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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20. (화)2026년 교회표어 「시대적인 사명완성을 위해 성전을 짓는 해」 (역대상 28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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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01)]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6) 영원한 신랑으로 다시 오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02)(호2:14~20)

정보배 목사2026-09-30조회 131읽는 시간 약 36분

설교핵심

본 설교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신랑으로 조명하며, 구약의 호세아 예언이 초림과 재림을 통해 성취되는 구원과 혼인의 과정임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역사와 성경의 정확한 해석을 강조하면서, 구약 시대 북이스라엘의 회복 예언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또한, 현재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약혼한 상태로서 날마다 회개와 말씀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가꾸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의 신앙 여정은 물질적인 천국 개념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에서 이루어질 어린아의 혼인 잔치와 신부로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강조하며 글을 맺습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출애굽의 절기와 이스라엘의 역사는 교회 시대와 마지막 때를 어떻게 비추는가?2호세아의 다시 장가들겠다는 약속은 사마리아에서 어떻게 성취되기 시작했는가?3요한계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을 왜 혈통적 이스라엘로만 볼 수 없는가?4영원한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는 왜 예수 그리스도이신가?5예수님과 세례 요한과 바울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어떻게 증언했는가?6성도는 왜 지금 약혼한 상태이며,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언제 어디에서 열리는가?7신랑을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끝까지 준비해야 하는가?

강의 자료

그림 3 · 슬라이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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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ternal Bridegroom설교 슬라이드 · 25장
설교 본문 기독론(201)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6) 영원한 신랑으로 다시 오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02) (호 2:14-20)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성경을 읽을 때 역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한 민족에게 행하신 일은 그 민족의 과거로만 끝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사는 출애굽을 거쳐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되었고, 출애굽의 여정은 오늘날 한 사람이 구원(救援, salvation)에 이르는 여정을 비추어 준다. 역사를 살피면 말씀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보인다.

호세아의 예표(豫表, type)와 예언도 그렇다. 북이스라엘은 참된 남편을 버리고 바알을 따라갔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다시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누구에게서 시작되어 언제 완성되는가? 북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다윗 왕을 찾으리라는 말씀은 멸망한 나라의 재건만을 뜻하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신랑이라 하셨고, 우리는 왜 아직 신랑을 기다리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의 혼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first coming)에서 어떻게 시작되어 재림(再臨, second coming)의 혼인 잔치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출애굽의 절기와 이스라엘의 역사는 교회 시대와 마지막 때를 어떻게 비추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시작하신 일은 한 가정에서 민족의 이야기로 커졌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길은 개인이 구원을 향해 가는 여정과도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그저 옛이야기로 읽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에 시선을 두시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출애굽의 이야기는 절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애굽의 시작에 유월절과 무교절이 있었고, 초실절이 있었으며, 이어 오순절이 있었다. 이 절기들이 지나간 뒤에는 넉 달 농사의 시간이 펼쳐진다. 필자는 바로 이 시간을 교회 시대로 본다. 그리고 뒤에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 있다. 앞부분의 절기가 역사 속에서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취된 사건이었지만, 뒤에 남은 절기를 오직 혈통적 유대 민족의 몫으로만 돌릴 수 없다. 왜냐하면 유월절 때에 이미 메시아가 죽으셨고 초실절에 부활하셨는데, 어찌 속죄일에 속죄하는 제사를 다시 드려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봄철의 절기가 육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가을의 절기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진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앞의 절기도 유대인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마지막 절기 역시 다시 유대인에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고 성령을 주신 뒤 복음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다른 민족들에게 전해졌다. 촛대가 혈통적인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로 옮겨진 것이다. 그렇다고 마지막 때에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주께 돌아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돌아와서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롬 9:27, 11:25-27). 다만 혈통적 이스라엘이 다시 세계사의 중심이 되어 모든 구원 역사를 이끈다고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왜 우리는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가? 말씀을 듣는다고 하여도, 지금 우리가 어느 때를 살고 있으며,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면 열심히 수고하고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는 역사 자료를 검토하여 여러 자료와 질문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는다. 인공지능(AI)의 대답도 도움이 되지만 AI는 얼마든지 잘못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으므로 늘 확인해야 한다. 이번에 호세아 말씀을 살피면서도 사마리아의 역사를 다시 검토했다. 그랬더니 호세아 3장의 여호와와 다윗 왕을 찾으리라는 약속이 그리심 성전 이야기와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역사와 성경을 함께 볼 때에 우리는 우리가 놓쳤던 장면도 다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진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월절의 어린양과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길을 보라.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 번 일어난 일이듯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 역시 죄와 세상에서 한 번 돌이켜 주님을 따라간다. 오순절 뒤에 바로 마지막 절기가 오지 않고 농사를 짓는 긴 시간이 놓인 것처럼,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이방인을 위한 긴 추수 시간이 진행되고 있다. 복음의 씨가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뿌려졌지만 이윽고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 민족에게까지 뿌려지고 있다. 이제는 주님께서 공중으로 오셔서 알곡을 추수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을의 절기를 해석할 때에도 역시 교회를 시대를 지나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거두시는지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역사를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어 왔는지를 놓칠 수가 있다. 역사를 편집하여 좋은 기억만을 남기고 불편한 사건을 없애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민족과 제도에 맞춰 역사를 쓴다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루신 일을 볼 수가 없다. 사마리아의 여호와 신앙 역시 그랬다. 여로보암 1세부터 제19대 호세아 왕 때까지 210년간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호세아 3장 5절에서는 북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바사 시대인 B.C. 450~400년에 북쪽 세겜성의 그리심 산에 그리심 성전이 세워졌고 정통의 레위인과 제사장들에 의해 여호와 신앙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경 이야기조차 남유다의 시선으로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오래전부터 그대로 있어 왔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기울어진 상태로 성경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 앞에서 우리의 잘못된 해석을 계속 배우며 바로잡아 가야 한다.

