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9(수) 수요예배
제목:[레위기강해(17)] 성결법(04) 절기들을 통한 단체적인 성결례(01)(레23:1~4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5hgyeBkOMeQ
레위기강해(17)
성결법(04)
절기들을 통한 단체적인 성결례(01)
(레 23:1-44)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레위기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깨끗함을 얻은 백성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가르치는 책이다. 레위기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법'을 다룬다. 소제처럼 피 흘림이 없는 제사도 있지만, 중심은 제물의 희생과 피를 통한 속죄다. 죄인은 자기 힘으로 죗값을 없앨 수 없기에 흠 없는 제물이 대신 죽고 피를 흘려야 했다. 이 제사는 장차 세상 죄를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라보게 한다.
레위기 11장부터 17장까지는 '정결법'을 다룬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옷을 물로 씻고 정해진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해산한 여인과 나병에서 깨끗해진 사람에게도 씻음이 요구되었다(레 12:6-8, 14:8-9). 그러므로 정결의 핵심에는 피와 물이 함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찔리실 때 피와 물이 나온 사건은 신약의 성도에게 속죄와 씻음이 모두 필요함을 보여 준다(요 19:34).
레위기 18장부터 27장까지는 '성결법'을 다룬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 아래,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레 19:2). 속죄와 정결이 죄와 부정을 처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얻게 한다면, 성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실을 바꾸어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신약에서는 거룩하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심으로 이 길을 걷게 하신다(요 14:26, 16:8, 16:13).
이 거룩함은 천국에서 내가 받을 신분과 그리고 내가 받을 상급과 연결된다.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해지는 일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관계되는 것이지만,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말씀대로 살았는지는 천국에서의 나의 위치와 상급에 관계되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정결과 성결의 필요성을 치워 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정결화 성결을 위해 회개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면 성품과 행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며, 죄를 통하여 들어온 악한 영의 영향과 삶의 저주에서도 온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이번에 다루게 될 레위기 23장은 이 성결을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으로 넓혀준다. 한 사람이 홀로 지킬 수 없는 절기를 온 회중이 함께 지키며 거룩함을 입는 단체적인 성결례가 바로 이러한 절기이기 때문이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 해마다 돌아오는 일곱 절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함께 모여,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한 민족과 공동체를 거룩하게 만들어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거룩한 소집을 통하여 백성을 반복해서 자기 임재 앞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위기 23장의 절기의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부분 성취되었으므로 신약의 성도가 구약의 달력과 제사를 문자적으로 되풀이해서 실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절기에 담긴 영적 원리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말씀을 받고 자신을 바로잡을 때 공동체는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레위기의 속죄·정결·성결의 차이, 개인적 성결과 공동체적 성결의 관계, 모에드와 성회의 뜻, 안식일의 창조와 구속의 의미, 절기 안식일과 예수님의 죽음·부활 시간표, 그리고 신약 성도가 절기의 영적 원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레위기의 속죄·정결·성결은 어떻게 구별되며 연결되는가?
'속죄'는 죄의 값을 처리하는 일이다. 레위기의 제사에서 흠 없는 제물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렸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하나님은 피를 제단에 뿌려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셨다(레 17:11). 특히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은 죄의 삯이 사망이며 죄 사함에는 생명의 대가가 필요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모든 제사는 흠도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일을 예표한다.
'정결'은 부정하게 된 사람을 씻어 공동체와 성소에 다시 나아오게 하는 일이다. 음식과 출산과 피부병과 유출과 시체 접촉에 관한 규례에서 물로 씻는 행동이 반복된다(레 11:24-25, 12:2-8, 14:8-9, 15:5-13). 피가 죄의 값을 담당한다면 물은 오염을 씻어내는 대포적인 표지다. 물론 물 자체가 마음의 죄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과 성령 안에서 죄와 부정이 씻기는 신약의 실체를 바라보게 한다.
'성결'은 속죄와 정결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단계다. 레위기 18장 이후에는 “하지 말라”와 “지키라”는 명령이 집중된다. 거룩함은 머리로 아는 교리가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구별이다. 십계명을 지키고,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며, 성적인 죄와 우상숭배와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레 18:3-5, 19:3-18, 20:7-8). 행실이 바뀌지 않으면 거룩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 단계는 서로 대체할 수 없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고백이 물과 말씀의 씻음이나 거룩한 행실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선한 행동만으로 그리스도의 피 없이 속죄받을 수도 없다. 먼저 죗값이 처리되고, 더러움이 씻기며, 그 뒤에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삶이 구별되어야 한다. 속죄와 정결과 성결을 함께 붙들 때 레위기의 구원 교육이 온전하게 보인다.
