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빌립보서 강해(13)] 생명책에 기록된 두 여인들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바람(빌4:2~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p7bSJJ3031c
1. 들어가며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로 투옥된 상황(A.D. 62-63년경 추정)에서 기록한 옥중서신 중 하나이다. 이 편지에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감사가 담겨 있지만, 동시에 교회 내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간절한 권면과 경고 또한 포함되어 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4장 2-3절은 이 편지를 쓴 핵심 이유 중 하나를 보여준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그들의 불화를 중재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바울은 이 두 여인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동역자였으며,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분명히 증언한다(빌 4:3).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천국이 보장된 성도라는데 바울은 왜 그토록 그들에게 간절히 화해를 권면하고 있는가? 심지어 바울은 ‘멍에를 같이 한 자’(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에게 그들을 “도우라”(붙잡아 주라)고까지 부탁한다(빌 4:3). 붙들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라는 교리에 익숙한 많은 성도에게 큰 혼란을 준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정말 위험할 수 있는가? 필자는 빌립보서가 바울의 후기 서신으로 넘어가면서, 구원 탈락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과도기적’인 책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초기 서신(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에서 강조된 구원의 확신을 넘어, 후기 서신(히브리서, 디모데전후서 등)에서 나타나는 엄중한 경고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완성해 가라)”는 말씀은 바로 그 핵심적인 말씀이다.
따라서 이번 시간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사례를 통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 할지라도 왜 구원의 완성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달려가야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그들이 다퉜던 근본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바울의 처방은 대체 무엇인지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첫 번째 질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 할지라도, 그 구원을 끝까지 보존하지 못하고 믿음에서 파선하거나 죄 가운데 거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성도의 견인’에 근거하여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되면 호적에서 파지 않는다’는 식의 세상 논리를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보지 못한 위험한 주장이다.
첫째, 예수님의 경고를 보자.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계 3:5)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반대로, 이기지 못하고 지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 자는 결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다(계 21:27).
둘째, 바울 사도의 경고를 보자. 바울 역시 자신의 신학이 성숙해진 후기 서신들에서 이 위험성을 분명히 밝혔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 것은,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Not yet) 탈락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는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서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말하며, 구원의 완성이 미래적인 사건임을 고백했다. 만약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면, 왜 그토록 눈물로 권면하며(행 20:31), 왜 자신이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쳐 복종시켰겠는가?(고전 9:27)
셋째, 히브리서의 경고를 보자. 바울의 저작(필자의 관점)인 히브리서는 구원 탈락의 가능성을 다섯 차례나(히 2:1-3; 3:7-4:13; 5:11-6:12; 10:26-31; 12:14-29) 강력하게 경고한다. 특히 히브리서 6장 4-6절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된’ 자라도 타락할 수 있음을 명시한다.
넷째, 구원파의 오류를 보자.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는 자칫 도덕 폐기론으로 흐를 수 있다. 이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영지주의(Gnosticism) 사상과 맞닿아 있으며, 오늘날 구원파의 핵심 교리이기도 하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19절에서 이들을 “십자가의 원수”라 칭하며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으신다(벧후 3:9). 하지만 우리가 자유의지로 주님을 버리고(데마처럼, 딤후 4:10)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결코 안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썼다 지웠다’ 하는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그런데 당시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은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다툼과 분열이라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음을 보았고, 이대로 가다가는 그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영적 위험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동역자에게 그들을 ‘붙잡아 달라’(돕고)고 간절히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3.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들의 다툼은 왜 그토록 심각한 문제였는가?
바울이 두 여인의 이름을 서신에 직접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화해를 간청(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ῶ)한 것은, 그들의 다툼이 단순히 개인적인 불화를 넘어 교회 전체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심각한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결코 평범한 성도들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들을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빌 4:3)이라고 증언한다. 헬라어 원문(συνήθλησάν μοι, 쉬네틀레산 모이)은 ‘나와 함께 고군분투했다’, ‘함께 싸웠다’는 뜻으로, 그들이 바울과 함께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했던 헌신적인 동역자요 전우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글레멘드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과 동등한 반열에서 언급될 만큼 교회 내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그토록 헌신적이었고 생명책에 이름까지 기록된 지도자급 여인들이, 지금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빌 4:2)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빌립보 교회 전체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위기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툰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빌립보서의 전체적인 문맥(빌 1:15의 ‘투기와 분쟁’, 2:3의 ‘다툼이나 허영’)을 볼 때, 이는 시기심, 질투, 주도권 다툼, 높아지려는 마음 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다툼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등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인정받지 못하면 시험에 들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시기하며 다툰다. 그 결과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빌 3:18)이며, 그 끝은 “멸망”(빌 3:19)일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이고 낮추는 것인데, 이들은 오히려 자기를 높이고 성질을 부리며 자아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은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구원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영적 문제였던 것이다.
