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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강론

 

 

총 서

1장 창 조 원 리

2장 타 락 론

3장 인류역사 종말론

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5장 부활론

6장 예정론

7장 기 독 론

 

 

원리강론Pt2

 

 

서 론

1장 복귀기대섭리시대

2장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3장 섭리 역사의 각 시대와 그 연수의 형성

4장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5장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

6장 재 림 론

 

 

 

 

 

 

 

 

 

 

 

 

 

 

 

 

 

 

 

 

 

 

 

 

총 서

 

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本意)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意)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의 발로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本 心)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 있지만, 유사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로마서 310 - 11)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慘境)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22 - 24)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 리는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邪心)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矛盾性)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 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墮落)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 간은 이와 같이 타락되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궁극(窮極)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을 두고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악이 도리 것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절대적인 정설(定說)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인간들은 선의 욕망을 일으키는 본심이 무엇이고 이 본심을 거슬러 악의 욕망을 일으키는 악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성을 갖게 하여 파멸을 초래케 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려는 이 무지(無知)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內外)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 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死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來世)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 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인간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無知)에서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 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하려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 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大別)햐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 러한 길을 지상(至上)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 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육신의 낙()을 즐기는 속인(俗人)의 기쁨은 청빈(淸貧)을 즐기는 도인(道人)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求道)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그가 이상(理想)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 곳이 바로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이제 과학(科 學)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本質)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現象)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 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적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實體世界)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理想鄕)에로 항행(航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現象世界)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本質世界)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哲人)들과 성현(聖賢)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 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그들이 제시한 주의(主義)와 사상(思想)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懷疑)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心靈)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蘇生)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이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온 인류의 구원(救 援)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殘虐無道)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基督精神)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中世封建社會)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클레시아(ecclesia)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財慾)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사회를 휩쓸어,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共産主義).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클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唯物思想)이다. 그리하여 기 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束手無策),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後裔)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 같이 형식화해 버린 현하(現下)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끝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 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社會惡)이 또 있다. 음란(淫亂)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사회가 현세인 들이 몰려가는 이 윤락(淪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 되고 분열되어, 패륜(悖倫)의 와중(渦中)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救援攝理)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宗 敎人)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질세계(本質世界)에 현상세계(現象世界)와의 관계는 비유건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 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 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理想世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現實)을 떠난 내세(來世)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적(心靈的)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宗敎)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 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 버리려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욕(幸福慾), 끈덕지게 도인(道人)들을 붙들어 오뇌(懊惱)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가당착(自家撞着)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현대의 종교가 무위화(無爲化)한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知性)이 최고로 계발(啓發)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缺如)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종교(宗 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행하심도 그가 메시아 됨을 알려서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 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無 知)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樣相)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의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眞 理)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며 절대적(絶對的)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 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本心)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宗敎)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와 같은 이유로 그 경서를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양각이(各樣各異)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오늘의 어떠한 종교도 현대인(現世人) 들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명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새 빛을 발하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聖書) 가운데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편 제3장 제5절 참조)

 

그러면 그 새 진리(眞理)는 어떤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無知)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사심(邪心)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악(善惡)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인간에 있어 ''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는 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떠한 정서(情緖)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서(無情緖)에서는 어떠한 의지(意志)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지()- ()- ()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實在性)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대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悠久)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救援)하시려고 애써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그 싸움은 바로 재물 빼앗기 싸움, 땅 빼앗기 싸움, 그리고 사람 빼앗기 싸움 등의 외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이 없이 한데 모여 한 국가를 이루고, 이제는 도리어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열강(列强)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유엔의 회원국가가 되게 함으로써, 함께 세계정부(世界政府)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국제관계가 하나의 경제문제를 중심하고 완화되어, 더불어 하나의 공동시장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날 문화면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이질성(理質性)을 극복하고 동서양(東西洋)의 거리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로 유통(流通)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民 主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내적인 이념(理念)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최종적인 이념의 싸움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오늘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이론도 실천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 援攝理)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唯心論)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唯物論)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에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 在)와 내세(來世)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靈的)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다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세우고 나아가는 그 누구도 마침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천성(天性)의 발로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인 사실에 부딪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을 현실세계에다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다 두고 가야 할 것임을 깨달을 때에는, 누구나 이 한 길을 통하여 하나의 목적지에서 하나의 형제로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眞理)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된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가지고 하나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이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兄弟愛)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자 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희생시킬 때에 느껴지는 불의(不義)한 만족감보다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도()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결코 그 이웃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형제애가 솟구칠 때, 도저히 그 이웃에 고통을 끼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시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그 사회의 인간에 있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가 인류 죄악 사를 청산한 새 역사의 시대에서 이루어 놓은 새 세계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聖 徒)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存在性)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地獄)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天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죄 없는 세계를 천국(天國)이라 할진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위에서, 인간이 타락(墮落)되었다는 사실과 이 타락은 인간이 생긴 이후에 되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인간시조가 타락하기 이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데 대한 답은 너무도 자명(自明)하다. 그에 관해서는 전편 제3장에서 논하겠거니와, 그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진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죄악세계(罪惡世界)를 이루어 무지에 떨어졌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 외 양면의 진리를 더듬어, 이 무지를 타개하면서 선()을 지향하여 분단히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인 지상천국을 되찾아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復歸)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인간을 그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復歸過程)에 있는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聖 書)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善惡果)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락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완전완미(完全完美) 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創造)하셨고 ,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그 들이 타락되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왜 그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시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15

우리가 피조세계(被 造世界)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데, 그와 같이 모든 법도(法度)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기간을 두시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오셨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에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긴절(緊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명확하게 풀려지게 될 때, 우리는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어떠한 주체,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이, 바로 타락인간(墮落人間)을 구원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文 化圈)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난해(難解)한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들은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주(求主)라는 정도의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뜻을 체득(體得)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학계(神學界)에서는 많은 논쟁을 벌여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 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救援)은 어찌하여 그 독생자(獨生子)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셔서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 贖)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救贖)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贖罪)가 필요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죄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重生)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그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의 기간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피로써 완전히 사죄(赦罪)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신도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죄 없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이루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기독정신(基督精神)은 점점 쇠미(衰微)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온 바 십자가 대속(代贖)의 완전 속죄(贖罪), 그 결과적 사실의 불일치(不一致)에서 초래되는 모순은 무엇으로써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하는 등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는 난문제(難問題)들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새 진리는 이에 대한 해답도 명백히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再 臨)하셔야 하며, 또 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과, 그때에 타락인간의 부활(復活)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하늘 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 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사(比辭)로써가 아니고 누구나 공통하게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요한복음 1625). 이러한 진리(眞理)로써만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성구(聖句)를 저마다 각양각이하게 해석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파 분열의 필연성을 지양(止揚)하고, 그것들을 통일할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經書)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성서(聖書)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요한계시록 1011)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 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이 분은 수십 성상(星霜)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창망(蒼茫)한 그 무형세계(無形世界)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인간으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孑 孑單身)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桂)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樂園)의 수많은 성현(聖賢)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天倫)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여기에 발표된 말씀은 바로 그 진리(眞理)의 일부로서, 이것은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범위의 것을 수록한 데 불과한 것이다. 때가 이르는 데로 더 깊은 진리의 부분이 계속 발표될 것으로 믿고 또 고대하는 바이다.

어둠길을 헤매던 수많은 생명들이 세계의 도처에서 이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받아 소생(蘇生)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어서 속히 이 빛이 온 누리에 가득 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장 창 조 원 리

 

 

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하여 석연(釋然)한 대답을 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본래 인간이나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구체적인 구극(究極)의 원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근본된 선결문제(先決問題)가 남아 있다. 그것은 결과적인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원인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과 우주에 관한 문제는 결국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서는 풀리지 않는 것이다.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광범하게 다루고 있다.

1 절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

. 하나님의 이성성상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피조세계(被造世界)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 마서 120)고 기록하였다. 마치 모든 작품은 그 작자의 보이지 않는 성품의 실체적인 전개인 것 같이, 피조세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그의 실체대상으로 전개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보아 그 작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 같이, 이 피조만물(被造萬物)을 보아서 하나님의 신성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알기 위하여,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보편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공통사실을 찾아 보기로 하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 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면,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모두 양성 음성 또는 양성과 음성의 중화에 의한 중성(中性) 등을띠고 있는데, 이것들이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원자(原子)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들도 양성 또는 음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들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물질의 분자(分子)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물질들이 또한 서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식물 또는 동물에 흡수됨으로써 그것들의 영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각각 수술과 암술에 의하여 존속하고, 또 모든 동물은 각각 수컷과 암컷에 의하여 번식 생존한다. 인간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을 창조하시고는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창세기218) 그의 대상으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야 선하다고 하셨다(창세기 131).

그리고 전리(電離)된 양이온이나 음이온도 또한 각각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결합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이, 수술이나 암술 또는 수컷이나 암컷들도 역시 각각 그 자체 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도 남성에는 여성성상(女性性相), 여성에는 남성성상(男性性相) 이 각각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삼 라만상의 존재하는 모양이 표리(表裏), 내외(內外), 전후(前後), 좌우(左右), 상하(上下), 고저(高低), 강약(强弱), 억양(抑揚), 장단(長短), 광협(廣狹), 동서(東西), 남북(南北) 등과 같이 모두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것도 모든 피조물이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서로 존재하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모든 존재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으로 인한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보다 근본된 또 하나의 이성성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알아야 하겠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외형(外形)과 내성(內性)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그 내성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성이 눈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 난 그 외형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꼴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후자를 형상(形狀)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상과 형상은 동일한 존재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형상은 제2의 성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틀어서 이성성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인간을 들어 보기로 하자. 인간은 몸이란 외형과 마음이란 내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타나 보이는 몸은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닮아 난 몸도 어떠한 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관상(觀相)이나 수상(手相) 외모로써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과 운명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에 마음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몸을 형상(形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마음과 몸은 동일한 인간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몸은 제2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틀어서 이성성상(二性性相)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존재가 성상과 형상에 의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성상과 형상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형(無形)의 내적인 성상이 원인이 되어 그것이 주체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형상은 유형(有形)의 외적인 결과가 되어 그의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 종적인 것과 횡적인 것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다시 인간을 들어 보자. 마음과 몸은 각각 성상과 형상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몸은 마음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명령하는대로 동()하고 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목적을 지향하여 생()을 유지한다. 따라서 마음과 몸은 내() (), 원인(原因)과 결과(結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과 횡() 등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피조물(被 造物)에도 그 차원은 서로 다르나, 무형의 성상 즉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무형의 내적인 성상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 또는주체가 되어 인간에 있어서의 몸과 같은 그의 형상적인 부분을 움직여서, 그 개성체(個性體)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을 가진 피조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게도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어떠한 목적을 지향하는 주체적인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육체는 그 개체의 목적을 위한 생()을 영위하게 된다. 식물에도 역시 그러한 성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개체는 유기적인 기능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각기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양이온과 음이온이 결합하여서 어떠한 물질을 형성하는 것도 이 두 이온들 속에 각각 그 분자(分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는 어떠한 성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陽子)를 중심하고 전자(電子)가 회전하여 원자(原子)를 형성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속에 각각 그 원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는 성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의 과학에 의하면,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는 모두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에너지가 소립자(素粒子)를 형성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그 에너지에도 그로 하여금 소립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성상적인 부분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와 같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갖추고 있는 그 에너지를 존재케 함으로써 모든 존재계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한 존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존재는 바로 모든 존재의 1원인으로서, 그 모든 것들의 주체적인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계의 이러한 제1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주체적인 성상과 형상을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바울이 논증한 바와 같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통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사실들을 추궁(追窮)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로서 모든 존재계의 제1원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 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의 제1원인 되신 존재인 하나님도 역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보아서도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도 계시다는 것을 바로 알 수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성성상과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본래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은 각각 본양성과 본음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양성과 본음성은 각각 본성상과 본형상의 속성(屬性)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성과 음성은 각각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내 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또는 종과 횡 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그의 대상으로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22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에 있어서의 양성과 음성은 각각 남성과 여성이라고 칭한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된 피조세계(被 造世界)는 마치 마음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 하나와 같아서,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有機體)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유기체도 성상과 형상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그의 성상적인 존재가 하나님이시요, 그 형상적인 존재가 피조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이 피조세계의 중심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창세기 127) 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男 性格 主體)로만 계셨기 때문에, 형상적인 여성격 대상으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17절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성구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아버지라 불러 그 격위(格位)를 표시하는 것이다.

상술(上述)한 내용을 요약하여 볼 때,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인 동시에, 본성상적 남성(男性)과 본형상적 여성(女性)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며, 피조세계에 대하여는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로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위에서 논술한 바에 의하여, 피조물은 모두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이러한 실체대상을 우리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적인실체대상이기 때문에 형상적 개성진리체라 하고,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상징적인 실체대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징적 개성진리체라고 한다.

개성진리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상적 남성을 닮은 양성(陽性)의 실체와 그의 본형상적 여성을 닮은 음성(陰性)의 실체로 분립된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분립된 개성진리체는 모두 하나님의 실체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기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아서 그 자체 내에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을 갖추게 되며, 그에 따라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을 함께 갖추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중심하고 본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요약하면, 피조세계는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창조원리에 의하여 상징적 또는 형상적인 실체로 분립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다. 즉 만물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상징적인 실체로 분립된 실체대상이요, 인간은 그것이 형상적인 실체로 분립된 실체대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내 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종과 횡 등 이성성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입각하여 동양철학(東洋哲學)의 중심인 역학(易學)의 근본을 알아보기로 하자.

역학에서는 우주의 근본은 태극(太 極, 無極)이며, 그 태극에서 음양(陰陽), 음양에서 금() () () () ()의 오행(五行), 그리고 오행에서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음양을 `()'라 이르고(一陰一陽之謂道), `'는 곧 `말씀'(道也者言也)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태극에서 음양 곧 말씀이 나왔고, 이 말씀에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태극은 모든 존재의 제1원인으로서 음양의 통일적 핵심이며 그 중화적 주체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을 요한복음 11 내지 3에 기록된 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이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한 그 내용과 대조해 보면, 음양의 중화적인 주체인 그 태극(太極)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신 하나님을 표시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창조원리(創造原理)로 보더라도 말씀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도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음양이 곧 `말씀'이라고 한 역학(易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다. 그 러나 역학은 다만 음양을 중심하고 존재계를 관찰함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태극이 음양의 중화적 주체인 것만을 밝혔을 뿐 그것이 본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에 의한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태극이 인격적인 신()이시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역학에 의한 동양철학의 근본도 결국 창조원리에 의하여서만 해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한의학이 점차 그권위를 더해 가게 되는 것도, 그것이 음양을 중심으로 한 창조원리적 근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절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및 사위기대

 

.만유원력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創 造主)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절대자(絶對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존재로 계시기 위한 근본적인 힘도 영원히 자존하는 절대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또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을 발생케 하는 힘의 근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의 근본된 힘을 우리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

 

.수수작용

 

모든 존재를 이루고 있는 주체(主 體)와 대상(對象)이 만유원력에 의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여기에서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과 작용 등을 위한 힘을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힘을 발생케하는 작용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 유원력과 수수작용의 힘은 각각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으로서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유원력은 종적(縱的)인 힘이요, 수수작용의 힘은 횡적(橫的)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피조물에 관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그 자체 내에 영존(永存)하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을 가지고 계셔서, 이것들이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이루어 영원한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이 수수작용의 힘에 의하여 그 이성성상은 영원한 상대기대(相對基臺)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기대 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은 영존하시며, 또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기 위한 모든 힘을 발휘하시게 되는 것이다.

한편 피조물(被造物)에 있어서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이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이루어 가지고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수수 작용의 힘에 의하여 그 2(二性)은 상대기대(相對基臺)를 조성하여 그 개성체(個性體)의 존재기대(存在基臺)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그 개성체는 하나님의 대상으로 서게 되며, 또 스스로가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도 발휘하게 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원자(原子)가 존재하게 되고, 그의 융합작용 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양() () 두 이온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분자(分子)가 존재하게 되며, 또 화학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편 양전(陽電)과 음전(陰電)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전기가 발생되며,모든 전기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식물에 있어서도 도관(導 管)과 사관(篩管)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식물체의 기능이 유지되며, 그의 유기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암술과 수술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번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도 수컷과 암컷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그의 생()을 유지하며 또한 번식 한다. 그리고 동식물간에 있어서도 산소와 탄산가스의 교환, 벌과 꽃의 수수작용 등에 의하여 그들은 공존(共存)하고 있다.

천체(天 體)를 보아도 태양과 혹성(惑星)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태양계(太陽系)가 존재하면서 우주형성을 위한 운행을 하고 있으며, 또 지구와 달도 서로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면서 공전(公轉)과 자전(自轉)의 운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동맥과 정맥, 호흡작용,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등의 수수작용으로써 그 생을 유지하고 있고, 그 개성체는 몸과 마음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존재하면서 그의 목적을 위한 활동을 한다.

그리고 가정에 있어서는 남편과 아내가, 사회에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국가에 있어서는 정부와 백성이, 더 나아가서 세계에 있어서는 국가와 국가가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른 것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그 양심(良心)의 힘만은 뚜렷이 그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기도 모르게 강력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할 때에는 즉각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타락인간에게 이러한 양심의 작용이 없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작용(良心作用)의 힘은 어떻게 되어 생기는 것인가? 모든 힘이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서만 생기는 것이라면, 양심도 역시 독자적으로 그 작용의 힘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양심도 어떠한 주체에 대한 대상으로 서서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양심의 주체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타락(墮 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수수(授受)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서로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과 수수의 관계를 맺어 그와 일체를 이루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룬 오직 한 분의 독생자로 오셨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그와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루게 되면 창조본성을 복귀하여 하나님과도 수수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그와 일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타락인간의 중보(仲保)가 되는 동시에 길이 되고 진리가 되며 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을 바쳐 사랑과 희생으로 모든 것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앞에 믿음을 돌려 드리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한복음 316).

기독교(基 督敎)는 사랑과 희생에 의하여 예수님을 중심하고 인간 사이의 횡적인 수수의 회로를 회복함으로써,하나님과의 종적인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복귀시키려고 하는 사랑의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72)라고 말씀하셨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고도 하셨으며,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태복음 1032)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1041)라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룬 사위기대

 

1. 정분합작용

 

만유원력(萬 有原力)으로 인하여 하나님 자체 안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수수작용의 힘은 번식작용을 일으키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다. 이와 같이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다시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수수작용을 하면, 이것들은 다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하나님의 또 하나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정()으로 하여 그로부터 분립(分立)되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고 한다.

 

2. 삼대상목적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 을 중심하고 2(二性)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合性體)가 제각기 주체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각각 나머지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세워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을 조성한다. 그래 가지고 그것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여기에서 그 주체들을 중심으로 각각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3. 사위기대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을 중심하고 2성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가 각각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게 된다.

사위기대는 4수의 근본이며, 또 그것은 삼대상목적을 완성한 결과이므로 3수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 위기대는 정분합작용에 의한 하나님, 부부, 자녀의 3단계로써 완성되므로 3단계 원칙의 근본이 된다.사위기대는 그의 각 위()를 중심하고 각각 3대상이 되므로 이것들을 총합하면 12대상이 되기 때문에 12수의 근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사위기대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선()의 근본적인 기대이므로,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와 또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따라서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목적이 되는 것이다.

