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직 신앙고백(1561)
캐나다 개혁교회의 교리표준 중에 첫 번째 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고백서입니다. 이것은 흔히 벨직신앙고백서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벨기에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남부에서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서의 저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설교자였던 기도 드 브레인데, 그는 1567년에 이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아 순교했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 교회는 로마 카톨릭 체제로부터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기도 드 브레는 1561년에 이 고백서를 ㅂ준비하여 당시의 잔혹한 탄압에 항거하고, 또한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처럼 반역자가 아니라 오히려 법을 준수하며 성경에 따라 참된 기독교 교리를 고백하는 시민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다음 해에 이 고백서의 사본에 탄원자들의 청원서를 첨부하여 필립 2세 왕에게 보냈는데, 이 청원서에서 그들은 선언하기를 합법적인 일에는 정부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만일 이 고백서에 담긴 진리를 부인해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의 등을 채찍에 내어주고, 우리 혀를 칼에 내어주며, 우리 입을 재갈에 맡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온몸을 불사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박해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던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고, 드 브레 역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수천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그의 노고는 잔존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대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저자는 이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위해 칼빈이 주로 작성하여 2년 먼저 출판했던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를 어느 정도 참조했습니다. 하지만 드 브레는 그저 칼빈의 것을 가져다 수정하여 이 고백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교회들은 즉시 이것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16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열린 전국 총회에서도 이 고백서를 채택하였습니다. 1618-1619년에 열린 위대한 도르트 총회에서는 내용이 아닌 본문에만 주의 깊게 수정을 가한 후 이 고백서를 개혁교회 교리표준의 하나로 채택하여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여기에 동의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고백서는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최고의 신조문으로서 그 탁월성이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에 관한 교리를 요약해서 담고 있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고백‡
‡ 벨직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 역자 주
Ⅰ. 제1~11조 : 하나님, 그리고 그분을 아는 방법
Ⅱ. 제12~15조 : 창조와 섭리, 타락과 그 결과
Ⅲ. 제16~26조 : 선택,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의 은덕
Ⅳ. 제27~35조 : 교회와 성례
Ⅴ. 제36~37조 : 교회와 정부, 그리고 최후의 심판
제1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며 순전하신 영적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고 계신다. 영원함, 불가해성, 불가시성, 불변성, 무한함, 전능함, 완전한 지혜, 의로움, 선함, 그리고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심.
제2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방법
우리는 두 가지 방편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된다. 첫째,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통해서이다. 이 것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지극히 아름다운 책으로서 그 안의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은 수많은 글자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즉 로마서 1:20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있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죄를 정하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생에서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그분의 거룩하고 신성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보다 분명하고 온전하게 알려주신다.
제3조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의 충동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각별히 보살피시는 가운데 선지자들과 사도들 같은 그분릐 종들에게 명하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기록된 것들을 신성한 책이라고 부른다.
제4조 성경
우리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책들이 정경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론도 제기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인정되는 이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 사도행전. 사도 바울이 쓴 열세 개의 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그 밖의 일곱 서신인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제5조 성경의 권위
우리는 이 책들 전부를, 그리고 오직 이것들만을 우리 신앙의 규율과 기초가 되고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거룩한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데, 그것은 교회가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서가 아니라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명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스스로 그에 대한 증거를 담고 있기도 한데, 이는 소경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6조 정경과 외경의 차이
우리는 이 거룩한 책과 외경을 구분하는데, 이 외경에는 에스드라3,4서, 토빗, 유딧, 지혜사, 집회서, 바룩, 에스더 부록, 아사랴의 기도와 풀무 속 세 소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그리고 마카비1,2서가 있다. 교회는 이 책들이 정경과 일치하는 한 그것을 읽고 거기서 교훈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들에는 우리의 신앙이나 기독교의 핵심을 확증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나 권위가 없다. 하물며 이 책들을 사용함으로써 정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7조 성경의 충족성
우리는 이 성경 안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담겨 있으며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만 하는 모든 가르침이 충분히 들어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양식도 그 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심지어 사도라 할지라도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참으로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언가를 가감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 말씀에는 가르치는 교리가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하고 완결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의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성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밖에도 관습이나 다수의 견해, 고색창연함, 특정 시대와 인물에 대한 계승, 공의회의 결정이나 결의 혹은 법규 등도 하나님의 진리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든 것 위에 있으나 사람은 스스로 거짓되고 입김보다 가볍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도들이 가르쳐준 무오한 규칙에 따라 그에 어긋나는 것들을 온 마음을 다해 거부한다.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또한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제8조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면서 또한 삼위로 구별되신다.
