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0(수) 수요기도회
제목: [레위기강해(08)] 정결법(01) 음식과 관련된 동물의 정부정법(레11:1~4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hNsNBU-wgpE
1. 들어가며
음식과 관련된 정부정법(淨不淨法)을 우리가 굳이 배워야 하는가? 신약 시대에 들어와 모든 음식이 풀렸는데, 굳이 구약의 음식법을 왜 배워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부정법을 단지 음식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음식법은 깊은 영적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림자이며 모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또한 행 10장에서 베드로에게 보여 주신 보자기 환상을 통해 모든 음식이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어떤 음식도 부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음식법이 본래 가지고 있던 영적 의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풀렸다는 사실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영적 보고(寶庫)를 그대로 묻어 두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
레위기 강해 시리즈의 첫 시간부터 일곱 번째 시간까지는 제사법과 제사장법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 여덟 번째 시간으로서, 정결법 첫째 시간을 시작하면서 레위기 11장의 음식과 관련된 동물의 정부정법이 신약 시대에 어떻게 풀렸는지, 그러면서도 그 영적 의미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그리고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가르는 영적 구분 기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신약 시대에 음식법이 풀린 영적 이유와 두 가지 정결법은 무엇인가?
신약 시대에 음식법이 풀린 영적 이유를 먼저 살펴보자.
행 10장의 베드로의 보자기 환상이 결정적이다. 베드로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중에 황홀한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되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워졌다. 그 안에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들어 있던 짐승들은 다 부정한 짐승일 확률이 매우 높다. 곧 돼지가 들었을 것이고, 독수리가 들었을 것이고, 박쥐가 들었을 것이며, 호랑이도 들었을 것이다. 다 부정한 짐승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사실의 영적 의미는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그때 주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거절하였다.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레 11장의 음식법을 철저히 지켜 온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소리가 있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셨다. 이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갔다.
이 환상은 단순히 음식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곧 이방인도 이제는 깨끗하게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너희만 정결한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도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이다.
행 10:11-16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뿐만 아니라 딤전 4장 3절에서 5절까지를 보라.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혀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 후에 감사함으로 받아 먹을 수가 있다.
딤전 4:3-5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여기서 한 가지 분별이 필요하다. 음식법을 적용할 때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내년 2월부터 강제로 보신탕을 먹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떻게 예쁜 강아지를 잡아먹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원칙으로 보자. 미꾸라지 추어탕은 어떠한가? 미꾸라지는 비늘이 없다. 지느러미는 옆에 약간 달리고 뒤에 큰 것이 있긴 하나, 비늘이 없으므로 영적 원칙으로는 부정한 음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추어탕을 맛있게 먹는다. 또한 오징어, 문어, 갑오징어, 고등어, 새우, 게, 가재, 랍스터 - 이것들이 다 비늘이 없거나 지느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별 거부감 없이 먹는다.
그러므로 적용을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이런 것은 되고 저런 것은 안 된다는 식의 자의적 적용은 옳지 않다. 신약 시대에는 모든 것이 깨끗해졌다. 그러나 그 영적 의미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이 정결법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먹어서 부정해지는 것'이다. 둘째는 '접촉해서 부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영적으로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진다.
'먹어서 부정해진다'는 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죄를 지어 뱀들과 귀신을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음식이 내 속에 들어와 살과 피가 되듯이, 죄를 지으면 그 영이 내 살과 피가 되어 내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반면 '접촉해서 부정해진다'는 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무당집에 간다든지 우상의 처소에 간다든지 하여 영적으로 잠시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는 그날 저녁까지 부정하다고만 하였다. 곧 잠시 영향을 받지만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먹어서 부정해진 것'에는 정결케 하는 방법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토해 내라고도 하지 않고, 물을 한 동이 마시라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부정하다고만 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곧 죄를 지어 귀신을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말해 준다. 신약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정결케 하는 법이 분명히 밝혀졌다. 곧 요일 1장 9절의 회개와 자백을 통해서만 그것이 정결케 되는 것이다.
3. 정결법은 레위기 전체에서 어디에 위치하며 대속죄일은 왜 정결법인가?
레위기서 전체 구조를 살펴보자. 레위기서를 영적으로 깊이 이해하려면 그 구조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레위기서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첫째 파트는 1장부터 10장까지의 '제사장법'이다. 그 가운데서도 1장부터 7장까지는 '제사법'이고, 8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장법'이다. 곧 어떤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 누가 그 제사를 집행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둘째 파트는 11장부터 28장까지의 '정결·성결례'이다. 그런데 이 둘째 파트는 다시 둘로 나뉜다. 11장부터 17장까지는 '정결법'이고, 18장부터 28장까지는 '성결법'이다.
'정결'과 '성결'은 한자 표기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정결(淨潔)'은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고, '성결(聖潔)'은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깨끗하게 하는가? '정결'은 물과 피로 깨끗하게 한다. 무엇이 거룩하게 하는가? '성결'은 피와 관유(冠油)와 옷으로 거룩하게 한다. 그 방법이 좀 달라지는 것이다.
정결법의 각 장을 살펴보자. 11장은 음식과 관련된 동물의 정부정법이다. 12장은 산모(産母)가 피를 흘려 아이를 낳았을 때의 정부정에 관한 것이다. 13장과 14장은 나병에 관한 것이다. 15장은 유출병에 관한 것이다. 16장은 대속죄일 제사에 관한 것이다. 17장은 피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곧 16장의 '대속죄일 제사'가 '속죄법'이 아니라 '정결법'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대속죄일을 그저 속죄법으로만 접근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영적 핀트가 아니다. 대속죄일은 정결법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대속죄일이 정결법에 속하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지성소가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사단 마귀에 의해, 또한 타락한 그룹 천사에 의해 하늘이 더럽혀졌기에, 그것을 청소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의 피를 가져와 뿌리는 것이 곧 대속죄일 제사이다. 이는 단순히 죄를 속하는 일이 아니라 더럽혀진 지성소를 청소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결법으로 대속죄일에 접근해야 한다. 속죄법으로만 접근하면 왜 예수께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정결법으로 접근하면 그 영적 비밀이 풀린다. 곧 하늘이 사단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에 의해 더럽혀졌기에, 예수의 피로 그 하늘 자체를 청소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레위기서의 전체적인 구조 가운데서 11장의 음식법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11장은 정결법의 첫 번째 항목이다. 곧 '깨끗하게 한다'는 큰 흐름 가운데서 '음식과 접촉'을 다루는 것이다.