 

4. 사위기대의 존재양상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루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완성한 존재는 무엇이든지 원형(圓形) 또는 구형운동(球形運動)을 하여 입체로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그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에 있어서, 그 대상이 주체에 대응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하면 그 대상은 주체를 중심하고 서로 주는 힘(遠心力)과 받는힘(求心力)으로써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 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주체를 중심하고 돌아서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하게 됨으로써 합성일체화한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그 주체는 하나님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아서 그와 합성일체화하고, 또 그 대상이 그러한 주체와 합성일체화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합성체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실체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그 대상은 그의 주체와 합성일체화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대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도 역시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도 똑같은 수수작용의 원리에 의하여 제각기 원형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체대상은 이와 같이 제각기 끊임없는 운동을 하고 있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원형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 원형운동은 이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 주체와 대상 자체들의 특수한 운동양상에 따라서는 동일한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는 그 주체를 중심하고 부단히 그 원형운동 궤도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원형운동은 드디어 구형운동(球形運動)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를 완성한 존재는 모두 원형또는 구형운동을 하게 되어 그 존재하는 모양은 입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태양계(太陽系)를 들어 보기로 하자. 태양을 주체로 한 모든 유성(遊星)들은 태양의 대상이 되어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태양을 중심하고 그에 대응하여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한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공전(公轉)의 원형운동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원형운동을 하는 태양과 유성들은 합성일체화하여 태양계를 이룬다.그런데 이성성상의 복합체인 지구가 자전(自轉)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양이나 태양을 중심한 다른 유성들도 또한 이성성상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부단히 자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전하고 있는 태양과 유성들의 수수작용에 의한 태양계의 원형운동은 항상 똑같은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하고 부단히 그 궤도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태양계는 구형운동을 하게 되어 입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모든 천체(天體)는 원형 또는 구형운동에 의하여 입체로써 존재하며, 이와 같은 무수한 천체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하여 이루어지는 우주(宇宙)도 역시 똑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형운동을 하게 됨으로써 입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原 子)를 형성하고 있는 전자(電子)가 양자(陽子)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양자를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것들은 원형운동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하여 원자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양자와 전자도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제각기 부단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양자와 전자의 수수작용에 의한 원형운동도 역시 똑같은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중심하고 부단히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운동은 드디어 구형운동으로 화하게 된다. 원자 역시 이렇듯 구형운동을 함으로써 입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전기에 의하여 양과 음 두 극에 나타나는 자력선(磁力線)도 똑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형운동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러한 예를 인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몸은 마음의 대상으로서 마음과 상대 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되면, 몸은 마음을 중심하고 원형운동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의 대상이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아서 그와 합성일체화 하고 몸이 이러한 마음과 합성일체화하게 되면, 그 개체는 비로소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실체대상이 되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도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자체들도 제각기 부단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몸과 마음의 수수작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원형운동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끊임없이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게 되어, 구형운동으로 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창조 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언제나 구형운동의 생활을 하는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무형세계(無形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는 것이다.(본장 제 6 절 참조)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 받는 평면적인 회로에 의한 원형운동이 다시 입체적인 회로에 의한 구형운동으로 화하는데서 창조의 조화는 벌어지는것이다. 즉 그 회로의 거리와 모양과 상태와 방향과 각도와 그리고 그들이 각각 주고 받는 힘의 속도 등의 차이에 의하여 천태만상의 조화의 미()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성상(性 相)과 형상(形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구형운동(球形運動)에도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의 중심에도 성상적인 중심과 형상적인 중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前者)와 후자(後者)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구형운동의 궁극적인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의 상징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중심은 인간이고, 그의 형상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므로, 피조세계의 구형운동의 궁극적인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제 이에 관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모든 실체대상(實 體對象)에 갖추어진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에 있어서, 그 대상의 중심이 그의 주체에 있으므로, 주체와 대상의 합성체(合性體)의 중심도 역시 그 주체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체의 궁극적인 중심이 하나님이시므로, 그 합성체의 궁극적인 중심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3대상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그것들의 3중심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되어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할 때 비로소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의 궁극적인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를 완성한 각개 피조물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개성진리체는 형상적 개성진리체(인간)와 상징적 개성진리체(인간 이외의 피조물)로 대별된다. 그리고 피조세계는 무수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있으며, 그 중 인간은 그 최고급의 개성진리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성진리체는 모두 구형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급한 개성진리체는 보다 고급한 개성진리체의 대상이 되므로, 이 대상의 구형운동의 중심은 보다 고급위(高級位)에서 그의 주체가 되어있는 개성진리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상징적 개성진리체의 중심들은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에로 연결되어 올라가, 그 최종적인 중심은 형상적 개성진리체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상고(詳考)해보자. 오늘의 과학은 물질의 최소단위를 소립자로 보고 있는데, 소립자(素粒子)는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물질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단계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들의 존재목적을 차원적으로 살펴보면, 에너지는 소립자의 형성을 위하여, 소립자는 원자(原子)의 구성을위하여, 원자는 분자(分子)의 구성을 위하여, 분자는 물질의 형성을 위하여, 모든 물질은 우주 삼라만상의 개체들을 구성하기 위하여 각각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의 운동의 목적은 소립자에, 소립자의 목적은 원자에, 원자의 목적은 분자에, 분자의 목적은 물질에, 모든 물질의 목적은 우주형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宇宙)는 무엇을 위하여 있으며 그의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주관하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28). 만일 피조세계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피조세계는 마치 보아 줄 사람이 없는 박물관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의 모든 진열품들은 그것들을 감상하고 사랑하며 기뻐해 줄 수 있는 인간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역사적인 유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인연적인 관계가 그것들 사이에 성립되어, 각각 그 존재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거기에 그 중심되는 인간이 없다면 그것들이 무슨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위주로 한 피조세계의 경우도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인 간이 있어 가지고 피조물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의 근본과 그 성격을 밝히고 분류함으로써 비로소 그것들이 상호간에 합목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나아가서는 인간이 있어야만 동식물이나 수륙만상(水陸萬象)이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성좌(星座)들의 정체가 구분되어 그것들이 인간을 중심하고 합목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은 인간의 육체에 흡수되어 그의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게 하는 요소가 되며, 삼라만상은 인간의 안락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피조세계에 대한 형상적인 중심으로서의 관계이지만, 이밖에 또 성상적인 중심으로서의 관계가 있다. 전자를 육적인 관계라고 하면, 후자는 정신적 또는 영적인 관계인 것이다. 물질로 형성된 인간의 생리적 기능이 마음의 지 정 의에 완전히 공명되는것은, 물질도 역시 지()- ()- ()에 공명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물질의 성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은 각각 그 정도의 차는 있으나, 모두 정 지 의의 감응체인 것이다. 우리가 자연계의 미()에 도취하여 그와의 혼연일체의 신비경(神秘境)을 체험하게 되는것은, 인간은 피조물의 이러한 성상의 중심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합성일체화한 자리가 바로 천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인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인간이 천주의 중심이 되는 것을 논하여 보자. 상세한 것은 제 6절에서 논하겠지만, 무형 유형 두 세계를 총칭하여 천주라고 하는데, 인간은 이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위에서논한 바에 의하여, 천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체와 대상의 두 가지로 양별(兩別)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시조로 창조되었던 아담이 완성되었더라면 그는 피조물(被造物)의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주체들을 총합한 실체상이 된고, 해와가 완성되었더면 그는 또 피조물의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대상들을 총합한실체상이 되었으리라는 결론을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리고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주관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다 함께 성장하여서, 아담은 피조물의 모든 주관주(主管主)로서 완성되고, 또 해와는 모든 대상의 주관주로서 완성되어 그들이 부부를 이루어 일체가 되었더라면, 그것이 바로 주체와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온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중심체였을 것이다.

또 인간은 천주의 화동(和同)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이성성상의 실체적인 중심체인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부부를 이루어 가지고 그들이 서로 화동하여 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이성성상으로 창조된 온 천주도 화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 담과 해와가 완성된 부부로서 일체를 이룬 그 자리가 바로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미()의 대상인 인간이 일체화하여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부모되신 하나님은 자녀로 완성된 인간에게 임재하시어 영원히 안식하시게 된다. 이 때의 이 중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원히 자극적인 기쁨을 느끼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실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진리의 중심이 되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본심의 중심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는 이와 같이 인간이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중심하고 합목적적인 구형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피조세계(被造世界)는 인간이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물도 탄식하면서 하늘의 뭇 아들들 즉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한 인간들이 나타나서 그의 중심이 되어줄 날을 고대한다고하였다 (로마서 819 - 22).

Ⅳ. 하나님의 편재성

 

위 에서 우리는,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완성한 사위기대는 하나님을 중심한 구형운동을 일으키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의,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의 실체로 되어 있는 피조물의 모든 개성체가 다 이와 같이 구형운동을 일으키어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되어 하나님은 일체의 피조물 가운데 편재하시게 되는 것이다.

 

Ⅴ. 생리체의 번식

 

생 리체가 존속하기 위하여는 번식해야 하며, 그 번식은 수수 작용에 의한 정분합작용으로 인하여 되어진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식물은 꽃씨로부터 꽃의 수술과 암술이 생기고, 그 수술과 암술의 수수작용으로 인하여 다시 많은 씨를 맺어서 번식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그 수컷과 암컷이 성장하여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 새끼를 낳아 번식하게 된다. 그리고 동식물의 모든 세포분열도 수수작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을 세워 놓고 마음이 원하는대로 몸이 실천하여 몸과 마음이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동지가 생기고, 동지들이 서로 잘 주고 잘 받으면 더 많은 동지를 번식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면에서 보면, 피조세계는 무형의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그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그것이 실체적으로 전개되어 번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Ⅵ. 모든 존재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

 

무 엇이든지 존재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어떠한 힘을 요하게 되는데, 그 힘은 수수작용에 의하여서만 생긴다. 그런데 무엇이나 단독적으로는 주고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존재하기 위한 힘을 일으키기 위하여는 반드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주체와 대상이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 리고 직선상의 운동에는 어느 때고 끝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존재는 영원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는 돌지 않으면 안 되고, 돌기 위하여는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 이성성상으로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대상인 피조물도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도 주기적인 윤회에 의하여 영원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3 절 창 조 목 적

 

Ⅰ.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피 조물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창세기 14 - 31),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피 조물이 어떻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만물세계를 창조하신 후, 끝으로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희노애락의 감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를 보시고 즐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식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하라(창세기 128)고 하신 3대 축복의 말씀에 따라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이루고 기뻐할 때에,하나님도 그것을 보시고 가장 기뻐하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3대 축복은 어떻게 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창조의 근본 기대인 사위기대가 이루어진 터전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완성하고, 3대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천국을 이룩함으로써 선의 목적을 완성한 것을 보시고 기쁨을 누리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45

 

그러므로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 드리는 데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이중목적을 지닌 연체인 것이다.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의 중심에는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중심이 지향하는 목적에도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어서, 그것들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성 상적인 목적은 전체를 위한 것이고, 형상적인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어서 전자와 후자는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목적을 떠나서 개체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개체적인목적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적인 목적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피조물은 이러한 이중 목적에 의하여 얽혀 있는 하나의 굉대한 유기체인 것이다.

 

Ⅱ.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관한 문제를 더 상세히 알기 위하여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을 때에 기쁨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기쁨은 독자적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무형이거나 실체거나,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작 가의 기쁨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구상 자체가 대상이 되든가 혹은 그 구상이 그림이나 조각 등의 작품으로 실체화하여 대상이 되었을 때, 그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낌으로써 비로소 생기게 된다. 이에 구상 자체가 대상으로 서게 될 때에는 그로부터 오는 자극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기쁨도 실체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성품은 모두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의 실체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시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위기대의 터전 위에서 3대 축복에 의한 천국이 이루어지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되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제 1축복은 개성을 완성하는데 있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려면,하나님의 이성성상의 대상으로 분립된 마음과 몸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그 자체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개체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하 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룬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고린도전서 316) 그와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요한복음 1420), 신성을 가지게 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그의 뜻을 알고 그대로 생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그 마음의 실체대상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된다. 이에 그 마음이나 하나님은 이러한 실체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제 1 축복을 이루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의 희노애락을 곧 그 자체의 것으로서 느끼게 되어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 범죄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제 2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개성을 완성한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아담과 해와가 부부가 되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룬 가정이나 사회는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의 모양을 닮게 되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의 실체대상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그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어 기쁨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제 2 축복을 이루면 그것도 또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제 3 축복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성상과 형상으로 본 인간과 만물세계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앞으로 창조하시게 될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형상적으로 전개하여 만물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하등동물에서부터 점차적으로 기능이 복잡한 고등동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최고급의 기능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동물의 구조와 요소와 소성도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인 간이 어떠한 동물의 소리도 다 낼 수 있다는 것은 곧 어떠한 동물의 발성기의 성능도 다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피조물의 형과 선의 아름다움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화가는 인간의 나체를 모델로 하여 화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인간과 식물을 놓고 보더라도 그 구조와 기능에는 차이가 있으나 모두 세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식물의 구조와 요소와 그의 소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즉 식물의 잎은 그 모양이나 기능으로 보아 인간의 폐에 해당된다. 잎이 대기 중에서 탄산가스를 흡수하는 것 같이 폐는 산소를 흡수한다. 식물의 줄기와 가지는 인간의 심장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양소를 전체에 공급한다. 그리고 식물의 뿌리는 인간의 위장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양소를 섭취한다. 더 나아가 식물의 사관과 도관의 형태와 기능은 인간의 동맥과 정맥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물과 흙과 공기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광물질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지구도 인체구조의 표시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지 구에는 식물로 덮인 지각이 있고, 지층 속에는 지하천이 있으며, 그 밑에 암층으로 둘러싸인 용암층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솜털로 덮인 피부가 있고, 근육 속에는 혈관이 있으며 그 밑에 골격과 골격으로 둘러싸인 골수가 있는 인체의구성과 흡사하다.

 

하 나님의 제 3 축복은 만물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성 완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인 인간과 그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피조세계가 사랑과 미를 주고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주관적인 4위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본장 제 5절 Ⅱ.3 참조).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만물세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 나님을 중심한 인간은 그의 실체대상인 만물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위와 같이 인간과 만물세계가 합성일체화하여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된 피조세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체의 본성상과 본형상에 대한 자극적인 감성을 상대적으로 느끼심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하나님의 제3축복을 이루면, 그것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또 하나의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 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졌다면 죄의 그림자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이상세계가 지상에 이루어졌을 것이니, 이러한 세계를 말하여 우리는 지상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차후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원래 인간은 지상천국에서 생활을 하다가 육신을 벗으면, 그와 동시에 영계에 가서 자동적으로 천상천국의 생활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바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천국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 하나의 모양을 닮은 세계를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마음의 명령이 중추신경을 통하여 그의 사지백체에 전달됨으로써 그 인체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이, 천국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류의 참부모를 통하여 모든 자녀들에게 전달됨으로써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4 절 창조본연의 가치

 

Ⅰ. 창조본연의 가치의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 50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그 대상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 주체의 욕구와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 왔던 일반적인 가치관이었다. 그 런데 어떤 개성체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그 자체 내에 절대적인 것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체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하고 어떠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주체의 창조본연의 가치추구욕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정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는, 그것이 인간 주체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 함으로써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되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러면 창조본연의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떤 대상과 인간 주체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룰 때 결정되는데, 이 사위기대의 중심이 절대자 하나님이시므로 이 가치의 기준도 절대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그에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어떠 대상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예 를 들면,꽃의 미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 꽃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미에 대한 창조본연의 추구욕이 합치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입각한 인간의 미에 대한 추구욕이 그 꽃으로부터 오는 정적인 자극으로 말미암아 충족되어 인간이 완전한 기쁨을 느낄 때 그 창조본연의 미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그 꽃으로부터 느끼는 기쁨이 완전할 때 그 꽃의 미는 절대적이다. 여기에 그 미의 추구욕이란 인간 자신이 그의 성상과 형상을 그의 대상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느끼려 하는 욕망을 말한다. 그리고 그 꽃의 창조목적과 그 꽃을 대하는 인간의 가치 추구욕이 합치되는 순간 그 대상과 주체는 혼연일체의 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가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그와 그를 대하는 인간주체가 혼연일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절 대적인 가치의 기준인 하나님과 상대적으로 결정된 만물들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대상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상대적이었던 것은, 그 대상과 그것을 대하는 타락인간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수수관계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 아니고 사탄적인 목적과 욕망을 중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Ⅱ. 창조본연의 지 정 의와 창조본연의 진 미 선 50

 

인 간의 마음은 그 작용에 있어서 지 정 의 의 세 기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그 마음의 명령에 감응되어 행동한다. 이것을 보면 그 육신은 마음 곧 지 정 의 의 감응체로서, 그의 행동은 진 미 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지 정 의 의 주체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실현욕에 의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본연의지 정 의에 감응하고, 몸으로 이것을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그 행동은 창조본연의 미 진 선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Ⅲ.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

 

1. 사랑과 미

 

하 나님으로부터 분립된 2성의 실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이루려 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제 3 대상으로 합성일체화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동적이요미의 자극은 정적이다.52

 

하 나님과 인간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시요 인간은 미의 대상이며, 남녀를 놓고 볼때에는 남자는 사랑의 주체가 되고 여자는 미의 대상이 된다. 피조세계에 있어서는 인간은 사랑의 주체가 되고 만믈세계는 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하면 미에도 사랑이, 사랑에도 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서로 돌아서 일체를 이루면 주체도 대상의 입장에, 대상도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에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윗사람의 사랑에 대하여 아랫사람이 돌리는 미를 충이라고 하고,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자녀가 돌리는 미를 효라고 하며,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아내가 돌리는 미를 열이라고 한다. 사랑과 미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양성이 사랑과 미를 주고받음으로 합성일체화하여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됨으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려는데 있다.

 

다 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을 중심하고 그의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완성된 아담과 해와가 일체를 이루어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부모의 사랑(1 대상의 사랑), 부부의 사랑(2 대상의 사랑), 자녀의 사랑(3 대상의 사랑) 등 창조본연의 3 대상의 사랑을 체휼해야만, 삼대상목적을 완성하여 사위기대를 이룬 존재들로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위기대의 3대상 사랑에있어서 그 주체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3대상의 사랑으로 나타나 사위기대 조성을 위한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4위기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를 체휼할 수 있는 완전한 미의 대상이요, 또 완전한 기쁨의 대상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2. 선 과 악

 

주 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되어 사 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선이라 하고,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배치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악이라고 한다.

 

예 를 들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주체와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하여 개인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한 개성체가 되어 하나님의 제 1 축복을 완성하게 될 때, 그 개성체나 또는 그러한 개성체를 이루기 위한 행위를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하고 아담과 해와가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조성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제2축복을 완성하게 될 때, 그 가정이나 또는 그러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행위를 선이라고한다. 또 개성을 완성한 인간이 어떠한 사물을 제2의 자아로서 그 대상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것과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 3 대상을 이루어 주관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제 3 축복을 완성하게 될때, 그 사물이나 또는 그 사물을 이루기 위핸 행위를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위와 같은 하나님의 3대 축복과 반대되는 목적을 이루는 행위나 또는 그 행위의 결과를 악이라고한다.

