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
이 설교는 세대주의적 종말론, 특히 환난 전 휴거설의 성경적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성경을 해석하는 올바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특정 신학적 교리라는 안경을 벗고 오직 성경 본연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말씀을 직시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는 세대주의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엄격히 분리하여 7년 대환난 전 모든 교회가 휴거된다고 가르치지만, 이는 다니엘서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지적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환난을 피한다는 안일함에 빠지기보다, 마지막 때에 준비된 알곡이자 영적 군사로서 승리하기 위해 철저히 회개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어떻게 종말론의 ‘신학적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본문 →2세대주의는 일곱 시대와 이스라엘·교회, 천년왕국을 어떻게 구분하는가?본문 →3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본문 →4마지막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와 제3성전의 시대로 보는 해석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본문 →5데살로니가전서 4장이 말하는 휴거와 부활은 무엇인가?본문 →6주님의 공중 강림 때 누가 데려감을 당하며, 알곡 추수와 나팔은 무엇을 뜻하는가?본문 →7환난 전 휴거설을 분별하는 성도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본문 →강의 자료
그림 2 · 슬라이드 26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세대주의 시리즈의 네 번째 시간이자, 세대주의의 성경 해석법을 살피는 세 번째 시간이다.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환난 전에 교회 전체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준비된 성도만 공중으로 들림받는다고 말하는가? 이는 성경 자체가 달라서가 아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붉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면 푸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필자는 장로교 합동개혁 측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나 장로교 통합 측으로 가서 통합측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목사가 된 이후에는 다른 교단의 신학도 공부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어느 교단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좋은 가르침이 많지만, 구원과 종말에 관한 중요한 대목은 괄호 안에 들어 있는 성경 말씀과 교리와 일치하는지 대조하여 다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어느 교단의 종말론이든지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에는 다양한 안경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 종말의 사건 순서까지 다르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독자도 필자의 설명을 무조건 따르지 말고 성경을 펴서 하나씩 확인해야 한다. 필자 역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왜 환난 전 휴거(携擧, rapture)를 말하는가? 그것의 핵심은 종말론 해석의 기준으로 잡고 있는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를 해석할 때 마지막 한 이레를 먼 미래의 일로 옮겨놓고, 그 시간은 이스라엘의 시간이므로 교회가 먼저 떠나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성도의 들림을 말하는 본문이기는 하지만 그 사건이 '칠 년 환난 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휴거의 존재와 휴거의 시점을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하려 할 때에는 우선적으로 공중 강림과 부활, 알곡의 추수, 남겨지는 사람, 마지막 나팔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지상재림을 살펴야 한다. 특히 이번 시간에 다룰 것은 환난 전 휴거설의 근거 가운데 첫째 대목으로서 '성도의 휴거'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대주의가 환난 전 휴거설을 어떻게 세웠으며, 성경이 주님의 공중 강림 때의 부활과 성도의 들림을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과연 얼마나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어떻게 종말론의 ‘신학적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종말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나는 이미 배운 것이 있으니 나는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다. 장로교에서 배운 사람은 장로교의 설명을 들었을 것이고, 순복음에서 배운 사람은 순복음의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석의 출발점은 교단의 이름도, 유명한 주석도, 필자의 말도 아니어야 한다. 성경의 문장과 그 문장이 놓인 배경과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야 한다. 성경 원문을 살피고, 예수께서 친히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자들은 종말론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은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하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한 구절의 문자적 의미를 소중히 여긴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어떤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정확히 살피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에만 묶어 놓으면, 이미 오신 메시아의 성취를 지나쳐 버린다. 그러므로 세대주의가 표준으로 삼고 있는 종말론의 근거 구절인 다니엘서 9장도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이 요한에게까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예언이 바라보던 바로 그분을 가리키는 마지막 주자이자 선구자였다(마 11:12-13).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의 대부분은 세례 요한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종말의 시간까지 확장해서 보려고 하는 입장이 세대주의 입장이다.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제사의 완성을 이루셨는데도 옛 제사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經綸, economy)을 거꾸로 보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먼저 메시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의 성취를 보고, 그다음에 다니엘의 예언과 성전의 문제도 읽어야 한다.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가장 큰 문제는 종말론을 잘못 해석했다고 해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말론을 잘못 배우면 실제 삶도 매우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혹 세대주의자들처럼 환난 전에 교회에 속한 사람은 모두가 다 휴거된다고 믿으면, 자신이 왜 지금 깨어 있어야 하는지, 죄를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지낼 수 있다. 주님은 때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분명 깨어 있으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어렵다(마 24:42). 그러므로 해석은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날 예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지를 결정하는 것은 삶의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혹시 필자가 말하는 바를 듣고도 성경을 대조하여 잘못된 곳을 찾게 된다면 얼마든지 알려 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언제라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고칠 의향이 있다. 그러나 판단하기도 전에 익숙한 안경을 다시 쓴 채 ‘우리 교단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혹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멈추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저자가 뜻한 흐름을 찾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각 구절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환난 전 휴거설을 검토하는 첫걸음이다.
