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3(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2)]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01)(엡2:11~2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wQdyApIJAAo
[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세대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대체신학에 왜 반발했는가?
2. 세대주의 성경해석법의 네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3. 문자적 해석은 이스라엘·예루살렘·성전을 어떻게 오해하게 하는가?
4.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면 구원론과 종말론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5.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는 구원 안에서 어떤 관계인가?
6. 아브라함의 약속과 참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
7. 세대주의의 공헌과 오류를 분별하며 유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설교핵심]
정보배 목사의 강의는 인류 역사를 일곱 시대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설명하는 세대주의 성경 해석법의 정의와 그에 따른 신학적 쟁점을 다룹니다. 본 텍스트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철저히 분리하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세대주의가 유대인의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대체 신학과 대립하는 지점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특히 저자는 세대주의가 유대인의 회복과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며 성경 대중화에 기여했으나, 구원의 방식이나 종말론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오류와 극단성을 경계해야 함을 지적합니다. 결국 이 강의는 성경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이해하고, 이방인인 우리 또한 약속의 자녀로서 회개를 통해 천국을 준비해야 한다는 본질적인 사명을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2)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01)
(엡 2:11-22)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인류 역사를 일곱 시대로 나누고,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석하는 신학 사조다. 영국 성공회 사제였으나 기존 교회를 떠나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된 존 넬슨 다비가 19세기에 그 체계를 세웠다. 그는 무죄, 양심, 인간 정부, 약속, 율법, 은혜 또는 복음, 천년왕국이라는 일곱 시대를 구분했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모든 시대를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각각의 특징을 살핀다는 장점이 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통하여 복잡한 성경의 틀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했고, 세대주의를 받아들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한 공헌도 크다. 우리는 그 공헌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철저히 분리하고, 구약의 약속이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원리가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에 적용되면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 유대인을 위한 별도의 구원 계획, 지상 천년왕국의 성전과 제사 회복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약속을 다시 육적인 이스라엘의 미래로 미루는 문제가 생긴다.
반대편에는 대체신학(代替神學, replacement theology)의 극단이 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절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고 교회가 모든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보는 견해다. 이 생각이 유대인을 멸시하고 핍박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세대주의의 오류를 지적한다고 유대인을 저주받아 사라져야 할 민족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 제2장은 이 문제를 푸는 중심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 유대인과 교회가 영원히 서로 다른 두 백성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며, 교회가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폐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둘이 한 새 사람과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다.
그러므로 양극단을 떠나 성경 전체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예표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교회로 확장되었는지, 마지막 때 유대인에게 어떤 구원의 기회가 남아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대주의가 대체신학에 반발하여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성경해석의 특징과 오류를 분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세대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대체신학에 왜 반발했는가?
존 넬슨 다비는 1800년에 태어나 1882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신학자다. 성공회 사제였던 그는 기존 교회의 교권주의를 부정하고, 성도들이 형제와 자매로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형제교회에 들어가 지도자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인간을 경영하시는 방식이 다르다는 체계를 세웠다.
그 출발점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켜 구원받고 이방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보았으며,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과 교회에게 주신 약속을 서로 다른 선로에 놓았다. 교회가 탄생했다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폐기하신 것은 아니므로,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은 교회와 별도로 끝까지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당시 교회 안에 강했던 대체신학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특권을 빼앗겼다고 보았다. 예수께서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열매 맺는 다른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 근거가 되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며,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받으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으나 그들은 때리고 죽였다.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내셨지만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했다. 이스라엘이 맡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이방인들에게 기회가 넘어간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거절한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약 사십 년 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자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다. 이때 약 11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전해지며, 성전과 도성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흩어졌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보였다. 다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로마서 제11장을 붙들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유대 민족 전체를 없애도 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한다. 엘리야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칠천 명을 남겨 두셨듯이, 이스라엘 가운데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들이 있다(롬 11:1-5).
그러므로 대체신학이 말한 모든 내용이 틀린 것도 아니며, 다비의 문제 제기가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촛대와 사명이 육적인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이 구원받을 기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대체신학이 유대인을 증오의 대상으로 몰아간 것과, 세대주의가 그 반작용으로 유대인의 특권과 별도의 미래를 지나치게 확대한 데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죽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면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까지 빼앗게 된다. 유대인 약 600만 명이 학살당한 비극은 반유대 감정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죄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지만,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다. 이 균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3. 세대주의 성경해석법의 네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세대주의 성경해석법에는 네 가지 핵심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문자적 성경해석이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혈통적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실제 예루살렘을, 다윗의 보좌는 지상에 세워질 실제 왕조를, 가나안 땅은 현재의 영토를, 성전은 예루살렘에 다시 세워질 물질적 건물을 뜻한다고 본다. 영적인 성취보다 문자적인 미래 성취를 앞세우는 것이다.
