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28)]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에돔의 남은 자를 통해 살펴보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의 비밀(02)(암9:11~12)
이 설교는 구약 성경의 예언서인 아모스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예표와 이방인 구원의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에돔과 아담의 역사적·언어적 연관성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기업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에서의 태도를 통해 영적 상속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나아가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열린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여 천국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소선지서는 왜 북 이스라엘의 회복을 그토록 강조하는가?본문 →2신약은 왜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70인역을 인용했는가?본문 →3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본문 →4번역 성경과 원문 성경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본문 →5아모스 9장 12절은 왜 '에돔의 남은 자'라고 말하는가?본문 →6에서는 어떻게 장자의 기업을 잃고 세일 산으로 갔는가?본문 →7형제였던 에돔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는가?본문 →1. 들어가며
우리는 지금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율법서와 역사서를 지나 시편과 잠언과 아가서 같은 시가서를 살폈고, 예언서에 들어와 대선지서를 지나 이제 소선지서를 살펴보고 있다. 그 가운데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豫表, type)는 아홉 가지인데, 첫 번째는 9장 11절의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는 9장 12절의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지금 이 두 번째 예표를 살펴보고 있다.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이 말씀에는 풀어야 할 물음이 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북 이스라엘이 장차 에돔의 남은 자와 모든 민족을 기업으로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용한 야고보 장로는 70인역을 따라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는 이들과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행 15:17). 70인역으로 들어가면서 주어가 바뀌고 동사가 바뀐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니 그것은 점 하나, 획 하나의 차이였고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까지 미리 다 알고 계셔서 단어 하나까지 그렇게 쓰게 하셨던 것인가? 그리고 70인역이 아담, 곧 사람의 남은 자로 읽은 그 자리에 아모스는 왜 굳이 에돔의 남은 자라고 기록했을까? 에돔이 거기에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소선지서가 북 이스라엘을 향해 품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출발하여, 신약이 70인역을 인용한 이유와 번역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살펴보고, 성경 속 에서와 에돔 족속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에돔의 남은 자에 담긴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의 비밀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소선지서는 왜 북 이스라엘의 회복을 그토록 강조하는가?
소선지서의 많은 부분이 남 유다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많이 충격적이다. 사무엘상하를 읽으면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이야기가 나오고, 열왕기상하로 넘어가면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B.C.930년경).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였고, 나머지 열 지파는 북쪽으로 가서 여로보암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신앙은 혼합 신앙(混合信仰, syncretism)이었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이라고 하였다(왕상 12:28-29).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고(왕상 12:31),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절기를 정하여 지켰다(왕상 12:32). 안식일도 지키고 할 것은 다 했다. 그런데 그 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섬기라고 하니, 진짜 믿음을 가진 자는 벧엘과 단에 가서 제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장소로 가자 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에 올라가 거기서 제사를 드렸는데, 갈멜 산도 그런 제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 종교를 들여온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제단마저 헐어 버렸다(왕상 19:1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갈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맞붙게 하셨다.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왕상 18:30) 그 위에 물을 붓게 한 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드러냈다.
이처럼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이 아마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세 절기(신 16:16)가 되면 남쪽 예루살렘에 가서 지키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때는 경계선에 보초를 세워 막아 놓은 때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해방 뒤에 38선이 그어졌지만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오가기도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 신앙보다 섞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자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다. 그래서 그 땅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찾아왔다(암 8:11). 하나님께서는 그런 북쪽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남쪽의 선지자를 북쪽으로 파송하기도 하시고, 북쪽에서 선지자를 세우기도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게 하셨다. 대선지서인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대부분 남 유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호세아부터 시작되는 소선지서에 들어오면 호세아와 아모스가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나중에 살려 주시겠다는 회복의 약속을 계속 전한다. 아모스 다음은 오바댜이고 오바댜 다음은 요나인데, 요나도 가드헤벨 출신의 북 이스라엘 선지자이다(왕하 14:25). 이것은 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한번 내 백성이면 어찌하든지 내 백성으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강렬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주님께서 영원한 구원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때 주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시겠는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한 사람 한 사람 성 밖으로 갈 때 주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탈락시키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탈락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탈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를 주셨고, 주님은 우리가 그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강제로 프로그램을 입력해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주님께 붙어 있기 위하여 조그만 생각과 판단과 행동에서부터, 돈을 쓰거나 은사와 달란트를 쓸 때에도 어디부터 쓸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자칫하면 그것을 놓쳐 버리고, 나중에 죽고 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마 8:12). "그때 내가 순종했어야 했는데, 그때 내가 깨우쳤어야 했는데, 그때 주께 돌아가 회개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하고 안타까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 통틀어 보면, 소선지서는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한번 구원하신 자를 영원히 구원받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담고 있다. 필자는 이전에 이것을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가, 이번에 다시 강의하면서 전체를 보니 다가오는 것이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패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표현이 바로 에돔의 남은 자이다.
