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136)] 다윗의 아들 솔로몬(14) 여자의 호칭에 나타난 왕의 바람은 무엇이었는가?(아가6:4~10)
이 설교는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을 통해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영적 성숙의 단계와 사명을 유려하게 설명합니다. 성도는 단순한 구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동역자로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군대같이 당당한 자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은밀한 동산에 거주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정보배 목사는 성도가 가져야 할 자유 의지와 일편단심의 지조를 중요하게 다루며, 안일한 신앙에서 벗어나 영혼을 살리는 영적 전쟁에 임할 것을 촉구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온전한 짝과 친구가 되어 하늘의 기업을 다스리는 성숙한 동역자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왕의 진정한 바람임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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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바라던 짝은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가? 그것은 솔로몬에게는 아내에 대한 어떤 기대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지 4년차에 성전건축을 시작한다. 그리고 10년차에 완공한다. 그것이 그에게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성전이 무엇인지를 구약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문학적인 관점에서 기록해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가서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아가서에서 신부를 어떻게 묘사해놓았을까? 그것은 4종류의 신부가 있다고 했다. 그것으로는 술람미 여인처럼 하나밖에 없는 짝이 있고, 왕비가 60명이 있고 후궁이 80명이 있으며 무수한 시녀들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교회의 하나의 구성원이 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신부처럼 오셔서 이기는 자가 되셨듯, 우리도 신랑을 따라 이 땅에 태어나 이기는 자가 되면 천국에 들어가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 제일 귀한 지위인 이십사 장로급에 해당하는 자들은 우주를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 무수히 많은 별들과 그보다 더 광대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으나, 그것을 천사를 위해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우리를 위해 지으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 피조물 된 우리 인간을 향하여 너는 나의 짝이라 말씀하시며 예비해 두신 그 복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만 마음을 쏟으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 속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삶을 투자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6:33).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분명한 약속을 주셨다(마 19:29).
마 19:29 또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땅의 것을 잠시 내려놓는 자가 결국 더 큰 것을 영원토록 누리게 된다는 약속이다. 세상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두고 끝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공산주의 체제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준다고 선전하지만, 실상은 권력을 쥔 자들이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지며 평민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천국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영광을 약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거짓 약속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마귀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천국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결정해 버린다면 자유의지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땅에는 마귀가 있고, 그 마귀를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자리가 있기에 비로소 자유의지가 의미를 가진다. 이 놀라운 자유의지를 천국을 예비하는 데 사용하는 자가 복된 자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온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다(요 10:10).
요 10:10 도둑은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풍성한 생명은 단지 길고 편안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과 직임의 풍성함까지 포함하는 약속이다.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본래의 뜻을 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은 원문 그대로 정확하게 따라가야 하며,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가르쳐 퍼뜨리는 것이야말로 이단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살피는 자세 또한 인간의 상상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를 정확히 붙잡는 데 있어야 한다. 주님은 충성된 종에게 더 큰 직임을 맡기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25:21).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과 많은 것을 맡는 영광스러운 자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지금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만이 장차 더 큰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저 흐리멍텅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많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다스리는 장로들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계 4:4).
계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흰옷을 입고 그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더라
보좌 둘레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그 자리는 거듭났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과하며 자라간 분량을 따라 주어진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신부 된 자들이 받을 복은 단순히 왕궁에 들어가 평안히 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아가서는 한 여인이 결혼 전, 결혼 후, 그리고 시련을 겪고 성숙해진 이후까지 세 단계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며, 그 변화의 각 단계마다 왕이 그 여인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다(빌 3:14).
빌 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자만이 그 상을 받는다. 출발선에 섰다는 사실만으로 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려가 푯대에 이른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처음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자라가는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온전한 상속자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 자신이 거할 곳을 친히 예비하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3).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자가 동일한 위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예비된 처소가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시인도 주의 앞에서 누릴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노래하였다(시 16:11).