하나님의 이 진리와 말씀에 따라 우리는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하나의 단일한 본질이시고 그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그 삼위의 비공유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시는 이른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다. 성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원인과 근원, 그리고 출발점이시다. 성자는 성부의 말씀이요 지혜이고 형상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영원한 능력과 권능이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별되신다고 해서 셋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그 특성 상 구별이 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삼위는 단지 한 분의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마찬가지로 성령 또한 성부와 성자가 아니신 것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이 삼위는 그렇게 구별 될지언정 나뉘거나 섞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성부는 우리의 살과 피를 입으신 적이 없고 성령도 마찬가지인데 반해, 오직 성자만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또 성부는 결코 그분의 성자나 성령 없이 존재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세 분이 진리와 능력,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제9조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경의 증언과 삼위 각각의 사역, 특히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알게 된다. 우리가 이 거룩한 삼위일체를 다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성경의 증언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 모든 곳을 다 거론할 필요는 없고 몇 군데만 선별해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다. 또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말씀에서 하나 이상의 신적 위격이 존재함이 분명 드러나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위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구약에서 다소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신약에서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의 음성이 들려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성자는 물 가운데 계셨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전형적인 문구를 정해주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우리 주님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전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씀도 있다. 성경의 이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하나의 유일하신 신적 본질 안에 삼위가 계심을 충분히 배우게 된다.
비록 이 교리가 인간의 모든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그것을 믿으며, 장차 천국에서 그것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그 열매를 누리게 될 것을 바라본다.
나아가 우리는 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독특한 직함과 사역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성부는 그 능력으로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성자는 그 피로 우리의 구원자와 구속주가 되시며,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성화주가 되신다. 이 성삼위일체 교리는 사도 시대 이래로 지금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과 무슬림에 맞서, 그리고 정통 교부들로부터 정당하게 정죄된 말시온, 마니,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라의 바울, 아리우스 등과 같은 거짓 그리스도인과 이단들에 맞서 참 교회 안에서 유지 보존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리와 관련하여 초대 교부들 역시 동의했던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세 신경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제10조 예수 그리스도,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심을 믿는다. 그분은 영원부터 나셨으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으셨고, - 만약 그렇다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 성부와 동일한 본질에 속하시고, 똑같이 영원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시며, 모든 면에서 성부와 동등하시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을 때부터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그러하시다. 우리는 다음의 증언들을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그 것을 배울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통해 세상을 지으셨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 말씀, 아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그분은 스스로 만물을 창조하실 그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또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그분을 부르고 예배하며 섬긴다.
제11조 성령님,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영원부터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심을 믿고 고백한다. 그분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혹은 나신 분이 아니시고, 오직 다른 두 분에게서 나오신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분은 순서상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고, 성부 ? 성자와 함께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위엄, 그리고 영광에 속하신 분이시며,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얻는 가르침이다.
제 12조 만물과 특별히 천사들을 창조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 곧 그분의 아들을 통해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믿는다. 또한 성부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그 존재와 모양과 형태를 주셨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창조주를 섬기는 일에 각각의 특정한 임무와 역할을 주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성부께서 그분의 영원한 섭리와 무한한 능력으로 만물을 지탱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을 쉬지 않으시며, 그로써 그 만물은 사람을 섬기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사들을 선하게 창조하셔서 그분의 사자를 삼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섬기도록 하셨다. 이들 중 일부는 자기들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그 존귀한 위치에서 타락함으로써 영벌에 처하게 되었으나,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의 상태를 굳게 지켜 그 위치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마귀와 악한 영들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과 모든 선에 대항하는 원수가 되어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마치 살인자처럼 숨어 기다리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해치고 자기들의 악한 계교로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그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정죄 받았고, 날마다 그 끔찍한 고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혐오하고 거부한다. 또한 마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며 부패된 것이 아니라 본질상 악하다고 하는 마니교의 오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제13조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선하신 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을 버려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 따위에 맡겨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다. 오히려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그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심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그분의 지시 없이는 일어나지 않음을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하나님께서 죄의 창시자는 아니시며, 그분께 그 책임을 돌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분의 권능과 선하심은 너무나 크고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설사 마귀와 악인들이 불의하게 행할때에라도 가장 뛰어나고 공의로운 방법으로 일을 정하고 행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여 행하실 때 우리는 호기심에 가득 차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을 묻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지극한 겸허함과 경외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추신 그 공의로우신 판단을 흠모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생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만을 배우고 그 한계를 넘지만 않으면 된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지시 없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이 없음을 거기서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며, 모든 피조물을 그분의 권능 아래 두어 지키시므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조차 - 그것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혹은 참새 한 마리조차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마 10:29, 30). 우리가 이것을 신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를 붙들고 계시므로 그분의 허락과 뜻이 없이는 우리를 해할 수 없도록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저 우연에 맡겨두신다고 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가증한 오류를 거부한다.
