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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9-08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4:1~19(신약 28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방언이은사,예언의은사,방언통역의은사,방언의정의,글로싸,다른언어,영의말,영의기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에도 진짜 그러한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방언의 은사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한 신령한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 바울은 이러한 2가지 은사를 추천해야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1. 들어가며

  모든 은사에도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 사용에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이 기본적으로 겸비된 사람에게 어떤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어떤 은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은사들 중에는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 14장의 전체 내용이다.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잘못된 은사 사용에 대해서 알려 주고 바른 은사 사용을 위한 실제적인 예로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록 방언의 은사가 신비롭게 보이고 멋있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공예배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공예배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예언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이길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리고 대체 방언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정의와 아울러 이 은사들의 유익성과 한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러한 3가지 은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예배 중 은사 사용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 중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 사용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알고 사모하면서 그 은사를 예배 중 사용했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다 보면 방언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언의 소리를 분석해 보면 어떤 방언은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소리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언은 도무지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유치하게 들리는 방언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또한 사모하다 보니, 일종의 좋은 방언과 나쁜 방언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지닌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방언이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3. 바울은 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것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방언 자체가 지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그것을 공중 예배에 사용한들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그 방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일만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한 마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이지만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덕을 세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의 뜻이지만, 이 단어에 대한 이차적인 뜻이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으로서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의 쓰러지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 세우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그런데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사실 방언이 필요하다.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도 다시 복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교회 자체를 그렇게 세워주고 복구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왕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깨닫고 돌이키고 배우게 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4. 방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방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는 곳은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고린도전서 14장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곳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방언이라는 언어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그곳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과 고린도전서 14:14~15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언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4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나의 이성(생각=누스)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 15 그러면 무엇이 있느냐? 나는 영으로 [장차]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찬송할 것이다.

  그렇다. 방언이란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다(고전14:2). 곧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가 방언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 다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목놓아 울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 이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새롭게 모신다. 그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자녀가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영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방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응애'하고 말을 하듯이 자신의 살아난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하는 새로운 채널로 부여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말을 알아들으신다. 만약 그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14~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가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일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 용어는 혼의 언어다. 배워서 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의 의사 소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다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내 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는 것이다. 내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해 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약 80~90% 정도가 되며,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의 기도는 약 10~20% 정도 된다. 나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영은 자신의 소원을 알고 벌써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그리고 방언의 분량 많아지고 깊어지 어느 순간부터는 방언 찬양도 나온다. 방언에 음률이 붙어서 자신의 영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방언은 '외국어' 중의 하나요 고린도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15)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하지만 방언이 영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고 있는 나오는 '방언'도 그때 예루살렘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지방에서 쓰던 지방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서 '방언'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일종의 귀신들의 속삭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린도지역에만 나타났던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분들의 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믿고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란 어떤 언어였을까? 정말 '지방말'이었던 것이었을까? 사도행전 2:4에 보면,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다(행2:4).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이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방언'이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들'로 뒤바뀌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언'이 '다른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명백한 성경 번역의 퇴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 tongues)'라는 단어로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언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언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같은 종류의 이 세상의 언어였다면, 그것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알로이스 글로싸이스(another tongues)'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단어는 종류가 다른 언어로 곧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로서 영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인 방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오순절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120명 성도들 말했던 언어를 들은 후에 "이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은 분명히 '글로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표적으로서 주어지는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막16:17).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말해졌던 언어도 '글로싸'였고,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셔서 베풀어졌던 방언도 역시 '글로싸'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안수할 때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그때 받은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 그리고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도 역시 '글로싸'라고 나온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 다른 종류의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라고 하겠다. 

 

6. 방언 통역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방언 통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 통역이란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원래 방언은 그 사람과 하나님만 소통하는 대화 채널이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아듣게 되는 은사가 바로 방언 통역의 은사인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상대방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영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통역은 상당히 실수할 때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통역하다 보면 방언의 내용에는 없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방 방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히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기 쉽게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듣고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신 분은 동시 통역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방언을 들으면서 바로 동시에 통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 통역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 낼 때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가 그만 그 사람의 체면이 손상되고 그 사람의 숨은 죄가 드러남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순화하는 말로 바꾸어서 통역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당사자만 알아듣고 회개를 할 수가 있다. 셋째, 방언하는 자의 입술에서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글자가 되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입으로 나오는 글자를 읽어 주면 된다. 이것이 방언 통역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몇 명 안되는 방언 통역 은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그것의 7가지 기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그것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 대상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와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는 얼마 후 나라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으며(행11:27~28),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행21:11).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떻게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알게 되어 예언을 한다. 첫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어떤 영감을 떠오르게 함으로 그냥 알게 된다. 그때에는 그냥 그것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사탄 마귀가 넣어 주는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전의 예보다는 더 분명한 것이지만 이것도 사탄 마귀가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셋째,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모습을 글자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글자가 떠서 보이는 예언이 있다. 글자가 떠서 보이고 영의 상태가 환상으로 보일 정도라면 그분의 영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언 뿐만 아니라 책망과 판단, 위로와 권면,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8. 나오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고 성령의 은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은 똑같은 한 분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주셨던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방언'도 들어 있다. 그런데 방언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자기 개인만을 세워주는 은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은사는 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이 외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으니, 그것이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보니 그것을 공중 예배 때에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방언을 듣고서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방언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좋은 은사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의 경우처럼 굳이 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 통역을 하여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서 그것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방언은 사실 자신을 세워 주고 복구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깨우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공예배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상요하려면 오직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른 은사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후에] 방언을 말한다면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적인 능력들이 계속해서 더 추가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강해(21)에 나오는 고전14장 직역 및 명령과선포 다운로드] 고린도전서강해(21).pdf

 

2021년 09월 0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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