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4(일) 주일낮1부예배
제목: [기독론(100)]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06) 그는 항상 배우는 자였다"(시편 97: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LUdSE8awYsw
1. 들어가며
성도는 이 땅에서 단지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이며, 마지막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분과 지위와 영광을 얻을 것인지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단지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고, 어떤 사람에게 왕 노릇할 권세를 맡기시는지를 배우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시편 97편은 바로 그 배움의 출발점이 되는 말씀이다. 이 시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우주를 감정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며, 사람을 임의로 편애하거나 미워하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법과 말씀을 따라 공의롭고 공평하게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을 만날 때 먼저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말씀 앞에서 자신과 자기 가문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길도 말씀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원리도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 97: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을 단순히 죄에서 건져 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시며, 그 사람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떤 존재로 서게 될지를 준비시키신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만 보여 주지 않는다. 상속자의 길을 보여 주는 야곱도 보여 주고, 민족을 이끄는 모세와 여호수아도 보여 주며, 마침내 왕 노릇할 자의 예표로 다윗을 보여 준다. 이 시간에 다윗을 공부하는 것은 한 인물을 존경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어떤 사람에게 왕직을 맡기시는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대표적인 예표다. 그는 처음부터 완성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사명으로 보냄받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였으며,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다윗도 배워야 했다. 그는 사울을 통해 잘못된 왕직을 배웠고, 자신의 죄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배웠으며, 하늘 보좌의 계시를 통해 의와 공평과 거룩을 배웠다.
고로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는 이 땅에서 왕직을 배워야 한다. 직분을 가졌다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위에 군림한다고 왕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하나님 앞에서 배우는 자이며, 말씀으로 자신을 교정받는 자이며, 죄를 책망받을 때 즉시 엎드리는 자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이 어떻게 왕직을 배웠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무엇을 배워야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하나님이 세우신 왕도 배워야 하는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도 배워야 한다. 다윗이 바로 그 증거다. 다윗은 평범한 목동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그 순간 곧바로 완성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고, 고난을 통과했으며, 사울에게 쫓기고 광야에서 훈련받으며 왕직의 본질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던 다윗에게서 발견되는 첫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왕권을 빼앗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람들은 장자 엘리압을 먼저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셨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보고 계셨다(삼상 16:7, 13).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여기서 “크게 감동되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동사 ‘찰라흐’와 연결된다. 이 말은 단순히 조용히 임했다는 뜻만이 아니다. 강하게 임하다, 돌진하다, 세차게 역사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강하게 임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주로 사람 위에 임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고, 그 결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다. 다윗은 바로 그런 성령의 감동을 입은 왕이었다.
그렇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배워야 한다. 사명으로 보냄받은 사람도 배워야 하고, 은사를 받은 사람도 배워야 하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는 은사는 위험해질 수 있다. 배우지 않는 직분은 자기 과시가 될 수 있다. 배우지 않는 왕권은 군림과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다윗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신 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다고 말씀하셨다(삼상 13:14). 사도 바울도 안디옥 비시디아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며 다윗을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할 사람으로 설명했다(행 13:22).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천국에서 큰 자는 단순히 능력이 많은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며, 어떤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자를 책망하시는지를 아는 자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직분은 외식이 되고, 왕직은 억압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권세는 섬김이 되고, 왕직은 목양이 된다.
다윗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성령의 감동과 은사다. 다윗은 단순히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어 찬양하고 예언하고 영적 세계를 본 사람이었다. 그는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와 심판, 생명책과 의인의 길, 악인의 멸망과 하늘의 영광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다윗을 알려면 사무엘상하만 읽어서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도 바울을 알려면 사도행전뿐 아니라 바울서신을 읽어야 하듯, 다윗을 알려면 사무엘상하와 더불어 시편을 읽어야 한다.
배움은 언제나 낮아짐을 요구한다. 배우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을 완성된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며 배웠고, 광야에서 도망 다니며 배웠으며, 책망을 들으며 배웠고, 시편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배웠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끝까지 배우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윗은 사명과 마음과 성령의 감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왕직을 실제로 배워야 했다. 그 배움이 없었다면 그는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예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3. 사울은 어떤 잘못된 왕직을 보여 주었는가?
