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1(일) 주일낮2부예배(투박하게 요약한 글)
제목:[기독론(128)] 다윗의 아들 솔로몬(06)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아가서가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아가1:14, 2: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sabDcwFeBcU
1. 들어가며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책이다(요 5:39, 눅24:44) .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각 권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이 예표(豫表)로 새겨져 있다. 구약 기독론 강의는 바로 그 예표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의 유다와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와 여호수아를 거쳐, 드디어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렀다.
우리는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는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장수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윗을 통해 확인하였다. 다윗은 일평생 전쟁만 하다 간 사람이다. 블레셋과 싸우고 모압과 싸우고 에돔과 싸우고 암몬과 싸우며,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대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바로 그 전쟁의 열매는 다음 세대가 거두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가 피로써 일군 평화의 토대 위에서 태평성대를 누렸으며, 그 평화의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 솔로몬이 이 땅에 태어난 존재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남긴 지혜 문학, 곧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를 살펴보면, 그 안에 단순한 처세술이나 철학적 성찰을 뛰어넘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아가서는 지혜 문학의 최고봉으로서,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와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고도로 정제된 문학 언어로 계시한다. 아가서는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이다. 신앙 용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깨달아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을 아는 만큼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고 살 수 있다. 천국의 실제를 알아야 지금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 알 수 있다. 천국의 미래를 모르면 현재를 준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구약 성경에는 신약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고, 신약 성경은 구약에 감추어진 비밀을 열어 보인다. 아가서는 그 둘을 잇는 열쇠 중 하나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앎이 삶을 바꾸고, 그 앎이 천국을 준비하게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가 솔로몬의 존재 목적과 어떻게 맞닿아 있으며, 그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가서를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신부, 순결한 백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2. 솔로몬은 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으며, 그가 성전을 지은 목적은 무엇인가?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가 역대상 22장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대상 22:7-9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내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안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shalom)'에서 왔다. 평화, 안식, 온전함을 뜻하는 그 이름처럼, 솔로몬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시대를 살았다. 아버지 다윗이 모든 대적을 물리쳐 놓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을 치르는 세대가 있고, 그 전쟁의 열매를 누리는 세대가 있다. 부모 세대가 회개하고 영적 싸움을 감당하면 자녀 세대는 그 수고의 결실 위에서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부모 세대가 회개하지 않고 영적 전쟁을 외면하면 자녀들이 그 고난을 대신 짊어지게 된다. 솔로몬의 태평성대는 다윗의 헌신 위에 세워진 것이다.
솔로몬은 약 스무 살 즈음에 왕이 되었다. 형 아도니야가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등에 업고 먼저 왕위를 선포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솔로몬을 서둘러 왕으로 세웠다. 갑작스러운 즉위였던 만큼 솔로몬은 스스로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자 그는 당시 번제단이 있던 기브온으로 나아가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솔로몬은 부도 장수도 명예도 아닌, 오직 듣는 마음, 곧 지혜를 구하였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 구함을 기뻐하셔서 지혜뿐 아니라 구하지 않은 것들, 부와 장수와 영광까지 더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동방 사람들의 지혜도 연구하고, 애굽 사람들의 지혜도 배웠다(왕상 4:29-30).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 더하는 것이었다. 세상 지식은 배워야 세상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면 헛되고 헛되다.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 1:1-2).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이후 세 가지 사명을 갖게 되었다. 첫째로 평화의 왕이 되는 것이요, 둘째로 지혜의 왕이 되는 것이며, 셋째로 성전을 건축하는 왕이 되는 것이다. 평화는 아버지 다윗이 전쟁을 통해 만들어 준 것이고, 지혜는 하나님이 기브온에서 직접 주신 것이자 솔로몬이 동방사람의 지혜와 애굽사람의 지혜를 배운 것이다. 그리고 성전 건축은 그 평화와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이루어야 할 사명이었다.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왕이 된 지 4년째인 스물네 살 즈음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기원전 966년의 일이다. 무려 7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성전을 완공하였다. 이것이 솔로몬의 존재 목적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60세까지 살았으니, 서른 살에 이미 자신의 존재 목적을 이룬 것이다. 나머지 30년은 그 성전 위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었다.
그렇다면 왜 성전을 짓는 것이 솔로몬의 존재 목적이었는가? 그것은 솔로몬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듯이,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자였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직접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성령이 믿는 자들의 영 속에 거하실 때 비로소 참된 성전이 이루어졌다.
고전 3:16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솔로몬이 돌과 백향목과 금으로 지은 성전은 외형적 그림자였다. 실제 성전은 성령이 거하시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 곧 교회다. 솔로몬이 이 땅에 온 목적은 바로 그 진리를 예표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쓴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참된 성전인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계시하는 책이 되는 것이다.
3. 솔로몬이 쓴 세 권의 지혜 문학은 각각 무엇을 가르치며, 아가서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솔로몬이 남긴 책은 크게 세 권이다. 잠언,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다. 시편 72편과 127편이 솔로몬의 작품으로 추가되지만, 핵심 지혜 문학은 이 세 권이다. 솔로몬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었다고 열왕기상 4장 32절은 전한다. 그러나 그 방대한 저작 중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선별되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이 세 권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후 두 종류의 지혜를 더 연구하였다. 하나는 동방 사람들의 지혜요, 다른 하나는 애굽 사람들의 지혜다. 동방의 지혜는 욥기에 나타나 있다. 욥이 갑자기 재산을 잃고 몸에 악창이 생기자 동방의 지혜자들이 몰려왔다. 욥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그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였다. 고난이 있으면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논리다. 욥은 이에 맞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두 진영의 논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단순한 도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애굽의 지혜는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보편 법칙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잠언이 바로 이 방식을 따른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무엇은 무엇이고 무엇은 무엇이다, 혹은 무엇이면 무엇이 된다는 식의 명제들이다. 그러나 잠언은 이 모든 지혜의 지향점을 하나님 경외에 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9:10).
