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중에서 중요하지 않는 성경이 있을까? 그렇지만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면 우리는 로마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롬1:1,16~17). 그래서 모든 사람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가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모든 과정을 총망라한 서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로마서의 소주제인 이신칭의를 구원과 거의 동일시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특히 이신칭의로 말미암아 한 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거나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은 맞는 것이며 성경적인 것일까? 오늘은 로마서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써,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보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어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무엇이며,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로마서를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로마서는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유익한 서신서다. 죄인이 어떻게 이신칭의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칭의자가 어떤 성화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로마서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단계로 이어지는 구원의 여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러한 구원의 여정은 구원에 관한 모든 절차를 다 포함하고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구원이란 죄사함을 받는 것 혹은 중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죄사함과 중생은 구원의 모든 개념을 다 포함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결국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죄사함을 받았던 자라도, 중생을 얻었던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음을 말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은 결국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죽기 전까지는 한 개인의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로마서를 통해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이 구원받아 영화롭게 되기까지는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의 여정의 끝마치기 위해서는 칭의의 단계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칭의를 강조하다가 그만 성화의 과정을 소홀히 여기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열매가 없을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아주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가 구원의 여정을 말하고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구원에 관한 완벽한 책이라고 단정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만약 구원의 여정에서 성화를 빼버린다면 그것은 곧 구원을 헐값에 팔아 넘기는 것이 되어 나중에는 죄를 회개치 못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일까지 발생할 수가 있다. 사실 구원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회개와 성화의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러한 성화의 과정이 없는 이신칭의는 결국 성도를 천국으로 보낼 수가 없다.
잠깐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조금 요약해보자. 로마서는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잘못된 구원론사상으로 인하여 요즘 현대의 개신교인들은 로마서에 나오는 이신칭의를 마치 구원인량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은 구원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성화의 과정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개신교회는 구원의 여정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끝까지 구원의 경주를 마치지 못하고 그만 구원을 놓쳐버리는 성도들도 있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이 없는 구원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칭의만으로 결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믿어야 그것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구원의 첫 출발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통과하여야 죽은 다음에 영화의 단계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는 성도들은 칭의에서 곧바로 영화의 단계로 넘겨버린다.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칭의는 얻었으나 성화되지 아니한 자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화의 과정은 성도들의 구원에 있어서 매주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사실 칭의는 구원의 첫 시작점에 불과하지만 성화는 구원의 거의 모든 전노정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리고 칭의가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만, 성화는 일평생 일어나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확대해석하여 성화없이도 구원에 이를 것처럼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구원론에 대한 반격 때문이다. 당시 카톨릭이 주장하는 구원의 방편은 3가지였다. '세례'와 '선행'과 '물질적 기부'다. 누구든지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선행을 하며 돈을 기부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공덕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하든지 세례만 받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행위구원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과정의 일부분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첫 발을 내딛는 시작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다 해 주신 것을 그저 믿는 것 뿐이다. 칭의를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행위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 사실 인간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취해야 할 어떤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속죄제물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의 후손치고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인간은 단 한 명도 자격을 갖춘 자가 없었기에, 죄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셨다. 이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는 완료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에게 효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 우리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의 기본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말고 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하는 일이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이었던 것을 시인하고, 지었던 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 이러한 회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회개까지 하나님께서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는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눅15:11~24).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돌아갈 분깃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것은 그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지은 인간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땡전한푼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아들이 스스로 뉘우친다(눅15:17). 회개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 그렇다. 아버지가 대신 회개할 수는 없다. 회개는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아들이 회개하도록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그의 회개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회개까지 하나님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만세전에 구원받기에 택정함을 입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겠지 하면서,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라. 그러다가 회개하지도 못한 채 죽으면 큰 일나기 때문이다. 회개까지 하나님이 대신하도록 밀쳐내지 말라. 회개는 죄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외치셨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의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은사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구원얻기 위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때 행하는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회개다. 