다윗이 왕직을 배운 첫 번째 교실은 사울 왕에게서였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났으며, 백성의 눈에는 왕으로 보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왕직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다. 다윗은 사울을 보며 “왕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사울의 첫 번째 실패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아각을 살려 두고, 좋은 양과 소도 남겨 두었다. 사무엘이 책망하자 사울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들었다고 고백했다(삼상 15:24).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왕은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의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사울은 사람 앞에서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오늘의 사역자도 마찬가지다. 성도를 사랑해야 하지만 성도의 비위만 맞추면 안 된다. 교단과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면, 그는 사울의 길을 걷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게서 이 점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왕이 되어야 함을 알았다. 사무엘하 5장 12절은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워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줄을 알았다고 말한다. 왕직의 출처를 알았다는 뜻이다. 왕직은 백성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다.
삼하 5: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사울의 두 번째 실패는 공적 권세를 사적 욕망에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대적을 막으라고 세우셨다. 그런데 사울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러 다녔다. 블레셋과 싸우라고 맡겨진 군사력을 자기 질투와 왕권 유지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왕직의 타락이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자기 욕망을 위해 쓰면 그 권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다. 목회자도, 장로도, 교사도, 부모도,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세를 사람을 살리고 보호하는 데 쓰지 않고 자기 체면과 욕망과 분노를 위해 사용하면, 그는 사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사울의 세 번째 실패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보지 못한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울이 비록 버림받는 길에 들어섰더라도 한때 여호와께 기름부음받은 왕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심판자가 되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는 하나님이 처리하신다는 질서를 배웠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사울에게서 배운 왕직은 역설적이다. 사울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가 다윗에게 교훈이 되었다. 다윗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을 배웠고, 권세를 사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함을 배웠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잘못된 사람에게서도 배운다. 사울처럼 살지 않기 위해 사울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4. 다윗은 부하의 생명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다윗은 사울에게서만 왕직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곁의 부하들을 통해서도 왕직을 배웠다. 왕은 사람을 부리는 자가 아니다. 왕은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서 귀히 여기는 자다. 이 진리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베들레헴 우물물 사건이다.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을 때, 블레셋 군대는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있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었다. 다윗은 문득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여 그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왔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삼하 23:15-17).
삼하 23:15-17 다윗이 사모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라.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다윗은 자기 말 한마디가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왕의 말은 가볍지 않다. 지도자의 말은 누군가에게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자기 목마름을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 드렸다.
사울은 군사를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의 생명을 자기 사사로운 소원보다 귀히 여겼다. 여기서 왕직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사병처럼 부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 기분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는 중요하다. 직분자는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사역의 도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부모도 자녀를 자기 욕망의 연장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피 값으로 산 생명이다. 그 생명을 함부로 다루면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왕이 무엇을 삼가야 하는지를 배웠다. 왕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거는 자이지, 백성의 목숨을 자기 만족을 위해 쓰는 자가 아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참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동원하여 자기 왕국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러므로 왕직은 섬김 없는 권세가 아니다. 왕직은 생명을 귀히 여기는 책임이다. 다윗은 베들레헴 우물물 앞에서 이것을 배웠다. 그는 자기 목마름보다 부하들의 피를 보았고, 자기 욕망보다 하나님 앞의 두려움을 보았다. 이것이 사울과 다른 다윗의 길이다.
5. 다윗은 자기 죄와 징계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다윗은 다른 사람의 실패에서만 배운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실패에서도 배웠다. 사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아픈 사건은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이다. 그는 이미 왕권이 안정된 시기에 영적으로 느슨해졌다. 전쟁터에 나가야 할 때 왕궁에 머물렀고, 옥상에서 한 여인을 보고 정욕에 끌려 죄를 범했다. 그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다.
