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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19. (월)2026년 교회표어 「시대적인 사명완성을 위해 성전을 짓는 해」 (역대상 28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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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왕상 4:20~34)

정보배 목사2026-06-16조회 1,365읽는 시간 약 39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약 성경의 솔로몬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조명하며 그 영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다윗의 아들이자 상속자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넘어, 솔로몬이 보여준 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 건축가로서의 세 가지 핵심 면모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품을 미리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정보배 목사는 솔로몬이 저술한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각각 하나님 경외의 지혜, 세상 지식의 허무함,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며,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완전한 지혜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솔로몬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참된 신부로 준비될 것을 권면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강의 자료

그림 15

1. 들어가며

솔로몬은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자로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예표자이다. 다윗이 전쟁으로 주변의 모든 대적을 평정함으로써 아들 솔로몬에게 평화의 기반을 넘겨주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권과 통치권을 위임하셨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데 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다윗 강해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자료를 나란히 공부했다. 하나는 사무엘상하와 역대상처럼 제3자의 관점에서 다윗을 기록한 역사서요, 다른 하나는 다윗이 직접 남긴 시편이었다. 제3자의 기록과 당사자의 직접 기록은 관점이 다르다. 역사서는 다윗의 행적을 서술하고, 시편은 다윗의 내면과 영성과 기도를 보여 준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볼 때 비로소 다윗이라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에 관한 제3자의 기록은 열왕기상 1장부터 11장, 그리고 역대하 1장부터 9장에 나온다. 그러나 솔로몬이 직접 쓴 성경책이 세 권 플러스 알파나 된다. 잠언 31장, 전도서 12장, 아가서 8장, 그리고 시편에도 72편과 127편 두 편이 있다. 이 직접 기록들이 솔로몬을 통해 예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풍성하게 드러내는지, 이 시간에는 그 핵심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기독론 강해는 구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읽는 작업이다. 구약의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자였고, 그 가운데 솔로몬은 특별히 풍성한 예표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솔로몬 강해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솔로몬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지혜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성전을 지은 왕인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지혜 자체이시고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솔로몬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지혜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성전을 지은 왕인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지혜 자체이시고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2. 솔로몬이 다윗의 열 번째 아들임에도 메시아의 예표로 선택된 근거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다윗의 몇 번째 아들인가? 성경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추정하면,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쯤 되는 것으로 본다. 다윗에게는 총 19명 내외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역대상의 기록과 사무엘하를 통해 확인된다(대상 3:1-4, 삼하 3:2-5). 그런데 그 가운데 솔로몬은 결코 장자가 아니었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다. 밧세바는 다윗의 여러 아내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녀에게서 아들이 네 명 태어났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의 징계로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하나님은 슬픔에 잠긴 다윗과 밧세바를 위로하시고 새 아들을 주셨다. 그가 바로 '솔로몬'이요 딴 이름으로 '여디디야'이다.

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시몬(시므온)에게 게바(이는 아람어인데, 헬라어로는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다. 원래 이름과 함께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솔로몬이 왜 다른 형들을 제치고 메시아의 예표가 되었는가?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이 그 답을 준다.

