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모든 것에는 기본이 있고 원칙이 있다. 원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원칙이 다 적용되었는지 검사할 수는 없다. 이것은 회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회개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아 자신이 정말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 잘 분간하기가 어렵다 말하기도 한다. 꼭 눈물을 흘려야 회개인가 아니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회개한 것인가?
사실 사람이 회개하는 과정을 분석해서 보면 보통 3가지 과정이 있다. 첫째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거나 죄를 범한 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죄를 범한 것에 대해 통회 자복하는 과정 즉 죄를 애통해하며 뉘우치는 과정이 있다. 그리고 셋째로, 죄로부터 돌아서서는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지정의(知情意)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비유를 중심으로 회개는 과연 어떤 과정이 이루어졌는지를 통해서 나 자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회개의 정의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개는 신약성경에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 대신 구약성경에는 보통 ‘회개’라는 비슷한 단어로서 “돌아서다(돌아오다, 돌아가다), 돌이키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슈브’가 사용되며(렘25:5,애3:40,겔14:6,18:21), “후회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의 ‘나함’이라는 단어도 쓰이기도 한다(욥42:6,민23:19,삼상15:11,렘4:28).
욜2:12-13a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슈브)’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겔18: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슈브)’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나함)’
렘4:28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나함)’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슈브)’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회개가 많이 등장하고, 신앙생활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사실 메시야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회개하라’라는 단어였다(마3:2). 이것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시키는 세례요한의 외침에 사용된 것이다. 이 단어는 ‘메타노에오’라는 동사로서 ‘뒤에 먹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뒤에 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했다고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메타노에오’와 더불어 ‘후회하다’라는 ‘메타멜로마이’라는 단어도 가끔씩 나온다. 특히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이 두 단어는 확실히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선다는 뜻이므로, 자신이 진정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는 회개가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식하고 뉘우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더 이상 가지 않고 돌이키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회개했다”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3. 회개의 세 가지 방면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회개의 사례로서 죄에 대해서 첫째로, 인식하고 둘째로, 애통해하며 셋째로, 가던 길에서 돌이키는 것, 이 3가지가 모두 등장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이 3가지가 회개의 원칙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이 3가지 방면이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회개의 3가지 방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사람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구약시대에는 ‘다윗’이 있으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가 있다. 다윗은 알다시피 자신의 범죄를 인식하자마자(삼하12:13), 철저히 낮추어 눈물로 회개하였으며(시6:6), 이어서 돌이켜 두 번 다시 같은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회개 이후 두 번 다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이 3가지 방면을 그나마 잘 실천했던 인물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돌아온 탕자’다(눅15:11~24).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심은 실제적으로 이러한 사례가 많지 않은 이유인 듯싶다. 어찌되었든 탕자의 사례를 보자. 그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돈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몰랐으나, 돈이 떨어지고 기근이 닥침으로 먹을 것조차 해결할 수 없자, 그는 아버지와 고향을 생각하며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깨달았다(눅15:18). 그리고 둘째 그는 죄인된 심정으로 아버지께 가려고 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여겨주시는 것’만해도 감사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눅15:19). 그리고 그는 실제로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 자신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눅15:20). 그렇다. 이 탕자는 회개에 아주 충실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회개의 진정한 의미인 가던 길에서 확실히 돌아선 사람이다. 회개는 유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회개를 ‘회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혹 자신이 회개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죄된 삶을 좋아하고 있다면 사실상 그는 회개하지 않은 자이다.
그런데 회개의 세 방면 중에서, 어느 한 방면이 더 부각된 사람도 있다. 먼저, 회개의 첫 번째 방면으로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있다. 자기 안에 죄된 본성이 가득이 들어있음을 깨닫고는 곧바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구약의 인물로는 ‘욥’이 있고, 신약의 인물로는 눅5장에 등장하는 ‘베드로’가 있다(눅5:1~11). 이중 베드로는 고기잡이의 기적을 경험한 후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5:8).”라고 고백했다. 한편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자신은 마땅히 지옥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고 여겼던 사람도 있다. 그는 바로 눅23장에 등장하는 ‘한편 강도’다(눅23:39~43). 그는 자신이 지은 살인죄 때문에 마땅히 죽어 지옥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요 속죄하는 주님으로 오셨기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그날 자신이 죄를 범한 죄인인 것을 시인한 후 죄없는 주님을 믿어 낙원의 약속을 받았다(눅23:43).
하지만 회개의 두 번째 방면으로서 죄를 짓고 죄에 대해 아파하면서 철저히 통회자복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눅18장의 기도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리’의 경우다(눅18:9~11).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심은 아마도 그러한 사례가 많지 않아서인 듯싶다. 그럼, 그는 어떻게 회개했는가? 그는 자신이 얼마나 죄를 짓고 살아왔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속죄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죄에 대해 철저히 뉘우쳤다. 그래서인지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으며, 다만 가슴을 치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눅18:13).
마지막으로 회개의 세 번째 방면의 경우를 보자. 이것은 이전의 죄된 삶으로부터 철저히 돌이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경우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죄를 깊이 인식했다든지 아니면 눈물로 간절히 통곡했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자신이 과거 얼마나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갔었는지 인식하고는, 그때부터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긴다. 이러한 사람의 예로는 눅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경우다(눅19:1~10). 그는 세리로서 남의 것을 속여 빼앗기도 했으며 착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물질을 제 주인으로 알던 그였지만 그순간 이미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었으며, 속여 빼앗은 자들에게는 4배가 갚고 있었기 때문이다(눅19:8). 또한 이러한 인물로서 또 한 사람이 있으니 ‘사도바울’이다.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하지만 그가 그순간 겪었던 심경의 변화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3일이 지난 후 그는 완전히 유턴하여 이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평생 고난으로 대신 달게 받는다. 그가 받았던 고난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고후11:23~27). 하지만 죄인의 괴수로서(딤전1:15), 핍박과 고난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 여겼던 바울은,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난에 감사하며 죽기까지 주님을 위해 살다 갔다. 이러한 삶은 그가 회개한 자임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마치 회개한 이후의 다윗의 삶처럼 말이다.
혹시 자신에게 눈물이 없다고 해서 회개지 않은 자로 알고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가? 주님을 위해 날마다 헌신하기를 기뻐하며,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주의 복음전파에 힘쓰는 자라면 당신은 지금 또 다른 회개의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하라. 감정적인 회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삶으로 회개를 실천하는 사도바울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