다윗의 죄는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다. 그는 왕의 권세를 사용하여 남의 아내를 데려왔고, 그 죄를 덮기 위해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선에 세워 죽게 만들었다. 이것은 간음죄이며 살인죄이고, 동시에 왕권 남용의 죄다.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책망 앞에서 드러났다. 사울은 책망을 들었을 때 변명하고 체면을 구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 즉시 고백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죄를 책망받았을 때 즉시 엎드렸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세워질 수 있었다(삼하 12:13).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사하셨지만, 죄의 결과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셨다. 칼이 다윗의 집에서 떠나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주어졌고, 다윗의 집안에는 비극이 이어졌다. 간음과 살인의 죄가 가정 안에서 고통스러운 징계로 돌아온 것이다(삼하 12:10-12).
삼하 12:10-12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배워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의 길이지만,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죄를 용서하시되 죄를 미워하신다. 회개하는 자를 살리시되, 죄가 남긴 결과를 통해 두려운 교훈을 주신다.
다윗은 이 사건 이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시편 7편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말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칼과 활이 예비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추상적 신학이 아니다. 다윗이 자기 죄와 징계를 통과하며 알게 된 하나님의 모습이다.
시 7:11-13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다윗은 자기 실패에서 배웠다. 그는 한 번 크게 넘어졌지만, 그 죄를 가슴에 새겼고 같은 길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실패하지 않는 자가 아니다. 실패했을 때 배우는 자다. 책망받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며, 회개로 다시 정결해지는 자다.
6. 하늘 보좌는 왕직의 어떤 기준을 보여 주는가?
다윗이 배운 세 번째 교실은 그가 받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여 환상을 본 것이다. 이번 설교의 본문인 시편 97편도 역시은 하나님의 통치와 보좌를 환상으로 본 것이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며, 그 보좌의 기초가 의와 공평이라고 말한다. 왕직을 배워야 할 사람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기준은 없다.
시편 97편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는 표제가 없어 작자 미상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70인역 전승에서는 이 시가 다윗과 연결되어 전해진다. 신약 성경이 구약을 인용할 때 많은 경우 70인역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편 97편을 다윗의 왕직 이해와 연결하여 묵상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저자 논쟁 자체가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보좌다.
하나님의 보좌는 의와 공평의 보좌다. 여기서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크’ 계열의 말과 연결되며,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바름을 가리킨다. “공평”은 ‘미쉬파트’ 계열의 말과 연결되며, 재판과 판결과 질서 있는 통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감정적 통치가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편드는 통치도 아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판결하시고 공평하게 다루신다.
시 97: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왕 노릇할 자는 이 보좌를 배워야 한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의 의와 공평을 모르면 왕직을 잘못 사용할 수 있다. 은사가 있어도 공의의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을 함부로 다루게 된다. 직분이 있어도 하나님의 보좌를 배우지 못하면, 그는 자기 보좌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은 자기 보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본다.
시편 9편도 이 사실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앉으시며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신다. 그리고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신다(시 9:7-8).
시 9:7-8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 기준을 보여 준다. 그 보좌 앞에서는 외모가 통하지 않는다. 직분도 가면이 될 수 없다. 목사라는 이름, 장로라는 이름, 권사라는 이름, 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사람을 세워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좌에서 의와 공평으로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맡겨진 권세를 가진 사람은 늘 물어야 한다. 나는 공평한가. 나는 의로운가. 나는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동시에 시편 97편은 불의 심판도 말한다.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 대적들을 사른다. 구약에서 불은 하나님의 거룩과 심판을 자주 나타낸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렸을 때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켰고, 고라의 무리가 반역했을 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소돔과 고모라도 불의 심판을 받았다. 이것은 왕직을 받은 자에게 매우 두려운 경고다.
시 97:3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그러나 신약의 완성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을 본다. 요한계시록 22장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한다. 심판의 불과 생명의 물은 서로 다른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불로, 회개하고 생명을 얻은 자에게는 생명수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여기서 한 분 하나님 신앙이 분명해진다. 하늘 보좌는 나뉜 보좌가 아니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 한 분 하나님께서 경륜 가운데 아들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는 왕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다윗이 배운 하늘 보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왕직의 기준을 보여 준다.
7. 왕은 왜 거룩함을 배워야 하는가?
그런데 왕직은 권세만의 문제가 아니다. 왕직은 거룩함의 문제다. 왕이 손은 더럽고 마음은 부정한데 보좌에 앉으면, 그 보좌는 백성을 살리는 자리가 아니라 백성을 해치는 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이 되면서 점점 더 거룩함을 배워야 했다.
