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선교사 #4 언더우드
한국기독교 선교사 #4 언더우드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건너와 동부에 위치한 뉴욕대학과 뉴저지의 뉴브런스윅 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다. 언더우드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1년간 의학을 공부하면서 선교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던 중 1882년 동경 명치학원에서 사역하던 올버트 올트만스Albert Oltmans에게 한국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한국선교를 위해 자신을 택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언더우드는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rank F. Elinwood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McWilliams의 기부금 6천 달러를 받고 1884년 7월 28일 미국장로회 선교본부를 통해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85년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해 2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이수정1842-1886의 도움을 받아 어학공부를 하였다. 때마침, 1885년 초 이수정은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라는 제목의 순 한글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그 성경을 갖고 1895년 4월에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외국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한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언더우드는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로부터 한국의 정치상황이 갑신정변으로 불안정하므로 한국 입국을 연기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임신 중인 부인을 대동하였던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는 제물포에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미혼이던 언더우드만이 위험을 무릎 쓰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신혼여행과 압록강 세례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해 처음 2년간 주로 한국어를 공부하며 조심스럽게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모색하였다. 제중원 교사가 그의 공식적 직함이었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알렌의 일을 도우며,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887년 가을에 언더우드는 개성, 소래, 평양, 의주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서울 위쪽 북부 지방으로의 첫 여행이었다. 그러나 의주를 중심으로 한 북쪽 지역에서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성경을 읽고 세례를 받고자 하는 신자 공동체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일부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언더우드도 1886년 알렌의 어학 선생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고, 전도여행을 할 때에도 몇몇 신자들을 문답하고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아펜젤러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방문하고, 1889년 3월에는 제중원에서 활동하던 호튼Lillias S. Horton과 결혼해 신혼여행으로 평양을 지나 의주, 강계, 압록강변 마을을 여행했다. 진정 복음에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언더우드가 의주에 도착했을 때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례는 물론 한국인에 대한 포교활동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자신의 중국 통행증을 활용해 중국에 건너가 한국인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언더우드 학당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원을 시작하면서 이를 학교 교육과 연계시켰다. 그는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데려다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고아원으로 발전했다. 언더우드학당은 구세학당, 예수교학당1891, 민로아Miller학당1893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 오늘날의 경신중, 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신학당으로 바뀌었다. 언더우드 이외에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과 프레드릭 밀러Frederick S. Miller 등 다양한 선교사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그러나 네비우스정책이 채택되고 자립정신을 강조하면서 원아들에게 모든 것을 마련해 주는 고아원이 선교부 정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때 폐당되기도 하였다.
1901년 제임스 게일에 의해 연동교회에서 재개된 경신학교는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미국의 부호들로부터 지원받은 돈으로 학교 건물을 지었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을 담당해 줄 교육기관을 세우기 원했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후 에비슨과 함께 1917년에 경신학교 대학부에 해당하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서 14명의 조선인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존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륜과 한국인들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이처럼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륜 같은 한국 신자들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진, 한국인 스스로 전도하고 신앙을 고백한 한국 신자들의 첫 번째 교회였다.
언더우드를 통해 많은 민족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몇몇 예를 들면, 한국의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은 언더우드 고아원 출신으로 새문안교회의 장로였고, 겨레의 스승이라 불린 도산 안창호는 민로아학당 출신이며 그 학당의 선생에 해당하는 접장이었다.
한국선교 동력화에 모델을 세우다
언더우드는 미국, 일본, 유럽을 오가며 한국에 대한 강연, 기고, 선교지원 연설 등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전 세계에 알렸다. 언더우드와 친분을 맺은 한국인들은 세계의 흐름이나 새로운 사조에 새롭게 눈을 뜰 수 있었는데, 이런 면에서 언더우드는 근대 한국의 ‘문화적 메신저’였다.
미국북장로회에 속해있던 언더우드는 교단을 초월해 많은 외국선교사를 한국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안식년을 맞이해 1891년 4월부터 1893년 2월까지 미국을 여행한 언더우드는 미국에 한국을 알리면서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91년 10월 시카고 맥코믹신학교 강연과 10월의 테네시주 내슈빌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 강연은 신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강연을 계기로 남장로회에 소속된 테이트, 존슨, 레이놀즈, 전킨 등이 한국선교에 헌신하여 남장로회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로써 북장로회 소속인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언더우드의 캐나다 강연을 통해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에비슨을 조선으로 오게 하였다. 이기풍과 김익두 목사의 회심에 큰 영향을 끼친 스왈른William L. Swallen의 경우도 신학교 재학 시절 언더우드에게 들은 한국의 이야기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장차 한국에서 하나님을 위해 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캐나다 출신 맥켄지 선교사가 소래에서 죽자 소래교회의 교인이었던 서경조의 편지를 번역해 주었는데, 이 편지는 캐나다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캐나다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898년 푸트William R. Foote,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맥래Duncan M. McRae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고, 언더우드는 이들을 이끌고 감격스럽게 소래를 방문했다.
