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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02)]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호2:19~20)

정보배 목사2026-10-01조회 195읽는 시간 약 37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부로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성경적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처녀의 삶, 음녀와 섞이지 않는 순결함, 그리고 마태복음의 열 처녀 비유 속 기름 준비를 실천해야만 진정한 구원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성도들이 안일한 신앙에서 벗어나 철저한 회개와 행함이 있는 믿음을 통해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자격을 갖추도록 영적으로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은 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언제 완성되는가?2초림 이후 그리스도인은 왜 약혼한 신부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3그리스도께 드릴 거룩한 처녀는 어떤 삶으로 준비되는가?4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누구이며 누구를 따르는가?5열 처녀는 누구이며 혼인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은 어디인가?6열 처녀의 등불과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7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신부는 어떻게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가?

강의 자료

그림 3 · 슬라이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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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Bride Blueprint설교 슬라이드 · 30장
설교 본문 기독론(202)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호 2:19-20)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여호와께서는 바알을 따라간 북이스라엘에게 다시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약속하셨다(호 2:19-20). 한 번 품고도 돌아오지 않은 백성을 또 품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first coming)과 재림(再臨, second coming)에 비추어 보면,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영원한 신랑이 오실 때 그분의 신부가 될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혼인잔치가 끝난 것일까? 아니다.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처녀라고 말했고, 사도 요한은 어린양을 따르며 여자들(음녀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등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라고 말씀하셨다(고후 11:2; 계 14:4; 마 25:1-13). 그런데 이 세 장면은 서로 다른 신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혼한 성도가 신랑을 실제로 맞이하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에서 과연 그들이 누구인지, 혼인잔치는 과연 어디에서 열리는지, 등불과 여분의 기름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처녀의 한 사람으로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기름을 주님의 재림시에 다른 사람에게서 빌릴 수 있는가? 혼인잔치가 열리는 문이 한 번 닫힌 뒤에도 다시 열릴 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을 받은 성도가 어떤 처녀로 자신을 지키고 무엇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은 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언제 완성되는가?

성경 66권 가운데,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보여 주는 책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단언코 구약성경 중에서 아가서를 떠올릴 수 있다. 필자는 이 책를 깊이 다루면서 『바른 아가서 강해』(회개와천국복음연구소 발행, 2025년)라는 책을 집필한 한 바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책이 있을까? 그것은 예언서 가운데서 하나인 호세아서가 유난히 강력하다. 예레미야에는 광야에서의 신혼 때의 사랑에 대해서, 이사야에도 남편과 신부라는 용어가 나오지만,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다시 장가들겠다는 말씀을 거듭 선포하고 있다(렘 2:2; 사 54:5; 호 2:19-20). 그렇다면 이 말씀은 과연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그것은 이미 남편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B.C.931~910)이 열 지파를 이끌고 나라를 세운 기원전 931년 무렵부터, 기원전 722년인 제19대 호세아 왕(B.C.732-722)이 멸망할 때까지 약 이백십 년을 존재하던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처음부터 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혼합된 신앙을 가졌고, 제7대 아합 왕 시대(B.C.874-853)에는 바알 숭배에 깊이 빠졌다. 남편이신 여호와의 마음에서 보면 가장 심하게 바람이 난 시대가 이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버리셔도 할 말이 없는데 주님은 버린다는 말보다 다시 품겠다는 약속을 거듭하셨다. 이 약속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우리를 알아야 한다(호 2:8, 13-17).

