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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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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제1부 순서

[기독론(209)]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6) 요엘서에 나타난 구원론과 오늘날의 구원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엘2:30~32)

요엘 2:30~32정보배 목사조회 320읽는 시간 약 43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단순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적 회개와 삶의 실천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믿음과 자백의 회개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부르심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구원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경의 참된 구원론을 왜곡하는 일부 교리의 오류를 비판하며,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올바른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일차적 구원은 무엇이며 완성된 구원과 어떻게 다른가?2회심의 회개와 자백의 회개는 왜 구원 보존에 필요한가?3요엘의 '누구든지'는 혈통 중심의 구원관을 어떻게 깨뜨렸나?4할례·율법이나 방언을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어디까지 옳은가?5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떻게 예정론과 제한 속죄로 지나쳤는가?6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7요엘서가 보여 주는 바른 구원론은 무엇인가?

강의 자료

그림 3 · 슬라이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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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구원의 완성설교 슬라이드 · 29장
설교 본문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오는가? 기도 응답을 받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은사와 축사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원(救援, salvation)을 받기 위해서다. 이 시간은 지난 시간에 다 마치지 못한 말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신약의 사람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섯 가지 정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간에는 그 방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고, 요엘서가 말하는 구원론과 오늘날 우리가 들어온 구원론이 어떻게 다른지 정리해 보도록 하자.

왜 이러한 시간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한 부분의 말씀을 전체로 확대하거나, 정반대편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제한 채 교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가 구원론에 있어서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이 말씀하고 있는 바, 바른 구원론을 찾아가야 한다.

2. 일차적 구원은 무엇이며 완성된 구원과 어떻게 다른가?

구원은 사실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고, 천국에 들어가야 완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속죄(贖罪, atonement)를 받아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주는 영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 거듭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시작된다.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속죄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속죄란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덮어 버리고 없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칭의(稱義, justification), 곧 의롭다고 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이 지은 죄를 다 깨끗이 청소해야 생명을 주는 영을 넣어 주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죄가 아무리 많았어도 “나는 하나님도 모른 채 죄를 짓고 살았으며 지옥도 몰랐던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할 때 속죄가 일어난다.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 죄가 없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효과다. 그렇게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주는 영의 분배를 받아 성령으로 거듭나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것을 가리켜 '일차적 구원'이라고 부른다. 일차적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시에 받은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일차적 구원은 완성될 구원을 향하여 출발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차적인 구원이라고 우리에게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신 구원인 것이지 중간에 탈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차적 구원을 받은 사람을 두고 영원히 구원받았다고 말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차적인 구원은 아직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완전한 구원을 받은 상태가 아니므로 누구든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이 받은 구원을 완성해 가야 한다.

그러나 일차적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차적인 구원을 받아 과거에 지었던 자신의 죄들이 덮인 상태이고, 자기 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이전부터 자기 속에 있던 악한 영들은 단 하나도 나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똥같이 더러운 것을 그냥 멍석으로 덮어 놓은 상태와 같다. 그러므로 그렇게 가만히 두면 냄새가 쏠쏠 올라온다. 그럼, 그 더러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 실체인 귀신과 뱀이다. 이런 것들이 계속 우리 육체 가운데 남아 있으면 이런 것들은 우리를 또다시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만약 이러한 관념이 머리에 박혀 버린다면 그는 속죄만을 믿고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는 마지막 날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계 3:5). 그리고 성밖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계 22:15).

이것은 필자가 성경을 다시 보고 또한 영적인 실체를 경험한 것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을 보라. 거기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고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으시며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지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뜻이다. 필자는 생명책에 관한 많은 것들을 확인하면서 이 말씀을 드린다.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진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으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부터 구원받는 것과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천국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천국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 안이 천국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은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각각 12,000 스타디온이다(계 21:16). 약 2,400km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00km의 여섯 배쯤 된다. 그런데 성 밖은 그보다 훨씬 넓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진 사람들만 있다. 한편 지옥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지워져서 거기에 있는 사람도 있고 아예 기록되지 않아서 거기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 밖은 다르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서 성안에서 성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예수님께서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마 22:13).