참고로 필자가 말하는 긴 농사의 시간은 오순절 뒤에 놓인 넉 달의 추수기를 가리킨다. 절기 하나하나를 단순히 달력의 행사로 읽으면 그 사이에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놓친다. 나팔절에 성도들을 모집하고, 속죄일에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어 민족에 대한 청소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며, 성경 말씀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호세아의 다시 장가들겠다는 약속은 사마리아에서 어떻게 성취되기 시작했는가?

여호수아에 의해 12지파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후(B.C.1406년경), 북쪽 10개의 지파가 따로 떨어져 나가서 북이스라엘 나라를 세운다(B.C.931년경).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땅 안에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기에 북이스라엘은 급속히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멀어져간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안 신인 바알을 자신의 남편이라 부르며 섬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신에게 드리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호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끝내 버리지 않겠다고 하신다. 호세아 2장을 보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광야로 이끌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북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참 남편이라 부르게 하겠다고 하신다(호 2:14-17). 그리고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과 진실함으로 다시 그들에게 장가들겠다고 선언하신다(호 2:19-20). 여기서 장가들겠다는 말씀은 주께서 세 번이나 연거푸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북이스라엘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렇다면 멸망한 북이스라엘은 어떻게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호세아는 그들이 오랫동안 왕도 없고 제사도 없이 지내다가 다시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호 3:4-5).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북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북쪽 땅에 남은 북이스라엘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그들이 다시 여호와를 찾았는지 역사를 뒤져보지 않았을 것이다.

호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사실 북이스라엘의 왕국은 1대 여로보암 1세(B.C.931~910)에서 마지막 12대 호세아 왕(B.C.732~722)까지 열아홉 명의 왕을 거치며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졌다. 그들은 송아지를 여호와를 섬겼고 바알을 그들의 남편이라고 하면서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 멸망한다.

