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8. 인구 센서스 실시 이전의 개신교 인구 변화
연 도 |
성도 수 |
비 율 (%) |
비 교 (1) |
비교 (2) (%) |
1914 |
196 000 |
1.2 |
177 692 (1910) |
1.3 (1910) |
1919 |
190 000 |
1.1 |
190 668 (1920) |
1.2 (1920) |
1929 |
244 000 |
1.3 |
260 534 (1930) |
1.5 (1930) |
1938 |
263 000 |
1.1 |
360 689 (1940) |
1.6 (1940) |
1949 |
744 000 |
3.7 |
500 198 (1950) |
3.0 (1950) |
1957 |
844 000 |
3.7 |
623 072 (1960) |
5.0 (1960) |
1968 |
1 873 000 |
6.0 |
|
|
1970 |
3 193 000 |
10.1 |
3 217 996 (1971) |
7.0 (1970) |
1976 |
4 659 000 |
13.0 |
5 001 491 (1977) |
10.4 (1978) |
1981 |
7 637 000 |
19.8 |
7 180 627 (1980) |
|
1985 |
6 489 282 |
16.1 |
|
|
* 1949년부터는 남한만 포함.
* 출처: James H. Grayson Early Buddhism and Christianity in Korea (Leiden: E. J. Brill) 126.
비교(1)은 1940년까지는 한영제 편 『한국 기독교 성장 100년』(서울: 기독교문사 1986) 200f; 1950 1960년 통계는 이원규 『종교사회학의 이해』(서울: 사회비평사 1997) 565; 1971-80년 통계는 문화공보부 『종교법인 단체 일람표』(1971) 『종교법인 및 단체현황』(1977) 『종교단체 현황』(1980).
비교(2)는 Thomas Kern "Das 'andere' Wachstumswunder. Protestantische Kirchen in Südkorea " Zeitschrift für Soziologie 30 (2001) 344.
1985년 통계는 인구센서스 결과.
그림 1. 인구 센서스 실시 이전의 개신교 인구 비율 변화
표에서 알 수 있는 개신교 인구의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1960-70년대의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이다. 많은 연구들이 초기의 한국 개신교의 성장에 대해 얘기하지만 실제로 전체 인구 대비 비율은 1960년대 이전 까지는 그렇게 눈에 띄게 높지는 않다. 이러한 개신교 인구 변화의 상황은 표의 내용을 다시 그래프로 표시한 그림 1에서 더욱 눈에 띈다. 그림 1에서 개신교는 1960년대 이전에도 꾸준한 성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추세는 1960년 대 이후 특히 1970년대에 이르러 급속하게 나타난다. 즉 현재의 한국 개신교의 성장은 1960년대 이후의 변화 요인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960-70년대의 한국 개신교의 성장을 가져온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처럼 이 시기는 경제 개발과 그에 따르는 급격한 사회 변동의 시기였다. 물론 정치적 요인도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지만 정치적 상황이 1960년대 이전에 비해 급격하게 변했다고 보기 어렵고 또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개신교의 급격한 성장을 직접적으로 연결 짓는 요인을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사회적 불안을 고조시켰고 한 편으로 정부가 보수적인 기독교 세력을 정권 유지를 위한 도움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요인은 본질적 요인이라기 보다는 경제·사회적 요인에 대해 부가적 촉진적 요인으로서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 개발은 전통적 가치의 붕괴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 그에 따른 생활 양식의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회적 심리적 불안을 야기시켰다. 이는 새로운 가치 체계 및 안정을 위한 연계망을 필요로 하는데 이 시기에 개신교가 바로 이러한 필요를 채워준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는 급격한 변동의 시기에 불안을 겪는 이들에게 특히 도시로 이주하여 뿌리를 잃고 새로운 정체성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정체성과 또한 공동체성의 새로운 뿌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의 산업 혁명 시기에 감리교가 행한 역할이기도 하며 또한 문화적 경제적 근대화의 과정 속에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현대에 있어 세속화를 주장하는 종교 사회학자들도 이러한 사회 변동의 시기는 새로운 정체성을 필요로 하며 이 시기에는 세속화의 예외로서 종교적 부흥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1960-70년대가 바로 이러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다른 종교가 아닌 개신교였을까?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이 시기의 불교와 천주교도 어느 정도 성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들 종교보다 더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몇 가지 요인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 성장의 역할 모델로서의 미국과 개신교의 역할이다. 개항 이후의 근대적 교육 기관은 대분분 미국을 모델로 한 것이었고 개신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러한 교육 기관에서 양육된 한국의 엘리트들은 성장의 모델로서 미국과 개신교의 영향을 탈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해방 이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정책은 이러한 경향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1960-70년대의 많은 국민들은 미국을 발전을 위한 이상적 국가로 생각하였으며 미국은 무엇보다도 개신교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는 전통적인 불교나 유럽적 색채가 짙은 천주교보다 더 나은 종교적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한국 개신교의 몇 가지 특징 또한 그 급격한 성장을 촉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장을 목표로 한 사회 변동의 시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변동 과정 속에서 살아 남는 것이고 이것은 성공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개신교는 ‘축복’의 교리를 통하여 생존 혹은 성공을 위한 중요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개신교를 믿으면 축복을 받고 성공할 수 있으며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은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는 많은 국민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여기에 개신교 특유의 (구역을 비롯한) 소집단 조직들은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도시민들에 중요한 안식처가 되 주었다. 