생명나무는 바로 성 안에 있다. 필자가 본 천국의 실제를 말하자면, 성 안에는 시온산이 있는데, 이것은 지상에서 직선으로 800km까지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그리고 나머지 1,600km는 원통형으로 쪽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꼭대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보좌 밑에서는 생명수가 발원하여 흐르는데,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영광의 광장의 밑을 지나 원통형 밖으로 1,600km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동쪽에서 시작된 생명강은 성의 동쪽 문 앞까지 이어져 있는데,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받은 구원을 내가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날마다 자기 두루마기(겉옷)를 빨고 있어야 한다(계 22:14). 자기의 겉옷을 빠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도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여 깨끗하게 한 자만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도록 구원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다시 죄를 지어 겉옷을 더럽혔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대부분 성 밖으로 쫓겨난다. 겉에서부터 더러워지니 그 더러워진 겉옷을 날마다 빨아야 하는 것이다.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면서도 사실 안전하지 않다. 주 예수를 믿고 끝까지 회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받은 구원은 안전하지만, 믿다가 안 믿겠다고 하거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그의 구원은 불안하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인내하라고 말한다(계 13:10, 14:12). 그러므로 성도가 한 번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으면 어떠한 핍박을 받아도, 혹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도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구원이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회심의 회개와 자백의 회개는 왜 구원 보존에 필요한가?

필자는 지난 13년 이상을 사람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해 왔다(막 1:15). 그런데 이것은 구원을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말한 것이다. 믿는 것도 내가 믿는 것이고 회개도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필자는 인간의 측면을 많이 강조해서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지금 필자가 외치는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마지막 복음’이라고 한 것도 인간의 측면에서 강조한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측면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도 있고, '천국'이라는 것도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겹치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사실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28). 하나님의 통치가 내 육체에 나타나 귀신을 쫓아내고 있으면 이미 내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마지막으로 장소를 이동하여 들어가는 곳이다. 진짜 천국은 물리적인 어떤 공간에 실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죽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와서 나를 데려가려고 한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교양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저승사자에게 붙들려 음부로 끌려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죄와 사망과 사탄마귀를 이기려면 반드시 우리는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겉옷을 빨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회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처음 믿을 때 하는 회개는 구원받기 위한 회개, 구원의 시작으로서의 회개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회개를 통해 속죄를 받는다. 필자는 이것을 회심(回心, conversion)으로서의 회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속죄를 위한 회심의 회개는 일생에 한 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하는 회개는 이와 다르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를 회개하는 회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정결함과 거룩함을 위하여 회개하는 회개다. 필자는 이것을 자백(自白, confession)함으로서의 회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일어한 자백함으로서의 회개는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구원을 잃어버리거나,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고, 자신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다. 한 번 구원받아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은 사실 사람의 바람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 2:12).

그런데 필자가 회개하라고 외쳤더니, 어떤 칭의론자가 말하기를 “너 행위 구원론자지? 오직 믿음 하나면 천국 가는데 무슨 그딴 소리를 하는 것이냐?” 하면서 필자를 정죄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믿음과 회개를 외치는 사람은 행위구원론자인가?

4. 요엘의 ‘누구든지’는 혈통 중심의 구원관을 어떻게 깨뜨렸나?