그런데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북쪽의 10개의 이스라엘 지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필자가 조사한 역사 자료를 따르면, 바사 시대인 대략 기원전 450년에서 400년 사이 남유다의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이 북쪽으로 올라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여호와 신앙은 그 뒤 약 삼백오십 년 지속되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잊혀져갔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손의 신앙이야기는 묻혀지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그리심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남쪽 유다 사람들은 그 성전을 마냥 달갑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 시대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헬카누스가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가서 그리심 성전을 파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B.C.111 혹은 110년경이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배 자리를 잃은 채 오직 한 분 곧 메시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세 오경 곧 사마리아 오경을 통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자기들의 억울한 사정을 밝혀 주고 회복을 가져올 분을 기다렸다. 그들은 그를 '타헤브(Tabeb)'라 불렀다(신 18:15, 요 4:25).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들이 여호와를 찾았던 역사적인 기록을 알아야 하고, 그 뒤에 그들이 왜 메시아를 기다렸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왜 그곳으로 일부러 가시려고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날 예수께서는 일부러 수가성 우물가로 가서 그 여인을 기다리셨다. 이야기 도중에 그 여인은 그리심산과 예루살렘 중 어디에서 예배해야 옳은지를 예수님께 물었고, 그녀는 메시아가 오면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타헤브이자 남유다인들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라고 밝히셨다(요 4:20-26). 호세아가 말한 다윗 왕은 죽은 다윗이 살아나서 다시 왕좌에 앉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이루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북쪽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다윗의 자손이 직접 사마리아에 가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려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 4장을 제대로 이해하면, 오후 6시에 물을 뜨러 나왔던 그 여인을 함부로 창녀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와 메시아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다(요 4:16-18, 28-30, 39-42). 그러므로 필자는 그 여인은 창녀가 아니라, 여러 남편을 잃었던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녀의 사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그녀의 삶을 아시면서도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드러내셨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때 주님은 그 여인에게 육신의 새 남편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적 남편으로 그녀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들이 새 남편인 다윗 왕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예언한 '내가 다시 장가들겠다'는 약속이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기다린 회복자 타헤브적 메시야는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있는 선지자였다. 그러나 과거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던 사람들의 후손이 모르는 사실도 알려 주셨다. 그것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이다(요 4:22). 그 말씀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원후 27년 무렵,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이르러 메시아를 기다리던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밝히셨다. 이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언젠가는 여호와를 구할 것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다윗 왕을 찾으리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본다. 고로 그리심 성전이 무너져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주님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그때가 지금이라고 알려 주셨다(요 4:23-24).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 요한계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을 왜 혈통적 이스라엘로만 볼 수 없는가?

또한 호세아는 예언하기를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울 것이라고도 했다(호 1:11). 세대주의는 이를 마지막 때에 혈통적 열두 지파가 다시 일어나 민족적 주도권을 쥐고 세상에 천년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 설명에 요한계시록 7장의 인 맞은 십사만 사천 명을 사용한다. 각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씩 나온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모두 혈통적 유대인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계 7:4-8).

그러나 144,000명의 명단을 실제로 읽어 보라.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의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사도 요한이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그대로 적으려 했다면 이 명단에 '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은 빠져 있고 요셉의 므낫세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하던 지파 명단에서도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리고 레위 지파가 나온다. 그러므로 이 명단을 어느 한 시대의 혈통적인 장부라고 말할 수가 없다.

더구나 각 지파에서 정확히 일만 이천 명씩 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를 읽어 보라. 옛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사람 수나 땅의 분량은 결코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숫자가 똑같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를 읽으면서 상징의 뜻을 물어야 한다. 필자는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보아서, 끝까지 이기는 사람들과 연결해서 해석한다. 십사만 사천 명은 온 민족 가운데서 이기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를 혈통을 증명할 수 있는 열두 집단의 명단으로 좁혀서 그대로 적용하면, 본문에 적힌 이름과 숫자에서부터 설명이 막힌다.

세대주의자들은 지금 우리가 르우벤 지파의 후손을 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혈통을 아신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아신다. 그러나 그 답만으로 요한이 왜 단을 그 명단에서 빼었었고, 요셉과 므낫세를 함께 썼으며, 열두 지파의 수를 똑같이 기록했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는 에스겔의 성전과 마지막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어지는 영적인 해석을 함께 보아야 한다(겔 40-48장, 계 21장).

필자는 육적인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말일에 회개하고 주께 나아오는 자가 있을 것임에 대해서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에 대해 함께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회복을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携擧, rapture), 혈통적 이스라엘의 세계 지배, 지상 천년왕국이라는 한 시간표에 묶을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이는 다윗 왕이 오리라는 말씀도 다윗 본인이 다시 와 통치한다는 뜻이 아니었듯, 호세아가 말한 영원한 혼인 역시 한 민족의 정치적 재결합에 갇히지 않는다고 본다.

