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구원(04)]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계3:20)
이 설교는 신앙생활의 연수나 종교적 행위만으로는 구원이 보장되지 않으며, 진정으로 내 안에 예수 생명이 내주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비유를 통해, 겉으로는 신자처럼 보이고 교회 활동을 오래했더라도 자유 의지로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예수님이 문 밖에 계신 상태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의 증거와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우리는 뜨거운 열심으로 회개하고, 기도로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들이며,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예수를 믿으면 즉시 성령이 들어오시며, 방언을 못 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본문 →2예수님은 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밖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셨는가?본문 →3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는 어떤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본문 →4은사가 나타나는 사역자라도 생명이 떠났을 수 있다면, 참 종은 무엇으로 분별하는가?본문 →5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마지막 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가?본문 →6나머지 여섯 교회는 예수 생명이 있는 성도의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는가?본문 →7예수 생명이 없거나 아직 애매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생명책에 기록되는가?본문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언제나 같은 순간에 일어나는가? 필자는 장로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바로 성령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을 동시적인 일로 알아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둘이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시간차를 두고 따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장로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 세례(聖靈洗禮, baptism with the Holy Spirit)를 받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성령의 역사에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있고, 내 밖에서 부어 주시는 성령이 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성령, 쇄도하시는 성령이다. 이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과 은사(恩賜, gift)가 나타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성령 세례라고 가르쳐 온 것이다.
필자는 장로교 출신의 목사이고, 통합 측 교단을 매우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은 따라갈 수 없다. 우리 아버지가 훌륭하지 못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잘못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바르게 가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 우리 교단뿐 아니라 다른 교단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를 찾아 듣고, 그다음에 성경 원문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나누는 말씀은 장로교에 속한 교리만이 아니라 여러 교단의 가르침을 두루 살핀 것임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 문제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어떤 사람은 거듭남(重生, regeneration)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교회를 20년, 30년, 50년 다닐 수 있다. 교회는 좋은 곳이다. 교회에서는 나쁜 말을 가르치지 않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하지도 않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한 성도의 남편이 그러했다. 그는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여 좋은 차에 아내를 태우고 와서 "교회 가세요" 하고는 예배가 마칠 때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예배가 끝나면 다시 아내를 모시고 돌아갔다. 한 번도 예배당 안에 앉은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필자를 보면 "목사님, 제 아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잘했다. 교회가 아내에게 남편을 존중하라고 가르치니 그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교회 주변에 머물다가 나중에 한 번씩 예배당에 들어와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일생에 한 번쯤은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예수 생명이 들어 있는가? 그것을 알려 주는 표지는 무엇인가? 혹시 아직 예수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 생명이 들어오게 할 수 있는가? 이번 시간에 다룰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예수님께서 아직 들어가지 못하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문밖에 계시는데, 그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의 생각과 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강 물이 인천 바다로 흘러가는 곳에서는 이 물이 민물인지 바닷물인지 알 수 없는 데가 있다. 그럴 때는 물을 떠서 먹어 보면 안다. "아직 민물이구나" 하든지 "아이고, 짠물이네" 하든지 알게 된다. 이번 시간에 필자는 그 물맛을 보는 일을 돕고자 한다. 이미 성령께서 들어오신 사람은 성령을 더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아직 애매한 사람은 분명히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 점검하는 방법과, 내 이름이 생명책(生命冊, Book of Life)에 기록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를 믿으면 즉시 성령이 들어오시며, 방언을 못 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
예수를 믿으면 즉시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인가? 이 문제를 바르게 알려면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 온 장로교 신앙뿐 아니라, 우리와 반대편에 있는 오순절 계열의 말씀도 들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순절 쪽은 다 옳은가? 대표적으로 방언(方言, tongues)을 말하면 성령을 받은 것인가? 방언을 말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된 것인가? 반대로 지금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인가? 이 부분은 오순절 교단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한 성경적 사실을 알고 나의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믿음과 성령 받음 사이의 시간 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시간차가 없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면서 쇄도하듯 부어 주셨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을 때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이 먼저 있었고, 성령은 아직 받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자 그제야 성령을 받았다(행 8:14-15).
행 8:16-17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는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과 동시에 성령께서 쇄도하셨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행 10:44-46). 사도행전 19장에서는 다시 시간차가 나타난다. 아볼로는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으나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행 18:25).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에베소에 와서,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 알던 제자들을 만났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다.