자 , 사람이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최소한 5가지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첫 번째 구원 방식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행 16:31; 롬 10:9-10). 그리고 이것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롬 10:12-13).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때 여기에 나오는 ‘주’는 히브리어로 따지면 여호와다. 왜 그런가? 구약의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신약에 아들로 오셨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신약성경에서 재인용될 때에는 전부다 '주'(퀴리오스)라고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구약성경 가운데 '주'라는 말씀은 대부분 '여호와'이다.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에는 여호와이셨던 주 예수님을 구원자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여기서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한편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으면 천국에 가니, 믿었으면 천국에 간다”는 삼단논법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면 이제 요엘서의 말씀을 보자. 요엘서는 구약 시대인데도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는 놀라운 예언서다. 당시 남유다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는 자기들만, 할례받은 아브라함 언약의 혈통적 후손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요엘 선지자가 그것을 깨부순 것이다. 물론 요엘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들어 그렇게 말하게 하신 것이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때 요엘 선지자는 할례받은 언약 자손만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가히 충격적이다. 앞서 본 호세아서도 혼혈로 타락한 북쪽 사마리아까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배웠고, 신약의 사도들은 이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도 함께 배웠다. 요엘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여기서 잠깐 '히브리인'과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구별해야 한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창세기부터 나오는데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인이라고 처음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창 14:13).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혈통적 후손을 보통 히브리인이라고 부른다.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뜻이다(빌 3:5).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의 손자 때에 생겨난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2장에서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곱의 이름을 이긴 자라는 뜻으로 바꾸어 주심으로 생겨난 이름이 '이스라엘'이다(창 32:28).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그의 부친 이삭 때는 아들들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상속자가 되었지만,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아 열두 명을 다 상속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긴 자요 풍성함의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란 야곱의 후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을 차지한 뒤 사사 시대를 살았으나 지파 사이의 연합이 약해 늘 주변국에 당했고, 그래서 왕을 구했다. 사울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백성이 하도 왕을 구하니 하나님께서 허락한 왕이다. 우리도 떼를 쓰고 울며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도 한다. 그런데 사울이 타락하자 왕권은 하나님이 원래 세우려 하신 다윗에게 넘어갔다. 전쟁에 능한 다윗은 아름다운 왕국을 세웠지만 피를 많이 흘려 성전을 짓지 못했고(대상 22:8), 평화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문과형 왕인 솔로몬은 불안하여 주변 나라의 공주들을 정략결혼으로 데려왔고 후궁과 첩이 천 명이었다(왕상 11:3). 그들이 가져온 우상으로 인하여 나라가 타락했다.

필자가 확인한 천국에서는 다윗과 솔로몬 두 사람만 왕복을 입고 다닌다. 다윗은 빛나는 멋진 왕복을 입었지만 솔로몬은 초라한 왕복을 입고 다윗을 따라다닌다. 솔로몬의 영광이 들의 백합화 하나만 못하다는 말씀(마 6:29)이 생각날 만큼 불쌍했다. 아버지 다윗 덕분에 겨우 회개하여 전도서 끝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고 남기고(전 12:13) 간신히 턱걸이로 천국에 갔다.

그런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세금을 줄여 달라는 여로보암과 백성의 요청을 젊은 신하들의 말을 따라 거절했다(왕상 12장). 그러자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데리고 북쪽으로 가서 북이스라엘을 세웠고, 남쪽에는 유다와 베냐민만 남아서 남유다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인이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은 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으며, 나중에 신약에는 이 말이 유대인이라고 바뀌어서 나온다.

사실 북쪽으로 갔던 북이스라엘은 혼혈로 사라졌지만 남유다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고 남아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받은 족속으로서 우리만 구원받는다”는 자부심이 아주 강했다. 그러나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했다(롬 2:28-29). 요한계시록은 인 맞은 자들을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부른다(계 7:4). 북쪽 열 지파가 사라졌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인과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가라고 하셨다(마 10:5-6). 그러나 남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였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다(마 27:25). 그래서 하나님은 혈통적 조건을 더는 우선순위에 두지 않기로 결정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마 28:19). 참고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유대인 우선주의가 있으니 그들을 가리켜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요엘서 2장 32절에 나오는 ‘누구든지’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고로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파격적인 예언을 바로 요엘이 한 예언인 것이다.

그런데 요엘서가 말한 구원의 첫째 조건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신약의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그러므로 믿고 부르는 것이 첫 번째 구원 방식인 셈이다.