제14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력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선하고 의로우며 거룩하게 만드셨음을 믿는다. 따라서 그 첫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뜻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그것을 감사하거나 그 탁월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의지로 죄의 종이 되었고, 그 결과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가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고, 자신의 죄로 참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며, 결국 자신의 본성 전체를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는 영과 육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하게 되었다.
사람이 이처럼 악하고 어그려져 모든 일에서 부패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전에 하나님께 받았던 탁월한 은사들을 전부 잃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약간의 흔적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는데,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이 어둠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인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인간을 어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이와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종"(요 8:34)이고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부하겠는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라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누가 자신의 의지를 자랑 삼겠는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라고 하셨는데, 누가 자기의 지식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요컨데,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라는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무슨 일이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은 여전히 참으로 지당하고 틀림없는 말씀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라고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그분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지각과 뜻에 합한 지각이나 뜻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15조 원죄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 가운데 원죄가 들어오게 되었음을 믿는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게 된 것이고, 심지어 어머니 뱃속에 있는 영아들에게까지 그 악함이 유전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뿌리가 되어 사람 안에 온갖 종류의 죄가 생겨난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이 원죄는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하다. 원죄는 세례를 받아도 없어지거나 그 뿌리가 뽑히지 않는데, 이는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이 비통한 근원에서부터 끊임없이 죄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전가되어 그들을 정죄에 이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은혜와 자비로 사함을 받는다. 하지만 이 것은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패함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은 자주 탄식하며 속히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 받기를 열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원죄는 그저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하는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거부한다.
제16조 하나님의 선택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그의 모든 후손이 영벌과 파멸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을 명백히 드러내셨다고 믿는다. 자비로우시다 함은 어떤 이들을 이 영벌에서 구하고 건지신 사실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원하고 불면하는 계획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들을 선택하셨는데, 이는 오로지 그분의 순전한 선하심을 따라 하신 일이지 그 사람들의 행위를 조금도 고려한 것이 아니다. 반면 공의로우시다 함은 그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빠진 그 타락과 영벌의 상태에 그대로 두신다는 사실에 있다.
제17조 타락한 인간의 구원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스스로 영육의 사망에 빠져 한없는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시고 비록 그가 두려움으로 그분에게서 도망칠 때에라도 그를 찾아 나서셨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로하시되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 4:4)하심으로써 그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람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통해 하셨다.
제18조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심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고백한다. 즉 정하신 때에 그분의 영원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종의 형체를 갖고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신 일이다(빌 2:7). 그분은 참으로 온갖 연약함이 가득한 실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인간의 행위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육신의 본성만이 아니라 참 인간의 영혼까지도 취하셨는데, 이는 진정한 사람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게 된 것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둘을 다 취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친으로부터 인간의 육을 취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에 반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의 혈과 육에 함께 참여하셨음을 고백한다(히 2:14).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행 2:30),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동정녀 마리아의 태 중에 잉태되시어(눅 1:42)여자에게서 나셨다(갈 4:4). 또한 다윗에게서 난 한가지이시고(렘 33:15),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이시며(사 11:1), 유다지파에서 나셨고(히 7:14),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자손이요(롬 9:5),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갈 3:16)이신데, 이는 그 아들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했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2:16, 17 ; 히 4:15).
이로써 그분께서 참으로 우리의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마 1:23)이 되신다.
