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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6. 11. (목)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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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PfVuVwscBuM
날짜 2026-06-10
본문말씀 레위기 13:1~14:57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6-06-10(수) 수요기도회

제목: [레위기강해(10)] 정결법(03) 산모의 정결례와 나병의 진단과 정결례(02)(레13:1~14:5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PfVuVwscBuM

 

1. 들어가며

  레위기는 제사법과 정결법을 가르치는 책이다. 제사를 드리고 정결 의식을 행할 자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레위기'라 이름 한 것이다. 레위기의 구조를 보면, 1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법과 제사장 위임식을 다루고, 11장부터 27장까지는 정결법을 다룬다.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분량에서 훨씬 많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속죄보다 정결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신 것이다.

  레위기에서 정결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는 정결(淨潔)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를 지내 거룩하게 하는 성결(聖潔)이다. 레위기 11장부터 16장까지는 정결을, 17장부터 27장까지는 성결을 다룬다. 정결은 더럽혀진 것을 씻는 것이고, 성결은 세속화된 것을 하나님 편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강조점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를 합쳐 정결 의식이라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제사는 속죄를 가리키는 의식이다. 속죄는 피로 죄를 덮어 버리는 것이며 칭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정결은 씻어 내는 것이다. 천국의 행위책에서 자신의 죄의 기록을 씻어 버리는 것이 정결이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다른 목적과 다른 기능을 가진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어 속죄를 받았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착각한다. 이 착각이 신앙생활을 정체시키고 영적 성장을 막는다. 정결케 되지 않으면 귀신이 합법적 근거를 빌미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40년이 지나도 저주가 떠나지 않고, 병이 낫지 않으며, 가난이 지속되고, 귀신이 떠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정결을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결의 핵심은 자백하는 회개에 달려 있다. 회개를 통해 천국 행위책에서 죄가 지워질 때, 악한 영은 더 이상 우리 안에 합법적으로 머물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결례가 신앙생활의 본질임을 레위기는 분명히 가르친다.

  한편 레위기 13장과 14장은 정결법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말씀이다. 나병을 진단하는 법이 13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고, 나병에서 나온 자가 정결케 되는 법이 14장 전체에 걸쳐 기술되어 있다. 왜 이렇게 방대한 분량을 나병에 할애하고 있을까? 이건 나병이 죄의 속성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나병을 통해 하나님은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들어오고 어떻게 진행되며 어떻게 죄에서 해방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병의 진단법과 정결법을 아는 것은 곧 죄의 속성을 알고 죄로부터 깨끗해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달을 때, 레위기는 더 이상 낡은 율법서가 아니라 오늘 나의 신앙생활을 안내하는 생생한 말씀이 된다.

  이번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속죄와 정결의 차이, 물·피·기름 세 가지의 정결 원리, 해산한 여인의 정결법이 가르치는 인간의 본질적 부정함, 레위기 13장 나병의 포괄적 의미, 나병의 세 가지 속성이 드러내는 죄의 본질, 나병에서 나은 자의 두 가지 정결 의식, 그리고 나아만의 요단강 목욕이 오늘날 성도가 자백하는 회개와 과연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 예수 믿는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자백하는 회개로 날마다 정결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 레위기에서 속죄(덮음)와 정결(씻음)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레위기 전체를 관통하는 두 개의 축은 속죄와 정결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은 레위기를 오독하는 것이며 신앙생활 전반에 치명적 오류를 낳는다. 그러므로 먼저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속죄(贖罪)란 무엇인가? 속죄는 히브리어로 '카파르(כָּפַר)'인데, '덮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 버리는 것이 속죄이다. 이것은 칭의를 가리키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김 받는 은혜이다. 신약 성경에서 '용서'로 번역된 헬라어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사실 '내버려 두다', '있는 그대로 두다'라는 뜻을 가진다.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있기는 있되 없는 것처럼 여겨 주는 것이 속죄이다. 거름이 있는 자리에 덮개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 덮개를 치우면 거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이처럼 속죄는 죄를 없앤 것이 아니라 덮어 준 것이다.