세대주의 안에서도 설명은 하나가 아니다. 한쪽은 마지막 때 열두 지파가 실제로 회복되어 예수님을 맞이하고 지상 천년왕국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다른 쪽은 각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 144,000명은 이스라엘 민족을 깨울 자로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이끄는 지도자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을 그 시간표와 연결하고, 교회가 먼저 휴거되어야 민족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문은 각 지파를 세는 방법부터 혈통 명단의 단순한 복원과는 전혀 다르다. 지파마다 정확히 일만 이천 명이라는 수를 정치적 지도자의 명부처럼 읽으면 그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천국에서 올라가서 영광의 광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144,000명을 보면,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5. 영원한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는 왜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여호와께서는 이미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오직 한 하나님만 바라보던 백성은 이제 가나안의 풍요를 얻기 위해 바알을 남편으로 믿고 따라갔다(렘 2:2, 31:32; 호 2:8, 13). 그런데 주님은 버림받은 남편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장가들어 그들과 영원히 살겠다고 하셨다(호 1:19-20). 그렇다면 이 혼인은 언제 영원하게 적용되는 것일까? 육체를 지닌 인간은 유한하고 역사 속의 왕국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영원히 장가들어 살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함께 영원히 사는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은 초림 때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게 찾아오셨다. 먼저 남쪽의 종교 지도자들을 부르셨으나 그들은 기득권을 붙잡고 그분을 거절했다. 반면에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가난한 자, 갈릴리로 밀려난 자들이 그분을 따랐다. 그리고 소외되었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 여인의 말을 듣고 나와 예수님을 영접했다(요 4:39-42). 그리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후 10여 일만에 만에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백이십 명을 통하여 복음은 예루살렘에 전파되어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고 이어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사람들 중에 빌립집사가 사마리아로 가면 복음을 전해준다. 그리고 이제 '사마리아 교회'가 탄생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 의해 이방인 지역에도 복음이 증거되어 땅끝까지 나아갔다(행 1:8, 15, 2:1-4).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이후부터는 신부가 될 사람을 어느 한 민족에만 가두어 두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초림에 영원한 혼인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를 믿은 뒤에도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주님과 함께 다녔으나 배반했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바울은 전한다(마 26:14-16, 딤후 4:10).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기를 바라시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의 손을 놓아 떨어져 나갈 수 있다. 호세아가 전한 말씀에도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는 권면이 나온다(호 3:3). 고로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로 우리의 배반 가능성을 지워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림은 혼인 약속의 시작이고 재림은 그 결합이 영원히 완성되는 때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편으로 말씀하신 여호와께서는 신약에 이르러 어린양이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당신의 신부를 만드시고 재림 이후에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씀은 호세아의 약속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계 19:7). 이스라엘과 영원히 장가들겠다고 하신 여호와께서 마지막에 신부를 맞이하시는 어린양으로 등장하고 있다. 고로 여호와와 예수님은 서로 다른 신랑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경륜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통일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린 사실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에루살렘에 성전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예배의 중심이라 여겼으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오히려 거절하고 말았다.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잃었으나 기다리던 분이 오셨다는 여인의 말을 듣고 우물가로 나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맞아들였다. 남유다에서는 약한 자들이, 북이스라엘에서는 밀려난 자들이 먼저 주님의 초청에 반응하여 신부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 주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받아들이는지를 말해 주는데, 그것이 혈통과 제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게 시작한 호세아 예언의 성취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모든 민족으로 확장시키셨다.

6. 예수님과 세례 요한과 바울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어떻게 증언했는가?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여호와이셨던 한 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예수님 스스로 당신을 신랑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느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나아와서 자기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게서는 "혼인집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고 답하셨다(마 9:14-15). 신랑이 곁에 있는 지금은 제자들이 기뻐할 때이며,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제자들도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초림의 예수께서는 단지 먼 미래의 신랑 신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신랑으로 제자들 가운데 서 계셨던 것이다.

마 9:14-15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행하신 곳이 가나의 혼인잔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요 2:1-11).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사라질 뻔한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아직 완성의 때는 아니었으나 혼인잔치에서 기쁨을 회복시키셨던 이 일은 신랑으로 오신 분의 사역이 어떤 것인지 미리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필자는 이 사건을 마지막 혼인잔치의 완성의 예표로 본다.

둘째,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으로 보았다. 사시 예수께서 신랑이시라는 사실을 맨 먼저 알아본 이는 세례 요한이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라 말하지 않고 그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했다. 이어 신부를 취하는 분이 신랑이지만, 자신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친구라고 말했다(요 3:28-30). 이어 그는 말하기를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자기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참된 종은 갈수록 자기 이름이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낸다. 그는 분명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신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우리도 이 기준으로 사역을 살펴야 한다. 어떤 종이 성경을 넓게 말하고 영적 세계에 관해 진실한 체험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한다. 필자도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보게 하신 것을 전하고 있지만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필자가 전한 것 가운데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누구든지 버려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그것을 목숨처럼 붙들어야 한다. 자신을 그리스도나 성령이라 사칭하며 높이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더욱 드러내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혹시 다른 종말론을 가르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을 높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우리의 형제이다. 견해가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이단이라 몰아서는 안 된다.