그리고 이때는 동시에 자신이 지었던 생각나는 죄까지 같이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신칭의를 받아 구원의 노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그후에 신자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성화의 과정을 크게 2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믿는 자 속에 들어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성도들은 과연 자신의 옛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가? 아니다. 이 질문에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신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고 오히려 옛사람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구약의 성도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 있었던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 중에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 들어갔고(마8:11~12), 모세와 엘리야도 천국에 들어가 있었다(마17:15). 구약의 성도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으며, 그분이 메시야를 보내어 인류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믿었다. 또한 그들 자신이 율법에 따라 살지 못했던 것을 철저히 회개했던 것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가 없이도 구원받았던 것이다. 그들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오실 메시야를 믿으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오직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으며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면 그리고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고 있다 해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편 강도의 경우라 하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도 큰 죄를 지어 십자가의 한 편에 못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는 3가지를 했다. 자신은 죄를 지었으니 마땅이 죽임당할 일을 한 것이라고 자백했으며, 자기들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갈 때에 자신을 불쌍히 여기어 자신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분을 어떤 죄인이라도 천국에 데려가실 수 있는 메시야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선행이나 물질적인 기부를 하지 않았어도 그날 낙원(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지도 않았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도 나가서 전파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막6:12). 예수께서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파했던 베드로도 군중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으며(행2:38, 3:19, 8:12),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활동했던 사도바울도 회개할 것을 명했던 것이다(행17:30).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60년이 지난 시점에 사도요한에게 일곱교회에 써 보내라고 했던 편지의 핵심내용은 곧 회개였다(계2:5,16,21~22,3:3,19). 그렇게 회개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하라는 명령은 어떤 명령이었겠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자기들이 지은 자범죄를 회개하라는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이미 구원의 노정 안으로 들어온 자들로 구성된 일곱교회의 성오들에게 명령한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미 이신칭의를 통해 구원 안으로 들어온 신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자범죄를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자가 있다면 그는 2가지 회개가 다 필요할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단회적인 회개와 지었던 자범죄를 자백하는 반복적인 회개를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이신칭의를 통해 단회적인 회개를 했고,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을 가진 자는 자범죄에 대한 회개만 하면 된다. 당신은 지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가? 아니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인가? 어찌되었든 당신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만큼 확실하다. 날마다 회개를 지속하라. 그래야 죽을 때에 깨끗히 죄를 떨쳐버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두번째로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의 실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복음이란 무엇일까? 사실 인간이 해야 할 두 가지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이다. 복음을 믿되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믿어야 한다(막1:14, 롬1:1). 그 복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그렇다. 복음의 요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을 가리킨다. 그 아들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어져왔다. 그 예언에 따르면, 예수그리스도는 인성에 있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실 것기고, 거룩의 영 곧 신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로 인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난 다윗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시작은 이렇게 선포한다. "아브라함의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1:1)" 예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후손이었고, 예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인 나단의 후손이었다. 이렇듯 다윗의 가문의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만나 약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해산할 무렵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로마황제에 의한 호적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요셉은 혹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여 배가 불러온 약손녀인 마리아를 데리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간다. 사실 당시 여자는 호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천사의 고지를 받은 요셉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그리하여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된다. 이것이 메시야에 관한 약 300가지의 예언 중에서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예언의 성취의 시작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오셨고 그리고 공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진 바로 그 메시야인 것을 안다. 만약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아니한 채, 혹시 하나라도 죄를 지어버렸다면 그분은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했다. 그분이 부활했다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로서 해야 할 사명을 다 성취했다는 것이며, 정작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분은 누구의 죄로 죽은 것인가? 예수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해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죄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제 모든 만물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확정되기에 이르셨다. 그분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심으로 인류구원의 새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 이외에 결코 메시야는 존재하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온 재림예수 내지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신천지의 이만희도 결코 메시야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도 아니며, 통일교의 문선명이도 아니고, 신앙촌의 박태선이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 단 하나도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이만희를 제외한 모든 교주들을 다 죽었지만 결코 살아나지 못했다. 그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이만희와 안상홍과 문선명과 박태선을 메시야나 재림예수나 보혜사로 믿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믿고 아무리 회개한들 그 회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이 분을 믿으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 이외에 구원자가 없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든든한 반석 위에 있는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