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 여기서 씨(히, 제라)는 단수다.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단 하나의 씨가 선택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직접 그 씨를 지목하셨고, 그것이 솔로몬이었다. 맏아들 암논은 이복 누이를 욕보인 죄로 인해 스스로 그 자리를 잃었다. 셋째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넷째 아도니야는 다윗이 노쇠하자 요압과 아비아달과 손을 잡고 독단적으로 왕을 자처했다. 그러자 선지자 나단과 밧세바의 중재로 다윗은 마지막 힘을 내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다윗의 씨로 오실 메시아는 오직 한 분이었다. 수많은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언약의 최종 성취자이시다. 솔로몬이 다윗의 보좌에 오른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나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것은 솔로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다윗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밧세바가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가운데 솔로몬이 마지막이었다. 죄로 인해 죽은 첫 번째 아이의 자리를 하나님이 솔로몬으로 채워 주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사람의 실수나 죄를 뛰어넘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윗과 밧세바의 죄에서 나온 관계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메시아의 예표자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패를 초월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대나 서열을 뛰어넘는다. 맏아들도, 능력 있는 자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고 선택하신 자가 그 보좌를 이어받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다. 이삭이 이스마엘 대신, 야곱이 에서 대신, 다윗이 맏형들 대신 선택되었듯이, 솔로몬이 형들 대신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나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것은 솔로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다윗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대나 서열을 뛰어넘는다. 맏아들도, 능력 있는 자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고 선택하신 자가 그 보좌를 이어받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다. 이삭이 이스마엘 대신, 야곱이 에서 대신, 다윗이 맏형들 대신 선택되었듯이, 솔로몬이 형들 대신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3.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솔로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여디디야(יְדִידְיָה)"는 히브리어로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이 이름을 주셨다고 사무엘하 12장 25절은 명시한다. 이 이름은 단순한 별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솔로몬 사이의 특별한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해 주는 이름이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거나 두 개의 이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 시몬이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은 것, 이 모든 개명(改名)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사명을 담고 있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받은 것도 그러하다.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이 이름은 솔로몬이 단순히 왕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임을 선포한다.

이제 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 궁극적인 예표인지를 생각해 보면, 답은 자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아들" 이것이 바로 여디디야의 신약적 선언이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불렸을 때,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오실 것을 예표하는 이름이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그 아들이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실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변화산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라는 이것이 여디디야가 담고 있는 권위의 선언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서 이스라엘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완전하고 영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어떤 학자나 교사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변화산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이것이 여디디야가 담고 있는 권위의 선언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서 이스라엘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완전하고 영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어떤 학자나 교사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의 말은 얼마든지 실수가 있고 불완전하다. 사도 바울도 틀릴 수 있고, 세상의 어떤 학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말씀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예수님 말씀의 권위는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와 문화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불릴 때 그 이름 안에 담긴 신뢰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의 기준을 예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말씀—그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기준이요 권위다.

4. 솔로몬이 쓴 성경 세 권과 두 편의 시편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가?

솔로몬 강해를 제대로 하려면 열왕기상(1-11장)과 역대하(1-9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직접 남긴 기록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직접 기록들이 솔로몬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드러낸다.

솔로몬이 직접 쓴 성경은 세 권이다. 잠언(31장), 전도서(12장), 아가서(8장)다. 여기에 시편 72편과 127편이 플러스 알파로 더해진다. 이 다섯 가지 기록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솔로몬 강해의 열쇠다.

잠언 1장 1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라고 시작한다. 전도서 1장 1절도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라고 서두를 연다.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두 책 모두 "다윗의 아들"로 시작한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임을 자신의 저술 서두에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저자 서명이 아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로 온다는 언약(삼하 7:12-14)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시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크게 보면 이렇다. 잠언의 주제는 시편 72편과 연결된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공의로운 심판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 잠언이 말하는 지혜다. 전도서의 주제는 시편 127편과 연결된다. 세상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선언이 전도서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 시편 127편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세 번째 대명사, 곧 '성전을 지은 왕'과 연결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교회를 상징하듯,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으로 예표한다.

이 구조를 한눈에 정리하면 이렇다. 잠언(시편 72편)은 지혜의 왕으로서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전도서(시편 127편)는 세상의 헛됨을 선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고, 아가서는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사랑을 노래한다. 솔로몬이 남긴 다섯 가지 직접 기록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단순히 열왕기상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제3자의 기록은 솔로몬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 그가 경험한 하나님, 그가 노래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직접 기록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의 저술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다음 강해들을 통해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하나하나 더 깊이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진리의 보고(寶庫)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단순히 열왕기상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제3자의 기록은 솔로몬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 그가 경험한 하나님, 그가 노래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직접 기록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의 저술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다음 강해들을 통해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하나하나 더 깊이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진리의 보고(寶庫)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

5. 잠언이 말하는 참된 지혜의 근본은 무엇이며, 왜 세상 학문과 다른가?

