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왜 그랬을까? 그냥 그때까지 음성으로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하시면 되는데, 왜 이때에는 아브라함에게 이전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아나하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인가? 거기에는 한 분 하나님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들어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1. 들어가며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보면 잘 모른다.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지에 관하여 설명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그러한 것은 따지려고 하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비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 분 하나님만을 믿고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나 여호와증인들마저도 한 분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지금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마저도 여전히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인(기독교인)은 어떠한가? 한 분 하나님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그런데 우리도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사정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마저도 하나님을 잘 모르니,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는 이단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곧 한 분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신 그분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잘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본문이 오늘 창세기 18장에 나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사람으로 나타나셨는지를 통하여 한 분 하나님이 누군지를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2. 그날 아브라함은 장막 문 앞에서 누구를 보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는 분이시다(요4:24, 딤전6:16). 아니 그분은 사람의 눈에 보여지지가 않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볼 수 없는 한 분 하나님께서 단 한 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18장에서다. 창세기 18장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었으며, 그것도 남자(에노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분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천사들을 대동하여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기자는 그들을 사람 셋으로 기록하면서, 그 중의 한 명은 "여호와"라고 하였고(창18:13) 나머지 두 명은 "천사들"(창19:1)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날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셋 중에 한 분은 사람의 모습을 한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아브라함만이 하나님을 사람의 모습으로 본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줄곧 나타나셨다. 적어도 그가 부름받았던 75세부터 그의 나이 99세 때까지 무려 5차례나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전능자"라고 소개해주셨다(창17:1).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99세 이전이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저주에서 풀어주지 않으셨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24년을 따라다녔지만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잘 몰랐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 일은 자신의 아내 사라의 잉태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른 것을 줄곧 생각했다. 아이를 못낳지 아내 때문에 그는 가장 먼저 조카 롯을 양자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떠나보아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기 집에서 길리고 자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도 약속의 씨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오직 "네 몸에서 날 자"라야 그의 씨가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 결국 아내의 말을 듣고 첩 하갈을 들여 자식을 낳았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씨가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가셨다. 그리고 13년 후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때에는 당신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뜻에서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인간적이고도 세상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자식을 낳았던 잘못을 그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의 고추의 포피를 자르는 할례를 행함으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비로소를 그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쓰시기 시작하신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의 역사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이 있기 전까지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전능자로 인식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을 전능자라고 밝히신 여호와께서 이제 또다른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창18:1~2). 그전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아니 그후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여호와 사이에 나눈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전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번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3인칭으로 말씀하셨다(창18:14). 어찌 된 일인가? 먼저, 창18:14의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직역해보자. "여호와 그에게 어찌 어려운(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내가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한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18:14)." 만약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있는 이가 여호와였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어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내가 생명의 때를 따라..."라고. 하지만 그분은 오히려 여호와를 3인칭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말씀하고 있는 분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은 바로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번 경우를 제외하고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에는(물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일이 없었다) 항상 음성으로 나타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셨으며, 직접 아브라함이 요리한 음식까지 드셨다. 이때 비로소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이 누군지를 처음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신 말씀이 가장 의미심장하다. "내가 네게로 다시 올 때에는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 왜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인가?
그동안에는 여호와로 당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께서 왜 이번에 아브라함에게는 사람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인가? 요약하면 그것은 크게 2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도 원래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꾸로 생각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셨다는 결론이 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이 사람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 것은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 보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영으로서 볼 수 없는 분이셨기에 자신을 드러낼 때에도 그분은 늘 음성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단 한 번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모습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둘째,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할 때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장차 다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사람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원래 한 분 하나님의 모습을 그때 미리 보여준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누구도 그를 볼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장차 사람이 되어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예수님으로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사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성부도 아니요 성령도 아니다. 오직 성자이신 예수님 뿐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그분이 원래의 모습도 사람이셨지만 사람이 되셔야 피흘릴 수가 있고, 피흘림이 있어야 인류의 죄를 사할 수 있기에(히9:22) 그리고 죄값은 사망이니만큼(롬6:23) 그분이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5. 왜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가?