제19조 그리스도의 한 인격체 안에 있는 두 본성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의 잉태로 말미암아 성자 하나님의 인격체가 사람의 본성과 붕리할 수 없도록 연합되고 결합되었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두 분 계신 것도 아니고, 인격체가 둘인 것도 아니며, 오직 두 본성이 하나의 인격체 안에 연합된 것이다. 각각의 본성은 자체의 고유한 특성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분의 신성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히 7:3)언제나 창조되지 않은 그대로이며 하늘과 땅에 충만하다. 그분의 인성 역시 그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곧 시작한 날이 있고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유한하고, 그 안에 참된 육신의 모든 특성들을 다 보유하고 있다. 비록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의 인성은 불멸의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인성의 실체는 변화시키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부활 역시 그분의 실체적인 육신을 따라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인격체 안에 있는 두 본성은 너무나도 단단히 연합되어 있어서 심지어 그분이 죽으실 때도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분께서 죽으실 때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은 육신에서 떠난 실제 인간의 영혼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분의 신성은 무덤에 누워계실 때조차 그분의 인성과 연합된 채로 있었다. 그리고 그 신성은, 비록 잠시 동안은 그다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적이 있었을지라도,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분을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으로 고백한다. 참 하나님이심은 그분의 능력으로 사망을 정복하시기 위함이고, 참 사람이심은 그 육체의 연약함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다.
제20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우리는 완전한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전에 불순종 했던 그 본성을 취하게 하셨음을 믿는다. 또한 그 아들로 동일한 그 본성 안에서 아버지의 요구를 만족케 하셨으며, 극심한 고난과 사망으로 죄의 형벌을 감당케 하셨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지우심으로써 그분의 공의를 드러내셨고, 죄로 말미암아 정죄 받아야 할 우리에게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사망에 내어주셨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그분을 일으키심으로써 그분을 통해 우리가 불멸의 영생을 얻게 하셨다.
제 21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하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맹세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확증되셨음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요구를 온전히 채워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고, 또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려 그분의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5, 7, 12). 실제로 본디오 빌라도가 처음에는 그분에게 무죄 선언을 했지만 결국 그분을 범죄자로 정죄했다. 그분은 "(자신이)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고"(시 69:4),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벧전 3:18). 또한 우리의 죄로 인한 끔찍한 형벌을 받으심으로 영과 육에 고난을 당하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눅 22:44). 마침내 그분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소리치셨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견디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고전 2:2)아무 것도 알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빌 3:8). 우리는 그분의 상함 안에서 위로를 찾고, 신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는 이 유일한 한 번의 제사(히 10:14)외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도 구하거나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분을 예수, 곧 구원자라고 부른 이유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제22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우리의 칭의
우리는 우리가 이 커다란 신비를 진정으로 알게 되려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믿음의 불씨를 붙여주셔야 함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분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며, 그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음 둘 중의 하나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없거나, 아니면 그것이 그분 안에 전부 다 있다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분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서운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죄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반쪽짜리 구원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롬 3:28)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가 하면 엄밀히 말해서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의(義)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해주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공로와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이루신 많은 거룩한 일들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믿음은 우리가 그분과의 교통 가운데 그분의 모든 은덕을 받으며 그분께 붙어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그 은덕들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충분히 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23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 다윗과 바울의 가르침이다. 이들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롬 4:6 ; 시 32:1)에 대해 말했고, 바울 사도 역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24)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견고한 기초를 붙든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시인한다.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의 공로로 내세우지 않으며,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종만을 의지하고 의탁한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순종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가리는 일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며, 우리 양심을 두려움과 무섭고 떨림에서 해방시켜 줌으로써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이 떨면서 숨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전례를 따르지 않게 해준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 행여 아주 작을지라도 -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우리는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다윗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제24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성령님의 역사로 사람 안에 이러한 참된 믿음이 생겨나고, 그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거듭나고 새롭게 된다고 믿는다. 즉 참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죄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 때문에 사람이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무관심해진다는 것은 그릇된 말이다. 그와는 반대로 그런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오직 자기를 향한 사랑이나 정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 아니고, 성경의 말씀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에 그렇다. 사람 안에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의 선한 뿌리에서 뻗어 나오는 그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성결해지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을 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데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선한 일을 하기 전에도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무 자체가 좋지 않을 때 그 나무의 열매도 좋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일도 선한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하되 공로를 쌓기 위해 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슨 공로를 쌓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선행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이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더욱 빛나게 하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 구원의 근거를 거기에 두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는 육신의 소욕으로 더러워져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 설사 한 가지 선행을 보인다 해도 전에 저지른 죄 하나가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받지 않으실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그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의 고난과 사망의 공로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나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어떠한 확신도 없이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을 겪게 될 것이다.