5. 할례·율법이나 방언을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어디까지 옳은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로 두 번째 구원 방식은 믿은 자가 되었어도 동시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행 15:1).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도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예수 믿는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맞는 것인가? 그 해답을 들으려면 사도들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어떻게 말했는가? 사도 바울은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갈 2:16). 그러므로 우리 이방인은 믿으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예루살렘 회의도 또한 그렇게 결정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자기들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했다(행 15:1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율법은 사실 그림자이며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자 곧 초등교사라고 했다(갈 3:24). 이는 율법 중에 의식법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했다(롬 3:20). 이는 율법 중에 도덕법을 십계명으로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인 것이었지 도덕법(道德法, moral law)은 아니었다. 구약의 율법 중에서 의식법이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어진 법으로서, 제사법, 음식법, 절기법, 정결법과, 할례법, 안식일법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할례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해야 한다. 의식법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는 모형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의식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오실 메시아를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잘못 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마치 도덕법까지 폐지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의식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으므로 폐지되었다고 한 것이며, 이것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손이다 보니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에 너무 꽂혀서 율법은 다 폐기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고, 그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 곧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타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와 음식법 같은 의식법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성되어 폐지되었으니 이것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의식법들 중의 하나인 절기법의 유월절 양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고전 5:7).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어떤 단체는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며 자신의 교주를 재림 예수라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으면 어머니도 있어야 한다며 한 여자를 어머니 하나님이라 주장한다. 그 여인이 태어나기 전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 여인이 죽으면 구원받을 사람도 없어진다는 말인가? 큰일 날 소리다. 또 어떤 교단은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리로 한번 넘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안식일은 절기법에도 나오고 도덕법에도 나온다는 것을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의식법인 절기법으로서는 안식일이 폐지되었고, 도덕법으로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지킨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자도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킨다고 이단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를 죄인으로 깨우쳐 회개하게 하지만, 의식법까지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교단은 믿어서는 부족하고 믿고 성령 세례(聖靈洗禮, 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받아야 구원받으며, 그 표적이 방언(方言, tongues)이므로 방언을 못 하면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교단에서는 전도하면 한 달, 늦어도 세 달 안에 반드시 방언이 터지게 해야 하고, 못 하면 큰일 난다. 그래서 날마다 모여 얼마나 기도하는지 모른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실 때 은사를 선물로 주시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필자는 그것도 잘하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못해서 문제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장로교의 성도들은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100% 맞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은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묻기 때문이다(고전 12:29-30). 이는 믿는 성도가 방언을 못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 구원받은 표적인 것은 맞지만, 방언을 못한다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겠다.

6. 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떻게 예정론과 제한 속죄로 지나쳤는가?

세 번째 구원 방식은 '은혜(恩惠, grace)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행 15:11, 엡 2:5, 딤후 1:9, 딛 2:11).

행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것은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은혜란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엡 2:5). 사도행전 15장 11절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두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했다. 고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의 방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왜냐하면 믿고 회개하고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 인간의 측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로서 말하는 진술들이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셨듯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불러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요엘서 2장 32절에서 요엘 선지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불러서 구원받는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어느 때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 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은혜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장 8-9절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의 뜻을 살려서 번역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베푸시는 은혜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고로 믿음은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고,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일이다. 고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을 뭉개 버리면 위험하다. 사실 필자의 ‘회개가 천국 복음’도 한쪽만 말하면 위험할 수 있다.

