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으려면 예수만 잘 믿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는 자신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예수를 믿고 있으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혹 죄를 짓고 있어도 예수를 믿고 있으니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므로,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맞는 것일까? 오늘 이시간에는 우리가 그동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구원론의 위험성과 아울러 올바른 구원관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영리와 같은 전도지에 따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죄. 거기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고 예수영접기도 순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한 가지 더 순서가 있다. 그것은 "당신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주고 받는 것인데, 이것을 일컬어 "구원의 확신" 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는 교리가 대부분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칼빈의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를 주입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순복음같은 오순절 교단에서는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르친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순복음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못하게 되면 그는 거기에서 버티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방언을 받기라도 하는 날에는 하늘이 떠나갈듯이 기뻐한다. 이제 구원받은 증거를 자신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관도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혹시 알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우선 살펴볼 것은 그동안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들어왔던 성경구절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럼,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사용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보자. 요5:24, 요10:28~29, 엡2:8~9, 눅10:20은 이런 성경구절의 대표격인 성경구절일 것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봐라. 여기에 보니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느냐?(요5:24).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니라 이미 얻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또한 "봐라.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느냐?(엡2:8~9) 그러니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자는 주님께서 결단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사람을 주님께서도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았느냐(요10:28~29)고 한다. 한편 오순절계통의 사람들은 눅10:20을 인용하여,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자는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고 한다. 더불어 이처럼 성령을 받아 새 방언을 말하는 자도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갸우뚱거리는 네 마음을 신뢰할래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믿을래?"라고 한다. 그러면 모두 다 "성경을 믿어야지요."하면서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주장들이다. 이 말은 위의 성경구절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성경구절들에 대한 해석이 바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구절과는 정반대되는 성경구절도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음으로 그만 값싼 구원론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제, 요5:24과 엡2:8~9의 구절을 바르게 풀어보자. 이것을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면 이렇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고 또 나 보내신 이를 (계속해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며, 심판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엡2:8-9 (왜냐하면) 너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희로부터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들로부터 난 것도 아니니 그것은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 요5:24의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믿는 자가 영생을 이미 받았다(완료형)는 뜻이 아니라 "영생을 갖는다. 구원을 받는다.(현재형)"는 일종의 선언같은 것이다. 둘 다 완료형이 아니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구문들이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한 번 들은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듣는 것을 의미하며, 계속해서 믿는 자를 가리킨다. 한 번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한 것이 천천만년까지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하고 있다가도 듣지 않으면 영생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고, 주님을 믿다가도 어느날 믿지 않게 된다면 영생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원칙은 사도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엡2:8~9에서도 동일하다. 이것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일종의 선언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10:28~29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께서 영생을 주시되, 과연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앞구절에 나와 있다. 영생을 받는 자는 아무나가 아니라 어떤 조건을 가진 자였던 것이다.