시 16:11 내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의 우편, 곧 보좌 가까운 그 자리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즐거움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 호칭들의 변화 속에 담긴 왕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왕이 신부를 부른 여러 호칭에는 어떤 변화의 의미가 담겨 있는가?
아가서에서 왕이 신부를 부르는 호칭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더해져 간다. 결혼 전, 왕이 아직 자신을 왕으로 밝히지 않고 목자와 포도원지기로 나타났을 때, 그는 여인을 "내 사랑", "내 어여쁜 자", "내 비둘기"라 불렀다(아 2:10, 13, 14).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같은 시기에, 솔로몬은 여인을 비유적으로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아 2:2).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이렇게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처지에서 정절을 지키던 여인을 향해 왕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간다. 결혼식 날, 왕은 면류관을 쓰고 나타난다. 결혼식을 지나 예루살렘 궁에 들어가자, 그 여인에 대한 호칭은 더 늘어나 셋이 더 붙는다. "내 누이", "내 신부", "내 완전한 자"가 그것이다(아 4:9, 10, 11, 12, 5:1, 2).
아 4: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이때부터 여인은 더 이상 남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가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한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
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그 와 같은 것이 없게 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신랑이 신부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그리고 그 신부를 티나 흠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세우려는 의도는 아가서의 왕이 이 여인을 향해 가졌던 마음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결혼하였다고 해서 이전의 호칭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결혼 후에도 왕은 여전히 그녀를 비둘기라 부른다(아 5:2).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신분이 올라가고 새로운 호칭이 더해진다 해도, 처음에 받은 순결과 정절의 호칭은 결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계속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순찰자에게 욕을 당하고 파수꾼에게 옷을 빼앗기는 시련을 지나, 남편이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직접 찾아 나서고 마침내 발견하게 되면서 여인은 또 하나의 새로운 호칭을 얻는다. "군대 같이 당당한 자"이다(아 6:4, 10).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아 6:10 이 여자가 누구인가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그녀는 마침내 "술람미 여자"라 불린다(아 6:13).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솔로몬의 여성형이 술람미이니, 이는 비로소 왕과 진정한 짝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호칭이다. 왕비가 되었을 때도 아직 완전한 짝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호칭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결혼 전에는 내 사랑, 내 어여쁜 자, 내 비둘기,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였고, 결혼 후에는 내 누이, 내 신부, 내 완전한 자가 더해졌으며, 시련을 지난 후에는 군대 같이 당당한 자, 술람미 여자, 동산에 거주하는 자로 완성된다. 호칭은 단계마다 더해질 뿐 결코 이전 것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왕의 바람은 처음의 순결을 지키면서도 점점 더 깊은 신분으로 자라가는 여인을 향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부 된 교회의 마지막 모습을 예고하는 계시록의 장면과도 연결된다(계 19:7-8).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이사야도 신부가 입을 옷을 구원과 의의 옷으로 표현한다(사 61:10).
사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고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과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은 거듭날 때 단번에 입혀지지만, 공의의 겉옷은 살아가는 동안 쌓아 가는 의로운 행실로 더해진다. 신부가 입을 세마포 옷은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곧 살아가는 동안 쌓아 온 신앙의 행적으로 짜여지는 것이다. 아가서의 여인이 호칭을 더해 가며 자라간 것처럼, 신부 된 교회도 행실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준비해 가야 한다. 주님께서도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가 다르다고 가르치셨다(마 22:2, 14).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청함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끝까지 예복을 갖추고 그 자리에 합당하게 머무는 자는 택함을 입은 적은 자들뿐이다. 이는 아가서의 여인이 단계마다 호칭을 더해 가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로 자라간 것과 같은 원리다. 주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을 복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5:8).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의 청결함은 단순히 행위의 깨끗함을 넘어, 오직 한 분만을 향한 전적인 헌신과 순전함을 의미한다. 이 청결함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을 가까이 뵙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3. 술람미 여인이 마지막에 도달한 '동산에 거주하는 자'란 무엇인가?