전도서는 솔로몬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책이다. 그는 포도원도 가꾸고, 연못도 파고, 노비도 사고, 금은보화도 모으고, 노래하는 남녀도 두었다. 학문도 연구하고, 철학도 탐구하고, 온갖 즐거움도 누려 보았다. 그 모든 것을 다 해 본 결론이 전도서 1장 2절의 선언이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의 공부로는, 세상의 쾌락으로는, 세상의 지혜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마지막 심판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지를 준비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전도서 12장 1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로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무엇인가? 잠언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고, 전도서가 "무엇이 헛된가"를 가르친다면, 아가서는 "무엇이 본질인가"를 가르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가서는 솔로몬이 이 땅에 보냄받은 목적인 성전이 무엇인지를 문학적으로 계시한 책이다. 솔로몬이 외형적으로 돌과 금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아가서는 그 성전의 실제 의미—성령이 거하시는 인격적 처소로서의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가르친다.
세 권의 책은 단계를 이루며 상승한다. 첫째로, 잠언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친다. 가정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말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잠언에서 멈추면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인 양 착각할 수 있다.
둘째로, 전도서는 그 착각을 깨뜨린다. 잠언의 지혜를 다 실천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려 보았더니, 결론은 헛되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혜롭게 살고,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도,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헛되다. 그렇다면 진정한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심판 앞에 서는 것, 그날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라는 결론에 이른다.
셋째로, 아가서는 그 준비가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마지막 심판 앞에 서는 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며 신앙의 최종 목표다. 아가서는 그 신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가,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강한 것인가를 문학적으로 계시한다.
잠언과 전도서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지혜를 가르친다면, 아가서는 그 모든 지혜가 향하는 종착점,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연합을 계시한다. 그래서 아가서가 지혜 문학의 최고봉이다. 최고봉은 가장 화려하거나 가장 쉬운 책이 아니다. 가장 깊고, 가장 어렵고, 그렇기에 가장 귀한 진리를 담은 책이 아가서다. 그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성령의 감동이 필요하고, 오랜 묵상이 필요하며,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아가서 1장 1절의 표제는 "솔로몬의 아가라"고 선언한다. 아가서 안에서 교회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가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4. 아가서는 어떤 장르의 문학 작품이며, 왜 번역이 어렵고 오해를 받아 왔는가?
아가서는 한마디로 가극시(歌劇詩)다. 노래로 연극하기 위하여 쓴 시다. 등장인물들이 순서에 따라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구조인데, 무대 지문도 없고 대사도 없고 오직 노래만 있다. 한 인물이 노래하면 다른 인물이 화답하고, 예루살렘 딸들이 합창으로 끼어드는 형식이다.
문제는 히브리어 원문에 누가 노래하는지를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브리어는 동사와 명사의 성(性)이 구분되기 때문에, 원문을 면밀히 살피면 어느 구절이 남성의 말이고 어느 구절이 여성의 말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간과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히게 된다. 번역의 문제도 심각하다. 1장 12절에 나오는 단어는 개역개정에서 "침상"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은 "식탁"이다. 왕이 여인을 침상으로 데려간 것이 아니라 식탁으로, 곧 잔치 자리로 초대한 것이다. 2장 4절의 "잔치집" 역시 원문은 "포도주의 집"이다. 이러한 번역 오류들이 겹치면서 아가서는 마치 야한 소설처럼 읽히게 된다.
이 때문에 아가서는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신앙과 관련된 단어가 사실상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 "여호와", "기도", "예배", "회개", "경외"—이런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8장 6절에 "여호와의 불"이라는 표현이 한 번 등장하는데, 이것도 번역상의 문제다. 히브리어 원문은 최상급을 표현하는 어법으로 "가장 강한 불"이라는 뜻이지, 여호와를 직접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과 배경 지명도 실존하지 않는다. 술람미 여인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열왕기상 11장에 솔로몬의 왕비 700명과 후궁 300명이 나오지만 그 이름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바알하몬이라는 지명도 성경 지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은 실존하지 않는 인물과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배경으로 이 책을 썼는가? 그것은 아가서가 특정한 실제 사건을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담기 위해 가상의 소재를 빌린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랍비들은 아가서를 정경(正經)에 반드시 포함시켰다. 그들은 아가서가 그 어떤 책보다도 중요한 책이라고 선언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연애 이야기처럼 보이고, 신앙 용어도 전무하며, 등장인물과 배경마저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이 본 것은 문자 너머에 감추어진 영적 실재였다.
아가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 없이 읽으면 청춘 남녀의 에로틱한 이야기로 흐른다. 조금 더 신앙적으로 본다 해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이야기 정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읽을 때, 그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하나님의 경륜, 사랑의 실체가 환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아가서는 바로 그 이중의 비밀을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은 책이다.
아가서를 읽고 눈물 없이는 넘길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수천 년 전 솔로몬이라는 한 왕이 쓴 노래 속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이다. 그 놀라운 발견이 아가서를 단순한 고전 문학이 아닌,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하게 한다. 솔로몬이 의도하여 쓴 것이든 성령이 그를 도구로 쓰신 것이든, 아가서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사랑 편지다. 그 편지를 읽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다. 나는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복선을 깔아 놓는다. 처음에 충격적인 이미지를 던지고, 그 의미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조금씩 풀린다. 인물 하나, 색깔 하나, 숫자 하나에 모두 의미가 있다. 아가서 1장 2절이 그 첫 충격이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누군가가 갑자기 등장하여 이렇게 외친다. 누가 누구에게 이 말을 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사모하는가? 독자는 그 의문을 안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것이 단순한 연애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는다. 수천 년을 이어 온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가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에, 그것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도 성령의 감동과 지혜를 구해야 한다.
5. 아가서의 등장인물인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각각 누구를 상징하는가?
