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8)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1)(요1:19~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Z158Ara-Qg [혹은 https://tv.naver.com/v/28241589 ]
예수께서는 과연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그의 부모의 이름과 그의 이름과 그의 미래와 과거를 말씀하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부르심에 대한 하늘의 비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늘의 부르심에 관한 영적인 비밀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섯 명의 첫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12가지 신앙고백 가운데, 세례 요한이 말했던 첫 번째 신앙고백 곧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만 알아도 속죄제의 비밀이 풀린다.
1. 들어가며
예수께서 누군지를 아는 것은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작업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그것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20:31, 17:3).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에서는 과연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일곱 번의 요한복음 강해를 통하여, 요한복음의 서론을 살펴보았고(6번에 걸쳐), 이어서 요한복음 1:19~51절에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론을 통하여는 예수께서 '말씀'(로고스)이자 '하나님'이시며, '독생자'이자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다(요1:1,14,18).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하여 들었고(요1:19~34), 이어서 예수께서 부르신 갈릴리의 첫 5명의 제자에 대해서도 들었다(요1:35~51).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덜 다뤘던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한 부분과 아울러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 신앙고백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며, 부르심은 어떻게 정해지며 본인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보내는 속사람(영)의 나이와 더불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에 대해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 신앙고백으로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항상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엇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20:31).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이러한 관점으로 서로 배치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크게 서론(1:1~18)과 본론(2:1~20장)과 결론(21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요한복음의 본론부는 또다시 전반부(요2:1~12:50)과 후반부(요13:1~20:31)로 나뉘게 되는데, 전반부에는 유대 안에서의 3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룬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총7가지의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본론의 전반부는 첫 번째 표적으로서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 시작되는데, 마지막 표적으로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7가지 표적이 끝난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가나의 포도주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나사로의 부활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7가지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분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본론의 후반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가 다락방의 강화에서 시작하여 예수께서 붙잡힘을 받으시고 고난받고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또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쓰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요한복음 1장의 19~51절에서도 여전히 이것은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 1:19~51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1:19~34)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역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는데, 그것은 세례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면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장의 35~51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다섯 명의 첫 갈릴리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안드레와 나다나엘을 통하여 고백되어지고 있다(요1:41,49).
3. 예수님의 첫 다섯 명의 제자들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그들의 이름과 부모 그리고 그들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요한복음 1:19~51의 후반부(1:35~51)는 예수께서 부르신 첫 갈릴리 다섯 명의 제자들의 이름과 그들을 불러내신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예지적인 감각이다. 즉 예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처음 보면서도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지와 또한 나다나엘을 처음 보면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후에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안드레의 형 베드로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니까, 베드로의 가족과 이름을 다 알고 있었으며, 장차 베드로가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반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나다나엘의 경우도 예수께서 그를 만나기 전에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자, 나타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12사도들을 어떻게 사도로 삼게 되셨는지를 하늘의 광경에서부터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누가 12사도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주님 오실 때가 다 된 것이다. 그러니 영성이 있는 자는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어서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한 광경이라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환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영성이 그만큼 받쳐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개인의 삶을 누군가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하여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4. 이 땅에 태어나는 사명자들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부르시는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하늘의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된 것은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서 그를 이 땅에 보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하여,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15:16). 즉 자기가 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사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때가 되자 미리 정하신 대로 그들을 불러내어 제자들과 사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이 땅에 태어난 사명자들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부르시는가?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참고로 이러한 과정은 대부분 알 수 없는 영적 세계의 비밀이지만 영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영역이다. 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후에 결혼하고 부부 생활을 하다 보면 보통 아이를 갖게 되는데, 이때 잉태된 아기가 약 2~3개월 정도 자랐을 때 이 아기의 육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육체 속에 하늘에 있는 영혼을 집어넣어 준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태어날 나라와 가정 그리고 성별과 직책 사명까지 정해서 내려보내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되도록이면 당신의 사명을 주어서 보내는 아이를 축복받은 나라와 가정에 보내신다. 과거 같으면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에 보내셨다. 그리고 기왕이면 몇 대째 믿고 있는 가정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영혼을 보내실 때에, 북한에 보내시겠는가 아니면 남한에 보내시겠는가? 북한에도 보내실 수 있겠지만 대부분 남한에 보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남한은 자유롭게 믿을 수 있고, 몇 대째 예수믿는 가정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 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 먼저는 24장로들이 있고, 이어 144,000명의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무수히 많은 허다한 성도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24장로나 144,000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천국의 보좌 자리가 정해진 채 이 땅에 영혼이 보내지는 것이다. 특히 천국에서 144,000명은 70줄의 좌석에 앉게 되는데, 그중에서 첫째 줄에서 셋째 줄까지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앉을 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러한 보좌 자리에 앉을 자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보통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불러서 사용하신다. 구약의 성도들 중에는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경우는 성부 하나님이 직접 불러서 쓰셨던 경우이고, 신약의 12사도들은 예수께서 직접 부르신 것이고,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불러내신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쓰실 자는 처음부터 목회자로서 하늘에서 보내신다. 그리고 평신도로 쓰실 자는 평신도로 보내신다. 심지어 어느 가정에서, 남여로 태어나게 될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주님이 배려하여 이 땅에 내려보내시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라는 환경까지도 다 안배해서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때 만난 베드로의 아버지를 모르시겠으며, 베드로의 장래를 모르시겠는가?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분이 정말 모르시겠는가?