여인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표현은 "동산에 거주하는 자"이다(아 8:13).
아 8:13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여기서 동산은 예루살렘 성안의 왕궁이 아니다. 시인도 하나님의 궁정에 거하는 한 날이 다른 곳의 천 날보다 낫다고 노래하였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나음이니이다
같은 천국이라도 주의 보좌, 곧 가장 깊은 동산에 가까이 머무는 한 날이 그렇지 못한 천 날보다 낫다는 고백이다. 결혼 전에는 레바논 바알 헤르몬의 포도원에서 살았고, 결혼 후에는 예루살렘 성안 왕궁에서 살았다. 예루살렘 왕궁에 들어가 먹고 자는 것으로 충분했다면 왕이 그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산은 왕의 은밀한 정원이며,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왕이 가장 가까이 두고자 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아가서 사 장은 이 동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 4: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동산 안에는 덮은 우물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봉한 샘이 있다. 봉한 샘은 생명수, 곧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을 가리킨다.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라는 세 가지 표현은 단계적으로 더 깊고 은밀한 곳을 가리키며, 이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오직 정결함과 헌신을 통과한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영역임을 보여 준다.
아 4: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이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똑같은 자리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사는 자와 멀리 사는 자가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왕의 바람은 처음부터 여인이 잠근 동산을 지나 덮은 우물을 지나 마침내 봉한 샘까지 이르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여인이 본래 생명나무 곁, 사과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자였으니 그 근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 거주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 결코 끝이 아니다. 결국 동산에 거주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운 자리, 가장 은밀하고 핵심적인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도 새 예루살렘 성 한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을 보았다(계 22:1-2).
계 22:1-2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성 전체에 생명수가 흐르지만, 그 강이 시작되는 근원, 곧 보좌로부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머무는 것과 그 물줄기 끝자락에 머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왕의 바람은 이 여인이 그 근원, 곧 보좌에 가장 가까운 동산까지 나아가는 것이었다. 다윗도 평생 주의 집에 거하기를 갈망하였다(시 23:6).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이 사모했던 것도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 곧 보좌 가까운 곳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도 자기를 따르려는 자에게 모든 것을 버릴 것을 분명히 요구하셨다(눅 14:33).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단지 물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과 욕심까지 내려놓고 왕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동산에 거주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전적인 헌신이 요구된다. 다윗도 자신이 평생 구할 단 한 가지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수많은 것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다윗이 평생 구한 단 한 가지는 바로 여호와의 집, 곧 보좌 가까운 자리에 거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산에 거주하는 자가 된 여인의 갈망과 정확히 일치한다.
4. 호도동산은 어떤 영적 의미를 지닌 왕의 은밀한 공간인가?
여인이 마침내 발견하게 되는 동산의 이름은 '호도동산'이다(아 6:11).
아 6: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지 알려고 내가 호두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호도'는 본래 '호두'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이 동산이 호도동산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 생김새가 호두를 닮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호두가 사람의 뇌와 닮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호도동산은 우주의 모든 행정이 다스려지는 머리, 곧 헤드쿼터에 해당하는 자리를 상징한다. 이는 왕의 동산이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우주의 경륜이 운영되는 핵심 처소임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도 자신과 성도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하셨다(요 15:5).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호도동산에서 맺히는 모든 열매도 왕과 연결되어 있는 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이 호도동산에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가 있다. 여인은 처음에는 이 동산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나, 시련을 지나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이 땅에 오게 된 까닭은 송이를 맺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원리와 같이, 포도와 석류도 송이를 이루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상징한다(아 6:6). 이는 많은 자식을 낳게 되는 풍성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직 자식을 낳지 못한 어린 신부에 대해서는 다르게 표현한다(아 8:8).
아 6: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온 암양 떼 같으니 색깔이 짝지어 있으며 그 중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구나
아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이는 아직 진정한 결실을 맺지 못한 어린 신부의 상태를 가리키며, 진짜 신부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어 많은 자녀를 길러 내는 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또한 호도동산은 순교자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수레가 준비된 곳이기도 하다(아 6:12).
