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 안에 알려진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대체로 이런 것일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경에 맞지 않는 것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또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마4:17). 또한 구원은 믿음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만세전에 예정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구원은 매우 어려운 것이고 쉬운 일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7:22~23). 그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며 좁은 길이며, 힘든 길이다(마7:13~14).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성경적인 구원관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관을 모르거나 알고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요, 그분이 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교리나 상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구원관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1. 들어가며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인가?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주님은 그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요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다(마7:13~15).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힘과 지혜만으로는 불가능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은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인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2. 구원이란 어떤 개념을 가리키며,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은 무엇인가?
어느날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 안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19:23~24). 그러자 제자들이 몹시 놀라서 말했다. "그러하면 누가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마19:25)" 그렇다. 구원은 얻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서 "구원'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뜻도 지니는데 그것이 아마도 최종적인 의미일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단어는 풍랑이는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것도 구원이며, 나을 수 없는 병에서 낫게 되는 것도 구원이며, 다시 볼 수 없는 소경이 다시 보게 되는 것도 구원에 속한다. 하지만 진정하고도 참된 구원은 자신의 영혼이 건짐을 받는 것인데, 그것의 끝은 곧 죽어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 속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두고 제자들은 그것을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죽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만약 "예"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는 금새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말 것이다. 왜 그런가?
3.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구원받는 기준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오늘날 믿는 이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오직 믿음'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2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가족과 재산)이라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9:27~20). 과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내 소중한 가족들과 재산을 정말 내버릴 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과 핍박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그런 자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들인가? 대답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힘과 지혜와 끈기만으로는 이 기준에 부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서 가능하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
4. 포도원품꾼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예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구원의 기준을 채울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하나님으로서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다음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셨다. 그것은 일명 "포도원품꾼의 비유"라는 비유다(마20:1~16). 그래서 이 비유의 시작은 "왜냐하면(헬, '가르')(=For)"으로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으로서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사실 "포도원품꾼의 주인의 비유"라고 해야 옳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포도원품꾼의 주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 비유는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내 일하게 하는 한 주인에 관한 비유다. 그런데 이 비유가 바로 천국비유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치 품꾼(일꾼)들을 자기의 포도원에 고용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나갔던 집주인과 같기 때문이다(마20:1)" 그렇다. 이 비유의 핵심은 포도원에 고용된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은 받았다는 데에 촛점이 있지 않다. 이 비유는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포도원품꾼의 주인에게 있다.
이 비유는 이렇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를 수확할 날이 다가오자 이른 아침(오전6시)에 장터가 나가 포도원품꾼을 골라서 하루치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들 중 몇 명을 고용하였다. 그런데 그가 제3시(오전9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해 선 채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에게 제안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상당하게 줄 것이니 내 포도원으로 들어가시오." 그러자 그들이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포도원주인이 또 제6시(정오)에도 장터에 나가보았다. 그랬더니 그때도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고용했고 또한 제9시(오후3시)에도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문제는 제11시(오후5시)다. 이제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또 장터에 가보았다. 그랬더니 여전히 종일토록 일을 구하지 못해 서 있은 채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에게 묻는다. "왜 여기에 종일간 선 채 있소" 그러자 그들이 대답한다. "아무도 우리를 품꾼으로 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당신들도 역시 포도원에 들어가시오, 당신에게 상당하게 주겠소."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다. 포도원 품군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나중 온 자들부터 품삯을 주게 했는데, 주인은 그들(오후5시에 들어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게 했다. 그러자 먼저 온 자들이 들떠 있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오후3시에 들어온 자는 3데나리온을 받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이 돌아갔다. 그런데 정오 때에 들어온 자, 그리고 오전 9시에 들어온 자도, 또한 오전6시에 들어온 자도 한 데나리온씩 주어졌다. 그러자 오전6시에 들어온 자가 입이 삐쭉 나왔다. 그리고 불평하며 말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종일 수고하면서 더위를 견뎌낸 우리를 그들과 같지 행하였습니까?(마20:12)" 그러나 주인은 말했다. "친구여, 나는 당신들에게 잘못 행하지 않았소.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에 합의하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것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당신처럼 주는 것은 내 뜻이라오. 내 것들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소?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의 눈에는 악하게 보이시오?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것이오.(마20:14~16)"
5. 포도원품꾼의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포도원품꾼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비유인가? 이 비유의 핵심은 오후에 고용되어 1시간만 일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1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다는 데에 있지 않으며, 1시간만 일한 자와 12시간을 일한 자에게 동일하게 1데나리온을 주는 주인은 부당하다는 데에도 있지 않다. 이 비유의 핵심은 고용되지 못해 선 채로 장터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그들에게 어찌하든지 일할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주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고 싶으시다. 건장하고 튼튼하고 일 잘할 것 같은 사람에게만 일할 기회를 주지 않고, 약하고 무능하고 일도 못할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일할 기회를 주시고 싶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들어온 자들은 오후5시에 들어온 자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주인을 보고 박수를 쳐주었어야 했다. 자기는 보다 더 일찍이 주인의 택함을 받아 고용되어 일할 수 있었지만, 1시간만 일했던 자는 하마터면 그날 고용되지 못해 빈털털이로 집에 들어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군가? 포도원품꾼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포도원품꾼들은 성도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포도원은 일터인 오늘날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포도원품꾼의 주인이 사람들을 고용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첫째, 이 주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공평하게 주시고 싶어하는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이 주인은 포도원의 품꾼들의 일하는 모습과 태도를 따라 그들의 최종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포도원에 들어간 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물론 그들 모두는 구원의 시작 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구원의 끝은 저물때에 일어난다. 사람이 죽을 때 곧 심판을 받을 때다. 그때에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한 데나리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른 아침에 왔던 종들의 입술에서 나온 고백처럼,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뎌내야할 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교회생활은 힘들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이 주인으로부터 약속된 한 데낙리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 곧 구원이다.