  그래서 속죄는 칭의적 은혜이며,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이제 정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로 먼저 베풀어 주신 일시적 은혜이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은 뒤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정결케 되어야 한다. 예수 믿어서 속죄는 받았으나 정결케 되지 않으면, 예수 믿고 40년이 지나도 저주가 떠나지 않고 병이 낫지 않으며 귀신이 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 많은 신자들이 경험하는 현실이다.

  둘째로, 정결(淨潔)이란 무엇인가? 정결은 씻어 내는 것이다. 천국의 행위책에 기록된 죄의 명부를 씻어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이다. 죄의 기록이 행위책에서 지워지면, 그 죄를 근거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던 악한 영은 더 이상 합법적으로 머물 수 없게 된다. 악한 영은 우리의 죄를 합법적 근거로 삼아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은 합법적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회개로 그 합법적 근거가 사라지면, 귀신은 합법적으로 나가야 한다. 귀신이 합법적으로 나가야 하는데도 나가지 않으면, 그것이 불법이다. 그래서 그 불법을 선포하며 내보내는 것이 축사이다. 이처럼 속죄와 정결과 축사는 연결된 하나의 신학 체계이다. 아직 회개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로 귀신을 뽑아내면, 귀신이 나가서 해코지를 한다. 회개가 70%밖에 안 되었는데 110%의 힘으로 뽑아내면, 귀신은 나간 뒤에 더 강한 다른 귀신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래서 자백하는 회개를 먼저 충분히 행하는 것이 정결이요, 정결이 이루어진 후에야 진정한 자유가 온다.

  정결법에도 두 단계가 있다. 하나는 물로 씻는 정결이요, 다른 하나는 기름과 피를 바르는 의식이다. 레위기 11장부터 16장까지는 주로 물로 씻는 정결을 다루고, 17장부터 27장까지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성결을 다룬다. 이 전체를 아울러 정결 의식이라 부른다.

  레위기의 구조가 이 진리를 잘 보여 준다. 1장부터 10장이 제사법이라면, 11장부터 27장은 정결법이다. 분량 면에서 정결법이 훨씬 많다. 하나님은 속죄보다 정결에 더 많은 관심을 두셨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의 피로 속죄를 받는 것만을 강조하고, 자백하는 회개를 통한 정결을 가르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 믿으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는 신학적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레위기의 정결법을 무시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피와 물을 헛되이 여기는 것이다. 속죄는 칭의이고 정결은 성화이다. 칭의로 시작했으면 반드시 성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레위기가 신약 성도에게도 살아있는 교훈인 이유이다.

  정결과 관련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정결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삶에서 귀신이 떠나고, 병이 낫고, 저주가 끊어지는 것은 정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과,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낫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후자는 정결 예식, 곧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별해야 신앙생활의 방향이 바로잡힌다. 속죄는 하나님이 먼저 베풀어 주신 선물이고, 정결은 그 선물을 받은 우리가 날마다 행해야 할 응답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질 때 신앙생활이 온전히 세워진다.

  회개를 충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귀신을 내쫓으면 어떻게 되는가? 귀신이 나가서 해코지를 한다. 합법적으로 들어왔는데 합법적인 과정 없이 강제로 뽑혀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귀신이 더 강한 귀신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것이 자백하는 회개를 먼저 충분히 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정결 예식이 선행될 때, 귀신은 합법적으로 나가고 다시 들어올 근거를 잃게 된다. 그래서 레위기의 정결법은 오늘날의 축사 사역에도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3. 요한일서 5장의 물·피·기름 세 가지는 어떻게 우리를 정결케 하는가?

  레위기 13장과 14장이 말하는 정결 의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신학적 근거를 알아야 한다. 요한일서 5장이 그 열쇠를 제공한다.

요일 5:5-8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본문은 정결의 세 요소를 선포한다. 물과 피와 성령, 곧 기름이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이 땅에 남겨 두고 승천하셨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채찍에 맞고 땀을 흘리시며,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물과 피를 이 땅에 남겨 두셨다.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살은 부활 때 갖고 가셨지만 뼈와 피와 물만 남기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뒤 성령, 곧 기름을 보내셨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행 10:38)고 증언한다. 성령은 기름이다.

  그러므로 정결의 세 요소는 물과 피와 기름이다.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정결케 한다. 레위기 14장의 정결 의식을 보면, 나병에서 나은 자는 먼저 흐르는 물로 씻고, 피를 뿌리며, 기름을 바른다. 이것은 단순한 의례적 절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물·피·기름으로 정결케 된다는 진리를 상징하는 예표이다.