아 6: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이는 죽음을 각오하고 사명을 감당한 자, 곧 순교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천국의 수레가 왕의 동산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여인은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뒤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행하기로 결심한다. 곧 자신만의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와 석류, 곧 영적 자녀들을 길러 내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아 7:12).
아가 7: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지 꽃이 피었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호도동산은 왕이 자기 백성을 낳고 기르고 훈련시키며 우주의 경륜을 이루어 가는 핵심 처소이며, 여인이 그 동산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는 것은 그녀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그 경륜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28:19). 바울도 자신이 심은 것을 아볼로가 물 주었으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고전 3:6-7).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자와 물 주는 자 모두가 필요하지만, 결국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심고 물 주는 일을 행하게 하시며, 그 일에 동참하는 자를 동역자로 삼으신다. 제자를 삼는 일, 곧 영적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왕의 백성 된 자에게 주어진 본질적 사명이다. 호도동산에서 포도와 석류가 송이를 이루어 가듯, 성도 역시 한 사람의 영혼을 전도하여 양육하고, 그 영혼이 다시 또 다른 영혼을 길러 내는 순환을 이루어 가야 한다. 바울도 자신이 낳은 영적 자녀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갈 4:19).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해산의 수고라는 표현은, 영적 자녀를 길러 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산고와 같은 인내와 헌신을 요구하는 일임을 보여 준다. 호도동산에서 송이를 맺는 일도 이와 같은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5. 가시밭의 백합화와 비둘기 비유는 신부의 무엇을 상징하는가?
결혼 전, 왕은 여인을 식물과 동물 두 가지 비유로 표현한다. 식물로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요, 동물로는 "비둘기"다.
아 2:14 바위 틈 낭떨어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하여금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가시나무 가운데 핀 백합화는 본래 히브리어 원문상 가시덤불 가운데 핀 아네모네를 가리킨다. 아네모네는 끝마다 손톱만 한 가시가 달린 가시덤불 사이에서 피어나는 붉은 꽃으로, 줄기는 붉고 안쪽은 희며 더 깊은 안쪽은 보라색을 띤다. 붉은빛은 예수의 피로 물든 것을, 흰빛은 그 피로 속죄받아 깨끗해진 것을, 보라색은 장차 왕복을 입을 자임을 암시한다.
요일 1:7 그러나 우리가 빛 가운데 다니면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께서도 등불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로 끝까지 준비된 신부의 자세를 가르치셨다.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등잔만 가진 자와 기름까지 예비한 자의 차이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는 그 기다림의 시간을 끝까지 깨어 준비하였는가에 있다. 곧 가시덤불 가운데 핀 아네모네는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의 피로 정결함을 입어 장차 왕 노릇 할 자가 됨을 상징한다. 한편 비둘기는 순결과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비둘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다른 짝을 찾지 않으며, 짝이 죽으면 평생 혼자 산다. 왕이 여인을 비둘기라 부른 것은 그녀가 오직 한 분만을 사랑하며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바울도 성도가 정신을 차리고 정결과 거룩함을 끝까지 지키기를 권면한다(살전 5:23).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을 보전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비유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킨다. 신앙은 지조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강할 때나 약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 비둘기와 같은 신앙이다. 거짓 메시아를 자처하는 자나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 왕은 결혼 후에도 여인을 향해 여전히 비둘기라 부른다(아 5:2). 이는 신분이 높아지고 새로운 호칭이 더해져도 처음에 지켰던 순결과 정절은 결코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국 가시밭의 백합화와 비둘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정결을 지키며 오직 한 분만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아가는 신부의 본질을 가리키는 표상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후 11:2).