잠언(총 31장)은 솔로몬의 저술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31장에 걸쳐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런데 잠언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신학적 지혜를 다루고, 10장부터 29장까지는 생활 속의 지혜를 다룬다. 그리고 30장은 아굴의 잠언, 31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훈계한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잠언의 구조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1장부터 9장은 '신학적 지혜'를 다룬다. 지혜가 무엇인지, 왜 지혜를 구해야 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가르쳐 준다. 특히 이 부분에서 지혜가 인격화되어 등장하는 8장이 핵심이다. 반면 10장부터 29장은 '생활상의 지혜'를 담고 있다. 부지런함과 게으름, 말의 절제, 부모와 자녀 관계, 정직과 거짓, 교만과 겸손 등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지혜를 격언 형식으로 가르친다. 이 부분은 애굽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 형식을 많이 따른다. 솔로몬이 당대 모든 나라의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이다.

잠언 1장부터 9장의 신학적 지혜는 핵심 주제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이 잠언 1장 7절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것은 잠언 전체의 주제 선언이다. 이 주제는 잠언 9장 10절에서 다시 한 번 더 강조된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두 본문이 나란히 선언하는 것은 동일하다. 지혜의 근본, 지식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지식과 지혜가 있다. 철학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다. 이 모든 지식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들은 참된 지혜의 근본이 아니다. 지혜의 근본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

특히 잠언 10장 이후에 나오는 생활 상의 지혜들로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게 하느니라"(잠 15:1)와 같은 격언들로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의 지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을 비롯한 당대 모든 나라의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 지혜들조차도 1장 7절의 대원칙 아래에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지혜를 삶에 적용할 때 참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잠언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있다면 8장이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1인칭으로 등장하여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지혜가 의인화(擬人化)된 것이다. "나는 명철이라 내가 근신과 함께 있고"(잠 8:12), "나는 여호와께서 그 일을 시작하시기 전 그 옛날 태초에 창조를 받았으며"(잠 8:22)—이 지혜의 인격적 서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말씀)가 바로 이 잠언 8장의 지혜의 신약적 계시다.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있었고,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 곁에 있었으며, 사람들을 기뻐하였다는 잠언 8장의 묘사는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의 선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이처럼 잠언은 세상의 생활 지혜를 담으면서도, 그 모든 지혜의 근원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임을 선포하고, 궁극적으로는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이 잠언이 성경에 포함된 이유다.

특히 잠언 8장의 지혜의 인격화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했다. 골로새서 2장 3절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지혜 왕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갖추었지만,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고 선언하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의 그림자였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최후의 날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구하는 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잠언 8장의 지혜의 인격화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했다. 골로새서 2장 3절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지혜 왕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갖추었지만,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고 선언하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의 그림자였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최후의 날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구하는 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6.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다"고 선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전도서(총 12장)는 솔로몬의 저술 가운데 가장 독특하다. 솔로몬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3,000가지 잠언을 말하였고, 1,005편의 노래를 지었으며(왕상 4:32), 식물과 동물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였다. 세상의 어떤 학자도 따라가기 어려운 방대한 지식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쾌락과 풍요도 경험했다. 그는 포도원도 만들고, 동산과 과수원도 만들고, 못도 파고, 남녀 종도 두고, 소와 양도 수없이 많이 가지고, 은금과 나라들의 보배를 쌓기도 하였다. 노래하는 남녀도 두었고 사람의 아들들이 기뻐하는 처첩도 많이 두었다(전 2:4-8).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다 누려 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고백하는 "헛되도다"는 무게가 다르다.

그런데 그 모든 공부와 탐구 끝에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전 1:2-3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세상 최고의 지식인이 모든 세상 학문을 섭렵한 뒤에 내린 최종 결론이다. 더 나아가 전도서 12장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전 12:12 내 아들아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세상의 학문은 끝이 없다. 아무리 공부해도 다음날 또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몸만 피곤하고 마음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한다(전 1:8). 이것이 세상 지식의 한계다.