시편 24편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답은 분명하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다. 이것은 단순히 일반 성도에게만 요구되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 하늘 시온산에 서고, 왕 노릇할 자에게 필요한 조건이다(시 24:3-4).
시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이 말씀은 오늘의 교회에도 날카롭게 적용된다. 사람은 겉모습을 꾸밀 수 있다. 직분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고, 말로 경건을 가장할 수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는 충성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민낯이 드러난다. 화장한 얼굴이 아니라 씻긴 얼굴이어야 하고, 포장된 경건이 아니라 회개로 정결해진 심령이어야 한다. 왕 노릇할 자는 사람 앞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손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행위가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는 것은 내면의 동기와 생각이 정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인생의 방향이 세상 헛된 것에 붙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짓 맹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왕 노릇할 자는 이 네 가지를 배워야 한다. 손이 더러운 자가 권세를 잡으면 약한 자를 압제한다. 마음이 부정한 자가 직분을 얻으면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한다. 뜻을 허탄한 데 둔 자가 지도자가 되면 성도를 세상 성공의 도구로 만든다. 거짓말하는 자가 보좌에 앉으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시편 29편도 왕에게 필요한 거룩함을 말한다. 권능 있는 자들은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하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해야 한다(시 29:1-2).
시 29:1-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거룩한 옷은 외적인 예복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상태를 말한다. 피 묻은 옷, 강포의 옷, 착취의 옷, 외식의 옷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왕직을 맡은 자일수록 더 정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죄는 개인의 죄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를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일 뿐 아니라, 왕 노릇할 자가 거룩하게 준비되는 길이다. 죄는 악한 영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몸과 마음과 생각을 더럽히고, 악한 영이 역사할 자리를 남긴다. 그러므로 왕직을 사모하는 자는 먼저 회개를 배워야 한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회개했다. 그리고 그 회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웠다. 사울은 왕직을 붙들려고 했지만 회개를 배우지 못했다. 다윗은 왕직보다 하나님 앞의 정결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다.
그렇다. 왕은 거룩함을 배워야 한다. 거룩하지 않은 권세는 위험하다. 정결하지 않은 은사는 위험하다. 회개 없는 직분은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날마다 자신을 씻고, 손과 마음과 옷을 정결하게 하며, 하늘 시온산에 설 수 있는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8. 왕은 왜 군림자가 아니라 목자여야 하는가?
다윗이 마지막으로 배운 왕직의 본질은 목양 곧 목자적인 왕직이다. 왕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목자다. 다윗은 어린 시절 목동이었다. 그는 양을 치며 왕직의 가장 깊은 원리를 배웠다. 양은 약하다. 양은 방향을 잘 잃는다. 양은 맹수에게 쉽게 찢길 수 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양을 해치는 존재와 싸워야 한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깨달은 목자적 왕직의 고백이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하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신다(시 23:1-4).
시 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지팡이와 막대기는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는 도구다. 길을 잃은 양을 방향으로 이끌고, 위험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한다. 반면 막대기는 양을 해치는 짐승을 대적하는 도구다.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가면 목자는 막대기로 싸워야 한다.
이 원리를 거꾸로 사용하면 사역이 무너진다. 지팡이로 성도를 때리고, 막대기로 악한 영을 대적하지 못하면 목양이 아니다. 성도를 억압하고 조종하고 군림하면서도 자신을 왕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다윗의 길이 아니라 사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참된 왕은 성도를 살리고, 성도를 인도하며, 성도를 괴롭히는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한다.
목양의 왕직은 약한 자를 먹이로 삼지 않는다. 세상 왕들은 자주 힘없는 사람을 밟고 올라서며, 권세를 자기 안전을 지키는 성벽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반대로 약한 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힘을 사용한다. 그래서 목자의 왕직은 십자가의 왕직과 연결된다. 십자가는 군림하는 왕의 의자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 주는 왕의 보좌다.