3. 신약은 왜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70인역을 인용했는가?
예수님과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을 사용했다. 그런데 70인역은 한 번에 번역된 것이 아니다. B.C.280년경 모세오경부터 시작하여 이후 약 200년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번역되어 합쳐진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경이 처음 들어올 때에도 1882년에 누가복음이 먼저 번역되고, 이어서 다른 복음서들과 서신서가 차례로 번역되어 1887년에 신약 전체가 나온 것과 같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인용된 70인역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번역한 성경과 비추어 보면 다른 곳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잘못 번역된 70인역을 쓰신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필자는 여기에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둔다.
첫째는 계시의 진전(啓示의 進展, progressive revelation)이다. 원래는 주님께서 히브리어 구약성경대로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복음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 1:8), 곧 이방인에게까지 증거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70인역으로 번역할 때 더 드러내어 확대하셨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오히려 70인역이 원문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다. 우리가 지금 개역개정 성경이나 영어 성경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70인역이 나온 지 한참 뒤의 것이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본(原本), 곧 원전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가 번역해서 쓰는 히브리어 본문은 A.D.6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 부호를 붙여 전한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이고, 그 완전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1008년의 레닌그라드 사본이다. 히브리어는 원래 자음만 기록하였고 모음이 없었다. 계속 전수되어 내려오던 본문에 한참 뒤에야 모음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니 자음만으로는 에돔(אֱדוֹם)인지 아담(אָדָם)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모스 9장 12절은 70인역이 원문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오랜 전수 과정에서 무엇이 없어지고 떨어져 나가며 모음이 잘못 붙어서 지금의 마소라 본문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바로 이 70인역의 아모스 말씀을 인용했다.
행 15:16-17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여기서 기업으로 얻는 주체였던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과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는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붙들어야 할 사실이 있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원전을 영감(靈感, inspiration)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100% 믿는다. 또한 예수님께서 70인역을 인용하신 것을 보면 70인역으로 번역된 말씀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다. 그래서 앞으로 최소한 신약성경이 인용하고 있는 70인역의 말씀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고로 필자는 이렇게 본다. 원래 마소라 본문의 말씀이 있었으나, 70인역으로 번역하면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더 진전시켜 주셨다(아니 70인역 번역자들이 본 히브리어 사본이 원래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왕 성경을 번역할 때 하나님의 뜻이 더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70인역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
4.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과 다르게 번역한 대표적인 말씀 하나를 들어 보겠다. 바로 이사야 7장 14절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에 처녀라고 나온다. 처녀는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여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처녀가 히브리어로는 알마(עַלְמָה)라고 되어 있다. 알마는 결혼할 나이가 된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처녀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런데 왜 처녀라고 되어 있는가? 이 말씀이 70인역으로 갔을 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여자, 곧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장 23절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 것인데, 마태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아니라 70인역을 인용했다. 필자는 그 당시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성경이 지금처럼 많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기의 처녀가 헬라어로 파르테노스, 곧 버진(virgin)이다. 이 단어가 요한계시록 14장에도 나온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여자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처녀이고, 하나는 바람난 음녀이다. 우리는 처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린 양의 신부가 된다. 바람이 나서 사탄을 따라가고 귀신을 따라가면 약혼을 했어도 신부로 삼아 주지 않으신다.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여기서 여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귀네(γυνή)이고, 순결한 자라는 말이 파르테노이(παρθένοι), 곧 파르테노스의 복수형이다. 