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짐에서 벗어나 진정 영생을 얻으려면(마11:28과 요5:40)_2018-04-22

by 갈렙 posted Apr 22,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srNEOtAKas8
날짜 2018-04-22
본문말씀 마태복음 11:28과 요한복음 5:40(신약 18면과 15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자유의지, 남겨진 자유의지, 회복된 자유의지, 주님께 나아가는 것의 의미,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 방종, 자유의지의 책임적 사용, 약한 형제를 위한 제한받는 자유의지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유의지가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러한 자유의지가 없다고들 말한다.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주장이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망과 저주를 택하지 말라고 하셨겠는가? 우리더러 꼭 생명과 복을 택하라고 말씀하셨겠는가? 우리가 주님 앞으로 전혀 나아갈 수도 없는 형편인데, 주님께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당신에게 나오라고 왜 초청하시겠는가? 그것은 사람이 타락하기는 했어도 구원을 위해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생명얻기 위해 주님을 선택할 정도)는 남아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 성령받으면 더 자유의지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을 자신의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 사용할 뿐만 아니라, 초신자들이 볼 때에 그들을 실족케 할 만한 선택을 하는 데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신자들은 그것을 보고 실족하든지 아니면 먼저 믿는 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지 않겠는가? 결국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이 그도 사망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의 사용에 관하여 올바른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가? 중세교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루터는 인간에게는 더이상 자유의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하였다. 만약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지가 결코 아니며,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가진 노예의지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칼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은 사실일까? 성경은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정말 인간에게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인간에게 남아있고 그리고 회복된 자유의지란 어떤 것이며, 이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라고 남겨두고 회복된 자유의지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가 공의의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결코 지옥에 보내지는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분이 한 번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찌하든지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아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잘못한 자를 심판하거나 벌을 주실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범죄를 마귀를 심판할 수 없고 불못에 보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셔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신 전능자이시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도 공의의 하나님도 되실 수가 있으시다(딤전2:4, 벧후3:9).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남아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구원을 강제적으로 집어넣지 아니하시며, 강제로 회개시키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록 타락했어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한 정도는 남아있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나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에게는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죄만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만 있다고 하였다. 인간이 정말 죄만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만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서 자기에게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실까? 목마른 자들은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는가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늪에 빠졌다. 자기의 힘으로 도무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더러, 거기에서 나오서 구원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다 자기를 향해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안식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했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비록 아담이 타락하였고, 죄된 본성이 인간을 채우고 있어도, 인간에게는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남아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붙들 것인지 말 것인지, 예수님께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4. 칼빈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 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그렇다면, 칼빈은 왜 인간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을까? 구원을 위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 무능의 상태에 있기에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롬3:10이하의 말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보라는 것이다. 여기에 보니, 선을 행하는 단 한 명의 인간이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그런데 아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대한 인용구절인 전7:20의 말씀은 칼빈이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한 것임을 말해준다. 사도바울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7:20)"는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곧 선만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치 아니하는 그러한 의인은 없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죄된 본성에 따라 죄를 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 아래에 놓여있다는 뜻이다(롬3:9). 그런데 칼빈을 이것을 왜곡시켜버렸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되 하나도 없다고 교리화시켜버린 것이다. 아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부모를 공경할 줄 알며, 거짓말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재산을 난민이나 고아를 위해 기꺼이 기부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은 비록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죄를 짓기 마련인 죄인이라는 뜻인 것이지, 선을 행하는 자가 한 명도 없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만약 인간들 중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이, 전적으로 다 타락해버렸고 전적으로 다 무능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면 안 되는 것이다.

신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구원할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그분을 의지하여 구원받을 수는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생명과 복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자가 결국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구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5. 성령이 오심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구약시대의 자유의지만으로는 인간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붙들어 구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이제는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또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주님께서 내 속 내 육신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보다 더 강력한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주심으로 자유의지가 더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은 자는 훨씬 더 양심이 깨끗해지며, 더 많은 본래의 자유의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회복된 좀 더 나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믿게 해주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해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 이 말은 인간이 피곤해 지쳐 있으며 이미 무거운 짐에 눌려있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비로소 주님을 선택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안식을 주시고 영생을 주실 수가 있다는 뜻이다.

 

6.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를 남겨두셨고 또 회복시켜 주었는가?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조금은 남겨두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더 회복된 자유의지를 주셨건만 그러한 자유의지를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쪽에 사용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회복된 자유의지를 가지고 육신의 본성을 따라가고 죄를 짓는데에 사용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왜 하나님께서 의지를 조금은 남겨두셨고 또 회복시켜주었는가를 말이다.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더 육체를 따라가고 세상을 따라가고 죄를 지으라고 남겨두신 자유의지인가? 그리고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폐지함으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으니 마음껏 죄지으라는 자유의지인가? 아니다. 그 반대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반드시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까, 오히려 그것을 사용해서 생명을 택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을 의지하라는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믿는 자들마저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 때문에 타인의 자유의지의 선택적인 권한을 오히려 침해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자유의지이니만큼 내 뜻대로 사용할 것이야 하면서 자유의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생명을 선택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을 초신자가 보았다고 치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실족하든지 육신을 따라가되 태연하게 죄를 짓는데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버릴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의 종이 술을 먹었다고 치자. 그것을 본 초신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실족할 것이다. 그 다음주터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믿는 성도들은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집안사정으로 인하여 어느날 주일을 빠졌다고 치자.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초신자의 마음이다.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주일은 집안일이 생기면 빠질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결국 그로 하여금 생명을 선택하도록 자유의지가 주어졌음에도 그는 이 사람 때문에 사망을 택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러면 바로 우리가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그러므로 내가 가진 자유의지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자유의지를 내 맘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명을 택하는 쪽에서 그 자유의지를 사용해야지 그 반대쪽에 써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든지 죄를 대범하게 짓도록 교육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7. 나오며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그나마 남겨두신 자유의지는 그것을 가지고 죄짓는 데 사용하라고 주신 자유의지가 아니다. 그것 가지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주신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믿고 성령받은 자는 더 회복된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의지로 주일을 빠지고 예배시간에 지각하라고 주신 자유의지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자유의지로 술먹고 마약하라고 주신 자유의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사용해 자신도 구원을 얻고 남들고 살리라고 주신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니 내 맘대로 그것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그것을 육체가 편한 데에 사용하고, 주일을 힘써 지키지 않는 데에 사용하고,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데에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지쳐 있는 상태라고 주님께로 나아가 생명을 얻기위해 주어진 자유의지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늘도 내가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해 육체가 편안히 지내는 데에 사용한다면, 예를 들어 주일날에 놀러가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자유의지라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사망과 저주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고치라. 자신의 삶이 초신자들에게 모범된 삶을 사는 데에 그러한 자유의지를 사용하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데에 그러한 자유의지를 사용하라.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회복된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건투를 빈다.

 

 

 

2018년 4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Articles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