4. 신약 시대에도 멀리해야 할 세 가지 음식은 무엇이며 왜인가?
신약 시대에 모든 음식이 풀렸으나, 그래도 멀리해야 할 음식이 있다. 그것이 세 가지이다. 행 15장 19절에서 20절까지를 보라. 또한 28절에서 29절까지를 보라. 이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며, 최초의 교회 회의가 정한 핵심 사항이다.
행 15:19-20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행 15: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기서 한 가지 정확히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행 15장 본문은 '먹지 말라'가 아니라 '멀리하라'고 말한다. 단호한 금지의 명령이 아니라 가까이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그러나 그 권고에는 깊은 영적 이유가 있다.
첫째, '우상의 재물'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전 10장 19절에서 22절까지를 보라.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상에 바쳐진 재물을 먹는 것은 곧 귀신과 교제하는 일이다. 영의 눈으로 우상의 재물을 보면 거기에 뱀들이 가득 들어가 있다. 그것을 먹으면 그 뱀들이 우리 위장 속에 그대로 들어와 달라붙어 우리를 괴롭힌다.
고전 10:19-22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자체의 쌀이나 미역이나 소고기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제사상에 올라가는 순간 영적 성격이 바뀌어 버린다. 그 음식에 뱀들이 가득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명절에 친지 집에 갔을 때 제사 음식을 그냥 먹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말씀과 기도로 깨끗하게 한 후에 먹어야 한다.
둘째, '피'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 '피를 멀리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수혈도 받지 말라'고 잘못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술 도중 피를 수혈받지 않아 죽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성경에서 피를 멀리하라고 하신 영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레 17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지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함부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피를 함부로 먹고 핏기를 막 먹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중요성이 떨어진다. 보혈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인데, 일상에서 피를 함부로 다루면 그 영적 중요성이 가벼이 여겨지는 것이다.
셋째,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가장 깊이 들어가야 할 영적 비밀을 담고 있다.
뱀들이 사람을 자살시킬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무엇인가? 곧 목매어 죽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관여하는 영들이 따로 있다. 어깨 쪽에서 타고 올라온 영들이 목 안에 들어가는데, 어깨에는 귀신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 목에는 뱀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 뱀들이 양쪽에서 목을 엮어 점점 굵어진다. 영의 눈으로 보면 그 굵어진 뱀들이 마치 자살할 때 쓰는 끈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목매어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망의 영, 자살의 영이 그 사람에게 달라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 세 가지 - 우상의 재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 는 모두 깊은 영적 이유 때문에 멀리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한다.
5.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가르는 영적 구분 기준은 무엇인가?
이제 레 11장의 본격적인 정부정 기준을 살펴보자. 그러나 그 기준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곧 레 11장이 기록되기 이전에도 이미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창 7장 2절에서 3절까지를 보라. 노아의 홍수 때 노아에게 정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데려오라 하셨다. 또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하셨다.
창 7:2-3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노아의 홍수 시대 곧 모세보다 한참 이전에 이미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정의 기준은 모세에게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영적으로 존재하던 것이며, 모세 시대에 와서 율법으로 명문화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가르는 영적 구분 기준이 무엇인가? 그 기준은 곧 '사단의 타락에 동조했는가'에 있다.
사단이 천사들을 미혹하여 타락하게 할 때, 그 사단은 동물들에게도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게 한 것 같다. 본 종이 이를 직접 영적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나 영적 흐름을 종합해 보면 그렇게 추정된다. 그래서 사단 편에 가담한 동물은 부정한 짐승이 되었고, 가담하지 않은 동물은 정한 짐승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영적 팩트가 하나 있다. 곧 '물고기'에 관한 사실이다. 행 10장의 베드로의 보자기 환상에서 '물고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보자기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었다. 또한 레 11장에서도 물고기 가운데 부정한 종류가 따로 있는 것이지, 물고기 전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물고기는 사단의 타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사단이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 했을 때, 물고기는 그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물고기는 부정한 짐승의 큰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다만 그 가운데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만 별도로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러나 육지에 사는 짐승과 하늘에 나는 새들 가운데서는 사단의 타락에 동조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어둠을 좋아하는 것은 어둠 쪽으로, 사망을 좋아하는 것은 사망 쪽으로, 약자를 착취하는 것은 착취 쪽으로, 이 세상에 딱 달라붙어 사는 것은 세상 쪽으로 분류되어 부정한 짐승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부정한 것이 무엇인가? 곧 '사단이 부정한 것'이다. 뱀과 귀신이 부정한 것이다. 죄가 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은 결국 사단 마귀의 영역에 속하느냐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느냐의 영적 구분이다.
6. 육지 동물의 '쪽발이와 새김질'이 가진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레 11장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부정 기준을 살펴보자. 먼저 육지 동물의 기준이다.
육지 동물은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정한 짐승이며, 그 외의 것은 부정한 짐승이라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쪽발이'와 '새김질'이 둘 다 충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곧 'AND'의 조건이지 'OR'의 조건이 아니다.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대표적인 짐승이 무엇인가? 사슴, 노루, 소, 양, 염소 등이다. 이런 짐승들은 정한 짐승이다. 반면 발바닥으로 다니는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다. 사자, 호랑이, 곰, 고양이 등이 그러하다. 레 11장 27절에서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걷는 것은 모두 부정하다고 하셨다.
레 11:27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걷는 것은 모두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또한 기는 것은 모두 부정하다. 도마뱀, 악어, 그리고 모든 뱀이 그러하다. 왜인가? 뱀이 타락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 마귀에게 쓰임을 받은 뱀이 하나님께 거역하는 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사는 모든 짐승이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돼지는 어떤가? 돼지는 쪽발이 되어 있다. 그러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돼지는 부정하다. 낙타는 어떤가? 낙타는 새김질을 한다. 그러나 쪽발이 아니다. 발바닥이 납작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부분적으로 갈라져 있긴 하나 완전히 갈라져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낙타도 부정하다. 한 가지 조건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부정한 짐승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 기준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자.
먼저 '쪽발이'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 쪽발이가 되어 있는 짐승들은 모두 톡톡 튄다. 사슴이 톡톡 뛰고, 노루가 톡톡 뛴다. 발이 갈라져 있어서 마치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톡톡 튀어 오른다. 이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이 세상에 딱 달라붙지 않고 빨리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이다.
반면 발바닥으로 다니는 짐승은 어떠한가? 발바닥이 넓고 부드러워서 땅에 딱 붙는다. 그 짐승들은 결국 '이 땅에 딱 달라붙어 사는 모습'을 표현한다. 곰이나 호랑이가 발바닥을 땅에 딱 붙이고 다니는 그 모습 - 그것이 영적으로 부정한 모습이다.