 

3. 의와 불의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의라고 하며, (사탄)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필연적으로 의의 생활을 요하게 되는 것으로서, 의가 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 절 피조세계의 창조과정과 그의 성장기간

 

Ⅰ. 피조세계의 창조과정

 

창 세기 1장을 보면, 천지창조는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서 빛을 창조하신 것으로 출발하여, 먼저 물을 궁창 위와 아래로 갈라 세우고, 다음에는 육지와 바다를 가르고, 다음엔 식물을 비롯하여 어류, 조류, 포유류, 인류 등을 창조하시는데 6일이라는 기간이 소요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피조세계의 창조가 끝날 때까지 6일이라는 시간적인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창조의 과정이 오늘날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우주의 생성과정과 거의 일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 학자들의 문헌에 의하면, 우주는 처음에는 가스상태로서 무수시대의 혼란과 공허한 가운데서 천체를 이루어, 비에의한 유수시대가 되면서 물로된 궁창을 형성하였고, 다음에는 화산의 분출에 의하여 물 속에서 육지가 들어나 바다와 육지가 생겼으며, 다음에는 하등의 식물과 동물에서 시작되어 순차로 어류, 조류, 포유류, 인류가 생성되었다고 하며, 지구의 연령을 수십억년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기록된 이 성경의 천지창조과정이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과 거의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이 기록이 하나님의 계시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우 리는 여기에서 우주는 시간성을 떠나서 돌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될 때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천지창조를 완료하기까지의 6일이란 기실 일출 일몰의 회수로 계산되는 6일이 아니라, 창조과정의 여섯단계의 기간을 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Ⅱ. 피조물의 성장기간

 

피조세계의 창조가 끝날 때까지 6일 즉 여섯 단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곧 피조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성체가 완성되는데 있어서도 어느만큼의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있는 천지창조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하루 하루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그 서수 일자를 밝힌 것이 있는데, 이 일자 표시에도 우리는 피조물의 완성에 어떠한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은 첫날의 창조를 마치시자 [저녁이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창세기 15)고 말씀하셨다. 저녁으로부터 밤을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둘째날일 것인데 첫째날이라고 한것은, 피조물이 밤이라는 성장기간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 완성된 후에야창조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첫 출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반드시 어느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인 바,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될 때 일정한 성장기간을 거쳐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56

 

1. 성장기간의 질서적 3단계

 

피 조세계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수리적인 원칙에 의하여 실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수리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면서 상대적인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3수적인 존재이시다. 따라서 한 하나님을 닮아 난 피조물은(창세기 127) 그 존재 양상이나 그 운동이나 또는 그 성장기간 등이 모두 3수과정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사위기대는 하나님, 아담과 해와, 그리고 자녀 번식의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된다. 그리고 4위기대를 조성하여 원형운동을 하려면 반드시 정분합 3단계의 작용을 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루고 3점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물체가 정착하려면 최소한 3점에서 지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이 완성됨에 있어서도 소생기, 장성기, 완성기의 질서적 3단계의 성장기간을 거쳐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그 러면 이제 자연계에서 3수로 나타나고 있는 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자연계는 광물과 식물과 동물로 되어 있고, 물질은 기체와 액체와 고체의 3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식물은 뿌리와 줄기와 잎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동물은 머리와 몸과 사지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또 성서에 보여지는 3수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인간은 성장기간의 3단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됨으로써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다시 이루는데 있어서도 이 3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러므로 복귀섭리는 3수를 찾는 섭리를 하셨고, 따라서 성서에는 3수를 중심한 섭리의 기록이 많이 있다. 성부 성자 성신의 3, 낙원의 3, 누시엘 가브리엘 미가엘의 3천사, 방주의 3, 노아홍수 때의 3차의 비둘기, 아브라함의 3제물, 이삭 헌제의 3, 모세 때의 어둠의 재앙 3일간, 출애급노정을 위한 3일간의 사탄 분립기간과 가나안복귀를 위한 3차의 40년 기간,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호수아를 중심한 사탄분립의 3일 기간, 예수님의 30년 사생애와 3년 공생애, 3인의 동방박사, 그들의 3예물, 3 제자, 3대 시험, 겟세마네의 3 차례의 기도와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3차의 부인,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의 세 시간의 어둠과 3일 만의 부활 등 그 예는 허다하다.

 

그러면 인간시조는 언제 타락되었는가? 그들은 성장기간 즉 미완성기에서타락했던 것이다. 인 간이 만일 완성된 후에 타락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선의 완성체가 되어가지고 타락하였다면 선 자체도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이요, 따라서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도 역시 불완전한 분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창세기 2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죽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아직 미완성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물세계가 6일이라는 기간을 지나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도 역시 그러한 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성장기간의 어느 단계에서 타락되었던가? 그것은 장성기의 완성급에서 타락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 시조의 타락을 전후한 제반 사정과 복귀섭리역사의 경위가 실증하는 바로서, 본서의 전후편을 두루 연구하는데서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2. 간접 주관권

 

피조물이 성장기에 있을 때에는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원리의 주관자로 계시면서 피조물이 원리에 의하여 성장하는 결과만을 보아서 간접적인 주관을 하시므로, 이 기간을 하나님의 간접주관권 또는 원리결과주관권이라고 한다.

 

만믈은 원리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기간(간접주관권)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 그러나 인간은 원리자체의 주관성이나 자율성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기간을 경과하여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즉 먹 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보면, 인간시조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어 따먹지 않고 완성되는 것이나 그 말씀을 불신하여 따먹고 타락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따 라서 인간의 완성 여부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책임수행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로서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성장기간(간접주관권)을 다 경과함으로서 완성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책임분담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간섭하셔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 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서만 완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성까지도 닮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에 가담케 하심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시듯이, 인간도 창조주의 입장에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의 권한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창세기 128). 인간이 만믈과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음으로써 천사를 비롯한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간접주관권을 두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되어 이러한 주관성을 갖지 못하게 된 인간들도 역시 복귀원리에 의하여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사탄을 비롯하여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하기 위한 그 간접주관권을 다 통과하지 않으면 창조목적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그처럼 오랜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 나온 것은, 복귀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들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항상 실수를 거듭하여 왔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은사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인 믿음을 세우지 않으면 그를 찾아온 구원섭리는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부활의 혜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었고, 그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인 것이다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8, 로마서 51).

 

3. 직접주관권

 

직 접주관권이란 어떠한 것이며 또 이것을 두고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어떠한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하여 4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 가지고, 주체의 뜻대로 사랑과 미를 완전히 주고 받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직접주관권은 곧 완성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직접주관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 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주관권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아담 해와가 완성되어 가지고 합성일체화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이루어,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의 뜻대로 서로 사랑과 미를 완전히 주고 받는 선의 생활을 하게 될때, 이것을 하나님의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의 뜻을 완전히 알고 실천하게 되므로, 마치 두뇌가 명령 아닌 명령으로 온 몸을 움직이는 것 같이, 인간도 하나님의 명령 아닌 명령에 의하여 그의 뜻대로 움직여서 창조목적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만물세계에 대한 인간의 직접주관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이 만물세계를 대상으로 세워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일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의 뜻대로 인간과 만믈세계가 사랑과미를 완전히 주고 받음으로써 선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만물에 대한 인간의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6 절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Ⅰ.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피 조세계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인간을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마음과 몸으로 된 인간의 기본형을 닮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본장 제 1 절 Ⅱ 참조). 그러므로 피조세계에는 인간의 몸과 같은 유형실체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마음과 같은 무형실체세계가 또 있다. 이 것을 무형실체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리적인 오관으로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고 영적 오관으로만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체험에 의하면, 이 무형세계는 영적인 오관에 의하여 유형세계와 꼭 같이 실감할 수 있는 실재세계인 바, 이 유형 무형의 두 실체세계를 합친 것을 우리는 천주라고 부른다.

 

마음과의 관계가 없이는 몸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는 창조본연의 인간의 행동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무형세계와의 관계가 없이는 유형세계가 창조본연의 가치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그 러므로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인생의 근본 의의를 알 수 없으며, 무형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는, 유형세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형세계는 주체의 세계요 유형세계는 대상의세계로서, 후자는 전자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히브리서 85). 유형세계에서 생활하던 인간이 육신을 벗으면 그 영인체는 바로 무형세계에 가서 영주하게 된다. 63

 

Ⅱ.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28). 피조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감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하나님은 이 세계를 직접 주관하지 않으시고, 이 세계에 대한 감성을 갖춘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직접 주관하도록 하신 것이다.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유형세계를 느껴 그것을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과 같은 요소인 물과 흙과 공기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무형세계를 느껴 그것을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과 같은 영적인 요소로써 영인체를 창조하시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 앞에 이미 1,600여년 전에 죽었던 모세와 900여년 전에 죽었던 엘리야가 나타났었는데(마태복음 173),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영인체들이었다. 이와 같이 유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육신과 무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영인체로 구성된 인간은 유형세계와 무형세계를 모두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로 창조하셨다. 인 간의 육신과 영인체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될 때, 유형 무형 두 세계도 또한 그 인간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일으키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대상세계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두 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치 두 음차를 공명시키는데 있어서의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또 이와 같이 무형세계(영계)와 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마치 라디오나 텔레비젼과도 같아서 영계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게 되어 있다.

 

세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으로 창조하셨다. 하 나님은 나중에 창조하실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실체적으로 전개하시어 먼저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었다. 따라서 영인체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무형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한편 또 육신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유형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니, 흔히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64

 

그런데 인 간이 타락되어 피조세계는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주인을 잃어버렸으므로, 로마서 819절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복귀된 창조본연의 인간)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동의 중심체인 인간이 타락되어 유형 무형 두 세계의 수수작용이 끊어짐으로써 그것들이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리되었기 때문에, 로마서 822절에는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인체와 육신을 가진 완성한 아담으로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셨다(고린도 전서 1527). 예수님은 타락인간이 그를 믿어 그와 일체가 됨으로써 그와 같이 완성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구주이신 것이다.

 

Ⅲ. 육신과 영인체와의 상대적 관계

 

1. 육신의 구성과 그의 기능

 

육신은 육심(주체)과 육체(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육 심은 육체로 하여금 그 생존과 번식과 보호 등을 위한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작용부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물에 있어서의 본능성은 바로 그들의 육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육신이 원만히 성장하려면 양성의 영양소인 무형의 공기와 광선을 흡수하고 음성의 영양소인 유형의 물질을 만물로부터 섭취하여, 이것들이 혈액을 중심하고 완전한 수수작용을 해야한다.

 

육신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함에 따라서 영인체 역시 선화 혹은 악화한다. 이것은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게 어따한 요소를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 주어지는 요소를 우리는 생력요소라고 한다. 우 리는 평소의 생활에 있어서 육신이 선한 행동을 할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행동을 할 때는 마음이 언짢은 것을 경험 하거니와, 이것은 그 육신의 행동의 선악에 따라 그에 적응하여 생기는 생력요소가 그대로 영인체에 돌아가는 증좌이다.

 

2. 영인체의 구성과 그의 기능

 

영 인체는 인간의 육신의 주체로 창조된 것으로서 영감으로만 감득되며,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고, 또 천사나 무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무형실체로서의 실존체인 것이다. 영인체는 그의 육신과 동일한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육신을 벗은 후에는 무형세계(영계)에 가서 영원히 생존한다. 인간이 영존하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 자체 내에 이와 같이 영존성을 지닌 영인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인체는 생심(주체)과 영체(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 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인체의 중심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음성)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를 받는 반면에 그가 육신에게 돌려보내는 요소도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생령요소라고 한다. 인간이 신령에 접함으로써 무한한 기쁨과 새로운 힘을 얻어서 고질이 물러가는 등 그 육신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그 육신이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한다. 그러므로 영인체와 육신과의 관계는 마치 열매와 나무와의 관계와 같다. 생 심의 요구대로 육심이 호응하여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따라 육신이 움직이게 되면 육신은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아 선하게 되고, 그에 따라 육신은 좋은 생력요소를 영인체에 다시 돌려 줄 수 있게 되어, 영인체는 선을 위한 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심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로 생심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인간 책임분담을 완수해야만 생령요소와 생력요소가 서로 선의 목적을 위한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그 런데 생령요소와 생력요소는 각각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에 있어서도 그의 본심이 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 생령요소가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생활을 하지 않는 한 그 요소도 육신을 선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생력요소와의 사이에 있어 올바른 수수작용을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인체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육신생활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 생심을 중심하고 창조원리에 의한 질서적 3기간을 거쳐서 성장하여 완성하게 되는데, 소생기의 영인체를 영형체라 하고, 장성기의 영인체를 생명체라 하며, 완성기의 영인체를 생령체라고 한다.67

 

하나님을 중심하고 영인체와 육신이 완전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완성하면,그 영인체는 생령체가 되는데, 이러한 영인체는 무형세계의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영인체에 느껴지는 모든 영적인 사실들은 그대로 육신에 공명되어 생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영적인 사실들을 육신의 오관으로 느껴서 알게 된다. 생령체를 이룬 인간들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인으로서 가서 사는 곳이 천상천국이다. 그러므로 지상천국이 먼저 이루어진 후에야 천상천국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영인체의 모든 감성도 육신생활 중 육신과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하여 육성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지상에서 완성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해야만 그 영인체도 육신을 벗은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영인체의 모든 소성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형성되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있어서 영인체가 악하게 되는 것은 육신생활의 범죄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영인체가 선화도 또한 육신생활의 속죄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진다. 죄악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지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 지상에서 선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섭리의 제1차적인 목적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문의 열쇠를 지상의 베드로에게 주셨고(마태복음 1619), 땅에서매고 푸는대로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린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818).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인체가 그 곳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인체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인 간은 원래 완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호흡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긴 허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완전히 호흡할 수 없게 된 영인체는 완전한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도리어 고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과 먼 거리에 있는 지옥을 자진하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생장할 수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인체의 번식은 어디까지나 육신 생활에 의한 육신의 번식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3. 생심과 육심과의 관계로 본 인간의 마음

 

생심 과 육심과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영인체와 육신을 합성일체화하게 하여 창조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 선의 절대적인 기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나, 위와 같이 창조된 본성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을 알지 못하여 양심의 절대적인 기준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선의 기준을 달리 함에 따라서 양심의 기준도 달라지게 되어,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흔히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상적인 부분을 본심이라하고, 그 형상적인 부분을 양심이라고 한다.

 

그 러므로 인간이 그 무지에 의하여 창조본연의 것과 그 기준을 달리한 선을 세우게 될 때에도 양심은 그 선을 지향하지만, 본심은 이에 반발하여 양심을 그 본심이 지향하는 곳으로 돌이키도록 작용한다. 사탄의 구애를 당하고 있는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지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사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심이나 양심은 이 사심에 반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분립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2장 타 락 론

 

인 간은 누구나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本心)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어떠한 악의 세력에 몰리어, 본심이 원하는 선을 버리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이러한 악의 세력 가운데서 인류의 죄악사(罪惡史)는 연면히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이 악의 세력의 주체를 사탄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사탄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해서 사탄이 되었는가 하는,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악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함으로써 인류죄악사를 청산하고 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이 사탄 된 동기와 경로와 그 결과를 밝히 알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타락론(墮落論)을 알아야 한다.

 

1절 죄의 뿌리

 

이 제까지 인간 속에 깊이 그 뿌리를 박고 쉬임 없이 인간을 죄악의 길로 몰아내고 있는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기독교 신도들만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인간 조상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것이 죄의 뿌리가 된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나무의 과실이라고 믿는 신도들과, 또 성서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이것도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상징이나 비유일 것이라고 믿는 신도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제각기 구구한 해석을 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완전한 해명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I.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많 은 기독교 신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해와가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다는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어떠한 나무의 열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부모 되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녀들이 따먹고 타락할 수 있는 과실(果實)을 그렇게도 보기 좋고 탐스럽게 만들어서(3 : 6), 그들이 손쉽게 따먹을 수 있는 곳에 두셨을 것인가?

 

예 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 : 11)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먹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한편 인간의 원죄(原罪)는 인간의 시조로부터 유전(遺傳)되어 나오고 있는 것인데, 먹는 물건이 어떻게 원죄를 유전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유 전은 오직 혈통(血統)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그 무엇을 먹었다고 하여 그 결과가 후손에게까지 유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믿고 있는 신도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간에게 사망이 따르는 방법으로써 그렇게 무자비한 시험을 하셨으리라고는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 담과 해와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으면 정녕코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먹으면 죽을 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따먹었다. 기아(饑餓)에 허덕였을 리도 없는 아담과 해와가 먹을 것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떠한 물질이 아니고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자극을 주는 다른 무엇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선악과가 이와 같이 물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경(聖經)의 많은 중요한 부분이 상징이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선악과만은 굳이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은 모름지기 성서의 문자에만 붙들려 있었던 지난날의 고루하고도 관습적인 신앙태도를 버려야 하겠다.

 

선 악과를 비유로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비유하였을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해명하는 방법으로서 창세기 29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에덴동산에 있었다고 하는 '생명나무'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와 함께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생명나무

 

성 서(聖書)의 말씀에 의하면, 타락인간(墮落人間)의 소망은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 '생명나무'를 이루는 데 있다. 즉 잠언 1312절을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도 '생명나무'를 소망의 대상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고, 요한계시록 2214절의 기록을 보면,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소망도 역시 '생명나무'에 나아가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생명나무'인 것을 보면 타락 전 아담의 소망도 '생명나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 인간은 원래 타락 전 아담이 이루려다가 못 이룬 바로 그 소망을 다시 찾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 세기 324절에, 아담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염검(火焰劍)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막아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보아도 타락 전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다는 이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고 에던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3 : 24), '생명나무'는 그 후 한결같이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 러면 완성될 때를 바라보며 성장하고 있던 미완성(未完成)한 아담에 있어서의 소망이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그가 타락되지 않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생명나무'의 내용은 바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은 곧 완성한 아담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명나무'는 결국 완성한 아담을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 일 아담이 타락되지 않고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되어서 '생명나무'를 이루었다면, 그의 후손들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화염검(火焰劍)으로 막아버리고 말았다(3 : 24).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복귀하려는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죄(原罪)가 있는 타락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생명나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이 '생명나무'가 되기 위하여는 로마서 1117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이 지상에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모든 인간을 그에게 접붙여서 하나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생명나무'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312절에 의하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고대하였던 '생명나무'는 바로 초림(初臨)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러나 창세기 324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화염검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아담의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것이 걷히지 않고는 인간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3절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五旬節) 날에 성도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불같은 혀 곧 화염검이 갈라진 후에야 성령(聖靈)이 강림하여, 전 인류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그에게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영적(靈的)으로만 접붙임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또다시 속죄(贖罪)를 받아야 할 죄악의 자식을 낳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나온 원죄를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또 그 자식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전편 제 4장 제 1).

 

그 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상에 '생명나무'로 재림(再臨)하셔서 온 인류를 다시 접붙이심으로써, 원죄까지 속죄해 주시는 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4절의 말씀대로, 신약성도(新約聖徒)들이 또 다시 '생명나무'를 고대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 22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나무'는 바로 재림 예수님을 비유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 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2 : 9)를 요한계시록 2214절의 '생명나무'로서 복귀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타락(墮落)하여 창세기 29절의 첫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214절의 후 '생명나무'로 재림하셔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15 : 45).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 나님은 아담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배필로서 해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동산 가운데에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을 비유하는 나무가 있었다면 그러한 여성을 비유하는 또 하나의 나무도 있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생명나무'와 같이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2 : 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한 그 나무는 실상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완성한 해와를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예수님을 포도나무(15 : 5) 혹은 감람나무(11 : 17)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타락(墮落)의 비밀을 암시하심에 있어서도 완성한 아담과 해와를 두 나무로 비유하셨던 것이다.