제25조 그리스도, 율법의 성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이 그쳤고 모든 그림자가 성취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것을 사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와 본질은 그것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아직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사용하는데, 이는 복음의 교훈 위에 우리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온전한 진실함 가운데 우리의 삶을 다스려가기 위함이다.
제26조 그리스도의 중보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자 우리의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없음을 믿는다. 이것을 위해 그분께서는 신성과 인성이 함께 연합된 사람이 되셨고, 그로써 우리가 엄위하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하셨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과 우리 사이에 세우신 이 중보자의 위대하심 때문에 우리가 겁을 먹고 우리 마음에 드는 다른 이를 찾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피조물은 없다. 비록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자기를 비우셔서 우리를 위해 사람과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빌 2:6, 7), 또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따라서 만약 다른 중보자를 찾아야 한다면, 우리가 원수 죄었을 때 우리를 위해 그 생명을 내려놓으신(롬 5:8, 10)분보다 더욱 우리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겠는가? 만약 권세와 능력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면,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마 28:18)분보다 더한 이가 있겠는가? 게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보다 더 귀 기울여 들으시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성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순전히 믿음이 없어서이고, 그것은 성인들을 명예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불명예를 안겨주는 것으로, 성인들 자신은 결코 하지도 않았고 또 요구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반대로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에 그와 같은 명예가 돌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했음이 그들의 글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우리가 무가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올릴 때 우리의 가치를 근거로 해서 한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함과 그 가치,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것이 된 그분의 의에 바탕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두려움, 혹은 오히려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떨쳐버리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 18)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더욱 용기를 내어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또한 같은 성경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라고도 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셨다. 왜 우리가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분을 떠나 다른 데로 가거나, 결코 찾을 수 없는 다른 이를 찾으려 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른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아버지께 구한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받게 되리라고 확신한다(요 16:23).
제27조 그리스도 교회의 보편성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 혹은 우주적인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참된 기독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회중이자 모임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그분의 피로 씻음 받고 성령님께서 성결하게 하여 인 치신 사람들이다.
이 교회는 세상이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고 또 끝날 때까지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왕이시고 왕은 백성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교회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비록 잠시 동안은 매우 미미하고 소멸해버린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포악함에 맞서 이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아합의 위협적인 통치 속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을 친히 남겨두셨다. 그뿐 아니라 이 거룩한 교회는 특별한 어느 한 지역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 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동일하신 한 성령님 안에서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로 이어지고 연합되어 있다.
제28조 교회에 연합해야 할 의무
우리는 이 거룩한 모임과 회중은 구속받은 자들의 모임이고 그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홀로 있는 것에 만족하여 이 교회를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교회에 들어와 연합함으로써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과 권징에 복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며, 형제와 자매를 위해 덕을 세우는 일에 봉사하되 하나님께서 한 몸의 지체로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더욱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떠나서 어디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모임에 들어가는 것이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 설사 통치자들이나 군주의 명령이 그에 반할지라도, 그리고 죽음과 육신의 형벌이 따를 지라도 신자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멀리하거나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제29조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표지
우리는 무엇이 참 교회인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부지런히 그리고 매우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분파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자기들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고 거기서 선한 이들과 함께 섞여있으나 사실은 참으로 교회에 속해있지 않은 위선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분파들과 구별해야만 하는 참 교회의 몸과 교제에 관한 것이다.
참 교회는 다음의 표지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참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설교한다. 또한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하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한다. 그리고 죄를 바로 잡고 벌하기 위해 교회의 권징을 시행한다. 한 마디로 참 교회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다스리되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여긴다. 이로써 참 교회는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누구도 거기서 분리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또한 죄를 멀리 하고 의를 좇는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와 그 육체의 일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비록 그들 안에 연약함이 많이 남아있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한평생 그에 맞서 싸운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고난, 죽으심과 순종에 호소하는데, 바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기 때문이다.
반면 거짓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회 자체와 교회가 정한 법령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한다. 자신을 낮춰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에 명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멋대로 거기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게 더 근간을 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면서 거짓 교회의 죄악과 탐욕, 우상숭배를 꾸짖는 사람들을 핍박한다.
이 두 교회는 쉽사리 알아볼 수 있고 서로 구별할 수 있다.