3. 세대주의는 일곱 시대와 이스라엘·교회, 천년왕국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세대주의'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끄시는 방식을 일곱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 신학사조(神學思潮) 가운데 하나이다. 그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대주의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통치하는 방식을 일곱 시대로 구분하여 본다. 타락 이전 아담의 무죄 시대, 타락 이후의 양심 시대, 바벨탑과 함께 이야기하는 인간 정부 시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약속 시대, 모세 이후의 율법 시대,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은혜 곧 교회 시대,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와 율법의 시대를 말할 때는 기원전 1446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부터 은혜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은 성경 역사의 순서를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시대마다 구원(救援, salvation)을 받는 방식이 다른 듯이 가르친다면 문제가 생긴다.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받고 은혜 시대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식의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엄격히 분리하는 입장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나온 민족 이스라엘을 땅의 백성이라 칭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 교회를 하늘의 백성이라 칭한다.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성전, 지상 왕국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교회는 하늘의 기업과 새 예루살렘을 받는 별도의 백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대주의처럼 이렇게 이스라엘과 교회를 둘로 영원히 나누면, 한 몸 안에서 두 백성을 함께 읽어야 풀리는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
셋째, 세대주의는 교회 시대를 이스라엘 역사 사이에 삽입된 기간으로 보는 것이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 중 예순아홉 이레가 지난 뒤 교회 시대가 끼어들어 왔고, 교회가 떠나가야 이스라엘에게 남은 한 이레가 시작된다고 본다. 이 논리를 따르면 교회는 환난 전에 공중으로 올라가야 하고, 땅에서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어 시련을 겪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환난 전 휴거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만을 가지고 갑자기 나온 주장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어 세운 시간표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영국의 존 넬슨 다비(A.D.1880-1882)에게서 시작되어 스코필드의 관주성경(A.D.1909)을 거치며 미국 교회와 선교 현장에 널리 퍼졌다. 그리고 한국에는 바로 그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순복음의 세대주의적 환난 전 휴거설과 일부 장로교회 안의 역사적 전천년설도 이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세대주의를 알려면 참고로 『세대적 진리(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클라렌스 라킨 저, 말씀보존학회, 1997)라는 책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 나온 그림과 도표를 보면 이 체계가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체계가 촘촘하게 풀이되었다고 해서 그 연결 하나하나가 곧 성경 본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환난전 휴거설은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al kingdom)과 그대로 연결된다. 특히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첫째 부활(復活, resurrection)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되어 있다. 장로교 통합 측에서는 무천년설이라는 교리로서, 천년왕국이 없다고 설명하지만, 필자는 실제로 천년의 왕 노릇을 하는 시기가 있다고 믿는다. 세대주의와 다른 대목은 성도들이 왕 노릇을 하는 장소다. 세대주의는 재림(再臨, second coming) 뒤 이 땅 위에 지상 왕국이 세워진다고 보지만, 필자는 천국의 땅에서 왕 노릇한다고 본다(계 5:10; 20:4-6).
계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계 20:6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 나오는 바,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과 20장의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함께 읽되, 그곳이 어느 땅을 가리키는지를 물어야 한다. 필자가 천국의 땅으로 이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실제로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중에는 새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서 왕 노릇하는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일곱 나팔의 재앙을 통해 지상의 환경을 심판하신 뒤, 천국에 있던 성도들이 다시 그 험한 지상으로 내려와 살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자의 종말론적 해석이며, 이 해석을 따라가려면 해당 본문을 직접 다 펴서 살펴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의 장소를 지상이라고 정해 놓고 모든 성구를 거기에 억지로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지금 천국의 실제 상황을 모르면 천년왕국의 비밀을 잘 풀 수 없다.
