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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BbRR3KNF_Lk
날짜 2024-09-04
본문말씀 히브리서 13:20~25(신약 370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4-09-04(수) 수요기도회

제목: [히브리서강해(20)] 최종회 - 히브리서가 이 시대에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은 대체 무엇인가?(히13:20~2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BbRR3KNF_Lk

 

1. 들어가며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이 히브리인이자 그리스도인인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다(히1:1~2, 2:1~3, 13:20, 22~24). 그런데 이 편지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편지의 서두에 발신자와 수신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맨 끝에 가서 발신자와 수신자가 누군지를 밝힌다. 아마도 이 편지를 이렇게 써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이 편지를 쓴 자는 이 편지를 받을 자에게 자신을 밝히지 않고서 편지를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가 누군지를 알 수 있도록 해 놓았을까? 그것은 우리가 히브리서에서 얻을 영적인 교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말씀하고 있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구원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이 편지에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가?

 

2. 이 편지의 영적인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편지의 서두(히1:1~3)에서 밝히는 것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도 히브리인이요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자도 히브리인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이 편지의 발신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말하기를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들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발신자나 수신자가 다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를 통해서 더 알 수 있는 사실들은 첫째로, 이 편지와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가 히브리인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퀴리오스')으로 믿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히2:3, 7:14, 8:2, 12:14, 13:20). 둘째,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는 여럿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개인으로서(히13:19,22,23), 예수님을 주님로 믿고 있는 자이면서(히13:20), 동시에 원래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과 함께 있었다가 잠시 떨어져 있는 이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히13:18~19).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전에도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짧은 시간을 통하여 이미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자였다는 사실이다(히13:22).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디모데를 자신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히13:23). 그리고 셋째, 이 편지를 받을 수신자들은 이달리야에서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것이다(히13:24). 즉 로마교회라는 것이다. 넷째, 정황으로 보았을 때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신앙에 있어서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어떤 이가 고난의 큰 싸움을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비방과 환난을 당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 일부는 그때도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였고 또한 그들의 소유(재산)까지도 빼앗기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히10:32~34).

  그 이유는 2가지였다. 그것은 로마정부로부터 가해지는 박해와 동족으로부터 가해지는 박해 가운데에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발신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권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편지라는 것이다. 곧 배교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렇다면 배교(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는 것)는 로마교회 성도들 곧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로마교회 성도들에만 해서는 안 될 일인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그것은 둘 다이다. 

  이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한가 하는 것은 만약 이 편지가 단지 히브리인이 히브리인들에게만 보내는 편지라고 한다면 이방인들은 이 편지를 굳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서는 이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편지가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은 자신이 히브리인들이든지 아니면 이방인들이 상관없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를 히브리인이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이방인인 우리 교회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럼, 이 편지를 보내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목적은 배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고로 이 편지의 주제는 배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인데, 그 결과는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대주제는 구원론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왜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 편지의 저자를 바울이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통하여 이 편지의 발신자는 바울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이 편지의 발신자가 '바나바'나 '아볼로'라고 주장하기도 하면 그것은 바른 주징이 아니다. 바나바가 아닌 것은 비록 그가 유대인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디모데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지도 아니했으며 그를 형제라고 부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둘은 같이 활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볼로'가 아닌 것은 이도 역시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히브리서와 같은 주제를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이것도 가능하지 않는 것은 이 편지를 쓰는 자가 어떤 개인 곧 '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편지의 발신자를 '누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가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누가는 처음부터 이방인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후보군에 들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편지의 발신자는 로마교회에 먼저 편지를 보냈던 자이다(히13:22).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로마교회와 함께 있었다가 잠시 떨어져 있었으나 곧 그리로 갈 자이다(히13:18~19).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이 교회의 지도자였던 자다(히13:7, 17, 24).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르는 자이다(히13:23). 고로 이 편지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일 수밖에 없다. 사실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감옥에 수감된 이후(A.D.60~62), 잠시 석방을 받아 서바나로 전도하러 떠났는데(A.D.63~65), 그만 로마의 네로황제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대화제(A.D.64)의 주범으로 몰리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재산이 몰수되는 상황에 놓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 것은 경고하기 위해 써 보낸 두번째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편지의 발신자는 자신을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 편지의 주제가 구원론에 관한 것인데, 이 주제가 이전에 써보낸 로마서(A.D.55년경)와 어쩌면 상충되는 듯한 내용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탈락의 가능성을 매우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바울이 써보내었던 로마서는 그렇지 않다.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내용으로 써 보내었기 때문이다(롬8:33~35). 그러므로 만약 로마서만을 알고 있는 자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바울이 써 보낸 편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히브리서가 구원을 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계속해서 그것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히2:1~4, 3:7~4:13, 5:11~6:12, 10:26~31, 12:1~29).