4. 왜 그들은 헌신적인 동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툼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영적 배경)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이들이 왜 그토록 유치해 보이는 시기와 다툼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을까? 이는 그들의 영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빌립보 교회에서 파송받았던 에바브로디도의 경우, 그의 이름(‘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는 자’)이 그가 누구였을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듯이, 그의 가문은 이방 신(아프로디테/비너스)을 숭배하는 제사(우상숭배)의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영향으로 육체적인 질병(죽을 병)에 걸렸다. 이는 제사(음식)를 통해 들어온 악한 영들이 주로 육체를 공격하는 영적 원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어떠한가? 그들의 이름 역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유오디아 (Εὐοδία) 라는 이름은 ‘좋은(Eu) 여행(Hodia)’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순두게 (Συντύχη)는 ‘함께(Syn) 행운(Tyche)’이라는 뜻으로, ‘행운’, ‘우연한 성공’을 의미한다. ‘좋은 여행’이나 ‘행운’을 바라는 것은 점을 치고 미래를 알고자 하는 무속 신앙(Shamanism)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바울이 빌립보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 맞닥뜨린 강력한 영적 세력은 “점치는 귀신(πνεῦμα Πύθωνα, 뱀의 영)” 들린 여종이었다(행 16:16). 이는 빌립보 지역이 무당과 점쟁이의 영향력(무속 신앙)이 매우 강한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무당(점쟁이) 계열의 영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지는 하기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기, 질투, 싸움, 다툼, 분열, 혈기, 분노, 교만, 미움, 살인(미움의 극치)과 같은 파괴적인 성품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로 여자들 사이에 나타난다. 이는 제사(유교) 배경의 영들이 주로 불신앙과 의심을 일으키며 남자에게 나타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로 이 무당(점쟁이)의 영에 깊이 영향을 받은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 이 영들의 영향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뜨거운 열정을 보였지만(‘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자신들 속에 깊이 뿌리박힌 시기, 질투, 다툼의 영들은 회개를 통해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이라는 강력한 영적 지도자가 함께 있을 때는 그 영향력에 눌려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바울이 떠나고 감옥에 갇히자, 그들 안에 잠재해 있던 악한 영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서로 싸우고 다투며 교회를 분열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국은 수천 년간 무속 신앙과 샤머니즘에 젖어 있던 나라이다. 예수님을 믿고 뜨거운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 유독 시기, 질투, 다툼, 분열, 혈기, 분노가 끊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회개하지 않은 무당의 영들이 여전히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길은 무엇인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는 단순히 성격 차이나 의견 대립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을 붙잡고 ‘나는 죽었다’고 선포하며 자신의 성품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러나 필자가 10년간 그렇게 살아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면의 악한 영들이 떠나가지 않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혈기와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악한 영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가리고 합법적으로 머물기 위해 ‘지식적인 믿음’(영지주의)이나 ‘형식적인 회개’(율법주의) 뒤에 숨는다. 많은 성도가 회개 기도문을 단순히 입술로만(립싱크) 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귀신을 속이는 행위일 뿐, 영이 떠나가지 않는다.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원했던 것은 ‘진실한 회개’였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공동 멍에자여, 너는 그녀들과 함께 붙잡고 있어라”(빌 4:3)고 부탁한 것이다. 그들이 영적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그들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의 실체를 깨닫게 하며, 진실로 회개하도록 도우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도움’은 회개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30년을 믿었어도 자신의 영적 실상을 모르고 성품이 변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회개 기도문과 같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죄와 조상의 죄를 구체적으로 깨닫고 자백하게 함으로써, 실제로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성품이 변화되도록 돕는 것이다(요일 1:9). 회개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수단이 아니다. 회개는 내 안의 악한 영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마음(겸손, 사랑)을 채우는 영적 전쟁이다. 그러므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는 이 진실한 회개가 없었기에, 헌신적인 사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툼의 죄에 빠져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6. 나오며: 진실한 회개로 생명책의 이름을 지키라
빌립보서 4장 2-3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엄중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첫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값싼 복음에 안주하지 말고,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빌 2:12). 둘째, 헌신적인 사역과 성품의 변화는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처럼 복음을 위해 고군분투했더라도, 내면의 죄와 악한 영들(시기, 질투, 다툼)을 회개로 처리하지 않으면, 언제든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다(빌 3:18-19). 셋째, 우리 안의 악한 영들은 우리의 영적 배경(조상 죄)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빌립보의 점치는 영(무속 신앙)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으로 나타났듯이, 우리의 죄와 성품 문제 역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악한 영들의 영향일 수 있다. 넷째, 이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진실한 회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입술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내 안의 악한 영들이 실제로 떠나갈 때까지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만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생명책의 이름을 견고하게 지키며, 구원을 완성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같은 이방인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의 영들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회개의 기회를 붙잡자. 주님이 능력이 없거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진실하게 회개하라. 내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을 몰아내고, 성품이 변화되어, 생명책의 이름이 더욱 두껍게 쓰여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5년 11월 07일(금)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 발췌문은 빌립보서 4장 2-3절에 기록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의 불화를 중심으로 구원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설교자는 두 여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들에게 화해를 간청하는 이유가, 구원이 한 번 얻은 것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빌립보서 2장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구원은 끝까지 성취해 나가야 할 과정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과 시기 질투를 그들의 이름에 내포된 '점치는' 배경과 연관 지어, 회개를 통한 악한 영의 축출과 성품의 변화가 구원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임을 역설하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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