둘째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철저한 분리다. 하나님께서 육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교회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영하시며,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교회에서 성취될 수 없다고 본다. 교회가 아무리 충성해도 이스라엘이 될 수 없고,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경륜은 마지막 때 다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患難前携擧, pretribulation rapture)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교회가 먼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자리를 비켜 주고, 그 뒤 지상에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고 본다. 그들은 칠 년 환난 전에 모든 교회가 휴거되어 공중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남은 유대인이 환난을 통과하며 회개한다고 설명한다.
넷째는 율법과 은혜의 분리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 구원받고 신약의 교회는 은혜로 믿어 구원받는 것처럼 시대별 구원 원리를 구별한다. 수정된 세대주의는 모든 시대의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완했지만, 종말론에서는 여전히 이스라엘과 교회의 두 길을 강하게 유지한다.
이 네 특징은 서로 연결된다. 문자적 해석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고, 그 분리가 교회를 먼저 휴거시킨 뒤 유대인을 역사의 중심에 다시 세우는 종말론을 만든다. 그리고 율법 시대와 은혜 시대를 과도하게 갈라놓으면서 동일한 믿음과 구원의 원리를 시대마다 다르게 보게 한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문자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출발하지만, 문자 그대로 성취된 사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크고 영적인 실체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놓친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처럼 숫자와 사건은 실제 역사 속에서 성취되지만, 그 목적은 죄를 끝내고 영원한 의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에게 이른다. 문자적 성취와 영적 성취는 서로 적이 아니다. 문자는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또한 시대를 구별한다고 구원의 길까지 여러 개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구원은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창 15:6; 롬 3:20; 갈 3:6-9). 하나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셨고, 때가 차매 그 약속을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셨다.
4. 문자적 해석은 이스라엘·예루살렘·성전을 어떻게 오해하게 하는가?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은 다섯 대상을 미래의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돌린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다윗의 보좌, 가나안 땅, 에스겔 성전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그분께 속한 백성에게 확장되었다고 해석한다.
먼저 이스라엘은 단지 혈통적 이스라엘만을 뜻하지 않는다. 육신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나고 할례를 받았다고 모두 참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자다(갈 3:16, 29).
둘째, 예루살렘의 약속은 중동의 한 도시에만 묶이지 않는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 즐거움이 되는 예루살렘을 예언했다(사 65:17-19). 요한계시록은 그 성취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보여 준다(계 21:1-4). 그곳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들어간다. 지상의 예루살렘이 세계의 영원한 수도가 되는 것이 최종 성취가 아니다.
셋째, 다윗의 보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뒤 이스라엘에는 다윗 왕조가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백성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왕을 기다렸고,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고, 이기는 자들에게 자신의 왕권을 나누어 주신다. 아직 오지 않은 다른 유다 지파 왕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사 9:6-7; 눅 1:32-33; 계 3:21).
넷째, 가나안 땅은 천국 기업의 예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땅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유업으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한 민족이 옛 영토를 되찾는다고 주변 민족을 죽이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도 모두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다. 구약의 정복 명령을 오늘날 국제 분쟁에 그대로 적용하면 신약의 원수 사랑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거스르게 된다.
다섯째, 에스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고 가르쳤다(요 2:19-21; 고전 3:16). 에스겔의 웅장한 성전을 미래 천년왕국에 물질적으로 다시 세우고 동물 제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린 십자가 제사의 완전성을 약화시킨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는데 다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성전을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림자는 실체가 오기 전까지 필요하지만 실체가 오면 역할을 마친다. 구약의 성전, 제사, 왕권, 땅과 도성은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었고, 그분 안에서 교회와 천국의 실체로 열렸다.
그렇다고 구약의 문자적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실제 민족이었고, 가나안은 실제 땅이었으며, 성전은 실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실체는 장차 올 더 큰 실체를 가리키는 예표였다. 세대주의의 문제는 문자를 인정한 데 있지 않고, 문자가 가리키던 그리스도의 성취를 충분히 보지 못한 채 그림자를 다시 미래의 중심으로 돌린 데 있다.
5.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면 구원론과 종말론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철저히 분리하면 하나님께 두 백성과 두 구원 경륜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유대인은 율법과 지상 왕국의 약속을 따라가고, 교회는 은혜와 천상의 약속을 따라간다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에베소서 제2장은 그리스도께서 두 무리를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엡 2:15-18).
이방인은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1-13). 가까워졌다는 것은 이방인을 별도의 두 번째 백성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 한 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한 가족이 된 것이다.