롬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곧 이 세상에 딱 달라붙지 말고 빨리 벗어나라는 명령이다. 쪽발이 짐승의 톡톡 뛰는 모습이 바로 그 영적 자세를 보여 준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새김질'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음식을 한번 먹고 그것을 위에 보내었다가 다시 끌어올려 되씹는 것이 새김질이다. 이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세'이다.
시 1편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 하지 않았는가?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한번 들은 말씀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곱씹고 또 곱씹어, 그 말씀의 깊은 영적 의미가 자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자이다.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결국 육지 동물의 정부정 기준은 우리 성도의 영적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딱 달라붙지 아니하고 톡톡 튀어 천국을 향해 빨리 벗어나려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주야로 묵상하는 자 - 그가 곧 영적으로 정결한 자이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정결한 것이지, 어느 한쪽만 있어서는 부정한 짐승이 되어 버린다.
7. 수중 생물과 새들의 정부정 기준이 가진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수중 생물과 새들의 정부정 기준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자.
먼저 수중 생물이다. 레 11장 9절은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AND'의 조건이다. 지느러미만 있어서는 안 되고, 비늘만 있어서도 안 된다. 둘 다 있어야 정한 것이다.
미꾸라지는 어떠한가? 미꾸라지는 비늘이 없다. 지느러미는 옆에 약간 달리고 뒤에 큰 것이 있긴 하나, 비늘이 없으므로 부정한 음식이다. 그러므로 영적 원칙으로 보면 추어탕은 부정한 음식에 속한다. 고등어는 어떠한가? 고등어도 비늘이 거의 없으므로 부정한 음식이다. 오징어, 문어, 새우, 게, 가재, 랍스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이 다 비늘이 없거나 지느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기준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자.
'비늘'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 비늘은 물고기의 몸 전체를 덮어 보호한다. 마치 갑옷과 같다. 이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자세'이다. 비늘은 물이 직접 살에 닿지 못하게 막아 준다. 그렇듯이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의 더러운 물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 닿지 못하도록 영적 갑옷을 입어야 한다. 곧 진리의 띠로 허리를 동이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느러미'의 영적 의미는 또 무엇인가? 지느러미는 물고기에게 추진력을 준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이 세대의 조류를 거슬러 하나님께로 차오르는 자세'이다. 세상은 자꾸 거꾸로 흘러간다. 그 흐름에 그대로 떠내려가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을 향해 차고 올라가는 자세 - 그것이 곧 영적인 지느러미이다.
그러므로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어야 정결한 것은, 영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면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동시에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하나님께로 차오르는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 보호만 있고 추진력이 없으면 그저 정체되어 있을 뿐이고, 추진력만 있고 보호가 없으면 세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더럽혀진다.
이제 새들의 정부정 기준을 살펴보자. 레 11장 13절 이하에서는 부정한 새들의 목록이 길게 나온다. 거기에는 독수리, 까마귀, 박쥐, 부엉이, 올빼미 등이 들어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네 가지 영적 부류로 정리된다.
첫째, '약한 새를 잡아먹는 맹금주류'이다. 곧 약자를 착취하는 부류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약한 자를 막 누르고 압제하며 빼앗아 먹는 모습이 영적으로 부정한 모습이다.
둘째, '까마귀와 독수리처럼 시체를 뜯어먹는 새'이다. 이는 동물의 사체 곧 죽은 것을 먹는 부류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사망을 추구하는 부류'이다. 죽음을 좋아하고, 죽음을 미화하고, 죽음 쪽으로 자꾸 끌리는 그 모습이 영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우리는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 '박쥐와 부엉이와 올빼미처럼 어둠을 좋아하는 새'이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활동한다. 이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어둠을 추구하는 부류'이다. 죄를 짓는 자가 어둠을 좋아하는 것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가 사단이기 때문이다. 나이트 클럽이 캄캄하다가 빨간 불이 돌아가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이 어둠의 속성이다.
넷째, '잡식성으로 이것도 저것도 먹는 새'이다. 시체도 먹고 곡식도 먹고 가리지 않고 다 먹는 부류이다. 이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세상도 즐기고 교회도 다니는 양다리 신앙'이다. 세상의 즐거움도 즐기다가 교회에 와서 찬송도 부르며 은혜도 받는 척하는 모습이 영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반면 정한 새는 어떠한가? 정한 새는 풀과 씨앗을 먹는 새이다. 비둘기가 대표적이다. 풀과 씨앗을 먹는다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씨앗은 '생명을 잉태한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다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새의 정부정 기준은 우리에게 분명한 영적 교훈을 준다. 약자를 착취하지 말고, 사망을 추구하지 말고, 어둠을 좋아하지 말고, 양다리 신앙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도리어 비둘기처럼 생명을 추구하고 빛 가운데 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체나 사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짐승이든 정한 짐승이든 모두 부정하다. 사람이 죽은 몸은 '주검'이라 하고, 동물이 죽은 몸은 '사체'라 한다. 또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죽은 사람의 몸은 '시체'라 하고, 신원이 확인된 죽은 사람의 몸은 '시신'이라 한다. 그 정확한 용어를 알면 보다 정확히 사용할 수가 있다. 어떻든 죽음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다. 그러나 그 부정은 그날 저녁까지의 일시적 부정이다. 곧 접촉한 영향이 일시적으로만 있는 것이다.
8. 음식 정부정법이 가르치는 궁극적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이제 음식 정부정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궁극적인 영적 교훈을 정리해 보자. 이 음식법은 결국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첫째는 너의 속에 악한 영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부정한 것과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영적 무게가 같지 않다. '먹은 것'은 살과 피가 되어 우리 몸 안에 깊이 박힌다. 그러나 '접촉한 것'은 그날 저녁까지의 일시적 부정에 그친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 귀신을 받아들이는 일과, 어떤 부정한 처소에 잠시 다녀오는 일은 그 영적 무게가 크게 다른 것이다.
죄를 지으면 그 영이 우리 몸에 들어와 살과 피 사이에 박힌다. 살 속에도 들어가고, 피 속에도 들어가고, 뼈 속에도 들어간다. 특별히 등뼈 사이사이에 그 영들이 깊이 박힌다. 사람의 등뼈는 24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오래된 영들이 다 들어가 있다. 이것이 곧 히브리서가 말하는 '쓴뿌리'이다. 이 쓴뿌리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회개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만큼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무당집에 잠시 들렀거나, 우상의 처소에 잠시 다녀오거나, 부정한 곳에 잠시 갔다 오는 것은 그날 저녁까지의 영향에 그친다. 회개와 정결 의식으로 금방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그것이 가벼운 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죄지어 영을 받아들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시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한 짐승의 영적 표상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 정한 짐승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 무엇인가? 곧 '노루와 사슴'이다.