아가서의 핵심 등장인물은 두 사람이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다. 예루살렘 딸들이 주변 인물로 등장하여 합창하거나 화답하고, 오빠들도 간접적으로 언급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술람미 여인은 누구인가? 그 이름은 아가서 6장 13절에 처음 나타난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리라." 그런데 이 "술람미"는 고유명사 이름이 아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 명사다. 히브리어에서 솔로몬과 술람미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둘 다 샬롬, 평화를 의미한다. 솔로몬이 "평화의 왕"이라면, 술람미 여인은 "평화에 속한 여인"이다. 원래 하나였던 존재가 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연상시킨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셨을 때, 아담은 그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외쳤다. 자신의 일부임을 즉각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처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를 알아보는 것도 이 원리다. 원래 하나였던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구도에서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술람미 여인은 교회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아담이 솔로몬을 예표하고, 하와가 술람미 여인을 예표한다. 에베소서 5장 31절에서 32절은 이것을 명확히 선언한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한 것이다.
솔로몬과 술람미라는 이름이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둘 다 샬롬, 평화를 의미한다. 신랑이 평화의 왕이고, 신부는 그 평화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준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은 또한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성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솔로몬 없이 술람미 여인은 완성될 수 없고, 술람미 여인 없이 솔로몬도 온전하지 않다. 그리스도 없이 교회는 존재할 수 없고, 교회 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되지 않는다. 신부를 얻는 것이 신랑의 가장 큰 기쁨이듯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리스도 사역의 완성이다.
열왕기상 11장을 보면, 솔로몬의 왕비는 700명이요 후궁은 300명이었다. 그런데 아가서 6장에는 왕비가 60명, 후궁이 8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숫자가 다르다. 이것은 아가서가 솔로몬 통치 초기에 기록된 것임을 시사한다. 성전을 완공한 직후, 그 영적 의미를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해설서로 아가서를 썼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술람미 여인이 사는 곳은 "바알하몬"이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이 지명은 실제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의 장소다. 마찬가지로 술람미 여인도 가상의 인물이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 천국에 들어갈 그리스도의 신부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름이 없다.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아가서 1장 6절은 이 여인의 형편을 이렇게 전한다.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이 여인에게는 오빠들이 있다. 그런데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오빠들이 아니라 의붓 오빠들이다. 이 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 곧 마귀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들이 연약한 여동생에게 포도원을 지키게 하였고, 여인의 얼굴은 태양에 그을려 검어졌다. 사탄 마귀의 통치 아래서 죄에 물들고 고통받는 인류의 형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아가서 6장은 이 여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왕비가 육십이요 후궁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 솔로몬 곁에 있어도,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 시골 처녀 단 하나다. 그 어머니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그 외동딸은 교회를 상징한다.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6. 아가서 1장 14절에서 여인이 고백한 고페르 나무 꽃송이는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을 계시하는가?
솔로몬이 바알하몬의 포도원을 시찰하기 위해 왕비 60명과 후궁 80명, 그리고 60명의 호위 병사를 데리고 그곳에 이르렀다. 그 화려한 행렬 가운데 포도원에서 일하던 한 시골 처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인은 나도 향기름을 풍기며 식탁 앞에 나타났다. 나도(nard)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매우 값비싼 향료다. 당시 나도 향 한 병은 노동자 1년 치 임금에 해당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후에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가 바로 나도 향이었다. 제자들이 "무슨 이유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마 26:8)며 분개할 정도였다. 이 여인이 나도 향기름을 풍기며 등장한 것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헌신과 같은 맥락이다.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않고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모습이다. 왕과 시골 처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은 서로가 서로임을 알아버렸다. 수많은 왕비와 후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이 여인이 자신이 찾던 진정한 짝임을 직감하였다.
그 순간 여인이 고백한다.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페르 나무 꽃송이로구나
이 고백 안에 네 가지 의미가 압축되어 있다. 솔로몬이라는 신랑이 어떤 존재인지를, 여인이 꽃 하나에 담아 고백한 것이다.
첫째, 엔게디(En Gedi)다. 히브리어로 "엔(Ain)"은 샘, 혹은 눈(眼)을 뜻하고 "게디(Gedi)"는 염소를 뜻한다. "염소의 샘"이라는 의미다. 엔게디는 유대 광야의 두 산 사이의 계곡에 움푹 파인 샘물 웅덩이로, 폭포가 흘러내려 그 물이 동그랗게 고이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사울을 피해 도망치던 다윗이 몸을 숨기던 곳이 바로 엔게디 동굴이다(삼상 24:1). 그 동그랗게 고인 샘물 가에 사슴과 염소들이 물을 마시러 모여든다. 영적으로 엔게디는 천국 보좌 앞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근원을 상징한다.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염소들이 그 샘물을 마시러 오듯이,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생명수를 마심으로 양이 된다. 염소에서 양으로의 변화, 이것이 구원의 본질이다. 또한 "엔"이 눈(眼)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천국 지성소로 들어갈 때 하나님의 눈 앞에 서게 된다는 영적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둘째, 포도원이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원 안에서 일하는 여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포도원인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여인이 포도원을 지키되 여우들 때문에 힘겨운 것처럼, 교회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되 악한 영들의 방해로 인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여우들을 잡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포도원은 이 세상을 상징하며,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수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산출된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가나안에서 가져온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막대에 꿰어 메어 왔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 준다(민 13:23). 한 송이에서 그토록 많은 열매가 달리듯이,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온 세상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자녀들이 산출된다.
셋째, 고페르 나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고페르(kopher)"에서 왔으며, "카파르(kapar)"라는 동사 어근을 갖는다. 카파르는 "속죄하다", "속량하다", "몸값을 지불하다"를 뜻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흔히 "henna blossom"으로 옮긴다. 이 고페르 나무의 꽃은 바깥쪽은 적갈색이고 안쪽은 흰 꽃잎에 노란 수술을 품고 있다. 바깥의 붉은색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킨다. 원래 죄가 없으신 분—안쪽의 흰색—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속죄를 이루신다.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 사용한 고페르 나무(창 6:14)도 같은 어원이다. 방주가 물 심판에서 인류를 구원하였듯이, 속죄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심판에서 인류를 구원하신다.
