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고 하는 이름만 가진 [사데]교회(계3:1~6)_2018-07-08

by 갈렙 posted Jul 0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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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GXOo3hC1u7E
날짜 2018-07-08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3:1~6(신약 40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사데교회, 살아있다고하나죽은교회, 종교개혁시대의교회,행함없는신앙을따라간교회,지도자의잘못,두아디라교회,버가모교회,믿음과회개,예정론과구원,회개의중요성

사데교회,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어있는 교회라고 책망받은 교회다. 그런데 한때 사람들은 이 교회의 유형이 중세시대의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데교회는 지금 우리 개신교회(개신교회)의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왜 사데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자기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주님으로부터 엄하게 책망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그것도 주님이 도둑처럼 갑자기 임하여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겠다고 엄히 책망하신 것인가? 이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한 편으로 이러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 희게 하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살아있다고 명성을 자자하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교회, 만약 그대로 쭉 진행된다면 결국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는 교회에 관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교회가 교회되게 하려면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고 가신 일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하든지 교회를 잘 세워야 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운 목적대로 교회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시고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 반대로 어떤 교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버리시는 교회가 되는 것일까? 한국교회는 1885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와서 세운 교회들이다. 1885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리고 133년이 흘러갔다. 과연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7가지의 교회유형 가운데 한 가지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의 상태는 어떤 교회의 유형 안에 속해 있으며, 계속 이대로 있으면 어떤 교회가 될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상황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A.D.95년경 소아시아 지역에는 어떤 유형의 교회들이 있었는가?

  이 땅에는 수많은 종류의 교회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교회의 유형에는 어떤 교회의 유형이 있을까? 교회를 나누는 기준과 방식에 따라 여러가지 유형들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어떤 유형으로 보시고 있을까? 그것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A.D.95년경 사도요한에게 써보내라고 했던 편지들을 살펴보면, 이 세상에는 어떤 유형의 교회들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사도요한의 편지에는 7가지 교회가 쭈욱 등장한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 교회들이다. 그런데 A.D.95년 당시 소아시아에는 방금 언급한 7가지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골로새교회, 히에라볼리교회 등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들 중에서 7개의 교회들을 말씀하셨고, 그중에 한 교회가 바로 오늘 다루게 될 사데교회라는 교회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데교회를 향하여 엄한 꾸중과 책망을 하신다. 그것도 단순한 꾸중과 책망 정도가 아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한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을 만큼의 그 교회에 중한 상태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대체 사데교회는 무슨 잘못을 범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교회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을까?

 

3.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데교회는 두아디라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사이에 있는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명성)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죽은 교회라고 하셨다. 왜 이런 책망을 받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그 교회에서 온전한 행위들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 교회가 더럽혀진 옷을 입은 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던 자들이다(계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도둑처럼 가시어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경고 가운데서도 우리들에게서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는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들이 지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는 더렵혀진 옷을 입은 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사데교회는 왜 엄중한 책망을 받았으며, 오늘 우리 교회는 사데교회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믿는 이들 중에 자신이 사데교회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은 절대 그러한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사데교회를 책망하실 때에 들려주신 2가지의 조건들을 다시 보라. 과연 우리에게 믿음에 따른 행함의 열매들이 발견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날마다 지은 죄들을 회개하여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겉옷들을 씻어 희게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언제부턴가 예수믿는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예정)과 믿음으로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구원론이 제대로 된 구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이러한 구원론이 제대로 된 구원론이라고 한다면, 사데교회는 결코 책망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 하늘의 생명책에 이미 자기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성령을 통해서 교회의 사정을 깊이 감찰하고 계시고, 오른손으로 주의 종들을 붙들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도둑처럼 임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벼르고 계셨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어떠한 믿음의 행위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실 상당히 심각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과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 들어와서 어떤 교회가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외치고  있는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상숭배하고 음행하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말하는 교회를 들어보았는가? 또한 "예수님을 믿어도 믿음에 따른 행함이 열매가 없으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일지라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회를 보았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자신의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외치는 교회를 보았는가? 그런데, 사데교회가 그렇게 되기에 충분한 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한 책망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어떤 유형의 교회요, 어떤 시대에 속한 교회를 가리키는가? 신학자들 중에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들의 모습은 초기사도시대의 모습부터 말세시대의 교회의 유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에베소교회 : 기독교초기 사도시대의 교회(A.D.31~54/81)  *54년은 네로황제의 통치 시작년도, *81년은 도미시안황제의 통치 시작년도

2)서머나교회 : 로마박해시대의 교회(A.D.54/81~313)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연도

3)버가모교회 : 로마국교시대의 교회(A.D.313~590) *590년은 제1대 로마교황 그레고리1세가 즉위한 연도

4)두아디라교회 : 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A.D.590~1517) *1517년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연도

5)사데교회 : 종교개혁시대의 교회(A.D.1517~현재)

6)빌라델비아교회: 회복 및 선교시대의 교회(A.D.1700~1900) *1700년은 영국에서 자유의지와 회개를 강조한 연도(존 웨슬리는 1703~1791년 사람임)

7)라오디게아교회: 말세시대의 교회(A.D.1900~재림전) *1900년은 기독교교단이 사라지고, 성령운동과 같은 은사운동이 시작된 연도.