그럼 신약시대에 성결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그러한 한 마디로 성결을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이끌며, 죄를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는 사람의 순종을 없애지 않는다. 책망을 받을 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말씀대로 행실을 고쳐야 한다. 거룩한 영을 모시고도 그 음성을 거슬러 계속 옛 습관을 따른다면 거룩의 열매가 나타날 수 없다.
회개의 과정에서는 영적 싸움도 일어난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던 악한 영들이 진실한 회개가 시작되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더 강하게 저항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회개를 시작했더니 오히려 힘들어졌다고 포기하면 정결과 성결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 죄를 합리화하지 말고 끝까지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죄의 지배와 악한 영의 영향에서 벗어나 성품과 생활이 실제로 달라진다.
그러므로 성결법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필요 없는 부록이 아니다. 속죄는 출발이고, 정결은 씻음이며, 성결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가까이 쓰임받는 자가 되려면 죄 사함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행실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회개와 순종을 통하여 거룩의 분량을 이루어 가야 한다.
3. 개인적 성결과 공동체적 성결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께서 성결례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레위기에서 성결례는 18장에서 시작하여 27장으로 끝난다. 그중에서 18장부터 20장까지의 말씀은 일반 백성이 지켜야 할 '개인적인 도덕적 성결'을 가르친다. 그 핵심은 이렇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던 방식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했다.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우상을 만들지 않고, 도둑질과 거짓말과 압제를 버리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했다(레 19:3-4, 11-18). 특히 친족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규례를 상세히 주어 성적 성결을 지키게 하셨다(레 18:6-23).
그리고 이어서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의 성결례를 다룬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는 더 엄격한 성결을 요구하셨다. 제사장은 시체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고, 결혼에서도 배우자에게 있어서 어떤 제한을 받어야했다. 대제사장은 자기 부모의 시체로도 몸을 더럽히지 말고, 오직 처녀를 아내로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레 21:1-15). 몸에 흠이 있는 제사장은 제사장의 음식은 먹을 수 있었지만 제단에 가까이 나아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레 21:16-23). 이는 사람의 가치가 낮다는 뜻이 아니라 제사장 직무가 지닌 상징성과 실제 수행 능력을 구별한 규례다.
이는 사실 제사장의 혼인과 시체 접촉 규례에서 사역자를 악한 영의 침입에서 보호하려는 영적 의미도 있는 것이다. 특히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상대에게 있던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많은 영혼을 섬겨야 할 제사장은 처음부터 자신을 더욱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도 흠이 없어야 했다.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가 더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되었다(레 22:17-25). 제사장만 거룩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도 하나님께 올리는 예물과 태도를 거룩하게 해야 했다. 하나님께 남은 것이나 쓸 수 없는 것을 내어놓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멸시하는 행동이다.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행위가 거룩함의 일부다.
그런데 이제 레위기 23장부터는 개인이 혼자 수행할 수 없는 공동체적 성결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23장의 절기, 25장의 안식년과 희년은 온 백성과 나라가 함께 지켜야 한다. 24장에는 등잔과 진설병과 신성모독에 관한 보충 규례가 배치되어 있다. 절기와 안식년과 희년은 한 사람만 쉬거나 한 사람만 빚을 탕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단체적인 성결의 절정은 희년에 나타난다. 희년에는 각 사람이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고, 종이 자유를 얻으며,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레 25:8-17, 39-55).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주의 은혜의 해가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눅 4:16-21). 필자는 이 말씀을 예수께서 희년의 선포자이자 집행자로 오셨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자기 백성을 풀어 주신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 성결과 공동체적 성결은 결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십계명을 어기면서 예배 모임에 참석한다고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바르게 산다고 공동체 예배를 가볍게 여겨도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시며 동시에 백성을 한자리에 모아 공동체 전체를 거룩하게 하신다. 개인의 순종이 모여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의 예배는 다시 개인을 깨우고 바로 세운다.
4. ‘모에드’는 무엇이며 안식일과 일곱 절기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레위기 23장에서 ‘절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모에드’(מוֹעֵד)다. 이 말은 '정해진 때', '약속된 시기', '회합의 시간'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절기(명절)'나 '계절'이나 '기한(시기, 때)'로 번역된다. 이는 하나님이 임의로 바뀌는 인간의 일정에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때를 정하시고 그때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절기는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도록 지정된 시간이다.