제30조 교회 정치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영적 질서에 따라 이 참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사역자 혹은 목사가 있어야 하고, 이 목사와 함께 교회 회의를 구성하는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권징하여 그들을 억제하며,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돕고 위로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준 규칙을 따라 신실한 사람을 선택하면 모든 것이 온전하고 선한 질서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제31조 교회의 직분자
우리는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와 장로, 집사를 직분자로 선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선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해진 대로 기도하며 선한 질서를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누구든 합당치 않은 방법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직분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로써 그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고 나아가 자신의 소명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말씀 사역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 힘과 권위에 있어 동등한데, 이는 그들 모두가 온 세상의 유일한 감독이시자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거룩한 명령을 어기거나 거부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모든 사람은 교회의 말씀 사역자와 장로를 그들이 하는 일로 말미암아 특별히 더 존경하고, 할 수 있는 한 불평이나 논쟁을 벌이지 않고 그들과 화평 가운데 지내야 한다.
제32조 교회의 질서와 권징
우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교회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질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고 또 유익한 일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바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양심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일체의 인간적인 창작물이나 법규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오직 교회의 화합과 하나 됨을 보존 및 증진하는데 적합한 것만을 받아들이고,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 안에서 하기에 합당한 것만 받아들인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권징과 출교를 시행해야만 한다.
제33조 성례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둔함과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성례를 제정하심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인 쳐주시고,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선한 뜻과 은혜에 대한 보증을 삼아주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리 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그 믿음을 지탱해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분께서는 복음의 말씀에 이 성례를 더하셔서 우리의 외적 감각으로 다음의 두가지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해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선언하신 것과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내적으로 행하신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 구원을 확증해주신다. 성례는 내면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신 표(標)와 인(印)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 표는 우리를 속이는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례가 나타내는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을 떠나서는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단 두가지 성례만을 우리에게 제정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그 두 성례는 바로 세례와 성찬이다.
제34조 세례
우리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롬 10:4)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사람이 죄를 속하거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할 수 있는 혹은 하고자 하는 다른 모든 피 흘림에 종지부를 찍으셨음을 믿고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피 흘리는 할례를 폐지하시고 그 대신 세례를 제정하셨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세상의 다른 모든 족속과 거짓 종교로부터 구별되는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표지와 표시를 지니고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된다. 이것은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과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되시리라는 것에 대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그분의 모든 백성은 평범한 물을 이용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안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표해주시는 것은 물을 부으면 그것이 몸의 먼지를 씻어내는 것처럼, 또한 세례를 받을 때 그 사람의 몸에 물이 뿌려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혼 안에서 동일하게 역사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씻어 정결케 하고, 우리를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다. 이런 일은 물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의 보혈을 뿌림으로써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홍해, 즉 마귀를 상징하는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영적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그 홍해를 뜻한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자신의 직무로써 이 성례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우리에게 베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성례가 표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선물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씻으시고 그 안의 모든 더러움과 불의를 제하심으로써 그 영혼을 정결케 하신다. 또한 우리의 마을을 새롭게 하시고 그 안을 위로로 가득 채우신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같은 그분의 선하심을 참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입혀주셔서 옛 본성과 그 일을 내어버리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단 한 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세례를 다시 주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두 번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례는 우리에게 물이 뿌려지고 우리가 그 물을 받을 때만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재세례파의 오류를 거부한다. 그들은 한번 받은 하나의 세례에 만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자의 어린 자녀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죄악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들이 세례를 받아 언약의 표로 인 펴져야 함을 믿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유아들도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약속 위에서 할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흘리신 것은 어른들뿐만 아니라 신자의 자녀들도 씻으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신자의 아이들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한 표로서 성례를 받아야만 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율법에 명하사 아이가 태어난 후에 어린양을 그리라고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성례이다. 이 세례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할례와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바울은 세례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라고 했다.