반대로 은혜가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구원의 네 번째 방식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기로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셔야 구원을 받는다는 방식이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고, 어떤 사람은 만세 전에 멸망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일명 개인 구원 예정론과 개인 멸망 예정론이다. 이것을 가리켜 칼빈의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이라고 부른다. 칼빈은 장로교의 아버지 격인 분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에 의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론을 강조하다가 그만 개인 구원 예정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개인 구원 예정'은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주장이다. 성경을 그렇게 해석해서 만든 교리인 셈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비록 장로교 목사이지만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과 만세전 개인 멸망 예정론을 따르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잘못된 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아들도 꼭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듯, 필자도 칼빈의 예정론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있어서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니 아버지를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하되 잘못된 사상은 따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순수한 복음으로 간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만 주권적으로 정해 놓으시고 정한 그들을 불러내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과연 주님은 구원받을 자만 불러내시겠는가, 아니면 누구든지 다 불러내서 구원으로 초청하시는가? 성경은 구원받을 자만 불러내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구원받으라고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37-39절과 10장 28-29절의 말씀을 근거로, 아버지께서는 구원받을 자만 아들에게 보내 주신다고 주장하신다. 그러나 그 구절들은 만세 전 예정론이 맞다고 하기 위해 번역을 왜곡해 놓은 것이다(이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이다). 그럼, 성경은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구원으로 초청하신다고 말씀하는가?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구원받을 자만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다(딛 2:11).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이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을 제한 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라고 한다. 예수님이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겠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겠는가? 하나님은 쩨쩨하지 않으시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보라.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 성경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씀한다(고후 5:14-15).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끝까지 그것을 믿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제한 속죄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자만이 그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만을 위해 예수께서 죽으셨다면 필자 같은 사람은 구원으로 초청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지옥에 가도 열두 번도 더 가야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며,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누구에게든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요 7:37-39). 그러니 감사하다.

필자는 칼빈주의를 예수님을 믿고 수십 년을 아버지의 가르침처럼 따라왔지만, 지금 보니 그 5대 교리는 거의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만세 전에 정해 놓으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무런 원칙도 없는 어떤 폭군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우리를 사랑하시어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신 분이 “너는 구원하고, 너는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안 된다. 너는 눈이 삐뚤어져서 안 되고, 너는 집안 때문에 안 된다” 하시겠는가? 고로 그들이 말하는 무조건적 선택도 틀린 것이고 제한 속죄도 틀린 것이다. 아버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필자를 두고 교단에서 언제 호적을 파버리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오직 순결한 진리는 두 가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신학교를 세워 교단을 하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한쪽만 보아서는 안 된다. 다른 쪽 말씀도 함께 보아야 한다. 둘이 같이 할 수 없는 교리는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신약을 전공한 필자는 헬라어 원문에 가장 근접한 신약성경 번역을 곧 내려고 한다.

7.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과 회개를 통한 응답은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 하나로 다 정리하신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다.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 아버지시고 아들은 예수님이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들을 잔치에 오라고 했다. 여기서 종들은 모세와 다윗과 예레미야 같은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청한 사람들’은 원문으로 ‘부르심을 받은 채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이 불러내신 자들이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다. 특히 유대종교지도자들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들은 오기를 싫어했다. 임금은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냥 잔치에 오라고 다시 종들을 보냈다.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준비하셨으니 그냥 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사업하러 갔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그의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 사가랴를 죽였고,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였으며, 나중에는 예수님까지 죽였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A.D.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을 보내 예루살렘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리고 종들에게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으니 네거리에 가서 만나는 대로 청하라고 했다.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거기에서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고,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했다(마 22:2-10). 여기에 나오는 네거리에 나가서 만난 사람들은 첫째, 유대인들 중에 병들고 귀신 들리고 죄인 취급을 받은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고, 둘째, 더 나아가서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누가 이 잔치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결국 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이 싫어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 초청권이 부여되었다. 그래서 이방인들로 인하여 혼인잔치 자리가 가득 찼다. 고로 이 비유의 핵심은 누구든지 그 잔치에 불러야(초청을 받아야)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아닌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책임이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응답하지 않고 예수가 아니라 주먹과 돈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의 굳어버린 마음을 버리고 자유의지로 믿겠다고, 그리고 회개하겠다고 결단하였으니 참으로 복된 자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은혜와 믿음 중에 무엇이 먼저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불러야 우리가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먼저 우선권을 주셨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자, 소외된 자, 귀신 들린 자, 창녀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유대인 가운데서 그들을 먼저 구원하시고, 그다음에 네거리에서 만나는 아무나, 곧 이방인을 부르셨다. 그런데 그 잔치에는 반드시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했다(마 22:11-13). 그 예복은 의의 예복,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 중에 은혜가 먼저 시작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에 반응하는 것이 믿는 것이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고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선교사 하멜이나 토마스 선교사 같은 앞선 사례도 먼저 있었지만, 하나님은 1885년 서양 선교사를 제물포항에 보내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구원으로 부르셨다. 우리나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화된 나라가 되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에서 나오라고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신 분을 믿고 따라갔다(창 12:1). 그러나 우리 한민족은 그전에는 부르심을 받지 못했으니 하나님을 모른 채 살면서, 무당을 5,000년 동안 섬겼고, 부처를 1,000년 동안 섬겼으며, 제사를 500년동안 지내며 살아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885년 저 서양 선교사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을 구원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럼 세종대왕은 천국에 갔습니까?” 하고 물을 것이다. 부르셨는데도 안 믿었다면 지옥에 가야 응당 마땅한 것이겠지만, 한 번도 부르지 않으셨는데 그를 지옥에 보내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하나님께 탄원할 것이다. 왜 한 번도 나에게 그러한 초청도 하지 않았으면서 내가 믿지 않았다고 지옥에 보냈느냐고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길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필자가 영적 실제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차와 방법은 우리가 몰라도 된다. 지금은 들을 수 있는 시대인데, 내가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인 시대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사실 지금 믿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다.