모에드는 창세기 1장 14절에서 광명체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한다는 말씀의 ‘계절’에 처음 사용되었다. 계절이 정해진 순서대로 되돌아오듯 절기도 반복하여 돌아온다. 아브라함에게 정한 때에 다시 와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에도 약속된 시기의 개념이 나타난다(창 18:10, 14). 회막을 가리키는 ‘오헬(텐트) 모에드’는 하나님과 만나는 지정된 만남의 장막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레위기 23장은 어떤 모에드를 말하는 것일까? 우선 레위기 23장에서는 연중 일곱 절기에 앞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부터 말한다. 매주간의 절기를 맨 처음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며 성회로 모이는 안식일이 절기 체계의 기초다(레 23:3).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절기는 매주의 안식일 하나와 연중 일곱 절기를 합하여 모두 여덟 가지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매주 백성을 부르시고, 해마다 구원 역사의 특별한 장면들을 반복하여 기억하게 하셨다.
그리고 연중 절기가 있다. 연중 절기는 봄의 네 절기와 가을의 세 절기로 나뉜다. 봄에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곧 오순절이 있다(레 23:5-22). 가을에는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 있다(레 23:23-43). 봄의 네 절기는 씨를 뿌리고 첫 열매를 거두는 계절에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을 예표한다. 가을의 세 절기는 추수를 마치는 계절에 있으며, 마지막 때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과 정결과 혼인잔치 곧 회개와 심판과 거두어 들임을 바라보게 한다.
필자는 성경에서 일곱이 자주 넷과 셋으로 구성되는 법칙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 가운데 먼저 네 말 탄 자가 나오고, 뒤의 세 인에서 순교자의 호소와 천체의 큰 변동과 일곱 나팔로의 전환이 이어진다(계 6:1-17, 8:1-2). 일곱 나팔도 앞의 네 나팔은 땅과 바다와 강과 천체를 치고, 뒤의 세 나팔은 화화화로 선언되며 사람에게 더 직접적인 심판을 가져온다(계 8:7-13, 9:1-21, 11:15-19). 봄 네 절기와 가을 세 절기도 이 넷과 셋의 구조를 따른다.
그러나 이 구조를 아는 목적은 숫자 자체를 신비화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구원 경륜을 질서 있게 계획하셨고, 구약의 절기와 신약의 성취가 서로 연결됨을 보는 데 있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초실절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신 부활을, 오순절은 성령 강림을 바라본다(고전 5:7, 15:20, 행 2:1-4). 이미 이루어진 절기를 다시 되풀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모에드라고 하신 것인가? 즉 절기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지키라고 하신 것인가? 그것은 반복적인 기억과 순종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예배드렸다고 이번 주의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생각과 행실이 흐려지기 쉬우므로 정한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의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가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는 울타리가 된다.
5. ‘성회’는 왜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는 소집인가?
레위기 23장을 보면, '성회'라는 말이 무려 11번 나온다. ‘성회’는 히브리어로 ‘미크라 코데쉬’(מִקְרָא־קֹדֶשׁ)라는 말인데, 이는 '거룩한 소집' 또는 '거룩하게 부름받은 모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흩어진 생활에서 불러내어 자기 앞에 모으시는 것이다. 레위기 23장에는 성회라는 표현이 열한 번 나오는데, 실제로 노동을 멈추고 모이는 절기의 날들은 주간 안식일과 무교절의 첫날과 일곱째 날,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의 첫날과 여덟째 날 등으로 배열된다.
레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레 23:3[안식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 23:4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레 23:7[무교절의 첫 날]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레 23:8[무교절의 마지막 날]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레 23:21[오순절]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 23:24[나팔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레 23:27[속죄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 23:35[초실절의 첫 날]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레 23:36[초설절의 마지막 날]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레 23: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드릴지니
레위기 23장 3절의 ‘쉴 안식일’은 히브리어로 ‘샤바트 샤바톤’(שַׁבַּת שַׁבָּתוֹן)이라고 하여 온전한 쉼을 강조한다. 공동체가 함께 모일 때 개인 예배와 다른 거룩의 힘이 나타난다. 혼자 신앙생활하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보기 어렵다. 다른 성도가 회개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말씀을 함께 들으며 생각과 삶을 바로잡게 된다. 한 사람의 간구와 찬양이 다른 사람을 깨우며,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일 때 거룩함이 공동체 안에 집약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 받는 것이 함께 있는 자리다. 우리는 기도와 찬송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축복과 성찬의 은혜를 주신다. 이 주고받음은 거래가 아니라 언약적 교제다.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창조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을 드리고, 다시 말씀과 은혜를 받아 다음 한 주를 거룩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예물을 드리는 일도 결코 성결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인정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색함과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훈련이 된다. 찬송과 기도와 예물과 말씀과 축복과 성찬이 조화를 이룰 때 예배 전체가 성도를 하나님께 맞추는 거룩한 통로가 된다.