여인은 솔로몬을 보는 순간, 저분이 바로 나를 속죄하실 분이심을 꽃 하나에 담아 고백한 것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때 발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저분이 나의 속죄자이시다. 저분이 내 죄의 빚을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
넷째, 꽃송이다. 고페르 나무는 열매가 맺히면 포도 송이처럼 붉게 열린다. 그 열매의 즙은 천연 염료로 사용되어, 결혼식 신부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쓰인다. 수많은 열매가 하나의 송이를 이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의 몸인 교회를 이룬다. 고페르 나무 열매의 즙이 신부를 아름답게 꾸미는 염료로 쓰이듯이, 그리스도의 보혈이 교회를 아름답게 단장한다. 계시록 19장 7절에서 8절은 혼인 잔치 때 신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보혈로 씻기고, 그 보혈로 말미암아 옳은 행실로 아름답게 단장된 신부—이것이 고페르 나무 꽃송이가 계시하는 교회의 최종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속죄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자신의 보혈로 교회를 아름답게 단장하시는 신랑이시다. 고페르 나무 꽃송이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담아낸 놀라운 표현이다.
여인의 이 한마디 고백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수 되심, 풍성한 산출자 되심, 속죄자 되심, 교회의 신랑 되심이 모두 담겨 있다. 솔로몬이 그 꽃을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이 솔로몬의 손을 이끌어 그 꽃에 이 모든 진리를 담게 하였다. 아가서 1장 14절 한 구절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역이 이미 계시되어 있다.
7. 아가서 2장 2절에서 솔로몬이 여인을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로 비유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인이 솔로몬을 고페르 나무 꽃송이로 고백하자, 솔로몬도 여인을 향해 화답한다.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이 구절 역시 번역의 문제를 안고 있다. 개역개정에서 "백합화"로 옮긴 히브리어 원어 "샤샤나(shoshana)"는 실제로는 아네모네(anemone)를 가리킨다. 봄이 되면 이스라엘 들판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는 아네모네 꽃이다. 하얀 백합이 아니라 선명한 색을 가진 들꽃이다.
아네모네의 꽃은 세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바깥쪽은 선명한 붉은색이고, 그 안쪽은 흰색이며, 가장 중심부는 짙은 보라색이다. 이 세 가지 색이 구원의 세 단계를 가리킨다.
붉은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구원의 시작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다. 우리의 죄가 그 피로 말미암아 씻겨나간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흰색은 의인의 신분이다. 보혈로 씻음을 받으면 눈처럼 희어진다. 죄인이 의인으로 선언된다. 이것이 칭의(稱義)의 은혜다. 그리고 가장 중심부의 보라색은 왕의 색깔이다. 고대 세계에서 보라색 옷은 왕과 귀족의 상징이었다. 구원받은 자들은 단순히 죄 용서를 받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에서 왕자와 왕녀의 신분을 얻는다. 계시록 1장 6절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이라고 선언한다. 보혈로 씻기고, 의인으로 선언되며, 왕의 권세에 참여하는 것—이 세 단계가 아네모네 한 송이 꽃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아네모네는 어디에 피어 있는가? "가시나무 가운데"다. 가시나무는 창세기 3장의 저주를 연상시킨다.
창 3:18 땅은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 이 땅은 가시밭이 되었다.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통치 아래 고통받으며, 가시나무 가운데서 신음한다. 아가서의 여인이 오빠들의 지시로 포도원을 지켜야 했던 것, 태양 아래 일하느라 피부가 검어진 것 모두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고통받는 인류의 형편을 보여 준다. 여인은 스스로 고백한다.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 자신을 돌보아야 할 의붓 오빠들이 오히려 자신을 혹사시켰다. 타락한 천사들이 인류를 죄 아래 묶어 두고 착취하는 형상이다.
그 가시밭 한가운데서 솔로몬의 눈에 들어온 것이 아네모네 한 송이였다. 수많은 여자들 중에, 가시덤불 속 고통받는 인류 가운데, 신랑의 눈에 포착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며 왕의 권세에 참여할 자들이다. 솔로몬은 그 여인을 보며 감격하였다. 저 가시밭 속에 저토록 순결하고 아름다운 자가 있다니. 나는 저 여인을 내 신부로 삼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가지신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이 여인의 현재 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태양에 그을려 거무스름한 피부, 화려하지 않은 시골 처녀의 차림새—그 외형을 본 것이 아니다. 솔로몬은 그 여인이 장차 어떤 모습이 될지를 본 것이다. 아네모네 꽃이 그 장래를 계시한다. 지금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지만, 내 피로 씻기면 흰 의인이 되고, 내 왕국에 들어오면 보라색 왕복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시는 시각이 이러하다. 지금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씻겨진 이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26절에서 27절이 그것을 설명한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교회를 영광스럽게 세우시기 위해 자신을 주셨다. 이것이 신랑이 신부를 위해 행하시는 일이다.
솔로몬이 그 여인을 "가시나무 가운데 아네모네"로 본 것은, 지금은 가시밭 속에 있지만 장차 내 피로 씻어 왕비로 세울 존재로 본 것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난 꽃 한 송이—그것이 교회의 현재이자 미래다. 지금은 세상 속에서 고통받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고 왕의 권세에 참여할 자들이다. 온 세상이 죄와 사망의 가시밭이지만, 그 가운데서 자신의 피로 씻길 자들을 바라보시며 "일어나 함께 가자"(아 2:10)고 청하시는 신랑의 초대가 아가서 2장 2절 안에 담겨 있다.
8. 아가서 전체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가서의 대주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가서 8장이 절정으로 보여 준다.
아 8:6-7 너는 나를 인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가장 강한 불 같으니이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고백은 신랑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죽음처럼 강한 사랑, 홍수로도 끌 수 없는 사랑, 온 가산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사랑—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가지신 사랑의 실체다. 그 사랑은 감상적 정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증명된 실재다. 피를 흘리고 죽음을 감수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는 것은 이 사랑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온 삶으로 고백하라는 권면이다.