그렇다면 전도서의 결론은 무엇인가? 솔로몬은 공부를 포기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지식의 탐구 끝에 가장 본질적인 지혜에 도달했다.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것은 전도서의 최종 결론이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다.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심판 앞에 설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지혜다. 이것이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공부한 끝에 얻은 최고의 지혜였다.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출발점을 선언한다면,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됨을 입증한 후에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잠언이 신학적 원리에서 출발하는 귀납이라면, 전도서는 세상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귀납이다. 그러나 두 책이 도달하는 종착점은 하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다.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지혜자의 역설적 고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왕이 결론으로 내놓은 것이 "헛되도다"였다. 이 고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역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최고가 헛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참되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은 참 생명이요 참 진리시다.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는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외침이다.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지혜자의 역설적 고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왕이 결론으로 내놓은 것이 "헛되도다"였다. 이 고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역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최고가 헛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참되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예수 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은 참 생명이요 참 진리시다.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는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외침이다.

7. 시편 72편과 127편은 각각 잠언·전도서의 어떤 주제를 예표하는가?

솔로몬이 시편에 남긴 두 편의 시, 72편과 127편은 각각 잠언과 전도서의 핵심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두 시편은 솔로몬의 저술 세계를 관통하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시편 72편을 살펴보면, 이 시는 왕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시 72:1-2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왕이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한다. 이것은 시편 72편의 핵심이다. 왜 이것이 잠언과 연결되는가? 잠언 1장 7절과 9장 10절이 말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은 결국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전도서 12장 14절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결론 맺듯이, 심판주 앞에 설 것을 알기에 지금 경외하며 산다는 것이 잠언과 전도서가 공유하는 핵심 메시지다. 그래서 시편 72편은 바로 그 심판주 곧 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위임하신 메시아 왕을 노래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시편 72편이 잠언에게 주는 예표적 의미다.

다음으로 시편 127편을 살펴보면, 이 시는 세상의 모든 수고가 하나님 없이는 헛됨을 선포한다.

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이것이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와 정확히 대응한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며 수고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전도서가 세상의 모든 공부와 경험이 헛되다고 결론 맺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시편 127편은 헛됨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이 있다. 이것이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그리고 그 복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시편 127편이 약속하는 참된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시편 72편은 잠언의 주제인 '심판주 앞에서의 지혜'를 예표하고, 시편 127편은 전도서의 주제인 '세상 수고의 헛됨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예표한다. 솔로몬의 두 시편이 그의 두 지혜서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솔로몬의 저술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고(시 72편의 메시지),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시 127편의 메시지). 이 두 메시지가 합쳐질 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완전해진다. 미래의 심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시편 72편의 심판주와 시편 127편의 은혜로운 공급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결국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고(시 72편의 메시지),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시 127편의 메시지). 이 두 메시지가 합쳐질 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완전해진다. 미래의 심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시편 72편의 심판주와 시편 127편의 은혜로운 공급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8.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증언하는가?

솔로몬의 세 번째 책, 아가서(총 8장)는 그 성격이 잠언이나 전도서와 전혀 다르다.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8장에 걸쳐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를 단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읽거나, 혹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기독론의 관점에서 아가서를 읽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지혜의 왕이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요 2:21),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한다(고전 3:16). 성전을 지은 왕 솔로몬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렇다면 솔로몬과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랑하시는 교회의 관계를 예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가서의 여주인공은 "술람미 여인"이다. "술람미(שׁוּלַמִּית)"는 솔로몬의 여성형 이름이다. 솔로몬이 히브리어로 '샬롬'에서 온 이름이듯, 술람미도 같은 어근에서 온 이름이다. 솔로몬(שְׁלֹמֹה)의 여성형이 술람미(שׁוּלַמִּית)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지닌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짝이요 그의 신부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서로 이름을 나누어 가진 한 몸이다. 그리스도가 왕이시면 교회는 왕의 신부다.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 솔로몬이라면, 교회는 술람미 곧 평강 안에 거하는 신부다.