아 2장 8절에서 9절까지를 보라.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는 그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 그 모습이, 마치 노루와 어린 사슴과 같다고 하였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모습이 정한 짐승의 표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아 2:8-9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신 12장 15절과 22절, 그리고 신 15장 22절에서도 노루와 사슴이 정결한 짐승의 표상으로 거듭 등장한다.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이들이 영적으로 정결한 짐승의 대표적인 표상이기 때문이다.
신 12:22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음 같이 먹을 수 있거니와
뿐만 아니라 시 18편 33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발이 암사슴 같다고 노래하였다. 다윗도 이 영적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려고 하지 않았고, 톡톡 튀어 하나님께 차오르는 영적 자세를 가졌던 것이다.
시 18:33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곧 예수님께 속한 것은 모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펄쩍펄쩍 뛰며 천국을 향해 차오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이미 더럽혀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신약 시대를 살면서 잘못 알아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 죄를 지어 더 많은 귀신과 뱀을 받아들였다면, 우리 몸은 이미 귀신의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회개로 이 모든 것을 빼내야 한다. 회개로 정결케 되면, 우리 육체까지도 성령이 지배하시는 거룩한 도구가 된다. 곧 귀신의 집이었던 우리 몸이 성령의 전, 성령의 집으로 바뀌는 것이다.
계 22장 14절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자기 두루마기를 날마다 빨아야 한다. 그 두루마기에 무엇이 묻었으면 - 죄가 묻었으면, 부정함이 묻었으면 - 즉시 빨아야 한다. 그것이 곧 회개이다.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결국 음식법이 가르치는 궁극적 영적 교훈은 이것이다. 곧 사단 마귀에 속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 마귀에 속한 자를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길이 곧 '회개'이다. 회개는 물로 씻는 것이고, 회개는 피로 씻는 것이다. 우리는 일평생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고, 생명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추구해야 한다.
9. 나오며
지금까지 본 시간을 통해 정결법의 첫째 시간으로서, 음식과 관련된 동물의 정부정법을 살펴보았다. 신약 시대에 음식법이 풀린 영적 이유와 두 가지 정결법 곧 '먹어서 부정해짐'과 '접촉해서 부정해짐'을 살펴보았고, 정결법이 레위기 전체 구조에서 11장부터 17장까지에 위치하며 대속죄일이 정결법에 속하는 영적 이유 곧 더럽혀진 지성소의 청소를 살펴보았다. 또한 신약 시대에도 멀리해야 할 세 가지 음식 - 우상의 재물, 피, 목매어 죽인 것 - 의 영적 이유를 살펴보았고, 노아 홍수 때부터 이미 존재한 정·부정의 영적 구분 기준이 곧 '사단의 타락에 동조했는가'에 있으며 물고기는 그 참여에서 빠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육지 동물의 '쪽발이와 새김질'의 영적 의미 곧 세상에서 벗어남과 말씀 묵상을 살펴보았고, 수중 생물의 '비늘과 지느러미'의 영적 의미 곧 세상에 물들지 않음과 조류를 거슬러 차오름을 살펴보았으며, 새들의 정부정 기준 네 가지 곧 맹금주류·시체 먹는 새·어둠의 새·잡식성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음식 정부정법이 가르치는 궁극적 영적 교훈 곧 정한 짐승의 표상인 노루와 사슴처럼 살아 회개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되어야 함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신약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 옛 음식법의 영적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음식이 풀렸다는 사실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음식법이 가리키는 영적 진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두 가지 부정 곧 '먹어서 부정해짐'과 '접촉해서 부정해짐'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죄를 지어 귀신과 뱀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 몸의 살과 피가 되어 깊이 박히지만, 우상의 처소에 잠시 들르는 일은 일시적 영향에 그친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회개와 정결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
레 16장의 대속죄일이 정결법에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단순한 속죄법으로만 대속죄일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단 마귀와 타락한 그룹 천사에 의해 더럽혀진 지성소를 예수의 피로 청소하시는 그 영적 진리를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한다.
신약 시대에도 우상의 재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멀리해야 한다. 우상에 바쳐진 재물에는 뱀들이 가득 들어가 있고, 피를 함부로 다루면 예수의 보혈의 중요성이 떨어지며, 목매어 죽은 짐승의 고기에는 자살의 영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영적 구분 기준이 곧 '사단의 타락에 동조했는가'에 있음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사단 편에 속한 모든 것은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 속한 모든 것은 정결한 것이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할 것인지를 매 순간 분별해야 한다.
육지 동물의 '쪽발이와 새김질'의 영적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한다. 이 세상에 발바닥을 딱 붙이고 살지 말고 톡톡 튀어 천국을 향해 차올라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하듯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영적으로 정결한 사람이 된다.
수중 생물의 '비늘과 지느러미'의 영적 교훈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한다. 영적 갑옷으로 자신을 보호하여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동시에 이 세대의 조류를 거슬러 하나님께로 차고 올라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새들의 정부정 기준이 가르치는 네 가지 영적 교훈을 분명히 익혀야 한다. 약자를 착취하지 말고, 사망을 추구하지 말고, 어둠을 좋아하지 말고, 양다리 신앙으로 살지 말고, 도리어 비둘기처럼 생명을 추구하며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회개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우리 육체에 깊이 박힌 영들 곧 등뼈 사이사이에 자리한 쓴뿌리들을 회개로 빼내야 한다. 두루마기를 날마다 빨아 정결하게 함으로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거룩한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날에, 정한 짐승의 표상을 따라 산 우리가 그분의 정결한 신부, 거룩한 신부로 인정받아 천국 잔치에 합류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20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의 레위기 11장 강해를 담고 있으며, 구약의 음식 정결법 속에 담긴 영적 교훈과 현대 기독교인의 회개와 성결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육지 동물, 수중 생물, 조류 등의 정부정(正不正) 기준이 단순히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생명을 추구해야 하는 성도의 영적 태도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교는 신약 시대에 음식의 제한은 풀렸으나 죄를 통해 악한 영을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오직 철저한 회개만이 신자를 정결케 하여 천국 상속자로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는 정결한 신부가 될 것을 촉구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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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정리]
1. 들어가며
레위기 11장은 음식과 관련된 동물의 정·부정법을 다룬다. 겉으로 보면 이 본문은 매우 낯설다.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어떤 물고기는 정하고, 어떤 물고기는 부정하다고 한다. 어떤 새는 부정하며, 어떤 기는 것은 가증하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예수께서 이미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레위기 11장의 음식법을 왜 다시 배워야 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신약 성도는 구약의 음식 규례로 다시 돌아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막 7:18-23). 또한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 안에 담긴 각종 부정한 짐승을 보았고,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행 10:13-15). 그러므로 신약 성도에게 음식 자체는 더 이상 구약 율법처럼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뉘어 금지되지 않는다.
