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물과 사건을 바라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첫인상이 그중에서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처음 어떻게 들었느냐는 자신의 신앙관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처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가? 그 관점은 크게 2가지였을 것이다. 베드로의 관점과 사도바울의 관점의 경우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의 청년 예수로 만났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주님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만났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관점자체가 다르다. 오늘은 우리가 만났던 예수님을 과연 어떤 관점으로 보았는지를 살펴보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7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기도 그 놀라운 능력과 우리의 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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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
[찬송]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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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도행전 20:24~28(신약 223면) |
2017.8.30(수) |
1. 들어가며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서 듣는가에 대해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달해주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가 한 말에 대해 이의나 토를 달고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진 분들로부터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바울에 의하여 신약성경이 무려 13권이나 쓰여졌고 그것이 우리들 손에 쥐어져 있음에 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적인 편협된 사고에 갇혀 있지 않는 열려진 사고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바울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믿고 따랐는지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믿고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두 사도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기록물로서 일종의 역사서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사도들이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했던 살아있는 선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베드로의 사도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부분(행1~12장)이며 또 하나는 사도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부분(행13~28장)이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주로 할례자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면, 사도바울은 주로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갈2:7~8).
갈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바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런데 이들의 복음전파의 기록들과 이들이 남긴 신약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사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도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나사렛출신의 사람이신 청년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람으로서 먼저 만나 뵈었지만, 사도바울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남긴 기록에서는 항상 육신을 입고 있으셨던 아들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 짙게 남아 있다. 그러기에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된다(마16:16). 그렇지만 나중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 곧 하나님이 되셨다고 증언한다(행2:36). 하지만 사도바울에게는 한 때 육신을 입으셨지만, 이미 부활승천하신 상태에 있는 예수님을 만났기에 항상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관점으로 성경을 기술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가장 잘 기술하고 그리고 완벽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아 사역했던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는 과연 어떻게 되어 예수님의 실상을 정확히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기를 바란다.
3.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첫째로, 바울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예수님이 바로 주님 곧 구약의 여호와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사역했다.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바울은 눈이 멀어 삼일동안 금식기도하고 있는 중에 선지자 아나니아를 만났다. 그때 아나니아는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만났던 그분이 곧 ‘주님’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고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었으니, 다메섹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에서나 13권이나 되는 그의 서신서들에서, 오직 예수님을 “주님(퀴리오스)”이라고 칭하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가 하나님을 두 분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과도기의 사람이었기에 조금은 달랐다. 그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하나님에게 사용하다가(행2:38~39,벧전5:6~7), 이어 예수님에게도 동시에 사용하였다(벧전1:3,벧후1:8,2:20,3:2).
벧전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들었고 그분을 만났기에,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구주(구원자)’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에도,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에게도 동시에 그 호칭을 사용하였다(딤전1:1,딛1:3,2:10,3:4). 하나님이 곧 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구주’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뿐이다(벧후1:1,11,2:20,3:18).
딛2:10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둘째, 바울은 성육신에 대해, 만세전에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였다(딤전3:16).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셋째,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피라고 증거하였다(행20:28).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피’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도바울에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요 하나님이셨기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장로들을 초청하여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 피는 아들 그리스도의 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피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그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왜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가 한 번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다 용서받을 수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의 피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의 피였지만, 사실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흘리신 피이기 때문이다. 골고다언덕의 피흘리심은 단번의 제사이지만 완전한 제사였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당신의 핏값을 주고 사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들의 몸값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들을 자신의 목숨값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것을 매우 시기하고 질투한다. 자신이 모든 피조물 중에 최고로 아름답고 지혜롭게 지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 값을 지불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지은 죄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죄는 이미 골고다언덕에서 흘리신 핏값 때문에 언제라도 우리가 회개하는 순간 눈같이 다 녹아 없어질 것이며,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다.
4. 나오며
우리들의 손에는 베드로의 사도행전과 서신서 외에도 사도바울의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함께 쥐어져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베드로가 비록 천국열쇠를 사용해 교회시대를 열기는 했지만, 그것의 꽃을 피운 자는 바로 사도바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바울에 의해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수받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께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정되어 전파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베드로의 복음으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의 복음으로 적셔져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전능자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주 예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곧 하나님의 피인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오직 한 분 전능자이신 예수님만 붙들면 된다. 그리고 무슨 죄이든지 그분께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