이 순결한 자들이 바로 처녀들이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본문은 이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말하지만, 그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70인역은 그것을 번역할 때 처녀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태는 그 70인역을 인용하여 처녀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에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때에는 정확히 몰랐으나 하나님께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감으로 더 가르쳐 주셨을 가능성과, 원래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히브리어 본문을 우리가 찾지 못해서 지금처럼 변형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계시의 진전으로 본다. 원래 마소라 본문이 있었으나, 70인역으로 번역하면서 하나님께서 동정녀 탄생의 계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70인역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5. 번역 성경과 원문 성경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도 영감된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원문은 100%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한글 성경은 번역이므로 얼마든지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 성경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는 이 번역 성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필자도 지금 킹제임스 버전이나 바른성경이나 표준새번역을 쓰지 않고 개역개정 성경을 쓴다. 그만큼 개역개정 성경이 가장 잘된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본에도 얼마나 많이 틀린 곳이 있는지 모른다. 뜻을 왜곡시켜서 아예 특정 교리를 합리화하게 만든 곳까지 있다. 그런데 누가 그 이야기를 하겠는가? 우리나라 140여 년 기독교 역사를 뒤집어야 하는 일이니,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놀라운 복이다. 우리는 원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역개정 성경을 한 글자도 변함이 없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번역서이다.
물론 이 번역이 이루어질 때에도 존 로스부터 시작하여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필자는 본다. 우리나라의 번역 가운데 가장 멋진 번역은 성경의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영어 성경도 신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 god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God로 구별할 뿐이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번역했다면 하나님을 신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번역자들은 신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말 하ᄂᆞ님을 성경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삼았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없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누구를 믿느냐고 물을 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을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지 무당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당이 섬기는 신은 귀신이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은 하나님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구별되도록 성경을 번역해 놓았으니 존 로스부터 시작한 번역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러므로 필자가 번역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문에 더 익숙해져야만 지금 우리가 혼란스럽게 여기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신학자를 따라가지 말고 원문을 따라가면 답이 나온다. 구원론도 답이 나오고 삼위일체도 답이 나온다. 원문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까지 일반 성도들이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평신도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아니다. 다 들어도 은혜가 된다.
오늘날 신학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서양에서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평학(歷史批評學, historical criticism)과 비신화화(非神話化, demythologization)는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기적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경험했다고 하는 자들의 고백을 써 놓은 것이며, 그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신학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유럽의 교회가 무너져 버렸다. 이것이 정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 조사해 보자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분해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신학교의 현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교회에 와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목회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말씀을 이어받아 원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르게 전해야 한다.
6. 아모스 9장 12절은 왜 '에돔의 남은 자'라고 말하는가?
이제 다시 아모스 9장 12절로 돌아가 보자. 이것이 아담의 남은 자인지 에돔의 남은 자인지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에돔의 남은 자를 아담의 남은 자로 번역하게 하심으로써 그 뜻을 더 분명하게 하셨다. 아담의 남은 자란 무엇인가? 아담이 범죄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아담의 후손을 다 죽이지 아니하셔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주를 찾아 결국 다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에베소서까지 연결하면,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 상속자가 될 자도 있고 그들 중에는 왕 노릇 할 자도 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담이라고 할 것이지 왜 에돔이라고 했을까? 그 핵심이 히브리서 12장에 나온다.