  구체적으로 이 세 가지의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로, 물(水)은 자백하는 회개이다. 자백으로 천국 행위책의 죄 기록이 지워지는 것이 물로 씻는 정결이다. 물로 씻는 것이 정결의 핵심이다. 레위기 14장을 자세히 보면 정결 의식에서 물로 씻는 과정이 거듭 반복된다. 처음에 옷을 빨고 몸을 물로 씻고, 7일째에 다시 털을 밀고 몸을 물로 씻는다. 그 반복이 자백하는 회개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둘째로, 피(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이다. 피 없이는 속죄도 정결도 없다.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덮어 주는 기반 위에서 정결이 시작된다. 셋째로, 기름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정결케 하시며, 정결된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채워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으니 끝났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5장은 세 가지가 합하여 하나라고 분명히 말한다. 물 없이는, 곧 자백하는 회개 없이는 피의 은혜도 완성되지 않는다. 또한 기름, 곧 성령의 역사 없이는 정결이 지속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작동한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정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만으로는 안 된다. 물만으로도 안 된다. 기름만으로도 안 된다. 세 가지가 합하여 하나가 될 때 온전한 정결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날마다 이 세 가지로 정결해지는 삶이다. 물로 씻듯 자백하며, 피의 은혜를 의지하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예수 믿고 나서 자백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 믿어도 귀신이 나가지 않고 병이 낫지 않으며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주님이 이 땅에 물과 피를 남겨 두고 기름을 보내 주신 것은, 그것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라는 뜻이다.

  정결에는 물이 가장 핵심이다. 그래서 레위기 14장의 정결 의식에서도 물로 씻는 과정이 가장 강조된다. 흐르는 물에서 새를 잡아 그 피를 섞은 물로 일곱 번 뿌린 뒤, 몸을 물로 씻는다. 7일 후에 또 몸을 물로 씻는다. 물로 씻는 것이 두 번, 세 번 반복된다. 이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한 번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자백하며, 날마다 씻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것이 주님이 남겨 주신 물의 의미이다.

  피와 기름도 중요하지만 물이 가장 중심이다. 이는 자백하는 회개가 정결의 핵심 수단임을 보여 준다. 예수의 피는 이미 충분히 공급되었고, 성령도 이미 보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자백하는 회개라는 물로 씻는 것이다. 주님은 피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두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물로 씻는 것, 자백하는 회개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위기 정결법이 오늘 성도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4. 해산한 여인의 정결법은 인간의 어떤 본질적 부정함을 가르치는가?

  레위기 12장은 해산한 여인의 정결법을 규정한다. 정결법의 두 번째 주제이다. 첫 번째 주제인 11장이 음식법과 접촉법—무엇을 먹고 무엇을 만짐으로써 더럽혀지는가—을 다루었다면, 12장은 인간 자체의 부정함을 다룬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정하다"는 진리이다.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진다. 아들을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33일간 산혈이 지속된다. 딸을 낳으면 14일 동안 부정하고 66일간 산혈이 지속된다. 아들의 경우 40일, 딸의 경우 80일, 곧 두 배의 차이가 있다. 아들의 경우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기 때문이다. 할례는 회개의 의식이다. 남자아이는 이 의식을 먼저 행함으로 절반의 기간이 단축된다. 여자는 그 의식이 없기 때문에 두 배의 기간이 요구된다. 또한 하와가 먼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의식적 의미도 있다.

  이 정결법이 선포하는 핵심 진리는 무엇인가? 인간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이미 부정하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이미 악한 영이 침투하여 들어간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존재로 세상에 나온다. 다윗은 이 진리를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왜 이렇게 고백하였는가? 다윗의 어머니는 특별한 상황에 있었다. 다윗의 형들과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에, 다윗의 어머니는 이세의 정식 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장군들의 유전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수루야와 아비가일이라는 두 딸을 낳았는데, 수루야에게서 요압·아비새·아사엘이 나왔고, 아비가일에게서 아마사가 나왔다. 모두 유명한 장수들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다윗이 태어났기 때문에,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죄 중에 태어나는 존재임을 다윗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내 어머니, 나의 탄생 자체가 이미 부정함을 담고 있었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이 얼마나 솔직하고 깊은 것인지 놀랍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어머니 탓으로 돌린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미 죄 중에 잉태된다는 진리를 고백한 것이다. 이 진리를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질 수 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7장에서 같은 진리를 가르치셨다.

