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09)]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6) 요엘서에 나타난 구원론과 오늘날의 구원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엘2:30~32)
이 설교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단순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적 회개와 삶의 실천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믿음과 자백의 회개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부르심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구원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경의 참된 구원론을 왜곡하는 일부 교리의 오류를 비판하며,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올바른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일차적 구원은 무엇이며 완성된 구원과 어떻게 다른가?본문 →2회심의 회개와 자백의 회개는 왜 구원 보존에 필요한가?본문 →3요엘의 '누구든지'는 혈통 중심의 구원관을 어떻게 깨뜨렸나?본문 →4할례·율법이나 방언을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어디까지 옳은가?본문 →5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떻게 예정론과 제한 속죄로 지나쳤는가?본문 →6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본문 →7요엘서가 보여 주는 바른 구원론은 무엇인가?본문 →1. 들어가며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오는가? 기도 응답을 받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은사와 축사를 받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원(救援, salvation)을 받기 위해서다. 이 시간은 새벽에 다 마치지 못한 말씀을 이어 간다.지난 시간에 신약의 사람들이 구원을 이해한 방식이 다섯 가지 정도 있다고 했다. 이번 시간에는 그 방식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요엘서가 말하는 구원론과 오늘날 우리가 들어 온 구원론이 어떻게 다른지 정리해 보자.
한 부분만 말해 놓고 전체로 확대하거나, 정반대 편의 말씀이 있는데도 한 부분을 교리로 만든 것은 옳다고 하기 곤란하다. 우리는 바른 구원론을 찾아가야 한다.
2. 일차적 구원은 무엇이며 완성된 구원과 어떻게 다른가?
구원의 과정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고, 천국에 들어가야 완성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속죄(贖罪, atonement)를 받아 죄 사함을 받고, 생명 주는 영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 거듭났다는 뜻이다.
이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시작된다. 믿으면 하나님께서 속죄를 베푸신다. 속죄란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덮어 버리고 없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칭의(稱義, justification), 곧 의롭다고 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죄를 다 깨끗이 청소해야 생명 주는 영을 넣어 주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죄가 많아도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죄를 짓고 살았으며 지옥도 몰랐던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할 때 속죄가 일어난다.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 죄가 없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을 통한 첫 번째 효과다. 그렇게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주는 영의 분배를 받아 성령으로 거듭나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을 일차적 구원이라고 부른다. 일차적 구원은 완성될 구원을 향하여 주시는 시작이다.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지 중간에 탈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차적 구원을 받은 사람을 두고 영원히 구원받았다고 말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차적 구원을 받은 사람 속의 악한 영은 하나도 나가지 않은 상태다. 더러운 것을 멍석으로 덮어 놓은 것과 같다. 가만히 두면 냄새가 난다. 그 더러운 것은 영적 실체인 귀신과 뱀이므로 우리에게 또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런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한 번 들어오면 회개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다가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죽으면 주님께서 마지막 날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 버리신다.
이것은 필자가 영적 실제를 가르쳐 드리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으시며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했다. 거꾸로 지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필자는 생명책에 관한 것을 거의 다 보았기 때문에 말씀드린다. 회개하지 않고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워진다.
천국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 성이다. 그 성 안이 천국이다. 성은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각각 12,000스타디온이다(계 21:16). 약 2,400km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00km의 여섯 배쯤 된다. 그런데 성 밖은 그보다 훨씬 넓다. 성 밖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진 사람들만 있다. 지옥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지옥에 간 사람도 있고 아예 기록되지 않은 사람도 간다. 그러나 성 밖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쫓겨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예수님께서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마 22:13).
