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97)]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을까?(호1:1~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7IXgmpXjxro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는가?
2. 북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따랐는가?
3. 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과 호세아의 활동 시기는 어떠했는가?
4. 하나님은 왜 여로보암 2세 때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셨는가?
5. 호세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6.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을 예표하는가?
7. 호세아의 외침을 듣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가?
[설교핵심]
이 설교는 호세아서를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조명합니다.정보배 목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가혹한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단순히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배반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값 주고 사오시는 구속자의 마음을 직접 체험하고 전하게 하기 위함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호세아의 이름이 여호수아를 거쳐 예수라는 이름으로 연결되는 구속사적 의미를 분석하며, 가장 풍요롭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이 메시지가 선포된 배경에는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결국이 설교는 호세아의 외침을 회개와 천국 복음으로 재해석하여, 오늘날 성도들이 심판주가 아닌 구원자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철저한 회개와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론(197)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을까
(호 1:1-9)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오늘은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 197번째 시간으로 호세아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예표를 두 번째로 살펴본다. 호세아서에는 다섯 가지 중요한 그리스도의 예표가 나온다. 첫째는 음란한 신부를 다시 값 주고 사 오시는 남편이고, 둘째는 참된 왕 다윗의 자손이며, 셋째는 다시 살려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넷째는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섯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구속자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랑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이미 우리의 신랑이심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부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다. 호세아서의 충격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바람난 아내처럼 다른 신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호세아에게 그 무거운 짐을 실제 삶으로 지게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고, 자녀를 낳고, 그 여인이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 뒤에도 다시 사랑하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한 선지자를 괴롭히기 위한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의 몸과 가정에 새겨 북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가 왜 그 무거운 사명을 짊어져야 했는지, 호세아의 이름과 시대적 배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그리고 회개의 외침을 듣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는가?
호세아 1장 2절은 선지자의 소명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상적인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을 따라간 영적 간음의 상태를 호세아가 직접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호세아가 사랑한 고멜은 처음부터 신전 창기였던 여자가 아니다. 성경은 그녀를 디블라임의 딸이라고 부른다(호 1:3). 이름과 아버지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녀가 한 가문에 속한 여인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녀 안에는 음란한 영, 밖으로 돌아다니게 하는 영, 자신을 꾸미고 사치하려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다고 본다. 얼굴이 아름답고 사람의 사랑을 쉽게 받는 성향도 그녀를 바깥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호세아는 그 여인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결혼했다. 그는 고멜과 자녀 셋을 낳았다. 아들이 이스르엘, 딸이 로루하마, 또 다른 아들이 로암미였다(호 1:4-9). 자녀의 이름 하나하나가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이고,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며,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호세아가 경험한 고통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었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면 아내가 남편과 가정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멜은 자녀와 남편을 뒤로하고 다른 남자의 사랑을 따라갔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배신을 몸으로 겪게 하셨다. 이것은 호세아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를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적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말씀만 들려주지 않으시고 종의 삶에 말씀을 새기신다.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나라의 멸망을 보여 주기 위한 표적이었다(렘 16:1-4).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백성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겔 24:15-24). 호세아의 결혼 역시 북이스라엘의 음행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 가정 안에 나타내는 표적이었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왜 이 명령을 거절하지 않았는가? 선지자는 자기 행복만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은 때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살리기 위해 걸어간다. 호세아의 고통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가정은 북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들을 붙드시는지 보여 주는 설교가 되었다.
3. 북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따랐는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다.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여호와께 예배하지 않고, 베델과 단에 세운 송아지 앞에서 예배했다는 것이다. 여로보암 1세가 만든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겼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을 섬기는 혼합주의였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일에 농사를 지었다. 목축하는 사람은 양 떼를 물 있는 곳으로 데려가면 되지만, 땅을 경작하는 사람에게는 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가나안 사람들은 비와 농산물을 바알과 아세라가 준다고 믿었다. 바알 신전에는 음란한 행위를 통해 비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 풍습도 있었다. 북이스라엘은 이 가나안 신앙에 물들어, 하나님이 주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바알에게 바쳤다.