 

II. 뱀의 정체

 

해와를 꼬여서 범죄케 한 것은 뱀이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3 : 4∼5). 그러면 또 이 뱀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우리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에 의하여 뱀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하자.

 

성 경에 기록된 뱀은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적인 인간을 타락시킨 것을 보면 그것도 영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뱀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더욱 영물(靈物)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또 요한계시록 129절을 보면, 하늘에서 큰 용()이 땅으로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魔鬼)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옛 뱀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해와를 꼬인 그 뱀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뱀이 하늘로부터 내쫓겼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있었던 그 옛 뱀이 영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편 이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탄은 인간이 타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을 악()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온 것이 사실이니 그것은 영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탄이 영물인 것이 사실이라면, 사탄으로 표시된 뱀이 영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해와를 꼬인 뱀은 동물이 아니고 어떠한 영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러면 이처럼 뱀으로 비유한 영물(靈物)이 과연 창세 전(創世前)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피조물(被造物) 중의 하나였던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 뱀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대립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라면,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악(善惡)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영속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결국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며, 모든 존재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일원론(一元論)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뱀으로 비유한 이 영물은 원래 선()을 목적으로 창조되었던 어떠한 존재가 타락되어 사탄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소재(所在)가 하늘이었고, 한편 또 그것이 만일 타락되어 악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심령(心靈)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 것인가? 천사(天使) 이외에는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존재가 없으므로 우선 그 뱀은 천사를 비유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 하시고 어두운 지옥(地獄)에 던져두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을 꼬여 가지고 범죄하였던 뱀의 정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뱀 은 혀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한 혀로 두 말을 하고, 한 마음으로 이중의 생활을 하는 자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또 뱀은 자기의 먹을 것을 몸으로 꼬아서 먹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유혹하는 자의 표상이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을 꼬인 천사를 뱀으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III.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

 

우리는 위에서 인간을 꼬여 타락케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하여 타락(墮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는 천사와 인간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천사의 범죄

 

유 다서 16절에서 7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천사가 간음(姦淫)으로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런데 간음이란 혼자서는 행할 수 없는 범행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행하여진 천사의 간음에 있어 그 대상이 되었던 존재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인간은 어떠한 죄를 저질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2. 인간의 범죄

 

창 세기 225절을 보면, 범죄하기 전 아담 해와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墮落)한 후에는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無花果)나무 잎으로 하체(下體)를 가리었다.(3 : 7). 만일 선악과(善惡果)라고 하는 어떠한 과실이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따먹고 범죄를 하였다면, 그들은 필시 손이나 입을 가리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은 허물을 가리는 것이 그 본성(本性)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손이나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리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들의 하체가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욥 기 3133∼34절에는 내가 언제 아담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던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한 후 그의 하체를 가리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아담이 가리었던 그의 하체가 허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하체가 어찌하여 허물이 되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담이 하체로써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인 간이 타락하기 전의 세계에 있어,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저지를 수도 있었던 행동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라(1 : 28)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사랑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두고 볼 때 사랑은 가장 귀하고 가장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사랑의 행동을 천시하여 온 것은 그것이 바로 타락의 원인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도 또한 음란(淫亂)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천사와 인간과의 행음

 

우 리는 위에서 밝힌 바 인간이 천사(天使)의 꼬임에 빠져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인간이나 천사는 모두 행음(行淫)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그 위에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영적인 존재로서 서로 어떠한 정적(情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과 천사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등을 결부하여 볼 때, 인간과 천사와의 사이에 행음관계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844절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9절에서는 마귀(魔鬼)는 곧 사탄이요 사탄은 곧 인간을 꼬인 옛 뱀이라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성구(聖句)들로 미루어 보면, 인간은 마귀의 후손이요, 따라서 사탄의 후손이기 때문에 결국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그 러면 인간은 어떤 경위로 타락한 천사, 즉 사탄의 후손이 되었는가? 이것은 인간의 조상이 천사와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사탄의 혈통(血統)에서 태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혈통이 아니고 사탄의 혈통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서 8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친자식이 못되고)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마태복음 37절에는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 즉 사탄의 자식이라고 질책하였고, 마태복음 2333절에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시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책망하신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천사와 인간 사이에 행음관계(行淫關係)가 있어서, 그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IV. 선악과

 

우 리는 위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해와를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러면 또 선악과(善惡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해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목(果木)이 과실에 의하여 번식되는 것과 같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그의 사랑으로써 선의 자녀를 번식해야 할 것이었는데, 사탄을 중심한 그의 사랑으로써 악의 자녀를 번식하였다. 해와는 이와 같이 그의 사랑으로써 선의 열매도 맺을 수 있고, 또한 악의 열매도 맺을 수 있었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통하여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랑을 선악과라고 하였던 것이며, 그 사람을 말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러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은 가지고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사랑으로 선과(善果)를 따먹고, 선의 피와 살을 받아 선의 혈통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탄을 중심한 악의 사랑으로 악과(惡果)를 따먹고 악의 피와 살을 받아 악의 혈통을 번식하여 죄악의 사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을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창 세기 314절을 보면,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를 저주하시어 배로 다니고 또 종신토록 흙을 먹으리라고 하셨다. 다리로 다니지 못하고 배로 다닌다는 것은, 천사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비참해진다는 뜻하는 것이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쫓겨남으로 말미암아(14 : 12, 12 : 9),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요소를 받지 못하고 죄악의 세계에서 악의 요소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죄의 뿌리

 

우 리는 성서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여, ()의 뿌리는 인간시조가 과실을 따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뱀으로 표시된 천사(天使)와 불륜(不倫)한 혈연관계를 맺은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의 혈통을 번식하지 못하고 사탄의 악의 혈통을 번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편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서 인간의 죄의 뿌리가 음란(淫亂)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의 뿌리가 혈연적인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원죄(原罪)는 자자손손(子子孫孫)에게 유전되어 왔다. 그리고 죄를 벗으려고 하는 종교마다 간음(姦淫)을 가장 큰 죄로 규정하여 왔으며, 이것을 막기 위하여 금욕생활(禁慾生活)을 강조하여 온 것이니, 이것도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되기 위한 속죄(贖罪)의 조건으로 할례(割禮)를 행하였던 것은, 죄의 뿌리가 음란에 의하여 악의 피를 받아들인 데 있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의 몸으로부터 그 악의 피를 뽑는다는 조건을 세워서 성별(聖別)하기 위함이다.

 

수 많은 영웅 열사(英雄烈士)와 국가들이 멸망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음란(淫亂)에 있었던 것은, 음란이란 죄의 뿌리가 항상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로써 인륜도덕(人倫道德)을 세우고, 제반 교육을 철저히 하며, 범죄를 양성하는 경제사회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다른 모든 죄악들은 이 사회로부터 불식(拂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되면서 날로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증대되어 가고 있는 음란이란 범죄만은 그 누구도 막을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서 이 범죄를 발본색원(拔本塞源) 할 수 없는 한 결코 이상세계(理想世界)는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再臨)하시는 메시아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죄의 뿌리가 어디까지나 음란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2절 타락의 동기와 경로

 

우 리는 이미 제1절에서 뱀은 곧 해와를 타락시킨 천사(天使)를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墮落)된 동기가 천사에게 있었으므로, 그 타락의 동기와 경로를 알려면 먼저 천사에 관한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I. 천사의 창조와 그의 사명 및 그와 인간과의 관계

 

모 든 존재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따라서 천사(天使)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被造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세계를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먼저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절에 씌어 있는 천지창조(天地創造)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스스로를 복수(複數)로 부르셨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대로 삼위신(三位神)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보다도 먼저 창조되어 있었던 천사들을 놓고, 그들을 포함시킨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 나님은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창조와 그의 경륜(經綸)을 위하여 먼저 천사를 사환(使喚) 으로 창조하셨다(1 : 14).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중대한 축복의 말씀을 전하였고(18 : 10), 그리스도의 잉태에 관한 소식을 전하였으며(1 : 20, 1 : 31), 옥중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베드로를 풀어 성 밖으로 인도하였던 것이다(12 : 7∼10).이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천사가 활동한 예는 성서에서 무수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29절에는 천사가 자기 자신을 ''이라고 하였고, 또 히브리서 114절에는 천사를 '부리는 영()'이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그리고 천사는 하나님에게 송영(誦詠)을 드리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증거를 성서 가운데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5 : 11, 7 : 11).

 

다음에는 천사와 인간과의 창조원리적 관계를 알아보자.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창조하시고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권(主管權)을 부여하셨기 때문에(1 : 28), 인간은 천사도 주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3장 인류역사 종말론

 

우 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人類歷史)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이것이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왔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終末)에 관한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基督敎) 신도들은 다만 성서(聖書)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末世)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불에 타서 소멸(消滅)되고(벧후 3 : 12),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24 : 29), 천사장(天使長)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름 속으로 끌어올리워 공중(空中)에서 예수님을 상봉(相逢)하리라고(살전 4 : 16∼17) 믿고 있다.

 

그 러나 사실 성서의 문자 그대로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서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무엇을 비유(比喩)하여 말씀하신 것인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기독교 신도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하나님이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創造)하신 목적과, 타락(墮落)의 의의, 그리고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 등 근본문제(根本問題)를 풀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1절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과 인간의 타락

 

I.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

 

이 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의 창조본연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인 간 이외의 피조물(被造物)은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원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스스로 노력하여서 그 뜻대로 생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개성완성(個性完成)이라고 한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타락 전의 아담 해와나 선지자(先知者)들이 하나님과 일문일답(一問一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인간에게 이와 같이 창조되었던 소성(素性)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 성을 완성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는 몸과 마음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이 거하는 하나의 전(殿)으로서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게 되므로, 결국 그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만 생활하게 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일체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3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20절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개성(個性)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이룸으로써, 성령(聖靈)이 그 안에 살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인간은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타락할 수도 없게 된다.

 

개 성을 완성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룬 선()의 완성체인데, 선의 완성체가 타락된다면 선 그 자체가 파멸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불합리(不合理)한 결과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완성된 입장에서 타락되었다면 하나님의 전능성마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영원(永遠)한 주체로 계시는 절대자(絶對者)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도 영원성과 절대성을 가져야 하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절대로 타락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와 같이 개성을 완성하여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하신 말씀대로(1 : 28) 선의 자녀를 번식하여 죄 없는 가정과 사회를 이루었더라면, 이것이 바로 한 부모를 중심한 대가족(大家族)으로 이루어지는 천국(天國)이었을 것이다.

 

천 국은 마치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 모양과 같은 세계여서, 인간에 있어 그 두뇌의 종적(縱的)인 명령에 의하여 그의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서로 횡적(橫的)인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듯이, 그 사회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종적인 명령에 의하여 서로 횡적인 유대(紐帶)를 맺어 생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서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고통을 당하면 그것을 보시고 같이 서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사회 전체가 그대로 체휼하게 되기 때문에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 리고 아무리 죄 없는 인간들이 생활하는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이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생활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고 또 인간이 원하는 천국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말씀대로(1 : 28), 개성을 완성한 인간들은 과학을 발달시켜 자연계(自然界)를 정복함으로써 극도로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 지상에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실현된 곳이 바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완성되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계(靈界)로 가게 되면 바로 거기에 천상천국(天上天國)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어디까지나 먼저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II. 인간의 타락

 

창 조원리(創造原理)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아직도 성장기간(成長期間)에 있어서, 미완성(未完成)한 입장에 있었을 때에 타락되었다. 인간에게는 왜 성장기간이 필요하였으며, 인간시조가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도 이미 창조원리에서 밝혔다.

 

인 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이루지 못하고, 사탄이 우거(寓居)하는 전(殿)이 되어 그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神性)을 갖지 못하고 악성(惡性)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악성을 가진 인간이 악의 자녀를 번식하여 악의 가정과 사회와 문제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지상지옥(地上地獄)이다. 지옥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유대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서 체휼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자행하게 된 것이다.

 

인 간은 지상지옥(地上地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벗은 후에는 천상지옥(天上地獄)으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 주권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 주권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탄을 세상 임금(12 : 31), 또는 세상의 신(고후 4 : 4)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2절 구원섭리

 

I.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다

 

이 죄악(罪惡)의 세계는 인간이 서러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도 서러워하시는 세계인 것이다(6 : 6).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설움의 세계를 그대로 방임하실 것인가? 기쁨을 누리시려고 창조하셨던 선()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로 영속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창조에 실패한 무능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필코 이 죄악의 세계를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어느 정도로 구원하셔야 할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죄악의 세계에서 사탄의 악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26 : 18), 먼저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의 입장을 복귀(復歸)하는 데까지 구원하시고, 그 위에 선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데까지(3 : 21)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병 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들기 전의 상태로 복귀시킨다는 뜻이요,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빠지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죄가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는 곧 복귀섭리(復歸攝理)인 것이다(1 : 6, 17 : 11).

 

타 락(墮落)은 물론 인간 자신의 과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란 결과도 있을 수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결과에 대하여 창조주(創造主)로서의 책임을 지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잘못된 결과를 창조본연의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 나님은 영존(永存)하시는 주체이시므로, 그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도 역시 영원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인간에게는 이와 같이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셨던 창조원리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타락된 인간이라고 해서 이를 아주 없애버리어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무위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을 구원하시어 그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런데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므로(1 : 2), 이사야 4611절에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탄 때문에 잃어버렸던 이 축복들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심으로써 그는 약속의 뜻을 이루어 나오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548절에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곧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본연의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신성(神性)을 갖게 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II. 복귀섭리의 목적

 

그 러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던 선의 대상인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지상에 창조하시고, 그들을 중심하고 먼저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시려 하셨다. 그러나 인간 시조(始祖)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제1차적인 목적도 역시 지상천국을 복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나(6 : 10),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4 : 17) 등은 모두 복귀섭리의 목적이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III.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역사다

 

우 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는 바로 복귀섭리(復歸攝理)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인류역사(人類歷史)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의 세계를 복귀케 하시려는 섭리역사(攝理歷史)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의 역사라는 것을 여러 면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 째로 문화권 발전사(文化圈發展史)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本心)만은 공통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떻게 해야 선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은 지능에 속하는 것이어서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어 투쟁의 역사를 엮어 내려온 것이 사실이지만, 선을 찾아 세우려는 그들의 근본목적만은 모두 동일하다.

 

그 러면 어찌하여 인간의 본심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은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선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비록 타락인간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선의 생활은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선을 추구하는 그 본심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들로써 엮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갈 곳은 결국 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 간의 본심(本心)이 아무리 선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하여도, 이미 악주권하(惡主權下)에 놓여진 이 세계에서는 그 선의 실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서 그 선의 주체를 찾으려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러한 필연적인 요구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종교(宗敎)인 것이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르게 된 인간은 종교를 세워 부단히 선을 찾아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설혹 종교를 받들고 있었던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망하였다 할지라도 종교 그 자체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남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국가흥망사(國家興亡史)를 중심하고 더듬어 보기로 하자.

 

먼 저 중국(中國)의 역사를 보면 춘추전국(春秋戰國)의 각 시대를 거치어 진() 통일시대가 왔고, 전한(前漢), (), 후한(後漢), 삼국(三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북조(南北朝)의 각 시대를 거치어 수() () 통일시대가 왔으며, 오대(五代), 북송(北宋), 남송(南宋), (), (), ()의 시대를 거치어 오늘의 중화민국(中華民國)에 이르기까지 복잡다양한 국가의 흥망과 정권의 교체를 거듭하여 내려왔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 (), ()의 극동종교(極東宗敎)만은 엄연히 그대로 남아져 있다.

 

다음으로 인도(印度)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마우리아, 안드라, 굽타, 바루다나, 사만, 가즈니, 무갈제국을 거쳐서 오늘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변천은 거듭되어 내려왔으나 힌두교만은 쇠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중동지역(中東地域)의 역사를 보면 사라센제국, ·서 칼리프, 셀주크 터어키, 오스만 터어키 등 나라의 주권은 여러 차례 바뀌어 내려왔으나,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만은 연면하게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나 아가 유럽사의 주류에서 그 실증을 찾아보기로 하자. 유럽의 주도권은 그리이스, 로마, 프랑크,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일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으로 옮겨졌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미국과 소련으로 나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만은 그대로 융흥(隆興)해 왔으며, 유물사관(唯物史觀) 위에 세워진 전제정치하(專制政治下)의 소련에서마저 기독교는 아직도 멸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남아져 있다.

 

이 러한 견지에서 모든 국가 흥망의 발자취를 깊이 더듬어 보면, 종교를 박해하는 나라는 망하였고, 종교를 보호하고 육성시킨 나라는 흥하였으며, 그 나라의 주권은 보다 더 종교를 숭앙(崇仰)하는 나라에로 넘겨져 간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를 박해하고 있는 공산주의세계(共産主義世界)가 괴멸될 날이 기필코 오리라는 것은 종교사(宗敎史)가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역 사상에는 많은 종교가 오고갔다.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 큰 종교는 반드시 문화권(文化圈)을 형성하여 왔는데, 문헌에 나타나 있는 문화권만 해도 21내지 26개나 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열등한 것은 보다 우수한 것에 흡수되었거나 또는 융화되어 왔다. 그리하여 근세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열거한 대로 수다한 국가 흥망의 굽이침 속에서 결국 극동문화권(極東文化圈), 인도교문화권(印度敎文化圈), 회회교문화권(回回敎文化圈),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 등의 4대 문화권이 남아지게 되었고, 이것들은 다시 기독교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선을 지향해 온 모든 종교의 목적을 함께 달성해야 할 최종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인 귀추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와 같이 문화권의 발전사가, 수많은 종교의 소장(消長) 또는 융합(融合)에 따라 결국 하나의 종교를 중심한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바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에로 복귀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 째로, 종교와 과학의 동향으로 보아도, 우리는 인류역사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타락인간의 양면의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함은 이미 총서(總序)에서 논술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이래 서로 관련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달해 온 종교와 과학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각각 제 갈 곳을 다 가서 한 자리에서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이제까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노정을 걸어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 일 인간이 타락(墮落)되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지능이 영적인 면에서 최고도에까지 향상하였었을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면에서도 최고도로 발달되어 과학은 그 때 극히 단시일 내에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사회(科學社會)는 벌써 인간시조 당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무지에 빠지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과학으로써 그 무지를 타개하면서 창조본연의 이상적 과학사회를 복귀하여 나왔다. 그런데 오늘의 과학사회는 극도로 발달되어, 외적으로는 이상사회(理想社會)에로 전환될 수 있는 그 전 단계에까지 복귀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셋 째로, 투쟁역사(鬪爭歷史)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물을 빼앗고 땅을 빼앗으며 사람을 빼앗으려는 싸움은 인류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벌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이 싸움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중심한 싸움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와, 오늘에 이르려는 민주(民主)와 공산(共産) 두 세계가 마지막 싸움을 겨루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제 인류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마지막 때에 있어서, 천륜(天倫)은 드디어 재물이나 땅이나 사람을 빼앗아 가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역사의 단계를 지나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이름을 띠고 이 땅에 찾아왔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패전국가(敗戰國家)가 식민지를 내놓더니,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차례로 식민지를 내놓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오늘의 강대국들은, 그들의 일개 도시만도 못한 약소국가들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그들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자기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주어, 모두 형제국가들을 만들고 있다.