히 12:15-17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5절의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뒤처져 배제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16절의 음행하는 자는 르우벤을 지칭한다. 르우벤은 장자였으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다(대상 5:1). 그리고 이어서 장자의 명분(長子의 名分, birthright)을 판 에서가 나온다.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가 원래 누구였는가? 에서였다. 에서는 이삭의 정실 부인인 리브가에게서 난 쌍둥이의 큰아들이었다. 에서는 첩에게서 난 자식도 아니고 다른 데서 데려온 자식도 아니었다. 정실 부인의 장자이자 쌍둥이의 형이었다. 그러니 원래는 에서가 기업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소라 본문의 원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를 기업으로 차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여기서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동사가 야라쉬(יָרַשׁ)인데, 기업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이다. 이 상속의 동사가 에돔의 남은 자와 묶여 있다. 이것은 에돔이 원래 기업을 받을 장자 에서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원래 기업을 차지해야 할 에돔이 그 기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원래 상속할 자는 에서였는데 에서가 상속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기업을 차지할 야곱의 후손인 북 이스라엘이 그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기업(基業, inheritance)을 차지할 자로 작정하고 부르셨는데, 죄짓다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봐 하나님께서는 너무 안타까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늘나라의 기업을 차지할 자가 되어야 한다. 턱걸이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이 상속자(相續者, heir)가 되지 못한 채 천국에서 땅도 없이 돗자리 펴 놓고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시간을 써야 할지, 내 은사와 달란트를 어디에 써야 할지, 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를 모르고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필자는 이런 말씀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이방인은 원래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아담의 남은 자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에 갈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도 주를 찾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70인역을 통해서 밝히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아, 자신을 가지라!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마 20:16). 우상에 찌들어 있던 너희라 할지라도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있고 왕 노릇 할 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원래 아담의 후손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원래 그렇게 디자인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해 버렸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그런 자들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강렬한 암시를 아모스 9장 12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이다.
다시 16절을 보면,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고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다시 세상 길로 가는 것이 망령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17절이 더 중요하다. 에서는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했으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도 이것을 따라가지 않고 다시 뒤로 물러가면(히 10:39),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왜 이 이야기를 듣게 하셨겠는가? 이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천국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는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다(계 2:7).
필자처럼 우상숭배에 찌든 사람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들어 쓰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샘플로 보여 주고 계신다. 필자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명대사의 형상을 한 큰 귀신을 우두머리로 하여 2천만이 넘는 귀신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회개시켜 그 영들을 내보내시고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어떠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절대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이 말씀을 듣는다면 그를 들어 쓰시겠다고 하신다.
7. 에서는 어떻게 장자의 기업을 잃고 세일 산으로 갔는가?
그렇다면 에돔은 왜 에돔인가? 원래 장자가 되어야 했던 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살려 두신 남은 자만 조금 남게 되었는가? 에돔이 처음 나오는 창세기 25장으로 가 보자. 리브가가 임신을 했는데 태 속에서 두 아들이 서로 싸웠다(창 25:22). 쌍둥이였다. 태 속에서 싸우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크니까 태 속에서 막 싸운 것이다. 왜 싸웠을까? "내가 먼저 나갈래." "아니야, 내가 먼저 나갈 거야." 먼저 나가는 자가 형이고, 형만 장자의 기업을 받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속에 이미 영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임신된 지 1개월에서 3개월 사이에 영이 들어오니, 그 아이들에게는 이미 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영은 벌써 다 알았다. 내가 먼저 나가야 한다고.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가운데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 기업을 받았듯이 장자만이 축복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쌍둥이이니 너나 나나 차이가 없었다. 동시에 임신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내가 형이 되겠다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미리 알려 주셨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나중에 야곱 족속이 에돔 족속보다 강해져서 에돔 족속을 멸망시킨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에서가 야곱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산 기한이 차서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삭이 육십 세였을 때였다(창 25:26).
창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에서라는 말의 뜻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붉고 털이 많아서 에서라고 했다는 것을 통해서, 학자들은 털이 많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다. 에서가 야곱에게 그 붉은 것을 먹게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 된 것이다(창 25:30). 에돔이라는 말은 붉다는 뜻이다.