그렇다면 오후5시에 들어온 자는 어떻게 되어서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었을까? 그에게는 비록 한 시간 밖에 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았던 주인은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후5시에 들어온 자는 주인이 자기처럼 무능하고 무식하고 별볼일없는 사람인데고 고용해준 것 자체를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일했기 때문이다. 주인이 걱정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까지 물어가면서 그것까지 다 일해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감사하니까. 너무 고마우니까 말이다.
6.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일반적인 구원관은 어떤 것이 잘못 되었는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늘날 성도들이 갖고 있는 구원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약간 동떨어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다. 왜나하면 이 이야기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잘못된 구원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구원은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다. 둘째, 구원받느냐 못받느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 있다. 셋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넷째, 구원의 판단근거는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이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교리적인 해석이 들어있고, 또한 칼빈주의의 예정론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을 매우 쉽게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였고 어떤 사람은 버리기로 예정하셨는데, 자신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니, 자신이 비록 죄짓고 살고 있고 잘못 살고 있어도 반드시 자신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게금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러한 잘못된 구원론을 설명하라고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은 공평하게 않는 분으로 보인다. 왜나하면 늦게 온 자든지 빨리 온 자든지 다 한 데나리온씩을 주는 주인이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 비유는 불공평한 한나님인데도, 그분이 자신에 대해 선하다고 말씀하니, 그분을의 행동을 선한 것이라고 억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요의 비유가 아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누구든지 포도원(교회) 안으로 들여보냄으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주시려는 주인의 따뜻한 마음에 있다. 그리고 비록 늦게 들어와서 한 시간만 일했어도 농땡이 피우지 않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최선을 다한 자에게는 원래는 그렇게 약속한 것은 아니었어도, 주인이 그에게 한 데나리온(구원)을 주시려는, 긍휼히 풍성하신 분이라는 데에 있다.
7. 나오며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도 맞다. 구원의 절대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말도 맞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는 말도 맞다. 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는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포도원에 들여보낸 후에 포도원에서 일하는 모습과 태도가 한 사람의 구원의 최종적인 관문으로 작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오직 회개를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포도원의 충성도만이 구원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어차피 육체는 피곤하고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충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도원(교회)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동참할 수 없었을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포도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가 그 사람들 전부를 다 천국가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포도원에 들여보낸 후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포도원 생활을 다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얼마나 주인되신 하나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계신다. 오후5시에 들어온 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아차 했으면 버려질 인생이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으로 초청해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또한 비록 남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낸 주인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주인은 그를 더욱 눈여겨 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구원론은 여기에서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구원과 멸망이 주님에게 있다고 하면서 주님을 폭군으로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선하시니까, 그분이 행하신 일들도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분은 정말로 선하신 분이시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고 온갖 노력과 시도를 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시간만 일했어도 그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절대능력자요 긍휼이 많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 자신이 늦게 들어왔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라. 한편, 한 시간 남았으니 적당히 떼우려고 하지도 말라. 우리가 어떻게 해서 부름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1시간이더라도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들어갈 자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구원의 시초는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주님의 판단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더라도 인간의 공로만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의 공로가 결론 자신의 죄를 속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로가 결코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사함과 거듭남과 같은 은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세전에 구원받지 못할 자로서 예정되어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기 때문이요(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게 이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벧후3:9).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포도원(교회)에 들여보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에서 농땡이 피우는 자까지 구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구원은 분명 거져주시는 은혜에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구원론의 핵심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0월 26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