 

그 러면 이 마지막 싸움이란 어떠한 싸움일 것인가? 그것은 이념(理念)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가 나오지 않는 한, 민주와 공산의 두 세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나올 때, 비로소 종교를 부인하고 과학편중의 발달을 꾀해 나온 공산주의 사상은 전복되고, 두 세계의 하나의 이념 아래 완전히 통일될 것이다. 이와 같이 투쟁역사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넷 째로, 우리는 성서(聖書)를 중심하고 좀더 이 문제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류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2 : 9)를 중심한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전편 제 2장 제 1I). 그런데 에덴동산은 아담과 해와가 창조된 어떤 국한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의미한다. 만일 에덴동산이 인간 시조(始祖)가 창조되었던 그 어느 한정된 지역만을 말한다면, 땅에 충만하도록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1 : 28)에 의하여 번식될 그 숱한 인류가 어떻게 그 좁은 곳에서 다 살 수 있을 것인가?

 

인 간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중심하고 세우려던 에덴동산은 사탄에게 내주게 되었었다(3 : 24). 그래서 알파로 시작된 인류 죄악역사(罪惡歷史)가 오메가로 끝날 때의 타락인간(墮落人間)의 소망은, 죄악으로 물든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복귀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 잃어버렸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찾아 나아가는 데 있다고 요한계시록 221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이 성서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미 타락론(墮落論)에 밝혀진 바이지만, '생명나무'는 완성한 아담 곧 인류의 참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타락되어 그의 후손도 원죄(原罪)를 가진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 죄악의 자녀들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두 거듭나지(重生) 않으면 아니 된다(중생론 참조). 그러므로 역사는 인류를 다시 낳아 주실 참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니, 역사의 종말기(終末期)에 들어 성도(聖徒)들이 소망하고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보아도, 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창조본연의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 한계시록 211절 내지 7절에도, 역사의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사탄의 주관하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복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819절 내지 22절에는 사탄 주관하에서 탄식하고 있는 만물(萬物)도 말세에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새롭게 되기 위하여(21 : 5)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창조본연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복귀되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여러 면으로 고찰하여 볼 때, 인류역사는 창조본연의 세계에로 복귀하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3절 말 세

 

I. 말세의 의의

 

하나님이 인간 조상(祖上)에게 허락하셨던 3대 축복(三大祝福)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루어지지 않고, 사탄을 중심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 런데 악으로 시작된 인류역사는 실상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이기 때문에, 사탄주권의 죄악세계(罪惡世界)는 메시아의 강림(降臨)을 전환점으로 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주권의 죄악세계가 하나님주권의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에로 교체되는 시대를 말세(末世)라고 한다. 따라서 말세는 지상지옥이 지상천국으로 바뀌어지는 때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도들이 믿어 온 대로의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는 공포의 때가 아니고, 창세 이후 유구한 역사노정을 통하여 인류가 유일한 소망으로 바라고 나왔던 기쁨의 한 날이 실현되는 때인 것이다.

 

상 세한 것은 후편 제1장으로 미루거니와,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래, 죄악세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의 세계를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여러 차례 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곤 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말세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은 사실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노아 때도 말세였다

 

창 세기 613절의 기록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였기 때문에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찌하여 노아 때가 말세였던가? 하나님은 인간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시작된 사탄을 중심한 타락세계를 1600년의 죄악사(罪惡史)를 일기로 하여 홍수심판(洪水審判)으로 멸하시고, 하나님을 신봉(信奉)하는 노아가정을 세우심으로써 그 믿음의 터 위에 하나님 주권의 이상세계를 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노아 때가 말세였던 것이다(후편 제1장 제2절 참조).

 

그러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그들이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 : 22).

 

2. 예수 때도 말세였다

 

복 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기 때문에(전편 제 6),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다시 다른 선지자(先知者)들을 부르시어 믿음의 터를 닦으시고, 그 터 위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사탄을 중심한 죄악의 세계를 멸하시고 하나님을 중심한 이상세계(理想世界)를 복귀하려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 때도 말세(末世)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심판주(審判主)로 오셨다고 말씀하셨고(5 : 22), 그 때도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4 : 1)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를 복귀하려고 오셨던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불신함으로써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도 이루어지지 않고 재림(再臨) 때에로 다시 연장되었다.

 

3. 예수의 재림 때도 말세다

 

유 대민족의 불신을 당하게 된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영적인 구원만을 이루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림하신 후에야 영육(靈肉) 아울러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완수하여(전편 제 4장 제 1IV) 지상천국을 복귀하시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때도 또한 말세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재림 때)에도 그러하리라(17 : 26)고 말씀하셨고, 그가 재림하실 때도 말세가 되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24 : 29).

 

II. 말세의 징조에 관한 성구

 

이 미 위에서 논한 바대로, 많은 기독교 신도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末世)에는 천변지이가 일어나며, 인간사회에도 현대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이(變異)가 생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해 가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세의 징조는 실제에 있어서 그 문자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세에 관한 성서의 모든 기록은 각각 무엇을 상징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1. 하늘과 땅을 멸하고(벧후 3 : 12, 6 : 13)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심(21 : 1, 벧후 3 : 13, 66 : 22)

 

창 세기 613절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가 되어 땅을 멸한다고 하셨지만, 사실상 멸하지는 않으셨다. 전도서 14절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하신 말씀이나, 시편 7869절에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땅은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그의 대상도 영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상으로 창조된 땅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파멸되어 없어질 세계를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 러면 그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인가? 한 국가를 멸한다는 것은 그의 주권(主權)을 멸한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또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21 : 1) 새 주권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을 멸한다는 것은 그를 주관하시고 있는 사탄주권을 멸한다는 뜻이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 주권하의 새로운 천지(天地)를 복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2. 하늘과 땅을 불로써 심판하심(벧후 3 : 12)

 

베 드로후서 312절을 보면 말세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말라기 4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 때도 그가 심판주(審判主)로 오셔서(5 : 22, 9 : 39)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또 누가복음 1249절에는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이 불로써 심판하신 아무 흔적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야고보서 36절에 혀는 곧 불이요라고 한 말씀에 의하여 불심판은 곧 혀의 심판이요, 혀의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니, 불심판은 곧 '말씀'심판임을 알 수 있다.

 

그 러면 말씀심판에 관한 성구(聖句)의 예를 찾아보자. 요한복음 1248절에는 예수님을 저버리고 그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였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8절에는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 즉 말씀으로 그를 죽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사야 114절에는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말씀)으로 악인(惡人)을 죽이리라고도 말씀하였으며,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불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러면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 13절에 인간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은 인간 시조가 말씀의 실체(實體)로서 말씀의 목적을 완수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타락되어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다시 말씀에 의하여 타락인간을 재창조(再創造)하심으로써 말씀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니, 이것이 곧 진리(성서)에 의한 복귀섭리인 것이다. 요한복음 1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이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 완성자로 재림하셔서, 스스로 말씀심판의 기준이 됨으로써 모든 인류가 어느 정도 말씀의 목적을 이루었는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 렇듯 복귀섭리의 목적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으므로, 그 목적을 위한 심판도 말씀으로 그의 기준을 세워 행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2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씌어 있는 바,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 오셔서(1 : 14) 생명의 말씀을 이미 선포하셨으나, 유대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시고 한탄하여 하신 말씀이다.

 

3. 무덤에서 시체가 일어남(27 : 52, 살전 4 : 16)

 

마 태복음 275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썩어 버린 그들의 육신이 다시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전편 제5장 제2III). 만일 영계(靈界)에 머물러 있던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들이 성서의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살아 나와 성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반드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때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을지라도, 그들의 증언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듯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육신(肉身)을 쓰고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면, 그 후의 그들의 행적(行蹟)에 관한 기사가 반드시 성서에 남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들에 관한 아무런 기사도 달리 씌어 있지 않다.

 

그 러면 무덤에서 살아 나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마치 모세와 에리야의 영인체(靈人體)가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었던 것처럼(17 : 3), 구약시대의 영인들이 재림부활(再臨復活)을 위하여, 지상에 재림한 것을 영적으로 보고(전편 제5장 제2III) 기록한 말씀이다.

 

그 러면 무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낙원(樂園)에서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들이 머물러 있던 영형체급 영인(靈形體級靈人)의 세계는 보다 어둠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곳을 가리켜 무덤이라고 하였다. 구약시대의 영인들은 모두 이 영계에 머물러 있다가 지상성도들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4. 지상인간들이 끌어 올리워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 (데살 4 : 17)

 

여 기에 기록되어 있는 공중은 공간적인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성서에 있어서 땅은 타락된 악주권(惡主權)의 세계를 의미하고, 하늘은 죄가 없는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은 땅에도 아니 계시는 곳이 없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6 : 9)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땅에서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3 : 13)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셔서 사탄주권을 물리치시고, 지상천국을 복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주권의 세계에서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짐 (24 : 29)

 

창 세기 379절 이하를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한째인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에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요셉이 커서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었을 때, 과연 이 꿈대로 그 부모와 형제들이 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해와 달은 부모를 상징했고, 별들은 자녀들을 상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 독론(基督論)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예수와 성신(聖神)은 아담과 해와 대신 인류를 중생(重生)해 주실 참부모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해와 달은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고 별들은 자녀 된 성도들을 상징한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을 참빛으로 비유한 것은(1 : 9), 그가 '말씀'으로 육신을 이루신 분으로 오셔서(1 : 14) 진리의 빛을 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는 햇빛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의 빛을 이름이며, 달빛은 진리의 신으로 오신 성신(16 : 13)의 빛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신약(新約)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그 러면 어찌하여 신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될 것인가? 마치 예수님과 성신이 오셔서 구약(舊約)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신약의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되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셔서 신약의 말씀을 이루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한(21 : 1) 새 말씀을 주시게 되면(본장 제 5I참조), 초림(初臨) 때에 주셨던 신약의 말씀은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에 말씀이 그 빛을 잃는다는 것은 새 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의 사명기간이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 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말세(末世)에 있어서의 성도들이 모두 실족(失足)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의 강림(降臨)을 열망해 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반대하다가 전부 떨어진 것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그 날에 실족하게 됨으로써 그와 같이 떨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후편 제 6장 제 2II참조).

 

누 가복음 188절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말씀이나, 마태복음 723절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가 잘 믿는 성도들을 보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책망하시면서, 떠나가라고 배척하게 될 것으로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끝날의 성도들이 불신으로 실족하게 될 것을 아시고 경고하신 것이다.

 

5절 말세와 새 말씀과 우리의 자세

 

I. 말세와 새 진리

 

타 락인간(墮落人間)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로써(4 : 23) 그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그런데 진리에 있어서도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종교에 의한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과학에 의한 외적인 진리의 두 면이 있다. 따라서 지능에도 내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내적인 지능과 외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외적인 지능의 두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지능은 내적인 진리를 찾아 종교를 세워 나아가고, 외적인 지능은 외적인 진리를 찾아서 과학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신 령은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五官)에 의하여 영인체(靈人體)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有形世界)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靈肉)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피조세계(被造世界)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심령과 지능을 아울러 깨우치게 함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를 하신다.

 

그 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를 깨우치기 위한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도 또한 점차로 그 정도를 높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 를 들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전 시대(舊約前時代)에는 진리 대신으로 제물(祭物)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 때는 율법(律法), 예수님 때는 복음(福音)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시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14 : 6).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新約聖書)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低級)하였을 때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적인 교과서(敎科書)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렇다면 그 당시에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과학 문명인(文明人)들의 진리 욕구(眞理慾求)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성인(知性人)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는, 보다 고차적인 내용과 과학의 표현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는 새 진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새 진리는 이미 총서(總序)에서 논한 바, 인간의 내외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통일된 과제로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할 이유를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서(聖書)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는 그 진리의 중요한 부분이 거의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사람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로 말미암아 많은 교파(敎派)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파 분열의 제1원인은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분열과 싸움은 계속 확대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가 나와서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는 성경의 근본내용을 누구나 공인(公認)할 수 있도록 해명하지 않는 한, 교파분열과 그 싸움의 길은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통일에 의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16 :25)는 말씀으로써 끝날이 이르면 다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 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 : 12)고 하신 말씀대로,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실 말씀을 못다 하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16 : 12)고 하심으로써, 속해 있는 말씀을 다 하시지 못하는 서러운 심정을 토로하셨던 것이다.

 

그 러나 예수님이 못다 하시고 돌아가셨던 그 말씀은 영원히 비밀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 : 13)고 계속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말씀은 반드시 성령(聖靈)에 의하여 새로운 진리로써 가르쳐 주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리고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5 : 1)고도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책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 그 말씀이 인봉(印封)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계속하여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능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여 요한이 애곡(哀哭)할 때에,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 : 5)고 말씀하셨다. 여기의 다윗의 뿌리에서 탄생한 사자(獅子)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 와 같이 그리스도가 인류 앞에 오랫동안 일곱 인()으로 봉하여 비밀로 남겨 두셨던 그 말씀의 인봉을 떼시어 성도들에게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주실 때가 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 : 11)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2 : 17∼18)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모로 보아서 말세(末世)에는 반드시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II.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취할 자세

 

복 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흐름을 보면, 낡은 것이 끝나려 할 때 새로운 것은 시작된다. 따라서 낡은 것이 끝나는 점이 바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낡은 역사의 종말기(終末期)는 바로 새 역사의 시창기(始創期)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는, 같은 점에서 출발하여 각각 그 목적을 달리하여 가지고, 세계적인 결실을 하게 된 선()과 악()의 두 주권이 서로 교차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처한 인간들은, 내적으로는 이념과 사상의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며, 외적으로는 무기로 인한 알력과 투쟁 속에서 떨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말세에는 나라가 나라를 치고, 민족과 민족이 상쟁하며, 가족들이 서로 결투를 하리라(24 : 4∼9)는 성서의 기록대로 온갖 비참한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 세에 있어서 이와 같은 참상(慘狀)이 일어나는 것은 악주권(惡主權)을 청산하고 선주권(善主權)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현상이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참상 속에서 새 시대를 이룩하기 위한 선주권의 중심을 반드시 세우시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님 같은 분들은 모두 그러한 새 시대의 중심으로 세워졌던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기(轉換期)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새 역사의 동참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세우신 새 역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러한 새 시대의 섭리(攝理)는 낡은 시대를 완전히 청산한 터 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시대의 종말기의 환경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시대에 대하여는 상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섭리는 낡은 시대의 인습(因習)에 젖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새 시대의 섭리를 담당하고 나왔던 성현(聖賢)들이 모두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어 버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실례로서, 아직도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종말기였을 때에,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구약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단자(異端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었기 때문에, 종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살해당하고 마셨다.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5 : 38)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제 예수님은 다시 신약시대의 종말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셔서, 새 시대의 건설을 위한(21 : 1∼7) 새 진리를 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초림(初臨) 때에 유대인들로부터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으로 몰렸듯이(12 : 24), 재림(再臨) 때도 틀림없이 기독교 신도들에게 몰림을 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시면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그 세대에 버린 바 될 것이라고 예언 하셨던 것이다(17 : 25). 그러므로 역사의 전환기에 있어서 그대로 낡은 시대의 환경에 집착되어 안도하려는 사람들은 낡은 시대와 더불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타 락된 인간은 신령(神靈)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관(眞理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舊約聖書)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 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신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 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末世)에 있어서 극심한 심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령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처한 현세인(現世人)은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통하여 신령(神靈)한 것을 감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 음으로는 인습적인 관념에 집착되지 말고 우리의 몸을 신령에 호응하게 함으로써,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찾아진 그 진리가 완전히 자기의 몸에서 신령과 하나되어, 진정한 천적(天的)인 기쁨이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게 하여 주는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끝날의 성도들은 참된 구원(救援)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메 시아라는 낱말은 히브리 말로서 '기름 부음을 사람'이라는 뜻인데, 특히 왕()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선민(選民)들은 그의 선지자(先知者)들의 예언에 의하여,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세주(救世主)를 왕으로 보내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으니,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메시아사상이다. 이러한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아와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보통 구세주로 통한다.

 

메 시아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야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이 타락(墮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타락에 관한 문제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타락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타락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창조목적에 관한 문제를 해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하 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먼저 지상에 천국이 건설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地上天國)은 이루어지지 않고 지상지옥(地上地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후 하나님은 이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거듭해 내려오셨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이기 때문에 이 역사의 목적은 먼저 지상에 천국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이미 전편 제3장 제1절과 제2절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 있는 것이다.

 

1절 십자가에 의한 구원섭리

 

I.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예수의 목적

 

예 수님이 메시아로 강림(降臨)하셨던 목적은,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완전히 구원(救援)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므로, 결국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며, 따라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먼저 이루셔야 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 : 48)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창 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은 창조목적을 두고 보면,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 같이 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서 천국인(天國人)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타락인간을 천국인으로 복귀케 하여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6 : 10), 또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것이다(4 : 17). 그래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러 왔던 세례 요한도 역시 천국이 가까웠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3 : 2).

 

그 러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완전하게 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그의 심정(心情)을 체휼함으로써 신성(神性)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불가분(不可分)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원죄(原罪)가 없으므로 다시 속죄(贖罪)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구주(救主)가 필요 없게 되며, 타락인간에게 요구되는 기도나 신앙의 생활도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원죄가 없으므로 그들은 원죄 없는 선()의 자손을 번식하게 되며, 따라서 그 자손들에게도 속죄를 위한 구주가 필요 없게 된다.

 

II.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섭리가 완성되었는가

 

그 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과연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이 완성되어 모든 성도들이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함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게 되었는가? 인류역사 이래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신성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생활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속죄가 필요 없고, 기도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성도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같이 훌륭한 신앙자에게 있어서도 눈물겨운 기도와 신앙생활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7 : 18∼25).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구주의 대속함이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원죄 없는 자식을 낳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 부모가 여전히 자식에게 원죄를 유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러면 기독교 신도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의 실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의한 속죄(贖罪)가 우리의 원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창조본성을 완전히 복귀해 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듯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써는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그의 목적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재림(再臨)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이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는 다시 오셔서 그 뜻을 완성하시려는 것이었다.

 

그 러면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은 전혀 무위(無爲)로 돌아간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3 : 16).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으로 보아도 십자가 대속의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대속의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원죄까지 완전히 벗겨줌으로써 죄를 지으려 하여도 지을 수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시켜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어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인한 속죄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대 지성인들이 신앙을 교도(敎導)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밝히 알아야겠다.

 

III.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우리는 먼저 성경상에 나타난 사도(使徒)들의 언행(言行)을 중심삼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사 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느낀 뚜렷한 하나의 정념(情念)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김으로써 분개하고 서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을 통분히 여겼으며, 그들의 행위를 패역무도(悖逆無道)한 것으로 여겨 저주하였다(사도행전 7 : 51∼53). 그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도 공통적으로 당시의 사도들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내려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였다면 사도들이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정이겠지만,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루어진 그 섭리(攝理)의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도 분개하고 저주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온당치 않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 (豫定)에서 되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부르시어 저들을 보호 육성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고난과 시련으로써 인도하셨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위로하시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굳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을 지음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동방박사(東方博士) 시므온, 안나, 세례 요한 등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현현을 널리 증거하셨던 것이다.