여기서 또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는데,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아담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는가? 히브리 라비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붉다는 뜻이다. 사람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는데(창 2:7) 그 흙이 붉은 흙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자, 곧 본향을 찾는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을 가진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도 붉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에돔은 아예 붉다는 의미이다. 에돔과 아담은 같은 근원의 말이다. 그래서 에돔과 아담이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사이에서 오간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렸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창 25:34).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중요한 것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우리도 이 시대 가운데 무슨 말씀을 들으며 어디에 내 시간을 들여야 할지에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말씀을 안 듣고 매일 부지런히 사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면 결국 떨어져 나가게 된다. 에서가 장자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팥죽 한 그릇 먹으려고 자기가 실수한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이것 때문에 동생을 죽이려고 했다. 야곱이 장자권을 가져갔는데, 나중에 성경의 연대로 계산하면 약 77세에 축복권까지 받아 가니 에서가 죽여 버리겠다고 한 것이다(창 27:41).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겠느냐며 야곱에게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외삼촌 집에 피해 있으라고 하였다(창 27:44-45). 그러나 야곱은 20년 동안 그곳에 있다가 약 97세에 아내들과 자식들을 낳아 많은 식구를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다(창 31:41). 그런데 돌아올 때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왔다(창 32:6). 야곱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때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죽기 살기로 기도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그 기도는 이런 마음이었다. "하나님, 저는 장자권 하나 때문에 이 고생을 겪는데, 제 자식들은 모두 장자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고, 제 자식이 하나도 죽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다. "그래, 나는 모든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 기업의 상속자가 되기를 원한다. 너 혼자만 딱 지정하지 않겠다. 너는 내 마음을 알았구나. 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형이 먼저 나가 버리니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얼마나 먼저 나가고 싶었으면 발꿈치를 잡고 나왔겠는가? 그런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 곧 이긴 자로 바뀌었다(창 32:2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 무리의 군대를 보이셨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 곧 두 진영이라 하였다(창 32:1-2). 또 야곱이 에서에게 앞서 보낸 사자들(창 32:3)은 히브리어로 말아킴인데, 이 말은 천사로도 번역되는 말이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그 두 무리의 군대 가운데 한 무리는 야곱을 돕게 하시고, 한 무리는 에서에게 보내셔서 에서를 따라오는 모든 악한 영을 제압하게 하셨다고 본다. 에서는 자기 무리보다 엄청나게 큰 군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겁에 질렸을 것이고, 누구냐고 묻는 에서에게 그 천사들은 야곱이 보낸 자라고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 긍휼의 마음을 심어 주셔서, 에서는 야곱을 용서하였다.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 맞추고 서로 울었다(창 33:4). 화해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아버지 이삭이 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이 함께 장사하였다(창 35:29). 형제 관계의 우애가 좋았던 것이다.
그 뒤에 에서는 가나안 땅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갔다.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창 36:6-7).
창 36: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장자로 인정하시면서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기업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 2: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그렇다면 세일 산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원래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사해 위쪽으로 올라가면 모압 평지가 있고, 모압 평지에서 요단강을 건너면 첫 성이 여리고이다. 요단강 서편의 땅을 저 북쪽에서부터, 사해 바닷가 맨 아래쪽의 브엘세바까지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다. 이 약속의 땅이 천국을 상징하는데, 이것을 야곱이 받았다. 그러면 에서는 어디로 갔는가? 사해 아래쪽에 세렛 시내가 있다. 그 세렛 시내 아래쪽 동편의 땅을 에돔이라고 한다. 세렛 시내 아래로 쭉 내려가면 홍해가 보이고, 그 맨 아래에 에시온게벨과 엘랏이 있다. 이 홍해에서 사해까지 이어지는 골짜기를 아라바 계곡이라고 한다. 이 아라바 계곡 오른쪽, 곧 동편의 산지가 세일 산지이고 이것이 세일 산이다. 그리고 세렛 시내 위쪽에서부터 사해 중간쪽의 아르논 강까지를 모압 땅이라고 한다. 아르논 강에서 얍복 강 사이는 한때 여러 족속이 오가기도 했지만 그 오른쪽은 암몬 족속의 땅이다. 이 나라들은 강을 경계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세렛 시내 아래쪽은 에돔, 세렛 시내 위쪽에서 아르논 강까지는 모압, 아르논 강에서 얍복 강 쪽은 암몬으로 지형을 외워 두면 쉽다.
그런데 세일 산은 다른 땅보다 특별히 붉은 산이다. 우리나라 땅도 어떤 곳에 가면 황토처럼 붉은 흙의 땅이 있듯이, 세일 산도 그런 곳이다. 붉은 사람 에돔이 붉은 산에 살게 된 것이다. 또 세일 산은 완전히 바위의 나라이다. 그 바위 틈에 집을 짓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열악했다. 그래도 에돔 족속은 놀랍게 거기서 살아남아 그 산지에 적응하였다. 그래서 어느 나라도 이 나라를 침범하기가 어려웠다. 후대에 페트라로 알려진 그 바위 지역을 다른 나라들이 잘 정복하지 못한 것이다.
