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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27)]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6) 에돔의 남은 자를 통해 살펴보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의 비밀(아모스9:11~12)

정보배 목사조회 8읽는 시간 약 33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연결하여 하나님의 만세전 구원 계획과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깊은 영적 비밀을 전달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의 차이를 통해 구약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를 설명하며,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찾고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뜻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단순한 죄 용서를 넘어 내면의 악한 영을 쫓아내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군사로 쓰임 받기 위한 필수 과정임을 역설합니다.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진리의 지식 안에서 깨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미래의 상속자로서 올바른 신앙의 노선을 끝까지 완주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구약에서 감추어졌던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2속죄만 구원으로 알면 성도의 삶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3마소라 텍스트와 70인역은 무엇이며 왜 둘 다 존중해야 하는가?4아모스 9장 12절은 두 본문에서 어떻게 다르게 기록되었는가?5하나님은 왜 '기업으로 차지함'을 '주를 찾음'으로 바꾸게 하셨는가?6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는 이방인 구원을 어떻게 증언했는가?7일으켜진 다윗의 장막에 들어가려면 왜 귀신을 쫓아내야 하는가?
설교 본문 (암 9:11-1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지난 시간에 살펴본 아모스 9장 11-12절은 우리가 일평생 마음에 두고 또 두어야 할 말씀이다. 이방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았으며, 왜 지금 살아 있어야 하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신 뒤에 에돔의 남은 자와 모든 민족이 주를 찾아 구원을 받게 하겠다고 하셨다. 에돔의 남은 자는 이방인 구원의 한 예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놀라운 문제가 하나 숨어 있다. 우리가 읽는 개역 성경이 번역한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신약의 사도들이 인용한 헬라어 70인역이 아모스 9장 12절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어도 다르고 동사도 다르며 명사도 다르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스라엘이 에돔의 남은 자와 모든 민족을 기업으로 차지한다고 말하는데, 70인역은 사람들 가운데 남은 자들과 모든 민족이 찾아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필자는 이 차이를 살펴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원래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나, 장차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을 미래까지 다 아시고 그 말씀 안에 이미 암시해 두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마소라 텍스트와 70인역이 아모스 9장 12절을 어떻게 다르게 기록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바뀌게 하셨는지,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 말씀으로 무엇을 증언했는지를 따라가며, 에돔의 남은 자를 통해 드러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의 비밀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약에서 감추어졌던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과 3장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구약 시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신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경륜(經綸, administration)의 비밀(祕密, mystery)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토라, 곧 모세오경부터 시작하여 역사서와 시가서와 예언서까지 구약성경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다. 초기에는 그 비밀이 희미하게 조금씩 나왔다. 그러다가 예언서에 들어와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쪼개지고 그 나라들이 쇠잔해 갈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내 백성이라 하겠다(호 2:23),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욜 2:28),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욜 2:32), 그리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 있을 것이다(암 9:12).

이 말씀들을 통하여 이방인도 누구든지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데까지는 나온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이방인이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그 이방인 가운데서 왕 노릇 할 자도 나올 것이라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암시만 계속되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다 아셨지만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아 계시와 조명하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고 있다. 바울은 그 비밀을 이렇게 밝혔다(엡 3:6).