 

특 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잉태(孕胎)될 때 천사(天使)가 나타나서 증거한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1 : 13), 그가 출생할 때에 되어진 기사(奇事)는 당시의 유대 성중(城中)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1 : 63∼66). 뿐만 아니라 광야에 있어서의 그의 수도생활(首都生活)은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고 생각케 할 정도로 놀랄만한 것이었다(3 : 15). 하나님이 이렇듯 위대한 세례 요한까지 보내시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게 하셨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 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이스라엘은 그를 메시아로 믿어야만 했었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고대해 왔던 그 메시아를 누가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을 것인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길에 내준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반()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언행(言行)으로 보아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메시아로 오셨던 그 전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의 모든 섭리가 그러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도록 언행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 : 29)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또 유대인들의 배신행위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시고 호소할 곳이 없어 성을 바라보고 우시면서, 하나님이 2천년 동안이나 애쓰시며 사랑으로 이끌어 온 이스라엘 선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성마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을 정도로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저주하시면서,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19 : 41∼44)고 명백히 그 무지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23 : 37)라고 하시어, 그들의 완고와 불신을 한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증거하고 있는 성경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5 : 39∼40)라고 슬퍼하셨다. 그는 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라고 서러워하시면서, 이어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 : 43∼46)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 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돌이키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여주셨던가.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바랑세불이 접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12 : 24).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정경(情景)을 보시는 예수님은 때로는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10 : 38)고도 말씀하셨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그들에게 화가 있으라고 분노를 퍼붓기도 하셨던 것이다(23 : 13∼36).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이와 같이 저들에게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언행을 하셨던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신 대로 그를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누가 그를 십자가의 죽음길로 몰아냈을 것인가!

 

우 리는 위에서 논증한 모든 사실로 보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의 결과로 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8절의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성구는 바로 이 사실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만 일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예정하신 길이었다면, 그는 당연히 가셔야 할 길을 걸어가시면서 무엇 때문에 할 만하면 그 죽음의 잔을 면케 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올리셨을 것인가(26 : 39). 실상 그것은 인간이 타락(墮落)된 이후 4천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애쓰셨던 지상천국이 유대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까지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연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요 한복음 3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광야(曠野)에서 모세를 믿지않게 되자 불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리뱀을 장대 끝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만민이 지옥으로 가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이 구리뱀과 같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후 그것을 쳐다보고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예견(豫見)하시면서 예수님은 서글픈 심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 수님이 예언하신 대로(19 : 44) 그가 돌아가신 후 이스라엘 선민이 쇠망(衰亡)한 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96절 이하에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 왕의 위()를 가지고 오셔서 영원히 멸하지 않을 왕국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잉태될 때에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 : 31∼33)는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 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선민을 불러 2천년간이나 고난 가운데서 이끌어 나오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시어 영원히 존속할 왕국을 이룩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다가 유대인들에게 몰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저들은 선민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 학대를 받아 나왔다. 이것은 그들이 신봉(信奉)해야 할 메시아를 도리어 살해함으로써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게 하였던 그 범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당하여 온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을 살해한 연대적 범죄(連帶的 犯罪)에 대한 형벌이었던 것이다.

 

IV.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의 한계와 예수 재림의 목적

 

만 일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예수님은 영육(靈肉) 양면의 구원섭리를 완수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예언(9 : 6∼7)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교시(1 : 31∼33) 그대로, 또 예수께서 친히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신 말씀(4 : 17)과 같이 그는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는 지상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었다.

 

하 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2 : 7). 이와 같이 영()과 육()으로 창조된 인간이므로, 타락도 역시 영육 아울러 된 것이었다. 따라서 구원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하셔야만 되는 것이다.

 

예 수님이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목적이 구원섭리를 완수하시려는 데 있었으므로, 그는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완성하셔야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포도나무로 신도들을 그 가지로 비유하셨고(15 : 5),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 : 20)고도 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써 영육 아울러 그와 하나가 되었더라면 타락인간도 영육 아울러 구원을 받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여 그를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으므로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마침내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을 믿어 그와 한 몸을 이룬 신도들의 육신도 그대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렇게 되어 아무리 독실한 신앙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贖罪)로써는 육적 구원은 완성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적인 원죄(原罪)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에게 원죄는 그대로 남아지게 되어 그는 또 원죄 있는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육신을 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죄로 말미암아 항상 육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탄 침범의 조건을 막기 위함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 : 17)한 것도 이와 같이 십자가에 의한 구속(救贖)으로도 근절되지 않은 원조로 인한 사탄 침범의 조건을 막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와 같이 예수님은 그의 육신이 사탄의 침범을 당함으로써 육적 구원섭리의 목적은 달성하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부활의 승리적인 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영적 구원의 기대를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신도들은 영적 구원섭리의 혜택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한 구원은 영적 구원뿐이므로 잘 믿는 신도들에게도 원죄(原罪)는 육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그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와 더불어 더욱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십가가로써 청산하시지 못한 원죄를 속하고 육적 구원을 완성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지상에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위 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을 받은 성도들은 원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사도(使徒)들 중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바울도 육적으로 들어오는 죄악의 길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던 끝에,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 ; 22∼25)고 말하였다. 이것은 영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육적 구원의 미완성에 대한 비탄을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또 요한일서 18절 내지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한 요한의 고백대로, 예수님의 십가가의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여전히 원죄 때문에 범죄자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 십자가에 대한 예언의 양면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사야 55장에 그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 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만이 성경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리(原理)를 알고 성서를 다시 읽어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이미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이사야 9, 11, 60장 등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천사(天使)를 보내시어 장차 잉태될 예수님이 생전에 유대인의 왕이 되어 영영세세(永永世世)토록 소멸되지 않는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실 것을 예언케 하셨던 사실을 알게 된다(1 : 31∼33). 그러면 어찌하여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완성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전편 제1장 제5절 Ⅱ 2).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인간 시조(始祖)는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러한 예를 성서에서 들어보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것을 안 따먹고 완성될 수도 있는 반면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사실과 같이 따먹고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한 편 또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위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의 조건으로 십계명(十誡命)을 주셨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인간은 그것을 지키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 멸망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애 급(埃及)에서 가나안 복지(福地)를 향하여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세워야 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혹은 불순종(不順從)하여 못 들어가게 될 수도 있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도록 예정하시고(3 : 8) 그에게 이를 명령하셨었으나, 불신으로 인하여 그들은 모두 광야(曠野)에서 쓰러지고 그 후손들만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와 같이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이 수행해야 될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도 없고, 혹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그 어느 한 면의 결과를 이루어 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메 시아를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지만, 오시는 메시아를 믿고 안 믿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메시아를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혹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믿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나타날 양면의 결과에 대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의 기록과 같이 유대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지만, 한편 이사야 9, 11, 60장과 누가복음 131절 이하의 기록과 같이 저들이 메시아를 믿고 모심으로써 영광으로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의 예언만이 이루어지고, 이사야 9, 11, 60장 및 누가복음 131절 이하의 예언은 모두 재림하셔서 이루어질 말씀으로 남아진 것이다.

 

.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

 

복 음서(福音書)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이것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16 : 23)고 하신 책망으로 미루어 그의 십자가 죽음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어찌하여 베드로를 대해 그토록 책망하셨을 것인가? 그러나 실에 있어 예수님은 그때 이미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어차피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완성하실 수 없게 되자, 영적 구원만이라도 이루시려고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서 부득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결정하고 계시던 때였다(9 : 31). 그런 때에 베드로가 이 길을 만류한 것은 결국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구원섭리의 길마저 방해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책망하셨던 것이다.

 

다 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다 이루었다(19 : 30)고 최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로써 구원섭리의 전목적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아시게 된 후부터 예수님은 육적 구원은 재림(再臨) 후의 섭리로 미루시고, 영적인 구원섭리의 기대만이라도 조성하시려고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말씀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적인 구원섭리의 목적으로 세우셨던 십자가에 의한 영적인 구원섭리의 기대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우 리가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하여는, 첫째로 기도에 의한 신령(神靈)으로 하나님과 직적 영교(靈交)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성서를 바르게 읽음으로써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4 : 24)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 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聖徒)들은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던 근본 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 구원이 예수님이 띠고 오셨던 사명의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다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억울하고도 비통한 심정을 풀어드리고 그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신부가 지상에 생겨나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와 더불어 그 뜻을 이루시겠다고 재림(再臨)하실 것인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 : 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무지를 예상하시고 개탄하신 말씀이었다.

 

우 리는 여기에서 성서를 중심하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죽음의 길을 가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영교로써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 보면 더욱 명백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영통(靈通)을 하지 못하면 영통하는 딴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서라도 바른 신앙을 가져야만 끝날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2절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요한

 

엘 리야가 재림(再臨)하리라는 것은 이미 말라기 선지(先知)가 예언했던 바였고(4 : 5), 세례 요한이 바로 재림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언이었다(17 : 13, 11 : 14).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자(再臨者)였다는 사실은 일반 유대인은 물론 세례요한 자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1 : 21),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의혹(11 : 3)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들의 불신은 날로 더하여지게 되어, 마침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I. 엘리야의 재림을 중심한 유대인들의 심적 동향

 

통 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있어서 솔로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전이상(聖殿理想)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성전이상을 다시 찾아 세워 실체성전 된 메시아를 맞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 대선지(四大先知)12소선지(十二小先知)를 보내시어 사탄 분립의 역사를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특별선지(特別先知) 엘리야를 보내시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케 하여 바알신을 멸하신 것도 이러한 이상실현(理想實現)의 뜻을 가로막는 사탄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고 昇天하였기 때문에(왕하 2 : 11).

 

메 시야를 맞기 위하여 사탄을 분립해 가는 노정에 다시 사탄이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실체성전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이에 앞서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사탄 분립의 사명을 계승 완수하게 하는 섭리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섭리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先知者 말라기는 엘리야가 재림해야 할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4 : 5).

 

선 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간곡한 소망은 물론 메시아의 강림(降臨)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유대인들이 갈망해 왔던 것은 엘리야의 재림(再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를 통하여 메시아의 강림에 앞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게 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마고 분명히 약속하셨었기 때문이다(4 : 5).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900여년 전에 승천한 선지자로서(왕하 2 : 11), 그는 분명히 영계(靈界)에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인 사실이 있다(9 : 31). 이와 같이 되어 유대 민족은 하늘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가 다시 올 때에는 전에 승천하던 모양으로 반드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이,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듯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대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소식은 없고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메시아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예루살렘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10절을 보면,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4 : 5) 엘리야는 어디 와 있는가 하는 공박(攻駁)을 받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 답변에 궁하여 예수님께 직접 문의한 결과(17 : 10), 예수님은 바로 세례 요한이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고 대답해 주셨다(11 : 14, 17 : 13).

 

제 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다른 유대인들이야 어떻게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이 자기의 증언을 즐겨 받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11 : 1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요한복음 121절의 기록이 보이는 바 이미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명백히 부인한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II. 유대민족의 갈 길

 

예 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11 : 14), 이와 반대로 장본인인 세례 요한 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으니 유대민족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따라서 좌우될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먼저 당시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예 수님은 빈천(貧賤)한 목수(木手)의 가정에서 생장(生長)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安息日)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다(12 : 1∼8).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원의 푯대인 율법(律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5 : 17).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몰린 바 되어 하는 수 없이 어부(漁夫)를 불러 제자를 삼았으며 세리(稅吏)와 창기(娼妓)와 죄인(罪人)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11 : 19).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21 : 31) 주장하셨던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다(7 : 37∼38).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도 용납(容納)되기 어려운 일이어든, 하물며 음행(淫行)하는 여인을 돌로 쳐죽여도 말못하던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倫理社會)에 있어서 어떻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을 칭찬하셨던 것이다(7 : 44∼50, 26 : 7∼13).

 

한 편 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시고(14 : 9), 자기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14 : 6), 자기를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10 : 37, 14 : 26).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므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여 조소(嘲笑)하였던 것이다(12 : 24)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겨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당시의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례 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세 례 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祭司長)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1 : 13). 그의 부친이 지성소(至聖所)에서 분향할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함으로써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하자마자 그 입이 열린 기사이적(奇事異蹟) 등으로 인하여 온 유대 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다(1 : 9∼66). 뿐만 아니라 광야(曠野)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연명하면서 수도(修道)하던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다(3 : 15, 1 : 20).

 

위 에서 밝힌 바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 요한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과연 그들이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이 세례 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 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말을 믿게 되자, 예수님의 이 증언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僞證)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妄言者)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와 같이 예수님이 망언자로 몰리게 될 때,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의 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보니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메시야가 오셨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말라기의 예언(豫言)을 믿는 처지에 서면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 서면 엘리야가 온 다음에야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성경을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거기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예언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유대인들은 부득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III. 세례 요한의 불신

 

위 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祭司長)이나 전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숭경(崇敬)하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3 : 15, 1 : 20). 따라서 만일 세례 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야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 례 요한은 일찍이 자기는 물로 세례(洗禮)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하였다(3 : 11).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36절을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敎示)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23절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28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言明)한 기록이 있다.

 

그 러므로 세례 요한은 응당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설혹 세례 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받아 알고 있는 위에(1 : 33∼34) 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 무지하여(11 : 19)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1 : 21) 그 후에도 섭리의 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례 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서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사실상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洗禮)를 주고 그를 증거함으로써 그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 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 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聖靈)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腹中)에 있었던 세례 요한 두고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1 : 75)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의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20절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 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결례(潔禮)를 중심하고 싸운 일까지 있었다(3 : 25).

 

그 리고 요한복음 330절에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입장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할 때에 그가 쇠()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 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 례 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인 역사(役事)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특히 옥중(獄中)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言行)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 : 3)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3절 내지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 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腹中)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1 : 75),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어린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노정(公生涯路程)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 : 4∼5)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가 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11 : 5) 하신 말씀에는, 세례 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선민(選民)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 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 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富饒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 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사 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 다니는 천 명보다도 먼저 천 명을 영도(領導)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그 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객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떼를 불러모아야만 하셨다. 이처럼 불청객(不請客)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11 : 6)라고 하는 심판(審判)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세 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3 : 15, 1 : 20∼21).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失足)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 요한의 운명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질 문하러 왔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요한이 본시 가장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 : 11)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 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과 거에 왔다 간 수 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하였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적인 입장에서 보아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세례 요한은 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자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은(1 : 75) 도리어 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 시 그 다음 절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느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여 온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위()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 수님은 결론적으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 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 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8절에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여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지혜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고 한탄한 사실을 볼 수 있다.

 

IV.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우 리는 상술(上述)한 바(2I)에 의하여,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계승 완성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가복음 117절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의 심령(心靈)과 능력(能力)으로 주 앞에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義人)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엘리야의 재림자(再臨者)가 되는 것이다.

 

이 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부활론(復活論)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엘리야는 땅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재림하여 그가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그를 협조함으로써, 자기가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세례 요한의 육신을 세워 그를 통하여서 완수하려 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육신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는 엘리야와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V.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 리는 위에서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무지와 불신은 유대인들의 불신을 초래하였고, 유대인들의 불신은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의 길을 가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천적(天的)인 비밀을 밝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견지에서만 성서를 보아왔던 까닭이다.

 

우 리는 인습적인 신앙 관념과 구태(舊態)를 벗어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고루한 신앙태도를 단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세례 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 요한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믿는 것도 부당하겠거니와, 사실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 요한을 잘못 알고 다한 것으로 믿는 것도 잘못된 신앙임에 틀림없다.

 

우 리는 신령면(神靈面)으로나 진리면(眞理面)으로나 항상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세례 요한의 진상을 밝혀 왔지만, 누구든지 영통(靈通)하여서 영계(靈界)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5장 부활론

 

 

성 서(聖書)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파묻혀 삭아져 버린 모든 성도(聖徒)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原狀)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나올 것으로 보아야 한다(살전 4 : 16, 27 : 52).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처지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1절 부활

 

부활(復活)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부활의 의의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槪念)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I.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의 개념

 

누 가복음 960절의 기록을 보면, 부친(父親)을 장사(葬事)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가려고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죽음과 삶에 각각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째는 장사를 치러야 할 그 제자의 부친과 같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사(生死)의 개념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은 그 육신이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그 죽은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모여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그 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현재 그 육신(肉身)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던가?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버린 자리, 즉 사탄의 주관권내(主管圈內)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사탄 주관권 내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서 그의 뜻대로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육신이 활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관권을 벗어나서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기준으로 보아 죽은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31절에 기록된 바, 비신앙적인 사데교회의 신도들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 말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반면에 이미 육신(肉身)의 목숨이 끊어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靈人體)가 영계의 천상천국(天上天國)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 내에 있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11 : 25)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주관권 내에서 사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고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영인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관권 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예 수님은 또 계속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 살아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후일 그가 죽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지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서 여전히 삶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위의 성구에 보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 있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그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하신 누가복음 1733절의 말씀도,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은 비록 그 육신이 활동하고 있어도 그는 죽은 자요, 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육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보면 설혹 그 육신은 흙 속에 묻혀 썩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존(永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II. 타락으로 인한 죽음

 

우리는 위에서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 중 어느 것이 인간 시조(始祖)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초래된 죽음일 것인가?

 

하 나님은 원래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어도 노쇠(老衰)하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930세에 죽어 그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락 때문에 온 죽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육신은 영인체(靈人體)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옷이 더러워지면 벗는 것 같이 육신도 노쇠하면 벗어버리고 그 영인체만이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 질로 된 생물체(生物體)로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이 창조원칙(創造原則)을 벗어날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육신이라고 해서 영존(永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지상에서 육신을 쓴 채로 영존한다면, 영인체의 갈 곳인 무형세계는 당초부터 창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무형세계는 타락한 인간의 영인체가 가서 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완성한 인간들이 지상에서 생활하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그 영인체가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서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 락인간(墮落人間)이 육적인 생명에 강한 미련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이 원래 육신을 벗은 후에는 보다 아름답고 영원한 무형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타락으로 인하여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어서의 육신생활(肉身生活)과 무형세계에 있어서의 영인생활(靈人生活)은 애벌레와 나비의 생활에 비교할 수 있다. 만일 애벌레에게 의식이 있다고 하면, 마치 인간이 육신생활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고 있듯이 그도 역시 허물 속의 삶에 애착을 느끼어 벗고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벌레가 일단 나비가 된 후에는 향화(香花)와 감밀(甘蜜)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이과 영인과의 관계는 바로 이 애벌레와 나비와의 관계와 흡사한 것이다.

 

만 일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지상인들은 같은 지상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인들과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는 것이 결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완성되어 생활하다가 노쇠한 후에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게 될 것이다.

 

위 에서 논술한 두 가지의 죽음 중에서,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탄주관권 내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곧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성서(聖書)를 중심하고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타 락으로 인한 죽음은 곧 인간 시조(始祖)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음으로써 초래된 바로 그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그 죽음은 어떠한 죽음이었을 것인가? 창세기 2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은 따먹은 그 ''을 기해서 정녕 죽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아담과 해와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상에서 육신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손을 번식하여 마침내 오늘의 타락한 인류사회(人類社會)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그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주관권(善主管圈)으로부터 사탄의 악주관권(惡主管圈)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 러면 우리는 성서(聖書)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요한일서 314절에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상(地上)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뜻으로서 로마서 623절에는 죄의 삵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고 하였고, 또 로마서 8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III. 부활의 의의

 

우 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復活)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聖徒)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태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 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태로 부활 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靈人體)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주관권내에 떨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인 것이 된다.