막 7: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행 10:13-15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그렇다면 레위기 11장은 오늘날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음식 정·부정법을 주신 데에는 분명한 뜻이 있다. 그 뜻은 단순히 위생법이나 민족 구별법에만 머물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탄에게 속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영적 교육이다.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말씀과 죄, 성령의 역사와 귀신의 역사를 구별하게 하는 하나님의 교육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 하나님이 서로 다른 뜻을 가지신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예표와 그림자로 가르치셨고, 신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이제도 이 동물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정하다고 하셨는가, 왜 이것을 부정하다고 하셨는가, 그 영적 기준은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히브리어로 ‘정하다’는 말은 ‘타호르’이다. 이는 깨끗하고 순전하며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반대로 ‘부정하다’는 말은 ‘타메’이다. 이는 더럽혀져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정결법은 단순히 음식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어떤 상태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법이다.
레위기 11장의 음식 정·부정법은 결국 성도의 영적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이다. 어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영이 죄를 통하여 내 안으로 들어오느냐이다. 무엇을 만지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과 접촉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세계에 마음을 붙이고 사느냐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레위기 11장의 음식 정·부정법이 오늘의 성도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우리가 어떻게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신약 성도도 음식 정·부정법을 배워야 하는가?
신약 성도는 구약의 음식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의 그림자는 실체를 만났다. 구약의 음식 정·부정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사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유대인의 음식 규례 전체를 짐으로 지우지 않았다. 디모데전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씀한다(딤전 4:4-5).
딤전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그렇다면 왜 배워야 하는가? 그것은 음식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법 안에 담긴 영적 원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음식 자체는 깨끗하게 되었지만, 정결과 부정의 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음식에 관한 문자 규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탄에게 속한 것을 분별해야 하는 영적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수께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다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도가 이제 아무 영적 분별 없이 무엇이든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음식 자체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죄가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는 더 깊은 차원의 정결을 요구받는다. 구약에서는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을 외적으로 구별했다면, 신약에서는 내 마음과 영혼 안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막 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구약의 음식 정·부정법은 성도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친다. 부정은 밖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안으로 받아들일 때 더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레위기 11장은 먹는 것과 접촉하는 것을 구분한다. 어떤 사체를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하다. 그러나 부정한 것을 먹는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죄를 통해 악한 영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는 레위기 11장을 통해 귀신론의 중요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 악한 영은 아무 근거 없이 사람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죄가 문이다. 불순종이 통로다. 우상숭배가 자리다. 음행과 탐욕과 거짓과 교만은 악한 영이 들어와 거처를 만들 수 있는 영적 공간을 제공한다. 접촉은 외부의 영향일 수 있지만, 죄를 지어 받아들이는 것은 내면화다. 바로 이 점에서 먹음의 부정은 오늘날 성도의 영적 상태를 깊이 경고한다.
레위기 11장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 그들에게 아무렇게나 살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와 제사만 규정하신 것이 아니라, 먹는 것과 만지는 것까지 가르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일상생활 전체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레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따로 떼어졌다는 뜻이다. 신약의 헬라어 ‘하기오스’도 같은 방향을 가진다. 성도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땅을 밟고 살지만 땅이 전부인 사람처럼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의 음식법은 오늘날에도 성도에게 묻는다. “너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먹고 있는가, 세상과 죄와 사망에 속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신약 성도는 음식법의 문자 규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음식법의 영적 의미는 반드시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다고 하신 것에는 생명과 빛과 하늘의 원리가 들어 있고,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하신 것에는 사망과 어둠과 땅의 원리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말씀이다. 그것은 식탁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며,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몸과 영의 정결 문제다.
3. 레위기 11장은 정결법 안에서 어디에 놓이는가?
레위기 11장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레위기 전체 구조를 보아야 한다. 레위기는 무작위로 배열된 제사 규례 모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분명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크게 보면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는 제사법을 다룬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와 같은 제사가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장법을 다룬다. 누가 제사를 집례하며, 제사장은 어떻게 위임받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레위기 11장부터 17장까지는 정결법이다. 여기서는 더럽혀진 것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음식으로 인한 부정, 출산으로 인한 부정, 나병과 악성 피부병으로 인한 부정, 유출로 인한 부정, 성소와 지성소의 정결, 피에 관한 규례가 이어진다. 그다음 레위기 18장부터 27장까지는 성결법이다.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룬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정결과 성결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말이 아니다. 정결은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성결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더러움이 제거되어야 거룩한 봉사가 가능하다. 깨끗하게 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결법은 성결법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여 있다.
레위기 11장이 바로 이 정결법의 첫머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은 정결을 말씀하실 때 가장 먼저 음식과 접촉의 문제를 다루신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삶에서 접촉하는 것이 그의 상태를 좌우한다. 이것은 오늘날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도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접촉하고, 무엇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조심해야 한다.
특히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 제사가 정결법 안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흔히 대속죄일을 단순히 속죄의 관점에서만 본다. 물론 대속죄일은 죄를 속하는 날이다. 그러나 레위기 구조 안에서 보면 그것은 동시에 성소와 지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날이다. 왜 지성소가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공간까지도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려야 했다.
레 16:15-16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타임라인을 보아야 한다. 창조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와 함께 사망이 들어왔다. 노아 시대에는 이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나타났다. 모세 시대에는 그 구분이 율법으로 명문화되었다. 성막 시대에는 부정이 성소까지 더럽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의 피로 참된 정결을 이루셨다. 이제 성도는 그 보혈을 힘입어 날마다 회개함으로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마지막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와 성 밖에 남는 자가 나뉜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은 단지 “먹을 수 있는 동물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정결을 배우는 첫 관문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더럽혀지는가, 더럽혀진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어떤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출발점이다.