막 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속에 있는 것들—악한 생각, 음란, 살인, 간음, 탐욕, 속임, 교만—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이것들은 단순한 감정이나 기질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며 악한 영들의 역사이다. 뱀이요, 귀신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부정한 존재이다. 해산한 여인의 정결법은 이 진리를 의식화한 것이다.

  이 정결 예식은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반드시 행해야 했다. 번제를 위해 1년 된 어린 양을 드릴 형편이 안 되는 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레 12:8).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마리아가 비둘기로 정결 예식을 드렸다는 사실이 이것을 확증한다.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 드리려 함이더라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양을 드릴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가난했다. 그러나 그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다. 정결 예식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결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산한 여인의 정결법이 오늘 성도에게 전하는 진리이다. 우리 모두가 죄 중에 잉태되었다. 그 부정함은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서만 씻겨 나간다.

  이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이전에 지었던 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들어온 악한 영들,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온 저주들—이 모든 것들이 정결 예식을 통해 씻겨 나가야 한다.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그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속죄는 덮어 주는 것이요, 정결은 씻어 내는 것이다. 해산한 여인이 반드시 정결 예식을 행해야 했듯이, 우리도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날마다 정결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믿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하는 신학적 근거이다.

 

5. 레위기 13장의 나병은 왜 악성 피부병을 포괄하는 표현인가?

  레위기 13장은 나병 진단법을 상세히 기술한다. 그런데 이 나병은 오늘날 우리가 한센병이라 부르는 특정 질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레위기 13장의 나병은 악성 피부병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장을 바르게 읽는 첫 번째 열쇠이다.

  한센병, 곧 진짜 나병은 1871년 노르웨이의 의학자 한센이라는 사람이 나병 세균인 작은 박테리아를 발견하면서 알려진 질병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한센씨 병이라 불린다. 이 질병은 기본적으로 낫지 않는다. 성경에 나병에서 나은 경우로는 모세, 미리암, 나아만 장군 세 사람이 이름이 밝혀져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치유하신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특별한 경우이다. 원칙적으로 진짜 한센병은 낫지 않는 질병이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것은 민수기 12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이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을 두고 미리암이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다음이었다.

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미리암은 단순히 구수 여인을 비방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빌미로 삼아 "모세만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아니라, 나도 지도자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어겼다. 그 결과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처럼 희어졌다. 이처럼 나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는 질병이다.

  그러나 레위기 13장에 등장하는 나병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레위기 13장을 살펴보면 나병의 종류가 일곱 가지나 된다. 첫 번째는 피부에 생긴 피부병이다(레 13:2).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생기거나 색점이 생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생살이 올라오는 것이다(레 13:10). 환부에 생살 곧 붉은 살이 볼록하게 올라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종기가 생긴 것이다(레 13:18). 종기가 나서 그 자리에 이상이 생기면 나병으로 진찰한다. 네 번째는 불에 덴 화상이다(레 13:24). 불에 데어 진물이 생긴 것도 나병에 포함한다. 다섯 번째는 머리털이나 수염에 누르스름한 털이 생기는 모발 나병이다(레 13:29). 여섯 번째는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하게 노랗게 보이는 어루러기이다(레 13:38). 일곱 번째는 머리털이 빠진 대머리이다(레 13:40). 심지어 대머리도 나병으로 분류한다.

  이처럼 레위기 13장의 나병은 피부에 이상이 생긴 모든 악성 피부병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뾰루지, 종기, 화상 흔적, 어루러기, 대머리까지—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나병이라 할 수 없는 것들도 다 포함한다. 이 넓은 의미의 나병은 죄의 광범위한 속성을 보여 준다. 죄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뾰루지 같은 작은 죄도, 온몸을 썩게 하는 큰 죄도 모두 나병이다.

  나병 진단의 절차도 중요하다. 먼저 나병 의심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려간다.