8. 형제였던 에돔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화해했던 형제는 어떻게 원수가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는 아말렉이라고 한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 때 길에서 만나 피곤할 때에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신 25: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반드시 쳐서 없애 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아말렉이 누구인가? 에서의 손자이다.
창 36:12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에서의 장자가 엘리바스인데, 엘리바스가 첩 딤나를 통해서 낳은 자식이 아말렉이다. 이스라엘은 죽을 때까지 아말렉과 원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없애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에서의 후손과 이스라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뒤로 시간이 지나면서 두 민족은 진짜 원수가 되었다. 사울 왕 때에 이스라엘은 에돔 족속과 자꾸 전쟁을 하였다(삼상 14:47). 다윗 왕은 주변의 모든 나라와 싸워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세워진 왕이었는데, 에돔 족속과도 싸웠다. 그래서 최초로 에돔 족속을 정복한 사람이 다윗 왕이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 죽이고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었다(삼하 8:13-14). 그런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는 에돔 사람 하닷이 일어나 솔로몬의 대적이 되었다(왕상 11:14). 정복이 되었는데도 다시 일어나서 원수가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여호람 때에는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웠다(왕하 8:20-22). 다윗 때에 정복당했다가 다시 독립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샤 왕은 에돔을 공격하여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에돔의 수도 격인 보스라와 셀라 가운데 셀라를 취하여 그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다(왕하 14:7).
그런데 이스라엘과 에돔 족속이 영영 가까이하지 못할 민족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민수기 20장에 있다. 출애굽 2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가려면 아라바 계곡 동편의 에돔 땅을 지나가야 했다. 그래서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민 20:14). 하나님께서도 에서의 자손이 너희 동족이니 그들과 다투지 말고 돈으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물을 사서 마시라고 하셨다(신 2:4-6). 에돔 사람은 형제이니 미워하지 말라고도 하셨다(신 23:7). 그래서 이스라엘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겠다고 하였고(민 20:17),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내겠다고까지 하였다(민 20:19). 그런데도 에돔 왕이 막아섰다.
민 20: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우리 땅은 한 평도 안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자기 조상 에서가 야곱 때문에 쫓겨나 광야 옆의 이 척박한 바위 산지에 살게 되었다고 여겨, 너희 때문에 우리가 쫓겨났다는 적대감을 없애지 않고 계속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에돔 땅의 변방 경계를 돌아서 가게 되었다(민 20:21).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우리 조상 때에 두 민족이 한 형제였지만 싸웠으니 우리가 피해 간다고 한 것이다.
그 뒤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그 나라가 두 동강이 나서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였고(B.C.722년), 남 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하였다(B.C.586년). 그런데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때 에돔 족속이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다(시 137:7). 그때 에돔 족속이 한 이야기가 바로 오바댜의 이야기이다.
옵 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에돔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바댜 선지자를 불러서 에돔 족속이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 놓으셨다. 이것이 오바댜의 이야기이다. 에돔 족속은 계속 반대편에 섰다가 결국 없어졌다. 이 모든 것은 에서가 스스로 장자권을 판 데서 시작되었다. 기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된 것이다.
사탄과 마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원래 높은 자리에 있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쫓겨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니 그것이 기분 나빠서 끝까지 대적하다가 결국 없어진다. 에돔 족속의 이야기가 이와 똑같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겨 잃어버리고, 그것을 얻은 형제를 끝까지 미워하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 살펴본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말씀을 들었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결론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에서처럼 슬피 울며 기업을 이어받으려고 해도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할 수 있다(히 12:17).
필자는 이 말씀을 깨닫고 이런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방인으로 태어났지만,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는 이 축복만큼은 다른 민족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이 사명을 필자는 다른 민족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 간절한 소망으로 다가왔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매우 기뻐하신다.
에돔 족속은 에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에서는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했지만 그것을 다시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 그중에 왕 노릇 하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놀라운 뜻을 품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매일 회개하며 시간과 은사와 달란트와 물질을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 먼저 써야 한다. 다음 시간에는 오바댜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바댜와 아모스를 연결해 볼 것이다. 우리 모두가 끝까지 주님께 붙어 있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 온전히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11월 04일(수) ·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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