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 왜 구약시대에는 귀신을 쫓아내라는 말이 없었던 것일까?(마태복음12:22~28)

이 설교는 성경에 등장하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귀신 언급 차이를 역사적 배경과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구약에 귀신을 쫓아내라는 기록이 없는 이유가 당시에는 사탄의 세력이 아직 왕국을 이루어 전면적으로 활동하기 전이었고,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악한 영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인류를 위협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회개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통해 내면의 악한 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삶 속에서 경험해야만 다가올 종말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왜 구약에는 귀신을 쫓아내라는 말이 없고 신약에는 축사가 등장하는가?본문 →2사탄·뱀·귀신은 본래 어떤 존재이며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가?본문 →3구약 시대 악한 영들은 무슨 일을 했으며 사탄의 왕국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본문 →4예수님은 왜 사탄을 먼저 제압하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는가?본문 →5사탄의 다섯 차례 추락은 어떻게 진행되는가?본문 →6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와 성령의 내주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본문 →7성도는 왜 회개와 전신갑주로 영적 싸움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가?본문 →1. 들어가며
구약성경을 읽다가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면 뜻밖의 변화를 만난다. 말라기의 마지막 장과 마태복음의 첫 장 사이에는 종이 한 장밖에 없지만, 역사로는 약 400년이 흘렀다. 구약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자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잇따른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구약에는 보이지 않다가 신약에 나타난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가?
이 물음은 단순히 귀신이라는 낱말이 어느 책에 몇 번 나오는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우는지, 예수께서 무엇을 이루셨는지, 왜 지금 회개하며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 상대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악의 영들이라고 했다(엡 6:12). 가족이나 이웃을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분별하고,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 채 귀신에게 명령하는 말만 외운다고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어떻게 사탄을 이기셨고 십자가에서 무엇을 빼앗으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구약에 축사의 명령이 없었던 까닭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한 영을 이기신 뒤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구약에는 귀신을 쫓아내라는 말이 없고 신약에는 축사가 등장하는가?
구약 시대에 귀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구약 시대에는 그 세력이 아직 오늘날처럼 왕국을 이루어 사람들을 압박하는 단계가 아니었다. 사탄은 선한 천사들을 하나씩 꾀어 자기 편으로 모아 갔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는 귀신의 통치자라는 말이 통할 만큼 세력을 이루었다. 이 세력의 확대를 보지 못하면, 구약에는 거의 없던 축사가 왜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으로 나타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 마태복음의 족보를 지나 복음서에 이르면, 전에 보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때문에 당황하기도 한다. 구약을 읽었다면 ‘이 사람들은 언제 생겼는가?’라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같은 질문을 귀신에게도 던져야 한다. 복음서에서 갑자기 귀신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종이 한 장의 간격에 감춰진 긴 역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 질문 자체를 놓친다. 처음 성경을 읽는 이에게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부터 읽고 다른 복음서로 나아가라고 권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먼저 분명히 알게 하려는 뜻이다.
그 사이에는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中間史, intertestamental history)가 있다. 바사 제국의 끝 무렵을 지나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의 시대에 이르렀다. 알렉산더 이후 네 장수와 관련된 역사도 전개되었다. 솔로몬의 첫 성전 뒤에 스룹바벨의 둘째 성전이 세워진 시대를 지나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집단이 등장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읽으면 이 시기의 역사와 귀신들의 우두머리에 관한 이야기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으로 바로 넘어간다고 해서 그 사이의 세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약에서 귀신을 가리키는 말로 다이모니온이 등장한다. 그러나 용어의 출현만으로 악한 영이 그때 처음 생겼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악신과 신접한 영, 사람을 꾀는 뱀을 함께 살펴야 한다. 신약의 복음서는 이전부터 이어져 온 악한 영의 활동이 예수님의 사역 앞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 현장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구약에는 귀신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구약에도 신약과 똑같은 규모의 축사가 필요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다(마 12:24). 여기서 ‘왕’으로 번역한 말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를 가리키는 아르콘이라는 말이다. 뒤에 그의 나라가 언급되기에 왕이라고 옮겼지만, 그 핵심은 사탄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데 있다. 신약성경은 그 왕국이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구약 백성에게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악한 영이 조금씩 활동했지만 그들의 세력이 아직 신약 때처럼 바글바글한 왕국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사람을 죄와 저주에서 건져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이 변화는 구약 성도를 소홀히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영의 세력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3. 사탄·뱀·귀신은 본래 어떤 존재이며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가?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는 사탄 마귀다. 요한계시록은 그를 큰 용,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부른다(계 12:9). 그는 시험하는 자, 이 세상의 임금, 이 세대의 신, 참소자, 거짓말의 아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로도 불린다. 이름이 여러 개라고 서로 다른 우두머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꾀며 자기 밑의 영들을 거느리는 같은 존재를 각 면에서 부르는 것이다.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6장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오고 그들을 귀신의 영이라고 부른다(계 16:13-14). 더러운 영은 본래 더럽게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가 범죄하여 더럽혀진 것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천사들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천군을 노래하고, 그들이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한다(시 103:20-22). 골로새서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정사와 권세도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골 1:16). 욥기의 장면에는 땅의 기초를 놓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했다는 말도 있다(욥 38:4-7).