엡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필자도 처음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날마다 그것만 생각했다. 속죄(贖罪, atonement)가 곧 구원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속죄는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하시기 위한 전 단계이며,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한 부분이다. 그동안 교회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 곧 속죄와 속량의 각도에서만 성경을 공부했다. 그러니 아무리 공부해도 풀리지 않고 답답하고 시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는 원래의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에서 빗나간 것을 원상으로 돌리는 이야기만 전 세계 교회가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우신 계획을 듣고 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계획, 천사들에게는 결코 주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주시려는 계획이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풀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개인은 구원하기로 하시고 어떤 개인은 멸망하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가르침을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따르고 있다. 그들은 죽은 뒤에 후회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한 번 듣고 정신이 번쩍 드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돌아설 것이다.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한 번 진리의 길에 들어섰다가 다시 뒤로 물러가 침륜(沈淪)에 빠지면 다시 돌이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히 10:39). 한 번 진리의 길에 들어왔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중간에 벗어나면 성 밖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지식에 이른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3. 속죄만 구원으로 알면 성도의 삶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전에도 성도들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했다. 속죄를 받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듭났다는 사실은 사실 잘 몰랐다. 그러나 몰랐을 뿐 실제로는 그 일이 있었다. 속죄를 받고 생명 분배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그 은혜를 보답하며 살려고 했으나, 내 속에는 귀신이 드글드글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내 속에 남은 귀신은 무슨 일을 하는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나를 계속 죄로 유혹한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 또 짓게 만든다. 속에서 죄의 유혹으로 역사하여 죄를 짓게 하므로, 예수를 믿어도 믿기 전과 똑같은 죄인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둘째, 저주받는 삶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조상에게서 이미 내려온 영들과 내가 지은 죄로 들어온 영들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만 있다. 속은 아주 드글드글하고 더러운데, 하나님께서 생명을 넣어 주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덮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저주스러운 삶이 계속된다. 계속 병이 들어 고통받고, 계속 가난하게 살고, 자녀들의 문제가 계속되고, 앞길이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십자가요 고난이라고 포장하는가! 그렇게 포장하면 안 된다. 참된 고난은 적극적인 고난이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 회개하다가 악한 영의 공격을 받는 것이 고난이다. 내가 죄를 지어서 들어온 영들과 조상에게서 내려온 영들에 의해 고통받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 베드로전서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한다(벧전 4:15-16).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벧전 2:20).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고난은 안 받아도 될 것을 받는 고난이다. 회개도 그렇다. 그러므로 회개하다가 악한 영의 공격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자 나를 깨끗하게 하는 적극적인 고난이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다(딤후 2:20).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딤후 2:21).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장차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주님과 같은 모습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계속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시대에 태어나 이런 말씀을 듣게 된 것을 떨이의 축복이라고 표현한다. 평소에는 비싸게 팔다가, 해가 저물고 집에 들어갈 때가 되면 떨이라며 막 얹어 주지 않는가! 우리가 바로 그때 태어난 것이다. 천국 창고에 가득한 은사들은 천국에 가서는 하나도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니 언제 써야 하는가? 지금 써야 한다. 지금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회개를 따라오고 있다. 어떤 분은 2천 번, 3천 번 계속 따라오고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쏟아부어 주실 은혜의 때가 올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직 모르지만 이 단계가 오면 놀라운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며 깨우고 계신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귀신 한번 쫓아 보고 병 한번 고쳐 보는 것에만 머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날마다 일으키지 않으신 것을 생각해 보라. 한 번의 기적은 샘플이었다. 그것을 통해 내가 생명의 양식, 하늘의 양식을 공급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려 하신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귀신을 쫓아내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 땅은 지금 세상 임금인 마귀가 지배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때 쓰임받는 사람은 장차 어마어마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4. 마소라 텍스트와 70인역은 무엇이며 왜 둘 다 존중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아모스 9장 12절에서 누가 주를 찾아 구원을 받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 손에 있는 성경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개역 성경의 구약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마소라 텍스트(Masoretic Text, MT)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B.C.3세기 중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스라엘 지파마다 여섯 명씩 72명의 학자가 모여 모세오경을 번역했고, 그 뒤 B.C.2세기 무렵까지 예언서를 비롯한 구약 전체가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70명 또는 72명이 번역했다고 하여 70인역이라 부르며, 로마 숫자 70을 따서 LXX라고 표기한다.