 

성 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 편 또 고린도전서 15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IV. 부활은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선 악과(善惡果)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2 :17)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이(變異)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復活)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聖神)으로 중생(重生)한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입장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입장에 있지만 그들의 외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 미 위에서 예증(例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따라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후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 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 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心靈)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우거(寓居)하는 전(殿) 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聖化)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약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하게 되면, 그 건물의 외형에 있어서는 하등의 변화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2절 부활섭리

 

I. 부활섭리는 어떻게 하시는가

 

부 활(復活)은 타락인간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자체로 복귀하는 과정적인 현상을 의미 하는 것이므로, 부활섭리(復活攝理)는 곧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의미한다. 복귀섭리는 곧 재창조섭리(再創造攝理)이므로 부활섭리는 또한 재창조섭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부활섭리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섭리하시게 되는 것이다.

 

첫 째로, 부활섭리역사(復活攝理歷史)에 있어서 그 사명적인 책임을 맡았던 인물들이 비록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늘 뜻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타락인간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터전을 넓혀 왔던 것이다. 따라서 후대의 인간들은 역사가 흐를수록 그 이전의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이 쌓아 올린 심정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섭리는 이러한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서 이루어지게 된다.

 

둘 째로,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하나님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창조된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되도록 창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섭리(復活攝理)를 하시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서의 섭리를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타락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로, 창조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하여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의한 영인체의 부활도 역시 지상의 육신생활을 중심하고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넷째로, 인간은 창조원리를 따라 성장기간(成長期間)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대한 부활섭리도 그 섭리기간(攝理其間)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야 완성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II. 지상인에 대한 부활섭리

 

1. 부활기대섭리

 

하 나님은 아담가정에서부터 부활섭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뜻을 받들고 나선 인물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그 섭리는 연장되어 나오다가, 2천년 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찾아 세움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 시대에 들어 부활섭리를 하실 수 있는 그 기대를 조성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2. 소생부활섭리

 

부 활섭리(復活攝理)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아브라함 때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소생부활섭리(蘇生復活攝理)를 해 나오셨다. 따라서 이 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하나님의 소생 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생부활섭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섭리를 위하여 주셨던 구약(舊約)의 율법(律法)의 말씀을 인간이 믿고 행함으로써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행의시대(行義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인체가 육신을 터로 하여 소생부활을 함으로써 영형체(靈形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영형체를 이룬 인간들이 육신을 벗으면 그 영인체는 영형체급의 영계에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3. 장성부활섭리

 

예 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섭리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림기(再臨期)까지 연장되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연장된 2천년 기간은 영적 구원에 의하여 장성부활섭리(長成復活攝理)를 해온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하나님의 장성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장성부활섭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섭리를 위하여 주셨던 신약(新約)의 말씀을 인간이 믿음으로써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여 의로움을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신의시대(信義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복음(福音)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인체가 육신을 터로 하여서 장성 부활을 함으로써 생명체(生命體)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생명체급의 영인체를 이룬 인간들은 육신을 벗은 후에 생명체급 영계인 낙원(樂園)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4. 완성부활섭리

 

재 림(再臨)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영육(靈肉) 아울러 부활하여서 부활섭리를 완성하는 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완성 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재림주님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새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다(전편 제3장 제5I). 그러므로 완성부활섭리는 신·구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시는 새 말씀(이 말씀은 성약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을 인간들이 믿고 또 주님을 직접 모심으로써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의로움을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시의시대(時議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재림주님을 믿고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육 아울러 완전히 부활되어 그의 영인체는 생령체(生靈體)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생령체를 완성한 인간들이 생활하는 곳을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 한다. 그리고 지상천국에서 생활하던 완성한 인간이 육신을 벗으면 생령체의 영인으로서 생령체급의 영계인 천상천국(天上天國)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5. 천국과 낙원

 

이 제까지의 기독교 신도들은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낙원(樂園)과 천국(天國)을 혼동해 왔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지상에 강림하셨던 목적이 완성되었더라면 그때에 이미 지상천국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상천국에서 생활하던 완성한 인간들이 육신을 벗고 생령체를 완성한 영인체(靈人體)로서 영계에 갔더라면 천상천국도 그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생령체를 완성한 인간은 나타나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생령체의 영인들이 생활하도록 창조된 천상천국에 들어간 영인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천국은 아직도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 주민이 되어야 할 인간을 중심삼고 보면 아직 천상천국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 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던가? 그것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던 본래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을 이루지 못하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끝내 믿어 주지 않았던 그 가운데서, 자신을 믿어준 오직 한 사람이었으며 십자가의 동반자였던 강도에게 예수님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23 : 43).

 

결 국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소망적인 과정에서는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강조하셨지만, 이 뜻을 못 이루고 떠나시는 십자가의 죽음길에 임해서는 실상 낙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이 된 사실을 표명하셨던 것이다. 낙원은 이렇듯 지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체를 이루어 가지고 육신을 벗고 간 영인들이 천국문이 열릴 때까지 머물러 있는 영계(靈界)를 말하는 것이다.

 

6. 말세에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

 

장 성기 완성급(長成期 完成級)에서 타락되었던 인간이, 복귀섭리에 의하여 소생 구약시대(蘇生 舊約時代)를 지나 장성 신약시대(長成 新約時代)의 완성급까지 복귀되어 인간시조가 타락되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시대를 말세(末世)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기 직전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그때를 세계적으로 복귀하는 시대이므로, 지상에는 영통(靈通)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많이 부어 주시마고 약속하셨던 것(2 : 17)은 바로 이러한 원리적인 근거에 의하여서만 그 이유가 해명되는 것이다.

 

말세에는 '너는 주()'는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흔히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재림주(再臨主)인 줄로 알고 바른 길을 찾아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원 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하는 주가 되라고 축복하셨다(1 : 28).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이 복귀섭리에 의하여 장성기(長成期) 완성급(完成級)까지 영적으로 복귀되어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기 직전의 입장과 맞먹는 심령기준(心靈基準)에 달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피조세계의 주가 되라고 축복하셨던 그 입장을 복귀했다는 뜻에서 '너는 주라'는 계시를 주시는 것이다.

 

말 세에 들어서 이와 같이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이 독실한 성도들은, 예수님 당시에 그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던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의 자리에 서게 된다(1 : 23). 따라서 그들에게도 각자가 맡은 바 그 사명분야에 있어서, 재림하실 예수님의 앞길을 곧게 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각자의 사명분야에 있어 재림주님을 위한 시대적인 대신 사명자로 택함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주라는 계시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영 통인(靈通人)들이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았을 때, 이와 같은 원리적인 사정을 알지 못하여 자기가 재림주인 것으로 잘못 알고 행동하다가는 그는 반드시 적그리스도의 입장에 서게 된다. 말세(末世)에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리라고 예언하신 이유는 실상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 통인(靈通人)들은 모두 제각기 통하고 있는 영계(靈界)의 계위(階位)와 계시의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고전 15 : 41), 피차가 상충적인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통인들은 사실상 모두 동일한 영계를 찾아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대하고 있는 각자의 환경, 위치, 특성, 영계도 각각 다른 모양으로 인식되어 상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복 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각각 섭리의 부분적인 사명을 담당하고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통인들과의 횡적인 관계를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각자가 받들고 나아가는 하늘의 뜻이 각각 다른 것 같이 여겨져서 상충역사(相衝役事)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각자로 하여금 복귀섭리의 목적을 달성케 함에 있어서, 그들이 제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결려하시기 위하여 '네가 제일이라'는 계시를 주시기 때문에 횡적인 상충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맡은 부분적인 사명분야에 있어서는 사실상 그가 제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계시를 내리시기도 하는 것이다.

 

한 편 독실한 신양자들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 직전의 심령기준(心靈基準)까지 성장하여 영통하게 되면, 아담과 해와가 넘지 못하고 타락한 것과 같은 시험으로 인하여 타락되기 쉬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원리를 모르는 한 이러한 입장을 극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인(道人)들이 이 시험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오랜 동안 수도(修道)한 공적을 일조일석(一朝一夕)에 허사로 돌려보내곤 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러면 영통인들의 이러한 혼란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빨리 이루시기 위하여 그 섭리의 과정에 있어서 부분적인 사명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분담시켜 그 개체들을 종적으로만 대하여 나오시기 때문에,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모든 영통인들은 상호간에 횡적인 상충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역사의 종말기(終末期)에 이르면 그들 각자의 사명이 모두 복귀섭리의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분담되어진 것임을 다 함께 깨닫고, 서로 횡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로 결합하여 복귀섭리의 전체적인 목적을 이루게 하시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시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 모든 영통인(靈通人)들은 자기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 온 고집을 버리고, 보다 고차적이며 전체적인 진리의 말씀 앞에 나와 자기 자신의 섭리적인 사명과 위치를 바로 깨달아야만, 횡적인 상충에서 일어났던 지난날의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시에 각자가 걸어온 신앙노정(信仰路程)에 대한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게 될 것이다.

 

7. 첫째 부활

 

'첫째 부활'이라 함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가 시작된 이후 재림역사(再臨役事)에 의하여서 맨 처음으로 인간이 원죄를 벗고 창조본연의 자아(自我)를 복귀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게 하는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따 라서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유일한 소망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재림 주님이 강림하시게 될 때, 맨 먼저 그를 믿고 모시고 따라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의 전체적이며 또한 세계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시는 그의 일을 협조함으로써, 모든 인간에 앞서 먼저 원죄를 벗고 생령체급 영인체(生靈體級 靈人體)를 이루어 창조목적을 완성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성경에 표시된 144천 무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예 수님이 재림하셔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수하시기 위하여는,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하늘 뜻을 받들고 나오다가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모든 성현들의 처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는 대신자들을 재림주님이 그 일대에서 횡적으로 찾아 세워 사탄세계에 대한 승리의 기대(基臺)를 닦아 놓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재림주님이 오셔서 찾아 세워야 할 성도들이 그 전체 수가 바로 요한계시록 141절 내지 4절과 요한계시록 74절에 기록되어 있는 144천 무리인 것이다.

 

하 나님의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가장 복귀의 사명자였던 야곱은 12자식을 중심하고 출발하였고, 민족 복귀를 위하여 출발하였던 모세는 12지파(支派)를 거느렸는데, 이 각 지파가 다시 12지파형으로 번식하면 144수가 된다. 세계 복귀의 사명자로 오셨던 예수님은 영육(靈肉) 아울러 이 144수의 수를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12제자를 세우셨으나,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영적으로만 이것을 탕감복귀하여 나오셨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노아로부터 야곱까지의 종적인 12대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야곱이 12자식을 세웠던 것과 같이, 재림주님은 초림 이후 영적으로만 144파형을 세워 나왔던 종적인 섭리노정을 영육 아울러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144의 수에 해당하는 일정한 필요수의 성도들을 찾아 세우셔야 하는 것이다.

 

III. 영인에 대한 부활섭리

 

1. 영인들이 재림부활하는 이유와 그 방법

 

창 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의 영인체(靈人體)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생소(生素)와 육신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생력요소(生力要素)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서만 성장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인체는 육신을 떠나서는 성장할 수 없으며, 또한 부활(復活)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지상의 육신생활(肉身生活)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해 버린 영인들이 부활하기 위하여는, 지상에 재림(再臨)하셔서 자기들이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이루지 못하였던 그 사명 부분을, 육신생활을 하고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협조하여 그것을 이루게 함으로써 지상인들이 육신을 통하여 대신 이루어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유다서 114절에 끝날에 주님과 함께 수만 성도가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러면 영인(影人)들은 어떤 방법으로써 지상인(地上人)들로 하여금 뜻을 이루도록 협조하는가? 지상의 성도들이 기도 및 기타 영적인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영인들의 상대가 되면, 그 영인들은 재림하여서 그 지상인들의 영인체와 상대기준(相對基)을 조성하여 역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인들은 지상인들로 하여금 불을 받게 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등 여러 가지의 능력을 행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입신상태(入神狀態)에 들어가서 영계의 사실을 보고 듣게도 하고, 혹은 계시(啓示)와 묵시(默示)에 의하여 예언을 하기도 하며, 그 심령에 감명을 주는 등 여러 면에 걸쳐 성신의 대신 역사를 함으로써, 지상인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어 나아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2. 기독교를 믿고 간 영인들의 재림부활

 

(1) 장성재림부활

 

지 상에서 율법(律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간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영형체급 영인(靈形體級靈人)들은, 메시아 강림 후에 전부 지상에 재림하여서 지상 성도들로 하여금 뜻을 이루어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이렇듯 재림 협조한 그 영인들도 그들의 협조를 받은 지상의 성도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아, 함께 생명체를 이루어 가지고 낙원(樂園)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장성 재림부활(長成再臨復活)이라고 한다.

 

이 에 관한 실례를 성경 가운데 들어보기로 하자. 마태복음 173절에 엘리야가 영인체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앞에 나타난 데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엘리야는 그대로 영계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마태복음 1712절을 보면, 예수님은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가 세례 요한에게 재림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까지 대신 이루도록 협조함으로써 재림부활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였으므로, 사명으로 보면 세례 요한의 육신은 곧 엘리야의 육신의 대신도 되었었기 때문이다.

 

한 편 마태복음 2752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무덤에서 자고 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흙 속에서 이미 썩어 없어져 버릴 그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태로 육신을 쓰고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형체급(靈形體級)의 영인체로서 영계에 머물러 있었던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영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혜택권내에 있는 지상 성도들을 생명체(生命體)를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그들을 힘입어 자기들도 함께 생명체를 이루기 위하여 영적으로 재림한 것을 보고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만 일 성경의 문자대로 구약시대의 영인(靈人)들이 무덤에서 육신을 쓰고 다시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을 것이니,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聖徒)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을 유대인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에 관한 사적은 반드시 성서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밖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무덤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그 성도들은 영안(靈眼)이 열린 신도들만이 잠깐 동안 볼 수 있었던 영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의하여서 갈 수 있는 낙원에 비교해 볼 때, 구약시대의 영인들이 머물러 있던 곳은 보다 어둡고 괴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무덤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2) 완성재림부활

 

신 약시대(新約時代)에 지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낙원으로 간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들은 메시아가 재강림(再降臨)하신 후 전부 지 상에 재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인들은 지상의 성도들로 하여금 재림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생령체급(生靈體級)의 영인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그들도 동일한 혜택을 받아서 생령체(生靈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상의 성도들이 육신을 벗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그 영인들도 그들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섭리를 완성재림부활섭리(完成再臨復活攝理)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섭리를 두고 볼 때에, 영인들이 지상인들을 협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과적으로 보아 지상인들도 영인들의 부활역사(復活役事)를 협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히 브리서 1139절 이하에 이 사람들(구약시대 성현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천국 들어가는 허)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지상인)를 위하여 더 좋은 것(천국)을 예비하셨은즉 우리(지상인)가 아니면 저희(영인들)로 온전함(천국인)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된 말씀은, 결국 위에서 설명한 사실을 실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 구절은 영계(靈界)에 있는 모든 영인들은 지상인의 협조를 받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다는 원리를 증거한 것이다. 마태복음 1818절에 기록된 바 무엇이든지 너희(지상성도)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성도들이 풀어 주지 않으면, 영인들에게 맺혀진 것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었다.

 

이 와 같이 영인(靈人)들은 지상의 성도들에게 재림(再臨)하여서 그를 협조함으로써만 부활(復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 161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국문의 열쇠를 지상 성도들의 대표로 베드로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천국문을 지상에서 열도록 하셨던 것이었다.

 

3. 낙원 이외의 영인들의 재림부활

 

먼 저 기독교(基督敎) 이외의 타종교(他宗敎)를 믿고 간 영인들은 어떻게 하여서 재림부활(再臨復活)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들끼리 어떠한 목적을 공동으로 이루려면 반드시 서로 상대기준(相對基準)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지상 인간과 영인들도 공동으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부활을 위하여 재림하는 영인들은, 자기들이 지상에 생존하였을 때에 신봉(信奉)하였던 것과 같은 종교를 믿고 있는 지상인 중에서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신도를 택하여 가지고 그에게 재림한다. 그리하여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협조함으로써 마침내 그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둘 째로는, 지상에서 종교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양심적으로 살다 간 선영인(善靈人)들은 어떻게 재림부활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원죄(原罪)를 벗지 못한 타락인간 중에는 절대적인 선인(善人)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선령(善靈)이라고 하는 것은 악성(惡性)보다 선성(善性)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영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영인들은 지상의 선인들에게 재림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마침내 그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된다.

 

셋 째로는, 악영인(惡靈人)들은 어떻게 재림부활하는가를 알아보자. 마태복음 2541절에 마귀와 그 사자라고 한 말이 있다. 이 사자(使者)는 바로 마귀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악영인체(惡靈人體)를 말하는 것이다. 세칭 유령(幽靈)이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영물(靈物)은 바로 이러한 악영인체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악령들도 역시 재림하여 가지고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러나 악영인들의 역사(役事)가 모두 다 재림부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벌로써 지상인의 죄를 청산하려 하셨던 것에 대한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세워졌을 때 비로소 그 악영인들은 재림부활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악령의 역사가 어떻게 하늘을 대신하여 심판의 행사를 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여 기에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이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인 혜택권으로부터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옮겨질 수 있는 한 지상인(地上人)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나 혹은 그 선조가 지은 어떠한 죄가 남아 있으면, 그에 해당하는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 그 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때에 하늘은 악영인(惡靈人)들로 하여금 그 죄에 대한 벌로서 이 지상인에게 고통(苦痛)을 주게 하는 역사를 하게 하신다. 이런 경우 이 지상인이 그 악영인들이 주는 고통을 감수하고 잘 넘어가면, 이것을 탕감조건으로 하여 그는 가정적인 혜택권으로부터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악영인도 그에 해당하는 혜택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서 복귀섭리는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 가정적인 혜택권에서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민족적인 것으로, 나중에는 세계적인 것으로 점차 그 혜택의 범위를 넓혀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적인 혜택권으로 넘어갈 때마다, 그 섭리를 담당한 인물은 반드시 그 자신이나 혹은 그 선조들이 지은 죄에 대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그것을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이렇게 악령(惡靈)들의 역사(役事)로써 지상인의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경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 째로는, 악영인(惡靈人)으로 하여금 직접 그 지상인(地上人)에게 접하여 역사하게 함으로써 그 지상인이 스스로 청산해야 할 죄에 대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둘째로는 그 악영인이 어떤 지상인에게 직접 역사하려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범죄를 행하려는 다른 지상의 악인(惡人)에게 그 악영인을 재림하게 하여서, 그 악인으로 하여금 실체로써 그 지상인에게 악의 역사를 하게 함으로써, 그 지상인이 스스로 청산해야 할 죄에 대한 탕감조건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이 러한 경우 그 지상인이 이 악령의 역사를 당연한 것으로서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는 자기나 혹은 그의 선조가 지은 죄에 대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되므로, 그 죄를 청산하고 새 시대의 혜택권내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악영인들의 역사는 하늘을 대신하여 지상인의 죄에 대한 심판의 행사를 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 역사로 말미암아 이 악영인들도 그 지상인과 같은 혜택을 받아 새 시대의 혜택권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IV. 재림부활로 본 윤회설

 

하 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그 전체적인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각 개체를 부르시어 그 개체에 적합한 사명을 분담시켜 나오셨다. 그리고 인간은 이 사명을 계속적으로 그 동일한 형의 개체에로 전승하면서,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 그 분담된 사명분야를 점차적으로 완수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그 런데 복귀섭리는 개인에서 출발하여 가정과 민족을 거쳐 세계를 넘어 천주(天宙)까지 복귀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개체에 맡겨진 사명은 비록 부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형은 개인형에서 시작하여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각 형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내려오는 것이다. 성서에서 그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개인형 또는 가정형이었고, 모세는 민족형이었으며, 예수님은 세계형이었다.