4.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세대주의는 과연 언제 주님의 재림이 있다고 보는가? 그들은 이중 재림을 믿는다. 그래서 7년 대환난 전에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시고, 7년 대환난이 있은 후에, 예수님의 지상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왜 세대주의는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세대주의의 종말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환난 전 휴거설의 시간표의 근간이 되는 다니엘서 9장부터 알아야 한다.
다니엘 9장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로 추정되는 이가 다니엘에게 그의 백성과 그의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의 기한이 정해졌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네 백성’이 유대 민족이고 ‘네 거룩한 성’이 예루살렘이므로, 이 예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예순아홉 이레 뒤에, 종말의 한 이레가 오기까지 교회 시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한 이레가 오기까지는 유대인들을 위한 예언의 시계가 멈춰 있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그러나 다니엘 9장의 칠십 이레의 말씀은 다니엘의 백성이 왜 보존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속해지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일을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할 수 있는가(단 9:24)? 불가능하다. 결코 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오셔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보존하신 것은 그 백성에게서 여자의 씨,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함이다. 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이 오시는 통로였고, 예언의 중심은 오실 그분에게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마지막 한 이레를 초림의 예수님으로 성취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을 먼 미래의 일로 떼어서 해석한다. 그들은 다니엘서 9장 27절에 나오는 한 이레를 먼 미래에 있을 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 다니엘서 9장 26절은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나 예순아홉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다는 예언이다(단 9:25-26). 여기서 끊어지는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시면서 죽으셨으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졌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이 완성되었다.
단 9:25-26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다시 성전을 짓고 옛 제사를 회복해야 한다는 세대주의의 주장은 더이상 설득력이 없다. 요한복음 4장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이라는 장소 우선주의 혹은 민족 우선주의를 뛰어넘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다(요 4:21-24).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칠십 이레는 그것을 읽는 자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여야 한다. 특별히 필자는 일곱이라는 수가 안식일과 안식년, 면제년과 희년으로 이어지는 구약의 흐름 속에서 메시아의 성취를 바라보게 한다고 여러 차례 밝혀 놓았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는 초림의 예수님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끝을 먼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에 묶어 놓으면, 이미 오신 희년의 주님을 놓치게 된다. 더욱이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요한에게까지 끝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 순서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마 11:13).
그렇다면 ‘네 백성’과 ‘네 성’을 무시하자는 말인가? 그러한 뜻이 아니다. 다니엘이 받은 예언은 실제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향해 주어졌다. 하지만 그 백성과 성을 통해 오실 분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이스라엘을 빼놓지도 않고 또한 그리스도를 뒤로 미루지도 않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이다. 세대주의가 본문에 없는 긴 교회 시대를 예순아홉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넣었는지, 그 이유를 다음 질문에서 살펴보자.
5. 마지막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와 제3성전의 시대로 보는 해석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그런데 다니엘서 9장 27절에는 한 이레 동안 언약을 굳게 하고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세대주의는 여기에 나오는 3인칭 대명사 ‘그’를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敵基督, antichrist)로 해석한다. 예순아홉 이레 뒤에 교회 시대라는 긴 간격을 집어넣고, 남은 한 이레를 지구 역사의 마지막 칠 년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스라엘과 평화언약을 맺었다가 삼 년 반이 지나 본색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지막 한 이레를 해석하면서 ‘칠 년 대환난’이라는 교리를 만들어내었다.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그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그런데 이 해석이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에게 성취되려면 다음 단계도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그때 적그리스도가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하려면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파괴되어 없는 상태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제3성전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그리스도가 성전을 세워줌으로써 유대인에게 메시아인 듯 보이다가, 이레의 절반에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제사를 막으며 짐승의 표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박해를 통해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이어 지상의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9장 27절을 읽으며 필자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솨바트)는 단어의 번역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금지한다고 읽으면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성전의 제사를 강제로 중단시키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을 '그친다'(솨바트)로 번역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면 제사와 예물이 그치게 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제사의 완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가 뒤이어 세우는 성전과 환난의 시간표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이미 2,000년 전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는데, 옛 제사를 다시 드려야 종말의 계획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세대주의에서는 이러한 종말의 시간표를 설명할 때, 다니엘 9장과 함께 데살로니가후서 2장도 같이 이어 붙여서 설명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며, 그가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내세운 후에 주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살후 2:3-4). 세대주의는 여기에 나오는 '불법의 사람'을 다니엘서 마지막 한 이레의 ‘그’와 동일시하고, 그가 세워 줄 성전을 미래의 제3성전으로 본다. 여러 구절을 이렇게 한 체계 안에 모아 놓으면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구절들을 잇는 고리가 본문 자체의 말씀인지, 후대의 시간표인지 분별하고 확인하고 검토해야 한다.