이처럼 우리는 마소라 텍스트와 70인역이라는 두 가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구약을 인용할 때 대부분 70인역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도 70인역을 따라 인용하셨다(마 15:8-9, 사 29:13).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두 개의 영감된 성경책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특히 아모스 9장 12절은 마소라 텍스트와 70인역이 다르다. 주어도 다르고 동사도 다르고 명사도 다르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5:18).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일점은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를 가리키고, 일획은 글자와 글자를 구별하는 작은 획을 가리킨다. 히브리어에서는 요드가 와우로 바뀌거나 획이 조금만 달라져도 글자가 바뀌고 뜻이 바뀌어 버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작은 글자와 작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맞으려면 신약의 성경 기록자들은 마소라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다 썼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70인역을 썼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다. 그렇다면 70인역은 일점 일획이 틀렸으니 가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70인역이 번역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70인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강력하게 임한 번역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글 성경은 어떠한가? 마소라 텍스트는 100% 하나님의 영감(靈感, inspiration)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70인역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번역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의 개역 성경은 번역이다. 그래서 지금도 새롭게 번역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말 성경은 구역, 개역,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새번역 등으로 계속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어느 번역도 완전하지 않다. 자신의 사상적·신학적 입장에 따라 번역하여 왜곡시켜 놓은 곳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한글 번역을 영감된 원본처럼 여겨 고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목회자는 바로 그것을 원어에서 찾아 바르게 설명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마소라 텍스트를 정확히 살펴보고, 신약이 인용한 구절이라면 70인역이 그것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신약에서 인용하지 않은 구절은 마소라 텍스트만 보아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 인용한 구약 구절이 마소라 텍스트와 다르게 인용되어 있다면, 사도들과 성경 기록자들이 잘못한 것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신약성경도 주님께서 역사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고로 최소한 신약에서 인용된 구약 구절은 70인역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70인역은 아직 제대로 된 한글 번역을 찾기 어렵다. 성경을 이렇게 제대로 보지 않으니 70인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어 감각을 많이 주신 사람들이 70인역을 번역해 주어야 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70인역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셨는지까지 알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 운행하심을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만 성경을 공부하라는 법은 없다. 누구든지 듣고자 하는 사람은 배울 수 있다. 이 말씀을 잘 듣고 공부하여 나의 포지션과 위치를 제대로 찾아가기를 바란다.

5. 아모스 9장 12절은 두 본문에서 어떻게 다르게 기록되었는가?

앞 장에서 두 성경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살폈으니, 이제 아모스 9장 12절을 직접 비교해 보자. 9장 11절은 두 본문이 대동소이하므로 넘어간다. 문제는 12절이다. 개역개정은 마소라 텍스트를 이렇게 번역했다(암 9:12).

암 9: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소라 텍스트를 필자가 직역하면 이렇다. "이는 그들이 에돔의 남은 것과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기업으로 차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그들 위에 나의 이름이 불려 있다. 이것들을 행하고 있는 여호와의 선언이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인가?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전했으므로 직접적으로는 북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킨다고 했으니 남유다도 함께 포함된다. 고로 "그들"은 언약 백성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다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에돔의 남은 자들과 모든 민족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다. 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70인역을 필자가 직역하면 이렇다.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는 이들과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찾아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는가? 세 가지가 바뀌었다.

첫째, 주어가 바뀌었다. 마소라 텍스트에서는 "그들", 곧 이스라엘이 주어다. 그런데 70인역에서는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는 이들과 모든 민족들이 주어가 되었다. 차지하는 쪽이 아니라 찾는 쪽이 된 것이다.

둘째, 동사가 바뀌었다. 마소라 텍스트의 동사는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야라쉬'다. 그런데 70인역은 이것을 찾는다는 '다라쉬'로 읽었다. 야라쉬(יִירְשׁוּ, 이르슈)와 다라쉬(יִדְרְשׁוּ, 이드르슈)는 요드(י)와 달렛(ד) 한 글자 차이다. 요드의 획을 조금 더 내리면 달렛이 되고, 조금 덜 내리면 요드가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일점 일획의 차이다.