정한 때의 예배를 가볍게 여기면 거룩함도 약해진다. 한 달 동안 세상 속에서만 살며 말씀과 기도와 회개의 자리를 떠나 있으면 생각과 욕망이 세상의 방식으로 굳어진다. 매일 새벽을 하나님께 드리고, 적어도 매주 공동체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반복하여 부르시는 것은 그분께서 모임의 숫자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반복적으로 말씀 앞에서 씻기고 바로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내용도 중요하다. 세상 이야기로만 채우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 경륜을 배우기 어렵다. 창조주께서 무엇을 지으셨고, 구속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으며, 앞으로 어떤 나라로 이끄시는지를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그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이 성회의 목적이다.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영원히 행할 중요한 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계 4:8-11, 7:9-12). 이 땅의 공동체 예배는 하늘의 거룩한 모임을 미리 배우고 참여하는 시간이다. 예배를 귀히 여기고 정한 때에 기쁨으로 모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더욱 깊이 경험한다. 그러므로 주일 성수는 단순한 출석 규정이 아니라 공동체가 거룩함을 유지하는 평생의 중요한 행위다.
6. 안식일은 왜 창조와 구속을 함께 기념하는 날인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제시한다. 먼저 출애굽기 20장은 출애굽 1세대들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 하지만, 이어 신명기 5장은 출애굽 2세대들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억하게 한다. 하나는 육적인 삶과 만물을 주신 창조의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종의 속박에서 해방하신 구속의 은혜다. 고로 우리의 예배에는 이 두 감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으니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피곤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안식일에 쉬셨다고 하는 말씀은 그분이 피곤하여 쉬어서 힘을 회복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간의 육체처럼 산소와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하다 즉 쉬다는 말의 근원적인 뜻부터 살펴야 한다.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שַׁבָּת)는 일을 '그치다' 혹은 '그만두다(멈추다)'는 뜻의 동사 ‘샤바트’(שָׁבַת)에서 시작된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 하나 더 추가되어 '안식하다', '쉬다'라는 뜻도 생겨났다. 고로 창세기 2장 2절은 하나님이 피곤해서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이 아니라 창조사역을 끝마치시고 하시던 일을 그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출애굽기 20장 11절의 ‘쉬셨다’는 말에는 역시 '샤바트'와 동일한 뜻을 가진 ‘누아흐’(נוּחַ) 계열의 동사가 사용된다. 두 표현 모두 문맥상 피로 회복을 위해 쉬셨다는 뜻보다 창조를 완성하고 일을 그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마지막으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뒤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하셨다(창 1:26-31). 해와 달과 별과 땅과 바다와 생물을 사람이 누리도록 마련하신 뒤에 만족하신 것이다. 그리고 창조 사역을 끝내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며 창조주를 찬양하고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이 창조한 별들의 수를 세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고 계신다. 이러한 위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상심한 자를 고쳐주시고 상처를 싸매어주신다(시 147:2-5).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안식일에 구속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끌어 내셨다. 신약의 성도도 죄와 마귀의 종노릇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누리도록 주신 은혜뿐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은혜도 함께 찬송해야 한다. 이처럼 창조주와 구속주는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사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창조의 하나님 곧 여호와를 특히 강조하고 신약시대에는 구원의 하나님 곧 예수님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호와와 예수님은 두 분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한 분 하나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신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 대신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을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는 우리 민족이 오천 년 이상 해와 달과 별과 나무와 돌, 그리고 무당과 점쟁이, 그리고 천 년 이상 석가모니를 그리고 오백 년 이상 공자와 조상을 숭배해 온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인간이나 자연만물인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 죄인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할 때에는 바로 창조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누리되 자연에 그것에 절하지 않고, 조상이나 부모는 공경하되 조상을 하나님이나 구원자로 섬기지 않아야 한다.
고로 안식일의 쉼은 단순히 노동을 하지 않는 소극적 휴식이 아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며, 창조와 구속을 찬양하는 적극적인 거룩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날에 자신의 몸을 쉬게 함으로 창조의 선물을 누리고, 말씀과 예배 안에서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얻은 영적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 두 의미를 붙들 때 오느날 주일 예배는 의무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감사와 감격의 날이 될 것이다.