살후 2:3-4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성경은 불법의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이라 내세우는 일에 대해 말한다. 누구든지 그 사실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 전체를 그 사람의 협약 기간으로 놓고, 그것을 제3성전의 건축과 환난 전 교회 전체의 휴거까지 잇는 것은 세대주의의 해석이다. 그런데 필자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를 먼저 그리스도의 성취로 읽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제사를 완성하셨다면, 물질적 성전과 제사를 하나님의 마지막 경륜의 중심에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불어 세대주의에서는 이스라엘의 절기를 끌어와서 종말론의 시간표를 보강하기도 한다. 봄의 절기들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도 미래의 민족 이스라엘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나팔절 때에 교회가 휴거되어 올라가고, 속죄일 때에는 환난 중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회개하며, 초막절 때에는 지상 천년왕국으로 들어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적 이스라엘을 통하여 말씀을 성취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이 불순종했을 때에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이루신다고 본다. 그러므로 절기의 배열 역시 반드시 육적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만 이루실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세대주의에서는 7년 대환난을 겪을 때에 이스라엘이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짐승의 강요와 박해를 겪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만이 구원자임을 깨달아 회개할 때에 속죄일에 대한 성취가 이루어지며, 이어 초막절의 성취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상의 천년왕국에 들어간다고 한다. 먼저 땅에서 휴거되어 하늘로 올라간 교회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한 이레가 끝날 때까지 공중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기와 마지막 한 이레와 두 백성의 분리가 한 묶음으로 움직이기에, 칠 년 대환난 전 휴거설을 검토하려면 그 묶음의 시작인 다니엘서 9장의 해석부터 정확히 점검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칠 년 대환난’이라는 기간은 대체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가? 아무리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읽어도 그 숫자가 나오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읽어도 그 숫자가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대답을 세대주의에서 다니엘서 9장의 한 이레에서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70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를 먼 미래의 칠 년으로 옮기고, 거기에 데살로니가후서와 요한계시록의 사건을 이어 붙여서 7년 대환난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7년 대환난이라는 것을 여러 구절을 붙여서 만든 것일 뿐, 직접적인 성경 말씀은 성경에 없다.
6. 데살로니가전서 4장이 말하는 휴거와 부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말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휴거가 있는가? 그것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가장 유력한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부터 18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본문에서 마지막 날에 주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살전 4:16-17). 그런데 여기 17절에서 '끌어올린다'는 동사는 바로 ‘하르파조’라는 동사인데, 그 뜻이 '낚아채어 데려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한자로 바꾸어 사람들은 '휴거'(携擧, Rapture)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세대주의자들도 인용하여 그대로 말한다. 필자도 역시 이러한 성도들의 휴거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살전 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잠자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단지 잠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살전 4:14). 예수께서 나사로를 두고 잠들었다고 하셨지만 그가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잠자는 자는 곧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요 11:11-14).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순서는 어떠한가? 주님이 강림하실 때 죽은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성도도 변화되어 그들과 함께 끌어올려질 것이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일과 산 자를 변화시키는 일은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도들의 부활의 사건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바울은 부활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려준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변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산 사람도 변화될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15:51-52). 이는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바, ‘먼저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가 끌어올려진다’는 순서와 일치한다.
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순서로 부활하는 것일까? 요한계시록 20장을 보면, 성도들에게 부활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는 첫째 부활이 있고 또 하나는 둘째 부활이다(계 20:4-6).
이 중에서 첫째 부활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개인적으로 죽은 성도가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부활 때에 어떤 사람은 지금 하늘의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천년왕국에 동참하여 왕 노릇을 하기도 할 것이다.