창세기 2장 1절의 ‘천지와 만물’도 함께 보아야 한다. 원문의 ‘하늘들과 땅과 그 모든 군대’라는 표현에는 하늘의 군대인 천사들이 이미 창조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능력을 받았다는 시편의 묘사와, 보이지 않는 권세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졌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연결하면, 악한 영의 능력이 처음부터 사탄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하나님께 거역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뱀과 귀신은 어떻게 다른가? 필자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타락한 천사들을 귀신이라 부르고, 땅에 파송되어 사람을 섬기다가 타락한 천사들을 뱀이라 보는 편이다. 이것은 필자가 제시하는 구별이며, 성경에 두 계열의 이름표가 처음부터 정리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구별을 따라 보면 창세기의 옛 뱀과 신약에서 사람 속에 들어가 역사하는 귀신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두 부류 모두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악한 영이지만 그 기원과 활동을 똑같이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
필자가 태백산에서 거대한 용의 형상을 본 체험도 있다. 그 모습은 산을 찾는 사람에게 영이 붙는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태백산뿐 아니라 지리산, 계룡산, 삼각산처럼 신을 받으러 찾는 산들을 거론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필자의 영적 체험과 목회 현장의 관찰이다. 요한계시록이 밝힌 큰 용의 정체와 개인이 본 용의 형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큰 용이 우두머리라고 해서 영적 현장에서 보이는 용의 형상이 하나뿐이라는 뜻도 아니다.
‘사탄은 사람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도 경계해야 한다.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장면이 있고,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장면도 있다(눅 22:3; 마 16:23). 사탄은 우두머리이고, 그 아래에 뱀과 귀신이 있다고 해서 사람에게 직접 역사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악한 영들의 조직과 계급을 배우는 목적은 무서운 이름을 외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빌미로 역사하며 어떤 권세 앞에 굴복하는지 분별하기 위함이다.
4. 구약 시대 악한 영들은 무슨 일을 했으며 사탄의 왕국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구약의 악한 영들에게 두드러진 일은 참소였다. 욥기에 사탄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느냐고 따진다(욥 1:6-11). 스가랴서에는 여호수아를 대적하려고 그의 오른편에 선 사탄이 나온다(슥 3:1-2). 그들이 이미 악한 마음을 품고 사람을 고발했어도,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참소할 길은 아직 막히지 않았다. 계시록은 뒤에야 그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고 선포한다(계 12:10).
이 참소의 자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허용된 ‘야당’과 같다. 정죄할 일을 찾고 잘못을 들추어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것이다. 욥을 치도록 허락을 받았을 때 사탄은 그의 소유와 자녀와 몸에까지 차례로 손을 댔다(욥 1:12-19; 2:4-7). 그러므로 구약의 사탄이 약해서 아무 일도 못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의 활동은 참소와 유혹, 허락받은 공격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 사이에 더 많은 천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그렇다고 구약 시대에 사람을 공격한 악한 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에게 악신이 역사했다(삼상 16:14).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등장하는 장면에도 영적 세계에 관한 문제가 드러난다(삼상 28:7-20). 창세기의 뱀은 사람을 유혹했고, 가인의 시기와 분노는 살인으로 나아갔다(창 3:1-6; 4:3-8). 악한 영은 죄를 틈타 사람에게 역사했다. 다만 구약의 기록은 그들의 계급과 활동을 신약처럼 자세히 펼쳐 놓지 않는다.