영국성서공회 소속으로 성경 번역과 반포사역에 큰 공을 세운 휴 밀러Hugh Miller 또한 언더우드의 요청으로 1899년 한국에 와서 한동안 언더우드의 서기로 일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언더우드는 해외에서 한국 선교자원 동력화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모든 선교사를 위한 학문적 토대 쌓기
언더우드의 한국을 알리는 일은 출판 사업으로 이어졌다. 어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여러 종류의 사전을 편찬해 외국인, 특별히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 1889년 《한영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을 출간하였고, 1890년에는 《한어자전》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한국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언더우드가 5년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편찬한 것이다.
이밖에 언더우드는 한국학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1910년에 《동아시아의 종교》The Religions of Eastern Asia를 발간했다. 성서번역에도 공이 큰 언더우드는 1886년부터 191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성서번역의 책임을 졌다.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의 한국 이름은 원한경이다. 아버지 언더우드가 아들이 태어나자 서울에서 경사가 났다고 해서 지어준 이름이다. 호튼은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1912년 9월에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아버지가 설립한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섬겼다. 1917년 4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한국에 온 호튼은 연희전문학교 문과교수로 섬겼다. 그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 이래, 1920년대에 연전의 문과 과장과 부교장, 1934년에 3대 교장이 되었다.
호튼은 아버지 언더우드가 편찬한 책들을 개정하는 작업을 했는데, 1915년에 《한영문법》韓英文法을 개정하고, 1917년에 《한영자전》韓英字典을 개정해 영한사전인 《영선자전》英鮮字典으로 출간했다1925. 호튼 언더우드는 1925년 뉴욕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한국의 근대교육”Modern Education in Korea이었다. 특히 이 논문에서 그는 일본이 행한 교육에서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주목했고, 한국인들의 지적 수준을 낮게 보는 서구인들의 글을 비판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인들의 교육적 자질을 강조했다.
호레이스 호튼의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는 《한국의 선박 연구》Korean Boats and Ships(1933)로 이어졌다. 또한, 한국 문화와 역사에 애정이 각별해서 연희전문학교에 정인보, 김윤경, 최현배, 백락준, 백남운, 홍이섭으로 이어지는 한국학 연구 인맥을 형성시키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그리고 호레이스 호튼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1919년 3·1운동 때는 제암리 양민 학살 등의 일제 만행을 세계 언론과 교회기관에 알렸다. 1942년 6월에 강제귀국 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미육군 통역으로 한국에 와서 하지John R. Hodge장군의 고문을 맡고, 1947년 10월부터 다시 연희대학교로 복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돕던 중 1949년 3월 17일 부인Ethel V. W. Underwood(1888-1949)이 좌익청년에 의해 피살을 당하자 그는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그의 한국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런 비운에도 한국을 저버리지 않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민간고문단 자격으로 아들 3명과 함께 자진해서 참전했다. 당시 대부분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이나 미국으로 피난을 떠난 상황에서 그의 가족들의 행보는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51년 2월 20일 과로로 소천했다. 순직이었지만 거의 순교의 죽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의 아들 호레이트 그랜트 언더우드 2세도 1939년 뉴욕의 해밀턴 대학을 졸업하고 내한하여 연희대학교의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1년 강제로 추방을 당하고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한국전쟁 때 미해군의 해병사단정보부에서 근무했으며, 1956년 경신학교 이사와 왕립아세아학회 회장을 겸임했다.
존 토마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원요한)는 1946년 청주 선교지부에 부임해 청주성경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66년 전남 광주 선교지부로 전임하여 호남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57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리차드 언더우드Richard F. Underwood(원득한)는 한미재단 책임자로 1961년까지 활동을 하였다. 1961년에서 1962년까지 외국인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며, 1963년 이후 서울 미연합장로회 선교부에서 선교사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 2세Horace Horton Underwood II(원한광)는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2세(원일한)의 장남으로 1971년 연세대학교 초청교수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였고, 그의 아내 낸시Nancy K. Underwood(원은혜)는 서강대학교와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교사,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2세의 3남 피터 언더우드Peter A. Underwood(원한석) 는 연세대학교 개원교수로 봉직하였다.
연세대학교 내에는 언더우드가家 기념관이 있으며, 문헌 자료실이 구비되어 있다. 이곳에는 김정호의 수선전도 위에 언더우드가 친필로 여러 선교기관과 교회들의 지점을 기록한 지도가 보관되어 있다.
-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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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KIATS
발매 2014.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