셋째, 명사가 바뀌었다. 마소라 텍스트의 '에돔'이 70인역에서는 '아담', 곧 사람이 되었다. 에돔(אֱדוֹם)과 아담(אָדָם)은 자음이 같고 모음만 다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원래 모음 부호가 없었고, A.D.6-10세기에 마소라 학자들이 나중에 붙였다. 그러니 같은 글자를 에돔으로 읽어도 되고 아담으로 읽어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소라 텍스트의 말씀은 사라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일으켜진 다윗의 장막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살폈다(요 1:14). 그래서 장막절, 곧 초막절의 끝날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고 외치셨다(요 7:37-38). 이것이 생명 분배의 구원이다. 속죄는 그 전 단계다. 그런데 마소라 텍스트에서 "모든 민족들"은 히브리어로 '고임'이며 헬라어로는 '에트네', 곧 민족들과 열방들이다. 필자는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가서 성 밖에 있는 이 민족들을 다스리며 왕 노릇 한다고 가르친다(계 22:5). 고로 마소라 텍스트가 말한 기업으로 차지함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회개하고 충성하는 자에게 열려 있는 약속이다.

6. 하나님은 왜 '기업으로 차지함'을 '주를 찾음'으로 바꾸게 하셨는가?

앞 장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보았다면, 이 장에서는 왜 바뀌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시대까지, 할례를 받은 언약 백성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게 너희가 회개하고 나의 뜻을 따라오면 너희 가운데서 기업을 상속할 자와 왕 노릇 할 자가 엄청나게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모스 9장 12절이 바로 그 약속이다. 기업으로 차지할 땅도 있고 왕 노릇 할 사람도 있으니 그런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계속 허물어졌다. 왜 그랬을까?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세상의 기쁨과 명예와 권력만 추구했다. 특히 북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고 송아지 우상을 섬겼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우상을 섞었다. 지금도 섞은 복음이 가득하지 않은가! 그러지 말라고 하셨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타락하여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나마 끝까지 언약을 붙들고 율법을 지킨 것은 남유다 백성이었다.

아모스가 예언한 때는 B.C.760년경이다. 아모스는 웃시야 때 지진이 있기 2년 전에 말씀을 받았는데(암 1:1), 필자가 역사 기록으로 찾아보니 그 지진은 B.C.758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500년도 더 지난 뒤에 마소라 텍스트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다르게 번역하게 하셨다.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야고보 장로가 이 구절을 70인역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행 15:16-18). 고로 이 번역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하나님의 백성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히브리어 성경이 이미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는 원래의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될 일도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처음부터 요드와 달렛 한 획 차이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야라쉬'를 쓰게 하시고, 모음만 바꾸면 '아담'으로 읽힐 수 있는 '에돔'을 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암시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역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70인역이 번역될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기대를 거두어 가고 계실 때였다. 그래서 70인역은 "찾아내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기록했다. 왜 하필 '찾는다'인가?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외친 말씀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암 5:4).

암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 "찾으라"가 바로 '다라쉬'다. 원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아 회개하고 충성했으면 '야라쉬'가 되었을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고 왕 노릇 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지자가 와서 그토록 책망하며 회개하라고 외쳐도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찾는 자를 바꾸어 버리셨다.

지금도 똑같다. 회개하라고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바꾸어 버리신다.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 자손의 축복이 만고불변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촛대는 옮겨진다(계 2:5).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은혜를 활용하지 않으면 그 은혜는 다른 곳으로 간다. 이 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른다. 산더미처럼 굴러 들어올 수 있는 복의 기회를 발로 차 버리지 말아야 한다.

7.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는 이방인 구원을 어떻게 증언했는가?

그렇다면 바뀐 70인역의 말씀은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예루살렘 회의가 열린 것은 이방인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데 주께 돌아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행 15:1, 5). 유대인 신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것을 지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희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이것을 다 해야 한다."

