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다고 할 때는 틱테를 쓴다. 독생자를 뜻하는 모노게네스는 겟나오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낳아진 유일한 아들이시다. 어머니를 통한 출산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오신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을 그대로 가진다. 손오공이 자신의 털 하나를 뽑아 변신시키면 똑같은 손오공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를 그대로 담고 계신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이것을 정확히 표현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반면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씀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은 아버지로부터의 직접적인 출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새로운 탄생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며, 그분이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선언한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그 생명이 흩어져서, 그 생명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게 된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 12:24),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산출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생명을 산출하시고, 그 산출된 생명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그분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구속의 목적이며, 역사 전체의 목적이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진리가 분명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그분이 단순히 선한 인간이거나 뛰어난 선지자라면, 우리는 그분께 최고의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라면, 우리는 그분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빌립보서 2장은 이것을 이렇게 선언한다. 결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다(빌 2:10).

빌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분으로서 영원히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 아들로부터 생명을 분배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피조물이다. 이 출생의 차이, 이 근원의 차이가 영원히 유지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단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주의 가족이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도 그 가문의 혈통을 가진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본체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 구별이 신앙의 겸손을 지켜 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별이 신앙의 경이로움을 보존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동등이 아니라, 창조주의 은혜로 주어진 가족 됨임을 알 때, 그 가족 됨의 놀라움이 더욱 커진다.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분은 영원히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이 창조주의 생명을 받아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신부로, 누이로,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찬양의 이유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급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은혜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히 2:11).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받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5. 아가서의 사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어떻게 상징하는가?

  아가서에는 사과나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사과나무는 단순한 과수원의 나무가 아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생명나무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아가서에서 사과나무가 처음 등장하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장은 봄이 온 계절의 배경으로 시작한다. 신랑이 신부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초청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이전 배경인 1장에서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일하던 처녀였다. 그 처녀가 왕을 만나 그 안에서 생명나무를 본 것이다.

  아가서 2장 3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이렇게 묘사한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신랑을 사과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아 2:3-5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잔치집으로 이끌어 들이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나를 힘을 돋우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라

  신랑을 왜 사과나무에 비유했을까?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서 생명나무를 본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그 나무를 보았을 때, 가장 가까운 표현으로 사과나무 같구나라고 한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에덴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에서 창조되었다. 아가서 8장 5절은 어머니가 술람미 여인을 사과나무 아래에서 낳았다고 말한다.

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냐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이 사과나무 아래는 곧 생명나무 아래이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우리가 탄생했다는 의미이다. 창세기의 동산에서 생명나무 아래 인간이 지어진 것처럼, 우리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아가서 3장 4절에는 신부가 신랑을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이끌어 가려 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잉태한 이의 방이 곧 생명나무 아래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

아 3:4 그들을 순찰하는 자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의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생명임을 여러 번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다. 생명나무이신 그분이 아가서에서 사과나무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과나무의 열매는 내 입에 달았다는 신부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가 느끼는 영적 달콤함의 고백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그 결과는 수치와 두려움과 죽음이었다. 그러나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먹을 때 그 결과는 생명이요 기쁨이요 달콤함이다. 아가서의 신부가 사과나무의 열매가 달았다고 고백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받은 자의 영적 체험의 고백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는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은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길이 다시 열렸다. 그분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에덴에서 잃어버린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선언이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 22장에도 등장한다. 새 예루살렘 성의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다(계 22:2). 아가서에서 신랑을 사과나무라고 표현한 것과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가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생명나무이시다. 그 나무 아래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그 나무의 열매로 우리가 살며, 마지막 날에도 그 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공급한다.