아가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러하다. 솔로몬이 바알하몬의 포도원을 시찰하러 왔다가 술람미 여인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1장). 그는 그 여인을 포도주의 집, 곧 잔치 자리로 초대한다. 이것은 자신의 피를 나누겠다는 것을 의미한다(2장 4절). 그가 그녀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청원한다(2장 10절). 이것은 가시밭의 삶을 떠나 왕성(王城)으로 들어오라는 초대다.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런데 여인은 즉각 따르지 않는다. 아직 포도원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들이 있다.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포도원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은 믿는 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영들을 상징한다. 작은 여우들이다.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포도원을 황폐하게 만드는 영적 세력들이다. 신랑은 그 여우들을 잡아 주겠다고 약속한다. 원수들을 무력화하고 여인을 해방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다.
요일 3:8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3장에서 결혼식이 이루어지고, 이야기는 점점 깊어진다. 신랑이 포도주의 집으로 신부를 데려가는 것은 자신이 신부를 위해 무엇을 감당할 것인지를 보여 주는 행위다. 포도주의 집이란 자신의 피를 나누는 자리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랑이 신부를 위해 자신의 피를 쏟겠다는 선언이다. 그 피의 선언을 들은 신부는 비로소 신랑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다. 신랑이 자기를 위해 죽어 줄 것임을 아는 자만이 그 신랑을 따를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근본적인 확신이다.
아가서의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의 의붓 오빠들이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지 않은 오빠들이다. 이들은 타락한 천사들, 곧 마귀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들이 연약한 여동생에게 포도원을 지키게 하였고, 여인의 얼굴은 태양에 그을려 검어졌다. 그것은 사탄 마귀의 통치 아래서 죄에 물들고 고통받는 인류의 형편이다. 그러나 솔로몬—그리스도—이 나타나자, 여인은 오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신랑을 따를 길이 열린다.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동시에 계시한다.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신랑이 사랑하고, 신부도 사랑한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아 6:3). 이 상호 속함, 이 온전한 연합이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한 연애 교과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사랑의 드라마를 문학이라는 옷을 입혀 계시한 책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한다.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되었다. 솔로몬이 아가서를 쓰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은 그 사랑 이야기를 이미 작정하고 계셨다. 성전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 그리스도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신부인 교회가 어떤 자세로 신랑을 기다려야 하는지—이 모든 것이 아가서라는 한 권의 가극시 안에 고도로 압축되어 있다.
아가서 전체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교회의 탄생과 성장과 완성을 본다. 첫째로, 1장과 2장에서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성도가 처음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받는 경험을 상징한다. 둘째로, 2장에서 신랑이 "일어나 함께 가자"고 초대하는 장면은 구원받은 후 성화(聖化)의 여정을 걷도록 부르시는 초대다. 셋째로, 3장의 결혼식은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예표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엡 1:4), 때가 되어 그 선택된 자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시며, 마침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완성하시는 경륜의 이야기다. 그래서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경륜 전체가 조명되어야 한다. 1장에서 처음 만나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알아보고, 2장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함께 가자고 초대하며, 3장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이후 신부는 점점 더 신랑을 닮아가고 신랑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성도의 여정이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을 더 알아가고, 더 닮아가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점점 성숙해지는 과정이 아가서에 담겨 있다. 마침내 8장에 이르러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사랑에 완전히 응답하는 자리에 이른다. "나를 인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이 고백이 성도의 최종 목표다.
9. 나오며
솔로몬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 그가 남긴 지혜 문학의 구조와 위계, 아가서가 어떤 장르인지, 등장인물의 정체와 상징, 고페르 나무 꽃송이와 아네모네가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시, 그리고 아가서 전체가 전하는 사랑의 비밀을 살펴보았다.
아가서는 믿음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 안에서 읽을 때,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장 소리다. 죽음처럼 강하고 홍수로도 끌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신랑의 목소리다.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난 아네모네처럼, 죄로 물든 세상 한가운데서 당신의 신부를 발견하시고 "일어나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초대다.
솔로몬이 물질적 성전을 지었다면, 아가서는 영적 성전인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알려 주는 교과서다. 성전을 짓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아가서가 가르쳐 준다. 고페르 나무의 붉은 꽃잎 속에 속죄의 피가 담겨 있고, 아네모네의 보라색 중심부에 왕의 신분이 예비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속죄자이시고, 생명수의 근원이시며, 교회를 산출하시는 포도나무이시고, 교회를 단장하시는 신랑이시다.
우리는 그 신랑의 초대에 응답해야 한다. 신부는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포도원의 여우들을 인식하고, 신랑이 약속하신 대로 그것들을 제거해 주실 것을 믿으며, 마침내 왕성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함께 걸어야 한다. 솔로몬이 7년 동안 성전을 지었듯이, 우리 각 사람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영적 성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성전이 된다. 성전을 짓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솔로몬도 7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워지는 것도 긴 여정의 과정이다.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기도를 통해 신랑의 음성을 듣고, 귀신을 쫓아 포도원의 여우들을 제거하며, 점점 더 신랑을 닮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 중에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신랑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아 8:7). 죽음처럼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고, 그 피의 붉음에서 의인의 흰 세마포를 입고, 나아가 왕의 보라색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것이 아네모네가 가리키는 구원의 완성이다. 아가서가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여야 한다. 이 관계를 붙들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여 주님이 빚으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자리에서 신랑 앞에 흠 없는 신부로 당당히 설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아가서의 첫 고백이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였다면, 그 결론은 "나를 인장같이 마음에 품으라"이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안에 인印 쳐진 삶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아가서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이다.