이것이 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하는 귀신론과도 연결된다. 성도를 괴롭히는 것은 단순한 심리 문제만이 아니다. 죄와 상처와 조상들의 죄를 통해 악한 영이 역사할 수 있다. 목자는 양을 책망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묶고 있는 악한 영의 역사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은 사람을 향한 폭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회개와 말씀을 통한 영적 전투여야 한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주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셨다.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말씀하신 장면을 기록한다(눅 13:32).
눅 13: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왕직은 목자적 왕직이었다. 주님은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왕이시지만, 그 다스림은 양을 멸망시키는 폭정이 아니다. 헬라어 요한계시록 2장 27절의 “다스리다”에는 ‘포이마이노’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이는 목양하다, 양을 치다는 뜻을 가진다. 주님의 통치는 목양의 통치다. 그분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자기 양은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계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그러므로 성도도 왕직을 탐내기 전에 목양을 배워야 한다.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마음, 직분으로 누르려는 마음,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대신 양을 살리고, 양을 인도하고, 양을 해치는 악한 영을 대적하며, 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다윗이 목동 시절부터 배운 왕직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참된 왕직이다.
9. 나오며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왕직을 배웠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윗은 사명으로 보냄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으며,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울의 실패를 통해 잘못된 왕직을 배웠고, 베들레헴 우물물 사건을 통해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왕직을 배웠으며, 자기 죄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배웠고, 하늘 보좌를 통해 의와 공평의 통치를 배웠으며, 목동의 삶을 통해 군림이 아니라 목양이 왕직의 본질임을 배웠다.
성도도 이 길을 배워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믿음과 회개의 문제이지만, 천국에서 어떤 신분과 영광으로 사는가는 이 땅에서 어떻게 준비하느냐와 깊이 연결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직분을 자랑해서는 안 되고, 외적인 성공으로 자신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배우고 있는가, 회개하고 있는가, 의와 공평을 따라 살고 있는가, 양을 살리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보좌는 의와 공평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왕 노릇할 자는 불의와 편파와 거짓을 버려야 한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이 맡기신 권세를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울의 실패를 보면서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성도는 또한 자기 실패에서도 배워야 한다. 다윗처럼 죄를 책망받을 때 즉시 엎드려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의 길이며, 정결의 길이다. 그러나 회개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면허가 아니므로, 죄의 결과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왕직을 사모하는 사람일수록 죄 앞에서 더 민감해야 하고, 날마다 자신을 씻어 거룩함을 배워야 한다. 성도는 마지막으로 목자적 왕직을 배워야 한다.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는 데 사용해야 하고, 막대기는 양을 해치는 악한 영을 대적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사람을 억압하고 군림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방식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선한 목자이신 것처럼, 왕 노릇할 자도 생명을 살리고 보호하는 목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왕직만 사모할 것이 아니라 왕직에 합당한 삶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하늘 보좌를 바라보며, 의와 공평과 거룩과 목양을 익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만하면 되었다. 너는 왕직을 받을 만하다”라고 하실 때까지, 성도는 배우는 자로 서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늘 배우고 회개하며 의와 공평과 거룩과 목양의 왕직을 준비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24일(주일)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다윗 왕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지도자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며,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기 위해 성도가 갖춰야 할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 정보배 목사는 다윗을 평생 배우는 자로 정의하며, 그가 사울 왕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자신의 뼈아픈 실수를 회개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공의로운 통치력을 학습했음을 설명합니다. 특히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의 보좌를 목격한 다윗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의와 공평을 깨닫고,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목자형 왕으로 변화된 점을 핵심 교훈으로 제시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날마다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는 회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죽음 이후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수 있는 거룩한 성품을 예비할 것을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설교요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처음부터 완성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계속 배우는 자다. 다윗은 하나님께 왕직의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었지만, 왕직을 실제로 배워야 했다. 그는 사울의 실패를 통해 잘못된 왕직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자신의 간음과 살인죄와 그 징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값을 반드시 물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배웠으며, 하늘 보좌의 계시를 통해 왕의 보좌는 의와 공평 위에 세워져야 함을 배웠다. 또한 그는 시편 23편의 목자 경험을 통해 왕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양을 인도하고 악한 영을 대적하는 목자적 왕이어야 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도 다윗처럼 회개하고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의와 공평과 거룩과 목양의 삶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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