계 22: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그러므로 그 열매를 먹은 자는 건포도로 힘을 얻고 사과로 시원하게 된다. 생명나무의 12가지 열매처럼(계 22:2), 그 생명이 우리 영혼의 온갖 필요를 채워 준다. 사과나무가 생명나무의 상징이고, 생명나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해할 때, 아가서의 이 아름다운 고백이 얼마나 깊은 신학적 진리를 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6.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빤 오빠들과 술람미 여인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아가서에 등장하는 오빠들의 정체는 아가서 해석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다. 이 오빠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술람미 여인이 처한 상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신랑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가 분명해진다.

  아가서 1장 6절은 오빠들이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한다.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화를 내어 포도원지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오빠들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다. 아버지가 다른 오빠들이라는 뜻이다. 아가서 6장 9절에서 신랑은 술람미 여인을 그의 어머니의 외동딸이라고 부른다. 오빠들이 있는데 어떻게 외동딸인가? 아버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오빠들에게는 그들의 아버지가 따로 있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가 다른 아버지를 통해 낳은 외동딸이다. 그래서 오빠들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의 유일한 딸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오빠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들이고, 술람미 여인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나 오빠들의 아버지는 타락한 천사들의 아버지인 사탄의 무리이고, 술람미 여인의 아버지는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차이가 오빠들을 의붓오빠로 만든다.

  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 곧 귀신들을 상징한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를 억압하고 종살이 시키는 자들이 되었다. 술람미 여인을 바알하몬의 포도원으로 보내어 땡볕에서 일하게 만든 것은, 귀신들이 인류를 죄와 고통 가운데 억압해 온 역사를 그린다.

  아가서 8장 11절에서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포도원을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었다. 오빠들은 그 포도원지기를 계약한 것으로 보인다.

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 개를 바치게 하였구나

  이것은 중요한 진실을 드러낸다. 포도원의 진정한 주인은 솔로몬이다. 그러나 지키는 자들, 즉 오빠들이 그 포도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사탄과 귀신들이 세상 임금처럼 활동하며 사람들을 억압한다. 요한복음 12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임금이라는 표현으로 사탄을 가리키셨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 이 세상 임금의 권세는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그러나 그 포도원의 진정한 주인은 솔로몬이다. 마치 귀신들이 이 땅에서 일시적인 권세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오빠들은 잠시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들일 뿐이다.

  술람미 여인은 인류를 상징한다. 그녀는 피조물로서 오빠들인 타락한 천사들의 억압 아래서 고통받고 있었다. 그 고통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가 겪어 온 죄와 죽음의 종살이를 나타낸다.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땡볕에 타는 그 모습이 바로 타락 이후 인류의 현실이다.

  그러나 왕이 그 여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가마를 보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이다. 귀신들의 억압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창조주이신 그분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의 세계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내려오신 것이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오직 사랑 때문에.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7. 결혼 후 신부를 '나의 누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가서 4장 8절부터 신랑은 신부를 내 신부야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9절에서는 더 놀라운 호칭이 등장한다. 내 누이 내 신부야. 신랑이 신부를 누이라고 부른다.

아 4: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왜 신부를 누이라고 부르는가? 이것은 단순한 친밀함의 표현이 아니다. 그 안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아가서에서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에게 한 번도 여동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오빠들에게 그녀는 그냥 일꾼이었다. 그런데 왕인 신랑은 그녀를 내 누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가? 신랑이 그녀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같은 피를 나눈 자, 같은 생명을 가진 자를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형제요 자매로 삼으신다.

  반면에 타락한 천사들인 오빠들은 이 생명 분배에 참여하지 않는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이다. 그래서 오빠들은 여동생이라 부르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 2:11). 히브리서의 이 선언이 아가서의 내 누이라는 호칭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신부의 이름 자체가 이 연합의 실체를 드러낸다. 아가서 6장 13절에서 신부는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술람미 여인이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 명사이다. 솔로몬과 술람미, 두 이름의 어근은 동일하다. 모두 평화를 뜻하는 샬롬에서 왔다. 신랑과 신부가 같은 이름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히브리어 에하드, 즉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함께 나눌 때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리라 너희가 마하나임 춤추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어찌하여 보려 하느냐

