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64) 교수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빛이 바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서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표지가 낡아 있었다. 조 교수는 “100년 넘은 책이지만 위그노 연구에 있어서는 아주 젊은 편에 속한다”며 웃었다. 합동신학대학원대 총장을 지내고 프랑스위그노역사연구소장을 맡아 위그노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조 교수를 지난 17일 경기도 수원의 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
위그노는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16세기부터 400년 넘게 왕정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받아왔다. 이른바 칼뱅주의를 추종했던 그들이 숱한 박해에도 믿음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배울 수 있는 신앙 자세는 무엇인지 조 교수에게 들어봤다.
조 교수는 한국교회가 위그노에게서 배워야 할 교훈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들었다. 재산 몰수, 고문, 학살 등을 겪은 위그노가 지녔던 정신은 저항이라기보다 고난의 수용이라 볼 수 있다.
위그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숨을 바칠 정도로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경건과 지식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따랐다. 주일예배를 지키기 위해 주중에 맡은 일은 모두 끝냈다.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의식을 가지면서 근면한 삶을 살았다.
1517년 독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프랑스어 신약성경(1524), 위그노의 중요한 신앙적 토대가 된 장 칼뱅의 시편 찬송(1539) 등이 출간됐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창조한 존재이며 직업은 소명이란 것을 알게 됐다. 각성한 그들은 신앙에 불이 붙었다. 왕과 가톨릭 사제를 위해 존재하는 일꾼이자 노예로만 알았던 백성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위그노운동은 지도자 몇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민중의 자각으로 이뤄진 평신도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깊다.
조 교수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위그노의 믿음을 본받아, 한국교회도 소수의 지도자에 의한 수동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개교회 위주의 한국교회에 통일된 예배 모범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앙리 2세 치하였던 1559년, 위그노 파리 총회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는 믿음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지침이었다. 공통된 예배 모범이 있으니 핍박의 시대에도 신앙을 지켜나갈 힘이 됐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현재 한국교회 상황과 비교해 봤을 때 이 점은 배울 점이 크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한국교회의 양적 부흥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외부의 공격은 거세져 곧 고난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위그노 신앙 방식을 다시 살려낸다면 이런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글·사진 임보혁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