2026년 06월 21일(일)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은 지혜 문학의 정수임을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생애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아가서에 등장하는 시적 대사들은 인간의 연애 소설이 아닌 구속사적 경륜을 보여주는 가극시라고 정의합니다. 특히 본문은 '엔게디 포도원의 고베라 송이'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는 상징을 통해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성도의 정체성을 조명합니다. 결국 아가서의 목적은 신랑 되신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강렬하게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여, 우리가 그 피로 깨끗해진 천국의 신부이자 상속자로 준비되도록 이끄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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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일) 주일낮2부예배(정제된 요약)
제목:[기독론(128)] 다윗의 아들 솔로몬(06)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아가서가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아가1:14, 2: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구약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 역사책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와 그림자와 사건과 인물 속에 감추어 보여 주는 하나님의 계시다. 그러므로 구약을 읽는 성도는 단순히 옛날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장차 우리를 어떤 영광으로 이끄실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도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러므로 구약 기독론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구약을 그리스도 없이 읽으면 성경의 심장을 놓치게 된다. 창세기의 유다와 요셉, 출애굽 이후의 모세와 여호수아, 사무엘서의 다윗, 그리고 열왕기상과 역대상에 등장하는 솔로몬은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여러 방면을 보여 준다. 다윗이 전쟁에 능한 왕으로서 이기는 자의 모형을 보여 주었다면, 솔로몬은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그런데 솔로몬에게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작품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가서'다. 아가서는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다. 아가서는 바로 이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라는 문학적 형식 안에 감추어 둔 책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가 왜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며, 그 안에 감추어진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인가?
성경을 바르게 읽으려면 먼저 전체 방향을 알아야 한다. 구약 성경은 단순히 율법과 역사와 시와 예언의 모음이 아니다. 구약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간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예표와 그림자로 말씀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그 실체가 밝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구약의 인물과 사건은 단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한 방면을 미리 보여 준다.
예표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신약에서 예표와 관련하여 쓰이는 헬라어는 튀포스, 곧 ‘모형, 본, 도장에 찍힌 형상’이라는 뜻을 가진다. 구약의 인물들이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한 특징이 찍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왕의 예표이고, 솔로몬은 평화와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예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다(마 1:1). 여기서 “자손”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휘오스, 곧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다윗 언약을 완성하시는 다윗의 아들이시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솔로몬도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와 영광과 성전 건축의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열왕기상 11장에 이르면 이방 여인들과 우상숭배로 인해 실패한 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완성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는 그림자다. 우리는 솔로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되, 솔로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계시기 때문이다(마 12:42).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밝히신다(계 22:16). 이것은 그분이 다윗에게서 나온 분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존재 근원이신 분이라는 뜻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으므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면서 다윗의 주가 되신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이런 관점에서 아가서를 읽어야 한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은 단순한 역사 속 왕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은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준비될 교회를 가리킨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아가서는 단지 아름답지만 난해한 연애시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으면, 아가서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깊은 신랑과 신부의 비밀을 알려 주는 책이 된다.
3. 솔로몬의 세 가지 사명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예표하는가?
솔로몬의 생애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사명을 붙잡아야 한다. 첫째, 그는 평화의 왕이다. 둘째, 그는 지혜의 왕이다. 셋째, 그는 성전 건축자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솔로몬에게 평화가 주어졌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는 그 평화의 시대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가 피를 많이 흘리고 크게 전쟁했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셨다(대상 22:7-9).
대상 22:7-9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 곧 평안과 관련된다. 그는 평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왕이다. 그러나 이 평화는 다윗의 전쟁 이후에 온 평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고, 그 승리 위에 성도들에게 참 평화를 주셨다. 성도 안에 참 평화가 오려면 먼저 악한 영들이 쫓겨나야 한다. 전쟁이 끝나야 성전이 세워진다. 이 원리는 다윗과 솔로몬에게서도 나타나고, 성도의 영적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그는 왕이 되었을 때 아직 어렸다. 아도니야의 반역적 움직임 가운데 갑자기 왕위에 올랐기에, 자신에게는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했다(왕상 3:9).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셨다. 그의 지혜는 동방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29-30).
왕상 4:29-30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셋째, 솔로몬은 성전 건축자다. 하나님이 그에게 평화를 주시고 지혜를 주신 최종 목적은 성전을 건축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솔로몬은 왕이 된 지 4년째 되는 해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했다. 그가 존재한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솔로몬의 사명에는 시간표가 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지 넷째 해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며, 일곱 해 동안 성전을 지어 서른 살 무렵에 완성했다. 그의 인생에서 성전 건축은 주변 업무가 아니라 중심 사명이었다. 그 후 그는 더 오래 살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가장 본질적인 일은 이미 성전 건축을 통해 드러났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와도 깊이 연결된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 모든 사역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교회를 산출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주어진 지혜는 단순한 학문적 총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한 지혜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지혜의 목적은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재물을 많이 모으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 자신을 준비하고,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우는 데 있다. 지혜가 성전 건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해 아래의 수고로 끝날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시며, 참 성전을 세우시는 분이다. 솔로몬이 돌과 백향목과 금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세 가지 사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4.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왜 교회의 비밀로 이어지는가?
솔로몬의 성전은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 실체가 아니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임재를 나타내신 장소였지만,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다. 성전은 장차 오실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질 교회를 향해 열린 예표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교회”라는 표현이다. 교회는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낳으시고, 자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처소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성령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심으로 형성되는 하나님의 처소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한다(고전 3:16).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엡 2:21-22).
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건축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산출하시는 일을 예표한다. 다윗이 전쟁을 통해 평화의 기반을 마련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들을 이기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성전의 깊은 의미를 전혀 모른 채 외형적 건물만 지었는가? 설교의 흐름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은 왕이었고, 성전을 지으라고 이 땅에 보냄받은 왕이었다. 그렇다면 성전의 내적 의미,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어떻게 산출되는지를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그 묵상의 최종 결산이 아가서다.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와 인생의 허무와 하나님 경외를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성전의 비밀을 사랑의 관계로 풀어 준다.