레 13: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생기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의 색점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죄인인지 아닌지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다. 이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제사장은 섣불리 결정하지 않는다. 의심스러우면 일주일 동안 격리하여 지켜본다. 그래도 여전히 나병의 증상이 나타나면 그때 부정하다고 선포한다. 이처럼 죄에 대한 판단은 신중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이루어진다.

  사람에게만 나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복 나병도 있다(레 13:47-48). 털옷이나 베옷, 가죽 옷에 색점이 발생하면 나병처럼 진찰한다. 이는 죄가 우리의 육체에만 머물지 않고 외부 환경까지 더럽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신 들린 사람을 보라. 몸도 더럽고 옷도 더럽다. 내부가 더럽혀지면 외부도 더럽혀지는 것이 죄의 본성이다. 반대로 귀신이 나가면 그 사람은 정숙해지고 옷도 빨아 입게 된다.

  이 모든 나병의 종류가 죄의 다양한 모습을 상징한다. 뾰루지 같은 작은 죄부터 종기 같은 고름이 가득 찬 죄, 화상처럼 고통스러운 죄, 어루러기처럼 색이 변질된 죄, 대머리처럼 드러나는 죄까지—죄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제사장에게, 곧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져가 진찰받아야 한다. 스스로 "나는 괜찮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제사장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 앞에 내 죄를 드러낼 때, 비로소 정결의 과정이 시작된다.

 

6. 나병의 세 속성—잠복·전염·감각 마비—은 죄의 어떤 본질을 드러내는가?

  레위기가 수많은 질병 중에서 유독 나병에 대해 방대한 분량을 할애한 이유가 있다. 나병이 죄의 속성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나병의 세 가지 특성—잠복, 전염, 감각 마비—은 죄의 본질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첫 번째 속성은 잠복기가 매우 길다는 것이다. 나병균이 몸 안에 들어와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짧게는 2년에서 3년, 길게는 20년까지 아무런 증상 없이 균을 보유한 채 살아갈 수 있다. 균이 들어와 있는데도 전혀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증상이 폭발한다. 이것이 죄의 첫 번째 속성이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도 당장은 아무 증상이 없다. 무당에게 신기가 있는 사람처럼, 20년 동안 잠복해 있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발동한다. 처음에는 무당집 냄새가 좋아지고, 무당 옷이 입고 싶어지고, 징 소리가 들리면 몸이 움직이고 싶어진다. 죄의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죄는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중 죄 없다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 속에는 저마다 잠복된 죄성이 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백하는 회개를 꾸준히 행하는 것이 영적 건강의 비결이다. 죄가 드러나기 전에 미리 씻는 것이 지혜이다. 마치 건강할 때 운동하고 음식을 조절하듯이, 죄가 폭발하기 전에 날마다 자백하는 회개로 죄의 잠복을 없애는 것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속성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병은 감염된 사람 옆에 있으면 전염된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죄짓는 사람 옆에 지속적으로 있으면 그 죄에 전염된다. 음란한 사람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 음란해진다. 수다를 떠는 사람과 항상 함께 있으면 입술이 수다로 가득 차게 된다. 공산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람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레위기 11장이 가르치는 접촉법의 핵심이다. 더러운 것과 접촉하면 더러워진다. 검은 것과 같이 가면 검어지고, 빨간 것과 같이 있으면 빨개진다. 그래서 누구와 교제하며 살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회개 기도를 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성장하고, 회개를 가로막는 사람과 함께하면 영적으로 쇠락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소중하다. 그 소중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교제의 대상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레위기 11장의 접촉법이 오늘 성도에게 주는 교훈이다.

  나병 환자가 해야 할 행동을 레위기 13장은 이렇게 규정한다.

레 13:45-46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이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는 것은 슬픔과 애통의 표현이다. 부정하다고 두 번 외치며 진영 밖으로 나가 혼자 살아야 한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격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덮어 주고 일주일 지켜보지만, 계속 더러운 채로 살면 완전히 격리된다. 이것이 지옥의 예표이다. 죄를 짓고 회개치 아니하면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 그것이 지옥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엄중하게 다루신다. 그러나 동시에 정결 의식을 마련해 주시며, 돌아올 길도 열어 주셨다.