이 문제의 시작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행 10:1). 고넬료의 집안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베드로가 쉽게 바뀌지 않으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 보자기 환상을 보여 주시며 더러운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행 10:16). 이제는 이방인도 거룩해졌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무슨 뜻이 있는가 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왔고,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할례도 받지 않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은 그들에게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임했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행 10:44-46). 베드로와 함께 간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다. 우리는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이방인과 섞이지 않고 음식도 가려 먹고 절기도 지키고 십일조도 하면서 겨우 살아남아 이 은혜를 받았는데, 저들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할례받은 족속으로 세우시기 전에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은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고(창 16:16) 99세에 할례를 받았다(창 17:24). 필자는 아브라함이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은 일 뒤에, 다시는 육체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회개의 표로 포피를 베는 할례가 주어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믿음이 먼저였고 할례는 나중이었다(롬 4:11).

롬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믿음의 후손 가운데는 할례받은 자도 있고 할례받지 않은 자도 있다. 고로 믿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누구든지 받을 수 있다. 신약의 가장 중요한 두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이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증언했다. 그것이 바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요엘의 예언이다(욜 2:32, 행 2:21). 사도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우리만이 아니었구나! 베드로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행 15:9-11).

행 15:9-11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의 피가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율법의 멍에, 곧 의식법의 멍에를 예수 믿고 따르려는 자들의 목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도 지금 이것을 깨닫고 있는가? 깨달아야 한다.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홍수가 나면 다 떠내려간다(마 7:26).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제사의 영을 빨리 버려야 한다. 제사의 영은 고집이 얼마나 센지, 옛날에 믿던 것을 계속 믿겠다고 한다. 특히 종손 집안의 남자들이 그렇다.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그것만 우려먹을 것인가?

그러자 야고보 장로가 일어났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가운데 처음으로 이름이 나오는 동생이다(마 13:55).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받았고(행 1:14), 사도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할 때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로서 그 교회를 대표했다(갈 1:19, 2:9). 그가 쓴 것이 야고보서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26). 그런데도 이 말을 하면 행위 구원론자라고 매도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다. 그렇다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부정하겠다는 것인가(마 7:21)? 완전한 유대인이었던 야고보는 이 회의에서 아모스 9장 11-12절을 마소라 텍스트가 아닌 70인역으로 인용했다(행 15:16-17).

행 15:16-17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데 여기서 핵심이 나온다. 70인역에는 "찾아내도록"의 목적어가 없다. 무엇을 찾는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70인역(표준본)에 없는 말인 '주를'을 넣었다.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는 이들과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찾아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다. 야고보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태어난 동생이다. 바로 위의 형을 형, 형 하고 부르던 그가 이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형인 줄 알고 함께 살았는데, 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오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도마도 예수님을 랍비로만 생각했다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요 20:28). 그러나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전 12:3).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엘 2장 32절도 마찬가지다. 마소라 텍스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기록했다. 70인역은 여호와를 '퀴리오스', 곧 주로 옮겼고, 신약은 그 '주'를 예수님께 적용했다(행 2:21).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오심이셨다. 고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세우신 이유는 예수님을 이 땅에 장막으로 보내셔서,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는 모든 자와 모든 이방 민족이 그 장막 안으로 들어와 주를 찾고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 남은 자에는 유대인의 남은 자도, 이방인의 남은 자도 다 포함된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가면, 마소라 텍스트가 말한 아모스 9장 12절의 약속처럼 기업을 차지하는 자도 거기서 나올 수 있다. 이 복을 원래는 유대인들과 북이스라엘이 찾아야 했는데, 그들이 찾지 못하여 우리에게까지 왔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그것을 놓쳐 버린다면, 천국에 간다 해도 한없이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8:12).