정결법의 핵심은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물로 씻고, 피로 속죄하며, 정결 기간을 지나야 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회개를 통해 정결케 된다. 요한일서는 성도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레위기 정결법의 신약적 성취를 보여 준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따라서 레위기 11장은 구약에 갇혀 있는 음식 규례가 아니다. 그것은 정결법의 문을 여는 말씀이다. 정결하지 않으면 거룩할 수 없고,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이 레위기 11장이 오늘날에도 성도에게 중요한 이유다.
4. 굽이 갈라짐과 새김질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레위기 11장에서 육지 동물의 정결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어야 한다. 둘째, 새김질해야 한다. 이 둘은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되는 조건이 아니다. 둘 다 있어야 한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하지 않으므로 부정하다. 낙타는 새김질하지만 굽이 완전히 갈라진 쪽발이 아니므로 부정하다. 하나님은 이 두 기준을 함께 요구하셨다.
레 11:3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히브리어로 굽은 ‘파르사’라는 말과 연결된다. 굽이 갈라진다는 것은 땅을 딛고 살되, 발바닥 전체를 땅에 밀착시켜 사는 방식이 아니라는 뜻을 가진다. 레위기 11장 27절은 네 발로 다니는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부정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묘사가 아니다. 영적으로 보면, 발바닥을 땅에 완전히 붙이고 다니는 것은 이 땅에 밀착된 삶을 상징한다.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육신의 쾌락과 물질과 이생의 자랑에 붙어 사는 삶을 보여 준다.
레 11:27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너희에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러나 굽이 갈라진 짐승은 땅을 밟지만 땅에 붙어 살지 않는다. 사슴과 노루와 양과 소는 땅 위를 걷지만, 발의 구조가 다르다. 특히 사슴과 노루는 가볍게 뛰어오른다. 이것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성도의 삶을 보여 준다. 성도는 땅에서 산다. 직장도 다니고, 가정도 이루고, 음식을 먹고, 돈도 사용한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 성도는 땅을 밟지만 하늘을 향해 산다.
예수께서도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셨지만 땅에 속한 방식으로 살지 않으셨다. 주님은 로마의 정치 권력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인정에 매이지 않으셨다. 주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다. 그러므로 주님께 속한 성도 역시 이 세상에 완전히 달라붙어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아가서에서 신랑은 노루와 어린 사슴에 비유된다. 신랑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한다. 그분은 땅의 무거움에 붙잡힌 분이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자를 찾아오시는 생명의 주님이다. 노루와 사슴은 정한 동물이며, 땅에 매이지 않고 뛰어오르는 모습을 가진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어떤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아 2:8-9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두 번째 기준은 새김질이다. 새김질은 히브리어 표현으로 ‘게라를 올린다’는 뜻과 관련된다. 먹은 것을 다시 올려 되씹는 행위다. 영적으로 이것은 말씀 묵상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한 번 듣고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되새긴다. 이것이 새김질하는 신앙이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묵상은 단순한 지적 사색이 아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되씹는 것이다. 말씀이 내 안에서 다시 올라오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세상 말과 세상 정보와 세상 욕망을 되새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이것이 정결한 삶의 두 번째 기준이다.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굽이 갈라짐과 새김질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완전히 붙어 산다면 정결한 삶이 아니다. 반대로 세상과 구별되려고 한다면서 말씀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그것도 정결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둘 다 요구하신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발과 말씀을 되씹는 입이 함께 있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배당 안에서는 말씀을 듣지만, 삶의 방향은 여전히 땅에 붙어 있다. 돈이 전부이고, 성공이 전부이며, 육신의 즐거움이 전부인 것처럼 산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과 구별된 척하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구별은 쉽게 자기 의나 종교적 고집이 된다. 정결한 성도는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져야 한다. 발은 땅에 달라붙지 않아야 하고, 입과 마음은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그러므로 육지 동물의 정결 기준은 성도의 삶을 정밀하게 비춘다. 굽이 갈라짐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이다. 새김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이다. 이 둘을 갖춘 자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을 향해 나아간다.
5. 지느러미와 비늘은 어떤 신앙을 보여 주는가?
물속 생물의 정결 기준도 두 가지다. 지느러미가 있어야 하고, 비늘이 있어야 한다. 이 역시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되는 조건이 아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물에 있는 것 중 바다든 강이든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하셨고, 둘 중 하나가 없거나 둘 다 없는 것은 가증하다고 하셨다.
레 11:9-10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히브리어로 지느러미는 ‘세나피르’이고, 비늘은 ‘카스케세트’이다. 지느러미는 물속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하는 기관이다. 비늘은 몸을 보호하는 덮개다. 그러므로 물속 생물의 두 기준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두 가지 원리를 보여 준다. 하나는 세상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추진력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력이다.
물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쓰인다. 때로는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방과 세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물속 생물의 정·부정법을 영적으로 볼 때, 물은 성도가 살아가는 세상 환경을 보여 준다. 세상에는 흐름이 있다. 시대의 흐름, 문화의 흐름, 욕망의 흐름, 죄의 흐름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흐름을 따라간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성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도는 물결에 떠내려가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처럼 방향을 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느러미는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다. 믿음은 시대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이 넓은 길을 좋아할 때 성도는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이 육신의 쾌락을 찬양할 때 성도는 거룩을 붙들어야 한다. 세상이 탐욕을 능력이라고 부를 때 성도는 자족과 청지기 정신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지느러미 있는 신앙이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비늘은 보호막이다. 물고기가 물속에 살지만 물이 몸 안으로 함부로 스며들지 않도록 보호한다. 성도도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마음과 영혼 속으로 침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비늘의 영적 의미다. 성도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갈 수 없다. 직장과 학교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불신자와 접촉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접촉과 동화는 다르다. 세상 속에 있는 것과 세상에 물드는 것은 다르다.
비늘이 없는 신앙은 위험하다.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유행에 쉽게 따라가며,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린다. 세상의 가치관이 조금만 들어와도 마음이 오염된다. 돈, 명예, 쾌락, 인정욕구, 비교의식, 원망, 음란, 교만이 마음에 스며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 비늘을 가져야 한다. 그 비늘은 말씀과 기도와 회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지느러미만 있고 비늘이 없으면 앞으로 가려는 열심은 있지만 쉽게 상처받고 오염된다. 비늘만 있고 지느러미가 없으면 보호하려는 태도는 있지만 하나님 뜻을 향해 전진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지느러미와 비늘을 함께 요구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도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보호력과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추진력을 함께 가져야 한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의 방식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 방식, 세상의 경쟁 방식, 세상의 인기 방식, 세상의 소비 방식에 물들면 비늘을 잃은 것이다. 또한 교회가 자기 보호에만 머물고 복음 전파와 영적 전진을 멈춘다면 지느러미를 잃은 것이다. 정결한 교회는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향해 전진한다.