제35조 성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제정해주심으로써 그분께서 이미 거듭나게 하시어 그분의 가족인 교회에 연합시키신 사람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이중적인 생명이 있다. 하나는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생명으로 이것은 처음 태어날 때 얻는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천상의 생명으로 이것은 두 번째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것이며 복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인 땅의 생명을 먹이시기 위해 이 땅의 물질적인 떡을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이 떡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천상의 생명, 곧 신자들의 생명을 먹이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요 6:5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분은 신자들이 그분을 먹을 때, 영적인 차원에서 믿음으로 그분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적인 천상의 떡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시기 위해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이 땅의 가시적인 떡과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제정해주셨다. 이로써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증거는 우리가 그 떡과 포도주를 우리 손에 받아 들어 우리 입으로 먹고 마시면 그것을 통해 우리 육신의 생명이 지속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손과 입인 믿음으로 우리의 유일하신 구주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를 우리 영혼에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게 되는 것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성례를 제정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이 거룩한 표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주시는 모든 것을 우리 안에 이루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에게 감추어 있어 우리가 그것을 다 파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본연의 몸과 참된 피라고 말해도 그것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것을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믿음으로 먹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늘 앉아 계시면서, 동시에 믿음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이 만찬의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과 그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해주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 자신은 물론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영적인 상(床)이다. 그분의 살을 먹음으로써 우리의 주리고 메마른 영혼을 먹이시고 힘과 위로를 주시며, 또한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신다.
비록 이 성례에는 그것이 표하는 실재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 표하는 본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악인은 이 성례를 받음으로써 반드시 정죄에 이르게 될 뿐 그 성례에 담겨 있는 진리는 받지 못한다. 따라서 가룟 유다와 마술사 시몬도 이 성례를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표하는 그리스도를 받지 못했다. 그분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자신을 주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회중 가운데서 겸허함과 경외심을 갖고 이 거룩한 성례를 받는다. 함께 모인 회중은 우리 구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감사를 돌리며 그것을 기념하고 우리의 믿음과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이 상(床)에 나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자기 위에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전 11:28, 29). 요컨대, 우리는 이 거룩한 성례를 통해 감화를 받아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이 이 성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가증스런 것들을 만들어 혼합하는 것을 불경한 일로 여겨 거부한다. 선언컨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가르쳐준 규례에 만족하며 오직 그 안에 거해야만 한다.
제36조 세속 정부
우리는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의 부패함 때문에 왕과 군주와 공직자들을 임명하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법과 규율에 따라 다스려짐으로써 인간의 방탕함이 억제되고 사람들 사이의 모든 일이 선한 질서를 따라 행해지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정부의 손에 칼을 쥐어 주심으로써 행악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보호하도록 하셨다(롬 13:4). 정부의 이와 같은 억제하고 보존하는 임무는 비단 공공질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교회와 교회의 사역을 보호하는 일도 포함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하고 복음의 말씀이 곳곳에 전파되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 계급에 상관 없이 공직자들에게 복종하고 세금을 내야하며, 그들을 존경하고 존중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일에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사에 그들을 인도하사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딤전 2:1, 2)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재세례파와 그 밖의 반체계적인 사람들, 그리고 권위자들과 공직자들을 거부하고, 공의를 뒤엎고, 재화의 공동소유를 주장하며, 하나님께서 사람 사이에 세우신 선한 윤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모든 사람을 정죄한다.
‡ 1905년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는 이곳에서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 예배를 제거 및 방지하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파멸되도록" 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제37조 최후 심판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주님께서 정하셨으나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이때가 되면 택하신 사람들의 수가 찰 것이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육신으로,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대로(행 1:11), 큰 영광과 위엄 가운데 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친히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 되심을 선언하시고, 이 옛 세상을 불로 태워 깨끗케 하실 것이다. 그 때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세상 첫날부터 끝 날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위대하신 이 재판장 앞에 각각 서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살전 4:16)그들을 불러 모으실 것이다.
그 날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이전에 들어가 살았던 몸과 다시 한번 결합되어 땅에서 일어날 것이다. 반면 그때까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 그 사람들과 같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책들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인데(계 2:12),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받게 된다. 진실로 모든 사람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비록 세상에서는 그것을 그저 우스갯소리나 오락거리에 불과하게 생각할지라도.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다."(마 12:36)그때는 사람들의 은밀하고 위선적인 모든 것이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사악한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이 심판이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지만, 의로운 자들과 택한 자들에게는 큰 기쁨과 위로가 됨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그들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들이 겪었던 수고와 고생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들의 결백을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핍박하고 억누르고 괴롭혔던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보복이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악인들은 자기 양심의 증거를 따라 유죄 판결을 받아 결국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마 25:41)에서 죽음을 보지 못한 채 고통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신실하고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마 10:32)과 그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시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계 21:4)것이고, 지금은 그들이 많은 재판관과 세상 권위자들로부터 이단적이고 악한 것으로 정죄 받을지라도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임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으로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을 은혜로운 상급으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면서 그 위대한 날을 바라본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