행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행 19:5-6). 여기에도 믿음과 성령 받음 사이에 시간차가 있다. 이처럼 성경은 시간차가 없었던 경우를 두 번, 시간차가 있었던 경우를 두 번 공평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 '믿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 '믿으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니 맞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쪽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오순절 쪽에서는 믿음과 성령 세례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다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방언을 못 하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이 말씀은 방언을 말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가 계실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신은 거듭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순절 교단 쪽에서 이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것처럼 말하게 된다. 오순절 교단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 거듭났고, 내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셨고,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혹시 내 안에 생명이 없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고, 생명이 있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간단하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가서 보면 된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것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를 통해 그것을 알 수밖에 없다.
3. 예수님은 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밖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셨는가?
이번 본문은 예수님께서 문밖에서 두드리실 때 우리가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를 사용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이 들어오시도록 허락하면,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저녁 정찬을 드신다는 말씀이다. 그 정찬은 그분이 준비하신 것, 곧 생명의 양식이다. 그분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부요함이 있다. 그래서 그분이 들어오시면 그분이 주시는 것을 우리도 함께 먹게 된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필자는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에서 이렇게 직역해 보았다. "보라, 내가 문 가까이에 선 채로 있어 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단번에 듣고 단번에 출입문을 연다면, 내가 그를 향하여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함께 정찬을 먹을 것이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여기서 '서 있다'(ἕστηκα, 헤스테카)는 완료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서 계신 채로 있어 오셨다는 뜻이다. '두드린다'(κρούω, 크루오)는 현재형으로, 지금도 계속 두드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듣고'와 '열면'은 한 번의 행동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가정법이어서 필자는 '단번에'라고 옮겼다. '먹는다'(δειπνέω, 데이프네오)는 저녁 식사, 곧 정찬을 먹는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부활하신 직후의 예수님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A.D. 95년경에 기록되었으므로, 부활하신 지 60여 년이 지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부르셨는데, 왜 그 교회의 문밖에 서 계신 채로 있어 오셨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을 영접(迎接, receiving Christ)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강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시고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셨을까? 혹시 지난번에는 열어 주어 들어가셨는데 이번에는 못 들어가셔서 다시 두드리시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본문은 서 계신 채로 있어 왔다는 완료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밖에 계셨음을 말한다. 들어가셨다 나오셨다 하셨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두드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에 모시고 있는지, 또 나 개인은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두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아직 예수님께서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셨는데도, 자기는 이미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과거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계셨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하였다. 주님께서 여러 번 경고하셨는데도 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버리시자 성령께서 떠나 버리셨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들은 풍월이 많다. 교회 이야기를 다 하고,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 채, 예전에 알던 관념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 그리고 예수 생명이 있다면 떠나지 않고 지금도 계신지를 정확하게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어도 예수 생명이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가는지를 잘 모르면 예수님께서 밖에 계시는데도 안에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 거듭나서 자기 안에 예수 생명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으니 당연히 예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자연히 성령께서 계속 자기 속에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교회에 출석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으니 자기 안에 절대적으로 예수 생명이 있고, 자기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본인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모시고 있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문 가까이에 서 계신 채로 있어 오셨고 지금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매번 이렇게 점검할 필요는 없지만, 한 번쯤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를 다시 점검하고, 없다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그분을 모셔 들임으로써 예수 생명이 있는 참된 신앙생활의 첫 출발을 해야 한다.
4.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는 어떤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다시 말해 예수 생명이 내 안에 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것은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이 세상에서 누가 생명책을 펼쳐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생명책을 보고 있었음을 성경이 말해 준다. 바울은 자기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증언하였다.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생명책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둘째, 수호천사(守護天使, guardian angel) 두 명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수호천사가 두 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바로 안다. 수호천사는 사람 바로 뒤에 있으며 흰옷을 입고 있다. 아기 때는 아기 천사가 와 있고, 어른이 되면 어른 천사, 곧 청년의 모습을 한 천사가 있다. 천사는 성(性)이 없다. 그러나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듯이 남성이 원칙이기 때문이다(창 2:21-22). 그러므로 여성의 몸으로 나타나는 천사는 다 가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 천사 한 명을 붙여 주신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천사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거듭나면 천사 한 명을 더 붙여 주신다. 그래서 두 명의 천사가 있게 되고,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 두 천사를 볼 수 있다면 내가 거듭났는지,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셋째, 방언을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를 통해 아는 방법이다. 예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표시가 난다. 우리의 영은 원래 생명이 없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성막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계셨다(출 25:8, 22). 성막이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듯이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으니,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에 계신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주께서 그의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딤후 4:22).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 영 속에 들어오시면 영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 탄생하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말을 하듯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바로 방언이다. 첫 번째 성령 강림 사건이 이를 보여 준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다른'은 헬라어 헤테로스(ἕτερος)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신 다른 종류의 언어를 뜻한다. 그날 모인 무리는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행 2:6).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것은 내가 거듭났을 가능성을 매우 크게 알려 준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으니(고전 12:30) 방언을 못 할 수도 있다. 방언을 못 한다고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방언을 말하면 일단 거듭났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말하지 말고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잘 모르겠으면 목사에게 와서 안수를 받든지 복음을 다시 영접하여 방언을 말해야 한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좋은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외적인 경우이지 보편적인 경우가 아니다.