두 백성론은 종말론에서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세대주의는 교회가 칠 년 환난 전에 모두 휴거되고, 지상은 다시 유대인의 구원 무대가 된다고 본다. 교회가 자리를 비워 주어야 이스라엘의 시계가 다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뒤 유대인은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를 드리며 환난을 통과하고, 천년왕국에서 열방을 다스리는 중심 민족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칠 년 환난이라는 체계는 성경의 한 이레를 먼 미래로 떼어 놓은 데서 생겼다. 마지막 때 교회 전체가 무조건 환난 전에 올라간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주님께서 공중으로 불러 올리시는 이들은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된 이기는 전사들이다. 교회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쭉정이까지 모두 휴거되는 것은 아니다. 회개하고 정결하게 준비된 자가 주님의 부르심에 참여한다.
이스라엘에게 아무 역할도 남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지막 때 회개를 외칠 두 증인이 이스라엘 사람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교회에서도 회개의 선지자들이 나오겠지만, 유대인 가운데서 자기 민족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회개를 촉구할 종이 나올 수 있다. 이는 유대 민족 전체가 다시 세계 구원사의 주도권을 독점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복음을 받아 사명을 감당한다는 뜻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나도록 혈통과 말씀을 보존해야 할 특별한 사명이 있었다.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고,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다(롬 9:4-5).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일차적 사명은 완수되었다. 그 뒤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 몸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도 아니며, 육적인 이스라엘이 교회 위에 다시 올라서는 것도 아니다. 촛대와 복음 전파의 사명은 열매 맺는 백성에게 옮겨졌다. 유대인도 이제 다른 모든 민족처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아야 하며, 믿을 때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하나님의 한 가족에 들어온다.
6.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는 구원 안에서 어떤 관계인가?
율법(律法, law)과 은혜(恩惠, grace)를 서로 다른 구원의 길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는 일흔다섯 살에 부름받았고, 여든여섯 살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며, 아흔아홉 살에 할례의 표를 받았다. 믿음의 의가 할례보다 먼저였다(창 12:4; 15:6; 16:16; 17:1-11).
율법은 죄인을 구원하는 또 하나의 사다리가 아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으며, 약속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필요를 알게 된다(롬 3:20; 갈 3:23-24). 구약의 성도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신약의 성도도 완성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시대는 달라도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를 받는 통로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행위는 필요 없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구원의 출발점에서 믿음을 강조했고, 야고보는 그 믿음이 끝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물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 독자 이삭을 바치는 순종으로 믿음이 살아 있음을 드러냈다(창 22:1-18; 약 2:21-24). 행위가 믿음을 대신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의 행위가 따라온다.
복음의 처음에는 “아무리 죄가 많아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선포해야 한다. 담배를 끊고 모든 습관을 고친 뒤에 교회에 들어오라고 하면 아무도 은혜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먼저 믿음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십 년, 삼십 년 신앙생활을 하고도 성품과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회개를 500번, 1천 번, 심지어 3천 번이나 1만 번 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혈기와 분노로 가족을 괴롭힌다면, 횟수만 반복한 주술적 회개가 된 것이다. 참된 회개는 속에 들어온 악한 영을 내보내고 성품과 삶의 열매를 바꾼다. 처음에는 바울처럼 믿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어야 하지만, 마지막에는 야고보처럼 그 믿음이 실제 순종을 낳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진리다. 사도들의 말씀 가운데에는 당시 문화와 목회 상황을 입고 주어진 상대적인 가르침도 있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 종의 신분과 결혼 문제, 우상 제물에 관한 권면은 당시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출발점은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다만 그것을 구원의 마지막 열매까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한 번 믿었으니 영원히 안전하다고 하면서 회개와 순종을 버리는 것은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것이다. 원감람나무 가지도 믿지 않으므로 꺾였는데, 돌감람나무 가지가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으신다(롬 11:17-22).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은 사람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회개와 성결(聖潔, holiness)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7. 아브라함의 약속과 참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셨다. 예수님이 약속의 씨로 오셨고, 그분께 속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과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
그러므로 혈통과 할례만으로는 아브라함의 참자손이 될 수 없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육체의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일을 끊어 내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겠다는 표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표 자체를 붙들고 할례만 받으면 언약 백성이며 가나안 땅을 영원히 소유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과 육신의 할례가 참기준이 아니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 참유대인이라고 가르친다(롬 2:28-29).
또한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씨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
이방인은 본래 돌감람나무 가지와 같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원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롬 11:17). 그렇다고 이방 교회가 스스로 뿌리가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언약과 율법과 메시아의 약속을 배웠으므로 감사해야 한다. 구약성경을 유대인의 경전이라고 버리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알 수 없다.