하나님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바알이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은과 금도 하나님이 주셨는데, 백성은 그것으로 바알의 제단을 꾸몄다.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이것을 주었다”고 말했다(호 2:5).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다른 신의 공로로 돌린 것이 북이스라엘의 죄였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듯했지만, 평일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신앙과 생활이 갈라졌다.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생업과 재물과 풍년을 위해서는 다른 신을 찾았다. 이것이 혼합주의의 무서움이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다. 애굽의 신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열 가지 재앙으로 드러내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셨다. “너는 나만 따르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결혼은 배타적인 관계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만 바라보고 살기로 약속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여호와만 섬겨야 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신을 따라갔다.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도, 가나안에서 다시 우상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냈는데, 너희는 나를 부를수록 점점 멀리한다”고 탄식하셨다(호 11:1-2). 이 탄식이 호세아서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다.
4. 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과 호세아의 활동 시기는 어떠했는가?
호세아 1장 1절은 호세아의 활동 시기를 남유다 왕들과 북이스라엘 왕의 이름으로 기록한다. 남유다에서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왕이었고, 북이스라엘에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왕이었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의 13대 왕이며, 약 40년 동안 통치했다.
호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가장 넓었고 물질적으로 가장 번성했다. 앗수르도 쉽게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나라가 되었다. 남유다의 웃시야도 같은 시대에 국력을 키웠다. 두 나라는 서로 전쟁하기보다 안정된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깊이 타락했다. 겉으로는 부유하고 강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고 송아지 우상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 때부터 북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때까지 활동했다. 짧게 보면 약 30년이고, 길게 보면 60년 가까운 기간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이름과 마지막 왕의 이름이 같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마지막 왕 호세아는 그 구원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다.
북이스라엘의 왕조는 여로보암 왕조, 바아사 왕조, 오므리 왕조, 예후 왕조로 계속 바뀌었다. 여로보암 2세 이후에는 스가랴가 살룸에게 죽고, 살룸은 므나헴에게 죽고,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는 베가에게 죽고, 베가는 호세아에게 죽었다. 반역과 쿠데타가 이어졌다. 왕들은 앗수르와 애굽 사이를 오가며 사람의 힘을 의지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호 7:11; 8:9; 12:1).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셨다. 나라가 가장 넓고 풍요로울 때, 백성이 가장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였다. 하나님은 멸망 직전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너희가 나를 버렸지만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돌아오라. 내가 너희를 다시 품겠다.” 호세아의 가정과 예언은 이 마지막 부르심의 표적이었다.
호세아서가 소선지서 가운데 앞부분에 놓인 것도 이 책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모스도 북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지만, 호세아는 자신의 가정과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죄를 지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배신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5. 하나님은 왜 여로보암 2세 때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 때 호세아를 부르신 첫째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북이스라엘도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열 지파로 이루어진 백성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고,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3:14-16; 15:5-7).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여로보암 2세 때는 북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누리는 외적 조건이 가장 좋았다. 영토가 넓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가장 많이 차지한 때였다. 하나님은 그 좋은 때를 영원히 이어 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백성은 풍요를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를 준다고 믿는 바알에게 갔다. 하나님은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이유는 호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사명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야샤에서 나온 이름이며,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꾼 것도 같은 구원의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민 13:8, 16).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히브리어 이름도 예슈아이며, 예슈아는 여호수아와 호세아의 축약형이다. 헬라어로 옮겨지면서 예수스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예수라고 부른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했다(마 1:21). 호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장차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셋째 이유는 호세아가 브에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브에리는 솟구쳐 나오는 샘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생명수가 솟아나는 샘처럼,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북이스라엘에 흘러가게 하셨다. 호세아가 자기 힘으로 구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흘려보내셨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부르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어느 시대에, 어느 가정에, 어떤 이름으로 태어나게 하실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하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회개의 복음을 듣고 거룩한 신부와 주님의 전사로 준비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6. 호세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호세아와 여호수아와 예수는 서로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구원의 의미로 연결된다. 호세아는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며,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하늘의 기업으로 이끄신다.