아가서 전체의 구조도 이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아가서에는 크게 세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신부), 그리고 더 넓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관계를 보여 준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고, 술람미가 솔로몬을 찾고, 함께 동산에서 기쁨을 누리는 이야기,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 이야기다.

아가서가 증언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신랑이시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아가서는 가장 풍성한 언어로 노래한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아 2:16).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다. 성전을 지은 왕 솔로몬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듯, 솔로몬의 사랑하는 신부 술람미는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신부 교회를 예표한다.

나아가 솔로몬의 평화의 왕국과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천국의 풍경을 미리 보여 준다. 솔로몬의 치세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열왕기상은 기록한다(왕상 4:25). 솔로몬의 궁전에서는 하루에 가는 밀가루 30고르(약 7,000리터), 굵은 밀가루 60고르, 살진 소 열 마리, 초장의 소 스물 마리, 양 백 마리,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 식탁에 올랐다(왕상 4:22-23). 14,000명이 먹고도 남을 분량이 매일 궁전에 넘쳤다. 이 풍요로운 식탁과 평안한 삶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풍성함을 예표한다. 천국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새 열매가 열리고, 생명수가 흐르며, 마귀가 없으므로 저주도 없고 눈물도 없다. 솔로몬 왕국의 풍요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원히 완성되는 것이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이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한다. 신랑 솔로몬이 신부를 왕궁 연회 자리에 이끌어 들이듯(아 2:4),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로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이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솔로몬의 태평성대와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그 영원한 잔치의 예표다.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아버지 다윗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준비해 놓았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실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 놓으셨다. 창세 전부터 택하신 백성, 십자가의 구속, 성령의 강림.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드린 성전 건축 재료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드려 교회라는 새 성전을 세우셨고,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성전이 되었다(마 16:18).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도다

신약에서 에베소서 5장 25-27절은 이 아가서의 신학을 명확하게 해설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그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 세우셨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남녀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를 가르쳐 주는 기독론의 보고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신다.

신약에서 에베소서 5장 25-27절은 이 아가서의 신학을 명확하게 해설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그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 세우셨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남녀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를 가르쳐 주는 기독론의 보고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신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솔로몬이 직접 남긴 기록들 곧 잠언, 전도서, 아가서, 시편 72편과 127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이 다윗의 열 번째 아들로 추정됨에도 메시아의 예표로 선택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고, 그에게 주어진 이름 여디디야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를 뜻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도 확인하였다. 또한 솔로몬의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시편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잠언은 심판주 앞에서의 참된 지혜를, 전도서는 세상 학문의 한계와 하나님 경외의 결론을,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각각 예표함을 보았다.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 곧 시편 72편과 127편이 각각 잠언과 전도서의 핵심 주제를 압축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시편 72편이 공의로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노래한다면, 시편 127편은 여호와 없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됨을 선포한다. 이 두 주제가 합쳐질 때,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마지막 날 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그분을 경외해야 하고,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솔로몬을 통해 배우는 핵심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을 다 섭렵한 최고의 지식인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헛되고 헛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었다. 이것이 참된 지혜다.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된 지혜다. 앞으로 솔로몬의 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을 지은 왕으로서의 사역을 하나하나 더 깊이 공부해 가면서, 그 모든 예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풍성하게 알아 가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이야기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삶의 양식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잠언이 말하는 여호와 경외, 전도서가 선포하는 세상의 헛됨, 아가서가 노래하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 곧 이 세 주제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끝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삶의 어떤 자리에서든 그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것을 제공해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요,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다. 우리는 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의 것들이 헛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알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이 세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보는 것이 솔로몬 강해의 실천적 열매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탁월한 지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 지혜를 삶으로 실천해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16일(월)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