그렇다면 이미 받은 구원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생명나무는 성 안에 있다. 필자가 본 천국의 실제를 말하자면, 성 안은 지상 800km까지 나선형으로, 나머지 1,600km는 원통형으로 올라가고 그 꼭대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보좌 밑에서 시작된 생명수가 영광의 광장 밑을 지나 원통형 밖으로 흘러내려 동쪽 유다 지파 앞까지 생명수 강을 이루고,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 그러므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도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여 깨끗하게 한 자만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간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도록 구원을 받았지만 다시 더럽혀지면 성 밖으로 쫓겨난다. 두루마기는 겉옷이다. 겉에서부터 더러워지니 그 더러워진 겉옷을 날마다 빨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면서도 안전하지 않다. 주 예수를 믿고 끝까지 회개하면 안전하지만, 믿다가 안 믿겠다고 하거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인내를 말한다. 핍박을 받아도,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도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구원이 내 것이 된다.
3. 회심의 회개와 자백의 회개는 왜 구원 보존에 필요한가?
필자는 그동안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믿는 것도 내가 믿는 것이고 회개도 내가 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잘못된 가르침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필자는 인간의 측면을 많이 강조했다. ‘회개가 천국 복음’이라고 한 것도 인간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겹치지 않기도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하셨다(마 12:28). 하나님의 통치가 내 육체에 나타나 귀신을 쫓아내고 있으면 이미 내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나 천국은 마지막에 장소를 이동하여 들어가는 곳이다. 죽을 때 검은 옷 입은 저승사자 같은 자가 와서 데려가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교양생활을 하다 간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기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 믿을 때 하는 회개는 구원받기 위한 회개, 구원의 시작으로서의 회개다. 이 회개를 통해 속죄를 받는다. 필자는 이것을 회심(回心, conversion)으로서의 회개라고 정의한다. 속죄를 위한 회심의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하는 회개는 삶을 회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결함과 거룩함을 위한 회개다. 필자는 이것을 자백(自白, confession)함으로서의 회개라고 정의한다. 자백함으로서의 회개는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구원을 잃어버리거나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할 수 있다. 한 번 구원받아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은 바람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회개하라고 하면 “너 행위 구원론자지? 오직 믿음이면 천국 가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구원 방식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4. 요엘의 ‘누구든지’는 혈통 중심의 구원관을 어떻게 깨뜨렸나?
첫 번째 구원 방식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행 16:31; 롬 10:9-10). 이 ‘주’를 히브리어로 따지면 여호와다. 구약의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신약에 아들로 오신 주 예수님을 구원자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 믿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은 성경에 한 번도 없다. 우리는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으면 천국에 가니, 믿었으면 천국에 간다”는 삼단논법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제 요엘서를 보자. 요엘서는 구약 시대인데도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구원을 말했다. 당시 남유다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는 자기들만, 할례받은 아브라함 언약의 혈통적 후손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요엘 선지자가 그것을 깨부순 것이다. 물론 요엘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들어 그렇게 말하게 하셨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할례받은 언약 자손만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다. 충격적이다. 앞서 본 호세아서도 혼혈로 타락한 북쪽 사마리아까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겠다고 했고, 신약의 사도들은 이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요엘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히브리인과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구별해야 한다. 히브리라는 말은 창세기부터 나오는데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인으로 처음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왔기 때문이다(창 14:13).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혈통적 후손을 히브리인이라고 한다.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뜻이다(빌 3: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2장에서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곱에게 이긴 자라는 뜻으로 바꾸어 주신 이름이다(창 32:28). 아브라함과 이삭 때는 한 사람만 상속자가 되었지만,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아 열두 명을 다 상속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긴 자요 풍성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란 야곱의 후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누구인가? 열두 지파는 가나안을 차지한 뒤 사사 시대를 살았으나 지파 사이의 연합이 약해 늘 주변국에 당했고, 그래서 왕을 구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는데 백성이 하도 구하니 응답하신 것이다. 우리도 떼를 쓰고 울며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사울이 타락하자 왕권은 하나님이 원래 세우려 하신 다윗에게 넘어갔다. 전쟁에 능한 다윗은 아름다운 왕국을 세웠지만 피를 많이 흘려 성전을 짓지 못했고(대상 22:8), 평화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문과형 왕인 솔로몬은 불안하여 주변 나라의 공주들을 정략결혼으로 데려왔고 후궁과 첩이 천 명이었다(왕상 11:3). 그들이 가져온 우상으로 나라가 타락했다.