눈의 아들 호세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 그 이름을 모세가 여호수아로 바꾸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여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율법만으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고, 여호수아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악한 영을 이기며 기업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이름은 단지 아름다운 호칭이 아니다. 그분의 이름에는 사명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어려움에서만 건져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바람난 신부처럼 세상을 따라갔을 때,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속전으로 지불하여 우리를 다시 사 오셨다. 호세아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고멜을 사 온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신 일을 예표한다(호 3:2; 엡 5:25).
호세아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게 “너희를 구원할 자가 있다”고 선포하셨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그 구원의 이름을 듣고도 우상에게 갔다. 오늘 우리도 예수라는 이름을 입술로 부르면서 실제로는 재물과 사람과 세상의 힘을 의지할 수 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부른다면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 다른 신과 다른 힘을 함께 붙들어서는 안 된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8). 이 사랑을 깨달으면 회개가 억지 의무가 아니라 돌아갈 길이 된다.
7.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을 예표하는가?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하나님의 신랑 되심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른 신에게 마음을 주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배신을 체험하게 하시고, 고멜을 다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배신했는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끝까지 사랑하시는지 동시에 보여 주셨다.
고멜은 세 자녀를 낳고도 집을 떠났다. 호세아는 “이제는 네가 내 아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호세아 2장 2절은 “그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언약이 깨진 현재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를 끝내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무대를 만드신 것이다.
호세아는 고멜이 다른 남자의 품에 있을 때에도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 더 나아가 그 여자가 노예 시장에 팔렸을 때 값을 지불하고 사 와야 했다.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한 여종의 몸값에 해당하는 값이었다. 고멜은 남편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 와야 할 상태가 되었다. 이 장면은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고, 주님이 값을 치러 구원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 주셨다(엡 5:25). 그분은 우리의 죄를 그냥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값을 지불하셨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으로 팔려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 오셨다. 이것이 속전의 사랑이며, 호세아의 무거운 결혼 생활이 예표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호세아에게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고 말하게 하셨다(호 3:3).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다른 신을 따르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살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지만, 우리도 주님만을 사랑하는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죄를 허용하는 사랑이 아니다. 고멜을 다시 데려온 뒤에도 음행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사셨다는 사실은 다시 죄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살라는 언약의 요구다. 은혜를 받았으면 거룩함으로 응답해야 한다.
8. 호세아의 외침을 듣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가?
호세아서는 회개하라는 부르심과 심판의 경고를 함께 담고 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선지자를 보내셨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셨고(호 6: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다(호 14:1). 하나님은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돌아와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여로보암 1세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210년 동안 한 번도 제거하지 않았다. 왕조가 바뀌고 쿠데타가 일어나도 우상은 그대로였다. 선지자가 외쳐도 듣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했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했다. 호세아의 회개 외침을 거부한 결과가 심판이었다.
호세아 선지자의 이름은 구원을 뜻하지만, 마지막 왕 호세아의 시대에는 심판이 왔다. 이름만 같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돌아와야 한다. 구원의 이름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이름이 심판의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주님으로 나타난다.
호세아 1장 11절은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울 날을 말한다. 호세아 3장 5절은 그들이 돌아와 하나님 여호와와 왕 다윗을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다윗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한 왕 아래 모이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 우리는 호세아의 외침을 듣고 있다. 회개하라. 우상을 버리라. 주님께 돌아오라. 회개는 단지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신을 따라갔던 죄를 인정하며, 주님만 섬기기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고, 죄를 받아들인 악한 영을 거절하며, 다시 그 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마지막 시대에 회개의 복음을 통해 거룩한 신부를 준비하신다. 우리가 회개를 멈추면 세상과 우상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회개를 계속하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악한 영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천국의 기업을 준비하게 하신다. 회개는 우리를 괴롭히는 짐이 아니라 구원자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여 주셨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고, 현재에는 그들이 다른 신을 따라가고 있으며, 미래에는 심판을 받거나 회개하여 돌아올 길이 열려 있었다. 세 자녀의 이름은 현재의 심판을 말하지만, 호세아 1장 10절과 2장 23절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미래를 말한다. 심판의 말씀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시지 않는다. 바알에게 드린 은과 금, 하나님이 주신 곡식과 포도주를 우상에게 바친 죄를 정확하게 지적하신다. “내가 주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신다(호 2:8).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를 드러내신다. 병을 숨긴 채 방치하지 않고 치료하기 위해 상처를 열어 보이는 것처럼, 호세아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적 병을 드러내는 수술과 같았다.