7. 주간 안식일과 절기 안식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밝히는가?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 저녁까지 계산되었다. 창세기 1장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날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주간 안식일은 금요일 해 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 질 무렵까지였다. 그러나 레위기 23장에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뿐 아니라 절기에 노동을 멈추는 날도 있다. 이 절기 안식일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시간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무교절은 일주일 동안 지켰으며 첫날과 일곱째 날에 성회로 모여 아무 노동도 하지 않았다(레 23:6-8). 초막절도 첫날에 성회로 모이고, 칠 일 뒤 여덟째 날에 다시 거룩한 대회로 모였다(레 23:34-36, 39). 유월절 당일의 규정에는 노동 금지가 직접 적혀 있지 않지만, 다음 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분명히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교절 첫날은 절기의 안식일이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시며 인자가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헬라어 표현은 직역하면 ‘땅의 마음 안에’이며 문맥상 땅속을 가리킨다. 필자는 이 말씀을 세 번의 낮과 세 번의 밤, 곧 일흔두 시간의 온전한 사흘로 이해한다. 전통적인 성금요일 오후의 죽음과 일요일 새벽의 부활로는 낮 한 번과 밤 두 번 정도만 계산되므로 이 표적과 맞지 않는다고 본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운명하신 날이 준비일이었고, 뒤이어 오는 안식일이 큰 날이었다고 기록한다(요 19:30-31). 필자는 이 ‘큰 날’을 주간 안식일이 아니라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 첫날의 절기 안식일로 본다. 그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향품과 세마포로 장사하고 가까운 새 무덤에 모셨다(요 19:38-42).
이 해석에 따른 사건 순서는 이렇다. 예수님은 유월절인 수요일 오후 세 시 무렵에 돌아가셨다. 수요일 해 질 때부터 목요일 해 질 때까지는 무교절 첫날의 절기 안식일이므로 쉬었다. 금요일은 평일이어서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할 수 있었고,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는 주간 안식일이므로 다시 쉬었다(막 16:1, 눅 23:56). 예수님은 수요일 밤·목요일 밤·금요일 밤과 목요일 낮·금요일 낮·토요일 낮을 채운 뒤 토요일 해 질 무렵에 부활하셨다고 필자는 설명한다.
마태복음 28장 1절의 헬라어에는 ‘안식일들’이라는 복수형 ‘사바톤’(σαββάτων)이 나타난다. 이 형태는 문맥에 따라 한 주를 가리키는 관용 표현으로도 쓰일 수 있으므로, 문법만으로 두 종류의 안식일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필자는 레위기 23장의 절기 안식일과 주간 안식일을 함께 놓고, 절기 안식일과 주간 안식일이 차례로 지난 뒤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는 시간표로 해석한다. 이는 성경의 직접 문장과 구별되는 필자의 연대 해석이다.
여인들은 일요일 새벽에 무덤으로 갔을 때 이미 돌이 옮겨지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마 28:1-6, 요 20:1). 성경은 그들이 새벽에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말하지,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식 날짜로 토요일 해 질 뒤는 이미 안식 후 첫날이 시작된 때다. 그러므로 필자는 예수께서 토요일 늦은 오후 곧 해 질 무렵에 온전한 사흘을 채우고 부활하셨다고 이해한다.
필자는 당시 유월절의 요일을 역사적으로 대조한 계산도 소개한다. 주후 28년부터 34년 사이의 후보들을 살핀 결과 주후 30년 유월절이 수요일에 해당하여 위 시간표와 맞는다고 설명한다. 이 연대 계산 역시 성경 본문 자체의 명시가 아니라 역사 자료를 결합한 해석이다. 핵심은 익숙한 전통만 반복하지 말고 주간 안식일과 절기 안식일을 모두 고려하여 성경의 시간 표현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데 있다.
8. 신약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기의 영적 원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약 성도는 구약의 절기를 구원을 얻기 위한 의식으로 다시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희생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셨다(고전 5:7, 15:20, 행 2:1-4). 이미 실체가 이루어졌는데 다시 유월절 어린양을 잡거나 예루살렘 성전을 세워 동물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거꾸로 돌리는 셈이 된다.