요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계속해서) 들으며 나는 그들을 (계속해서) 알며 그들은 나를 (계속해서)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는(이것도 일종의 선언이다) 주님의 음성을 한 번만 듣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듣는 자이며, 계속해서 주님의 따르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아신 바 되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울러 눅10:20에 기록된 말씀처럼, 하늘의 생명책에 이미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경우도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출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결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내가)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문제는 이러한 경고의 말씀이 있다는 것조차 가르쳐주지도 않을 뿐더러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계3:5의 말씀은 A.D.95년경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직접 들려준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이기는 자만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도 죄와 사탄마귀의 유혹에 넘어지는 자는 결코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을 믿어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가 계속된 사탄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어느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면 그는 지는 자가 될 것이며, 만약 죽는 순간에서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따논 당상이 결코 아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여 병든 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하나의 증거요 표적일 뿐이다.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지는 않는다. 자, 여기 예수님의 말씀을 보라.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믿는 자는 무조건 이미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 즉 이중예정론과 견인교리에 빠져있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살다간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 사도들의 가르침에 나오는 구원이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구원(헬라어로 '소테리아')라는 단어는 "어떤 위험한 상황이나 죽음의 위기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것, 구출받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이 말은 병든 자가 낫게 될 때도 사용되었고(눅8:48), 귀신에게 붙들린 자가 놓임받을 때에도 쓰였다(눅8:36). 이러한 경우에 '구원'이라는 단어는 '치료받다' 혹은 '해방을 받다. 놓임을 받다'라는 뜻이 된다.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열두해 혈루증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눅8: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그런데 '구원(소테리아)'라는 단어가 교회의 사도들에 의해서 사용됨에 따라 그 단어가 기독론적인 용어로 쓰이게 된다. 마치 '믿음'이라는 단어가 믿기는 믿되 예수를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는 것을 가리키는 기독교적인 용어가 되었듯이 말이다. 이때 '구원(소테리아)'라는 단어는 궁극적으로 크게 2가지 개념을 의미하게 된다. 하나는 구원이 육신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 것이고, 또 하나는 구원이 다른 것에서가 아니라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출받는 것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구원의 정의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딤후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자신을 모든 악한 일들 곧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어 주실 것과 그리고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해주실 것을 소망했던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는다는 단어에 대한 바른 정의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결국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나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라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 결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다. 만약 오늘 믿고 회개하고 죽는다면 그는 아마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믿는 즉시 죽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면 사탄마귀는 믿는 자가 평안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가만히 놔두겠는가? 과거에는 자신의 자식(요8:44)이었는데, 하나님의 자식이 되겠다고 첫걸음을 뗀 자를 고스란히 보내주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어떤 자라도 미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진행형이지 결코 완료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시작될 수 있겠지만, 구원은 사람이 죽어서 받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롬8:24).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켜내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마10:22).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하며, 죄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것을 이겨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사탄의 유혹을 받아 지은 죄가 있다면 그 죄를 회개해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믿어도 죄를 가지고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을 이야기할 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구원'을 '칭의(稱義)'와 동일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구원과 칭의는 공통분모가 있기는 하나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강조하다보니, 이신칭의가 곧 구원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무엇인가? 이신칭의란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죄된 본성을 소유하고 있고 또한 그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들을 맺고 있다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믿음으로 의롭다라고 칭함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롬3:24, 갈2:16). 실제의 우리의 삶은 비록 의롭지 못하지만 이미 구주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 곧 외적인 신분의 변화가 바로 이신칭의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다시 말해 칭의는 사람이 의롭게 되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을 뿐이다. 사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율법을 다 지켜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킬 수는 없었다. 사실 율법은 자신이 죄인된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지 결코 지키라고 주신 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롬3:20).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렇듯 이신칭의란 우리가 이 세상을 탈출하여 저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준비해주는 전초작업이다. 믿는 자들은 이신칭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완전히 구원받도록 해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아니다. 구원은 의롭다하심을 포함하고 있지만, 의롭다하심 자체가 구원은 아닌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라.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사실 모든 죄인들은 예수님의 피의 옷을 입어서 이 세상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죄로 인한 그분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신칭의란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의 한 영역에 불과하다. 이신칭의 자체가 곧 구원을 완성해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노정에서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믿는 자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구원은 안전하다거나 완료되었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떨어질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한 번 살펴보자. 애굽에 있을 때에 그들은 애굽의 바로왕에게 종노릇을 하였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당신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출해내신다. 우선 애굽에 내린 9가지 재앙에서 보호해주셨고 이어 유월절양을 잡아 그 어린양의 피를 자기집 좌우인방에 바르게 하여 10번째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다(출7:14~12:28).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에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땅으로부터 탈출시키신다. 그렇지만 바로와 그의 군대는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바로와 그의 군대들을 홍해로 불러내어 수장시키심으로 바로의 세력을 끝내버리고 마신다. 이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지만 바로와 그의 군대가 남아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자일 뿐이지 결코 자유인의 신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바로의 세력으로부터 탈출하여 광야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보라. 이러한 과정이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피로 이신칭의를 받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신칭의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유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행하던 우상숭배는 우리 인간의 범죄를 상징하고, 애굽에 있는 사람들이 받았던 10가지 재앙들과 장자죽음의 재앙은 곧 죄로 인하여 인간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며, 바로와 그의 군대가 물속에 수장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된 것은 우리가 사탄과 그의 세력인 귀신들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상징한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은 것은 교회생활을 의미하며,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상징하고,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은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신칭의를 받아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나는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확정지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탈출하되 광야인 교회로 들어가서 신앙생활하다가 결국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일종의 탈출이다. 엑소더스이다(눅9:31). 마귀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우리가 마귀가 통치하고 있는 이 세상을 탈출하여 주님이 하늘에 마련해 두신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으나 그들의 99.9%는 광야에 엎드려져 죽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광야에 엎드려져 죽었던 자들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형벌을 받아서 광야에서 죽었던 자들이다. 이들은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 다음 성경구절을 보라.