필자가 본 천국에서는 다윗과 솔로몬 두 사람만 왕복을 입고 다닌다. 다윗은 빛나는 멋진 왕복을 입었지만 솔로몬은 초라한 왕복을 입고 다윗을 따라다닌다. 솔로몬의 영광이 들의 백합화 하나만 못하다는 말씀(마 6:29)이 생각날 만큼 불쌍했다. 아버지 다윗 덕분에 겨우 회개하여 전도서 끝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고 남기고(전 12:13) 간신히 턱걸이로 천국에 갔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세금을 줄여 달라는 여로보암과 백성의 요청을 젊은 신하들의 말을 따라 거절했다(왕상 12장). 그러자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을 세웠고, 남쪽에는 유다와 베냐민만 남아 남유다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다. 르호보암 때부터 유대인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신약에는 주로 유대인이라고 나온다.
북이스라엘은 혼혈로 사라졌지만 남유다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고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받은 족속이니 우리만 구원받는다”는 자부심이 아주 강했다. 그러나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했다(롬 2:28-29). 요한계시록은 인 맞은 자들을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부른다(계 7:4). 북쪽 열 지파가 사라졌어도 주님은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가라고 하셨다(마 10:5-6). 그러나 남유다는 종교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였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다(마 27:25). 그래서 하나님은 혈통적 조건을 더는 우선순위에 두지 않기로 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다(마 28:19). 이 유대인 우선주의가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이며, 필자는 이것을 철폐하겠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 요엘서 2장 32절의 ‘누구든지’는 이방인을 포함한다.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구원을 주시겠다는 파격적인 예언을 요엘이 한 것이다.
요엘서가 말한 구원의 첫째 조건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의 예수님을 믿는 것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믿고 부르는 것이 첫 번째 구원 방식이다.
5. 할례·율법이나 방언을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어디까지 옳은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구원 방식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도 이렇게 말했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의 혈통적 특혜를 가진 그들은, 예수 믿는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구원받는다고 했다. 맞는가, 틀린가? 사도들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갈 2:16). 그러므로 우리 이방인은 믿기만 하면 된다. 예루살렘 회의도 그렇게 결정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했다(행 15:11).
그렇다면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율법은 그림자이며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 곧 초등교사다(갈 3:2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롬 3:20).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이지 도덕법(道德法, moral law)이 아니었다. 의식법이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어진 제사법, 음식법, 절기법, 정결법과 할례, 안식일 같은 것이다. 할례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해야 한다. 의식법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는 모형이므로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덕법까지 폐지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손이다 보니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에 너무 꽂혀서 율법은 다 폐기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이고, 그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그러므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 곧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타당성이 있다.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와 음식법 같은 의식법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성되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오셨다.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고전 5:7). 그러므로 지금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어떤 단체는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며 교주를 재림 예수라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으면 어머니도 있어야 한다며 한 여인을 어머니 하나님이라 한다. 그 여인이 태어나기 전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없었고 그 여인이 죽으면 구원받을 사람도 없다는 말인가? 큰일 날 소리다. 또 어떤 교단은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로 한번 넘어가면 나오기 어렵다. 안식일은 절기법에도 나오고 도덕법에도 나온다. 의식법인 절기법으로서는 폐지되었고, 도덕법으로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킨다고 이단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를 죄인으로 깨우쳐 회개하게 하지만, 의식법까지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지나친 것이다.
또 어떤 교단은 믿고 성령 세례(聖靈洗禮, 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받아야 구원받으며, 그 표적이 방언(方言, tongues)이므로 방언을 못 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한다. 그 교단에서는 전도하면 한 달, 늦어도 세 달 안에 반드시 방언이 터지게 해야 하고, 못 하면 구역장 자격이 없다. 그래서 날마다 모여 얼마나 기도하는지 모른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실 때 은사를 가져오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필자는 그것도 잘하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못 해서 문제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장로교 구역장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묻는다(고전 12:29-30). 방언을 못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 구원받은 표적인 것은 맞지만, 방언을 못 한다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은 지나치다.