고후 11:2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은 성도들이 여러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을 따라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을 향한 정결한 마음을 끝까지 지키기를 원하였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가운데도 환경이 바뀌고 형편이 나아지면 처음 가졌던 순전한 마음이 흐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가시밭의 백합화와 비둘기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는 분명하다. 환경이 어떠하든, 신분이 어떻게 높아지든 처음 사랑, 처음 정절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두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 고백이야말로 비둘기처럼 한 분만을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장 잘 보여 준다(빌 1:21). 야고보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가까이하신다고 권면하였다(약 4:8).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가까이하려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 마음의 거리만큼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 비둘기와 같은 일편단심도 결국 하나님을 향해 끝까지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6. 결혼 전 시련의 훈련이 왕비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여인은 본래 왕궁의 사람이 아니라 의붓 오빠들에게 노동을 착취당하며 얼굴이 햇볕에 그을릴 정도로 고생하던 포도원지기 시골 처녀였다. 왕에게는 이미 왕비가 육십 명, 후궁이 팔십 명, 처녀가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왕이 굳이 이 험한 환경에서 고생하던 여인을 데려온 이유는 단순히 그녀를 편히 쉬게 해 주려는 데 있지 않았다. 왕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과 마음이 하나 되어 자신의 뜻을 행할 자였다. 다른 왕비들은 대부분 정략결혼으로 애굽과 에돔과 모압 같은 이방 나라의 공주로서 시집온 자들이었으니, 본래 그 나라에서 왕 노릇 하던 딸들로서 고생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야생과 같은 환경, 곧 사자와 표범이 사는 헤르몬산 자락의 험지에서 양과 여우조차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곳에서 바위틈에 숨어 지내며 끝까지 정절을 지켰다. 욥도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였다(욥 23:10).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순금은 불에 들어가지 않고는 정금이 되지 못한다. 온실 속의 화초는 비바람이 몰아치면 쉽게 꺾이지만, 야생에서 단련된 자는 어떠한 시련이 와도 쉽게 상처 입지 않는 단단한 자가 된다. 무언가를 오래도록 반복하여 익혀 본 자만이 두려움 없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일도 수많은 실패와 고난을 거치며 단련된 자만이 흔들리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포도원에 그대로 두신 까닭은, 장차 그녀가 참으로 일해야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단련을 거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 원리를 분명히 가르친다(롬 8:17-18).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히브리서 기자도 징계와 단련의 목적을 분명히 알려 준다(히 12:11).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습된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당장은 괴롭고 슬프게 느껴지는 시련이라 할지라도, 그 시련을 통하여 단련된 자만이 의와 평강의 열매, 곧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앙을 거두어들이게 된다. 상속자의 자격은 거듭난 자녀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나, 그 상속을 실제로 받기 위해서는 고난을 함께 받고 이겨 내야 한다. 결혼한 뒤에도 이 여인은 곧바로 완전한 자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실수를 저지른다. 남편이 늦은 밤 문을 두드릴 때 귀찮음으로 인해 즉시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이다(아 5:2).
이 실수로 인해 남편을 잃어버린 듯한 두 번째 시련이 닥쳤고, 그녀는 순찰자에게 욕을 당하고 파수꾼에게 옷을 빼앗기면서도 성 밖까지 나가 남편을 찾아 헤맨다. 결국 그 시련을 통해 비로소 왕이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은 진짜 이유, 곧 호도동산에서 행하던 일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결혼 전의 야전 훈련과 결혼 후의 두 번째 시련은 모두 그녀를 군대 같이 당당한 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시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시련을 통하여 비로소 왕의 마음과 왕의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야고보도 시련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를 이렇게 가르친다(약 1:2, 4).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련은 성도를 부족함 없는 온전한 자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련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그 시련 속에 담긴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을 찾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울도 자기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였다(갈 2:20).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옛 자아가 죽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살아난다. 여인이 시련을 통해 자기중심적인 안일함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성도 역시 자기 욕심이 죽는 자리를 거쳐야 비로소 진정한 단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7. 신부가 '친구'와 '동역자'로 불리게 된 과정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여인이 호도동산에서 왕의 진짜 목적을 발견한 뒤, 그녀는 자기 자신도 포도원을 만들어 똑같은 일을 행하기 시작한다. 그 직전에 이미 여인은 자신의 신랑을 두고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자랑한 바 있다(아 5:16).