이 점에서 아가서의 기록 시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가서 6장에는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아 6:8-9).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 말년의 솔로몬은 왕비 칠백 명과 후궁 삼백 명을 두었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솔로몬 말년의 타락 이후가 아니라,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솔로몬의 마음이 완전히 이방 여인들과 우상에게 빼앗기기 전, 그가 성전 건축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던 시기에 이 작품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아 6:8-9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 말씀에서 신랑은 많은 여인들 가운데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신부로 준비될 교회를 보시는 시선이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많고 많은 단체 중 하나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눈에 하나뿐인 짝이며, 그분의 피로 사신 유일한 신부다.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돌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깨끗하게 된 신부, 곧 교회로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가서는 성전의 내적 의미를 보여 주는 책이다.
5. 아가서는 왜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가극시인가?
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책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첫째, 누가 말하는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여인이 말하는지, 솔로몬이 말하는지, 예루살렘의 딸들이 말하는지, 합창이 말하는지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대목이 많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히 문자만 읽어서는 전체 흐름을 잡기 어렵다.
둘째, 아가서에는 직접적인 신앙 용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 기도, 회개, 믿음 같은 표현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책을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나 연애 교과서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아가서는 더 깊은 책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직접 설명문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노래와 상징과 장면 속에 감추어 두셨다.
아가서 1장 1절은 이 책의 표제를 말한다(아 1:1).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아가”는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다. 히브리어 방식의 최상급 표현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가장 뛰어난 노래, 가장 깊은 사랑의 노래다. 설교적 관점에서 이것은 가극시다. 가극시는 노래로 진행되는 연극적 시다. 아가서에는 대사만 남아 있고, 무대 설명과 의상 설명은 본문에 직접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등장인물과 상황과 상징을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아가서의 시작은 매우 충격적이다. 술람미 여인이 “그가 그의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한다(아 1:2). 이것을 겉으로만 읽으면 남녀의 애정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신부가 신랑의 사랑과 말씀과 생명 접촉을 갈망하는 고백이다.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가서의 큰 주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적 감정에 머무는 사랑이 아니다. 아가서 8장은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끄지 못하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한다고 말한다(아 8:6-7).
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가장 강한 불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셨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엡 5:31-32).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가서가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번역의 문제다. 어떤 단어들은 문자적으로 옮기면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의 배경과 상징을 살피면 훨씬 깊은 뜻이 열린다. 예를 들어 “침상”으로 이해되는 표현들, “입맞춤”, “포도주의 집”, “향기름”과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의 장면으로만 읽으면 전체가 왜곡될 수 있다. 문학 작품은 한 장면과 한 단어와 한 색깔에도 복선을 심는다. 아가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성령께서 감동하신 지혜문학이라면, 그 안의 식물 하나, 지명 하나, 색깔 하나, 대화의 순서 하나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그래서 아가서 해석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문맥을 따라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둘째,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와 성경 전체의 상징을 살펴야 한다. 셋째,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아가서는 연애시로 떨어지거나, 막연한 비유로 흐르거나, 지나친 상상으로 흩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다. 그것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하고, 연합하고, 새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가극시다. 아가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히브리 지혜자들은 이 책 안에 감추어진 영적 깊이를 보았던 것이다.
6.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각각 누구를 예표하는가?
아가서의 중심 인물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며 평화의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신랑으로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오고,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자신의 사랑으로 이끌고, 결국 왕의 처소로 데려가려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찾아오시고, 사랑하시고, 피로 정결하게 하시고, 장차 새 예루살렘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모습과 연결된다.
술람미 여인은 역사 속 특정 여인으로 보기 어렵다. 열왕기상에는 솔로몬의 왕비와 후궁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그 가운데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오히려 아가서 자체는 그녀를 가상의 인물처럼 제시한다. “술람미”라는 이름은 솔로몬과 같은 샬롬 계열의 여성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솔로몬과 본래 한 짝을 이루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구조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게 한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고, 다시 아담에게로 돌아가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창 2:23-24).
창 2:23-24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신약에서 이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로 완성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명으로 산출되고,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그분과 연합한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은 단순한 시골 처녀가 아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준비될 교회, 곧 신부 된 성도들을 예표한다.
아가서 1장 6절은 술람미 여인의 처지를 보여 준다. 그녀는 햇볕에 그을렸고, 어머니의 아들들이 노하여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삼았으며, 자기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아 1:6).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설교적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 혹은 악한 영들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인류를 죄와 수고와 억압 아래 두었다. 포도원은 생명을 산출해야 할 영역인데, 작은 여우들이 들어와 포도원을 해친다. 술람미 여인은 자기 힘으로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이 죄와 악한 영의 압제 아래서 자기 생명과 사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준다.
술람미 여인의 이름도 중요하다. 솔로몬은 히브리어 샬롬에서 온 이름으로 평화와 안식을 뜻한다. 술람미도 그와 같은 어근권에서 이해될 수 있는 여성형 명칭이다. 그러므로 설교적 해석에서 술람미는 솔로몬과 전혀 무관한 여인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속하고 솔로몬과 짝을 이루어야 할 여인이다. 이것은 하와가 아담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과 같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밖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명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께 다시 연합되어야 할 신부다.
또한 술람미가 검게 그을렸다는 고백은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본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햇볕 아래 수고하면서 검게 되었다. 이것은 타락 이후 인간이 죄와 수고와 악한 영의 억압 아래서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신랑은 그녀의 겉모습만 보지 않는다. 신랑은 그녀 안에 숨겨진 본래의 가치와 장차 자신의 사랑으로 회복될 아름다움을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눈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그녀를 찾아온다. 왕이 신부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녀를 검게 그을린 시골 처녀로 볼 수 있지만, 신랑은 그녀에게서 자기 짝을 본다. 그리스도께서도 죄와 상처와 악한 영의 억압 아래 있는 인류 가운데서 자기 피로 씻을 교회를 보신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준다.