 

  이상의 교회사적인 증거들을 살펴보면, 결국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이후(A.D.1517~현재)의  교회상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루터(A.D.1483~1546)가 종교개혁을 했을 때에는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강조했었다. 그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붙힌 95개 반박문 가운데, 적어도 11개조항이 회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개혁을 바톤을 이어받은 칼빈(A.D.1509~1564)은 다시 중세시대의 구원론을 다시 가져왔으니 그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행함이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이미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이니) 구원얻는다는 생각이 팽대해지기 시작하였고, 회개없이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생각(하나님이 작정한 것은 틀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영락없이 사데교회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5. 사데들 안에 있는 자신의 겉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누군가?

  그런데 사데들 안에 자신의 더러운 겉옷을 씻어 흰 옷을 입고 다니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더럽혀진 옷을 깨끗하게 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아, 사데교회가 주의 종들과 성도들 모두가 잘못된 구원론에 빠져 있었지만, 그 교회 안에는 참된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몇 몇의 성도들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데교회 안에 그러한 성도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더라도 "사데에"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라(계3:4). "사데 안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계3:4)" 하지만 이것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자신의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나온다. "사데들 안에 자기들의 겉옷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던 몇 명이 있어...(계3:4)" 그렇다. 사데교회 안에 겉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데라는 도시 안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데와 같은 도시들 안에 그러한 몇 명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데교회와 같은 가르침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자기들의 죄로 더럽혀진 겉옷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 희게한 자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다만, 사데들 곧 사데와 같은 다른 지역들 안에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데교회 바로 앞에 소개되고 있는 두아디라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두아디라교회는 중세 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에도 "두아디라들 안에 남아 있어, 그 교훈(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한...(계2:24)"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두아디라는 이미 주의 종들마저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있기만하면 우상숭배해도 천국가고, 음행을 저질러도 천국간다고 가르치던 시기였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평신도들은 주의 종들(신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마리아도 숭배하고, 성인들도 숭배하고 그리고 죽은 자들도 숭배하고, 성물을 숭배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지옥에 떨어질 우상숭배의 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성경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는 두아디라교회 안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자는 다만 두아디라들 안에 있었던 것이다. 즉 두아디라와 같은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 두아디라교회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6. 사데교회같은 유형의 교회, 과연 무엇이 무엇인가?

  바른 구원론이 아니라 거짓된 구원론이 가르쳐지고 있는 시기에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회가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데, 거기서 아니라고 외친다고 한들 그것이 교회(교회의 지도자들)를 바꿀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취급받아 퇴출당하거나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는 두아디라교회 안에 있지 아니하였고, 사데교회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아디라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사데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나 사데교회나 똑같이 다 지도자들도 타락하고, 성도들도 타락한 동일한 유형의 교회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나 음행을 저질러도 다시말해, 십계명을 어겨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 시기의 교회라고 한다면, 사데교회는 살아있다는 그 명성이 알려주듯이, 겉으로는 정통신앙이라고 하는 구원론을 따르고 있다고 믿기에, 자신이 이단적인 가르침(이세벨의 교훈)안에 있지 않으며, 정통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니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기의 교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스로가 깨어있다고 하는 개신교회(개혁교회) 성도들은 두아디라교회에 있는 성도들(로마카톨릭교회의 성도들)을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는 이름의 교회 안에 있으니까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한다. 사데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라. 믿음이 있어 자신의 이름이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뒤따르지 아니한 자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결국 자신의 더럽혀진 행실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날까지 두아디라교회(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나 사데교회(종교개혁이후시대의 교회) 안에 남아 있어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의 구원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사데교회가 어떤 유형의 교회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명성을 가진 교회 즉 정통이라는 이름 하에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가진 이들의 교회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무섭게 들린다. 속히 도둑같이 임하여서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버리시겠다고 경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계3:5b).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시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계3:5c). 더럽혀진 채 있는 그들의 행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는 천국의 흰 옷을 입혀주지 않으시겠다고 경고하지 계시기 때문이다(계3:5a).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남들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날마다 더렵혀진 자신의 행실을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어 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름만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론에 따라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날마다 지은 죄들을 회개함으로 자신의 더럽혀진 행실을 깨끗케 해야 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7월 8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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