  그리스도가 신부를 내 누이라 부르시는 것은 구원이 완성된 관계의 표현이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한 생명 안에 연합된 가족의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이 가족이 됨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주의 가족이 된다는 것, 이것은 피조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그분은 누구든지 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다. 그분의 형제와 자매는 단순히 혈연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분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의 진정한 가족이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아가서에서 신부가 신랑의 누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됨으로써 그분의 참된 가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한 천사들은 이 가족에 들어올 수 없다. 히브리서 1장 14절은 천사들을 섬기는 영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누이가 되는 놀라운 신분을 얻는다.

히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한때 포도원에서 일하던 이름 없는 처녀가 왕의 신부가 되고, 왕의 형제가 되고, 왕의 이름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구원의 최종 목적지이다. 죄로 인해 멀어졌던 그 관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복되고, 더 나아가 신부와 누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로 완성된다.

 

8. 술람미라는 이름과 신랑의 깃발은 신부의 사명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아가서에는 잔치집, 깃발, 건포도, 사과 같은 소품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잔치집과 깃발은 신부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 핵심 상징이다.

  아가서 2장 4절에서 신랑은 신부를 포도주의 집, 곧 잔치집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라고 신부가 고백한다.

아 2:4 그가 나를 잔치집으로 이끌어 들이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가리켜 내 피라고 말씀하셨다. 잔치집으로 신부를 이끌어 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피 흘림이 이루어지는 자리, 즉 십자가의 자리로 신부를 인도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신부에게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깃발이라는 단어도 심오하다. 군대가 원수의 진영을 점령하면 거기에 깃발을 꽂는다. 신랑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원수의 진영에 깃발을 꽂는 승리의 사랑이다. 사탄이 지배하던 이 땅에 십자가를 세우심으로, 그 진영에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꽂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에 신부를 동참시키신다.

  술람미라는 이름은 단순히 솔로몬의 여성형이 아니다. 솔로몬은 평화를 뜻하는 샬롬에서 온 이름이다. 그리고 술람미도 같은 어근에서 온 이름이다. 신랑과 신부가 같은 이름의 뿌리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이다. 그분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이고, 그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다.

  술람미라는 이름이 솔로몬의 여성형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깊은 의미를 가진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말한다. 그분이 이루신 화평을 우리가 함께 나눈다. 신랑의 이름이 신부의 이름이 되는 것처럼, 그분의 화평이 우리의 화평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의 이름 그리스도를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이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포도주의 집이라는 표현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아가서의 맥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다. 아가서 1장 2절에서 신부는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으니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포도주와 같이 기쁨을 준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사랑이 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신부의 고백이다. 신랑이 신부를 포도주의 집으로 이끌어 들인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죽음과 피를 통해 신부에게 생명을 주실 것임을 미리 보여 주시는 행위이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신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도주처럼 쏟아 부으신다는 것, 이것이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의 절정이다.

아 1:2 그가 그의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

  나아가 아가서의 마지막 장에서 신부는 변화한다. 처음에 그녀는 포도원에서 억압받던 수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신랑의 사랑을 받고 함께 성장하면서, 마침내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변한다. 6장과 7장에서 신부는 신랑이 백합화 사이에서 양 떼를 먹이는 동산에 함께 있다. 신랑이 하는 일, 양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의 일을 신부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부의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분이 바라보시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아가서 5장에서 신부는 밤중에 신랑이 문 밖에 와서 두드리는데 문을 열지 않는 실수를 한다. 그리고 나중에 신랑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 장면은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영적 방황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신랑의 뜻보다 자신의 편안함을 택하는 신부가, 그 고통을 통해 성장하여 결국 신랑의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변화된다. 이 성화의 여정이 아가서 전체를 통해 그려진다.