셋째, 바울도 그리스도를 한 남편으로, 성도들을 그분께 드릴 정결한 처녀로 말했다(고후 11:2). 개역한글은 마지막 단어를 ‘중매함이로다’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헬라어 단어 '하르모조'는 '결혼시키다' 또는 '약혼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문맥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께 드려질 약혼의 관계에 있다는 뜻을 살려 읽는 것이 알맞다고 본다. 믿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혼인잔치까지 이미 다 마쳤다고 여겨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되는 비밀을 말한 뒤, 자신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고 했다(엡 5:31-32). 성경은 이렇게 신랑과 신부의 언어로 처음 오신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연결한다. 그렇다. 호세아의 남편 약속과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증언을 한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바울이 성도의 신분을 정결한 처녀라고 불렀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 속하였다고 하면서 마음은 다른 주인에게 빼앗기는 자는 정결한 처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날까 두려워했다(고후 11:3). 약혼의 관계를 가볍게 보는 자는 이 경고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랑이라 하신 말씀과 바울이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성도들을 드리려 한다는 말은, 이미 시작된 사랑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한 가지 방향을 계속해서 가리킨다.

7. 성도는 왜 지금 약혼한 상태이며,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언제 어디에서 열리는가?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속하였으나 아직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상태를 약혼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약혼은 신랑을 향한 신부의 변치 않는 약속이지만, 마지막까지 정결한 처녀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아내가 자기 자신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계 19:7-9). 아내 될 자가 준비할 필요가 없다면 왜 그 아내가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겠는가?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세대주의는 교회 전체가 환난 전에 공중으로 올라가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은 혼인잔치의 기간을 7년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필자는 환난의 끝부분에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준비된 알곡 성도가 주님께 모여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것이고, 그리고 백보좌 심판 뒤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혼인잔치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마 24:29-31; 고전 15:51-52; 계 19:7-11, 21:1-2). 교회 전체가 환난을 피하여 자동으로 올라간다는 시간표를 혼인잔치에 혼합해서 전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혼인잔치의 기쁨이 선포되고, 이어 백마를 타신 분과 그분의 군대가 아마겟돈으로 나온다(계 19:7-14). 그런데 20장에 천년왕국이 나온다. 이런 기록 순서 때문에 모든 장면을 한 줄의 시간표처럼 이어 붙이면 안 된다. 필자는 20장이 이미 진행 중인 천국의 천년왕국과 마지막 전쟁의 모습을 확대하여 보여 주는 그림이라고 본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장면 묘사법의 하나이다. 즉, 시간별로 기록하면서 중간중간에 포커스를 맞춘 삽입계시를 넣는 방식이다. 또한 19장의 아마겟돈 전쟁과 20장의 곡과 마곡 전쟁도 천년을 두고 벌어지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은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을 하나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지막 전쟁 뒤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혼인잔치가 펼쳐질 것이다(계 20:7-10, 21:1-2).

그러면 어린 양의 신부는 누구인가?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기록했다(계 21:2). 뒤이어 천사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겠다고 하고 거룩한 성을 보여 준다(계 21:9-10). 필자는 이 장면을 두고, 주님이 새 예루살렘 성의 돌과 벽을 아내로 맞으시는 장면이 아니라 그 성 안에 있는 성도들을 당신의 짝으로 맞으시는 장면이라고 본다. 성은 그들이 영원히 함께할 신혼집이며, 어린양의 신부는 그곳에 사는 인격적인 성도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 21:9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처음 사람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에게 돕는 배필이 주어졌듯이, 주님은 자신과 마주할 짝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끝내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이다(창 2:18, 21-24).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을 물질적 건축물로만 설명하거나, 혹은 반대로 성 안에 거할 사람의 실재를 지워서는 안 된다. 새 예루살렘은 신랑과 신부가 함께하는 신혼집이자 완성의 자리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이야기도 다음 시간에 더 살피겠지만, 누가 신혼집으로 들어가는지를 알려주는 장면인 것이다(마 25:1-13).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을 기다리러 나왔지만 준비한 모습은 같지 않았다. 다음 시간에 그 비유를 더 살피겠으나, 혼인잔치의 문이 열릴 때 누구든지 자신의 이름을 교회에 올려 두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요한계시록이 신부의 예비와 세마포 옷을 말하는 이유를 우리는 이 비유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마 25:1-13; 계 19:7-8).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을 말하며 오늘의 준비를 뒤로 미루는 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의 모습은 요한이 본 영광스러운 장면이다. 천사가 보여 주겠다고 한 것은 어린 양의 아내이고, 그가 보여 준 곳은 거룩한 성이다(계 21:9-10). 이 둘의 관계를 보지 않고 성의 건축 재료 자체가 신부라고만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려는 뜻이 흐려지고 만다. 필자가 성 안에 살고 있는 성도를 신부라고 거듭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분이 찾으시는 짝은 살아서 그분을 사랑하고 마주하는 인격체이다.