6. 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떻게 예정론과 제한 속죄로 지나쳤는가?
세 번째 구원 방식은 은혜(恩惠, grace)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은혜란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엡 2:5). 사도행전 15장 11절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은혜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이야기다. 믿고 회개하고 부르는 것, 할례를 행하는 것은 다 인간의 측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애굽에서 불러내셨듯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불러내셨다. 요엘서 2장 32절도 누구든지 부르면 구원받는다는 말뿐 아니라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으리라고 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은혜로 구원받을 자가 있음을 말한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원문의 뜻을 살리면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 편에서 할 일이고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이다.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정확하다. 한쪽을 뭉개 버리면 위험하다. 사실 필자의 ‘회개가 천국 복음’도 한쪽만 말하면 위험할 수 있다.
반대로 은혜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어디까지 갔는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이 사람은 구원하기로, 저 사람은 멸망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데까지 갔다.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이다. 이것이 칼빈의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이다. 우리 장로교의 아버지 격인 분이다.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잘못된 사상을 가졌다고 아들도 꼭 그것을 따라야 하는가? 따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있어서 내가 존재하니 존중은 해야 한다. 존중은 하되 잘못된 사상은 따르지 않는다. 필자는 순수한 복음으로 간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만 불러내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님은 구원받을 자만 불러내시겠는가, 누구든지 다 부르시겠는가? 성경은 ‘누구든지’라고 한다. 요한복음 6장 37-39절과 10장 28-29절을 근거로 아버지께서 구원받을 자만 예수님께 보내신다고 하지만, 그 구절들은 만세 전 예정론을 맞다고 하기 위해 번역을 왜곡해 놓았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하겠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구원받을 자만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다(딛 2:11). 그런데 칼빈주의는 예수님이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이것을 제한 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라고 한다. 예수님이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겠는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겠는가? 하나님은 쩨쩨하지 않으시다.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했다(고후 5:14-15).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는데 우리가 끝까지 믿지 않는 것이 문제다. 물론 제한 속죄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자만 그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필자 같은 사람은 지옥에 열두 번도 더 가야 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시며,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누구에게든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7:37-39). 그러니 감사하다.
필자는 칼빈주의를 아버지의 가르침처럼 따라왔지만, 지금 보니 그 5대 교리는 거의 틀렸다.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만세 전에 정해 놓으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었다. 우리를 사랑하여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 “너는 구원하고, 너는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안 된다. 너는 눈이 삐뚤어져서 안 되고, 너는 집안 때문에 안 된다” 하시겠는가? 무조건적 선택도 아니고 제한 속죄도 아니다. 아버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호적을 파 버리겠다고 할지도 모르고, 언제 교단에서 탈퇴당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신학교를 세워 교단을 하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한쪽만 보아서는 안 된다. 다른 쪽 말씀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신약을 전공한 필자는 헬라어 원문에 가장 근접한 신약성경 번역을 내년에 내려고 한다.
7.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그렇다면 부르심과 응답은 어떻게 함께하는가? 예수님은 비유 하나로 다 정리하신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다.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임금은 하나님 아버지시고 아들은 예수님이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들을 잔치에 오라고 했다. 종들은 모세와 다윗과 예레미야 같은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청한 사람들’은 원문으로 ‘부르심을 받은 채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이 불러내신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기를 싫어했다. 임금은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다시 종들을 보냈다.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사업하러 갔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 스가랴를 죽였고,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였으며, 나중에는 예수님까지 죽였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디도 장군을 보내 예루살렘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리고 종들에게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으니 네거리에 가서 만나는 대로 청하라고 했다.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고,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했다(마 22:2-10).