계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럼, 둘째 부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부활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어서 진행되는 백보좌 심판 때에 나머지 성도들과 불신자들이 부활하는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둘째 부활은 모두가 단체적인 부활에 속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의 공중강림 시에 부활하는가? 그들은 알곡 성도들이다(계 14:14-16). 이 부활은 궁극적으로 곧 있을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자를 소집하는 부활이다. 이것이 구약의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인 나팔절의 실현이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시에 쭉정이 성도들이 부활할 것이며 불신자가 부활하여 백보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계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성도는 딱 두 가지 종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는 첫째 부활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주 안에서 죽어서 개인적으로 부활하는 부활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하늘에서 진행되고 있는 천년왕국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이때 죽은 성도들은 천국의 한 켠인 낙원으로 가서 심판을 받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하고(고후 5:10), 이후 그들은 천국에 마련된 자기의 처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공중으로 강림하실 때에 부활하는 둘째 부활로서 단체적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알곡 성도들만 먼저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진행될 지상 재림 때에 부활하는 부활도 역시 단체적인 부활인데, 이때는 남겨진 쭉정이 성도들이 부활할 것이며, 불신자들의 부활하여 백보좌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왜 성경은 부활을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로 나누어 말씀하는가? 그것은 사망도 둘을 구분하여 말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첫째 사망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사망을 가리키며,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사망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결코 둘째 사망이 그를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말한다(계 20:6).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사건을 분별할 때 이 사망의 차이까지 함께 살펴야, 몸이 죽는 일과 최종 심판 뒤의 영원한 운명을 혼동하지 않게 된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금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은 부활체를 입고 천국의 한켠인 낙원으로 간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데, 그때에 이 땅에서 맡은 사명과 행한 일에 따라 상급과 책망을 받는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행위책에 너무 많다면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을 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무렵 죽는 성도가 왜 ‘먼저 일어난다’고 할까? 필자는 그때 주님이 낙원이 아니라 공중으로 강림하여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그 무렵 죽은 사람의 심판은 잠시 유보하고 무덤에 머물게 하고 있다가 먼저 일으키시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어 살아남은 성도들을 변화시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부활과 재림 때의 부활하는 단체적인 부활로서 둘째 부활을 구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7. 주님의 공중 강림 때 누가 데려감을 당하며, 알곡 추수와 나팔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런데 세대주의의 환난 전 휴거설의 가장 큰 맹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것이 7년 대환난 전에 교회의 휴거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는 없는 것인데, 다니엘의 70이레 가운데 한 이레를 자기들식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둘째는 그때 교회의 모든 지체가 하나도 빠짐없이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므로 일부는 들림받고 일부는 땅에 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의 필독서인 『세대적 진리』에도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므로 몸이 나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 시에 있을 휴거의 모습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두 사람(남자)이 밭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24:40-41). 이것은 두 여자가 집 안에서 맷돌질을 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이것은 낮에 있을 주님의 강림의 모습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밤에 있을 휴거의 모습까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남겨지게 될 것이다(눅 17:34). 한 지역이 낮일 때 지구 반대편은 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시계로만 주님의 오심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날짜와 그 시간을 알 수 없다고 하셨다.
마 24:40-41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17: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그러나 세대주의는 몸의 하나 됨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외면해 버린다. 분명히 분리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그날 휴거되어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주님이 오시는 날과 시각은 우리가 정할 수 없다. 예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날짜를 맞추라는 말이 아니라, 갑자기 오실 때 준비된 모습으로 서 있으라는 말씀이다(마 24:36, 42-44).
그렇다면 언제 이렇게 성도들 가운데서도 분리가 일어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흰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인자 같은 이가 나온다.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이 들려 있다. 그때 천사가 땅의 곡식이 익었으니 거둘 때가 되었다고 외친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고 이어서 곡식이 추수된다(계 14:14-16). 필자는 이것을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때 있을 성도들의 휴거, 곧 익은 곡식, 곧 알곡을 거두시는 휴거라고 본다. 여기를 보더라도, 주님의 공중강림 시에 있게 될 휴거에 모든 성도들이 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계 14:14-16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또한 그날 성도들의 휴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정확하게 말씀해주셨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서 31절의 말씀이다. 환난 후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신다고 했다(마 24:30-31). 데살로니가전서의 하나님의 나팔,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나팔, 마태복음의 큰 나팔을 함께 읽으면, 들림은 주님을 맞을 사람을 공중으로 모으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필자는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면 주님께서 공중으로 강림하시고, 그때 천사들이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성도들을 모을 텐데,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알곡 추수라고 본다.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나팔절에 알곡 추수가 일어날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 성도들을 공중으로 모으실 것이다.