아 5: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다
여기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바울도 성도의 신분을 동역자로 분명히 표현한다(고전 3:9).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도 주님은 깨어 준비하는 종을 향해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눅 12:37).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눅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 들리라
주인이 도리어 띠를 띠고 종을 섬기는 자리, 이는 종과 주인의 구분을 넘어선 친밀한 관계를 보여 준다. 밭이나 집으로 머무는 자리와 동역자로 함께 일하는 자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마침내 친구의 자리에 들어선다(아 7:10-11).
아 7:10-11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여기서 '동네'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상 코페르 나무숲, 곧 속죄 나무가 우거진 숲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잠자리를 청하는 말이 아니라, 속죄의 은총으로 세워진 처소로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다(아 7:13). 그리고 거기에 새것과 묵은 것이 함께 있다는 표현은, 이미 길러 낸 열매와 지금도 계속 길러 내고 있는 열매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천국 비유 중 하나와도 통한다(마 13:52).
아 7: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갖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니라
마 13:52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곧 여인은 이제 자신이 낳고 기르고 훈련시켜 온 영적 자녀들을 왕에게 보여 드리며 자랑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왕은 이러한 여인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그녀에게 동산에 거주할 자격이 있다고 선언한다(아 8:13).
아 8:13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뜻을 함께 알고 함께 이루어 가는 관계가 곧 친구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칠 만큼 그 마음을 이해하였기에 그를 '친구'라 부르셨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다 알려 주었기에 그들을 '친구'라 부르셨다.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처음에는 가족으로서 누이와 신부가 되었으나, 왕의 뜻을 깨닫고 그 일에 동참하게 되면서 비로소 친구, 곧 동역자가 된 것이다. 동역자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자를 가리킨다. 결국 이 여인의 여정은 가족 됨에서 멈추지 않고 동역자 됨으로 완성되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친구라 부른다(약 2:23).
약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함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종은 시키는 일만 하는 자이지만 친구는 주인의 마음을 알고 스스로 그 일을 도모하는 자다. 성도 역시 단지 명령을 받아 순종하는 종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스스로 그 일에 동참하는 친구요 동역자의 자리로 자라가야 한다.
8.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도의 최종적 신분 변화는 무엇인가?
이 여인의 신분 변화를 정리하면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결혼 전, 포도원지기 시골 처녀로서 내 사랑, 내 어여쁜 자, 내 비둘기, 가시밭의 백합화로 불리던 시기다. 둘째 단계는 결혼 후 예루살렘 왕궁에 들어가 내 누이, 내 신부, 내 완전한 자로 불리던 시기다. 셋째 단계는 시련을 겪고 성숙해진 후, 군대 같이 당당한 자, 술람미 여자, 마침내 동산에 거주하는 자로 불리는 시기다. 왕에게는 이미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여인은 유일한 자로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도 충성된 종에게 주실 상을 이렇게 약속하셨다(마 25:23).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많은 여인들 가운데서 단 하나뿐인 자로 인정받는 것과, 많은 종들 가운데서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아 많은 것을 맡게 되는 것은 같은 원리를 보여 준다(아 6:8-9).
아 6:8-9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가장 사랑하는 바로다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수많은 왕비와 후궁이 있어도 왕의 마음과 하나 되어 그 뜻을 함께 이루어 가는 자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단계가 올라간다고 해서 이전 호칭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둘기와 같은 순결, 신부로서의 정절은 동산에 거주하는 자가 된 뒤에도 여전히 지켜야 할 본질이다. 단지 그 위에 친구와 동역자로서의 신분이 더해질 뿐이다.