유1:5,7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두번째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형벌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죽은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로 나왔으나 애굽생활을 버리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믿지 아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광야에 나왔지만 또다시 애굽에서 했던 것처럼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출32: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애굽에서 구출해내셨지만 그들은 애굽에서 했던 우상숭배를 그대로 재현하여 송아지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이다(출32:34~35).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잘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차라리 광야에서 죽어버리거나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불평했다민14:1~4). 결국 하나님께서는 일주일만에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땅인데도 불구하고 범죄한 그들이 죽을 때까지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리셨다.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비록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신칭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여정에 들어섰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으니 그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히3:17~4:1).
히3:17-4:1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렇다. 이러한 사례를 오늘날로 바꾸어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처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자 값없이 그리고 믿음으로 이신칭의를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그 뒤에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하늘에 마련해두신 천국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고 칭함받는 의의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또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천국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광야와 같다. 교회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장소다. 하지만 교회가 곧 천국은 아닌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아 천국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교회가 천국은 아닌 것이다. 천국이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땅이 바로 천국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마련해 두신 천국을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자들을 천국에 어찌하든지 억지로라도 데려가실 것 같은가? 천무당만부당한 말씀이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도의 견인교리는 틀린 것이다. 그렇다. 애굽에서 탈출한 것은 우리가 이싱칭의를 받는 것과 같다. 이신칭의는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이여, 비록 우리가 의롭다칭함을 받았던 자라 할지라도 천국에 못들어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말처럼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것이다(빌2:12). 어느 누구도 그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안전한 구원은 없다. 과거의 죄된 삶에서 빠져나와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두지 아니했던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들을 광야까지 인도해 내셨는가? 그런데 그들이 어찌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을 숭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 곧 가나안땅을 주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곧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곧 죽은 것과 같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약2:26). 그렇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도 계속해서 범죄한 채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이 들어갈 안식의 처소 곧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당신의 믿음을 체크할 때다. 예수님을 믿어도 한 번 믿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라. 믿음에서 파선하면 안 된다.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한 번만 들어서도 아니 된다. 계속해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이라고 하지 아니했던가! 예수님을 믿어서 비록 영생을 소유했다 하더라고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붙들고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주어진 영생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이다. 혹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는가? 그럴 때에는 회개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 회개하는 것이 너무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죄를 가지고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오고 사탄마귀로부터 어떤 유혹이 찾아오더라도 끝까지 믿으라.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나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내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죄짓지 말라. 특히 우상숭배하지 말라. 원망불평하지 말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를 못 믿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예수님을 믿고도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마귀의 유혹이 오면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버리라. 혹 넘어졌으면 그 즉시 회개하라. 그리고 하늘에 마련된 천국이 있음을 믿고 오늘도 자신의 가야할 길을 걸어가라.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