  세 번째 속성은 감각이 마비된다는 것이다. 나병이 진행되면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썩어 가고, 코와 입이 무너진다. 산 송장의 냄새가 날 정도로 몸이 썩어 간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프지 않다.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죄의 세 번째 속성이다. 죄를 짓고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이미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뒤 열 달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다. 그 고통이 다윗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시편 32편을 보면 다윗이 고백을 하지 않는 동안 뼈가 녹는 것 같았다고 했다. 반대로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은 자,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자는 감각이 마비된 것이다. 귀신이 들어와 감각을 마비시킨 것이다.

  이 세 가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죄는 잠복하고, 전염되며,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러므로 자백하는 회개만이 죄의 잠복을 드러내고, 그 감각을 회복시키며, 전염을 끊는 유일한 길이다.

  레위기가 무수한 질병 중에서 왜 나병을 선택하여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나병은 죄의 속성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 주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병이라는 질병을 통해, 죄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눈에 보이도록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그 나병에서 어떻게 정결케 되는가를 14장에서 가르쳐 주심으로, 죄에서 어떻게 깨끗해지는가를 보여 주신다. 나병은 죄의 상징이요, 정결 의식은 회개의 예표이다.

  특히 나병 진단 과정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나병이 의심될 때 제사장은 즉시 선고하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격리하며 지켜본다. 그래도 증상이 지속되면 그때 부정하다고 선포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신다. 충분히 살펴보신 후에 심판하신다. 그러나 일단 부정하다고 선고되면, 그 결과는 명확하다.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한다. 죄를 방치하면 반드시 격리가 따른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방치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영적 격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 즉시 자백하는 회개로 나아가는 것이 영적 건강의 비결이다.

 

7. 나병에서 나은 자의 두 가지 정결 의식—두 새와 네 가지 제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위기 14장은 나병에서 나은 자가 어떤 정결 의식을 행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규정한다. 나병에서 나았다고 해서 곧바로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제사장이 다시 진찰하여 나았음을 확인한 뒤, 두 단계의 정결 의식을 행해야 한다. 첫 번째는 정결 의식이요, 두 번째는 제사 의식이다.

  먼저 첫 번째 정결 의식을 살펴보자. 제사장은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한다(레 14:4). 그리고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는다. 새의 피가 흐르는 물에 섞여 붉은 물이 된다. 다른 한 마리의 살아 있는 새는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그 피에 찍어서 나병에서 정결케 될 자에게 일곱 번 뿌린다.

레 14:5-7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중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서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일곱 번 피를 뿌린 뒤,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날려 보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잡힌 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날려 보낸 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죽음과 부활, 이것이 정결의 근거이다. 백향목은 높음과 의로움을 상징하고, 홍색 실은 속죄의 피를 상징하며,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 도구를 상징한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시 51:7)라고 기도한 것이 바로 이 정결 의식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다음, 정결함을 받는 자는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씻어야 한다(레 14:8). 7일이 지난 후 다시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물로 씻어야 비로소 진영 안에 들어올 수 있다. 물로 씻는 정결이 반복되어 강조된다. 이 물로 씻는 과정이 바로 자백하는 회개이다.

  두 번째는 제사 의식이다. 8일째 되는 날, 흠 없는 순양 두 마리와 1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고운 가루 소재물과 기름 한 록을 가져온다.

레 14:10 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이것으로 네 가지 제사를 드린다.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이다. 속건제의 어린 양의 피를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른다. 그리고 기름도 같은 방식으로 바른다. 귓불은 말씀을 듣는 기관이요, 엄지손가락은 일하는 손이며, 엄지발가락은 걸어가는 발이다. 죄로 오염된 모든 삶의 영역—듣는 것, 행하는 것, 걸어가는 것—을 피와 기름으로 정결케 한다는 의미이다. 삶의 전 영역이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의식은 보여 준다. 귓불에 피와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앞으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가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에 바른다는 것은 앞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가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지발가락에 바른다는 것은 앞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갈 것인가가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라도 이 의식을 면제받지 못한다. 순양을 드릴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레 14:21-22). 정결 예식은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요구된다. 어떤 형편에 있든 정결 예식은 반드시 행해야 한다.