8.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끝까지 준비해야 하는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분은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속제 제물로 내어 주셨다. 속죄(贖罪, atonement)는 이처럼 그분의 희생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속죄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때부터는 깨끗하고 거룩한 행실로 단장해서 신랑을 맞이해야 한다. 한 번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신의 죄와 삶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랑이신 주님께서 신부인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실 것이라고 했다(엡 5:25-27). 십자가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면, 그 뒤에 우리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씻고 거룩하게 만드는 여정이 있어야 한다.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특별히 그날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자는 날마다 성령의 깨우침을 따라 죄를 돌아보고 회개(悔改, repentance)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자기의 잘못을 자백하여 정결(淨潔)해지며, 의로운 행실로 자신을 성결(聖潔)하게 단장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아내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는데, 그녀의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 19:8). 여기서 성도들의 믿음은 기본이다. 왜냐하면 자기 공로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다고 말하면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더러운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한 번 구원받았으니 끝까지 안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호세아서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을 보라. 그들은 자기의 남편이신 여호와의 사랑을 받았어도 끝내 바알을 따라가고 말았다. 호세아가 다시 집 나간 아내를 사온 후에 그녀에게 이제부터는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고 한 까닭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호 3:3).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여 계속적으로 밖으로 나간다면 어느 날 마주 잡은 손이 서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는 결코 경홀히 여겨서는 아니 된다. 약혼한 사람이 신랑을 잊고 다른 사람을 좇아간다면 어떻게 자기의 신랑과 혼인잔치를 치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부가 정결함으로 단장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회개 기도문을 가지고 회개하는 일은 결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라 신랑을 향해 자신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주님께서 이기는 성도를 마지막 나팔로 부르실 때, 그대 우리 성도들은 익은 곡식이 되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소집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필자는 성도가 죄를 품고 악한 영과 타협한 채 있다면, 그날 전사의 자리에 설 수 없다고 확실히 말하고 싶다. 그래서 부지런히 죄를 씻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아마겟돈 전쟁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좁은 생명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의 끝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이다(마 7:13-14).

필자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접하고는 매우 기뻐하지만, 회개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또다시 또 다른 곳으로 가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회개와 천국복음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의 소문이나 특별한 체험을 따라가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성경을 살피고, 성령의 깨우침으로 자신을 준비시켜야 한다. 주님께서 보이신 것을 전하는 종도 자신을 높여서는 아니 되고 듣는 사람도 종에게만 매여서는 아니 된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우리는 줄어들고 그리스도는 커져야 한다. 끝까지 주님만을 붙잡는 성도가 그분과 함께 그날 신부로 준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으며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말한다(계 22:14). 고로 자신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고백에만 머무르지 말고, 자신의 더러운 옷을 날마다 씻어야 한다. 죄를 씻는 일은 스스로 구원의 값을 치르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어린 양께서 값 주고 부르신 사람답게 그분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옳은 행실로 살아가야 한다. 혼인잔치에 참여할 사람은 바로 이 준비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호세아의 다시 장가들겠다는 약속이 북이스라엘의 역사와 사마리아에서의 만남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고 새 예루살렘의 혼인잔치로 이어짐을 살펴보았다. 출애굽의 절기와 요한계시록의 열두 지파를 읽을 때에도 지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이기는 성도들에게 행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이라 하셨고, 세례 요한과 바울도 그분과 신부의 관계를 증언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신부, 전사, 상속자, 왕 노릇할 자로 준비시키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준비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말씀과 성령 앞에서 죄를 씻고,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손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30일(수)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