고멜의 행동도 영적 작동 원리를 보여 준다. 음란한 영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려 세상으로 향하게 한다. 돌아다니게 하는 영은 가정과 말씀과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꾸미고 사치하려는 욕망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과 물질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이런 영적 상태가 그대로 방치되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다른 신의 공로로 돌리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단지 “나쁜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고 의지했던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부르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었다. 호세아 4장 1절은 이 땅에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한다. 호세아 4장 6절은 지식이 없으므로 백성이 망한다고 말한다. 오늘도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말씀을 읽고도 자기 욕심을 따라가면 지식이 삶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만 섬기며, 죄에서 돌아오는 순종으로 나타난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때에는 남유다에서 웃시야와 요담과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었고, 이사야도 활동했다. 북이스라엘에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있었다. 하나님은 한 시대에 여러 증인을 세워 같은 메시지를 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다. 선지자를 한 번 보내고 끝내지 않으셨다. 계속 말씀하시고, 계속 경고하시고, 계속 돌아오라고 부르셨다. 그럼에도 듣지 않을 때 심판이 임한 것이다.
여로보암 2세 때의 번영은 하나님께 돌아올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사람은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기 쉽지만, 북이스라엘은 풍요로울 때 하나님을 떠났다. 경제가 좋아지고 영토가 넓어지자 자신들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풍요가 하나님을 대신하면 풍요 자체가 우상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시지만, 잘된 뒤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복을 주신 분을 기억하고 그 복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호세아가 무거운 짐을 진 것은 북이스라엘의 마음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말로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면 백성은 그 말을 가볍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실제 가정에 배신과 눈물과 기다림이 나타나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눈앞에 드러났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의 종을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는 사건으로 바꾸신다. 호세아의 삶은 북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하는 성경책과 같았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 질문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는가? 아니면 주일에는 하나님을 찾고 평일에는 세상의 신을 의지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건강과 자녀와 기회를 누구의 것이라고 고백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는 대상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나에게 편안함과 이익을 주는 세상인가? 호세아서의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구원받은 사람을 다시 세상에 내어 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자기 신부로 삼으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신다(엡 5:26-27). 그러므로 회개는 한 번의 감정적 결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날마다 마음을 살피고, 세상과 타협한 부분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호세아서의 마지막 방향은 새 출발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부르심은 정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호 6:1). 하나님은 찢으셨지만 도로 낫게 하시고, 치셨지만 싸매어 주신다. 이틀 후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게 한다(호 6:1-2). 우리가 아무리 멀리 갔어도 주님께 돌아가면 회복의 길이 열린다.
회개를 방해하는 것은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절망이다. 그러나 고멜처럼 팔려 간 사람도 다시 사 오셨고, 로암미라고 불린 백성도 다시 암미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회복은 없다. 다만 돌아와야 한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 마음을 돌려야 한다. 회개를 미루는 동안 마음은 더 굳어지지만, 오늘 돌이키면 오늘부터 회복이 시작된다.
호세아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미리 보여 주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셨다. 그분은 죄의 종이 된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무거운 짐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위해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가 받은 회개의 복음도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이 민족을 통해 회개를 외치게 하시고, 세상과 우상에 묶인 영혼을 돌아오게 하신다. 이 복음을 들은 사람은 먼저 자기 안의 우상을 버리고, 가족과 이웃이 구원받도록 기도하며,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한다. 호세아가 자기 가정의 아픔을 통해 북이스라엘을 살리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회개와 사랑으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
9.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는지, 북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따랐는지, 호세아가 활동한 시대와 여로보암 2세 때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또한 호세아라는 이름이 여호수아와 예수의 이름으로 이어지며,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죄인을 찾아 값 주고 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무리한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사명을 맡기셨다. 고멜을 사랑한 호세아의 고통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나타냈다. 예수님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셨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신부이며, 다른 신을 따르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호세아의 외침을 듣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지만,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붙들고 회개와 거룩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2일(화)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