가나안 땅의 약속도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유업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혈통과 국적에 상관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늘의 기업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의 팔레스타인 땅을 영원한 최종 기업으로 붙드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바라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고 확장되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맡았던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교회에 맡기셨다(마 28:19-20).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를 주저하자 주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 복음이 열방에 전해지게 하셨다. 오늘 우리도 그 복음의 열매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참이스라엘은 혈통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 약속에 참여한 사람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증오하며 그 자리를 빼앗았다고 자랑해서도 안 되고, 육적인 이스라엘 아래로 다시 들어가 그들의 미래만을 위해 존재해서도 안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 가야 한다.
8. 세대주의의 공헌과 오류를 분별하며 유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세대주의에는 분명한 공헌이 있다. 성경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평신도도 큰 흐름을 이해하게 했고,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통하여 성경 공부를 대중화했다. 성경의 예언과 재림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으며, 세대주의를 받아들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된 역사에는 그들의 수고가 들어 있으므로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공헌이 있다고 오류까지 끌어안아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영원히 분리하고, 구약의 모든 약속을 육적인 이스라엘의 미래로 돌리며, 칠 년 환난 전에 교회 전체가 휴거된다고 가르치는 종말론은 바로잡아야 한다. 에스겔 성전과 동물 제사의 회복, 지상의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이 천년왕국에서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주장도 그리스도 안의 성취를 놓친 것이다.
이 해석은 현대의 기독교 시온주의(Christian Zionism)와 결합하여 이스라엘의 영토와 전쟁을 무조건 지지하는 정치적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의 강한 세대주의 지지층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으며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의 생명만 귀하고 팔레스타인 사람의 생명은 가볍다고 볼 수 없다. 두 민족 모두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는 나팔절 같은 유대 절기에 맞추어 이스라엘의 국가적 부흥과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장시간 기도하기도 한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귀하지만, 지상의 국가와 영토가 다시 하나님의 구원 경륜 전체를 이끌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의 참평화는 군사력과 영토 확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할 때 이루어진다.
유대인은 저주받아 없어져야 할 민족이 아니다. 그들을 죽이거나 미워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빼앗는다. 우리가 오천 년 동안 무속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고 하나님께서 한국 민족을 없애 버리셔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유대인의 죄는 죄대로 보되,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동시에 유대 민족이 다시 전 세계 구원사의 유일한 중심이 된다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메시아를 낳을 특별한 사명이 있었으나, 예수님이 오신 뒤에는 누구든지 그분을 믿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이 있을 수 있고 마지막 때 남은 자들이 돌아올 수 있지만,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교회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원감람나무 가지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은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도 믿음과 회개의 열매가 없으면 꺾으실 수 있다. 촛대가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겨졌다고 해서 교회가 자동으로 끝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안심하며 죄를 품고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잃게 된다.
마지막 시대에 중요한 것은 어느 민족이 더 우월한가가 아니다. 누가 회개하고 천국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회개와 천국복음의 촛대를 맡기셨다면, 우리는 민족적 자랑이 아니라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세로 감당해야 한다. 육체 안의 귀신을 내보내고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늘의 기업을 차지하게 하는 희년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유대인에게는 감사와 긍휼을, 세대주의에는 공헌에 대한 인정과 오류에 대한 분별을, 교회에는 회개와 충성을 적용해야 한다. 극단적인 대체신학처럼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말고, 극단적인 세대주의처럼 육적인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와 교회 위에 올려놓지도 말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과 한 가족이 되는 복음의 질서를 붙들어야 한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세대주의의 시작과 네 가지 성경해석 특징, 그리고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세대주의는 대체신학의 반유대적 극단과 교권주의에 반발하여 등장했고, 성경 공부의 대중화와 선교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문자적 해석과 두 백성론을 지나치게 밀고 나가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약속을 다시 육적인 이스라엘의 미래로 돌렸다.
대체신학의 극단도 옳지 않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절했다고 유대인을 증오하고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를 두셨고, 마지막 때에도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외칠 사람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은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소중한 영혼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구원이 교회와 별도의 길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다윗의 보좌, 가나안 땅, 성전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그분께 속한 교회와 하늘의 기업으로 확장되었다.
구원은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살아 있는 믿음은 회개와 순종의 열매를 낳는다. 믿음으로 시작했다는 이유로 마지막 열매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회개를 수없이 반복하고도 성품과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진실로 죄를 버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비난하는 데 머물지 말고 자신에게 맡겨진 촛대와 사명을 돌아보아야 한다. 원감람나무도 믿지 않음으로 꺾였으니 접붙임을 받은 우리는 더욱 겸손히 믿음에 서야 한다. 회개와 천국복음을 붙들고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들며, 주님이 맡기신 희년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대주의의 공헌은 감사히 받고 그 오류는 성경적으로 분별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사랑으로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천국의 기업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13일(일)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