마 24:29-31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와 천사의 장면도 이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한다.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작은 두루마리와 관련된 사명을 힘센 천사에게 넘기신 뒤에 구름 위에 강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알곡을 거두실 것이다(계 10:1-11; 14:14-16). 그러므로 우리들 중에 누군가 어느 날 나팔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그날 공중으로 올라갈 알곡 성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이라면 빨리 익어야 한다. 그래서 그날 울려 퍼질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바로 지상으로 내려오지 아니하시고, 공중으로 성도들을 모으시는 것일까? 그것은 곧 있을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에 참여할 나머지 전사들을 모으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전사들은 그날 주님께서 데리고 오실 것이다. 그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로서 왕 노릇하는 성도들이 바짝 주님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날 공중으로 휴거되어 올라가서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이기는 성도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7년 대환난 때에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공중으로 데려간다는 세대주의의 설명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날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여 주님 뒤에 설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충성하고 정결(淨潔)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악한 영을 떠나보내야 한다. 내 속에 악한 영들이 남아 있다면 간첩을 내 안에 간직한 채 전쟁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자를 과연 주님께서 그날 전쟁의 전면에 내세우실 것인지는 본인이 생각해야 한다. 전쟁에 나갈 사람 안에 원수의 첩자가 가득 들어 있다면 어떻게 그를 주님께서 당신 곁에 세우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기는 자들이 되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날 휴거되지 못한 채 남겨진 모든 성도들이 곧바로 멸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중 강림 때 알곡으로 선택되지 못한 성도라 할지라도 남은 기간에 믿음을 지키고 주님께 나아오면 그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으며, 또한 죽을 때에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을 위해 주님께서 지상으로 오실 때에는 남겨진 신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불신자도 함께 부활하여 백보좌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깨어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성도들이 들림받을 때에 선택과 남겨짐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8. 환난 전 휴거설을 분별하는 성도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환난 전 휴거설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가장 염려되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7년 대환난전에 휴거된다는 것을 믿은 나머지, 회개를 게을리하고 적당히 살아도 휴거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까 염려된다. 그렇다. ‘나는 이미 교회에 속해 있으니 칠 년 대환난이 오더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체로서 나는 반드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할까 염려된다. 환난 전 휴거설을 믿는 자들은 과연 자신이 남겨질 가능성이 있는지를 생각하며 그날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러나 환난이 왔는데도 그들이 휴거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면, 과연 그 후에 진행될 혹독한 시련의 기간을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신앙을 보라. 모두 다 믿는 성도들이다. 모두가 약혼한 처녀로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신랑을 기다렸고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신부와 그렇지 않은 신부의 결말은 어떠했는가?(마 25:1-13). 준비한 신부는 신랑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 혼인잔치에 참여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나머지 신부는 성 밖에 남겨지고 말았다. 다시 말해, 재림 후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치러지는 혼인잔치에 미련한 다섯 처녀는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라는 자격이 그날 혼인잔치에 그 사람들을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밖으로 보이는 신앙의 모양만으로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못 들어가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는 바, 그날 들림받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 성도들이 ‘다 휴거된다’는 말에서 미혹되지 말고, ‘그날 나도 혼인잔치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일어난다고 하는데, 어찌 오늘의 준비를 내일로 미룰 수 있다는 말인가!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종말의 한 사건에 나도 참여하기 위한 형식이 아니다. 필자로 이토록 회개를 거듭 권하는 까닭은 죄를 자백할 때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지워지게 되고, 악한 영이 떠나가며, 성도가 주님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알곡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섭섭한 일 하나 때문에 말씀에서 멀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자신을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듣고 날마다 죄를 돌이키며, 환난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세대주의를 따르는 사람을 모두 이단이라 부를 일은 더더욱 아니다. 세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인천의 모교회 목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다면 다 같이 형제인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을 높이 평가하고 스코필드 계열의 세대주의 해석을 따른다 해도, 그들을 미워하거나 그들을 정죄할 이유는 없다. 해석의 차이는 성경을 펴서 검토하고, 사람은 형제로 대해야 한다. 다른 해석을 배웠다는 이유로 서로를 끌어내리려는 태도 또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니다.