물속 생물의 정결 기준은 성도의 영적 균형을 가르친다. 세상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신앙이다. 성도는 세상의 물결 속에 살지만, 그 물결이 이끄는 대로 떠내려가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향해 올라가는 존재다.
6. 부정한 새와 기는 것은 무엇을 경고하는가?
레위기 11장은 새들 가운데 부정한 것들을 열거한다. 독수리, 솔개, 매,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새매, 부엉이, 가마우지, 따오기, 학, 박쥐 등이 언급된다. 본문은 육지 동물이나 물속 생물처럼 “이런 조건을 가진 새는 정하다”라고 명시하지 않고, 부정한 새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새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야 한다.
부정한 새들의 특징은 대체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체를 먹는 새들이다. 독수리와 까마귀는 죽은 것을 먹는다. 둘째, 약한 것을 잡아먹는 맹금류다. 매와 솔개와 같은 새들은 다른 생명을 사냥한다. 셋째, 어둠과 관련된 새들이다. 올빼미와 부엉이와 박쥐는 밤과 어둠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이 특징들은 모두 영적 의미를 가진다.
레 11:13 너희가 새 중에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사체를 먹는 것은 사망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 반대로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다. 그러므로 죽은 것을 가까이하고, 사망의 문화를 즐기고, 자살과 죽음을 미화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부정한 영의 속성과 연결된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약한 것을 잡아먹는 맹금류는 착취와 폭력을 보여 준다. 이 세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구조를 당연하게 여긴다. 돈 있는 자가 돈 없는 자를 이용하고, 권력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지식 있는 자가 모르는 자를 속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분이다. 약한 자를 삼키는 속성은 사탄의 속성이다. 성도는 힘을 가졌을 때 남을 짓누르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둠에 속한 새들은 죄의 환경을 보여 준다. 죄는 대개 어둠을 좋아한다. 감추어진 곳에서 자란다. 은밀한 욕망 속에서 자란다. 밝은 빛 앞에 나오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어둠을 좋아하는 삶, 은밀한 죄를 붙드는 삶, 빛 가운데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삶은 부정한 삶이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요일 1:5-7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반대로 정한 새들은 대체로 씨앗과 곡식을 먹는 새들로 볼 수 있다. 씨앗은 생명을 품고 있다. 작은 씨 안에는 장차 자라날 생명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을 먹는 새는 생명의 원리와 연결된다. 이것을 절대화하여 생물학적 분류로만 읽어서는 안 되지만, 영적 상징으로 볼 때 의미가 분명하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사망을 즐기지 않고 생명을 귀히 여긴다. 어둠을 사랑하지 않고 빛을 사랑한다. 약한 자를 삼키지 않고 살리는 일을 한다.
기는 것의 부정은 더 직접적이다. 레위기 11장은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하다고 말한다. 배로 기어 다니는 것, 네 발로 걷는 것 중 땅에 배를 붙이는 것, 여러 발을 가진 것 중 기는 것은 부정하다. 그 대표는 뱀이다. 뱀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 타락의 도구로 쓰였다. 사탄은 뱀을 통하여 하와를 미혹했고,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 그러므로 뱀의 계열은 성경 전체에서 사탄의 속성과 연결된다.
레 11:41-42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곧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기는 것은 땅에 밀착된 삶을 보여 준다. 특히 배로 기는 것은 온몸을 땅에 붙이고 사는 모습이다. 영적으로 이것은 땅의 것만 추구하는 삶이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 생명나무와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지 않고, 오직 이 땅의 만족만 붙드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부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하늘의 원리가 아니라 사탄에게 속한 땅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르는 큰 기준을 볼 수 있다. 생명에 속한 것은 정하다. 빛에 속한 것은 정하다. 하늘을 향하는 것은 정하다. 말씀을 되새기며 하나님께 속한 것은 정하다. 그러나 사망에 속한 것은 부정하다. 어둠에 속한 것은 부정하다. 땅에 완전히 달라붙은 것은 부정하다. 약한 자를 삼키고 착취하는 것은 부정하다. 뱀과 귀신의 속성과 연결된 것은 부정하다.
그러므로 부정한 새와 기는 것에 관한 말씀은 성도에게 강력한 경고가 된다. 사망의 문화를 즐겨서는 안 된다. 어둠의 환경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약한 자를 삼키는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땅에 배를 붙이고 사는 자처럼 땅의 것만 추구해서도 안 된다. 성도는 생명과 빛과 하늘과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선택해야 한다.
7. 먹음과 접촉의 부정은 어떻게 다른가?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것을 먹는 문제와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문제를 구분한다. 부정한 사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다. 그 옷을 빨아야 한다. 어떤 그릇은 씻어야 하고, 어떤 토기는 깨뜨려야 한다. 접촉의 부정은 분명히 실제적인 부정이지만, 대개 시간의 제한이 있다. 저녁까지 부정하고, 씻음으로 정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레 11:24-25 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러나 먹는 것은 다르다. 먹는다는 것은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온 것은 몸 안에서 소화되고, 살과 피의 일부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먹음의 부정은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 접촉은 외부 영향이지만, 먹음은 내면화다. 접촉은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먹음은 내 안에 들어온다. 이것이 레위기 11장이 오늘날 성도에게 주는 귀신론적 교훈이다.
영적으로 볼 때, 접촉은 악한 환경과 부정한 장소와 죄의 분위기에 노출되는 것과 같다. 장례식장에 갈 수도 있다.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만날 수도 있다. 세상 직장에서 일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접촉 자체가 곧바로 영혼의 영구적 오염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부정한 환경은 영향을 준다. 죄의 장소, 유흥의 장소, 우상숭배의 장소, 음란과 탐욕이 역사하는 공간은 성도에게 해롭다. 그러나 접촉으로 인한 영향은 회개와 말씀과 기도로 씻어내야 할 외부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죄를 짓는 것은 먹는 것과 같다. 성도가 음란을 행하면 음란의 영에게 문을 여는 것이다. 거짓을 행하면 거짓의 영에게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하면 우상 뒤에서 역사하는 귀신과 접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미움과 살인, 탐욕과 교만, 불순종과 원망도 마찬가지다. 죄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합법적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죄는 더러움이다. 죄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문이다. 죄는 몸과 영혼을 귀신의 집처럼 만들 수 있다. 물론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즉시 구원을 잃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죄를 품고 회개하지 않는 삶은 몸과 영혼을 계속 더럽힌다. 결국 그 더러움은 성도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손해가 된다.