 

그 런데 지상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영인(靈人)들은, 각각 자기들이 지상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사명을 맡은 동형(同型)의 지상인에게 재림하여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이 때에 그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자기 자신의 사명도 이루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 지상인의 육신은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육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그 지상인은 그를 협조하고 있는 영인의 재림자(再臨者)가 되는 것이므로 그 지상인은 흔히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이름으로 대칭(代稱)신 불리우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지상인은 흔히 그 영인이 윤회환생(輪廻還生)한 실체인 것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 서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협조를 받아서 그의 뜻을 세워 나아갔기 때문에, 그는 엘리야가 지상에 있을 때에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까지 다해 주어야만 했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육신은 엘리야의 육신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던 것이다(본장 제2III 2)

 

말 세(末世)에 있어서 세계형(世界型)의 분담 사명을 맡은 지상인들은, 각각 과거에 그와 동형의 사명을 띠고 왔다 간 모든 영인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계승하여 완수해야 될 입장에 있다. 따라서 그 모든 영인들은 그 지상인들에게 재림하여 그를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에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인들의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그를 협조하는 모든 영인들의 재림자요, 따라서 그 지상인은 그 모든 영인들이 환생한 것 같이 보여지는 것이다. 끝날에 자기가 재림 예수요, 미륵불이요, 석가요, 공자요, 혹은 감람나무 혹은 생명나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윤회환생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재림부활(再臨復活)의 원리를 모르고 다만 그 나타나는 결과만을 보고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3절 재림부활에 의한 종교의 통일

 

I. 재림부활에 의한 기독교의 통일

 

이 미 본장 제 2III 2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낙원(樂園)에 머물러 있는 생명체급 영인(生命體級 靈人)들은 재림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써 생령체급 영인체(生靈級體 靈人體)를 완성할 수 있는 지상의 성도들에게 재림한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귀섭리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그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아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기(再臨期)에는 낙원에 있는 모든 영인들이 함께 지상성도들에게 재림하여 그들을 협조하는 역사(役事)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각 개체의 신앙태도와 그가 가지고 있는 천품(天稟), 그리고 뜻을 위하여 세운 그 선조들의 공적(功績) 등에 의하여, 그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입장에서, 지상성도들은 낙원(樂園)에 있는 영인들의 협조에 의하여 재림주님 앞으로 나아가 뜻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히 통일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II. 재림부활에 의한 다른 모든 종교의 통일

 

이 미 말세론(末世論)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제까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나왔던 모든 종교(宗敎)가 하나의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으로 점차 흡수되어 가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독교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과거 역사상에 나타났던 모든 종교의 목적까지 아울러 성취해야 되는 최종적인 사명을 가지고 나타난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으로 오실 재림주님은 결국 불교(佛敎)에서 재림할 것으로 믿고 있는 미륵불도 되는 것이고, 유교(儒敎)에서 현현할 것으로 고대하고 있는 진인(眞人)도 되는 것이며, 한편 또 많은 한국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정도령(正道令)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밖에 모든 종교에서 각각 그들 앞에 나타나리라고 믿고 있는 그 중심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와 같이 기독교에서 고대하고 있는 재림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 재림하리라고 믿고 있는 그 중심인물(中心人物)이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다가 타계한 영인들도 그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위치에 따라 그에 적응될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재림부활(再臨復活)의 혜택을 받기 위하여 낙원(樂園)에 있는 영인들과 같이 재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각자가 지상에 있을 때 믿었던 종교의 지상 신자들을 재림하신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를 믿고 모시어 뜻을 이루도록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결국 기독교를 중심하고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III. 재림부활에 의한 비종교인의 통일

 

어 떠한 종교도 믿지 않고 다만 양심적으로 생활하다가 타계한 영인들도 모두 재림부활의 혜택을 받기 위하여 각각 그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시기에 지상에 재림한다. 그리하여 그들도 양심적인 지상인으로 하여금 재림주님을 찾아 모시어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절 이하에 기록된 바, 예수님의 탄생 때 점성술자(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敬拜)하고 모시었던 일은 이러한 예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 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궁극적 목적은 전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각각 그 죄를 탕감(蕩減)하는데 필요한 어느 기간만 다 경과하면 지옥까지도 완전히 철폐하시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선의 목적이 이루어진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지옥이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나 복귀섭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까지도 불완전한 분이 되어지는 모순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타 락인간에 있어서도 그 어느 한 자녀라도 불행하게 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 그 부모의 심정이거늘, 하물며 하늘 부모로 계신 하나님에 있어서랴. 베드로후서 39절을 보면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져야 할 이상세계에 지옥이 영원한 것으로 남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829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바로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끝날에 있어서도 때가 이르면 악영인(惡靈人)들까지도 각각 동급의 지상의 악인들에게 재림하여 그들이 뜻을 위하여 나아가도록 협조함으로써, 결국 오랜 기간을 경과하면서 점차적으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통일될 것이다.

 

 

6장 예정론

 

 

고래(古來)로 예정설(豫定說)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성도(聖徒)들의 신앙생활의 실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성서에는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행·불행은 물론 타락인간의 구원(救援) 여부와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성구가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로마서 829절 이하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다. 또 로마서 915절 이하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으며, 로마서 9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911절 이하에는, 하나님은 복중(腹中)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長子)된 에서는 차자(次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예정설(完全豫定說)을 세워줄 수 있는 성서적인 근거는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정설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성서적인 근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 를 들면, 창세기 217절에 인간조상의 타락(墮落)을 막으시기 위하여 '따먹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결과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한편 또 창세기 66절에는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을 한탄하신 기록이 있는데,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타락되었다면 하나님 자신의 예정대로 타락된 인간을 두시고 한탄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 316절에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救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로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 구나 잘 알고 있는 성구인 마태복음 77절에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성사(成事)가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또 야고보서 514절에 환중(患中)에 있는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병이 나거나 낫거나 하게 되는 것도 역시 모두 하나님의 예정에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불가피한 운명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이 애써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종 래의 예정설(豫定說)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기도나 전도나 자선 행위 등 인간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절대적이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변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와 같이 예정설을 둘러싸고 찬 반 양론이 모두 세워질 수 있는 성서의 문자적인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리의 논쟁은 피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가 원리(原理)로써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예정론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절 뜻에 대한 예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豫定)을 논술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은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뜻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 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이러한 뜻을 예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을 세우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루지 못하셨던 그 뜻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예정하시고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 런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뜻을 선()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하며, ()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主體)이시므로 창조목적(創造目的)도 선이요,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어서 그 목적을 이루시려는 ''도 선이 아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데 반대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예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나 타락인간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우주의 멸망 등을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악의 결과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예정하신대로 되어진 악의 결과에 대하여 후회하셔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 나님은 타락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고(6 : 6), 또 불신으로 돌아간 사울 왕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자신의 일을 후회하셨던 것이니(삼상 15 : 11),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 예정으로 되어진 결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악의 결과는 모두 인간 자신이 사탄과 짝함으로써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뜻을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것은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인가?

 

하 나님은 유일(唯一)하시고 영원(永遠)하시며 불변(不變)하신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도 유일하고 불변하며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뜻에 대한 예정 또한 절대적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46 : 11). 이와 같이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의 대신 다른 인물을 세워서라도 끝까지 이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려 하셨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시어 그를 중심하고 그 뜻을 다시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뜻도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전편 제 4장 제 1II),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기필코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16 : 27).

 

또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한 섭리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려 하셨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노아가정을 세우시어 이 뜻을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노아가정이 또 이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시어 기필코 그 뜻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아벨로써 이루시지 못한 뜻을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이루려 하셨고(4 : 25), 또 모세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그 대신 여호수아를 택하여 이루려 하셨으며(1 : 5), 가룟 유다의 반역(反逆)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뜻을 그의 대신 맛디아를 택하시어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1 : 25).

 

2절 뜻 성사에 대한 예정

 

창 조원리(創造原理)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으나, 그 뜻 성사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러므로 아담과 해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실상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분담을 그들 자신이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2 :17)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있어서도, 그 사명을 담당한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수행함으로써만 그 뜻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는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불신으로 돌아감으로써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 성사는 부득이 재림 때에로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이미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퍼센트의 책임분담에 그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퍼센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에 대한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되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方舟)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도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그 ''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3 : 16). 그러나 인간들은 이 작은 책임분담마저 감당치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연장케 하였었다.

 

한 편 또 야고보서 515절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534절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며, 마태복음 78절에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성구(聖句)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에 의하여서만 ''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증시(證示)한 것이다.

 

그 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경미(輕微)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3절 인간에 대한 예정

 

아 담과 해와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선의 인간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인간조상이 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도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인가? 어떤 인물을 중심한 하나님의 '뜻 성사'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언제나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해야만 된다는 필수적인 요건이 따라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인물을 어떠한 사명자(使命者)로 예정하시는데 있어서도, 그 예정을 위한 95퍼센트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5퍼센트의 인간 책임분담 수행이 합하여서 그 인물을 중심한 뜻이 100퍼센트 완성됨으로써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신다. 그러므로 그 인물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인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를 들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실 때에 그가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선민(選民)을 가나안 복지(福地)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도자(領導者)가 되도록 예정하셨다(3 : 10).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20 : 7∼12, 20 : 24, 27 : 14).

 

한 편 하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실 때에도, 그가 충성으로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도리어 반역자(反逆者)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세우실 때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맡겨진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영광의 선민(選民)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이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백성은 쇠퇴해 갔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타락된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로 완전히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타락인간은 누구나 다 빠짐없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벧후 3 : 9).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했듯이 그의 재창조역사(再創造役事)인 구원섭리도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체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위한 예정에 있어서도 먼저 그 중심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 러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는 중심인물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는 먼저 복귀섭리를 담당한 선민의 하나로서 태어나야 하며, 다음으로는 같은 선민 중에서도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똑같이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가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천품(天稟)을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며, 또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위한 후천적인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체를 먼저 택하시는 것이다.

 

 

 

 

 

 

 

 

 

 

7장 기 독 론

 

 

구 원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타락인간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와 성신(聖神)과의 관계, 예수와 성신과 타락인간과의 관계, 중생(重生)과 삼위일체(三位一體) 등 기독론(基督論)에 관한 제 문제(諸問題)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미해결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알아야 하므로, 이에 관하여 먼저 논한 다음에 위의 제 문제를 다루기로 하자.

 

1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 즉 완성한 아담의 가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하여 보기로 하자.

 

첫 째,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을 이성성상적(二性性相的)인 관계로서 논하여 보자.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마음과 몸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 사이에도 이성성상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이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무형(無形)의 마음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것이 몸인 것과 같이, 무형의 하나님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완성한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될 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서 일체가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완전히 체휼하는 생활을 하게 되므로 그 관계는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이 항상 거하실 수 있는 성전(聖殿)이 되어(고전 3 : 16)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전편 제 1장 제 3II).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5 : 48).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둘 째, 인간 창조의 목적을 중심하고 그 가치를 논하여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딴 사람이 가지 수 없는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아무리 많이 번식된다 하더라도 개성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내재(內在)하고 있는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주체적인 이성성상(二性性相)에 대한 자극적인 기쁨을 상대적으로 일으켜 드릴 수 있는 실체대상은, 그 이성성상의 실체로서 전개된 그 한 개성체밖에는 없는 것이다(전편 제1장 제3절Ⅱ).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우주간(宇宙間)에 있어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인 것이다. 석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원리로 보아서 타당한 것이다.

 

셋 째, 인간과 피조세계(被造世界)와의 관계로 본 그 가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앎으로써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靈人體)로는 무형세계(無形世界), 육신(肉身)으로는 유형세계(有形世界)를 각각 주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전 피조세계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1 : 28).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육신과 영인체가 있어서 유형 무형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세계는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서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실체대상의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 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그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626절에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 령 여기에 하나의 완전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기계의 모든 부속품들이 이 세상에 단 하나씩밖에 없는 것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고 하면, 그 하나 하나의 부속품은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라도 전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한 인간의 개체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미미(微微)한 것 같다 하다라도 실상 전천주적(全天宙的)인 가치와 대등하다고도 볼 수 있다.

 

2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

 

I.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

 

인 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3 : 24)를 역사의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하여(22 : 14)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2 : 9)와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되어질 생명나무(22 : 14)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앎으로써,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 락론(墮落論)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이지만, 아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었더라면 그가 바로 창세기 29절의 생명나무가 되어, 그의 후손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이 ''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3 : 24), 타락인간의 소망은 바로 이 생명나무로 복귀되는데 있었다(13 : 12, 22 : 14).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생명나무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반드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만민으로 하여금 그에게 접붙임을 받도록 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 러한 남성으로 오실 분이 바로 요한계시록 2214절에 생명나무로 표상(表象)되어 있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상징되어 있는 완성한 아담이나 요한계시록 2214절에 생명나무로 비유된 예수님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II. 창조목적의 완성으로 본 인간과 예수님

 

우리는 이미 본장 제1절에서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 리가 상술(上述)한 바에 의하여 아는 바와 같이, 완성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두고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서(5 : 48) 하나님과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가치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지음 받은 인간도 역시 완성되면 영원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완성한 인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천주(天宙)의 존재 가치도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예수님이 지니신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가지는 가치 이상의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원 리(原理)는 이제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어온 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갖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임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원리가 예수님을 말하여, 그는 창조목적을 완성한 하나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추호도 격하(格下)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완성된 창조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것을 논술하였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디 모데전서 25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로마서 519절에는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고린도전서 1521절에는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표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731절에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726절에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서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인간이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인류를 중생(重生)하여 주실 참부모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III.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신가

 

빌 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아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4 : 9∼10)라고 대답하셨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 세상은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 : 10)라고 한 말씀도 있고, 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예수님)가 있느니라(8 : 58)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구 등을 근거로 하여서 이제까지의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 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에 그의 신성(神性)으로 보아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을 닮아 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 마음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있을망정, 몸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 149절내지 10절의 말씀대로 그를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신 것은 아니다.

 

요 한복음 114절에는 예수님을 말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신 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3절을 보면 만물세계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요한복음 110절에는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라고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런데 창조원리에 의하면, 피조세계(被造世界)는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피조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또한 그의 화동(和動)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은 완성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면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그로 하여금 만물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요한복음 110절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 뿐이요, 그가 곧 창조주 자신임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예 수님은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그는 전인류를 중생(重生)하여 주실 인간조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의 선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858절에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 수님은 지상에 있어서도 원죄(原罪)가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었고, 또 부활 후 영계에 있어서도 제자들과 다름없이 영인체로서 계신다. 다만 제자들은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으로서 빛의 반사체(反射體)로 있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생령체급(生靈體級)의 영인으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로 계시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한 편 또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영계에서 지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계신다(8 : 34).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자신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어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27 : 46, 17 : 1).

 

만 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또 사탄에 몰려 십자가에 달리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 : 46)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3절 타락인간과 예수님

 

타 락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자기보다 저급하게 창조된 천사(天使)를 우러러 볼 정도로 천한 자리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천사를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15 : 27). 한편 타락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으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 리고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심정(心情)을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아시고 또 그 심정을 체휼하는 자리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 라서 인간은 타락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이지만, 참부모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원죄를 벗고 선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 사회의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서차(序次)가 있을 뿐 그 본연의 가치에는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고(1 : 22), 우리는 그의 몸이 되며 지체(肢體)가 된다(고전 12 : 27). 따라서 예수님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우리는 그의 분성전(分聖殿)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이며(15 : 5), 한편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감람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참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11 : 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고(15 : 14), 또 그(예수님)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을 줄을 안다(요일 3 : 2)고 한 성구도 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예수님은 처음 익은 열매요 우리는 다음 익은 열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고전 15 : 23)

 

4절 중생론과 삼위일체론

 

삼 위일체론(三位一體論)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학계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논란되어 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그 근본적인 뜻을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내왔던 문제 중의 하나가 역시 본항에서 다루려는 중생론(重生論)인 것이다.

 

I. 중생론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와 성신

 

예 수님은 자기를 찾아 온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重生)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3 : 3). 중생이라는 말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중생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 담과 해와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地上地獄)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두 번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 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原罪)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 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서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3절에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예 수님은 아담으로써 못이루셨던 참아버지로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 하였고(고전 15 : 45), 영존(永存)하신 아버지라 하였으며(9 : 6), 또 하나님은 선지자(先知者)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다(4 : 6).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리라(16 : 27)고 하셨다.

 

그 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는 참아버지와 함께 참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罪惡)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바로 성신(聖神)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3 : 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와 같이 성신은 참어머니로서 후해와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女性神)으로 계시받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役事)를 하시는 것이며(고전 12 : 3), 또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성이시므로 하늘()에서,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와 성신

 

로 고스라는 낱말은 헬라어로서 '말씀' 혹은 '이법(理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1절 이하를 보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對象)으로서 하나님과 수수적(授受的)인 관계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로고스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계시므로, 그의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1 : 3)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것이 아담과 해와였던 것이다(전편 제1장 제1I).

 

아 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 즉 '생명나무'가 되고,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 즉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때에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이 완성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지상지옥(地上地獄)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아담(고전 15 : 45)으로서 '생명나무'의 사명을 가지고(22 : 14)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여기에 후해와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사명을 가진 인류의 참어머니가(22 : 17) 마땅히 계셔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다시 낳아 주실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성신(聖神)인 것이다.

 

3. 예수와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부 모의 사랑이 없이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23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게 되면, 영적 참 아버지이신 예수님과 영적 참어머니이신 성신과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重生)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原罪)를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인 중생에 의한 육적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再臨)하시게 되는 것이다.

 

II. 삼위일체론

 

창 조원리에 의하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터전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예수님과 성신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대상으로 서 가지고 서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에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원 래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인류의 참부모로 세워 합성일체화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시어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참부모로서의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선의 자녀를 번식하였더라면, 그의 후손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부부를 이루어 각각 삼위일체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 완성에 의한 지상천국은 그 때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었.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역시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를 형성하여 타락한 인간사회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 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후아담과 후해와로 세워 인류의 참부모가 되게 하심으로써, 타락 인간을 중생(重生)케 하여 가지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게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영적 참부모의 사명만을 하시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 중생의 사명만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역시 영적인 삼위일체로만 복귀되어 아직도 영적 자녀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를 이루어 영육(靈肉) 아우른 참부모가 되심으로써, 타락인간을 영육 아울러 중생케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조성하면,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지상천국이 복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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