  또한 오늘날에 들어와서 신학자들도 역시 이 편지를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지 않으려는 이유는 초기의 바울저작의 편지들 곧 로마서 갈라디아아서와 같은 편지와 히브리서는 서로 상충되는 듯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탈락의 가능성을 강하게 경고하는 히브리서를 바울이 쓸 리가 없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정황을 보고 이 편지를 읽어보면 금방 이 편지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바울의 편지라고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초기의 편지들이 하나같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고부동함을 증거해주고 있는 반면에, 히브리서는 구원은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편지의 영적인 교훈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편지의 영적인 교훈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신 구원이지만 만약 우리가 그 구원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히2:1~4, 3:7~4:13, 5:11~6:12, 10:26~31, 12:1~29). 사실 이 편지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들어오신 완전한 제사장으로서 또한 완전하고도 흠없는 제물이 되시어 완전한 성막인 자신의 몸 안에서 속죄제사를 드리므로 인류의 죄를 단번에 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우리 주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구원을 받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김으로 주님을 부인한다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얻으라고 주신 것이지만 이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배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고난과 유혹에 직면했을 때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로서 믿음을 견고히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히3:13). 목숨 걸고 믿음을 사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편지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라고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셋째, 구원은 믿음을 갖는 순간을 통해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구원은 일종의 경주와도 같아서 끝까지 완주하는 자가 결국에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히12:1~2). 결국은 구원은 순간이 아니라 경주요 여정인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게 되지만 고난을 인내해서 구원을 완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은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짐난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은 자신이 죽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고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경주는 바울이 A.D.54~55년경 그의 신앙의 초기에 기록했던 고린도전서에서도 이야기했었고(고전9:24~27) 또한 A.D.60~62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로 수감되었을 때에 썼던 빌립보서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빌3:12~14). 

  넷째, 인내하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믿음의 길을 걸어간 믿음의 신앙선배들의 삶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히11장). 왜냐하면 신앙선배들의 삶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에 결국 새 예루살 성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들의 신앙의 목표는 이 땅에서 받을 복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받을 복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주실 복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어놓으신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것을 바라보면서 인내로서 자기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한 것이다(히10:35).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받을 축복보다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치욕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당한 고난들 곧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결박당하고, 투옥당하고, 시련을 겪고, 궁핍함을 겪고, 환난을 당하고, 학대를 당해도 결국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다섯째, 신앙공동체가 흔들리거나 견고하게 되는 것은 항상 교회의 지도자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히13:7, 17, 18~19, 24). 신앙공동체의 지도자가 약하면 신앙공동체도 함께 흔들리며, 신앙공동체의 지도자가 견고하면 그 신앙공동체 또한 견고하기 때문이다. 이는 잠시 바울이 떠나간 로마교회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겨두고 간 그들의 인도자들이 많이 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인도하는 자들에 대해 각별한 순종고 애정을 부탁한다. 

  여섯째, 구약성경은 모형과 그림자이자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이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람이 확실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모형과 그림자를 붙들 것이 아니라 참 형상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모형과 그림자로 등장하는 대제사장과 속죄제물과 성막의 실체이기 때문에 모형과 그림자를 붙든다든지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미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붙들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일곱째, 성도들이 진정 바라고 소망해야 할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며, 그것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일이며, 거기에 들어가서도 상얻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고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늘에서 최고의 복에 참여하는 24장로들 가운데 11명의 장로들(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사무엘)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진정 바라보았던 것은 이 땅에서의 안정과 평안이 아니라 하늘에 준비된 새로운 도성 곧 새 예루살렘 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성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상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인내하고 믿음의 경주를 행한 것이다. 

 

5. 나오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실 히브리서는 낯설고 생소한 책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을 비교적 소상히 알아야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을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신 그리스도와 비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구약의 천사와 여러 인물들(모세, 여호수아, 아론, 대제사장들)과 비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언약과 제사제도와도 비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구약적인 성경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제대로 알때에 비로소 여기에 나온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 책은 유대인들만큼 소중한 책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만 다를 뿐 이방인들도 꼭 알고 있어야 할 구원의 핵심을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탈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은 한 순간이 아니라 여정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거기에서도 상얻는 자가 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구약의 성경은 다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증언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우리가 비록 이방인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멀리할 책이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도 부지런히 이 책을 살펴서 유대인인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하고 있는 구원탈락의 가능성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히브리서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간음했던 르우벤과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던 에서는 원래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였으나, 결국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을 얻은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계속 잘 감당해아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아야 하며, 그곳에서 상 얻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24년 09월 04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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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탄명성교회 2024.09.05 09:19

    1. 들어가며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이 히브리인이자 그리스도인인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다(히1:1~2, 2:1~3, 13:20, 22~24). 그런데 이 편지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편지의 서두에 발신자와 수신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맨 끝에 가서 발신자와 수신자가 누군지를 밝힌다. 아마도 이 편지를 이렇게 써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이 편지를 쓴 자는 이 편지를 받을 자에게 자신을 밝히지 않고서 편지를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가 누군지를 알 수 있도록 해 놓았을까? 그것은 우리가 히브리서에서 얻을 영적인 교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말씀하고 있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구원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이 편지에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가?