필자에게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필자는 열심히 믿었다. 필자는 열여덟 살에 예수님을 믿었다. 처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은 잘 모르지만, 필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안다. 그 차이는 하나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롬 8:15).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처음에는 어색하여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믿은 지 1년쯤 지나 세례를 받으니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때 필자는 '아, 내가 믿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방언은 말하지 못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야 비로소 방언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었다. 7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는 믿지 않았느냐 하면 분명히 믿었다. 그런데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에서 방언도 하지 말고 귀신도 쫓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종들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좋은 종이 아니다.
넷째, 손에서 예수의 피가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필자는 예수님을 믿은 자들의 손에서 예수의 피가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영의 손에서 피가 나오는 것이다. 오래 믿고 신앙을 지켜 온 사람은 예수의 피가 빨대처럼 나오다가 점점 커져서 온 손에서 피가 나온다. 손가락 끝에서 물줄기처럼 나온다.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치유 사역자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믿은 사람은 어떠한가? 거듭나는 순간 예수의 피가 손에 딱 들어간다. 그러나 아직 터지지는 않아서 손 안에 맺혀 있다. 보이기는 보인다. 그러다가 조금 있으면 터져서 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이 사람은 확실하게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생명이 떠나 버린 사람에게는 예수의 피가 아예 없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결과를 통해 보아야 한다.
5. 은사가 나타나는 사역자라도 생명이 떠났을 수 있다면, 참 종은 무엇으로 분별하는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필자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한 사역자를 통해서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방언을 말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하고 예언도 했다. 그런데 이 사역자가 타락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서 성령을 데려가 버리셨다. 그렇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필자는 그것이 죽을 때 결정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죽을 때가 아니라 그 전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 성령을 받고 은사도 받았는데 타락하여 생명이 떠나 버린 사람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그에게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 분명히 과거에 예수님을 믿었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름이 없다. 수호천사도 없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예수의 피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를 믿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던 사람이라도 타락하여 예수를 욕하며 짓밟는 모독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를 믿다가 타락하여 스스로 재림 예수요 감람나무라고 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그가 죽을 때까지 회개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에게서 예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 그러면 생명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사역자가 지금 사역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참 사역자인지 아닌지는 능력만으로 알 수 없다. 능력은 나타날 수 있다. 방언을 하고, 방언 통역을 해 주고, 예언을 해 주고, 귀신도 쫓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참 사역자인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아는가? 그의 사역 가운데 치유가 일어나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수의 피가 들어가면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의 피가 아니라 은사로 치유하는 경우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치유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래도 예수 생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 은사만으로는 하나님의 종인지 알 수 없는가? 은사는 한 번 주어지면 그 사람에게서 생명이 떠나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방언의 은사나 방언 통역의 은사가 주어지면, 예수 생명이 떠나도 은사는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은사가 나타나니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인지를 알려면 전투방언 기도를 하라고 말해 왔다. 전투방언 기도는 악한 영과 싸우는 방언 기도다. 영적인 무기를 손에 잡았다고 생각하고 악한 영과 싸우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과 한패인 자는 절대로 악한 영과 싸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투방언 기도를 하면서, 그의 사역 가운데 치유 사역이 결과로 많이 따라온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런데 전투방언 기도나 악한 영과 싸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가 해 준다고만 할 뿐 성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투방언 기도와 치유 사역이 나타나는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주의 종들이 회개기도를 150번 하고 오면 그의 손에서 예수의 피가 얼마나 나오는지를 반드시 알려 준다. 주의 종이 타락하여 손에서 예수의 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예수 생명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방언을 말하는 것은 예수 생명이 있다는 것의 시작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예수 생명이 있을 가능성을 이미 매우 많이 확보한 것이다. 여기에 전투방언 기도까지 한다면 생명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생명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6.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마지막 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가?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직 예수님께서 들어가지 않으신 상황, 곧 믿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속에 생명이 확실히 들어가지 않았다. 믿으면 교회다. 예수 생명이 들어가지 않아도 믿으면 교회가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렇게 믿기만 하는 교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방언을 말했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그뿐 아니라 여러 정황을 보면 이 교회에 아직 성령께서, 곧 예수님께서 들어가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이 하나도 없이 책망만 받은 교회다. 