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왜 썼을까? 베드로는 원래 글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헬라어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헬라어로된 편지를 남겼다. 그것도 자기 전도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소아시아 북쪽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늙은 노사도는 과연 그들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인가? 베드로는 원래 할례받은 신자들만을 위한 사도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지금 이방인 그리스인들이면서 또한 자기가 전도하지도 않은 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뭔가 중요한 변수가 생긴 것이다.
베드로전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적어도 A.D.64년 이후에 썼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증이 그렇다. 당시 로마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의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네로 황제가 로마시의 대화재(A.D.64년)의 주범으로 그리스도인을 지목하고서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하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밖에서 볼 때는 로마에 대한 불만세력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죽어갔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역에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또다른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이방인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우상의 제물을 나눠먹었으며, 신전의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위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를 할 수 있으며, 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바위를 타고 올라가 중간에 구멍을 파고 그곳에서 생활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갑바도기아 지방 성지순례를 가보면 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종합해보면,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과 각 지역사람들에게 많은 괴롭힘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음란과 욕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데 자기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 해보라. 얼마나 힘들고 생뚱맞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지조를 지켰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위로하여 점점 더 거세어질 핍박을 믿음으로 견뎌내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그들에게 써 보낸 것이다. 그것도 실라(실루아노)에게 대신 써달라고 해서 말이다.
베드로전서는 3부분(1:1~12, 1:13~4장, 5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1~12은 서론부에 해당된다. 서론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북쪽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 핍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을 칭찬하면서, 이방인이라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잇는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이다. 그렇다. 이방인이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결국 이기는 자가 되어 하늘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 한국사람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상속자까지 예정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베드로전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적어도 A.D.64년 이후에 썼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증이 그렇다. 당시 로마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의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네로 황제가 로마시의 대화재(A.D.64년)의 주범으로 그리스도인을 지목하고서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하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밖에서 볼 때는 로마에 대한 불만세력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죽어갔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역에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또다른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이방인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우상의 제물을 나눠먹었으며, 신전의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위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를 할 수 있으며, 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바위를 타고 올라가 중간에 구멍을 파고 그곳에서 생활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갑바도기아 지방 성지순례를 가보면 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종합해보면,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과 각 지역사람들에게 많은 괴롭힘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음란과 욕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데 자기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 해보라. 얼마나 힘들고 생뚱맞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지조를 지켰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위로하여 점점 더 거세어질 핍박을 믿음으로 견뎌내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그들에게 써 보낸 것이다. 그것도 실라(실루아노)에게 대신 써달라고 해서 말이다.
베드로전서는 3부분(1:1~12, 1:13~4장, 5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1~12은 서론부에 해당된다. 서론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북쪽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 핍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을 칭찬하면서, 이방인이라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잇는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이다. 그렇다. 이방인이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결국 이기는 자가 되어 하늘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 한국사람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상속자까지 예정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