그 핵심은 여호와께서 5가지 지참금으로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 그리고 진실함으로 북이스라엘 백성과 장가들어 그들과 영원히 살겠다고 하셨다. 장가들겠다는 말씀을 3번씩이나 하신 여호와께서는 마지막에는 ‘네가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호 2:19-20). 죄 많은 백성에게 관계 회복의 값을 여호와께서 먼저 내놓으신 것이다. 사람의 변덕에 매인 약속이 아니라 끝까지 아내를 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이이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북왕국이 무너진 뒤에 그들이 끝내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들었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이 왕과 지도자와 제사 없이 오랫동안 지내겠지만, 언젠가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호 3:4-5). 그랬는데 정말 북이스라엘 멸망 후 사마리아에 남은 사람들이 다시 여호와를 찾은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다(요 4:4-26). 그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자리가 어디인지와 오실 메시아에 대해 물었고,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세아의 예언의 성취가 다윗 왕이 다시 무덤에서 올라와 통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통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남유다 역시 B.C.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한 뒤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회복의 움직임을 가졌지만 그들에게 다윗 왕이 다시 세워진 적은 없었다. 호세아가 말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우두머리를 세울 일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호 1:11). 그러므로 남쪽만 참 백성이고 북쪽은 영원히 버려진 백성이라는 식으로 이 역사를 읽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두 편 모두에게 오셨고 사마리아에서도 신랑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영원히 살되’라는 호세아 선지자의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사람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초림하신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라고 말한다(딤후 4:10; 딤전 1:19-20). 그리고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의 끝과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도 가볍게만 여길 수 없다(마 27:3-5; 행 5:1-11). 히브리서는 은혜를 맛보고도 약속의 안식에 이르지 못할 위험이 있음을 거듭해서 경고하고 있다(히 3:12-19, 6:4-8, 12:16-17). 하나님은 영원한 신랑이 되고자 초림하시어 신랑이 되시려 했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놓아버리고 그분을 떠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인간인 신부와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영원한 혼인의 완성은 재림하시는 날에 이뤄지는 것이다. 그날에 주님을 영원한 신랑으로 맞이하여 어린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들려주는 에서의 사례를 보라. 그는 한 그릇 식물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고, 뒤에 눈물을 흘리며 복을 구해도 돌이킬 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히 12:16-17).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일이 그대로 성취되지 못하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가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지도 계속해서 묻고 답을 찾아야 한다.

3. 초림 이후 그리스도인은 왜 약혼한 신부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신분은 대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리스도의 신부인가 그리스도의 전사인가? 우리는 여러 가지로 성도의 신분에 대해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의 신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칭은 과연 어떤 것인지부터 우리는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현재 상태를 혼인을 기다리는 약혼(約婚, betrothal)의 상태라고 말하고 싶아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중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후 11:2). 여기서 '중매한다'는 단어는 '하르모조'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결합하다. 함쩨 짜 맞추다'라는 뜻에서 '결혼시키다, 약혼시키다'라는 뜻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도는 그리스도와 약혼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결혼식이 끝난 상태라면 왜 사도 바울은 그들을 그분께 드리려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약혼한 상태가 된 것이지 결혼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9:7-9).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그러나 약혼이라도 해서 가벼운 말장난의 수준은 결코 아니다. 필자는 친구가 약혼을 깨뜨리면서 법적 책임을 지는 일을 직접 지켜보았고, 그때 약혼에도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예를 들어, 요셉이 마리아와 아직 함께 살기 전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조용히 끊고자 고민한 일도 약혼 관계가 엄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마 1:18-19). 그러므로 약혼과 혼인의 완성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약속한 상대가 있다고 할지라도 혼인잔치를 치르고 함께해야 결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죄(贖罪, atonement)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생명을 주는 영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서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된다(엡 1:13-14).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다른 사랑을 따라 살게 된다면, 우리가 이미 주님과 맺은 약혼은 깨지고 말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고 있다고 선포한다는 사실이다(계 19:7-9). 여기서 ‘예비하였다’는 말은 예수님의 초림을 믿은 모든 사람이 다시 오실 주님과 결혼식을 준비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믿음으로 그날을 기다리면, 자신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오신 뒤, 지금 이 시간까지는 바로 그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곧 오실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처녀로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처녀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세 종류의 처녀들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말한 정결한 처녀요, 둘째는 사도 요한이 본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이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비유하신 슬기로운 처녀가 바로 그것이다(고후 11:2; 계 14:4; 마 25:2). 그런데 이러한 세 처녀의 공통분모는 신랑을 믿는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어서는 아니 되고, 그날 그분을 맞이할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혼한 사람은 약혼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상대를 따라가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관하여 잘못된 견해를 전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7년 대환난 전에 교회 전체가 공중으로 올라가 칠 년 동안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을 보라.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말한다(계 19:7-9, 21:1-2, 9-10). 그러므로 세대주의자들처럼 누구든지 올라가서 칠 년 동안 공중에서 치러질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믿게 되면, 지금 약혼한 성도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정말 놓치기 쉽다. 특히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는 그날을 준비하는 자의 차이가 얼마나 달지게 될 것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4. 그리스도께 드릴 거룩한 처녀는 어떤 삶으로 준비되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결혼할 처녀들은 어떤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3가지이다.