  이처럼 나병에서 나은 자의 두 가지 정결 의식—두 새와 네 가지 제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위에서 물과 피와 기름으로 정결케 되는 진리를 예표한다. 죄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냥 진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진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 곧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을 상징한다. 정결케 되지 못한 자는 천국 백성의 온전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 또한 이 정결 의식이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는 사실도 의미 있다. 첫날 물로 씻고 진영 밖에서 이틀을 더 지낸 뒤, 일곱째 날에 다시 씻고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 이후에야 8일째에 제사를 드린다. 정결의 과정은 즉각적이지 않다. 인내와 지속적인 씻음이 필요하다. 자백하는 회개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의 회개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자백하는 회개를 행해야 한다. 그 과정이 쌓일 때 마침내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지는 날이 온다.

 

8. 나아만의 요단강 일곱 번 목욕은 오늘 성도의 자백하는 회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병 치유의 가장 생생한 실례가 열왕기하 5장에 기록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레위기 14장의 정결 의식이 실제로 적용된 사건이며, 동시에 오늘 성도가 어떻게 정결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모형이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다. 전쟁에서 뛰어난 용맹을 발휘하여 왕의 총애를 받던 자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나아만은 아마도 뚜껑이나 모자로 항상 나병 부위를 가리고 살았을 것이다. 왕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 수 있다. 그 나아만이 어느 날 이스라엘 선지자를 찾아가게 된다. 그의 아내의 종으로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소녀가 있었는데, 그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

왕하 5:3 그 아이가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이 작은 소녀의 말 한 마디가 나아만의 운명을 바꾸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친서를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다. 이스라엘 왕은 그 친서를 받고 옷을 찢으며 "내가 하나님이냐 죽이고 살리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느냐"고 탄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그를 내게로 보내소서"라고 했고, 나아만은 병거와 말과 많은 예물을 이끌고 엘리사의 집 문에 이르렀다.

  그런데 엘리사는 직접 나와서 만나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 5:10). 나아만은 크게 노했다.

왕하 5:11-12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노한 마음으로 떠나려 하니

  나아만이 기대한 것은 선지자가 직접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얹어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사람 하나 달랑 보내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했다. 나아만의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요단강은 흙탕물이 흐르는 강이다. 다메섹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이 더 깨끗한데 왜 굳이 저 흙탕물 흐르는 요단강에서 씻어야 하는가? 나아만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나아만의 종들이 그를 설득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 5:13). 어렵게 여기에 왔는데, 시키는 것이 어렵지도 않은데 왜 안 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아랫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지도자이다. 이 말이 나아만의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몸을 잠갔다.

왕하 5:14 이에 그가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섯 번까지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일곱 번째 올라오는 순간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졌다. 이것이 중요하다. 자백하는 회개도 한 번이나 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일곱 번, 수십 번, 수백 번 거듭 자백하며 씻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자백해야 한다. 흙탕물로 보이는 요단강의 물은 사실 산 새의 피가 섞인 핏물을 상징한다. 흐르는 물에서 새를 잡아 그 피가 섞인 물이 요단강이다. 그 물에 일곱 번 잠기는 것이 바로 레위기 14장의 정결 의식이다.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예수의 피가 섞인 물로 씻는 것이다.

  예수님도 나아만의 사건을 직접 언급하셨다.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는 나병환자들은 낫지 못했다. 이방인인 나아만만 정결케 되었다. 무엇이 달랐는가? 자신을 낮추고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정결 의식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여 정결 의식을 행한 나아만은 천국에 들어간 자이다. 예수님이 이것을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성도에게 주는 교훈이다. 자백하는 회개를 통한 정결 의식은 어렵지 않다.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듯이, 우리에게 자백하는 회개를 하라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왜 하지 않는가?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나아만처럼 자존심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는 것처럼, 예수의 피로 덮어진 그 은혜 위에서 자백하는 회개를 행하는 것이다. 그 회개가 천국 행위책에서 죄를 씻어 낼 때, 귀신은 합법적으로 나가야 하고, 병은 낫게 되며, 저주는 떠난다. 예수 믿어서 속죄만 받았다고 만족하지 말고, 나아만처럼 요단강으로 내려가 자백하는 회개를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나아만은 이방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결 의식을 행하여 천국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반면 이스라엘 안에 있는 나병환자들은 그 정결 의식을 행하지 않아 낫지 못했다.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아만처럼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자백하는 회개가 그 요단강이다. 그 강에 일곱 번 잠기는 것이 지속적인 자백하는 회개이다. 번거롭고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아도, 나아만이 장군의 체면을 내려놓고 요단강에 몸을 잠갔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자백하는 회개로 요단강에 내려갈 때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지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지금까지 속죄와 정결의 차이, 물·피·기름으로 정결케 되는 원리, 해산한 여인의 정결법이 가르치는 인간의 본질적 부정함, 레위기 13장의 나병이 악성 피부병을 포괄하는 표현, 나병의 세 가지 속성이 죄의 본질을 드러냄, 나병에서 나은 자의 두 가지 정결 의식의 의미, 그리고 나아만의 요단강 일곱 번 목욕이 오늘 성도의 자백하는 회개와 연결됨을 살펴보았다.