사탄이 어떻게 세력을 키웠는가? 요한계시록은 붉은 용의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고 한다(계 12:3-4). 그 별들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사탄은 오랜 기간 선한 천사들을 꾀어 자기 부하로 삼았다. 그들을 하루아침에 다 얻은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조금씩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마침내 예수님 당시에는 부하들이 모인 왕국이 되었다. 귀신의 우두머리라는 바리새인의 말과 ‘사단의 나라’라는 예수님의 답변이 그 형편을 보여 준다(마 12:24-26).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사탄이 하늘에서 완전히 추방되었고, 그 때문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해졌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욥기에서는 그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올라간다(욥 1:6). 계시록은 승천하신 남자아이에 관한 장면 뒤에 미가엘과 용의 전쟁, 그리고 용의 추방을 보여 준다(계 12:5, 7-10). 그러므로 창조 초기에 있었던 도덕적 타락과 하늘 출입이 막힌 추방은 구별해야 한다. 구약에는 참소하고 세력을 모으던 때가 있었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그 자리가 사라졌다.
다윗의 인구 조사와 전염병의 이야기도 이 영적 세계를 살필 때 거론할 수 있다(삼하 24:1, 15-17; 대상 21:1, 14-17). 하나님께서 죄를 다루실 때 선한 천사를 쓰시는 경우와 사탄의 공격을 허용하시는 경우는 다르다. 욥이 겪은 연이은 손실과 질병을 생각하면, 사탄이 구약에서는 오로지 말로만 참소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자리와, 그가 자기 부하를 늘려 예수님 당시 왕국을 이룬 상태를 시간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
5. 예수님은 왜 사탄을 먼저 제압하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는가?
예수님의 공생애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시는 일로 시작되었다.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육체가 가장 약해졌을 때 마귀가 다가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마 4:1-4). 배고픔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자기 말에 순종하게 하려는 시험이었다.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세 번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1-11). 이것은 사탄을 향한 첫 승리, 곧 앞으로 그의 부하들을 내쫓기 위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지셨다면 그의 지배 아래 있는 귀신들을 자유롭게 몰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왜 먼저 우두머리를 제압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강한 자를 결박한 뒤에야 그 집의 세간을 빼앗을 수 있다고 하셨다(마 12:29). 사탄이 사람들을 붙들고 자기 나라의 세간처럼 삼았으나, 주님은 그를 결박하고 사람들을 건져 내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일이었다(마 9:35). 저물 무렵 귀신 들린 이들이 왔을 때에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이들을 고치셨다(마 8:16-17). 필자가 축사 현장에서 병든 사람 속에 많은 영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까닭도 병의 겉증상만 다루지 말고 그 근원을 살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병이 귀신 하나를 쫓아내는 방법으로만 낫는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둘씩 보내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막 6:7). 제자들은 회개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막 6:12-13). 칠십 명 또는 칠십이 명으로 전해지는 제자들도 주의 이름에 귀신이 항복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능력보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다(눅 10:17-20). 마가복음에는 믿는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표적도 기록되어 있다(막 16:17-18).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그렇다고 예수 이름을 믿는 모든 이가 실제 삶에서 똑같이 축사를 행한 기록이 많은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빌립의 사역,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은 바울의 일이 나온다(행 5:16; 8:7; 16:16-18). 바나바나 누가, 디모데가 귀신을 쫓아냈는지는 기록으로 단정할 수 없다.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과 그 권세를 실제로 사용하고 다룰 줄 아는 문제는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고 말씀으로 무장하며 회개해야 한다.
광야의 승리에 이어 십자가에서는 더 결정적인 승리가 있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지셨다. 사탄은 죄의 삯인 사망을 붙들고 사람을 위협했지만, 죄 없으신 주님을 죽임으로 불법을 행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겨 버리고 승리하셨다(골 2:14-15). ‘계급장을 떼었다’는 표현은 악한 영들이 능력을 전혀 잃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권세가 주님의 권세 앞에서 무장 해제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약한 사람도 자기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맞설 수 있다.
고을에 힘센 관리가 있어도 임금이 내린 마패를 지닌 암행어사가 오면 권세의 관계가 뒤집힌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그와 같다. 귀신의 능력은 여전히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나라를 묶으신 예수님의 권세가 그 위에 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나가라’는 말만 반복하면 상대의 위세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 먼저 강한 자를 이기신 주님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 그분이 제자와 믿는 자에게 맡기신 일을 행해야 한다.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6. 사탄의 다섯 차례 추락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사탄의 추락을 한 날의 한 사건으로만 읽으면 구약의 참소자와 신약의 추방 장면을 서로 맞출 수 없다. 그 과정을 다섯 차례로 구별해야 한다. 첫째는 창조된 뒤 마음에서 일어난 도덕적 타락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선하게 지으셨다. 에스겔 28장의 두로 왕에 관한 표현 속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과 그의 불의를 읽으면 사탄의 교만이 드러난다(겔 28:14-17). 지음받던 날의 완전함에서 불의가 드러난 일을 보라(겔 28:15). 그는 창조되던 날부터 자기 아름다움과 지혜를 보며 마음이 높아졌고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 이사야의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는 말도 그 마음과 연결한다(사 14:12-14). 이것은 먼저 마음에 품은 대적이었다. 그가 천사들을 거느리던 찬양의 자리까지 자기 영광으로 돌리려 했다는 것도 이 교만의 모습이다. 마음속 교만이 뒤이어 천사들을 꾀는 행동으로 나아갔다.