이 비유의 핵심은 불러야 잔치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의 책임이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응답하지 않고 예수가 아니라 주먹과 돈을 믿는다. 여러분은 굳은 마음을 뚫고 자유의지로 믿겠다고, 회개하겠다고 결단하고 따라왔으니 복된 자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다. 불러야 우리가 반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먼저 우선권을 주셨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자, 소외된 자, 귀신 들린 자, 창녀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유대인 가운데서 그들을 먼저 구원하시고, 그다음에 네거리에서 만나는 아무나, 곧 이방인을 부르셨다. 그런데 그 잔치에는 반드시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했다(마 22:11-13). 그 예복은 의의 예복,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 중에 은혜가 먼저 시작이며, 우리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정의하면 아주 좋다.
우리나라의 경우, 하멜이나 토마스 선교사 같은 앞선 사례도 있지만 하나님은 1885년 서양 선교사를 제물포항에 보내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구원으로 부르셨다. 우리나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화된 나라가 되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에서 나오라고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신 분을 믿고 따라갔다(창 12:1). 우리 민족은 그 전에는 부르심을 받지 못했으니 하나님을 모르고 무당과 부처를 섬기고 오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내며 살았다.
그러면 “목사님, 세종대왕은 천국에 갔습니까?” 하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부르셨는데도 안 믿었다면 지옥에 가겠지만, 한 번도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탄원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 이것은 필자가 영적 실제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몰라도 된다. 지금 들을 수 있는데 듣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사실 지금 믿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다.
8. 요엘서가 보여 주는 바른 구원론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요엘서대로 믿으면 된다. 요엘서 2장 32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을 자가 있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불러내셔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누구든지’의 은혜를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셨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다(욜 2:12-13). 그렇게 돌아오는 시온의 자녀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하신다(욜 2:23-24). 그런 자들에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고, 여호와께서 불러내신 자가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리고 마태복음 22장처럼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보내 불러내셔야 구원을 받는다. 주권적인 은혜로 그 민족을 사랑하셔서 불러내셔야 한다.
그러나 예정론은 너무 지나쳤다. 없는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넘어 성경 번역까지 뜯어고쳤다. 만세 전에 하나님 마음대로 주권적으로 다 정하신다면 이 말씀은 성경에서 찢어내야 한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은 누가 여는가? 하나님이 강제로 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려고, 부르시려고 문을 두드리신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때 반응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로 그 사람 안의 귀신을 꽉 눌러 불신앙과 의심을 주지 못하게 하면 “아멘” 하고 믿게 된다. 그런데 한 번도 기도하지 않으니 귀신의 역사로 “너나 잘 믿어라, 나는 내 길 간다” 하다가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인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기 때문이고,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도 우리가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므로 필자는 인간이 해야 할 일, 곧 믿고 회개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회개가 천국 복음이다. 오늘 내가 믿지 못하는 구석이 있다면 악한 영이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이고, 말씀을 듣지 않아 믿음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꾸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한 번 구원받은 것이 영원하다며 앉아 있다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66권 성경의 원문에 나와 있는 대로 정확히 알아야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 부르심에 인간의 응답이 필요하다. 내가 죄인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심으로서의 회개이고, 주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 믿음이다. 셋째, 그 구원이 영원토록 우리의 것이 되려면 최소한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거듭난 뒤에도 우리 속의 귀신은 한 명도 나가지 않았으므로, 날마다 자백하는 회개로 내보내지 않으면 귀신이 우리를 죄로 유혹한다. 그런데도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를 따라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성 밖으로 간다.
9. 나오며
오늘 여러분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일차적 구원을 이룬 것이다. 이제부터는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점차 내보내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의심의 영이 오지 않는다. 필자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 교회 한 성도는 별다른 은사가 없었는데 “주님, 손에 불을 주세요” 하고 아침에 일어나 30분씩 손을 비볐더니 불신앙의 영이 없어져 버렸다. 손에 불이 붙은 것은 귀신을 쫓는 데 쓰라는 것이다.
특히 회개하면 예수의 피가 들어와 악한 영을 떼어 내고 떠나보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다. 우리는 무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고 악한 영들의 방해로 그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회개로 악한 영을 내보내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아가 온전히 구원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26년 10월 10일(토) ·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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