또 이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비참하고 가련하며 옷도 입지 않은 가난한 자로 보셨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외적으로, 물질적으로 볼 때 그들은 부자였고 멋지게 지어진 교회였으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내적으로, 영적으로 볼 때는 정반대였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일곱 교회의 순서상 맨 마지막에 두셨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의 순서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순서가 역사 속의 교회상을 차례로 보여 준다고 본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말하니 교회의 처음을 보여 주고,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관을 주신다고 하시며 주님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소개하시니 핍박받는 교회를 보여 준다. 이런 식으로 차례대로 이어진다. 특히 일곱 교회를 지도 위에 그리면 에베소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그려진다.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듯 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곱은 완전수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상 전체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맨 마지막에 놓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서 오시기 직전의 교회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예수 생명이 들어가지도 않았으면서 들어가 있는 것처럼 사는 종말 시대의 교회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장로교의 영향이 강하다. 그런 상황에서 믿기만 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왔으니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아직 예수 생명이 없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믿기는 하고 있었으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 그 증거가 본문에 세 겹으로 나타난다. 먼저 주님께서는 그들을 입에서 토해 버리겠다고 하셨다.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왜 토해 버리시는가? 미지근하기 때문이다.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열정이 나타난다. 그래서 주님의 처방도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다(계 3:19). 필자는 기도를 하든 말씀을 전하든 적당히 하는 것이 없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뜨겁고, 죄를 짓는 데는 차가우라는 말이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정을 내고, 기도하는 데 열정을 내는 것이다. 전투방언 기도를 할 때도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땀이 뻘뻘 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영적 계급이 올라가고 귀신과 싸울 수 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토해 버리실 정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그때 죽는다면 구원을 확실히 보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수도 있다. 믿음을 지키면 되기 때문이다. '믿고 거듭나야 구원받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구원받을 수도 있지만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직 예수 생명이 들어가지 않고 믿음의 차원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믿음도 온전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문밖에 서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결정타를 날리셨다. 이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이 교회의 주된 상황은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둔 상황이지 예수님께서 그 안에 들어가 계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어진 처방이 너희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원해서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었지만, 너희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아직 그 문을 열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지가 중요하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하셨다. '아멘'은 '참으로', '진실로'라는 말이다. '근본'은 헬라어 아르케(ἀρχή)로, 시작(beginning)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실 때, 칭찬하실 때는 그 교회가 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소개하시고, 책망하실 때는 그들이 잘못 나간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소개하신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책망만 있다. 그러므로 이 소개는 그들에게 없는 것을 드러낸다. 너희의 신앙은 아멘이 아니다. 곧 참된 신앙, 진실한 신앙이 아니다. 너희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살고 있지 않다. 자기 안에 생명이 없으니 어떻게 증인으로 살아가겠는가?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도 하지 않았다. 육체는 이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서 오시기 직전, 마지막 종말 시대의 교회상을 보여 준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아직 성령께서 내주(內住, indwelling)하지 않으셔서 거듭나지 않은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는 신앙생활을 했지만 예수 생명이 들어가지 않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하여 성 밖으로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성령을 받았으나 타락하여 주님께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우셔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날 교회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평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7. 나머지 여섯 교회는 예수 생명이 있는 성도의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는가?
지금까지는 예수 생명이 없는 모습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았다면 어떤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야 하는가? 나머지 여섯 교회를 보면 예수 생명이 들어간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에베소 교회에는 처음 사랑이 있었다(계 2:4). 주님을 사랑한다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주님의 사랑이 철철 넘치거나 가슴이 미어져서 운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조금 물음표를 던져 보아야 한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견딘 교회다(계 2:10). 그렇게 끝까지 견디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새 생명이 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다(계 2:13). 그렇게 죽이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나는 신앙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예수 생명이 들어가 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거짓으로 가르쳤다(계 2:20). 그런 가르침 앞에서 "아니다, 제사는 안 된다. 세상의 권력과 인기와 명예도 우상이 될 수 있으니 나는 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겠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 생명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다(계 3:1).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늘 자기 죄를 회개하여 옷을 빨고 있는 사람, 이 사람에게는 예수 생명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교회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나는 가진 것이 많지 않고 능력도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안에는 지금 예수 생명이 있다.