첫째, 정결한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성도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처녀’라고 약혼시켰다고 말했다(고후 11:2). 개역한글에 나오는 ‘중매함이로다’를 통하여 성도는 이미 혼인까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힘쓰는 일은 교회를 그리스도께 정결한 처녀로 바칠 수 있는 상태로 세우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혼한 신부로서 성도는 결혼할 날까지 자신을 지키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정결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하그노스'이다. 이 단어는 '깨끗한'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 단어는 '거룩한'이라는 뜻이 1차적인 뜻이고, 2차적으로 '순결한, 정결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단지 자신의 겉을 씻어 깨끗해진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뜻을 초월한다. 오히려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처녀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 곧 성결(聖潔, holiness)은 더러움을 씻는 것에 더하여 주님의 소유로 구별되어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약혼 후 처녀는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아래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어야 한다. 구약의 레위기가 가르친 속죄와 정결(淨潔)과 성결의 흐름도 바로 이러한 맥락을 그대로 말해준다.

그렇다면 레위기에서는 '거룩함(성결)'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행동으로 드러난 깨끗함과 구별된 삶이다. 그것은 이방인의 풍속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음행과 금지된 성관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안식일과 절기와 안식년을 공동체와 함께 지키는 일이었다.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의 몸과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바침이었다(레 18-27장). 순종과 바침은 실제 행동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에게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삶의 순종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성령의 깨우침을 거스르고 세상 풍속을 좇으면서 자신을 거룩한 처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할 때 그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것의 결론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더러운 영들의 제거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더러운 영이 사람의 육체 안에서 역사할 때 인간의 절제의 능력만으로 그들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행동을 잠시 억누를 수 있어도 생각 속에서 더러운 영과 성령과 하나 된 나와의 전쟁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悔改, repentance)를 통해서 더러운 영들을 제거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죄를 깨닫고 자백하면서 회개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함으로써,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더러운 영을 내보내고 난 후 온전한 성령의 통치를 받을 때, 성도는 거룩한 삶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흠을 없애 보라는 권면이 아니다. 먼저 주님의 속죄와 생명을 받은 후에, 죄를 회개하며 자신을 구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부정한 것을 품은 채 믿는다고 말만 되풀이해서는 신랑에게 바쳐질 처녀가 될 수 없다. 거룩함은 신랑과의 약속을 삶으로 지키는 일이며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

5. 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누구이며 누구를 따르는가?

둘째,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로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시온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선 채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을 보았다. 그들은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었고,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땅에서 구속받은 자들로서, 그들 외에는 이 노래를 배울 수 없었다(계 14:1-3). 요한이 이어서 그들의 삶을 어떠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갔기 때문이다.

계 14:3-5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이들을 ‘정절이 있는 자’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원문에는 그들은 처녀를 뜻하는 '파르테노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성별에 따라 여자만 혼인잔치에 참여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랑이신 어린양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신부의 순결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여자만 나온다. 하나는 태양을 입은 여자와 그 남은 자손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는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불리는 큰 음녀가 나온다(계 12:1, 17, 17:1-5). 이 중에서도 어린양의 신부가 처녀인데, 이 처녀 외에 세상의 것과 짝하면 산 여자는 음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녀와 함께 자신을 더럽힌다는 뜻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의 길을 같은 주인처럼 좇아가거나, 세상의 쾌락과 인기와 명예를 더 사랑하여 신랑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일을 가리킨다. 겉에서는 경건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것을 따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강단에서는 바른 말을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자가 곧 음녀인 것이다. 누구라도 악한 영을 회개로 내보내지 않고는 그런 유혹을 지속해서 이기기가 어렵다. 자신이 처녀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더럽힘을 거절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녀들과 더불이 더럽히지 않는 처녀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다. 신랑이 가는 곳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길을 번갈아서 좇아가는 사람을 온전한 신부라 할 수 없다. 둘째, 그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도 없는 자이다(계 14:5). 특히 말씀을 맡은 종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하고도 아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필자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얼마나 진실하게 말씀을 전했는지 스스로 돌아보았다. 거짓말 없는 입과 흠 없는 삶은 신랑을 따라가는 것이 처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십사만 사천 명을 두고서, 마지막 시대에 혈통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뽑힐 사역자들로 보는 세대주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사도 요한이 본 이들은 땅에서 유혹을 이기고 구속받아 어린양께 속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였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4:3-4). 필자는 이 표현을 첫째 부활(復活, resurrection)에 참여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본다. 또한 요한계시록 9장에 가면, 인 맞은 자들을 악한 영이 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파송한 사명자들로서 이긴 자가 되어 144,000석의 보좌에 앉아서 주인노릇과 왕노릇을 할 사람들이라고 해석한다(계 7:3-4, 9:4-5).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나온 것처럼 천국에 가서 확인해보니, 144,000명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을 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파송한 특별한 주의 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누구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도 세상의 욕망 때문에 그리로 돌아서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오직 어린양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은 신부라고 주장하면서 음녀의 손도 함께 잡고 가고 있다면, 그는 처녀가 아니다.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오직 어린양께 속하여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6. 열 처녀는 누구이며 혼인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은 어디인가?