  속죄는 칭의이고 정결은 곧 성화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죄를 받은 것은 구원의 시작이다. 고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해결된다는 생각은 레위기의 가르침과 다르다. 레위기는 속죄 이후에 반드시 정결의 과정이 따라야 함을 가르친다. 그 위에서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날마다 정결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죄는 나병처럼 잠복하며, 전염되고, 감각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죄를 지었을 때 즉시 자백하는 회개로 돌아와야 한다. 자백하는 회개를 늦추는 것은 나병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천국 행위책에서 죄의 기록이 지워질 때, 합법적으로 들어온 귀신은 합법적으로 나가야 한다. 귀신도 법 앞에 굴복해야 한다.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을 때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진 것처럼, 오늘 성도도 예수의 피와 물과 성령으로 날마다 정결케 되어야 한다. 속죄만으로는 병이 낫지 않고 저주가 떠나가지 않으며, 귀신이 나가지 않는다. 레위기 11장부터 27장까지, 분량 면에서 제사법의 두 배가 넘는 이 정결법의 가르침이 그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준다. 주님이 이 땅에 물과 피를 남겨 두고 기름 곧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려는 뜻이다. 해산한 여인이 반드시 정결 예식을 행해야 했듯, 우리도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정결케 되어야 한다. 나병에서 나은 자가 두 마리의 새로 정결케하는 의식과 4가지 제사를 드렸듯,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지하며 물과 피와 기름으로 정결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어 속죄를 받은 것은 이 정결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출발점이다. 속죄 없이 정결 예식을 행할 수 없다. 먼저 예수의 피로 덮어진 자만이 그 피를 근거로 자백하며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속죄에서 멈추어서도 안 된다. 속죄로 시작하여 정결로 나아가고, 정결을 통해 성결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보여 주신 신앙의 여정이다. 날마다 자백하는 회개로 물로 씻고, 예수의 피를 의지하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충만해질 때, 나아만처럼 어린아이의 살처럼 새롭게 회복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레위기 정결법은 오늘 이 시대에도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 앞에 순종하여 자백하는 회개로 날마다 정결케 되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10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레위기의 핵심 체계를 속죄와 정결이라는 두 축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며, 특히 회개를 통한 실질적인 깨끗해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단순히 죄를 덮어주는 '칭의'의 단계를 넘어, 삶 속의 악한 영과 저주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물과 피와 성령의 상징이 담긴 정결 예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나병을 단순한 질병이 아닌 죄의 속성 즉 긴 잠복기, 강한 전염성, 감각의 마비를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하며, 나만 장군의 치유 과정을 통해 순종과 자백이 어떻게 온전한 회복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이 설교의 목적은 신앙인이 관념적인 용서에 머물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정결례를 행하는 회개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을 회복하도록 독려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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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 [마태복음강해(61)]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과 베드로의 부인과 가룟 유다의 최후(01)(마26:57~27:10)_2026-02-04(수) file 갈렙 2026.02.05 123
648 [마태복음강해(60)] 베드로의 부인예고와 겟세마네 동산의 간절한 기도와 붙들리심(마26:31~56)_2026-01-28(수) file 갈렙 2026.01.28 152
647 [마태복음강해(59)] 마지막 만찬과 겟세마네 기도에 나타난 예수님의 순종(마26:26~46)_2026-01-21(수) file 갈렙 2026.01.21 166
646 [마태복음강해(58)] 향유부은 여인과 마지막 만찬(02)(마26:1~30)_2026-01-14(수) file 갈렙 2026.01.15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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