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둘째아들과 첫째아들 과연 누가 더 효자이며 누가 더 불효자인가?(눅15:25~32)_2020-05-12(화)
https://youtu.be/Z-e8hIutio8
1. 잃은 아들을 되찾은 것에 대한 비유는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누가복음 15장 11~32에 나오는 "잃은 아들의 비유"는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들으라고 들려주신 예수님의 비유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꾸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겠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비유로 들려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잃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아들과 첫째아들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잃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고, 첫째아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2. 누가 더 불효자인가요?
실은 둘 다 불효자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만으로 보면, 둘째아들은 불효자였다가 효자로 돌아선 상태에 있으며, 첫째아들은 여전히 불효자로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3. 왜 첫째아들이 더 불효자인가요?
첫째아들은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나이가 든 아들(25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첫째아들은 충분히 장성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둘째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베푼 잔치소식을 듣고 그가 아버지에게 보인 태도는 금방 그가 불효자인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그의 불손한 태도와 언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있는 아버지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밖에까지 나와서 달래보지만 그는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아버지라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보십시오!(헬라어원문참조) 내가 여러 해들을 당신을 종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명령을 아무때든지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내 벗들과 함께 흥겨워지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주지 않았습니다(눅15:29)." 첫째아들은 아버지를 부르기를 "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꾸짖듯 언성을 높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된 태도와 언어가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몇 년동안(아마도 동생과 자신이 재산을 물려받고 동생은 먼 곳으로 나가 살던 기간을 가리키는 기간인 것 같음) 종처럼 일해왔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버지가 들려준 그 다음 대화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온 이유가 바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물려받고 또한 아버지 집의 종들까지 다스리는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현재 아버지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는 그의 생각 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재산과 상속권을 물려받기 위해서 자기가 설정해놓은 것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 둘째아들은 왜 첫째아들보다 효자라고 할 수 있나요?
둘째아들도 역시 불효자입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을 보면, 이 둘째는 "젊은 아들"입니다(12절). 아직 아버지의 재산을 맡을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의사표시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좀 더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야 할 미숙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 아버지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영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잘못 관리했고 다 써버리고 말아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간신히 남의 집에 들어가서 돼지치는 일을 도맡았는데, 돼지가 먹는 사료를 먹으려했지만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미성숙한 둘째 아들은에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가 아버지께 효도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거기서 그냥 굶어죽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버지께 나아가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을까요? 그건 당연합니다. 그는 아직 미성숙한 자였기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러 아버지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둘째아들은 살아서 그것도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감사였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둘째아들이 비록 아버지의 곁을 떠나 죄를 지고 살았었지만, 그가 다시 아버지께 돌아온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5. 오늘날의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오늘날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자녀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효도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은 율법시대가 아니라 실은 복음시대입니다. 정죄시대가 아니라 용서받는 시대요,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사랑을 받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통치하는 방식을 약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적인 방식에서 신약적인 방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주어 잘못한 자에게는 벌을 주었고 잘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방식으로 했더니 오히려 위선자를 산출하게 되었고, 더 악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사랑과 용서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을 죄값을 미리 다 담당하시고, 인간은 회개만 하면 용서해줏고, 더욱이 끝까지 붙어있기만 해도 상을 주시는 방식으로 방법을 바꾼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 시대 이후 모든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방식의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죄를 마음껏 지으라고 용서를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효자가 되려면, 신약시대 이후에는 이처럼 우리에게 종이 아니라 아들과 같은 자유를 갖고 있음을 알고, 그 자유를 이용하여 방종으로 나아가서 죄짓는 데에 그러한 자유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시대와 같은 마음으로 즉 "두렵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이미 아들이요 상속자가 되었지만, 아직은 마치 구약시대처럼 어떤 잘못을 범하게 되면 자기가 모든 징계를 다 받겠다고 하는 종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2020년 05월 12일(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