     

    2. 이 편지의 영적인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편지의 서두(히1:1~3)에서 밝히는 것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도 히브리인이요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자도 히브리인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발신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말하기를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들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발신자나 수신자가 다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를 통해서 더 알 수 있는 사실들은 첫째로, 이 편지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가 히브리인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퀴리오스')으로 믿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히2:3, 7:14, 8:2, 12:14, 13:20). 둘째,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는 여럿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개인으로서(히13:19,22,23), 예수님을 주님로 믿고 있는 자이면서(히13:20), 동시에 원래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과 함께 있었다가 잠시 떨어져 있는 이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히13:18~19).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전에도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짧은 시간을 통하여 이미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자였다는 사실이다(히13:22).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디모데를 자신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히13:23). 그리고 셋째, 이 편지를 받을 수신자들은 이달리야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것이다(히13:24). 즉 마 교라는 것이다. 넷째, 정황으로 보았을 때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신앙에 있어서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어떤 이가 고난의 큰 싸움을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비방과 환난을 당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 일부는 그때도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고 또한 그들의 소유(재산)까지도 빼앗기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히10:32~34).

      그 이유는 2가지였다. 그것은 로마 정부로부터 가해지는 박해와 동족으로부터 가해지는 박해 가운데에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발신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권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라는 것이다. 곧 배교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렇다면 배교(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는 것)는 로마 교회 성도들 곧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로마 교회 성도들에만 해서는 안 될 일인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그것은 둘 다이다. 

      이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한가 하는 것은 만약 이 편지가 단지 히브리인이 히브리인들에게만 보내는 편지라고 한다면 이방인들은 이 편지를 굳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서는 이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편지가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은 자신이 히브리인들이든지 아니면 이방인들이든지 상관없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를 히브리인이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이방인인 우리 교회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럼, 이 편지를 보내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목적은 배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고로 이 편지의 주제는 배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인데, 그 결과는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대주제는 구원론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왜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 편지의 저자를 바울이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통하여 이 편지의 발신자 바울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이 편지의 발신자가 '바나바'나 '아볼로'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른 주이 아니다. 바나바가 아닌 것은 비록 그가 유대인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디모데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지도 아니했으며 그를 형제라고 부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둘은 같이 활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볼로'가 아닌 것은 이도 역시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히브리서와 같은 주제를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이것도 가능하지 않는 것은 이 편지를 쓰는 자가 어떤 개인 곧 '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편지의 발신자를 '누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가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누가는 처음부터 이방인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후보군에 들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편지의 발신자는 로마 교회에 먼저 편지를 보냈던 자이다(히13:22).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로마 교회와 함께 있었다가 잠시 떨어져 있었으나 곧 그리로 갈 자이다(히13:18~19).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이 교회의 지도자였던 자다(히13:7,17,24). 그리고 이 편지의 발신자는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르는 자이다(히13:23). 고로 이 편지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일 수밖에 없다. 사실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 감옥에 수감된 이후(A.D.60~62), 잠시 석방을 받아 서바나로 전도하러 떠났는데(A.D.63~65), 그만 로마의 네로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대화제(A.D.64)의 주범으로 몰리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재산이 몰수되는 상황에 놓 있었기 때문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 것 경고하기 위해 써 보낸 두 번째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편지의 발신자는 자신을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 편지의 주제가 구원론에 관한 것인데, 이 주제가 이전에 써 보낸 로마서(A.D.55년경)와 어쩌면 상충되는 듯한 내용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 탈락의 가능성을 매우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바울이 써 보내었던 로마서는 그렇지 않다.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내용으로 써 보내었기 때문이다(롬8:33~35). 그러므로 만약 로마서만을 알고 있는 자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바울이 써 보낸 편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히브리서가 구원을 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계속해서 그것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히2:1~4, 3:7~4:13, 5:11~6:12, 10:26~31, 12:1~29).