7.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아가서 1장 14절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처음 보고 고백한 말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부른다(아 1:14).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이 한 구절 안에는 네 가지 상징이 들어 있다. 엔게디, 포도원, 고벨화, 송이다. 이 네 가지를 정밀하게 보아야 그리스도의 비밀이 열린다.
첫째, 엔게디는 히브리어로 “염소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다. “엔”은 샘 혹은 눈을 뜻하고, “게디”는 염소를 뜻한다. 엔게디는 광야와 사해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물이 흐르는 장소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보면 엔게디는 생명수의 근원을 떠올리게 한다. 염소 같은 자가 생명수를 마시고 양으로 변화되는 은혜의 장소다. 그리스도는 생명수를 주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자신의 양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요 15:1-5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둘째, 포도원은 생명을 산출하는 장소다.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다(요 12:24).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셋째, 고벨화는 히브리어로 코페르, 혹은 고페르로 불린다. 문맥상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향기와 염료로 사용되던 꽃, 곧 고벨화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는 속전과 몸값을 뜻하는 코페르라는 말과도 연결되고, 덮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카파르와 신학적으로도 깊은 연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 1장 14절의 고벨화는 설교적 해석에서 속죄의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고벨화는 적갈색을 띠며, 그 안에는 흰색과 금빛의 이미지를 함께 품고 있다. 적갈색은 피를 떠올리게 하고, 흰색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순결을 떠올리게 하며, 금빛은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죄 없으신 분이 피를 흘려 우리를 속죄하시고, 마침내 성도들을 영광스러운 왕노릇의 자리로 이끄신다는 뜻이다.
넷째, 송이는 열매의 풍성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생명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피와 생명으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산출하신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본 솔로몬의 모습은 단순히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신랑 안에서 생명수와 포도원의 풍성함과 속죄의 피와 열매의 풍성함을 본 것이다.
특히 고벨화의 색은 아가서의 신학을 더 깊게 열어 준다. 겉으로 보이는 적갈색은 피의 색이다. 그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색이 아니라 희생의 색이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 안쪽의 흰색은 그분의 무죄성과 순결을 말한다.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 피는 속죄의 능력을 가진다. 더 깊은 중심의 금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새 예루살렘의 왕권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단지 지옥을 피하게 하는 정도의 피가 아니라, 성도를 하나님의 상속자와 왕노릇할 자로 준비시키는 피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대속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되었다고 말한다(벧전 1:18-19).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러므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는 그리스도의 압축된 초상이다. 그분은 생명의 샘에서 오시고, 포도원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며, 자신의 피로 속죄하시고, 많은 자녀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8.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교회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아가서 2장 2절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그녀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부른다(아 2:2).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여기서 백합화로 번역된 말은 흔히 흰 백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설교적 해석에서는 이것을 팔레스타인 들판에 피는 붉은 아네모네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의 색과 위치다. 그 꽃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 꽃은 붉은 빛과 흰 빛과 왕권의 색을 함께 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시나무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나타난 저주의 표지다. 사람이 죄를 지은 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18).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그러므로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꽃은 죄와 저주와 고통의 세상 속에 있는 인류를 보여 준다. 술람미 여인은 스스로 보면 검게 그을린 여인이고,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연약한 자다. 그러나 신랑은 그녀를 가시나무 가운데 핀 꽃으로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시선이다.
성도는 본래 죄와 저주 가운데 있었다. 악한 영들의 억압 아래 있었고, 자기 포도원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성도에게 임하면 붉은 피로 덮이고, 죄 사함으로 희게 되며,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꽃은 교회의 운명을 보여 준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눈에는 신부요 왕비가 될 존재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말한다. 어린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다고 한다(계 19:7-8).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또한 새 예루살렘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표현된다(계 21:9-10).
계 21: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것이 아가서가 보여 주는 교회의 비밀이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되며, 장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가시나무 가운데 버려진 존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분은 성도를 피로 씻을 신부로 보시고, 새 예루살렘의 영광으로 이끌 존재로 보신다.
여기서 가시나무와 꽃의 대비가 중요하다. 가시나무는 찌르고 상하게 한다. 죄의 세상도 그러하다. 사람은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악한 영의 역사로 묶이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신랑은 그 가시나무 가운데서 꽃을 보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교회를 보셨다는 뜻이다. 교회는 원래 깨끗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바깥의 붉은 색은 그리스도의 피로 덮임을 말한다. 안쪽의 흰 색은 죄 사함과 정결을 말한다. 더 깊은 보라색 혹은 왕권의 색은 장차 왕노릇할 성도의 신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은 현재의 모습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녀는 과정 중에 있는 신부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연약하고 부족할 수 있으나, 회개와 피의 적용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아가서 2장 2절은 바로 이 사실을 압축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가시나무 같은 죄와 저주 가운데 있는 신부를 보시면서도, 자신의 피와 사랑으로 변화될 교회의 영광을 미리 보신다. 그러므로 백합화, 곧 붉은 들꽃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 주는 상징이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아가서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지를 살펴보았다. 아가서는 단순한 남녀의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혜의 최종 결산으로 남긴 영적 가극시이며,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의 관계를 상징과 노래 안에 감춘 책이다.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 건축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외형적 성전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적 성전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교회의 비밀로 이어져야 한다.
아가서는 바로 그 교회의 비밀을 사랑의 언어로 풀어 준다.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술람미 여인은 교회를 예표한다. 술람미 여인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연약한 여인이지만, 신랑은 그녀를 자기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시선이다.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는 생명수와 포도원과 속죄의 피와 풍성한 열매를 품은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죄와 저주 가운데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될 교회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는 성도는 연애 감정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이 교회를 어떻게 산출하고 준비시키는지를 보아야 한다.
성도는 자신이 어떤 존재로 부름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도는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 변두리에 들어가는 데서 멈추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기는 자로서 왕노릇할 신분까지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늘의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들을 내보내야 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하며, 말씀과 성령 안에서 신부의 단장을 이루어야 한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하고, 그 사랑에 합당한 신부로 세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가시나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 새 예루살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21일(일)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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