누구나 구약성경을 읽다가 신약성경으로 쭉 읽을 때에 하나님의 칭호에 대해서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은 구약에 그토록 많이 언급된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라는 명칭이 왜 한 번도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신약에 들어와서 여호와는 "하나님" 내지는 "아버지"라는 명칭으로만 나올 뿐 그의 이름이 한 번도 거명된 적이 없다. 심지어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부분에서도 그분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되어 있는 인용구절을 신약의 기자들은 다 "주(퀴리오스)"으로 썼다. 그때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얼핏 생각하기에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다 "주[님]"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된 데에는 1차적으로는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히브리어성경(맛소라사본)에서 본문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히브리어로 기록됨)을 헬라어로 번역한 번역본 곧 70인역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70인역에서는 "여호와"를 다 "주[님]"이라고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여호와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이유가 어디 그뿐일까? 아마 다른 뜻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이 둘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 '아하야흐')이셨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사람에게 알려진 것인가? 그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분의 이름을 정확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 그분의 이름을 가르쳐주시기는 했지만 십계명의 제2계명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음가를 잃어버 것이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다 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글자로는 기록했으나 말로는 표현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 상황에서 그들은 "여호와" 대신에 차용어로서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이는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신명사문자(요오드 헤 와우 헤)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게 되었을 뿐 그 음가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가 1,518년에 한 천주교 신부가 하나님의 이름인 글자 곧 "신명사문자"에다가 "아도나이"의 음가를 합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그때부터 "여호와"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렇게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음가가 "여호와"이라기보다는 "야훼"가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고, 최근 들어와서는 "아하야흐"라고 주장하는 분들까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약시대에 들어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공개됨에 따라, '여호와"라는 구약시대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한다. 둘의 이름이 같이 있으면 하나님 두 분처럼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는 예수님시대 이후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으로 통일하고 있다. 그래서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예수만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그런데 제자들이 직접 세례를 준 사건을 보면, 단 한 번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없다. 전부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시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로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4차례에 걸쳐 사람이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가 나오는데, 이때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과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주었으며(행2:38, 10:48), 빌립집사와 사도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나온다(행8:16, 19:5). 왜 그런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도 예수요 아들의 이름도 예수요 성령의 이름도 예수이기 때문이다(마28:19).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문장을 보면, "이름"이 복수로 나오지 않고 단수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한 것은 천국에 올라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현재 하나님의 이름이 과연 "여호와"라고 불리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말이다.
6. 하나님에 대한 양태론과 삼위일체론의 설명은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으며 어떤 부분에서 미흡하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전에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소개하실 때에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자.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딱 2가지 표현으로 당신 자신을 표현하셨다. 그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나는 나)니라(출3:14)"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사41:4, 44:6, 48:12)"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땅에 보내심을 받고 오셨던 예수께서도 당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요8:24, 28. 58)"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계1;17, 2:8, 22:13)"는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한 분 하나님 자신이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나하면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동정녀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 그분은 부명 "사람의 아들(인자)"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이다. 그때에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자 그분 안에(하나님의 경륜 속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시간과 공간밖에 계신 그분은 이미 만세전부터 그리스도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그분 안에 계셨던 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부분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증거로서 예수님 탄생 직전까지 하나님의 보좌에 가서 천상회의에 참석했던 사탄마귀도 하나님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세례받을 때에 하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듣게 된 사탄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알아보고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마귀의 예수님에 대한 3대시험이라는 것이다(마4:1~11).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약식 표현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약시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양태론이나 삼위일체론만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다. 그 설명이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설명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왜나하면 양태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성령이 되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앙태론자들은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게 아버지께 기도하신 장면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삼위일체론도 약점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은 이전에 아들로 계시다가 오셨다고 하는 부분에서 그 설명이 미흡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미 아들로 밖으로 나와 계시던 분이 온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만세전의 계획에 따라 그때 아버지에게서 혹흔 하나님에게서 나와 아들이 나와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16:28, 6:46, 8:42).
7. 나오며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알되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외쳤다(호6:3).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하나님으로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사람들 중에는 다신론적인 신앙에 빠져서 이단에 속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으로 보지 못함으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을 다신론 이단이라고 여기고는 매일 저주하는 기도를 회당에서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는 한 분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대는 신구약성경을 원문으로 전부 다 접해 볼 수 가 있고, 성령께서 날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갔다오신 분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보고 와서 말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보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께서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가 천국에 가 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천국의 현재 모습이 고스란히 요한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는 한 개 뿐인데(계22;1,3) 그 보좌에 예수께서 앉아계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보좌에 앉아계신 그분이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계21:5~6, 22:13).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나 예수"라고 말씀하신다(계22:16). 그렇다. 이제는 진리를 들으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진정 사모한다면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삼위일체방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절대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난 것에 정말 감사를 드린다. 대신 우리에게도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분이 삼위일체 방식으로 존재하시며 또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에 빠진 분들에게 한 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유대인들과 여호와증인에게도 전도해서 한 분 하나님을 믿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사람이 되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우리 주 한 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하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귀신의 미혹과 그리고 그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07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