5. 사람은 얼마 정도의 속사람(영혼)의 나이로 보내어지며 얼마만큼 성장해 가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속사람(영혼)을 어떤 육체 속에 보내시는가?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속사람의 나이는 다 똑같지 않다. 최소 천국의 나이로 볼 때, 3살에서 최대 15~16살까지의 영혼을 이 땅에 보내신다. 어떤 아이는 갓 태어난 아기의 나이에서부터 3~4살 정도의 나이로 보내어지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평신도의 경우 3~4살 이하의 아이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거의 없이 보내어진다. 그리고 보통은 5~6살의 나이로 이 땅에 보내어진다. 이때부터는 예수께서 천국의 낙원에서 그 아이를 만나 물어보고 답을 받고 보내는 나이가 이때부터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자신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온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한 가정을 전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한 가문을 기독교 가정으로 만들기 위하여,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로 보내거나, 기도하는 자로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평신도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의 종들과 같은 사명자들에게 해당되는데, 이때는 7~9살 정도의 나이에 보내어진다. 그리고 속사람의 나이로 7~9살 정도의 나이를 태어난 자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될 수가 있다. 사역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신도든 주의 종이든 상관이 없이 면류관을 얻게 된다. 그리고 10~16세까지는 대부분 주의 종들로서, 이 나이에 이 땅에 보내어진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보내어지는 사람은 많이 있지 않다. 특히 15~16세의 나이로 보내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세상에 보내어지는 나이의 최고령은 16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자기의 속사람의 나이를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을까? 보통은 10년에 1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0년의 기간이라도 빨리 자라는 사람은 2~3살 정도까지도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지 20년이 되었을 때 영의 나이가 무려 6살이나 먹는 사람은 드물게 하나씩 있다. 그런데 50년을 신앙생활 했어도 영의 나이가 1살도 못 먹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럼, 무엇에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영의 양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의 영혼이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속사람(영혼)이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2가지만 잘 지키면 된다. 첫째, 영혼의 양식은 성경 말씀을 잘 먹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성경 말씀을 보고 성경을 공부할 때에 영혼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절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둘째, 고난과 역경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의 그릇의 두께가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자꾸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는 자는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그릇이 작아 보여도 금그릇이나 은그릇으로 쓰임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혼의 나이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나이가 25세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장할 수 있는 최대의 나이 곧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까지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 영혼(속사람)은 그때 천국에 들어간 나이로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죽인다거나 자살하면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6. 내가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사명자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럴수록 처음부터 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구별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의 큰 사명을 담당할 자가 어릴 적부터 막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믿지 않는 집안에 태어난 자라도 크게 쓰임받을 자는 막 살지 않는다.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며, 효도하고 살며, 징징거리지 않고 대견스럽게 살아간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노는 것이 다르며, 하는 짓이 대범스럽고 구별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일찌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절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전 순결을 지킬 것이다", "나는 절대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순종할 것이다" 등을 스스로 정하고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천국의 144,000석의 보좌 앞쪽에 있는 자는 주님이 직접 부르시지만, 대부분은 성령을 통하여 부르신다. 그때에는 성령의 은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꿈과 환상을 통하여 알게 된다. 그러면 자신을 구별하면서 살아간다. 사무엘의 경우를 보라. 잉태되기 전부터 그의 엄마 한나가 잉태될 아기를 위해 얼마나 기도에 힘썼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복된 영혼을 그녀의 자궁 속에 보낸 것이다. 그러니 사무엘은 어릴 적부터 나실인으로서 주님께 드려진다. 그리고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각별한 개인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영광을 받고 자라났던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면,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자는 다음과 같은 3~4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 사명자는 더이상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천국을 사모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꿈이 되는 것이다. 둘째,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매우 갈망한다.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하고, 영적인 일에 자신이 더 크게 쓰임받기를 사모하고, 영적인 은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셋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자신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난 풍파가 찾아와도 항상 이것도 지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명에 목숨을 바쳐 끝까지 충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하지 말라고 막을 수도 없다. 그것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삶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의 삶 역시 그랬었다.