이러한 성공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여의도 순복음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부흥에는 조용기 목사 특유의 카리스마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맞물리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근대화 산업화와 연관된 사회 변동은 어느 정도 누그러들기 시작한다. 산업사회로서의 틀은 어느 정도 갖추어졌고 그와 함께 경제적 풍요도 조금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부가적 요인이지만 정치적 상황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점점 안정되어 갔고 사회적 불안정의 많은 요소들이 사회복지 제도들을 통하여 흡수되어 갔다. 1982년 생활보호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공적 부조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1989년에는 전 국민 의료보험이 이루어졌다. 국민연금법도 1986년 개정되어 1988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아직도 경제·사회적 불안 요소는 남아 있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되었고 국민들은 예전과는 다른 욕구체계 - 종교적 욕구를 포함한 - 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여 진다. 개신교의 성장이 둔화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욕구 가치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경제 성장에 따른 가치 변화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가 바로 잉엘하트(Ronald Inglehart)의 가치변화 이론이다. 물론 잉엘하트 이론의 가정과 가치 변화의 측정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그의 이론에 따른 많은 국제적인 연구가 행해졌기에 여러 국가 사회 간에 비교가 가능한 장점이 있고 또한 실제 현상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해여는 유용한 설명을 제공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잉엘하트는 가치 유형을 물질주의자(Materialist 이후 M)와 탈물질주의자(Postmaterial- ist 이후 PM) 그리고 혼합형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유형의 분포는 그 사회의 경제적 요인에 크게 의존한다. 즉 어느 사회이든 M 유형과 PM 유형이 공존하지만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PM 유형이 증가한다는 것이 잉엘하트의 기본적 주장이다. 잉엘하트는 그의 이론에 기초하여 1970-71년의 “유럽 사회 여론 조사 (European Community Public Opinion Surveys)"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실증적인 연구를 실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PM 유형의 분포는 1인당 국민소득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며 (p < 0.0001) 그 밖에 학력 (ϒ = 0.297) 월수입 (ϒ = 0.080)과도 유의미한 상관을 보였다. 1990-93년 “World Values Survey"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행해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20년 출생 집단은 M 유형이 70% 혼합형이 30%를 차지한데 반하여 1970년 출생 집단은 M 유형이 PM 유형보다 불과 10% 많은 분포를 보였다. 이러한 세대별 가치 유형의 변화는 조사대상 43개국 가운데서 가장 큰 것으로 이후로도 PM 유형이 더 증가하였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PM 유형의 특징은 무엇인가? 잉엘하트는 정치 노동 가족 성 문제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을 제시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종교에 관한 사항에 제한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잉엘하트에 따르면 매주 정기적으로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비종교인에 비해 물질적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종교 행사 참여자의 경우 M:PM 유형의 비율이 38:11%인데 반해 비종교인의 경우 22:26%로 PM 유형이 높아진다. 또한 M 유형의 사람들에 비해 PM 유형의 사람들이 “신 존재가 그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비율이 2배 정도 높았다 (44:23%). 반면에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가?”는 질문에 대해서는 PM 유형의 사람들이 더 ‘자주’라고 대답했다 (41:27%). 잉엘하트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잠재적인 그리고 다른 의미에 있어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PM 유형의 사람들은 기존의 제도적인 종교에 대하여는 소극적이지만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또 다른 종교적인 욕구를 지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1960-70년대의 개신교의 성장을 사회·경제적 변동의 요인과 관련지어 설명하였고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안정과 더불어 그 성장이 둔화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잉엘하트의 이론에 따르면 경제 성장은 가치의 변화를 동반하고 변화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은 예전과는 다른 종교적 욕구를 지닌다. M 유형의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에 토대한 축복의 교리에서 만족을 얻었다면 이제 PM 유형의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대답을 얻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개신교 성장의 둔화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과거 현실적 물질적 축복에만 매달린 결과일 수 있다.
에서 발췌한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