셋째, 슬기로운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1절에서 13절의 말씀으로 예수께서 직접 이야기하신 것으러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아니라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그런데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을 보면, 이들은 모두 재림하신 예수님을 신랑으로 기다리는 처녀들이었다. 모두가 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마 25:1-2). 필자도 한때 이 열 명을 신부의 들러리라고 배운 적이 있다. 신부의 집에서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마중 나갔다가 신랑과 함께 돌아온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비유 전체를 보면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가 아니라,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야 할 당사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성도들, 곧 약혼한 신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렇다면 왜 열 명의 처녀를 신부의 들러리로만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그 잔치집에 들어갔지만, 늦게 온 나머지는 ‘주여 주여’라고 외쳤어도 혼인잔치가 열리는 그 집(혹은 성)에 들어가지 못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마 25:10-12).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기에 등장하는 집 혹은 성은 신부들의 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성이 처녀들의 집이었다면, 왜 다시 돌아와서 자기의 집에 못 들어갔겠는가! 그리고 이 처녀들이 신부의 들러리였다면 왜 친구의 집에 못 들어갔겠는가! 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신부들은 전부 다 혼인 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으로 들어가야 할 신부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성이 신부 자신의 집이었다면, 신랑이 그 문을 열어 줄 권한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아니 된다. 고로 이 집은 분명 신랑의 집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방향을 한 번 살펴보자. 이전에 배웠던 설명대로 신부의 친구들이 신부의 집에서 나온 경우라면, 기름을 사러 갈 때에는 자기 집 쪽으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파는 기름을 사 올 수는 없는 상황이다. 또한 이 비유에서 신랑은 들어올 신부들을 결정하는 자이고 처녀들은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고로 필자는 신부들이 신랑의 성을 향하여 왔다가, 신랑의 나옴이 늦어져서 그 성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읽는다. 문이 닫힌 뒤 신랑에게 열어 달라고 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마 25:5-12).

그렇다면, 이날 결혼잔치가 열리는 그 집 혹은 성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을 읽어보면, 이 신랑의 집이 새 예루살렘 성임을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신부처럼 단장한 거룩한 성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계 19:7-9, 21:1-2). 그리고 천사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겠다면서 그 성을 보였다(계 21:9-10). 그 성 안에서 신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어린 양의 신부는 새 예루살렘 성 자체가 아니다. 돌과 성벽을 인격적인 아내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신부는 그 성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 성도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랑의 성문 안으로 누가 들어갈 것인지는 성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끝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인이 어느 날 올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셨다. 곧이어 예비하고 있으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고 하셨다(마 24:42-45). 그 질문에 이어 25장에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는 ‘지혜 있게 준비하는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며, 달란트의 비유는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달란트는 종이 자신의 주인이 맡겨주신 사명을 어떻게 했는지를 밝혀주는 비유이고, 열 처녀는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자가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알려주는 비유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대하는 자세로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잠을 한순간도 자지 말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신랑이 더디 오자 열 처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모두 다 졸면서 잤다고 했다(마 25:5). 여기서 모두가 피곤하여 잠시 잠든 것과, 오랜 기다림 끝에 먼저 죽은 성도의 상태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씀하셨고, 데살로니가전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있다고 말했다(요 11:11-14; 살전 4:13-16). 슬기로운 처녀도 같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비유의 차이는 몸을 움직여 밤새 버텼느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늦게 온다할지라도 어느때든지 불을 밝힐 준비를 갖추고 있었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때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렸다(마 25:6). 영적으로 볼 때 그때는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때라는 것을 이 비유는 암시해 준다. 고로 필자는 이 외침을 마지막 때 천사장의 소리라고 생각한다(살전 4:16). 그 외침에 모두 일어나 자신의 등불을 손질한다고 하지만, 이미 준비한 것이 없는 자는 그날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시대인가? 어느 시대보다 살아서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날과 시각은 아무도 알 수 없다(마 24:36, 25:13). 그러므로 오래 살 것만 기대하지 말고, 지금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7. 열 처녀의 등불과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 성에서 진행될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참여 여부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그것은 자신의 등불 외에도 용기에 기름을 따로 가졌갔는가의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을 가져갔으나 여분의 기름을 가져가지 않았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까지 담아 갔다(마 25:3-4).