이는 성도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 평안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왕비로 끝나는 자다. 그러나 왕의 진짜 바람은 그 이상이다. 자신과 마음이 하나 되어 함께 영적 자녀를 길러 내고 함께 우주의 경륜을 이루어 가는 동역자가 되는 것, 곧 군대 같이 당당한 전사가 되어 호도동산, 곧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가장 은밀한 처소에까지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처음 믿을 때의 순결과 정절을 끝까지 잃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련을 통해 단련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자로 자라가야 한다. 온실 속에 머물러 안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 왕의 동산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왕이 진정으로 바라는 신부의 모습이다.
이 세 단계는 어느 하나도 건너뛸 수 없으며, 또한 순서를 거꾸로 밟을 수도 없다. 먼저 처음 사랑의 순결을 지키는 단계를 통과해야 하고, 그다음 가족 됨의 단계를 거쳐야 하며, 마지막으로 시련을 통한 동역자 됨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신앙의 연차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마다 요구되는 단련과 깨달음을 실제로 통과해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상속자의 신분을 이렇게 설명한다(갈 4:7).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종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다시 상속자로 자라가는 신분의 여정은 아가서의 여인이 걸어간 길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바울도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이 달려온 길을 이렇게 정리하였다(딤후 4:7-8).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끝까지 달려간 자에게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약속은, 아가서의 여인이 시련을 통과하여 동산에 거주하는 자로 완성된 것과 동일한 원리를 보여 준다. 주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 친히 부르셨다(마 11:28-29).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 쉼은 모든 수고와 헌신을 멈추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애쓰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메는 가운데 누리는 참된 평안을 가리킨다. 동산에 거주하는 자로 자라가는 여정 역시 자기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멍에 아래서 동행하며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9. 나오며
아가서에 나타난 여인의 변천사를 통하여 왕이 신부에게 바라셨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왕의 바람은 단지 여인을 왕궁에 데려와 평안히 살게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시밭에 핀 백합화처럼, 바위틈에 깃든 비둘기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정결과 일편단심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했고, 결혼한 뒤에는 누이와 신부와 완전한 자로서 가족 된 자리에 들어가야 했으며, 마지막에는 시련을 통과하여 군대 같이 당당한 자, 술람미 여자, 동산에 거주하는 친구요 동역자로 자라가야 했다.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인내로 달려가야 한다고 권면한다(히 12:1-2).
히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경주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며 달려가야 하는 여정이다. 성도 역시 이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처음 믿음을 가진 그 순결함을 끝까지 잃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고난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어야 한다. 자유의지로 천국을 침노하는 열정을 회복해야 하며, 자신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혼한 왕비로 만족하지 않고, 왕의 뜻을 깨달아 그 일에 직접 동참하는 친구요 동역자로 자라가야 한다. 하나뿐인 자, 왕의 마음과 하나 된 자로 인정받기까지 정결과 인내와 헌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호도동산의 송이처럼 영적 자녀를 길러 내는 일에도 헌신해야 하며, 받은 은혜를 자기 안에만 가두지 않고 다른 영혼을 향해 흘려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처음 사랑의 순결, 가족 됨의 친밀함, 동역자 됨의 헌신, 이 세 가지가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자라갈 때에야 비로소 왕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신부가 될 수 있다. 바울도 자신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분과 함께하는 영광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고후 5:17).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거듭난 자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그 새로움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아가서의 여인이 호칭을 더해 가며 완성을 향해 나아간 것처럼, 성도 역시 날마다 새로워지며 왕이 바라는 신부의 모습으로 자라가야 한다.
요한도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그날을 보았다(계 21:3-4).
계 21:3-4 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단지 멀리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계시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약속이다. 바울도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한 부활의 권능 안에서 살아가기를 간구하였다(빌 3:10).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시련을 통과한 자만이 비로소 부활의 권능, 곧 죽음 너머의 영광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가시밭 가운데서도 정결을 지키며, 시련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마침내 왕의 가장 은밀한 동산에까지 들어가 그 뜻을 함께 이루어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30일(화) ·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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