둘째는 다른 천사들을 끌어들여 자기 세력을 만드는 추락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관한 말씀과 붉은 용이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당긴 장면을 함께 보라(유 1:6; 계 12:3-4).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을 시기하여 사람을 죄로 유혹했고, 오래도록 부하를 모아 왕국을 세웠다. 이 시기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참소했다. 아직 하늘에서 완전히 쫓겨난 때가 아니었으므로, 도덕적 타락과 추방을 같은 사건으로 합쳐서는 안 된다.
셋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빼앗기고 정사와 권세가 무장 해제된 추락이다(골 2:14-15; 계 1:17-18). 예수께서는 죽으셨다가 살아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 십자가의 승리는 전쟁에서 패한 자의 옷과 계급장을 벗기고 개선 행진하는 모습과 같다. 귀신이 세게 느껴져도 그리스도의 권세와 나란히 놓을 수는 없다.
넷째는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하늘에서 내쫓긴 추락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아이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간 뒤,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싸운다(계 12:5, 7-9). 그때까지 형제들을 밤낮 참소하던 자가 더는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한다. 그 뒤 사탄 자신은 무저갱(無底坑, abyss)에 결박되어 있고 그의 부하들이 땅에서 활동한다(계 20:1-3). 지금 사역 현장에서 마주치는 영을 모두 사탄 자신이라고 부르지 않는 까닭이다.
다섯째는 마지막에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완전한 추락이다. 무저갱은 그를 결박한 감옥이고, 불못은 최종 형벌의 자리다. 요한계시록은 천 년 뒤 잠시 풀려난 그가 결국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는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한다(계 20:7-10). 지금은 그 마지막 심판 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활동을 끝까지 방치하지 않으신다.
7.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와 성령의 내주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께서는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표지라고 하셨다(마 12:28). 귀신을 내쫓는 목적은 기이한 현상을 보여 주는 데 있지 않다. 악한 영이 붙들던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데 있다. 영만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육체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에 끌려간다면, 그 몸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데 장애가 남는다. 그래서 회개하여 영을 내보내는 일은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일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구약에서는 성령께서 왕이나 사사 같은 사람에게 임하여 일을 맡기시고 떠나시는 장면이 나온다.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난 일이 그 예다(삼상 16:14). 신약에서는 주께서 성도 안에 생명 주는 영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신다(고전 6:17; 15:45). 악한 영의 세력이 커진 때에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창조주를 의지하면 귀신의 계급이나 위세 때문에 포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권세를 가졌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죄를 통하여 들어온 영이 저절로 떠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디에서 먼저 경험할 수 있는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육체와 삶에서다. 귀신이 붙들고 있는 부분을 그대로 두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고름이 찬 곳에 겉약만 바르는 것과 같다. 고름을 빼내야 새살이 차오르듯이,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 붙은 악한 영이 떠나야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 삶에 더 깊이 임한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을 이번 말씀의 중심 본문으로 잡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축사는 천국의 통치를 몸으로 미리 맛보게 하는 일이다.
왜 나가지 않는가? 영이 죄를 틈타 합법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죄를 그대로 두고 ‘나가라’고만 하면 그 영은 나갈 이유가 없다고 버틴다. 창세기에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과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육체를 연결하면 이 일을 알 수 있다(창 2:7; 3:14). 한 차례 강한 사역으로 영이 아파 떠난 듯해도 회개가 없으면 다시 들어올 수 있다. 예수께서도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일곱을 더 데리고 돌아오는 일을 말씀하셨다(마 12:43-45). 그러므로 쓰러졌다는 현상이나 큰 소리가 났다는 사실만으로 끝났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사역자가 강한 불로 영을 밀어내는 경우에도 죄의 자리가 남아 있다면 돌아올 길이 남는다. 내보내는 순간의 고통과 완전히 떠난 결과는 다르다. 단번에 끝내 주겠다는 말만 듣고 회개를 미루면, 잠시 가벼워졌다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사역을 받기 전에 자기 죄를 살피고 여러 번 지은 죄라면 그만큼 거듭 자백해야 한다. 회개는 귀신을 내보내기 위한 형식이 아니라, 그 영이 붙잡고 있던 죄의 근거를 없애는 일이다.