그러나 절기의 영적 원리는 지켜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으므로 묵은 누룩과 악의 누룩을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명절을 지키자고 했다. 이는 구약 달력을 의무로 되돌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은 사람이 죄의 누룩을 제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절기의 성취를 믿는 사람에게 회개와 성결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적용은 정한 때 함께 예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 규정 아래 있지 않지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에 함께 모이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성탄절이나 부활절처럼 특별한 날에 함께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을 공동체적으로 기억하는 절기의 원리를 보여 준다. 날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 앞에 모여 말씀과 은혜를 받는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예배에 참석할 때는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을 함께 찬양해야 한다. 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모든 생명을 감사하고,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송해야 한다. 기도와 찬송과 예물을 드리고, 말씀과 축복과 성찬을 받으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온몸으로 익혀야 한다.
공동체 예배는 개인의 회개를 대신하지 않는다. 주일마다 모이면서도 십계명을 어기고 이방 풍속과 음란과 탐욕을 따른다면 거룩한 열매가 없다. 반대로 개인 기도만으로 공동체의 모임을 불필요하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 날마다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정한 때 성회에 참여하여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개인의 성결과 단체적인 성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의 절기 구조와 영적 원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도가 주간 안식일과 절기 안식일의 차이조차 듣지 못하면, 하나님의교회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낯선 지식을 제시할 때 그것을 새로운 진리로 오해하여 끌려갈 수 있다. 성경 전체를 충실히 가르쳐야 거짓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다. 문자적 절기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주장도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만 목표로 삼지 말고, 예배를 통하여 실제로 거룩해져야 한다. 찬송할 때 창조와 구속을 감사하고,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죄와 잘못된 생각을 발견하며, 회개와 순종으로 행실을 바꾸어야 한다. 반복하여 돌아오는 모에드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면 세상의 때가 벗겨지고 천국의 성품이 자라난다. 이것이 절기를 통한 단체적인 성결례가 신약의 성도에게 가르치는 영적 원리다.
9. 나오며
레위기의 속죄와 정결과 성결이 서로 어떻게 구별되고 연결되며, 절기를 통한 단체적인 성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레위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제사는 피를 통한 속죄를, 11장부터 17장까지의 규례는 물과 피를 통한 정결을, 18장부터 27장까지의 법은 말씀을 지키는 행실의 성결을 가르친다. 죄 사함을 출발점으로 삼되 회개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야 한다.
개인의 성결은 십계명과 성윤리와 제사장의 규례와 흠 없는 예물에서 나타나며, 공동체적 성결은 절기와 안식년과 희년처럼 온 백성이 함께 순종하는 데서 나타난다. 특히 희년은 속박에서 놓아주는 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희년의 선포자이자 집행자로 오셨다.
모에드는 하나님이 정하신 만남의 때이고, 성회는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는 소집이다. 주간의 안식일과 연중 일곱 절기는 반복하여 백성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불러냈다. 봄의 네 절기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을 바라보고, 가을의 세 절기는 마지막 거두어 들임을 바라보게 한다. 신약의 성도는 절기를 문자적으로 되풀이하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적 의미를 살아야 한다.
안식일에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감사가 담겨 있다. 만물을 지어 누리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와 마귀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주간 안식일과 절기 안식일을 함께 살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시간표에 관한 필자의 해석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직접 진술과 해석을 구별하면서, 익숙한 전통보다 성경 전체의 구조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한 때에 함께 모여 기도와 찬송과 예물을 드리고, 말씀과 축복과 성찬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개인의 회개와 공동체 예배를 함께 지키며, 예배에서 받은 말씀을 실제 행실로 옮겨야 한다. 그리하여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공동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는 삶을 실천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8월 19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본 설교는 레위기 23장을 바탕으로 단체적인 성결의 의미와 절기 속에 감춰진 영적 법칙을 강해한 자료입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결을 개인적 도덕 차원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정한 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완성되는 상태로 정의하며, 특히 안식일을 모든 절기의 기초이자 성결의 핵심 수단으로 강조합니다. 이 설교의 구조적 핵심은 성경 속 ‘4대 3’의 법칙을 통해 봄 절기는 예수의 초림을, 가을 절기는 재림과 천국 소망을 상징한다는 논리적 체계입니다. 또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단순한 주간 안식일이 아닌 절기 안식일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며, 이를 통해 성도들이 창조와 구속의 은총을 기억하는 예배의 삶을 회복할 것을 독려합니다. 결국 이 설교의 목적은 절기에 담긴 하나님의 정한 때(모에드)를 준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더욱 거룩한 존재로 빚어가는 필수적인 과정임을 일깨우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