그럼, '기름'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지 이 차이를 ‘믿음이 있고 없고’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열 사람 모두가 다 처녀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예비신부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는 열 처녀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고 신랑을 기다리던 성도들이라고 본다. 어찌 불신자가 예수님을 신랑이라 부르며 마중 나갔겠는가?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그럼, 열 처녀들이 들고 나간 자기들의 등불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인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계 4:5).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천국에 올라가서 보좌 앞에 켜진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을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마태복음의 등불과 연결하여, 등불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본다. 성도에게는 이미 성령의 불이 켜져 있다. 그러나 등에 든 기름만으로 신랑이 더디 오는 긴 밤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그릇에 담아 준비한 채 마중 나가야 한다. 등불과 기름을 모두 성령이라고만 하면, 슬기로운 다섯이 따로 가지고 온 그릇의 뜻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름은 사서 채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성령은 자기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그렇다면 슬기러운 처녀들이 허리춤에 차고 갔던 기름병의 기름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본문의 맥락을 통해서 이 기름이 4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첫째, 남에게는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신랑이 왔을 때 미련한 자들이 불이 꺼져 간다며 슬기러운 처녀들에게 그들의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하자, 슬기로운 자들은 함께 쓰기에 부족하다며 직접 사라고 했다(마 25:8-9). 다른 성도의 준비를 빌려 신랑의 마중 나감 앞에 쓸 수 없다. 각자가 준비해야 한다.

둘째, 그 기름은 등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그것은 값을 치러 사야 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파는 자에게 가서 사라’는 말에는 이미 준비한 사람들이 그것을 사서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넷째,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것을 장만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다 잠들었다.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이 깨어났을 때 그들은 신랑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육체가 죽고 영혼만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다 알고 있겠지만 죽은 다음에는 다음의 세계를 준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사 오라는 말을 듣고 떠나간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사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값을 주고 사와야 하는데 그 늦은 밤 중에 어디서 돈은 만들 수 있었겠으며, 사 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필자는 그 기름을 신랑이 신부로 알아볼 만한 삶의 증표라고 본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댓가를 지불하여 일평생 그 기름병에 기름을 채워넣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주님께 바친 시간과 눈물, 회개와 기도, 수고와 핍박을 견딘 순종등이 한 방울씩 더해져서 기름병을 채웠을 것이다. 말로만 믿는다고 되풀이하면서 삶은 아무것도 주께 드리지 않는 성도라면 그 기름병에 기름은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기름이야말로 신랑을 향한 실제 헌신에 따르는 수고와 값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로 그 기름은 자기가 채운 것이기에 남에게 넘겨 줄 수 없고 남이 흘린 눈물을 나도 내 것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값을 치르고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게을러서 준비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여분의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인가? 필자는 마태복음 25장 2절의 ‘미련한 자로 있었고 슬기로운 자로 있었다’는 헬라어 미완료형에 주목한다. 그 상태가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만 들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줄곧 준비의 필요를 몰랐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몰랐던 자들이다. 듣지 못해서 몰랐을 수도 있고, 들었으나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등불 외에 기름을 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그릇에 기름을 계속 채워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에 닥쳐서야 비로소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아니했는가?’라는 질문도 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만 믿고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얻으면 어떤 준비함 없이도 혼인잔치에 들어간다는 말만 들은 성도는 기름그릇을 따로 마련해야 할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신랑이 늦어지자 등불이 꺼져 가는 위기가 비로소 드러나가 시작한다. 오늘 말씀을 듣는다면 그 차이를 지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훗날 문 앞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놀랄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그릇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8. 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신부는 어떻게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 예비했던 이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마 25:10). 성경은 결혼잔친에 들어간 여인들을 가리켜 ‘등불을 가졌던 자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예비했던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말은 이렇게 예비하는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일찍부터 신랑을 생각하며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자가 그날 그시에 그분의 집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마 25: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때 남은 처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뒤늦게 돌아와서(아마 기름을 사오지 못했을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했으나, 신랑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마 25:11-12). 그런데 그들은 원래 신랑을 주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고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절대 불신자가 아니다. 문이 닫히고 나면, 기름을 빌리거나 뒤늦게 값을 치러 채울 수가 없다. 살아 있을 때 준비해야 한다.