8. 요엘서가 보여 주는 바른 구원론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으면 된다. 특히 요엘서는 참으로 좋은 지침이 된다. 요엘서 2장 32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오늘날로 표현한다면,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불러내야 한다. 고로 하나님이 불러낸 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믿게 하시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자 곧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는 보편적인 구원 초청 이전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욜 2:12-13). 그렇게 돌아오는 시온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욜 2:23-2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것이고, 여호와께서 불러내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롬 1:15) 그리고 마태복음 22장처럼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보내 우리를 먼저 부르셔야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민족을 사랑하셔서 그 민족을 불러내셔야 한다.

그러나 예정론은 너무 지나쳤다. 없는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넘어 성경 번역까지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주권적으로 다 정해 놓으셨다면 아래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찢어내야 한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은 누가 여는가? 하나님이 강제로 그 문을 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려고, 곧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려고 지금도 문을 두드리신다. 그런데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가 문을 열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우리 성도들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중보 기도를 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로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떠나가서 불신앙과 의심이 사라지고 말씀을 들을 때 “아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불신자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는다면, 귀신은 그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안과 밖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 불신자더러 믿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도 역시 우리가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구원받아야 할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필자는 인간이 해야 할 일, 곧 믿고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래서 회개가 천국 복음이라고 말이다. 오늘 내가 믿지 못하는 면이 있다면 악한 영이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듣지 않아 믿음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꾸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한 번 구원받은 것이 영원하다며 앉아 있다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66권 성경의 원문에 나와 있는 대로 정확히 알아야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 부르심에 인간의 응답이 필요하다. 내가 죄인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심으로서의 회개이고, 주 예수를 믿겠다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믿음이다. 셋째, 그렇게 해서 한 번 얻은 구원이 영원토록 내 것이 되려면 최소한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거듭난 뒤에 우리 속의 귀신은 한 명도 나가지 않은 상태이므로, 날마다 자백하는 회개로 귀신을 내보내지 않으면 귀신이 우리를 죄로 유혹하여 마침내는 구원에서 미끄러지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데도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를 믿고 회개하지 않은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자는 죽을 때에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면서 성 밖으로 갈 확률이 매우 높다.

9. 나오며

오늘 여러분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일차적 구원을 이룬 것이다. 이제부터는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점차 내보내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의심과 불신앙의 영이 오지 않는다. 필자는 오늘날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별로 없다. 회개하여 내 속에 있는 영들을 거의 다 내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어떤 성도는 별다른 은사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필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제 손에 불을 주세요” 하고 아침에 일어나 20번씩 귀를 비볐더니 불신앙의 영들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손을 주신 것은 귀신을 쫓는 데 쓰라고 주신 것이다.

특히 회개하면 예수의 피가 들어와 악한 영을 떼어낼 수 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회개다. 우리는 그간 무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고, 악한 영들의 방해로 인하여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회개로써 악한 영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아가 온전히 구원받는 자로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한다.

2026년 10월 10일(토)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