8. 일으켜진 다윗의 장막에 들어가려면 왜 귀신을 쫓아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일으켜진 다윗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요 2:19, 21).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장막은 교회로 확장되었다(고전 3:16). 교회를 향한 만세 전의 계획은 하나님의 양자(養子, adoption)가 되고(엡 1:5), 상속자(相續者, heir)가 되며, 아브라함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엡 3:6). 할례를 받지 않아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관계없다. 그것은 의식법이다. 진짜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다(롬 2:28-29). 그러므로 다시 세워진 장막인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야라쉬'를 하게 해 주신다. 기업을 상속으로 물려받게 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성취하시려고 이 땅에 장막을 치셨다. 그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장막이며 하나님의 품이다. 우리는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장막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인가? 귀신이다. 구약에는 귀신 이야기가 별로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 땅에는 귀신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금식하시고 마귀와 맞붙어 세 번의 시험을 이기셨다(마 4:1-11).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귀신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저주도 없애시고, 병도 고치시고, 장애인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장막을 치시고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을 때, 그 장막이 천국이었고 그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었다(마 12:28).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천국 복음을 전한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초대교회도 그런 일을 했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지금 우리가 귀신을 이야기하고 귀신을 쫓아내는가? 천국에 들어갈 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마지막 때다.

그렇다면 왜 하필 대한민국인가? 대한민국처럼 무당 문화가 센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작두를 타는 사람들이 있고, 신내림을 받아 귀신에게 의존하고 따라가는 민족이 없다. 전 세계에서 귀신과 가장 많이 접촉하여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홀리고 괴롭히고 속여 온 민족이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시작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 이야기를 하면 다른 어떤 민족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다 알아듣는다. 금요기도회 말씀을 한 100편쯤 들어 보라. 아, 그랬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무속 문화를 가장 많이 받아들인 우리 민족을 찾아내셔서, 우리를 통해 귀신을 쫓아내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하늘나라에서 왕 노릇 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번 레위기를 강의하면서 레위기 1-7장은 제사를 통한 속죄이고, 11장부터 마지막 27장까지는 정결과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정결과 성화 가운데 단체적인 성화가 23장의 절기였다. 그런데 그 절기 가운데 재림의 절기인 하반기 절기의 첫 번째, 나팔절(레 23:24)이 무엇인가? 아마겟돈 전쟁을 할 자들을 뽑는 소집이다. 필자는 이번에 공부하면서 이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 안의 귀신을 다 쫓아내려는 것은 단순히 저주를 끝내기 위함만이 아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군대를 만드시려는 것이다(민 1:3).

민 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하나님의 싸움에 나갈 만한 군대를 만드셔서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게 하시고, 마지막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깨닫고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지금 준비하게 하시는데, 바로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다.

9. 나오며

아모스는 B.C.760년경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일으켜지면 이스라엘이 에돔의 남은 자와 모든 민족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500년도 더 지난 뒤에 70인역을 통하여 그 말씀을 사람들 가운데 남은 자들과 모든 민족이 주를 찾는 말씀으로 바꾸게 하셨다. 에돔이 아담이 되고, 차지함이 찾음이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 장로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주를'을 넣어 이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이방인들이 할례 없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었음을 선포했다.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말씀 안에, 하나님께서는 원래의 계획과 장차 될 일을 함께 담아 두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비밀은 우리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아 '야라쉬'를 놓쳤듯이, 우리도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촛대는 옮겨진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에 한 번 들어섰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속죄에 머물지 말고, 회개를 통해 내 속의 귀신을 쫓아내어 죄의 유혹과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회개하다가 악한 영의 공격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끝까지 가는 자는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왕 노릇 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벗어나는 자는 성 밖에 남겨져 이를 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귀신을 쫓아내고 전투방 기도를 하게 하시며 귀신을 공부하게 하셨다. 하늘에서 상속자가 되고 왕 노릇 할 자를 세우시려고 대한민국을 들어 쓰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쳐 촛대가 옮겨지는 일이 없도록 이 일을 끝까지 붙잡고 가서, 마침내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2026년 11월 03일(화)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