밤중에 기름을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준비할 시간이 죽은 다음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미련한 처녀들이 사러 간 동안 신랑이 왔고, 돌아왔을 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마 25:9-12). 죽은 다음에는 처음부터 준비했던 슬기로운 처녀들의 기름을 나누어 쓸 수 없다. 오늘 듣고 깨닫는 말씀이 내일의 결단으로만 남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살아서 회개하고 주께 드릴 삶이 있을 때 기름을 그릇에 채워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일에 지친 밤에도 죄를 돌아보며, 눈물로 회개하고,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말씀을 따라 맡은 일을 해내는 시간이 기름을 채우고 있는가? 슬기로운 처녀는 하루 아침에 호리병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한 방울씩 모았다. 주님께서 보실 때 신부로 인정할 만한 삶의 증표가 이렇게 쌓인다. 필자는 믿음과 회개를 천국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으로, 그 믿음을 따라 살아 낸 행실을 신부의 준비를 완성하는 충분 조건으로 말한다. 구원(救援, salvation)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난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기름그릇의 크기와 채운 분량은 곧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릴 상과 지위와 신분의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본다. 기름을 많이 채운 사람과 거의 채우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같은 종류의 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성문을 통과하는 문제와 들어가서 누릴 영광의 문제는 같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믿음만 말하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린 일이 전혀 없다면, 무엇으로 신랑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어린양의 아내에게 허락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분명히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계 19:7-8).

필자는 천국의 정의와 누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지, 천국의 신분과 상급, 천년왕국과 천국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도 준비하고 있다. 그 내용을 책으로 내면 각자가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더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열 처녀의 말씀이 이미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호리병에 얼마나 기름이 들어 있는지 지금 살펴야 한다.

이 말씀을 처음 듣고 자신의 준비가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돌이켜야 한다. 필자는 자신이 모르고 살았음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주께서 받아 주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죽은 뒤에야, 또는 신랑이 문을 닫은 뒤에야 준비하려 한다면 늦다. 지금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며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다. 기름은 옆 사람에게 달라고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필자에게 맡기신 것은 필자가 감당하고, 각자가 맡은 삶은 각자가 그분 앞에 올려 드려야 한다.

주의 종들도 이 경고를 들어야 한다. 한번 믿었으니 절대로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말만 전하고, 끝까지 회개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면, 그날 문 앞에서 울 성도들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줄 수 있겠는가? 주님은 말씀을 맡긴 종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마 24:45-51, 25:14-30). 필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있다. 듣는 사람은 그 가르침을 듣고 오늘 자기의 기름그릇을 확인해야 한다. 그날까지 준비할 시간이 영원히 남아 있지 않다.

신랑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오늘의 준비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등불이 켜졌다는 사실을 감사하되, 그 불이 신랑을 맞을 때까지 타도록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오직 어린양을 따르는 거룩한 처녀로 자신을 지키고, 음녀의 유혹을 끊고, 하루하루의 순종으로 그릇을 채워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그날과 그 시를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마 25:13). 바로 이 시간이 깨닫고 시작할 때다.

9. 나오며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되어 재림의 혼인 잔치로 이어지며, 그날 신부가 어떻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지금 우리는 신랑과 약혼한 성도다. 바울의 정결한 처녀, 요한이 본 더럽히지 않은 처녀, 예수님이 말씀하신 슬기로운 처녀로 그분 앞에 서야 한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으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자만 신랑의 집에 들어갔다. 준비하지 못한 자가 문 앞에서야 깨달은 일을 우리는 지금 알아야 한다. 성령의 등불을 받았다는 고백에 머물지 않고 회개하며 죄를 끊고, 어린양을 따르며, 시간과 수고와 눈물의 대가를 들여 기름 그릇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부로 부르신 사랑을 가볍게 버리지 말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신랑이 오실 때 예비한 자로 인정받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01일(목)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