  아가서의 마지막에서 신부는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아 8:14). 이것이 성숙한 신부의 고백이다. 처음에는 신랑의 사랑을 받기만 하던 신부가, 이제는 신랑의 재림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의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라는 외침이 바로 이 아가서의 신부의 고백과 연결된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루어질 때, 신부는 단순히 잔치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과 함께 백마를 타고 원수를 이기는 군대로 나타난다(계 19:14). 승리의 깃발을 꽂는 영적 군사가 된다. 이것이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이다. 신부가 신랑과 함께 왕 노릇 하고, 그분과 함께 통치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이처럼 아가서의 신부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여정 전체를 담은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억압받던 피조물이 창조주의 사랑을 받아 신부가 되고, 결국 그분과 함께 원수를 이기는 군대가 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술람미의 이름을 가진 신부들이여, 신랑이 오실 때를 준비하라.

 

9. 나오며

  아가서 8장 1절과 사과나무의 상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살펴보았다. 오빠들은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빤 피조물들, 특히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하고, 신랑은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은 자, 즉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신 분임을 확인하였다. 헤테로스와 알로스라는 헬라어의 구분을 통해,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차이는 같은 종류 안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차이임을 배웠다.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 아래에서 우리가 탄생했음을 아가서 8장 5절이 선언한다.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친히 자신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형제, 자매가 된다. 결혼 후 신부를 내 누이라 부르시는 그분의 호칭이 이 생명 분배의 현실을 선포한다.

  술람미라는 이름이 솔로몬의 여성형임을 알 때,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그분의 이름을 함께 나누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신부는 결국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처음에는 포도원에서 억압받던 수동적 존재였지만, 마침내 그분과 함께 원수의 진영에 깃발을 꽂는 영적 군사로 서게 된다. 이것이 신부가 받은 사명이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서로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랑은 함께 일어나 싸우는 사랑이다. 신랑의 사랑을 받은 신부는 신랑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신부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아가서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의 확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 가는 과정이다. 오늘 공부한 내용들이 단순히 머릿속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온전히 따르는 삶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는 이 진리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할 때, 비로소 아가서의 신부처럼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는 간절한 고백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그분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임을 알 때, 그 무한한 거리를 건너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의 사랑이 더욱 경이롭게 느껴진다. 포도원에서 억압받던 처녀를 왕이 친히 찾아와 신부로 데려가신다는 이 이야기 속에,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기 위해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이 담겨 있다.

  이 모든 진리가 아가서라는 한 편의 사랑 시가 안에 숨겨져 있었다. 성경 전체를 꿰뚫는 시각으로 아가서를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과 그분의 사랑의 깊이가 찬연히 빛난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우리를 신부로 취하시고, 누이라 부르시며, 함께 통치하는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는 이 놀라운 경륜을 마음 깊이 새길 때, 우리는 신앙이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신앙은 사랑이다. 창조주의 사랑에 응답하는 피조물의 사랑이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그분을 닮아 가고, 점점 더 그분과 하나가 되어 가며, 마침내 그분의 신부로 완성된다. 아가서의 마지막 고백처럼,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는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 삶을 채울 때, 우리는 이미 그분과 깊이 연합된 신부가 된 것이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그분이 바라보시는 곳을 바라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함께 하며, 그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된다. 이것이 아가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본질이다. 솔로몬이 지혜 문학의 정수로 아가서를 남긴 것은, 이 진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아가서를 단순한 연애 시로 읽는 자는 그 보화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빛으로 아가서를 읽는 자는, 그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경륜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부터 골로새서, 빌립보서, 히브리서가 말하는 신학이 아가서 안에 이미 담겨 있었다. 솔로몬이 아가서를 썼을 때,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모든 진리를 시적 언어로 기록한 것이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우리를 신부로 취하시고, 누이라 부르시며, 함께 통치하는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는 이 놀라운 경륜을 마음 깊이 새길 때, 우리는 이 땅의 삶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이 하시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며,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6월 23일(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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