      또한 오늘날에 들어와서 신학자들도 역시 이 편지를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지 않으려는 이유는 초기의 바울 저작의 편지들 곧 로마서, 갈라디서와 같은 편지와 히브리서는 서로 상충되는 듯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 탈락의 가능성을 강하게 경고하는 히브리서를 바울이 쓸 리가 없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정황을 보고 이 편지를 읽어 보면 금방 이 편지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바울의 편지라고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초기의 편지들이 하나같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고부동함을 증거해 주고 있는 반면에, 히브리서는 구원은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편지의 영적인 교훈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편지의 영적인 교훈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신 구원이지만 만약 우리가 그 구원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히2:1~4, 3:7~4:13, 5:11~6:12, 10:26~31, 12:1~29). 사실 이 편지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들어오신 완전한 제사장으로서 또한 완전하고도 흠없는 제물이 되시어 완전한 성막인 자신의 몸 안에서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인류의 죄를 단번에 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우리 주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구원을 받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김으로 주님을 부인한다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얻으라고 주신 것이지만 이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배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고난과 유혹에 직면했을 때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로서 믿음을 견고히 지켜 내야 한다는 것이다(히3:13). 목숨 걸고 믿음을 사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편지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라고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셋째, 구원은 믿음을 갖는 순간을 통해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구원은 일종의 경주와도 같아서 끝까지 완주하는 자가 결국얻게 된다는 것이다(히12:1~2). 결국은 구원은 순간이 아니라 경주요 여정인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게 되지만 고난을 인내해서 구원을 완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은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은 자신이 죽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고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경주는 바울이 A.D.54~55년경 그의 신앙의 초기에 기록했던 고린도전서에서도 이야기했었고(고전9:24~27) 또한 A.D.60~62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로 수감되었을 때에 썼던 빌립보서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빌3:12~14). 

      넷째, 인내하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믿음의 길을 걸어간 믿음의 신앙 선배들의 삶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히11장). 왜냐하면 신앙 선배들의 삶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에 결국 새 예루살 성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들의 신앙의 목표는 이 땅에서 받을 복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받을 복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주실 복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어 놓으신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것을 바라보면서 인내로서 자기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한 것이다(히10:35).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받을 축복보다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치욕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당한 고난들 곧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결박당하고, 투옥당하고, 시련을 겪고, 궁핍함을 겪고, 환난을 당하고, 학대를 당해도 결국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다섯째, 신앙 공동체가 흔들리거나 견고하게 되는 것은 항상 교회의 지도자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히13:7, 17, 18~19, 24).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가 약하면 신앙 공동체도 함께 흔들리며,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가 견고하면 그 신앙 공동체 또한 견고하기 때문이다. 이는 잠시 바울이 떠나간 로마 교회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겨두고 간 그들의 인도자들이 많이 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인도하는 자들에 대해 각별한 순종애정을 부탁한다. 

      여섯째, 구약성경은 모형과 그림자이자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이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람이 확실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모형과 그림자를 붙들 것이 아니라 참 형상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모형과 그림자로 등장하는 대제사장과 속죄제물과 성막의 실체이기 때문에 모형과 그림자를 붙든다든지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미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붙들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일곱째, 성도들이 진정 바라고 소망해야 할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며, 그것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일이며, 거기에 들어가서도 상얻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고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늘에서 최고의 복에 참여하는 24장로들 가운데 11명의 장로들(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사무엘)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진정 바라보았던 것은 이 땅에서의 안정과 평안이 아니라 하늘에 준비된 새로운 도성 곧 새 예루살렘 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성에 들어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상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인내하고 믿음의 경주를 행한 것이다. 

     

    5. 나오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실 히브리서는 낯설고 생소한 책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을 비교적 소상히 알아야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을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신 그리스도와 비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구약의 천사와 여러 인물들(모세, 여호수아, 아론, 대제사장들)과 비교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언약과 제사 제도와도 비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구약적인 성경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제대로 알 때에 비로소 여기에 나온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풀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 책은 유대인들만큼 소중한 책이다. 왜냐하면 상황만 다를 뿐 이방인들도 꼭 알고 있어야 할 구원의 핵심을 정확히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탈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은 한 순간이 아니라 여정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거기에서도 상얻는 자가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구약의 성경은 다 그리스도대하여 증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우리가 비록 이방인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멀리할 책이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도 부지런히 이 책을 살펴서 유대인인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하고 있는 구원 탈락의 가능성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히브리서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간음했던 르우벤과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던 에서는 원래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였으나, 결국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을 얻은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계속 잘 감당해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아야 하며, 그곳에서 상 얻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24년 09월 04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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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히브리서강해(15)]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 이야기(5) - 사사들,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히11:32~40)_2024-07-10(수)

    2024-07-10(수) 수요기도회 제목: [히브리서강해(15)]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 이야기(5) - 사사들,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히11:32~4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pDSDYwJjego 1. 들어가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할 우리들에게 신앙의 ...
    Date2024.07.11 By갈렙 Views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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