필자 자신도 독자에게 ‘무조건 필자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신약성경의 어디에도, 즉 데살로니가전서 4장이나 요한계시록이나 마태복음 24장의 어디를 살펴보아도, 칠 년이라는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7년 대환난 전에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휴거되어 올라간다고 주장하지만, 마태복음 24장이나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그날에 데려감을 받은 자와 남겨짐을 받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휴거 때에 올라가는 성도들을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익은 곡식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에 둘째 부활과 공중에서의 만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7년 대환난 전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휴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날 남겨진 성도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대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지상 재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환난 전 휴거설의 근거 가운데 첫 번째로서, "7년 대환난 전 교회의 휴거"에 대해 다루었으며, 나머지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자신 안의 악한 영을 내보내며, 맡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 주님이 알곡을 거두시는 날 나팔소리를 듣고 그분 곁에 설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는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이 권면은 어느 종말론 도표를 따르라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모든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하겠지만 환난의 끝부분에 휴거될 것임을 미리 알고 환난에 잘 대비하자는 데에 있다. 그날 주님께서 공중으로 부르실 때에 응답할 성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 나오며
환난 전 휴거설이 나온 세대주의의 일곱 시대와 두 백성의 구분,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 해석, 데살로니가전서의 부활과 들림, 예수님의 데려감과 남겨짐을 살펴보았다. 성도의 휴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교회가 칠 년 환난 전에 빠짐없이 올라간다’는 주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니엘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에서 읽어야 하며,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는 익은 알곡이 모인다.
그러므로 성도는 익숙한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의 말씀과 사건의 순서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남겨질 가능성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오늘 회개하며 믿음을 지켜야 한다. 동시에 다른 종말론을 배웠다는 이유로 형제를 정죄하지 말고, 함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 깨어 준비한 알곡으로 응답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7일(주일) · 정보배 목사
![이번 주 말씀 온라인새벽기도회(2026.10.19/월,오전5시반)[바른 구원론(01)] 사람이 구원을 얻는 시점과 구원을 잃어버리는 시점은 언제인가?(히10:26~31)](https://i.ytimg.com/vi/5VoG2mwGH8k/mqdefault.jpg)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files/attach/images/218/347/267/42ef806342b79c8e974e0f0c030bfc8a.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files/attach/images/218/347/267/79df515ea1412408bf1079d28b2e2837.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3](/files/attach/images/218/347/267/e94e3215cb13b76bdbeffcf4c2224a91.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4](/files/attach/images/218/347/267/c58ce108a5d485ab61b259cbc2484eff.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9](/files/attach/images/218/347/267/63afc4005ba2b70dcc5fadceb625f781.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0](/files/attach/images/218/347/267/6fa45ca1c34a7e9efe7b98f1992edec0.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1](/files/attach/images/218/347/267/5f081ebc7e655104df9da55b43d0cba0.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2](/files/attach/images/218/347/267/61a450bd6e498b11228b7fd3d51559e7.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3](/files/attach/images/218/347/267/fdeb3d4c26f9797e0126488be51e3859.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4](/files/attach/images/218/347/267/7ff3804f62ea91bac4ba376814239925.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5](/files/attach/images/218/347/267/734257a99f0f69aee17b2534ffdb70ea.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6](/files/attach/images/218/347/267/4413b7baf7b97ce2101dbb7a961f34ce.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7](/files/attach/images/218/347/267/bf49a2ad45aab8a14aa44796d16bd24f.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8](/files/attach/images/218/347/267/289c964c291f1ce13de0d2cab1c9e88c.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19](/files/attach/images/218/347/267/5eb6265fa9b59624a5f33c6f89df5ccf.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0](/files/attach/images/218/347/267/89b3be7a611b4a06472d43c8c0de5a76.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1](/files/attach/images/218/347/267/30ebd5e7d7a1738a6ef9e3b4acdf6899.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2](/files/attach/images/218/347/267/7f2534556f383f4cfa8f58f533430503.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3](/files/attach/images/218/347/267/4d8470ed936818c1b345942db960adef.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4](/files/attach/images/218/347/267/a5c80adf53dbece9fb6f7cab413a7c8e.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5](/files/attach/images/218/347/267/f83fd75894f8debe69af79a31a7eb14c.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6](/files/attach/images/218/347/267/ad68107277b76c2871e1540fcdf62542.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7](/files/attach/images/218/347/267/6e931c03e1a792349214ced876af2bd9.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8](/files/attach/images/218/347/267/1581556886231f831f4231984e56ca69.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29](/files/attach/images/218/347/267/f1db83b3fcedf133cc0a7550ba0abe05.webp)
![[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_2026-09-27(주일) – 이미지 30](/files/attach/images/218/347/267/fd1f0fe6739ce11d3e7142c0ce51d675.we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