여기서 회개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구약의 레위기 11장에는 부정한 것을 먹은 사람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는지 세밀한 방법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가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것이 신약 성도에게 주어진 정결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단지 처음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도는 날마다 그 피를 의지하여 회개해야 한다.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헬라어로 회개는 ‘메타노이아’이다. 마음과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죄를 사랑하던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사탄에게 속한 자리에서 나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다. 회개는 물로 씻는 것과 같고, 피로 정결케 되는 것과 같다. 회개를 통해 몸속에 자리 잡은 악한 영의 근거가 제거되고, 성도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으로 회복된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누구에게 쓰임받느냐의 문제다. 죄를 지으면 몸은 죄의 도구가 된다. 귀신이 역사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회개하고 성령께 자신을 드리면 몸은 의의 무기가 된다.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 된다.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먹음과 접촉의 차이는 성도의 영적 분별에 매우 중요하다. 모든 접촉을 두려워하여 세상 밖으로 도망갈 필요는 없다. 주님도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셨고, 사도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죄를 먹어서는 안 된다. 죄를 마음 안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정한 것을 즐기고, 반복하고, 합리화하고,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접촉은 씻어내야 하지만, 먹음은 반드시 토해 내듯 회개해야 한다. 죄를 품고 살면 악한 영이 거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레위기 11장이 오늘날 성도에게 주는 매우 실제적인 경고다. 성도는 무엇을 보고 듣고 만지는지도 살펴야 하지만, 더 깊이 무엇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먹는 것은 내가 된다. 죄를 먹으면 죄의 사람이 되고, 말씀을 먹으면 말씀의 사람이 된다.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먹고,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전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8. 음식의 자유 안에서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가?
신약 성도는 음식의 자유를 받았다. 이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게 하셨고, 베드로의 환상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깨끗하게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약 음식법의 문자적 금지에 매여 두려움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음식의 자유가 영적 방종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약 성경은 분명히 멀리해야 할 것들을 말한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 전체를 짐으로 지우지 않았지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멀리하라고 결정했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적 배려만이 아니다. 영적 오염과 깊이 관련된 문제다.
행 15:19-20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행 15: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첫째, 우상의 제물을 멀리해야 한다. 음식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쌀 자체, 고기 자체, 채소 자체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졌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바울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귀신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귀신의 식탁과 연결된다.
고전 10:20-21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성도는 여기서 분별해야 한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 일반 식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받는 음식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우상숭배 의식에 참여하거나, 귀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의미를 알면서 그것을 먹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영적 교제의 문제가 된다. 성도는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하여 참여할 수 없다.
둘째, 피를 멀리해야 한다. 피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 17장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피를 제단에 주신 것은 생명을 속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피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생명과 속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신약 성도에게 피를 멀리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귀하게 여기라는 영적 의미를 품고 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말씀을 잘못 적용해서 수혈 자체를 금지하는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학적 처치에까지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핵심은 피를 생명과 속죄의 관점에서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며,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셋째,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해야 한다. 목매어 죽인 것은 피가 제대로 빠지지 않은 죽음과 관련될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비정상적 죽음과 자살의 어두운 이미지와 연결된다. 목은 생명의 호흡이 지나가는 자리다. 성경은 이 항목을 우상의 제물과 피와 함께 두며 멀리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과 자살과 절망을 부추기는 어두운 영의 흐름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탄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지만, 주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
넷째, 음행을 멀리해야 한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음식 항목들과 함께 음행을 언급한다. 이것은 음행이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영적 오염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행은 몸을 더럽히고, 영혼을 무너뜨리며, 악한 영에게 문을 연다.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므로, 음행은 성령의 전을 더럽히는 일이다.
고전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신약 성도의 음식 자유는 영적 분별과 함께 가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식 자체는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귀신의 식탁에 연결된 것은 멀리해야 한다. 피를 함부로 여기며 생명과 보혈의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태도를 멀리해야 한다. 목매어 죽인 것과 같이 죽음과 절망의 어두운 흐름을 담은 것을 멀리해야 한다. 음행을 멀리해야 한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영적 정결의 문제다.
성도는 자유를 받았지만,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자유는 아무것이나 받아들이는 방종이 아니다. 참된 자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죄와 귀신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을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정결하게 사는 자유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9. 나오며
우리는 레위기 11장의 음식 정·부정법이 오늘날 성도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법은 신약 성도를 다시 구약 음식 규정 아래로 묶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동물의 정·부정법을 통해 영적 분별의 그림자를 보여 주셨고, 신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밝히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음식 자체의 금지에 머물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정결과 부정의 영적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육지 동물의 굽이 갈라짐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보여 준다. 새김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사는 삶을 보여 준다. 물속 생물의 지느러미는 세상 조류를 거슬러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추진력을 보여 준다. 비늘은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는 영적 방어력을 보여 준다. 부정한 새들은 사망과 착취와 어둠을 경고한다. 기는 것들은 뱀의 계열, 곧 땅에 배를 붙이고 사는 사탄적 속성을 경고한다. 먹음과 접촉의 차이는 죄를 통해 악한 영을 내면화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준다.
신약 성도는 음식의 자유를 받았지만, 영적 분별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은 멀리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식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귀신의 식탁과 주의 식탁을 구분하는 문제다. 성도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없다.
성도는 또한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죄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통로이며, 회개는 그 근거를 제거하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는 날마다 회개하고 충성하며, 자신의 몸을 귀신의 집이 아니라 성령의 전으로 세워 가야 한다. 몸을 죄의 도구로 내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정결법의 최종 목적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 요한계시록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을 정결케 하는 삶을 가리킨다. 그런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의 것에 배를 붙이고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늘의 것과 영원한 것과 생명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단지 구원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승점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시작한 성도가 회개와 충성과 정결의 길을 걸어야 함을 말한다. 정결하지 못한 삶을 지속하면서도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날마다 자신을 씻어야 한다. 말씀을 새김질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빛 가운데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길을 걸어야 한다.
레위기 11장의 음식 정·부정법은 결국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 “너는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생명과 빛과 하늘과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인가, 아니면 사망과 어둠과 땅과 죄와 뱀과 귀신의 속성에 끌려가는 자인가를 묻는다. 성도는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 사탄에게 속한 자리에서 벗어나 한 분 하나님께 속한 거룩하고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날마다 두루마기를 빨아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20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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