필자는 성경을 외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선포하며 금식해 보았어도, 그 말만으로는 속의 영이 나가지 않았던 경험을 말한다. 또 병든 이를 위해 사역하다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영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런 체험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현장에서 왜 회개가 필요한지를 배운 과정이다. 병이 깊어져 힘이 다 빠진 뒤에는 회개하기조차 버겁다.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시간이 있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8. 성도는 왜 회개와 전신갑주로 영적 싸움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가?
먼저 싸움의 상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바울은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의 영들을 상대한다고 했다(엡 6:12). 그렇다고 그들에 대한 지식만 쌓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 full armor of God)를 입어야 한다.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호와 공격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엡 6:10-17). 무장하지 않고 무턱대고 귀신에게 명령하면 그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 무장에는 회개(悔改, repentance)가 빠질 수 없다. 요한일서는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한다(요일 1:7-9). 먼저 죄를 깨닫고 자백해야 영이 떠날 합법적인 근거가 생긴다. 그 다음에 사역자의 도움으로 영을 내보낼 수 있다. 회개 없이 축사만 받고 영이 강제로 떠난다면,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들어와 더 괴롭힐 수 있다. 자기가 지은 죄를 되풀이했다면 그 횟수와 들어온 영의 수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진실하게 거듭 회개해야 한다. 열다섯 번 회개하고 한 번 안수받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설교에서 이천육백 번의 회개를 예로 든 것은 숫자를 기계적인 입장권으로 만들려는 말이 아니라, 적은 회개로 많은 죄의 자리를 한 번에 해결했다고 단정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한 번의 안수에만 모든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많은 죄를 오랫동안 반복해 놓고 짧은 시간에 몇 차례 회개한 뒤 영이 모두 떠났다고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회개 횟수를 채우기만 하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뜻도 아니다. 지은 죄를 진실하게 인정하고 돌이키면서, 그 죄를 범한 반복과 영이 들어온 과정을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한다. 진실한 자백과 반복 회개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예수의 피가 죄를 씻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요일 1:7, 9).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를 자백하고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는 길을 두고, 기름을 바르거나 ‘나갔다’고 선포하거나 사람을 밀어 쓰러뜨리는 현상만으로 축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이런 현상 뒤에 영이 그대로 남거나 돌아오는 사례를 보아 왔다. 중요한 것은 죄의 자리가 처리되어 악한 영이 합법적으로 떠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삶에 임하는 일이다. 회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죄를 돌이키는 실제 행위여야 한다.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이 준비는 더 절실하다. 요한계시록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귀신의 영들이 나와 아마겟돈의 전쟁을 위해 세상을 모으는 모습을 보여 준다(계 16:13-16). 지금 천국의 땅에서 천년왕국이 진행되며 사탄은 무저갱에 결박되어 있지만, 마지막에 그의 세력이 드러나 큰 핍박이 올 것이다(계 20:1-7). 주님의 공중 강림 때 준비된 알곡 성도는 나팔절의 실현으로 아마겟돈 전쟁에 소집된다. 그때까지 죄와 악한 영을 안고 적그리스도의 압박 앞에 서지 않도록 지금 익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 그분을 사랑하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맡겨진 사람에게 충성하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다섯째 나팔 때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이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 영적 싸움을 미루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계 9:1-11). 황충의 공격과 적그리스도의 때가 오기 전에 알곡으로 익어야 한다. 공중으로 들림받는 성도는 마지막 전쟁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시는 전사들이다. 그 싸움에 나아가기 전에 자기 속의 간첩 같은 영을 회개로 내보내야 한다. 회개와 축사, 말씀의 무장은 이 마지막 부르심을 위한 현재의 준비다.
9. 나오며
구약 시대에 축사의 명령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까닭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신 과정을 살펴보았다. 사탄과 뱀과 귀신은 같은 말로 뭉칠 존재가 아니며, 구약의 참소와 신약의 추방도 한순간의 사건으로 합칠 수 없다. 사탄은 교만으로 타락하고 천사들을 꾀어 왕국을 세웠으나, 주님은 광야에서 그를 이기고 십자가에서 그 권세를 벗기셨다. 승천 뒤에는 하늘에서 쫓겨났고, 마지막에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도는 악한 영의 위세에 눌려 있을 이유가 없다. 다만 죄를 붙든 채 축사의 말과 현상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거듭 진실하게 죄를 자백하고, 말씀과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의 육체와 삶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과 마지막 싸움을 바라보며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회개로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끝까지 그분께 충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03일(토)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