7. 세례 요한이 말했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신앙고백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요1:19~51절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고백을 한 것일까? 세례 요한이 요1:19~34에 말했던 것을 요약하면 총 5가지다. 그리고 나머지 7가지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말했던 다섯 가지 신앙고백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29절). 둘째는 '먼저 계신 이'라고 했다(30절). 셋째, 예수님을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이'라고 했으며(33절), 넷째,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고 했다(33절).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34절). 이중에서 오늘은 그의 첫 번째 고백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예수님은 "어린양"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린양'이란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어린 양'이란 헬라어로 '암노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몇 번 안 나오는 단어다. 요한복음에서 2번, 나머지 2번 나올 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1장 29절과 이 고백을 반복해서 짧게 말하는 36절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리고는 스데반이 언급했던 바, 사도행전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데, 그때에 스데반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서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이라는 인용문에서 세 번째로 언급한다(행8:32).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도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 믿는 이들이 구속받는 것이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했다(벧전1:19). 그리고는 더이상 '암노스' 어린양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혹시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에 30회나 등장하는 '어린양'은 모두가 다 '아르니온'이라는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지, '암노스'라고 하는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아르니온')은 모두가 다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진노'(계6:16),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7:7,9), '어린양의 아내'(계21:9), '어린양의 생명책'(계21:27), '어린양의 보좌'(계22:1,3) 등의 용어가 나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예수께서 제2위의 하나님으로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시며(계17:14), '목자'와 같은 분으로 나온다(계14:4~5). 그러니까 풀이나 뜯어 먹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어린양을 가리키는 표현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암노스'로서의 어린양은 다르다. '암노스'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자 재림주로서의 어린양('아르니온')이 아니라, 희생 제물로서 바쳐지는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어린양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요1:29).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어린양이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어린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여기에서 '지고 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로'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은 '들어올린다'의 뜻에서 더 나아가서 죄를 '없이 한다. 제거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번역은 '세상 죄를 없이 하는(제거하는) 어린양'으로 번역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8. 예수께서는 어떻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셨는가?
그럼, 어떻게 되어서 예수께서는 하루아침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신 것일까? 사실 요한복음 1:29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튿날". 그렇다. 그것은 그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앞 구절(요1:25~28)을 보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므로 '이튿날'이란 표현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 다음 날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을 응시하여 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없이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렇다면 그와 예수님에게 전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은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선언한 것일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주었던 세례의 비밀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 전날이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말리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허락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성취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마3:15 직역)" 그러자 세례 요한이 그분에게 안수하면서 침례를 준다. 그의 머리에 안수하여 예수님의 몸을 물속에 풍덩 넣었다가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 여기에는 이러저러한 해석들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이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3:14). 여기서 '의'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인류의 죄를 그에게서 전가받아서 당신이 대신 죄인이 되고 그 죄를 해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죄를 전가받은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민21장의 놋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것이라고 하셨다(요3:14). 이는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서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다 죄없는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인류의 모든 죄는 어떻게 예수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안수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안수할 때에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그에게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 제사법에 그 과정이 들어 있다. 레위기 16장은 모든 백성이 지은 죄를 한꺼번에 용서하기 위한 속죄일 제사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는 두 마리의 속죄제 염소가 사용된다(참고로 염소나 양은 제물에서는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로 드리고, 또 한 마리는 광야에 있는 아사셀(광야의 마귀?)을 위한 속죄제로 사용된다. 이때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는 그냥 잡아서 그 피를 성소와 회막와 분향단에 뿌리거나 발라서 속죄하면 된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는 과정이 좀 있다. 먼저 대제사장이 자기의 두 손으로 안수하여서 살아 있는 속죄제 염소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둔 후에 미리 정한 사람을 통해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불모지의 땅에 이르렀을 때에 정한 사람은 그 염소를 광야에 놓고 돌아온다. 그러면 목이 말라서 아사셀 염소가 죽게 된다(레16:20~22).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백성의 속죄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세례 요한의 안수가 대제사장 아론의 안수와 같은 것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들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주자라고 언급하셨다.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1:13). 그리고 세례 요한은 둘째,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 곧 선지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마11:9). 왜 그런가? 그가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수고하는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그는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했다(마11:14). 이는 그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오실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 존재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실제로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의 24반차 가운데 8번째 아비야 반차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눅1:5~7,24). 그리고 그 시기에 사가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눅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여자가 낳은 자들 중에 제일 큰 자라고 했다(마11:11). 예수님 당시에 여자로서 세례 요한만큼 더 큰 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날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는 "보라!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오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이며, 이들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또한 쓰임받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쓰실 수 있지만 아무나 쓰시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서 내려보내는 자를 쓰신다. 그래도 가룟 유다처럼 결국 천국의 보좌 자리에서 탈락하는 이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하신 자로 하여금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더 성숙한 자를 내려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불러서 사용하시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것들을 결코 즐거워하지 않으며, 영적인 세계를 깊이 알고 있고, 또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끝까지 목숨을 다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나간다. 이런 자들이 있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께서 누군지에 관하여 세례 요한의 다섯 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의 것을 살펴보았다. 그는 예수님 더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그가 하루 전날에 인류의 죄를 그에게 전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3년 반 동안 세상 죄를 짊어지신 후에 때가 되자 영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뒤집어 쓰신 채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실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죄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 스스로 놋뱀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2022년 07월 26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