이제 각자 느낌이 올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애매한 사람은 빨리 결정해야 한다. 강으로 가든지 바다로 가든지 노를 저어 가야 한다. 지금 이 물이 짠물인지 민물인지 모를 만큼 애매한 곳에 있다면, 빨리 예수 생명 쪽으로 노를 저어 가야 한다.
8. 예수 생명이 없거나 아직 애매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생명책에 기록되는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 생명책에 대해 애매한 상태에 있거나, 말씀을 듣고 보니 아직은 아닌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세 가지이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처방이 그것이다.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첫째, 회개(悔改, repentance)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해도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결단해야 한다. 내가 잘못 살았다고 인정하고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한다. 이제는 열심을 내는 자로 바뀌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라면 열심을 낼 것이다.
둘째,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문을 여는 것은 자유의지이니, 내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한다. 모태신앙인 가운데에는 예수 생명을 모셔 들이는 영접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필자처럼 열여덟 살에 믿은 사람은 믿기 전과 후의 차이를 분명히 알지만, 모태신앙인은 그 차이를 잘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예수님, 내 마음속에 들어오십시오"라고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 계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혹시 애매한 사람, 또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필자가 준비한 영접기도는 다음과 같다. 이대로 따라 하면 된다. 이 기도로 이번 시간에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시작하고, 이미 시작한 사람은 더 견고해지기를 바란다.
"주여, 이 시간 저는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뜨뜻미지근하게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내 속에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셔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합니다. 2천 년 전 나를 위해 사람이 되기를 자처하신 예수님을 이 시간 내 마음속에 영접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심은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나의 죗값을 처리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죽음은 나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한 죽음이었고, 나를 살려 주기 위한 죽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정작 죄가 없으셨기에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여, 이 시간 그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원히 받아들입니다. 주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원히 모셔 드립니다. 내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시고, 세상 끝날까지 나를 떠나가지 마시고 나와 동행하소서. 주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요 나를 천국까지 인도해 주실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마음속에 간절히 받아들이면 주님께서 바람처럼, 호흡처럼 쑥 들어오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셋째, 이제부터는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힘쓰는 것이다.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깨끗한 옷을 입은 영적으로 깨끗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영의 눈이 열려서 하늘에서 얻을 지위와 영광과 신분을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처방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하셨다. 물질적으로는 높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했다. 눈이 멀어서 영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 벌거벗어서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 가지를 처방하셨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필자는 불로 연단한 금을 불로 연단한 순결한 믿음으로, 흰 옷을 회개하여 깨끗해진 옷으로 본다. 불로 연단한 순결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고, 회개하여 흰 옷을 만들라는 것이며, 눈이 보이지 않으니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은행에 돈을 맡겨 내 육신의 안전을 위해 날마다 수고하지 말고, 순결한 믿음을 얻는 데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한다. 세상의 비싼 옷을 사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깨끗하고 순결한 세마포 옷을 입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안약을 사서 바르면서 육체의 시력이 떨어진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기업과 영광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며 열심을 품고 그 나라를 사모해야 한다.
9. 나오며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같은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시간차를 두고 따로 일어날 수도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둔 교회였고, 주님께서는 그 문밖에 오래 서 계신 채로 지금도 두드리고 계신다.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는 생명책, 수호천사 두 명, 방언, 손에서 나오는 예수의 피로 알 수 있고, 사역자에게는 전투방언 기도와 치유 사역의 열매로 드러난다. 생명이 있는 성도에게는 처음 사랑과 고난 중의 인내, 목숨을 건 신앙, 우상을 거절하는 결단, 회개로 빤 흰 옷, 작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는 순종이 나타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는 결국 교회 가운데서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지를 보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밖에 세워 두지 말자. 열심을 내어 회개하고, 자유의지로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모셔 들이자. 그리고 시간과 물질과 은사를 다 드려 영적인 삶을 추구하자. 예수님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분이 아니다. 예수 생명이 없으면 우리가 죽는 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임을 인정하고, 마음속에 들어오시도록 고백한 그 주님께서 영원토록 떠나가지 마시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자. 그리하여 내 이름이 생명책에 분명히 기록되고, 하늘나라에서 필자와 함께 살게 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11월 08일(일) · 정보배 목사
![이번 주 말씀 [바른 구원(04)]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계3:20)](https://i.ytimg.com/vi/8qx8mFSAacQ/mqdefault.jpg)